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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세 강의 남쪽부터 걸어서 거슬러오르기 시작하려고 숭인지구 입구에 갔다가 우연히 들어간 야나기하라柳原 은행 기념관. 

 

 

 

아무 기대 없이 그냥 한번 둘러볼까 하다가 망치로 한 대 얻어맞는 충격을 받았다.

 

작년인가 진주에 갔다가 인상깊게 본 형평사 운동이 일본의 부락민 운동인 수평사와 1920년대부터 연대해 활동했단다. 

그러니까 야나기하라의 버드나무가 백정과 밀접한 그 단어였던 것이다. 일본도 한국의 백정처럼 버드나무로 고리짝이라도 엮어서 내다팔았던 것일까?

이번 선거로 인민은 위대한가란 명제로 머리가 무거웠는데, 난 저항하는 인민은 위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래는 참고로 읽으면 좋은 글

https://platformc.kr/2023/03/equality-and-burakumin/

 

1920년대 형평사 운동과 부락민 해방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들

1920년대 형평사와 수평사 2022년 말 경남MBC가 제작한 ‘어른 김장하’가 입소문을 타고 ‘꼭 봐야할 다큐’로 알려지면서 많은 화제를 낳았다. 자신은 차 한 대, 새 옷 한 벌 사지 않으면서 수많

platform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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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소는 왜 달달한가 했더니... 재료로 쌀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지역이 콩과 소금으로만 미소를 만드는 곳이 있으니! 그 빛깔도 한국 된장처럼 시커무루죽죽하구만. 지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맛도 비슷하다 한다.



그래서 이런 요리도 발달했다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먹어봐야겠다. 후박잎에 미소와 각종 재료를 올리고 구워먹는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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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광대장간 : 02-966-1114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2동 99-1 

불광대장간 : 02-353-8543, 016-9211-8543     서울특별시 은평구 대조동 80-7  박경원 

동명대장간 : 02-487-3559    서울특별시 강동구 천호동 556-5

형제대장간 : 02-304-7156

충남공작소   02-2235-3107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233-37 

광주대장간 : 02-2618-5155    서울특별시 구로구 고척1동 72-29    

 

 

 

 

경기도

동래 대장간 : 031-245-9894       정대봉   수원시 남문 지동시장 입구, 개천 왼쪽 100미터 거리 

드림종합상사 대장간  032-567-4509     김포시 양촌면 학운리 448-326  

화성대장간  :  019-294-3980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송문리 480-2

해남대장간  :  031-527-3439                 남양주시 진접읍 내곡리 246-5

우전철물대장간  : 031-673-3254            안성시 성남동 203-15

수산대장간: 031-494-8118  경기 시흥시 도일로 117

명일대장간철공소: 031-241-8517  경기 수원시 팔달구 수원천로 213

안성대장간: 안성시 가현동

민속촌 대장간: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 94-2  

소사대장간: 경기 부천시 경인로 293

신시철물대장간: 이천시 장호원읍 서동대로8975번길 43-13

전통대장간: 안성시 장기로 24

충남대장간: 구리시 딸기원로8번길 56

광흥대장간: 광주시 역동로16

충북대장간: 031-752-7352   경기 성남시 수정구 산성대로 69번길 2 

 

 

 

 

강원도

둔내 늘봄대장간 : 033-342-1263  횡성군 둔내면 둔방내리 586 

양양대장간철물 :  033-673-3343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성내리 77

형제대장간 : 033-745-2718   강원도 원주시 중앙동 42

흥전대장간 : 033-541-9321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흥전리 63

근덕대장간 : 033-573-3751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광태리 102-1

평창대장간(대장철공소) : 033-332-3191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하리 55-11

신흥대장간 : 033-434-4107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 370-61

일품철물대장간 : 033-742-0222   강원도 원주시 중앙동 36-1

임계대장간 : 033-562-6426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송계리 633-25

대성대장간 : 033-433-1617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진리 29-5

 

 

 

 

충청북도

증평대장간 : 043-836-4501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중동리 85-17 최용진

보은대장간: 043-544-1400 충북 보은군 보은읍 죽전리 227-8

남다리대장간: 043-542-1084 충북 보은군

삼화대장간: 충북 충주 무학1길 24

 

 

 

 

충청남도

허창구 대장간 : 041-545-6075  아산시 온양1동 16-28

홍성대장간 : 041-632-3272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386-2

예당철공(대장간) : 041-335-7306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329-19

대한대장간: 042-284-9284  대전 동구 원동 107-55

용신대장간: 대전 동구 인동 43-2 이호일

한밭대장간: 대전 유성구 용계동 산47-8 

연산대장간: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399-3

아성대장간: 서천군 한산면 충절로1173번길 21-1

대휘철공소대장간: 서산시 율지9로 8

오송대장간: 연기군 서면 월하리

 

 

 

 

전라북도

한일민속대장간 : 063-283-6231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완산동2가 128-4

광명대장간:  063-284-3913   전주시 완산구 서완산동2가 126-1     

이리대장간 : 063-852-7531   전라북도 익산시 평화동 111-1

송기대장간 : 063-263-4040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 572-3

정읍대장간 : 063-537-0605   전라북도 정읍시 시기동 409

남원대장간: 남원시 주천면 송치리 변재선

태성대장간: 남원시 금지면 요천로 406-1

우리대장간: 무주군 무주읍 장터로2

장수대장간: 장수군 장수읍 오일장

 

 

 

 

전라남도

진남대장간 : 061-642-7333   전라남도 여수시 광무동 918-8

신광철공소: 광주 광산구 송정동 5일장 인근 

신월대장간철물: 장흥군 장흥읍 토요시장1길 49  

구례대장간: 구례읍 오일장

 

 

 

 

경상북도

정일대장간철물 : 054-748-6108

월성 대장간 : 경북 영천시 054-334-4568  

영주대장간 :  054-631-5754 경북 영주시 구성로 197

영천대장간: 대구 중구 태평로89

남경대장간: 대구 중구 태평로 103

 

 

 

 

경상남도

대장간: 055-584-1129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 470-2

삼거리대장간 : 055-742-0748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 759

삼성공작소: 이평갑선생 통영  강구안 문화마당 건너편 뒤 골목 안쪽 시민탕 인근

언양대장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남부리 124-2

울산성남대장간: 울산 울주군 언양읍 남부리

신광대장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동

꼴통대장간: 부산 사상구 감전동 949-11

고령대장간: 고령군 대가야읍 시장3길 29

건천대장간: 경주시 건천읍 건천시장1길 12-10

월성대장간: 영천시 강남길 44-1

서부시장 대장간: 진주 서부시장

 

 

 

 

제주도

원일대장간 : 010-2714-0400, 자택 : 064-742-0440 한림읍 한림오일장

거로민속대장간: 제주시 화북이동 3090-1

제주전통대장간: 제주시 서사로185-1  064-753-0371 / 010-3639-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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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이라 하면 온주温州 밀감을 가리키는데, 메이지 무렵까지 "밀감"이라 하면 소밀감小蜜柑을 가리켰습니다. 이 소밀감은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온주 밀감도 소밀감도 모두 똑같은 '밀감'을 부르는 이름인데,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있어 적어 봅니다. 먼저, 소밀감은 정식으로는 기주紀州 밀감이라 부르고 학명도 Citrus kinokuni라고 합니다만,  여기에서는 소밀감이라 부르겠습니다.

 

 

밀감은 소밀감

 

에도 시대 초기 무렵, 와카야마의 상인 키노쿠니야 분자에몬紀伊国屋文이 폭풍우를 무릅쓰고 배로 밀감을 에도로 옮겨 에도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폭풍 때문에 운송선이 움직이지 못해 에도에서는 대장장이의 신을 기리는 "풀무 마츠리"에 바칠 귤이 부족하여 가격이 폭등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카미가타上方에서는 에도로 보낼 밀감 화물이 정체되어 시중에 넘쳐 값을 후려 때려 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옮기던 귤이 소밀감으로, 지금의 온주 밀감이 아닙니다.  소밀감은 정월의 공물로 쓰는, 잎이 붙어 있는 작은 밀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씨가 있고, 단맛이 나는 작은 밀감입니다. 크기는 30g 정도, 온주 밀감의 1/4 정도입니다. 혼本 밀감, 신眞 밀감, 3월三月 밀감, 기노쿠니紀の国 밀감, 야츠시로八代 밀감, 사쿠라지마桜島 밀감 등도 모두 소밀감입니다.   

 

소밀감 나무(이마바리시今治市 오미시마大三島)

 

 

온주 밀감은 이부인李夫人

밀감이 소밀감이라면 온주 밀감은 무엇이라 불렀을까 하면, 이것은 이부인이라는 왠지 요염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왜 중국 여성의 이름일지 신경쓰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상세한 기술은 없어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부인이라 하면 고대 중국의 한무제가 사랑했던 여성에 그 이름이 있고, 백거이의 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절세의 미녀였던 것 같습니다. 온주 밀감이 뛰어나게 좋은 성품을 지녀서 붙여진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작물에 여성의 이름을 붙인 건 귤에 상수부인이 있고, 밀감에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있듯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닙니다.

 

 

이부인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부인(=온주 밀감)이란 이름 때문에 중국에서 전해진 과일 같지만, 사실은 일본 원산 감귤입니다. 가고시마현 이즈미군出水郡에 있는 나가시마長島라는 야마쿠사天草 섬에 면한 섬이 발상지로, 씨앗에서 태어난 변이종으로 생각됩니다.  나가시마에서는 온주 밀감을 이부인이라 부르고, 에히메愛媛현에서도 온주 밀감이 최초로 다치마立間에 들어왔을 때 역시 이부인이라 불렀습니다.

 

 

귤 연구소에 있는 이부인(온주 밀감) 기념비와 다치마에 전해진 원목의 후계 나무(오른쪽 구석)

  

이밖에 이부인李婦人, 쥬쿠진じゅくじん, 용신 등의 호칭도 있고, 오쿠라 나가츠네大蔵永常가 저술한 <広益国産考>(1859)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이부인이란, 서쪽 지방에서 씨 없는 밀감이라 부르는 것과 약간의 차이도 없는데, 씨 없는 밀감 쪽이 이부인보다 맛이 좋고 전혀 씨가 없다. 이부인도 맛있지만, 약간 신맛이 있고, 씨가 하나나 둘 들어 있다."

 

씨 없는 밀감은 이부인에서 생긴 것처럼 생각되는데, 소밀감에도 씨 없는 게 있어 어느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부인, 즉 온주 밀감은 영어로 사츠마 만다린(satsuma mandarin)이라 부릅니다. 메이지 9년(1876), 미국 플로리다로 도입되었을 때 묘목이 원산지인 가고시마현에서 운반되었기 때문에 사츠마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또한 그 뒤 묘목의 대부분이 오와리尾張의 종묘 산지에서 미국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오와리 사츠마(Owari satsuma)라고도 불렀습니다. (이와마사 마사오 씨)   

 

 

이부인의 탄생

<규원귤보桂園橘譜>(1828)에는 "치쿠고筑後 야나가와柳川에 귤이 있는데, 타이코우太閤(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출병시 야나가와 후柳川候가 가져온 것으로, 이부인 귤이라 한다."라고 나옵니다.  또, <본초도보本草図譜>(1830)에도 똑같은 기술이 있어, 조선에서 가져왔는지 어떤지는 별개로 치쿠고에는 임진왜란이 있었던 1600년 전후에 온주 밀감이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1936년 가고시마현 이즈미군, 나가시마의 타카노스鷹巣에서 발견된 이부인의 고목은 발견 당시 나무 나이 300년 정도로, 그 내력은 1600년 무렵. 게다가 고목은 접목으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 부모 나무는 앞서 야나가와에 전래된 시기보다 오래되어, 야나가와의 이부인 귤은 나가시마에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가시마는 무역선이 왕래하던 야츠시로해八代海에 면한 섬으로 전에는 아마쿠사 영역이었던 나카지마仲島의 것. 히고肥後와 히젠肥前에서는 온주 밀감을 "오오나카지마大仲島"나 "나카지마中島"라고도 부르고 있었다고 하여(이와마사 마사오 씨), 이부인은 전국시대인 1500년대에는 재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후쿠오카번福岡藩의 미야자키 야스사다宮崎安貞가  저술한 <농업전서農業全書>(1697)에는 귤橘과 감柑이란 이름은 있어도 이부인이란 이름은 없습니다. 메이지 무렵까지 귤은 주로 선물이나 증답용 물품으로서, 맛있는 과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씨가 없거나 적은 것이 선호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부인이 확산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보입니다. 

 

 

온주 밀감으로 개명하다

이부인이 일본 원산의 귤인데 왜 온주 밀감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온주라고 하면 중국 저장성 원저우부温州府를 가리킵니다. 남송의 한언직韓彦直이 저술한 <귤록橘録>(1178)에는 "감귤은 소주蘇州, 태주台州에서 나지 않는다. 서쪽으로는 형주荊州에서 나오고, 남쪽으로는 민閩・광広・무주撫州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두 온주의 것이 으뜸으로 그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밀감은 온주부의 것을 최상이라 칭찬했습니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図絵>(1712)에서도 "온주 귤은 밀감이다. 온주란 절강의 남쪽에 있어 감귤의 명산지이다"라 하고, <규원귤보>(1848)에서도 감귤의 종류로 온주귤을 들며 그 맛좋음이 밀감 중에서 뛰어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주라는 이름은 맛있는 밀감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메이지가 되어 국가에서는 통계상 이름이 제각각인 귤을 정리해야 했지요. 소밀감을 보통 밀감으로 하고, 이부인을 온주 밀감으로 했습니다. 전고에 뛰어난 사람이 있어 온주부의 밀감에 뒤지지 않는 맛이기 때문에 온주 밀감이라 이름을 붙였겠지만, 온주부에서 전해진 밀감은 아닌 것입니다.

 

온주 밀감

 

 

소밀감의 전래

그럼, 소밀감으로 이야기를 돌려 그 발상을 더듬어 봅시다.

 

소밀감에는 게이코景行 천황이 구마모토로 행차했을 때 씨앗을 하사해 오아마小天 마을 미즈시마水島에 심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게이코 천황의 1대 전에 해당하는 스이닌垂仁 천황의 명을 받은 다지마모리田道間守라는 사람이  불로불사의 나라에서 토키지쿠노카구노미非時香菓를 구하러 떠나서 10년의 세월이 걸려 가지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토키지쿠노카구노미는 겨울에도 과실이 달리는 감귤 또는 엄동설한에도 바로 옆에 있는 과실이란 의미일까요? 돌아온 다지마모리는 바로 전에 스이닌 천황이 붕어한 것을 알고 황제의 신령에 의지해 무사히 돌아왔는데 만날 수 없게 되자 비탄에 빠져 자살을 합니다. 다음 황제인 게이코 천황은 다지마모리의 충성을 어여삐 여겨 스이닌 천황의 능묘 옆에 매장하도록 명했다 하고, 가지고 돌아온 토키지쿠노카구노미가 귤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지마모리 초상화(귤 연구소 소장)

 

 

귤은 일본 원산의 감귤이고, 일부러 다지마모리가 해외까지 찾으러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귤을 감귤류의 통칭이라 하면, 토키지쿠노카구노미는 일본으로 전래된 시기를 알 수 없는 소밀감이나 등자(橙)가 아니었을까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전승처럼 게이코 천황이 다지마모리가 귀국한 뒤 소밀감의 씨를 구마모토에 심도록 했다면, 토키지쿠노카구노미가 소밀감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소밀감이 그 당시에 전해졌다면, 그 달콤한 맛 때문에 각지에서 재배가 확산되었을 테고 쿠카이空海가 812년에 사가嵯峨 천황에게 헌상한 과실은 감자柑子가 아니라 소밀감이어도 괜찮았을 터. 소밀감 설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 감자는 일본에 오래전부터 있던 추위에 강한 감귤로서 과실은 짙은 황색의 얇은 껍질, 크기는 40g 정도의 작은 열매이다. 쇼무聖武 천황 시대(725)에 당나라에서 전해진 것이 <속일본서기続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토키지쿠노카구노미에는 그밖에 등자나 귤이었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근거가 없습니다. 덧붙여서, 소밀감이 심어진 장소도 구마모투현 이외에 다지마모리를 신사에 신으로 모시는 와카야마현和歌山県의 키츠모토橘本 신사와 사가현佐賀県에도 전승이 있는데 토키지쿠노카구노미의 씨를 하사했던 게이코 천황이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日本武尊의 아버지라는 신화에 가까운 시대의 이야기인 만큼 전승을 뒷받침할 방법은 없을 겁니다.

 

 

에히메의 소밀감 점묘点描

에히메의 소밀감에 대해서는 오미시마大三島에 있는 오야마즈미大山祇 신사의 大祝오호오리 직職인 미시마三島 씨가 음력 11월에 소밀감을 영주의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에게 헌상해 미치나오에게서 "밀감(みつかん) 매우 매우 경사스럽다"라고 감사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밀감은 "みつかん"이라고 부르고 그 가운데 "つ"가 생략되어 "みかん"이 되는데, 미시마 씨에게는 또 한 통의 고노 미치나오에게 온 감사 편지가 있으니 거기에는 "みかん"이라 적혀 있습니다. 이 문서는 마침 "みつかん"에서 "みかん"으로 변하는 과도기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밀감은 환자의 입에 맞는 귀중한 과실인 듯하여, "아이들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는데 고맙습니다"라고 나옵니다. 문서가 작성된 시대는 무로마치 시대 후기인 1540년 무렵이 아닐까 합니다만, 특별한 과일이라 하는 만큼 소밀감이 재배되기 시작한지 그다지 긴 세월이 지나지 않은 듯합니다.

 

에히메현 이마바리시今治市 카미우라쵸上浦町의 소밀감 
위 설명의 소밀감

 

세토우치瀬戸内의 오미지마나 오시마大島에는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기 하는 소밀감의 고목이 남아 있어, 항해가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시대에 세토우치의 섬들을 거점으로 한 왜구와 수군이 가지고 돌아갔거나, 교역선이 순풍을 기다리며 들르는 등을 통해 소밀감 등의 감귤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 때문에 도서 지역에는 자연히 교배되어 생긴 감귤이 많고,  안세이감安政柑이나 핫사쿠八朔 등도 그 종류입니다. 인노시마因島에 들어간 여러  종류가 자연교잡으로 생긴 것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핫사쿠의 실물

 

미시마 씨의 문서로부터 50년 정도 뒤인 키타우와군北宇和郡 미마三間 지방에서 저술된 <친민감월집親民鑑月集>(1564)에는 감귤의 종류로 "감자柑子, 구년보九年甫, 밀감樒柑, 유柚, 등橙" 등 8종을 들고, 그밖에도 종류가 많다고 적혀 있습니다. 밀감은 소밀감이며, 호칭도 "미츠캉みつかん"이 아니라 "미캉みかん"으로 되어 있습니다. 

 

"감귤류는 무가와 사원 등에서 심어도 좋지만, 농가는 유자와 등자 외에는 재배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다만, 판매하여 팔린다면 이야기는 다르다"라고도 합니다. 유자와 등자는 식초용으로 삼고, 집 주변에 자가용으로 심어도 괜찮았던 겁니다. 이외의 감귤은 유통하면 상품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에도 시대에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기타군喜多郡이나 이요군伊予郡의 일부를 영역으로 한 오즈大洲 번주에게 촌장(庄屋)들이 소밀감을 헌상했습니다. 시모카라카와下唐川나 시모스카이下須戒, 마츠오松尾, 지세이知清가 있던 산간 지역에서 소밀감이 헌상된 것입니다. 밀감 재배는 해안선의 따뜻한 지역이 적합한데, 내륙부에서도 남향의 해가 잘 드는 좋은 토지를 선택해 재배했던 것이죠.

 

메이지 21년(1888)에 작성된 에히메현의 감귤 통계에서는 현 내의 밀감 생산량 3504섬 가운데 기타우와군北宇和郡이 1930섬, 기타군이 1097섬으로 두 군에서 80% 이상을 차지합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오스 번 영역의 기타군은 현 내에서도 유수의 소밀감 산지였던 겁니다.

 

에도 시대의 백과사전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図絵>(1712)에는 밀감의 산지로 "기주紀州 아리타有田, 살주薩州 사쿠리지마桜島, 예주豫州 마츠야마松山, 준주駿州, 히고肥後 야츠시로八代를 들고, 예주 마츠야마 산물은 준주 산물보다 맛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에히메의 밀감이 유명해진 건 메이지 17년(1884)에 다치마立間의 이부인(온주 밀감)이 도쿄의 전국 중요 물산 공진회에서 1등상을 받고, 이듬해 1885년에도 대일본 농회의 전국 농산물 품평회에서 1등상을 받아 호평을 받기 이전 이미 에도 시대부터 맛있는 밀감 산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소밀감은 구마모토부터 가고시마, 오이타, 에히메, 히로시마, 와카야마, 시즈오카로 항로를 따라 확산되고, 게다가 대부분이 현재의 온주 밀감    산지와 겹쳐 있어 소밀감의 역사가 현재를 떠받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역사에 등장한 소밀감

메이지 중반 무렵까지 소밀감은 밀감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도대체 밀감이란 단어는 언제쯤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요? 꿀에 절인 듯한 달콤한 것으로부터 밀감이라 부른 것 같습니다만, 밀귤蜜橘이나 밀감樒柑 등 다양한 글자가 충당되어 최초로 사료에 나타난 것은 1418년, 고스코우잉後崇光院이 상황의 거처로 밀감 2홉을 바친 기술입니다. 이어지는 사료에는 "병중인 무로마치室町 도노殿가 밀감을 바라시어 조우코우잉蔵光院의 밀감을 100개 받아 헌상하고, 부족분은 감자柑子를 더했다."라고 해, 밀감은 무로마치 도노(장군)가 바라는 귀중한 과일이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대명 무역을 활발히 하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의 다음 장군 시대이고, 소밀감 같은 달달한 과실이 재배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뒤 얼마 동안 밀감이란 글자는 사료에서 사라지고, 앞에 기술한 미지마 씨의 문서가 쓰여진 1540년 무럽까지 공백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미지마 문서의 다음, 즉 1500년대 중기부터 빈번하게 사료에 등장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소밀감이 밀감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쇠퇴하고, 이요국伊予国에서는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1509년 영주)가 활약하며, 인노시마因島와 노지마能島, 쿠루시마来島의 무라카미村上 씨 등의 미지마 수군이 큐슈와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대와 부합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500년 이상 전이라 생각됩니다. .

 

 

 

참고자료

安部熊之輔(1904): 日本の蜜柑. 明治農学全集 果樹

愛媛県果樹園芸史(1968): 愛媛県青果農業協同組合連合会

村上節太郎(1967): 柑橘栽培地域の研究
岩政正男
(1979): 作物品種名雑考・柑橘. 農業技術 34(9)409-413 

古事類苑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 大

蔵永常(1859): 広益国産考.日本農学全集,()農山漁村文化協会

宮崎安貞(1697): 農業全書卷六~巻十一日本農学全集, ()農山漁村文化協会 郷土誌資料第 1 集の 1 産業編 吉田町立間公民館

菅 菊太郎(大正 4 ): 伊予における古き蜜柑の栽培地伊予史談第 1  4 

大洲藩領史料要録村々庄屋旧家献上物覚:伊予史談会
親民鑑月集 和名類聚楽抄 和漢三才図会 魏志倭人伝 古事記 日本書紀

 

 

 

 

 

 

원문 https://www.pref.ehime.jp/h35118/1707/siteas/11_chishiki/documents/kankiturekisi.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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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단체에 대한 중요한 문제 제기가 나왔다. 공론화되어 잘 토의되면 좋겠다.

 

http://m.agrine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2960



필자는 얼마 전 SNS에 어느 농민단체를 비판한 적이 있다. 다 아시겠지만 비판은 비난과 달라서 개선과 발전을 기대하면서 보완과 개선할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농민단체는 농민들의 대중조직으로 「농민대중 속에 뿌리내리고 자발적인 농민의 참여 속에 전체 농민의 이익을 위해 모든 사업을 실천함으로써 농민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생동하는 조직」을 지향하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특정 정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함으로서 그 정당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농민들과 벽을 만들고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또 특정 정치이념 혹은 편중된 노선을 운동방향으로 설정하여 농민들의 당장의 이해를 대변하는데 소홀히 하고 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북한의 농업을 지원하여 통일의 시간을 앞당기자며 북한에 농기계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농기계는 결국 북한에 보내지도 못하고 임진각에 세워져 녹슬고 있다.(지금은 파주의 옛 미군부대 부지로 옮겼다)

이 단체는 최근 농민수당이냐, 농민기본소득이냐라는 농민들의 기본소득을 지원하는 제도를 가지고도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다. 농민수당이나 농민기본소득이나 다 현재의 어려운 농업 ·농촌에 최소한의 지원책을 마련해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체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농민수당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자기 역할에 대한 정당한 보상(농민기본권)을 요구하는 반면, 기본소득은 소득감소로 신음하는 농민에게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일부 자금으로 시혜를 베푸는 정책으로 철학적 출발점이 다르다고 주장하며 농민기본소득이란 제도는 사회적 논란과 제도 수립에 장애가 되니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필자는 농민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부, 제정당, 다른 농민단체들과 연대 협력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이에 대해 크게 세 가지의 반응이 댓글로 있었다. 하나는 현재 이 단체의 지도부 혹은 노선에 적극 찬동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중단하라’는 반응이었다. 또 하나의 반응은 이 단체의 초기 멤버 혹은 현장 활동가들로부터 나왔는데 ‘적절한 시기에 꼭 필요한 지적’이라는 반응이다. 마지막으로 농업계 외곽에 있는 분들이 ‘공론화를 통해서 자정과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위 글을 읽어보시면 대략 어떤 단체에 대한 비판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데 이 단체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농민단체들이 농민들을 위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을까?

문재인 정부 들어서 농정의 새로운 변화를 다짐하고 ‘농업은 대통령이 직접 챙기겠다’는 공약을 했지만 임기의 절반이 지나도록 변화와 ‘직접’은 체감하기 어렵다. 농정의 수장이 5개월이나 비기도 하고 우리 농업을 경쟁력 구도에서 겨우 지켜온 ‘개도국 지위’마저 포기한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엄중히 대처하고 있는가?

농민단체의 지도부는  대규모 쌀 전업농이나 축산농 혹은 시설농업을 하는 대농들이 주로 참여하고 있으니 중소농들의 문제는 관심에서 멀어지고 대농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는 비판도 나온다. 농업소득이 떨어져도, 농민이 급격히 줄어들어도, 국민의 먹을거리를  우리 농업이 제대로 공급하지 못해도 농민단체들은 별 다른 대응을 하지 않는다.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에 우리나라 대표 농민단체가 위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농업과 농민들의 절박함을 생각한다면 굳이 회장이 아니라도 단체의 위임을 받아 단체와 농민들의 이익을 위해 임원 중의 한명을 보내면 될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농촌 마을에서 마을의 대소사를 감당하던 청장년들이 점차 줄어들어 마을이 노쇠화하는 것처럼 농민단체도 노쇠화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농업과 농촌을 살리기 위해 농촌 현장에서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지속가능한 농업 농촌을 만들기 위해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플랜을 준비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회원 없는 단체, 농민 없는 농민단체로 전락할 것이다. 올해 농민의 날에는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참석하지 않고 중앙언론에 제대로 보도도 되지 않아 쇠멸하는 농업의 상황을 얘기해 주는 것 같다.

혹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필자는 앞에서 비판한 단체의 지역 간부라는 걸 밝힌다. 우리 연구소는 해가 가기 전에 농민단체들의 성과와 과제를 토론하는 심포지엄을 통해 농민단체들의 문제를 공론화할 예정이다.이 땅에 민간자주 농민단체가 만들어진지 30여 년이 되었다. 초심을 되찾아 우리 농업과 농촌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책임지는 농민들의 대표단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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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닭'이라 하면 품종은 상관없이 그냥 교외의 가든에서 풀어서 키우며 다 자란 닭을 가리키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정부에서 인정한 토종닭 품종이 38종, 그걸 기반으로 개량한 닭의 품종까지 합하면 100종 정도가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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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중요한 통계 자료가 발표되었구나.




한국은 곡물 자급률도 낮은데 농약과 비료의 사용량은 세계 최고 수준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농약과 비료를 오남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서둘러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각에서 글리포세이트를 사용하는 유전자변형 농산물의 수입량 증가와 한국인의 각종 질병 발생률의 상승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떠드는데, 이렇게나 농약을 미국보다 많이 쓰니 그거 아니더라도 다들 병이 나서 죽겠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난 그쪽 주장은 잘못된 근거에 기반하는 사상누각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한국의 농업은 미국 농업을 롤모델로 하고 있는 것 같다. 농업보조금 비율만 보면 그러하다. 그리고 모든 걸 시장에 맡기려 하는 관계기관의 모습들을 보면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농업소득을 올리겠다고 자랑스럽게 떠들지 말고 농가소득을 올려 농촌에서 사는 사람들이 소중한 자연을 지켜 나아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낫지 않을까. 반대하는 도시민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설득하고 그 혜택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해라. 지금도 주말이면 자연이 그리워 어디든 떠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어떤 방향으로 전환을 하는 게 좋을지는 각자 판단하여 함께 논의할 문제이겠다. 무엇이든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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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활용했다는 다양한 절구를 보자.

한국과 유사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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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의 유전체 정보 전체를 해독한 결과, 

인삼의 원산지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이라는 게 밝혀졌다고 한다.

당연한 사실이겠거니 해서 큰 감흥은 없는데, 원산지의 범위가 엄청 넓어서 당혹스럽긴 하다.


 

http://news.mt.co.kr/mtview.php?no=2018052510082683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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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에서 상당히 재밌고 흥미로운 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농촌진흥청에서는 1971년부터 2013년까지 10년을 주기로 계속해서 전국의 논에서 발생하는 잡초들을 조사해 왔다고 합니다. '풀과의 전쟁'이라는 속설처럼 적을 알아야 전쟁에서 이긴다는 맥락에서, 어떤 풀이 자라는지 알아야 그 풀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기에 조사했다고 합니다. 오늘 그 결과를 발표해서 눈길을 끕니다.


먼저 1970년대에는 마디꽃, 쇠털골, 물달개비 같이 한해살이 풀이 주를 이루다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피를 방제하는 제초제가 확산되며 논에서 피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대신 물달개비, 올미, 벗풀 같은 잎이 넓은 풀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하네요.



마디꽃


쇠털골


물달개비


올미



이런 양상은 1990년대가 되면서 또 바뀝니다. 1990년대에는 한해살이와 여러해살이 풀을 한방에 처리할 수 있는 제초제가 널리 사용되면서, 한해살이 풀은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올방개, 올미, 벗풀 같은 여러해살이 풀이 끈질기게 살아남았다는 보고입니다.



올방개


벗풀



그러던 것이 2000년대에는 슬슬 제초제에 약한 마디꽃이나 쇠털골은 순위 밖으로 밀려나고, 제초제에 내성이 생긴 물달개비가 가장 많이 발생하고 다음으로는 올방개와 피, 벗풀이 뒤를 이었다는데요. 재미난 건 가장 최근인 2013년의 조사결과입니다. 약 4년 전 행한 조사에 의하면, 제초제에 확실히 내성이 생긴 피와 물달개비가 논에서 자라는 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올방개와 올챙이고랭이, 벗풀 순서대로 많이 발견되었답니다. 최근 논을 구경하면 피가 너무 많이 자란 논들이 많아서, '저 논은 쌀값이 얼마 안 되니까 농사에 관심이 없어 피를 방치했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피가 이제는 제초제를 쳐도 죽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피를 확실히 죽일 수 있는 그런 제초제가 개발되겠지요? 농약 말고 다른 방법으로 풀을 없앨 수도 있던데 그런 방식은 도입하지 않으려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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