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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농업의 역사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신석기인들은 채취의 대상이었던 과실류․근경류, 화본과 식물인 곡류 등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일어난 농업기술의 큰 변화는 그들이 쓰던 도구로도 추적할 수 있다. 원시적 경작기구의 모습은 유물이나 현존하는 미개종족의 용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농경구農耕具는 ‘굴봉掘棒’이었을 것이다. 굴봉이 발달하여 더 능률적인 괭이나 가래가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쟁기로 발달했다.

괭이농경에서 쟁기농경으로 진전하는 과정에 삽(賴)을 쓰던 단계가 있었다고 추정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원시형 쟁기라 할 수 있는 뇌사(內殯 : 쟁깃술과 보습)이다. 쟁기술은 쟁기 몸체 아래로 비스듬히 뻗은 나무로 굴봉에 해당하며, 보습은 돌․나무․금속으로 만든 밭을 가는 부분이다. 중국에서는 주周나라 때 청동으로 만든 보습을 단 뇌사를 썼다고 한다. 당시의 재배작물은 조, 기장, 밀, 보리, 콩, 쌀 들이다. 철제 농기구는 전국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뇌사에 해당하는 따비가 있었다. 지금도 서남부 섬 지방에서 어쩌다가 볼 수 있다. 그것은 말굽형, 코끼리형(쌍따비), 주걱형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술과 발판, 쇠보습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따비에 관한 옛 기록은 󰡔�삼국유사󰡕� 유리왕조에도 나오고, 따비 유물도 더러 발굴되었다. 특히 1970년 대전에서 발견된 청동의기靑銅儀器에 나온 그림은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다. 이 청동의기는 청동기시대(기원전 7∼3세기)의 유물로서, 뒷면 그림에 따비로 밭을 가는 사람과 괭이로 흙을 파는 사람이 있다. 이 따비는 얼마 전까지 제주도에 있던 쌍따비와 똑같은 것으로, 발판을 밟고 밭을 가는 모습이 거의 똑같다. 이 그림으로 보아 당시(마한시대)의 농경은 주로 밭농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따비와 괭이가 밭갈이하는 데 쓰는 농기구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잡곡은 밭에서 나는 곡물로서 농경 초기부터 오랫동안 주곡류를 이루어왔다. 그것은 각지에서 출토되는 유물에서 입증된다. 탄화물炭化物, 토기에 나타난 자국, 수수껍질과 보리껍질 등과 같은 유물이 석기․토기․용범鎔范 등과 함께 출토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물들과 기록들로 보아 피, 기장, 조 같은 알이 작은 곡식이 초기의 주곡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작은 알맹이의 곡류를 가꾸고 거두어서, 탈곡하고 제분했으며, 밭을 가는 도구로는 괭이와 따비를 주로 썼을 것이다.

작은 알맹이의 곡류를 뒤쫓아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맥류는 선구곡물先驅穀物 가운데 특히 조와 함께 이른바 속맥문화粟麥文化를 오래 누렸다고 본다. 그것은 중국의 화북지방과 같다. 󰡔�삼국사기󰡕�의 5~6세기까지 농사기록 가운데 대부분이 조나 보리에 관한 기술이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맥류의 발굴유물로는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 선사주거지에서 탄화미와 함께 나온 보리껍질이 있다.

맥류가 들어온 것에 이어서 벼를 재배한 것도 중국대륙을 통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대륙 어느 지역의 어느 길을 통하여 우리의 어느 고장으로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북방설, 남방설, 절충설 등 이론이 많으나 요즈음 잇따라 출토되는 쌀의 유물로 북방설이 유력하다. 1976년에 여주 흔암리에서 기원전 1000년으로 추정된 탄화미가 발굴되었고, 이어서 충청남도 부여군 송국리에서도 비슷한 연대의 탄화미가 출토되었다. 그 뒤 1981년에 평양시 남경南京 유적에서도 비슷한 연대의 탄화미가 다른 잡곡과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 전라남도 나주에서 채취한 벼꽃가루를 분석한 결과도 약 3500년 전의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보면 벼 재배는 적어도 3천 년 전에, 즉 청동기시대에 이미 들어왔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경로는 북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고시대 


고고학적으로 철기시대의 완숙기라 할 수 있는 1∼3세기 무렵 청동제는 물러나고 철기가 두루 보급되었다. 그에 따라 낙동강 하구에서는 철 생산이 활발해져 낙랑과 일본으로 철을 수출했다. 따라서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나 대동강 기슭의 낙랑군, 대방군은 야철冶鐵과 함께 철제농구를 점차 더 많이 썼을 것이다.

이때 한강 하류의 충적평야는 농경지로서, 석기시대부터 주거지를 이루었던 양평 대심리에서는 초기의 야철 유적이 나왔고, 남양주의 덕소와 서울의 암사동․풍납동에서는 김해토기(시루 포함)가 출토될 만큼 문화와 농경기술이 발닳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강유역의 진한이라는 사회에 부여일족이 세운 백제는 비교적 넓은 평야와 비옥한 토양과 수리시설에 알맞은 하천이 많아 농업국가의 면모를 띠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다루왕 때 남쪽 주군州郡에 벼농사를 시작하고, 기루왕 때 큰비가 10일 동안 내려 한강이 넘쳐 논밭이 훼손되는 등 수해를 입은 전답을 보수하도록 했으며, 벽골지碧骨池를 새로 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도 벼 재배가 중요시됨에 따라 관개공사와 치수공사가 국가의 사업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古事記󰡕�에 나오는 한인지韓人池, 백제지百濟池라는 기록은 백제의 수리기술이 일본에까지 전해진 것을 말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4~5세기까지도 맥류가 주작물이었던 것 같다. 그 뒤에는 벼의 재배가 꽤 보급되고, 수리와 치수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에 둑이 얼마나 많았던가는 지명과 인명에서 찾을 수 있고(미동彌凍 : 물독, 토해吐解 : 뚝캐 등), 논을 뜻하는 답畓자의 신조新造가 진흥왕순수비의 하나인 창녕비昌寧碑에 나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일본 쇼소원正倉院에서 소장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민정문서民政文書」에는 ‘촌주위답村主位畓’ ‘내시령답內視令畓’ ‘연수유답烟受有畓’ 등 직전職田과 구분전口分田의 종류가 기재되어 벼 재배가 주작화主作化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536년(법흥왕 23)에 건조해 798년(원성왕 14)에 보수했다는 지금의 영천에 있는 총제菁堤의 비문碑文인 798년의 정원명貞元銘에는 보洑와 둑을 관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국가가 수리사업을 하여 벼 재배를 뒷받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 일대의 고분에서 때때로 출토되는 여러 가지 철제농구와 벼 껍질, 탄화미 등도 이를 증명한다. 이와 함께 기록에 나오는 쟁기와 황우가 흙을 간다는 우경牛耕 이야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신라의 농업은 경작기술뿐만 아니라 농가의 민속까지도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 많다. 이른바 명절이라 하여 설, 정월대보름, 오월단오, 칠월칠석, 팔월한가위, 시월고사 등은 그 원천이 신라에 있는 것들이다.



고려시대 


신라와 후백제를 병합한 고려는 전제田制 개혁과 부세賦稅 조정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농상農桑을 장려하여 농산증진에 주력하였다. 한편 감세癎稅, 농기구 급여, 씨앗 배포, 일소의 대여 등으로 민심을 무마하면서 국고수입을 보충했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여 민생이 점차 궁색해짐에 따라 국고수입 대상을 증대해야 할 요청과 함께 반드시 토지를 확대해야 했다. 즉, 생산력(농민과 가축) 증강의 상대는 토지의 팽창밖에 없었다. 따라서 신라의 강토를 거의 차지한 고려는 끊임없이 북방으로 확장하기를 꾀하고, 안으로는 입체적 확대, 즉 개간을 적극 권장했다. 영토 확장은 다분히 위험한 모험과 병력 소모를 수반하지만 대내적인 경지확대는 풍부한 노동력으로도 쉽게 수행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현종과 광종 때 같이 개간의 특전과 그 조세와 소작료를 규정함으로써 진전陳田을 개척하게 하는 욕구를 북돋워주고, 그 결과 서긍徐兢은 󰡔�고려도경󰡕�에서 산간에까지 치전治田이 진출하여 멀리서 보기에 마치 사다리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적었다.

간전墾田 사업에는 많은 노동력이 드는 동시에 기술, 특히 농기구와 수리水利에서도 혁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성종 때는 각 주군州郡의 병기를 덜어서 농기구를 주조했으며, 󰡔�고려도경󰡕�에도 고려의 농구가 송나라의 그것들과 대동소이하다고 한 것을 보면 농구의 대량생산과 개량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리면에서는 간전사업이 활발해지고 벼 재배가 보급됨에 따라 해마다 겪은 한수재旱水災에 대하여 힘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기록에 있는 바와 같이 장정과 병졸을 동원하여 제방의 개축과 증축에 힘썼다. 이들 저수지의 대부분은 하천의 상류를 가로막아 흙과 돌로 둑을 쌓는 식으로 만들어졌으나 때때로 소택지沼澤地(늪과 못)를 파서 둑을 쌓는 경우도 있었다.

권농정책의 전면적 진전에 따라 문종 때는 각 도에 권농사勸農使를 파견하고, 나중에는 이를 강화해 명종 때는 안찰사, 감창사監倉使가 그것을 겸하였고, 이어서 충렬왕 때는 중앙에 농무도감農務都監을 설치했다. 한편으로는 친경적전親耕籍田을 맡아 종묘제宗廟祭에 쓰는 쌀을 바치는 기관으로 사농시司農寺가 있어 권농의 본령을 발휘했다.

고려 전성기에는 중농정책을 실시하여 국가재정이나 국민경제의 수입과 지출의 근원으로 쌀과 옷감을 화폐 대신으로 할 만큼 강행되어 지방의 고관도 권농관 겸 징세관인이었고, 토지반급제土地班給制․녹봉제 및 창제倉制의 확립과 함께 미곡증산에 박차를 가했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는 큰 창고의 미곡이 묵어서 붉은곰팡이가 생길 정도로 자족자급하는 살림이 넉넉한 백성들의 다스림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도경󰡕�에도 각 창고에 쌓인 쌀이 굉장하여 병란과 홍수와 가뭄에도 항상 대비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당시의 재배곡식은 벼 말고도 종래의 보리, 밀, 조, 기장, 수수, 피, 귀리, 콩, 팥, 녹두 등이 있었고, 밭곡식은 고려 초부터 2년3작식인 윤작법輪作法으로 재배했다. 이규보李奎報는 󰡔�가포육영家圃六詠󰡕�에서 채소류로는 오이․가지․무․순무․파․박 등을 많이 가꾸어 생식 말고도 조리․김치 등 가공식품으로 애용했다고 말했다.

임목林木으로는 성종 때 각 도道․주州․현縣에 영을 내려 경지로서 적당하지 않은 토양에는 뽕나무, 밤나무, 옻나무, 닥나무 등을 심도록 장려했다. 인종 때는 이러한 나무들을 다른 과일나무들과 함께 심도록 권장했는데, 이 임목들을 잠업, 칠기, 제지의 원료로 하여 당시에 견직류․종이류, 기타 공예품 제조가 융성했다.

고려시대의 의류는 그 원료가 주로 삼, 모시 등과 명주실이었으므로 삼, 모시, 뽕나무를 활발히 재배했다. 특히 모시제품은 외국에까지 명성을 떨쳤고, 비단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발달했다. 그 뒤 고려 말기에 문익점文益漸이 중국에서 얻어왔다는 목화씨와 씨아(攪車), 물레 등은 조선시대에 들어 널리 전파되었다.

고려시대의 축산, 특히 말 사육은 몽고가 침입하기 시작한 12세기부터 피동적인 성황을 띠었다. 몽고는 농우, 군마와 그 먹이를 다른 군량과 함께 강제로 징발했으며, 한편으로는 동북 변경 너머 여진족의 위협도 있어 군마의 양육이 촉진되었다. 농우의 징발은 때때로 농민의 분격을 사기도 하였다.

마필의 번식은 북방에서 종마를 얻어 직접 국가에서 관리했으며, 마별초馬別抄라는 무반도 생겼고, 교통과 체신의 일을 맡은 역마제驛馬制도 있었다. 목마사업은 제주도, 함경도, 남해의 섬 지방에서 활발했고, 더 나아가 몽고말의 마종계획馬種計劃도 세웠다. 그때 목마사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얼마 전까지도 전해오던 말 품종 이름의 수효와 제주목사濟州牧使, 제주말총 및 그 제품의 다양함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고려의 목마사업은 너무나 국가의 통제에 치우친 나머지 말기에 와서는 국내 혼란 때문에 관리의 해이, 목장의 황폐, 마필의 이산 등이 일어났다.



조선 초기


조선 초기 농업정책의 핵심으로 전제의 개혁을 내세우며 새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토지제도의 개정과 함께 그에 부수하는 세제를 강화하고 여러 방면의 권농 정책과 수리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태종 때는 양전量田을 다시 실시하고, 벽골지의 중수를 명했으며, 농잠서農蠶書를 번역하고 간행도 했다. 세종 때는 측우기의 발명, 역서曆書 간행, 󰡔�농사직설農事直說󰡕�의 반포, 󰡔�구황벽곡방救荒陽穀方󰡕�의 간행 등이 있어 농업기술 향상에 공헌이 컸다. 문종 때는 수리水利, 방천防川, 저수貯水 등의 계획이 있었고, 단종 때는 마목장馬牧場의 설치와 잠종 배부의 거사가 있었으며, 세조 때에 와서는 양잠 장려, 제언堤堰의 수리, 농서의 간행, 축산 장려 등 여러 가지 실천이 있었다. 뒤이어 성종 때도 교서를 발포하고 친잠親蠶하는 등 양잠을 장려하고 농기구를 제조하는 등 권농 사업이 매우 활발했다.

이와 같이 초기의 농정은 자못 활기를 띠었으나 연산군 때의 실정失政을 계기로 눈에 띄게 농정이 문란해졌다. 그 영향으로 중종 때에 가서도 제언은 황폐한 것이 많아 개수를 엄명하기도 했으며, 각 도에 버려진 아이가 많아 거두어 기르기를 명하기까지 했다. 중종 때는 권농교서가 자주 나왔고, 농잠서의 언해諺解 간행, 향약법鄕約法의 제정이 있었다. 대체로 보아 조선 초기의 활발한 모습은 집권 강화와 재정 확보를 위한 토지제도 및 그에 따르는 세제의 확립과 아울러 농본주의를 뒷받침할 권농책의 조밀한 강구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빈번한 흉농에 대한 대책도 적지 않은 과업이어서 의창제義倉制, 사창제社倉制, 진휼청賑恤廳 같은 흉년에 대비하여 곡식을 쌓아 두는 저곡제도貯穀制度와 진대제賑貸制가 있었으며, 흉년의 대용식을 조리하는 방법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구황벽곡방󰡕� 등의 언해본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종 때의 과학기술 진흥은 직․간접으로 농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칠정산七政算󰡕� 내․외편으로 확립된 역법의 실시와 측우법測雨法의 개발은 농사 지도와 수리 사업에 직결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각종 농서와 문헌으로 볼 때 당시의 벼 재배는 건삶이(乾耕:乾畓直播法), 무삶이(水耕:直播法), 모내기법, 밭벼법으로 이루어졌다. 즉, 무논에 볍씨를 직접 파종하여 벼를 기르는 법과 마른 논에 파종하여 마치 밭벼와 같이 모를 가꾸다가 장마 때 물을 가두어 무논처럼 재배하는 건답법을 많이 행했으며, 모내기법은 별로 보급되지 않았다. 모내기는 벼 재배 면적의 1/10을 묘판, 즉 못자리를 만들어 가려낸 볍씨를 뿌려 모를 키우고, 모를 낼 때는 포기당 3~4낱모를 넘지 않게 하고 뿌리를 내릴 때까지 물을 깊이 대지 않았다. 그리고 높은 곳이나 물이 찬 곳에는 밭벼를 권장했으며, 실농을 막기 위하여 피와 팥과 함께 혼작하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밭작물의 경작 방식으로는 2년3작, 홑짓기, 섞어짓기, 사이짓기 등이 작물, 토질, 기후에 따라 적절히 채택되었다. 밭곡식으로는 기장, 조 등을 섞어서 줄뿌림 또는 흩뿌림 등 견종법腔種法(이랑과 이랑 사이의 골에 씨앗을 뿌리는 방법)을 썼으며, 거름으로는 재거름을 많이 썼다.

보리, 밀 등의 파종은 밑거름에 유의하여 재거름과 숙분熟糞을 썼는데, 앞그루가 조나 콩일 때는 그 짚과 줄기를 깔아 태운 다음에 씨를 뿌리거나 또는 녹두를 재배했다가 갈아엎어 부숙시킨 뒤에 파종했다.

뒷거름에는 봄여름 사이에 버들가지를 잘게 썰어 외양간에 깐 지 5~6일 뒤에 꺼내어 쌓아뒀다가 쓰면 맥류에 매우 이롭다고 했다. 콩 종류에는 올콩과 늦콩이 있는데 올콩은 봄갈이로, 늦콩은 그루갈이로 하였다.

그루갈이는 맥류의 수확이 끝난 뒤 또는 거두어들이기 조금 전에 고랑 사이에 파종하는 것인데, 가을에는 콩 두렁 사이에 다시 맥류를 파종했다. 콩에는 거름이 적은 편이 좋고, 씨를 뿌릴 때는 포기에 3~4알이 넘지 않도록 점뿌림하며, 꽃이 필 때는 호미를 쓰지 말라고 했다.

주요 작물에는 지방별로 많은 수의 품종이 재배되어 그 특성과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었고, 알맞은 지역과 익는 때도 잘 알려져 있었다.

농기구도 현재 볼 수 있는 전통 농구 말고도 지금은 보기 어려운 따비, 끌개, 번지, 제초기 등도 썼다. 비료로는 두엄, 외양간두엄, 사람똥, 소말똥, 누에똥, 풋거름 등을 썼고, 질고 물이 찬 땅은 객토를 하였다.

각 작물의 품종과 명칭에 중국명이나 일본명에서 유래한 듯한 것이 적지 않음을 보면 외국에서 우량 품종을 도입하고 시험하여 이 땅에 알맞고 좋은 것을 골라 보급시켰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한편으로 국내에서도 농경 기술을 북쪽으로 전파시키려고 애쓴 일이 있었다. 그 일례로 벼와 목화 재배를 평안도, 함경도의 국경 지대에 시험한 것을 들 수 있다.

당시의 과목류에는 능금, 앵두, 대추, 배, 감, 유자, 귤, 석류 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가 진상품으로 재배를 장려했다. 감귤류로는 유감乳柑, 동정귤洞庭橘, 감자柑子, 금귤金橘, 유자 등 여러 가지 품종이 있었다.

고려 말에 도입된 목화는 그 조사繰絲 등 방직법과 함께 관심을 가진 인사들의 연구 결과로 신속히 발달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무명의 보급이 활발해졌다. 목화 재배에 필요한 노동력이나 수확량, 그리고 실 만들기의 편리성 등으로 보아 베나 명주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빛깔과 견고성도 월등하여 우수한 경제 작물로 기반이 굳었다. 백색 무명은 보급도 빨랐지만 정부의 징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통화로도 쓰이고, 가장 중요한 무역품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무명의 징수는 태종 때 시작하여 대를 거듭할수록 강화되어 연산군 때는 절정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면포의 정치적․경제적 위치 때문에 목화 재배를 강력히 장려하고 경지를 확대했다. 당시 무명을 생산하지 않았던 일본에 무역품으로 면포를 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태종 때이며, 중종 때 절정에 달하였다. 따라서 목화 재배의 장려는 역대 왕의 큰 관심사가 되었다. 세종 때는 평안도, 함길도에 명하여 관가에서 경작하게 하고, 성종 때는 삼남三南의 목화씨를 평안도, 황해도에 보내 적합한 땅에 재배하게 했다. 또 당면종唐棉種을 얻어 경상도, 전라도로 보내어 심게 했다. 농업 증산과 경지 확대는 농기구의 발달을 불러오고, 따라서 축력畜力 사용을 더욱 요청하였다. 즉, 소와 말의 증식이 요구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전용戰用, 역용驛用, 승용乘用, 수렵용, 무역용 등의 목적으로 특히 목마牧馬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고려 시대에 힘썼던 목마 사업은 조선시대에 와서 계승, 조직화되었다. 즉, 159개 소의 각 목장에 각기 100필 이상의 암말과 50필 이상의 수말을 책임지고 확보하게 했으므로 전국 공목장公牧場에서 약 2만4000필 이상의 말을 유지하고, 또 해마다 각 군에서는 이상과 같이 산출해야만 했다. 이와 같이 방대한 목마 사업은 엄격한 관리와 상벌로 강행되어 일반 국민에게 육식 금지, 승마 금지, 매매 금지 등의 금법禁法과 함께 마량 조달 등 심한 부담을 부과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60여 종이나 되는 말의 품종별 관리와 보호, 품종개량, 마의馬醫 양성, 마초馬草 생산에 큰 힘을 기울였다.



조서 중기


조선 중기 농업에 대한 정부 대책은 진휼, 대동미포大同米布 반감, 군보미軍保米 삭감, 진상進上을 줄여주고, 저수지나 둑 등을 논밭으로 일구게 허용, 담배 경작 금지, 양조 금지 등 시대의 요구에 따르는 데 급급하였다. 더욱이 중기 후반부터 성숙하기 시작한 자아의식의 확대와 실용후생의 학풍은 농정 또는 농업기술의 측면에서 비판의 눈을 뜨게 하였다. 󰡔�반계수록磻溪隨錄󰡕� 가운데 전제田制를 중심으로 하는 농론農論은 그 백미에 속한다.

임진왜란 또는 그 뒤의 중국․일본과의 통교通交에 따라 몇몇 외래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대륙이 원산인 고추․호박․담배가 선조․광해군 때에 일본 또는 중국에서 도입되어 신속하게 퍼져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재배했다. 호박은 식량에 보탬이 되는 데다 가꾸기 쉽고, 고추와 담배는 일반인의 기호에 맞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고추는 우리 식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담배는 전업專業 작물로서 경제적인 위치도 확보했다.

한편 조선시대 초기의 농서들과 중기의 농서들을 비교하면 농민들의 역曆 생활이 24절기 중심으로 굳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태양의 운행을 정확히 계산하여 1년의 길이를 정하고, 그것을 24등분하여 24절기라 하며 농경에 필요한 계절변화의 지표로 삼은 것이다. 「농가월령가」의 내용을 절기별로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입춘立春 : 섣달에 물에 담가 두었던 가을보리를 바깥에 놓아 얼게 한다(봄에 파종할 것). 농기구(쟁기, 삽, 후치, 써레, 번지 등)를 갖춘다.

우수雨水 : 비온 다음날에 띠와 솔새를 베어 도롱이를 만들고, 뜰 안팎의 잡초를 태워 재를 만들어 재거름으로 하여 보리밭 봄갈이에 쓴다. 얼음이 풀리면 봄보리를 파종한다.

경칩驚蟄 : 절기 안에 봄보리를 다 뿌리도록 한다. 콩, 들깨, 수수, 삼을 파종한다. 보름 전에 과목과 잡목을 심고, 홍화紅花와 쪽(藍)과 담배(南草)를 파종한다.

춘분春分 : 묵은 땅을 쟁기로 갈아 기장, 조, 메밀, 목화 등을 파종한다. 닥나무와 청포를 심고, 가을보리밭을 매고, 두렁 사이에 콩이나 조를 심는다.

청명淸明 : 올조, 올기장을 건조한 땅에 심고, 올벼를 파종하며, 목화씨를 뿌리고, 보리밭을 간다.

곡우穀雨 : 목화씨를 뿌리고, 참깨를 섞어 심는다. 습한 땅에는 율무를 파종하고, 잠박蠶箔을 만든다.

입하立夏 : 중생도中生稻를 파종하고, 삼밭을 다시 갈고, 비가 오지 않으면 천수답에서 건답직파한다.

소만小滿 : 이 절기 안에 늦벼를 모두 파종하고, 목화밭을 초벌갈이 하며, 올조와 이른콩의 김을 맨다. 올벼의 모내기를 한다.

망종芒種 : 도리깨를 고치고, 조밭을 두벌갈이하며, 들왕골을 베어 자리 짤 것을 마련한다. 비온 뒤에 담배모를 모종한다. 중생벼의 모를 낸다.

하지夏至 : 보리를 서둘러 거두어들이고, 그루갈이로 먼저 콩이나 팥을 심되 그 다음에는 기장과 조를, 그 다음에는 녹두를 심고 들깨를 모종한다. 늦벼의 모를 내고, 목화밭의 김을 맨다.

소서小暑 : 잡초와 버들가지를 베어 잘게 썰어 외양간에 넣는다. 비온 뒤에는 돌삼(山麻)을 베고, 목화밭의 김을 맨다.

대서大暑 : 올기장, 올조를 거두어들이고 그루갈이로 메밀을 심는다.

입추立秋 : 입추 뒤 4~5일쯤에 메밀을 심고, 삼밭에 무씨를 뿌리며, 목화밭의 김을 여섯 번째로 맨다. 그루밭에 콩과 조를 파종한다.

처서處暑 : 올벼를 거두어들이고, 잡초와 버들가지를 베어 잘게 썰어 외양간에 넣는다. 목화밭을 일곱 번째 맨다. 참깨를 베어 처마에 매달아 말려 씨를 거둔다.

백로白露 : 절기 초에 배추와 상추를 심고, 산중의 잡초와 참갈 가지를 베어 잘라 쌓아 두어 겨울과 봄에 외양간에 넣는다.

한로寒露 : 꼴풀을 베어 마르면 쌓아 두어 겨울 동안 소․말을 기르는 데 쓴다. 잡초와 참갈 가지를 베어 둔다.

상강霜降 : 들깨의 이삭이 거뭇해지면 곧 베어 씨를 채취한다. 칡을 베어서 밧줄을 만들고, 닥나무잎이 떨어지면 베어 쪄서 껍질을 벗긴다. 껍질은 종이를 만들고 속의 큰 것은 울타리를 만들 수 있고 가는 것은 짤 수 있다.

입동立冬 : 추수가 이미 끝났으니 우선 움을 만들고, 울타리를 보수하며, 창호窓戶와 벽을 살펴본다. 갈대와 물억새를 베어 다음해 봄에 쓸 잠박을 만든다. 메주를 디딘다.

소설小雪 : 볏짚을 도리깨로 두드려 남은 곡식을 회수하고, 무논에 갈풀이 무성하면 이 달에 반갈이(反耕)함이 좋다. 억새풀을 베어 날개(이엉)를 만든다. 숯을 굽는다. 비온 뒤 목화밭을 반갈이한다.

대설大雪 : 비온 뒤에 띠와 솔새를 베어 밧줄이나 도롱이를 만드는 데 쓴다.

동지冬至 : 움 또는 토굴을 만들고 멍석을 짜며 날개를 엮는다.

소한小寒 : 멍석을 만들고 이엉을 짠다.

대한大寒 : 가을보리를 물에 담가 두고 농기구를 간수한다. 섣달의 눈을 항아리에 넣어 얼지 않게 두었다가 봄보리 파종 전에 담갔다 쓰면 밀, 보리가 황증黃蒸에 걸리지 않는다.


농업기술의 변천을 보면 효종 때 간행한 󰡔�농가집성農家集成󰡕�은 증보된 󰡔�농사직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세종 때의 그것과 비교하면, 지경법地耕法에서 메마른 밭에 녹두를 키워 무성할 때 갈아엎어 잡초와 해충이 적게 하고 밭을 기름지게 했다. 또한 풋거름을 쓰도록 권장한 것이 추가되어 있다. 또 증보된 조도앙기항早稻秧基項에서는 영남과 기타 남도의 행법을 많이 소개하되 재와 똥의 용법, 사질토砂質土에서의 유의사항, 앙초秧草 곧 참갈․억새풀 기타 잡초를 외양간 즙액, 사람 오줌 등에 처리하여 쌓아 쓰는 것들을 논하였다. 그리고 화누법火麴法이라 하여 논에 건초를 깔아 태우고 관수하는 제초법도 소개하고, 벼 모의 이앙이 늦어 파리오줌병이 생겼을 때는 건초를 두껍게 덮어 적당히 자랐을 때 모종하라고 했다. 기장과 조를 재배하는데 줄기(莖節)가 너무 무성하면 소로 갈아서 흙으로 줄기를 덮어 주면 새로 뿌리가 나서 열매가 좋아진다는 것도 부가되어 있다.

그리고 󰡔�농가집성󰡕�에는 종목화법種木花法이 수록되어 있는데, 목화를 참깨, 푸른콩 사이에 사이짓기하는 것은 목화에 손해를 준다 하여 전업자專業者는 목화를 홑짓기하라고 했다. 목화에 알맞은 땅으로는 건조한 모래 토양을 권한다. 그밖에도 󰡔�농가집성󰡕�에 수록된 목화 재배법의 내용은 상세하여 땅고르기, 씨앗 처리, 씨뿌리기, 거름주기, 김매기, 순치기 등 재배 기술이 상당히 진전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경상좌도에서는 습한 밭에도 목화를 경작하고 있다 했으니, 건조한 모래 토양 원칙에서 벗어나 발전한 기술도 있었던 것 같다.

「농가월령가」에 따르면 가을보리를 냉동 처리하여 봄에 파종할 수 있게 하는 기술(현대용어로는 춘화처리春化處理)이 있었으며, 벼에는 조早․중中․만晩의 익는 시기별 품종이 있어 각기 씨뿌리기, 모내기, 거두는 시기와 방법이 잘 구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맥류의 그루갈이에도 돌려짓기의 순서가 잘 짜여 있어 조, 기장, 수수 등과 콩류의 안배가 오묘하다. 거름 준비도 사람똥오줌, 외양간두엄은 물론 재의 마련 및 두엄과 풋거름의 제조를 위한 갖가지 풀과 잎의 수집과 활용 등 용의주도한 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목화 재배에서는 전업專業을 위한 집약 재배가 논술되어 있다. 다른 특용작물로 염색용 작물과 제지용 작물인 닥나무 등의 재배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담배의 파종․모종이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전래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 기호작물이 얼마나 신속히 보급되었는지 암시한다. 그리고 농가의 필수용품인 밧줄, 멍석, 이엉, 잠박, 도롱이, 뱁댕이 등의 제조를 위하여 수시로 띠, 갈대, 물억새, 돌삼 등 야생 잡초를 최대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채소류 및 과일류의 재배 상황을 허균許筠이 지은 󰡔�도문대작屠門大嚼󰡕�과 다른 농서들을 참고하면, 채소류로는 오이, 가지, 마늘을 비롯하여 무, 아욱, 부추, 염교, 미나리, 배추, 갓, 토란, 생강, 파 등을 많이 재배하고, 고려 때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수박과 참외도 각기 명산지를 이루고 있다. 과일류로는 강릉에서 돌연변이종인 배를 얻어 키웠는데, 크고 단맛이 있으며 육질이 연하였다는 천사리天賜梨와 정선의 금색리金色梨, 평안도의 현리玄梨, 석왕사의 홍리紅梨․대숙리大熟梨 같은 배가 있었다. 또한 온양의 조홍시早紅柿, 남양의 각시角柿, 지리산의 오시烏柿 같은 감이나 황도黃桃, 반도盤桃, 승도僧桃 같은 복숭아, 그리고 당행唐杏, 자도紫桃, 녹리綠李 같은 자두류가 있었다. 밤, 대추가 각지에서 생산되었음은 물론이다. 고려 때부터 전통이 있던 감귤류로는 금귤, 감귤, 청귤靑橘, 유감柚柑, 감자, 유자 등이 제주를 위주로 하여 서남 해안에서도 산출되었다.

이들 말고도 우리나라에서는 능금(지금도 있음)이라는 소형 과일이 있었는데,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의하면 고려 중기에는 ‘핏부’라고 했다. 그 뒤에 임금林檎의 음을 따서 ‘능금’ 또는 ‘님금’이라 하였는데, 이보다 대형인 사과査果(또는 掠果)가 효종 때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한다. 우리가 오늘날 ‘사과’라고 하는 것은 한말에 들어온 서양 사과를 가리키는 것이다.

축산 방면의 모습은 효종 말에 간행된 󰡔�목장지도牧場地圖󰡕�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을 겪고 병자호란까지 거친 직후 목장의 마필은 1/3로 줄어들었는데, 그 뒤의 얼마나 복구하려고 노력했는지 효종 말에는 마필의 수효가 2만 필이 넘었다고 한다. 물론 목장은 폐지된 곳이 많았다.



조선 후기


조선 후기 농업정책은 영조 때 제언당상堤堰堂上을 두어 모경자冒耕者(임자의 승낙 없이 남의 땅에 농사를 짓는 사람)를 과죄科罪하는 임무를 맡기는 한편, 제방을 개수하고 수차水車를 제조, 보급하는 등 수리 정책에 힘썼다.

균역법을 베풀어 일반민의 과중한 납세 부담을 덜어 주고, 그 보충은 어염세와 은결隱結(탈세를 목적으로 조세의 부가 대상에서 제외시킨 땅)의 과세로 이루었다. 권농하는 교서가 빈번했고, 󰡔�농가집성󰡕�․󰡔�구황촬요救荒撮要󰡕� 등 서적을 중간했으며, 옥토에 너무 담배를 재배하므로 그것을 금하기도 했고, 우역牛疫이 창궐하여 사람이 대신 쟁기를 끌 지경이라 소 잡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으며, 각지에 측우기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정조는 스스로 농정에 유의하여 제언의 개축, 제언절목堤堰節目의 전국 반포, 새로운 제언(만년제萬年堤․축만제祝萬堤 등)의 축조가 있었고, 권농 행사가 많았으며 농서를 널리 구하기도 하였다.

헌종 때도 권농윤음勸農綸音을 내리고, 각 도에 제언수축의 공사가 있었다. 하지만 큰 가뭄과 흉년이 잦아 모를 내지 못한 논에 다른 곡식을 심는 일과 모내기 금지안이 대책에 오르기까지 했다. 황폐하여 방치된 땅의 경작을 장려해도 비옥한 전답마저 많이 폐기되었고, 감히 개간할 의사도 보이지 않았으며, 어쩌다 맞는 풍년에도 영세민의 고생은 오히려 흉년 때보다 못하지 않았다. 여러 해 체납된 환곡과 신포身布(평민의 신역身役 대신에 바치던 무명이나 베), 그리고 부역에 대한 독촉이 성화같아 1년 소작의 곡식이 모조리 상납되는 참경을 빚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이때부터 척신에 의한 세도정치가 점점 심해지면서 관기官紀의 부패는 더했고 국민은 도탄에 빠져 신음했다. 철종 때는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절정에 다다랐다.

1600년대에는 실학의 풍조가 성숙하기 시작하여 농업 연구에도 반영되어 적지 않은 농정서와 농업기술서가 저술되었다. 1700년대에 들어서는 정상기鄭尙驥의 󰡔�농포문답農圃問答󰡕�이 나왔고, 이어서 󰡔�반계수록󰡕�이 저작된 지 100년 만에 간행되었다. 정조 때는 강력한 권농 정책 아래 대대적으로 농서를 모집하여 그 중에서도 북학파의 석학들이 농업에 보인 관심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농업에 탁견을 보인 학자로는 박제가朴齊家와 박지원朴趾源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빈번한 연경燕京 방문에서 얻은 견문과 경험을 보태어 예리한 식견으로 󰡔�북학의北學議󰡕�와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엮어 내놓았다. 그밖에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海東農書󰡕�, 이규경李圭景의 󰡔�백운필 白雲筆󰡕�, 서유구(徐有梏의 󰡔�행포지杏蒲志󰡕�․󰡔�종저보種藷譜󰡕�, 백과전서식 󰡔�임원경제지󰡕�, 정약용丁若鏞의 논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농업론 등이 실학자들의 농정과 농업기술에 대한 연구 업적으로 나타났다. 이들 논저들은 탁월하고 혁신적인 내용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농론農論 자체로 또는 보급되지 않은 교본敎本으로 매몰되고 말았다.

자연재해에 따른 흉작과 악정惡政에 시달린 농민들에게 대용 식품이 될 외래 작물의 도입은 이 시기 식량 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 가운데 고구마(甘藷), 감자(馬鈴薯), 옥수수가 특기할 만한 것들이다. 고구마는 1763년(영조 39)에 통신사 조엄趙湄이 대마도에서 씨고구마(種藷)를 얻어 부산진으로 보낸 것이 시작이다. 거의 같은 때 이광려李匡呂와 강계현姜啓賢도 씨고구마를 얻어 심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필리姜必履는 동래東萊에서 시험 재배하여 민간에 장려하는 한편 󰡔�감저보甘藷譜󰡕�를 지었다. 이들은 씨고구마를 서울로 보내 재배를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한때 영남 지역에서만 재배했던 모양이다. 1813년(순조 13)에 이르러 김장순金長淳과 선종한宣宗漢이 많은 씨고구마를 기호지방에 보급하기 시작했으며 󰡔�감저신보甘藷新譜󰡕�를 저술했다. 그 뒤 1824년에 당시 호남순찰사였던 서유구가 󰡔�종저보󰡕�를 편찬하여 호남 지방에도 재배를 장려했다. 고구마 재배에 알맞은 땅은 기름지고 가볍고 질이 거친 땅으로, 양지쪽을 택하여 여러 번 겨울갈이로 벌레알을 죽이고 거름을 한 뒤 곡우 전에 3~4번 갈아서 둔덕을 만들어 모를 옮겨 꽂고, 생육이 진전하여 무성해지면 적절히 마디와 덩굴을 막거나 자르고, 가벼운 서리가 한두 번 내린 뒤 수확한다. 󰡔�종저보󰡕�의 풍부한 내용을 보면 영남, 호남, 기호 각지에 알맞은 고구마 경종법耕種法(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방법)을 알아내느라 무던히 노력한 자취가 역력하다.

이와 같이 여러 인사들이 고구마 재배법을 연구하고 그 보급에 힘썼건만, 그 재배법과 저장법이 까다로워 파급 속도가 느렸다. 감자는 고구마보다 60년이나 늦게 함경북도를 통하여 도입되었으나 10여년이 지나지 않아 전국 방방곡곡에 퍼졌다. 두만강을 건너 도입, 보급한 공로자는 명천明天 김 씨, 이향재李享在, 신종민申鍾敏, 김사승金士升 등이다. ‘북저北藷’라고도 하는 감자는 ‘남저南藷’라고 불린 고구마와 달라 한랭지에도 잘 견디며, 재배법이 비교적 간단하고 많이 수확할 수 있다. 이 새로 도입된 작물은 평지는 물론 화전火田)에 이르기까지 짧은 시간 안에 보급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거의 모든 농가마다 심는 옥수수는 30여 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크게 나누어 수끼계, 당쉬계, 강남(강냉이)계, 옥수수계로 분류한다. 우리나라에는 어느 때 어느 경로를 통하여 들어왔는지 󰡔�농가집성󰡕�․󰡔�색경穡經󰡕�․󰡔�산림경제󰡕� 등에도 이 곡물 이름의 기록이 없고, 1766년에 나온 󰡔�증보산림경제󰡕�에 처음 소개되었다. 거기서는 옥수수에 5품종이 있으며, 비옥한 땅에 자라고 쪄 먹거나 죽을 쑤어 먹기 좋다고 했다. 그런데 1800년대 초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서유구의 󰡔�행포지󰡕�에는 옥수수 품종이 청, 백, 홍 3품종이 있으며, 가루로 하여 양식으로 충당할 수 있고 맛이 밀가루에 견줄 만하나 국민들이 그리 숭상하지 않는다고 한 것을 보면 이때에도 널리 보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땅콩(落花生)은 1778년쯤에, 완두콩(豌豆)은 두만강을 건너 들어온 것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는 농경 기술의 발달도 부진하여 농구의 모습은 경작에 맞지 않고, 장공기술匠工技術도 좋지 않아 질과 능률이 떨어져 중국의 농구를 본떠서 만들거나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파종도 흩뿌림과 밀파密播(씨앗을 빽빽이 배게 뿌림)에 치우쳤고, 거름의 수집․운반․저장에 힘쓰는 것도 부족했다.

채소류의 재배도 종자의 선택과 거름 주는 방법이 시원하지 않아 모처럼 북경에서 들여온 것도 몇 해 지나지 않아 퇴화하기 일쑤였다. 수차제水車制는 논의만 많았을 뿐 별로 보급하지 못했고, 수리 시설은 허물어져만 갔다. 목화 재배는 활발했으나 누에와 뽕은 쇠퇴하여 양잠은 여인의 소업所業으로 축소되고, 과목류 재배도 해마다 줄어갔다.

이러한 농업의 쇠퇴 속에서도 목화와 인삼 재배 등은 그 기술과 경영이 발전했다. 특히 인삼은 산삼 종자를 산골짜기에 파종하여 산에 옮겨 심어 기르는 삼양법蔘養法에서 출발하여 차차 집약적인 삼밭에서 가꾸는 가삼재배家蔘栽培가 이루어졌다. 가삼법이 시작된 것은 정조 때이며, 정조 말에서 순조 초에 걸친 기간에는 개성에까지 그 재배지가 북진해 결국 그곳이 명산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즈음에 중국과 일본에 사신들이 자주 오가고, 실학자들과 관심 있는 인사들의 열성이 가세되어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의 도입이 단시일에 꽃피었음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기후와 토질이 판이한 원산지에서 이 땅에 와 정착하기까지 나타난 재배법의 연구와 보급 노력은 당시 농업기술 발달의 정도를 가늠케 한다.



조선 말기


19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부터 도도히 들어오는 서양 문물이 이 땅의 농업기술에도 영향을 끼치려 했다. 1884년(고종 21)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과 농상공사農桑公司의 설치를 비롯하여, 미국의 새로운 농기계류 도입, 외국 농작물 종묘의 주문, 외국 가축의 구입 등 한때 활발한 정부의 움직임이 있었다.

1884년 안종수安宗洙의 󰡔�농정신편農政新編󰡕�과 이우규李祐珪의 󰡔�잠상촬요蠶桑撮要󰡕�, 1886년 정병하鄭秉夏의 󰡔�농정촬요農政撮要󰡕� 등 새로운 농업 서적이 출판되기도 했지만 이 서적들은 보급되지 못했다.

이때 우리나라 각계에 퍼져 있던 일본인들의 눈에는 우리나라의 농법이 매우 낙후된 것으로 보였다. 논농사의 대부분이 홑짓기를 하고, 논갈이도 불완전하며 그 횟수도 적었다. 벼의 품종은 강약이 혼합되어 잡다했다. 수리도 많은 논이 비를 기다려야 모를 낼 수 있고, 하천을 이용하는 관개시설이 부족하고 저수지를 이용할 수 있는 수리안전답은 매우 적었으며, 그나마 이전의 제언은 대부분 황폐한 상태였다. 경운, 제초, 조제, 저장 등에 쓰이는 농구의 종류 및 제조가 매우 단순했다.

수확고는 김해, 양산, 밀양, 은진 등의 아주 좋은 논 300평에 현미玄米로 계산하면 1.8∼2.2석이었고, 일반 하답下畓에서는 7말 정도였으므로 평균하면 1∼1.5석이었다. 전국의 쌀 수확고는 약 1200만 석(또는 900만 석) 정도였다.

맥류와 두류의 경우도 열악하여 거름의 부족, 밭갈이의 불충분, 병충해의 방치 등으로 수확량이 일본의 반에 지나지 않아, 300평에 소출이 보리 1.5석, 밀 1석, 콩 1∼1.5석이었다.

인삼은 재배법도 정교하고 무엇보다 그 제품인 백삼, 홍삼은 국제시장의 경쟁을 물리쳤는데, 재배지로는 개성을 으뜸으로 하여 용인, 강계, 금산, 충주 등이 유명했다.

목화는 함경도 및 강원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 각지에 재배되어 그 면적이 5만6천여 정보에 수확량 300만 관 이상을 헤아렸으며, 수출도 거의 1만 관에 이르렀다. 품질도 중국과 인도에 비견할 만큼 양호하다고 보았다.

담배는 우리나라의 토양과 기후에 맞고 일반 민중의 기호 대상이 되어 전국 도처에 경작되어 그 면적이 2만1600여 정보에 생산이 454만 관에 도달했는데, 성천, 곡산, 김화, 용인 등이 명산지로 알려졌다.

채소의 재배는 각지에서 자급적으로 행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서울 부근과 개성 등지에서 번성했다. 과수 재배는 미국인, 캐나다인, 일본인들이 경영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축산은 그 대상이 소, 말, 닭, 염소 등이 주품종이었으나, 그 가운데 한우韓牛는 사역을 목적으로 하는 역축役畜으로 우수하여 외국에까지 알려졌다. 한때는 농가 5∼10호마다 한 마리의 일소를 소유하고, 일본과 러시아에 수출도 활발히 하여 수출한 마릿수가 1만3천 마리에 이르렀다. 한우는 거친 먹이도 잘 먹으며 유순하고 쟁기갈이, 두엄 생산, 운반용, 식용으로도 아주 요긴했다.

말은 비록 체구가 작으나 예전에는 운반용이나 전용戰用, 공용貢用으로 목축牧畜에 힘썼지만 이때는 목장이라고 할 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돼지, 닭, 염소 등은 육용肉用이나 난용卵用으로 재래종이 농가의 자급 정도로 사육되었다.

양잠업은 우리나라의 토양이 뽕나무 재배에 적당하고, 기후로는 5~6월의 건조가 누에치기에 알맞아 예부터 성행했지만, 기술적인 진전이 별로 없었던 것은 부녀자의 전업으로 맡긴 결과 개량하려는 연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국의 뽕밭은 751정보, 양잠 호수는 6만8500여 호였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농업에 관심을 가졌던 주요 분야는 식량 확보를 위한 벼농사와 일본 방적공업의 원료 획득을 목표로 한 목화 재배, 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던 과수 재배 세 가지였다.

벼 재배는 예부터 내려오던 1천여 종이나 되는 많은 벼 품종이 일본에서 도입된 품종을 장려함에 따라 재배 면적이 점차 줄어들고 쇠퇴했다.

목화의 작황도 1904년 일본을 통하여 미국 육지면 종자를 수입하여 순화馴化에 힘쓰는 한편 재래 품종에서 좋은 종자를 선발하여 증산에 박차를 가했다. 고려 말에 처음 들어온 목화가 임진왜란 전에 융성하여 그 뒤로도 현상유지를 하더니 조선 말기에는 쇠퇴의 길을 걷다가 일본의 강력한 면작 계획을 맞이한 것이다.

과수 재배는 우리나라 풍토에 적합하여 고래로 각종 과일을 생산해 왔고, 각지에 명산지를 두기까지 했으며, 제주도와 남해 연안의 귤 재배는 크게 장려되었다. 서울 근교를 제외하고는 과수원다운 것이 거의 없었을 즈음인 1890년 무렵에 길주, 원산, 대구 등지에 외국인이 서양 사과, 복숭아, 서양 배 등을 시험 재배한 이후 점차 과수원의 규모 재배가 활발히 시작되었다.

1905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일본인 기업가들이 황주, 진남포, 경인 지방, 경상북도 지방, 특히 대구 주변, 구포, 나주 등지에 각종 서양 사과(祝․紅魁․紅玉․滿紅 등)와 배(金村秋․明月․長十郎 등)를 대규모로 심었고, 그 뒤 이 지방들은 사과 또는 배의 명산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인들은 각종 작물의 품종 도입과 아울러 경작법 이식에 부수하여 우선 일본제 농구의 판로를 얻었다. 농기구의 수입 외에 일본인 공장工匠의 내왕이 잦아졌고 농구를 제작하여 공급하였다. 1908년에는 일본제 농구를 개량 농구라 하여 일부 농민에게 무상 배부한 것을 비롯하여 그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일본식 괭이(備中嵩․三德嵩), 일본낫(松原鎌), 쇼벨(삽), 도급기稻扱器, 당기唐箕, 연직기筵織機, 관수차灌水車 등이 그 선구였다.

비료에서도 통감 정치 이래 우선 자급비료로서 퇴비 증산, 녹비작물의 재배를 장려하면서 판매 비료의 도입도 시작되었다. 재배면에서는 해이해졌거나 근대과학의 조명을 받지 못한 종래의 여러 농법이 비판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즉, 선종選種, 종자처리, 파종, 이앙, 시비, 중경, 제초, 병충해 대책, 수확, 조제, 포장 등이 그들의 영향을 입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함에 따라 강력한 일본 자본을 배경으로 일본 농업(정책․경영․기술)의 이식이 벼농사, 목화 재배, 과수 재배, 담배와 인삼 경작 등에 수행되었다. 특히 일본은 자국의 식량난 타개를 위하여 이른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우리나라에서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즉, 경종법 개선, 품종 개량, 종자 갱신, 퇴비 장려, 수리 개량, 개간, 간척 등 다각적인 시책으로 증산의 실효를 거두려고 애썼다. 그러나 우리나라 쌀이 일본으로 많이 수출되어 일본의 열등미 가격 폭락을 일으켜 이른바 선미배척운동鮮米排斥運動이 격화되었고, 1930년대의 세계적인 농업공황이 겹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수리조합비의 과중한 부담 등으로 농가의 토지방매가 성행하여 2차 산미증식계획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농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변모한 벼농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벼농사 면적은 1910년에 132만 정보이던 것이 1941년에는 164만 정보에 달하였고, 몽리면적은 수만 정보에서 23만8천 정보에 이르렀다. 미곡의 수확량은 1910년에 1240만 석이던 것이 1941년에는 2488만 석으로 상승되어 1910년에 300평에 0.77석이던 것이 1941년에는 1.5석으로 배의 수확량을 올리게 된 셈이다. 그동안 일본 품종이 조수와 같이 밀려들어와 1935년경에는 75%까지 재배 면적을 차지했다. 1935년부터는 개량 품종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1945년을 전후하여 일본 재래종을 교체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미곡의 300평당 수량이 약 30년 동안에 배증한 기술 진보의 배경에는 품종 생산력의 발전, 수리 시설의 증강, 금비金肥 사용량 증가, 그리고 기타 경종법 개선에 힘입은 바가 크다. 농기구의 기계화는 별로 진전하지 못했다. 어떻든지 이렇게 증산된 미곡의 많은 부분이 일본에 수출되었으며, 1938년에는 수출량이 1070만 석에 달하였다.

한편으로 잡곡 생산은 1910년대에 약 2천만 석이던 것이 1930년대에는 2400만 석 안팎으로 약간 증가했을 뿐 수출미 대신으로 1930년대에는 어쩔 수 없이 280만 석을 수입했다. 이는 1910년대의 26만 석 수입의 10배 이상이나 된다. 이것을 보면 맥류를 위시한 잡곡류의 증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투자성이 높은 다른 작물, 특히 과수, 담배 등은 많은 품종개량과 재배법 개선이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 

농가월령(高尙顔)

림원경제지(徐有梏)

산림경제(洪萬選)

한국 농학사, 李春寧, 民音社, 1990

농림수산고문헌비요, 金榮鎭, 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2

한국농기구고, 金光彦, 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6

한국 고대의 농업기술과 생산력, 李春寧, 國史關論叢 31輯, 1992

우리나라 수도작 기술의 변천, 李殷雄外, 學術院論文集 35輯,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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