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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으로 가는 길 2 |
김석기 기자 |
그리고 저 옆 안산공고 쪽에 가보며 시랑 초등학교도 볼 수 있습니다. 이 학교 이름도 마음대로 추리해서 ‘여우랑 늑대가 많이 나타나서 시랑이라고 했나.’ 했습니다. 이것도 나중에 알아보니 정정옹주의 부군이었던 분이 생전에 이부시랑이라는 관직을 지냈다고 해서 시랑골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여우와 늑대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42번 도로를 타고 가다보니 교통 안내판에 이곳을 ‘시낭’ 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명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발음 나는 데로 그냥 표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디서 관리하는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시정을 요청해야하겠습니다. 이제 정재초등학교를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고속도로가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 이곳은 엄청 넓은 들판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봐도 고속도로가 가로질러서 그렇지 넓은 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대는 벌터 라고 불렸습니다. 들이 하도 넓어서 농부가 소를 크게 불러야 한다고 해서 질우지(叱牛地) 라고 하기도 했다 합니다. 지금도 그 흔적을 조그만 길안내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마을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원부곡(元釜谷)입니다. 한자 그대로 원래 부곡이라는 뜻이지요.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이 가마를 엎어 놓은 형상이라서 복부산(伏釜山)이라 하고, 그 아래 형성된 마을은 가마골 이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산에는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졌다고 해서 만수동(萬樹洞) 이라 부르고, 동쪽은 골짜기 안에 있다고 해서 안골 또는 관찰사를 지낸 유석 이라는 분의 묘가 능같이 크다 하여 능안골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능안골이 바로, 텃밭이 있는 그곳입니다. 이렇게 지명 하나도 허투루 지어진 이름이 없습니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 조사하다 보니 지명에는 그곳의 역사, 문화, 자연 등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역사가 깊은 마을이 지금은 큰 도로에 의해서 맥이 잘리고 사람들은 거의 떠난 것을 보면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곳에 자리잡게 된 진주 유씨는 조선 중기에는 기호남인(畿湖南人) 3대 집안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였고, 조선 후기에는 남인 문사들이 이곳에 모여 교류하면서 실학의 산실이 되었다 합니다. 특히 청문당에 있는 만권루(萬券樓) 라는 도서관은 조선 4대 서고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일동 쪽에 있었던 성호 이익 선생의 집과 함께 엄청난 학문의 요람이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과거의 그 찬란함은 사라지고 겉모양만 남아 집 앞에 서 있는 200년 넘었다는 은행나무만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청문당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곤 했는데, 올 해부터 복원사업에 들어가서 그 모습이 깔끔하게 싹 바뀌고 있습니다. 현재 사랑채는 복원사업이 완전히 끝난 상태입니다. 앞으로는 청문당 옆쪽에 있는 공장건물들도 이주를 시키고 집 앞에 있던 연못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하니 이후가 더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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