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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은 변신 중
김석기 기자

3월 말 경이었던가? 내가 분양받은 아래 밭과 같은 곳에 분양받은 분들이 처음 오시던 날, '이런 흙에서도 뭐가 자라나' 고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난다. 솔직히 나도 그 밭을 처음 보고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이니, 올 해가 첫경험이신 분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텃밭농사 지을 생각을 하시면서 주변으로 풍광도 좋고, 새도 울고, 녹색이 쫙 펼쳐져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계셨을 터에 그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그랬다면 밭의 상태는 거의 배신이요, 배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뻘건 흙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덮여 있었으니 무리도 아닐 것이다. 나도 ‘올해 고생 좀 하겠네.’라고 생각했다. 그때 흙의 상태를 떠올리니 그래도 황토라는 건 봐 줄만 했다. 그보다 더 걱정스러웠던 점은 흙이 무슨 돌맹이처럼 덩어리가 져 있지를 않나, 겉은 푸석푸석하고 속은 찐덕거리는 표리부동한 상태라는 것이다. 흙을 만져보고 냄새를 맡으며 자연히 ‘올해는 수확은 크게 기대하지 말고 흙을 되살리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런 흙을 보니 저절로 작년 윗밭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곳은 여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작년 윗밭에 비교하면 여기는 양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작년 그 밭을 분양받고 얼마나 기운이 빠졌는지 모른다. 거기는 흙이 겉에만 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에 돌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속 흙은 삽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시커먼 뻘흙이었다.
3년 전, 처음 텃밭을 시작하며 분양받았던 밭에서는 참 재밌게, 열심히 농사 흉내를 냈다. 나름대로 이 궁리 저 궁리 하면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 온갖 생각을 다 해보고 직접 실행해 보고 정말 재밌었다. 그때는 진짜 주중이 주말을 위해서 존재했다. 주말이나 공휴일이 되면 서울에서 자전거 타고 전철을 탄 후, 전철 안에서는 사람들 눈치 보며 자전거를 싣고 와서 내려서 다시 자전거로 밭을 오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밭으로 향했다. 그 정성 덕분이었는지 생각지도 않은 수확도 꽤 풍성했다. 이제 3년차이지만 농사는 해마다 새롭고 재미있다. 하지만 처음 농사짓던 때가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고 그때를 생각만하면 아직도 가슴이 설레인다. 그런데 그렇게 정성껏 농사짓던 곳을 불가피하게 옮기게 되었는데, 아무런 정도 없지 흙 상태는 한 숨만 나오지 하다보니 땅을 거의 방치, 아니 아예 손을 놓고 놀렸다.

그런데 어느 날 다시 돌아와 본 밭은 놀랄 정도였다.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것 같았던 곳에서 뭐가 막 자라고, 더욱 놀라운 것은 흙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뻘흙이 부서지고, 흙냄새가 좋아지고, 색깔도 영양분이 많은 흙색깔이 되어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곳에서 농사를 짓는 회원분들이 일 년 내내 열심히 가꾼 결과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처음에 지레 낙심해서 포기했던 것이 너무 부끄럽고 내가 분양받은 땅에게 죄스러웠다. 사람이라면 그 대상이 무엇이건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운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올 해 그런 아래 밭을 분양받고 나서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하기 보다는 작년 밭을 떠올리며 ‘거기도 그렇게 변했는데 여기라고 변하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시간을 두고 천천히 흙을 되살려 나가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수확 보다는 흙살리기에 중점을 둔다 생각하고 흙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서 거름도 약간 적게 주고, 산에서 부엽토도 퍼다 부지런히 섞어주고, 풀은 뽑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돌려주고, 씨를 뿌릴 때도 혹 흙에 도움이 될까 이것저것 섞어서 뿌려주고, 집에서 오줌도 받아다가 틈틈이 뿌려주었다. 그래서인지 이제 4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흙이 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기분이 좋다. 그만큼 관심과 애정을 쏟았기 때문일까? 아무튼 처음에는 벌겋기만 했는데 지금은 거뭇거뭇한 기가 눈에도 보이고, 지렁이도 간혹 가다 보이고, 이런 저런 곤충들도 살아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확인은 못해 봤지만 듣기로는 건강한 흙 한 숟가락에는 미생물이 수 억 마리가 산다고 한다. 정말 흙은 살아있는 존재이다. 세상에 흙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이 어디 있는가! 지금의 우리들이야 흙을 그저 발로 밟고 걸어다니는 곳으로 알며 살아가고 있다. 아니 그나마도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덮어버려 흙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느끼지도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왠지 흙은 더러운 것, 불편한 것,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사두면 돈이 되는 대상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 가치 있다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눈이 멀어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는 부평초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뿌리가 붕 떠 있으니 건강할리도 없다.

밭에서 일하다 보면 그 앞에 가로놓인 고속도로로 주말이면 도심을 빠져나가는 차량들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무엇이 우리를 주말이면 고생할 것을 뻔히 알면서 길을 떠나게 만드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흙이 그리워서 떠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흙이, 그리고 자연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지, 또 우리의 삶에 무언가가 빠져있고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아닐지……. 나는 오늘도 텃밭에 서서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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