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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농사짓자는 생각은 예전부터 했습니다.
처음 농사용어를 마주하고는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 한참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추비니 윤작이니 종자니 하는 말들이 모두 그렇지요.
그냥 우리말로 웃거름, 돌려짓기, 씨앗이라고 하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데 꼭 어려운 말을 쓰더군요.

우리나라의 학문이라는 개념은 일본 제국주의가 들어오면서 확립했을 것입니다.
물론 본디 우리의 학문이야 있었지만 서양식 근대 학문이 그렇지요.
그러면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일본어에 영향을 받은 말을 많이 쓰고, 그것은 고스란히 사람들에게 퍼졌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주요한 자리에 앉아 일본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했지요.
그러던 것이 요즘에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말은 일본식 표현과 미국식 표현으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책을 봐도 그렇고,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뭐가 문제냐고 할 수도 있지만 말은 정말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영어나 일본어를 보고 있다가 드는 생각이 외국어를 잘하려면 생각하는 방법도 그네들과 같이 해야겠구나 느꼈습니다.
일단 어순이 다르고, 단어의 느낌이 다르고, 무엇보다 그 단어에 담긴 생각이 다르니까요.
그만큼 말은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역사, 문화, 사상, 가치를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말로 농사짓는 일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이 땅에서 여기서 나고 자란 것들과 소통하는 일인만큼 우리말로 농사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동물인 소와 관련된 우리말을 찾아보았습니다.
저는 왜 이다지도 소가 좋은 줄 모르겠습니다.
굼벅굼벅한 눈망울하며 듬직한 덩치, 음메~하고 우는 소리가 참 정겹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랫동안 소와 함께 살았기 때문일까요?
조선사람들 유전자에는 소와 친근하게 지내는 요소가 박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있지만 나중에는 꼭 소를 키우고 싶습니다.
떼로 키워서 고기를 만들기 위해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소를 훈련시켜서 같이 논밭도 갈고, 달구지도 달아서 물건도 싣고 나도 타고, 소죽도 쑤어서 먹이고 싶습니다.
소죽 냄새가 얼마나 구수한지 그 냄새만 떠올리면 지금도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그럼 우리말로 소를 어떻게 부르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크게 나누자면 소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제가 키우고 싶은 논밭을 갈거나 짐을 옮기는 소는 '부림소,' '일소'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즘 많이 키우는 코뚜레도 없이 외양간이 아닌 축사에 갇혀서 사는 놈들, 미국놈들이 FTA하면서 그렇게 밀어붙이고 있는 '고기소'입니다.
마지막으로 젖을 짜 먹는 '젖소'입니다.

이런 놈들을 뿔의 모양에 따라서 구분하는 말이 있습니다.
두 뿔이 모두 똑바로 곧게 선 소를 '고추뿔이 소'라고 합니다. 곧추 선 뿔을 가진 소라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모든 소가 그렇게 곧은 뿔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왠만한 소들은 뿔이 말려 있거나 꼬이고 아주 저마다 다릅니다.
그런 것들 가운데 두 뿔이 모두 옆으로 꼬부라진 소를 '송낙뿔이 소'라고 부릅니다.
옆으로 꼬부라진 놈 말고 두 뿔이 안으로 굽은 소는 '우걱뿔이 소'라고 합니다.
그런 우걱뿔이 가운데 뿔 하나는 삐죽 높고 하나는 낮은 소가 있습니다.
그런 소는 '노구거리 소'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그렇게 짧은 뿔을 '묘족뿔'이라고 합니다.
또 뿔이 뒤로 뒤틀리고 끌이 꼬부라진 소는 '자빡뿔이 소'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두 뿔이 모두 짧게 난 소는 '새앙뿔이 소'라고 합니다. 이것은 생강 아시죠? 그 생강처럼 뿔이 짤막하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 답니다.
마지막으로 두 뿔이 모두 밖으로 가로 뻗쳐서 홰모양으로 일자형인 소는 '홰뿔이 소'라고 하지요.

이렇듯 뿔 모양 하나만 가지고도 소를 부르는 다양한 이름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런 말을 노인분들이나 아실까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중에 소를 키우신다면 내 소는 무슨 소인지 알아보십시오.


뿔 모양 말고도 털빛에 따라서 부르는 말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빛깔대로 부르는 것이지요.
털빛이 검은 소는 '검정소'라 하고, 그것보다 더 검은 소는 '껌정소'라고 합니다.
털빛이 누런 소는 보통 '황소'나 '누렁'소라고 하지요. 북한에서는 황소를 '둥글소'라고 한답니다.
우리는 소 하면 누런 소만 생각하는데, 그것 말고도 어룽어룽한 무늬나 점이 있는 소도 있습니다. 그런 소는 '어릉소'라고 합니다.
또 털빛이 얼럭진 소는 '얼럭소'라 하고, 얼룩이 있는 소는 '얼룩배기 소'라고 합니다.
얼룩배기 황소는 정지용 시인의 '향수'에 나오니 많이 들어보셨겠지요.
그런가 하면 얼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털빛이 전체적으로 얼룩얼룩한 소는 '얼룩소'라고 합니다.
털이 푸르스름하게 얼룩진 소는 '청치'라 하고, 온 몸에 칡덩굴 같은 어룽어룽한 무늬가 있는 소는 '칡소'라 하지요.
요즘 토종 한우를 복원한다고 하던데 그 소가 바로 칡소랍니다.


앞에서 소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눴는데, 그 기준은 어디에 쓰느냐에 따른 것입니다.
그걸 더 자세히 나누면 더 다양한 말이 있지요.
옛날 소로 논밭을 갈던 시절에 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겨리라고 부르지요. 그 겨리를 끌며 논밭을 가는 소를 '겨릿소'라고 합니다.
겨리는 주로 강원도처럼 땅이 척박한 곳에서 자주 썼다고 합니다.
저도 직접 본 일은 없어 언제 한 번 꼭 보고 싶은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냥 혼자서 쟁기를 끄는 소는 '호릿소'라고 합니다.
남의 소를 빌어다 길러서 나중에 다 자라거나 송아지를 낸 뒤에 임자와 나누어 가지기로 하는 소는 '배냇소'라고 합니다.
배냇소 말고 송아지를 주고 그것을 기른 뒤에 소 값을 빼고 도조睹租를 내는 '수냇소'도 있지요.
도조는 남의 논밭을 빌려서 부치고 그 대가로 해마다 내는 벼를 말합니다.
요즘은 흔히 도지라고 하지요.
농사지을 때 부릴 수 있는 튼튼한 소는 '실소'라 하고, 씨를 받을 소는 '씨소'라고 합니다.
이런 농사일 말고 짐 싣는 수레나 달구지를 끄는 소는 '차부소'라 합니다.
옛날 제주도에서 제사지낼 때 쓰던 검은소는 '흑우'라고 하는데, 앞으로 제주도에서는 2020년까지 모든 소를 이 씨로 바꾼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지요.


이제 '어미소' 옆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 귀여운 송아지를 만나보겠습니다.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송아지는 참 미치도록 귀엽지요.
뿔이 날 만한 나이의 송아지, 사람으로 치면 미운 일곱살 정도일까요.
그런 소는 '동부레기'라고 합니다.
아직 코를 꿰지 않고 목에 고삐를 맨 송아지는 '목매기'라고 부르지요.
길 들이지 않은 송아지는 '부룩송아지'라고 합니다.
부룩이라는 말은 농사에서도 쓰는데, 어떤 작물을 심고나서 그 두둑 사이사이나 빈틈에 다른 작물을 듬성듬성 심는 일을 말합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고 암소의 뱃속에 들어있는 놈은 '송치'라 합니다.
전라도에서는 이 말이 그대로 송아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어린 송아지는 '애송아지'라고도 부르고, '어석소'라고도 부릅니다.
거의 중송아지만큼 자란 송아지는 '어스럭송아지'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안산에 사시는 분에게 처음 들었는데, 말의 느낌이 다 큰 소는 아니고 그렇다고 송아지도 아닌 놈에게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송아지'는 중간쯤 자란 송아지를 말합니다.
털빛이 얼룩얼룩한 송아지는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를 닮았네"라는 노랫말에 나오지요.
어릴 때는 얼룩소라고 하니 젖소를 생각했습니다.
어디 얼룩소를 봤어야 알지요.
요즘도 얼룩소 보기는 참 어렵지요.
아직 큰 소가 되지 못한 숫송아지는 '엇부루기'라 하고, 아직 덜 자란 송아지는 '엇송아지'라고 합니다.
엇이라는 말은 '어지간한 정도로 대충'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요.
그러니까 어지간히 컸지만 아직 제몫은 못하는 송아지에 엇이라는 말을 붙인 겁니다.
거의 큰 소가 될 정도로 자란 송아지는 '큰송아지'라고 합니다.


이제 송아지도 다 컸으니, 이번에는 수소의 이름을 알아보겠습니다.
'길치'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것은 길을 못찾는 길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서 나는 황소를 말합니다.
이 소들은 보통 살찌고 윤택이 있지만 억세지 못하다고 합니다.
주로 고기소로나 써야겠네요.
수소 가운데 몸집이 작은 놈은 '부룩소'라고 합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지요.
제주도에서는 이런 부룩소 가운데 나이를 꽤 먹은 놈을 '쒜부사리' '부룽이' '부렝이'라고 한답니다.
제주도는 참 독특한 말이 많습니다.
지난 설인가 바보상자에서 제주도 말에 대한 방송을 보았는데, 뭍과 떨어져 있기에 우리나라의 중세 국어가 보존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부사리'라는 말은 그냥 머리로 잘 들이받는 버릇이 있는 소를 가리키는 말로도 씁니다.
아무튼 그렇게 성질이 몹시 사나운 황소는 '찌러리'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소 하면 역시 암소를 으뜸으로 치지요.
순해서 일부리기도 좋고, 저는 잘 모르겠는데 고기맛도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소는 이래저래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도 아들놈보다는 딸이 더 낫던데 소도 그런가 봅니다.
그나마 수소가 인정을 받으려면 거세를 해야지요.
그렇게 잡아먹을 감으로 불알을 까서 기른 수소를 '불친소'나 '악대소'라고 합니다.


사람도 한 살 두 살하고 나이를 세듯이 소도 나이를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한 살인 소는 '하릅소'라고 합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지요.
하룻강아지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강아지를 말하고, 또 하릅강아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살 된 강아지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동물이 한 살이 되면 하릅이라는 말을 붙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릅망아지, 하릅비둘기에 또 무엇이 있을까요?
평안북도에서는 한해살이풀도 하릅나무라고 한답니다.
두 살된 소는 '두습소'나 '이듭소'라고 합니다.
또 세 살은 '사릅소'라 하지요.
세 살이 된 말, 소, 개 따위는 모두 사릅잡이라고 합니다.
네 살은 '나릅소', 다섯 살은 '다습소', 여섯 살은 '여습소',
일곱 살은 '이롭소', 여덟 살은 '여듭소' 아홉 살은 '아습소'나 '구릅소',
열 살은 '열릅소'나 '담불소'라고 부릅니다.
소는 보통 20년 정도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 열한 살, 열두 살은 뭐라고 할까요?
그냥 늙었다거나 나이 많다고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앞에서 이야기한 것 말고 다른 소 이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귀가 보통 소들보다 작은 소가 있습니다.
그런 소는 '귀다래기소'나 '귀다라기소'라고 합니다.
새?를 낳지 못하는 소는 '둘소'나 '둘암소'라고 합니다.
그 말 말고 '둘치'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새?를 낳지 못하는 짐승의 암컷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건 믿거나 말거나인데 수퇘지와 암소가 교미하여 낳는다는 '매기'라는 짐승이 있습니다.
라이거나 타이온 이런 종류일까요?
아무튼 돼지와 소는 서로 교미를 할 수 없겠지요.
뒷발 왼쪽이 흰 소는 꼭 소만이 아니라 그런 짐승은 모두 '외쪽박이'라고 합니다.
몸에 점이 있는 소는 '점박이'지요.
'푿소'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름에 생풀만 먹고 자라서 기운이 약해 일부리기 어려운 소를 말합니다.
좀 있는 집에서는 콩이다 뭐다 영양식을 잔뜩 주겠지만 없는 집에서는 여름에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풀밖에 먹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소가 순해 보이지만 한 번 화나면 아주 무섭지요.
그 뿔에 받히기라도 하면 사람 하나 붕 뜨는 것은 식은죽 먹기입니다.
그렇게 뿔로 물건을 닥치는 대로 들이받는 짓을 뜸베질이라 합니다.
그리고 뿔로 세게 들이받거나 밀치는 것을 '뜬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예전에 보은에 이철희 선생님을 찾아뵙고 처음 들었습니다.
소가 주인을 한 번 뜨면 더 이상 기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게 버릇이 되어서 또 그런 짓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 소는 빨리 팔든지 잡든지 해야 한답니다.


지금까지 소와 관련한 우리말을 알아보았습니다.
소가 우리와 함께 한 세월이 긴 만큼 이것 말고도 엄청 많은 말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것들까지는 제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나머지는 이 글을 보신 분들께서 정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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