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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60여 평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있는 부곡동 텃밭의 옛 지명은 능안골이라 한다. 이 지명은 조선시대 관찰사를 지낸 유석이라는 분의 무덤이 마치 능처럼 커다랗다고 해서 불렸던 옛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정면에 신갈-안산 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고, 그 중간에는 고속철도가 광명역을 향해 지하로 달리고 있다. 한 마디로 최고의 문명혜택을 받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밤낮없이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귀에 거슬리고 지하로 고속철도가 지나가는 상상만 하면 괜히 땅이 울리는 것 같기도 하더니 지금은 그저 무덤덤하게 그것들을 쳐다보게 된다. 산 좋고 물 좋은 것만 따지자면 그리 좋은 조건은 아니겠지만 하루하루 지내면서 느끼는 능안골은 아늑하고 포근하기만 하다.

다른 모든 곳이 마찬가지 이겠지만 능안골의 절경은 봄에 펼쳐진다. 이곳을 몇 년 전부터 오갔지만 올 해처럼 겨울의 끝자락부터 지켜본 적은 처음이라 올 해 느끼는 봄은 특별하고 새롭다.
봄이 오기 전에 능안골은 황량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앙상한 나무가지들, 거기에 걸려 있는 흡사 까마귀 같은 검은 비닐들이며 땅은 작년 가을 롯데마트 공사장에서 나온 흙을 갖다부어서 정말 볼품 없었다. 그런 곳이 봄이 되기 시작하자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그저 봄이 오는구나 했었는데, 봄이 이렇게 오는지는 머리털 나고 처음 알게 되었다.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전령사는 산새들이다. 봄이 오면 겨우내 어딘지 모르는 곳에 꽁꽁 숨어있던 산새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지저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버드나무에는 새순이 돋아 연두빛으로 물들고, 버들강아지도 솜털이 뽀송송하게 달리게 된다.
그 무렵이 되면 개나리꽃이 서둘러 핀다. 개나리꽃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잎도 달지 않고 꽃부터 피운다. 이 때 산수유도 함께 노란 꽃망을 터트리는데, 산수유도 개나리와 함께 노란색이긴 하지만 개나리가 붓으로 꾹꾹 찍어 누른 듯 하다면 산수유는 빨대에 노란 물감을 머금고 훅 불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때 쯤이 되면 동네에 있는 목련에도 꽃이 달리기 시작한다. 목련꽃은 정말 탐스럽다. 애기 머리만한 꽃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을 보면 그 탐스러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목련은 꽃이 하얘서 그런지 밤에 보는 맛이 또한 기가 막히다. 은은한 달빛에 빛나는 목련꽃을 보면 괜히 감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제 개나리에 잎이 생기기 시작하면 산에 있는 진달래꽃이 피기 시작한다. 나무들은 아직 앙상한 채로 있기에 진달래가 여기 저기 울긋불긋 피면 그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다. 마치 진분홍색만 보이는 흑백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는 진달래꽃을 너무 많이 따먹어 분홍 똥을 쌌다는 옛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진달래꽃이 피고 나면 이제 이 나무 저 나무에도 꽃이 달리기 시작한다. 요즘 지자체에서 너도 나도 앞다투어 가로수로 많이 심는 벗꽃도 피고 맛있는 열매가 달리는 살구꽃, 앵두꽃도 만발한다. 그러고 보니 이 맘 때 피는 꽃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주는 것들이다.

이런 꽃들이 피고 나면 산이 본격적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새잎이 돋아 온 산이 연두빛으로 가득하다. 어떤 작가는 그 빛깔을 보고 유록색이라고 했다고 한다. 정말 절묘한 표현이다. 어떤 생명이나 어릴 때는 이렇게 예쁜 것일까.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왜 이리 사랑스럽고 정이 가는지 모르겠다.
산의 변신은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잎을 단 후에는 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혼자 보다는 여럿이 뭉쳐 있을 때 더 예쁜 조팝나무에 하얗고 조그만 꽃들이 다닥다닥 달린다. 이 꽃을 보면 손으로 쭉 훑어서 한 입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조팝나무 인지도 모르겠다. 조팝나무는 거꾸로 심어도 자란다고 할 만큼 생명력이 강한데, 올 해 초봄에 경지정리 때문에 죽게 될 운명에 처한 조팝나무를 가져다 밭에 들어가는 입구에 대충 묻어줬는데 신기하게도 살아서 잘 자라고 있다. 이놈을 가만히 보니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잎과 꽃만을 피웠다. 욕심 많은 사람 같으면 전부 다 원상복구 해놓으라고 닥달하거나 어떻게든 다 피워내려고 고생할텐데 자기 몫만큼만 알아서 피우는 모습에 경외감이 든다.
조팝나무에 꽃이 달리면 산벗꽃과 철쭉 차례이다. 조팝을 옮길 때쯤 광명에 있는 화원에서 사다 심은 철쭉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도 꽃망울을 피웠다. 붉은 색도 있고 하얀 색도 있고, 똑같은 철쭉인데도 가지각색이다.
산벗꽃도 장관이다. 회색빛 길거리에 피어있는 벗꽃과는 다르게 연두빛 속에서 피어있는 산벗꽃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밭에서 일을 하다보면 벗꽃이 바람에 날려 꽃잎을 떨구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면 여기가 무릉도원 인가 착각할 정도이다. 밭은 척박해서 새싹들이 힘겨워 하는 모습에 마음이 짠했는데 벗꽃비가 그 마음을 달래준다.

능안골에는 이렇게 봄이 온다.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한 모습에 하루하루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일 년이 가고, 이 년이 가고, 십 년이 가도 지금처럼 감동할 수 있을까? 자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그때그때 할 일을 하면서 산다면 백 년이 가도 똑같은 마음을 갖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곳이 도시 한 복판이라도 생명이 살아 숨쉬는 곳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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