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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제도의 포도밭 경관.

 

화산재로 덮힌 곳에서 포도나무를 심으려면 흙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화산재를 걷어내 움푹한 구덩이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대서양의 강한 바닷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그 둘레에는 마치 제주도처럼 돌담을 쌓는다. 

 

이 모두가 자연에 적응하며 형성된 독특한 경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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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날이 흐리고 부슬비까지 흩뿌리고 있다. 참 다행이지 않은가! 돌아가는 날 날이 궂으니... 그 전날에 그랬다면 하루를 공쳤을 텐데 말이다. 지난 25일 동안 토종 수집을 다니면서 날씨가 많이 도와주었다. 겨울 날씨 너무 추울 수도 있고 변덕스러울 수도 있는데 그런 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난 날들을 돌아보니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마지막이기도 하고, 날도 궂고, 더 다닐 곳도 있지 않아서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제주공항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로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단지무를 재배하고 있다는 분을 찾아가 연락하여 결국 세 번째 만에 만났다. 그것도 한참을 기다려서 간신히 만난 것이라 참 어려웠다. 직접 가서 단지무로 추정되는 것을 보니, 꼭 단지무는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봐오던 그것과 비슷하여 조금은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가장 단지무다운 것을 몇 개 뽑아 챙겨놓았다.

 

이후에는 민속박물관에 들렀다. 이곳 관장을 하시는 분은 이 박물관을 오로지 본인 스스로의 힘으로만 세우셨다고 한다. 그 열정과 노력이 대단한 분이셨는데 너무 외로워 보였다. 이곳에서 제주와 관련된 이런저런 책을 몇 권 사서 왔다.

 

제주 민속박물관에서 본 관음사 기와 조각.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방문했을 당시에 들렀다는 관음사를 이번에는 가지 못했다. 다음을 기약하며 그 흔적만 살펴본다.

 

 

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김정임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오면서 본인이 수집한 보리와 피마자를 가지고 오셨다. 이로써 11월 말부터 12월 31일까지 강화도와 교동도, 석모도, 울릉도 및 제주도를 돌면서 수집한 토종 종자는 511번까지 매겨졌다. 이러한 토종을 수집하러 다니며 배우고 느낀 점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가 어렵다. 이번 경험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리라! 아, 집에 있는 아내와 개새끼가 보고 싶은 시간이다.

 

 

뱀다리. 이 날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뒤 몇 달 동안 수집한 종자를 다시 분류, 선별하고, 싹 꺼내서 사진을 찍고 정리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또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각 기관에 송부하는 일부터 예산을 결산하는 일까지... 그렇게 애를 써서 이 모든 성과는 농촌진흥청 유전자원센터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잠시 쉬며 새로 빛을 볼 날을 기다리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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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30일, 날씨는 맑지만 바람이 강해 춥다. 먼저 어제 날이 저물어 보지 못한 성읍 2리쪽을 돌아보기로 했다. 여기도 중산간이니 기대할 만하다. 차를 타고 오르는 길은 좋은 드라이브 코스다. 이 길도 곧 확장공사를 한다고 하니, 이런 경치를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참 좋은데...

 

성읍 2리는 올라가보니 목장 지대였다. 농사는 그리 많이 짓지 않고 말을 키우는 곳이 많았다. 경치가 좋아서 그런지 별장 식으로 지은 듯한 집도 꽤 보였다. 그래도 차에서 내려 이 마을을 한참 돌다가 다시 표선 쪽으로 내려갔다. 다음 목적지는 제주민속촌마을을 가보기로 했다. 관광객들이 아침부터 참 많이 왔다.   

제주의 전통 뗏목, 테우. 보기에는 위험해 보이지만, 이런 배가 오히려 뒤집히는 일이 없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물이 귀한 제주에서는 빗물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이렇게 받아서 썼다.

 

 

눌. 뭍에서 낟가리라 부르는 것과 같다. 바람이 많은 곳답게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돌로 매달아 놓았다. 

 

 

제주의 옛 민가. 옥수수를 주루룩 달아놓았는데, 제주에서 옥수수를 이렇게 많이 심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조 같은 씨앗을 심은 뒤에는 이 섬피를 끌고 다니며 흙으로 덮었다.

 

제주의 장독대. 제주의 장독은 그 색도 독특하다. 흙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제주의 부엌. 역시 굴뚝이 따로 없다. 벽은 그을음으로 검게 그을렸다. 메주를 저렇게 달아놓으면 그건 괜찮았을려나? 

 

 

세간이 참 단촐하다는 느낌이 들어 한 장 찍었다.  

 

 

아이들이 돌릴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맷돌. 

 

 

김칫독을 묻어 놓은 곳도 아닐 테고,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다.

 

 

그 옛날 라이터나 성냥이 없을 때 썼다는 불씨를 보관하는 도구.

 

 

이것도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죽은자의 집, 상여. 

 

 

벼를 훑어서 털던 그네. 

 

제주의 보습. 밭에 돌이 많아서 그런가 뭍의 것보다 좁다. 

 

남태. 씨앗을 심고 흙을 다지는 용도로 쓰던 것.

 

 

표선 민속촌을 구경하고 세화1리 쪽으로 향했다. 이곳은 지난 여름 제주에서 토종 조사 사업을 하면서 만났던 고옥화(76) 할머니께서 살고 계신다 한다. 일단 집 앞 담장에 있던 나팔꽃의 씨앗을 채집했다. 고옥화 할머니께는 제주의 옛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아래는 그 내용이다.

지금은 피를 가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는데, 옛날에는 피쌀이라 하여 송당이나 성읍에서 많이 했다. 피쌀은 3번을 방아 찧어서 체로 고르는데, 맛이 좋다. 포근하니 입에 넣으면 보드라운데, 먹고 나면 배가 일찍 꺼진다. '송당 목장'에서 아직도 피를 가는 것 같다. 습기가 많은 데는 피, 어느 정도 있는 데는 산듸, 없는 데는 조나 고구마를 심었다. 여름에는 한 달에 한 번 돗거름(돼지거름)을 냈다. 보리에 돗거름을 섞어서 뿌리고, 말이나 소로 밟는다. 사람이 있냐 없냐, 거름이 있냐 없냐에 따라 씨를 심는 법이 달라졌다. 거름이 없으면 그냥 쫙쫙 뿌리고, 있으면 하나로 섞어서 들고 뿌렸다.

그 아들 분께서 같이 자리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42세인데도 어렸을 적에 하루 두 끼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는데도 그랬다. 제사 때나 쌀밥을 먹을 정도였고, 겨울에는 보리범벅이나 메밀범벅을 자주 먹었다. 좋은 메밀쌀은 제사 때 쓰고, 후진 것으로 두 번 세 번 갈아서 고구마범벅에 넣는데, 그러면 색이 거무티티해진다. 고구마절간은 뱃때기라고 불렀다.

따뜻한 커피를 얻어 마시며 이야기를 듣고 인사를 드리고 나와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냥 기사식당 같은 곳이었는데 다른 어느 곳보다 인심도 후하고 맛있으며 값도 쌌다. 나중에 제주를 다시 찾으면 꼭 다시 들르고 싶은 곳이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계속 표선면 일대를 누비고 다녔으나 별로 소득은 없었다. 아니 전혀 없다. 그래서 아까 들은 송당 목장으로 피를 찾으러 가기로 했다. 송당 목장을 지도에서 찾아 산으로 올랐다. 조금 헤매다가 송당 목장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한다.

 

송당 목장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

 

목장 사무실을 찾아가 관계자 분을 만났다. 피는 사료로 쓰려고 심고 있는데, 현재 반장님이 집에 씨를 보관하고 있어 이곳에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찾아오기는 어렵고 하여, 우리가 피를 찾는 목적을 말씀드리고 주소와 발송비 명목으로 비용을 드리고 왔다. 이 피는 이후 집으로 돌아갔을 때  틀림없이 배달되었다.

이제 어느덧 마지막 날이 되었다. 내일은 비행기 시간도 있고 하여 여기저기 많이 다니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한 달에 걸친 기간이 마지막이라니 지난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참 시간이 빠르기도 하다.

 

 송당 목장은 전체 넓이가 여의도의 몇 배나 된다고 한다. 이 드넓은 초지에서 말과 소가 다니며 한가로이 노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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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리다. 하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는다.

아침 매표소가 열기 전에 겸사 겸사 관광명소를 들른다. 입장료를 안 내도 되는 것은 물론, 오늘 돌아다녀야 하는 시간을 뺏지도 않을 만큼만 쬐끔 시간을 낸다. 정말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하시다. 어지간하면 다들 이런 곳에 와서는 놀러다닐 것 같은데 말이다. 하하

아무튼 그 짤막한 시간 동안 중문에서 가까운 천지연인가 천제연인가 하는 폭포를 구경했다. 어디인지도 확인 못하고 쓱...

 

 

다음은 주상절리가 있는 곳으로 차를 타고 가서 다시 한 번 쓱...

 

 

이거 무슨 수학 시간도 아니고 돌이, 돌이, 육각형이다. 하하. 이 무슨 일이...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건너편을 보니 거기도 돌이 육각형이 삐죽 솟았다. 바다 색은 기가 막히네. 내가 본 바다 가운데 두 번째다. 첫 번째는 96년에 강릉에서 부산으로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본 바다 색깔. 그건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디 지중해를 가서 보면 달라질까나?

 

 

중문을 들른 뒤, 서귀포 5일장에서 왕콩(경북 영주)과 노랑갯나물(노란빛이 남)을 구입했다. 이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참을 돌다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런 걸 구입했다. 다음은 저 위에 돈네코인지 섭코인지로 올라갔다. 오르는 길에 집도 없고 한참 헤매긴 했다.

 

 

돈네코로 오르던 길에 바라본 제주도 남단. 군데 군데 허옇게 보이는 것은, 놀라지 마시라! 눈이 아니라 비닐하우스다! 비닐의 물결이 펼쳐진 모습.

 

상법호촌이라 지도에 표기된 곳으로 올랐는데 몇 집이 없다. 제주는 지도에 표기된 것과 실제 있는 집과 차이가 많다. 아예 사라진 마을도 많은 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여기는 사람이 좀 사는 듯하여 다행이다. 일단 차를 세우고 돌아다니는데 무가 심상치 않다. 다른 곳에서 본 것과 달리 엄청 동그랗고 크다. 이건 단지무?

혹시나 하여 주인이 누구인지 찾았으나, 주인은 없고. 일단 많은 것 가운데 두 개만 뽑고 주인집으로 생각되는 곳에 편지와 선물을 남겼다. 그랬더니 나중에 전화가 왔다. 확실히 현물을 주고 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많다. 아무것도 주지 않고 그냥 오면 도둑질한 것 같아 영 찝찝하지만, 뭔가 보답을 주고 오면 그렇지 않다.

 

 

돈네코에서 내려와서 여기저기 돌아봤지만 다들 감귤만 있다. 이럴 바에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한 번 인도할까?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찾았던 마을로 이끌었다. 어쨌든 가는 길이고 하니 그렇게 간다한들 크게 시간을 뺏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찾은 보목리. 볼레낭이란 제주말의 나무가 많아 이런 이름이 정해졌다고 한다. 안완식 박사님께서 확실히 해주시기 위하여 아는 후배 가운데 제주 출신에게 전화하여 볼레낭이 뭐냐고 물으니, 보리수 나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보리수 나무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여기 제주도는 날씨가 따뜻하여 축축 늘어지는 나무가 주종이라고 알려주셨다.

 

 

70년 전에도 서 있었을지 모르는 팽나무. 여기는 보목리다. 이 마을을 좀 돌아다니다 할머니들을 만났는데, 토종은 둘째치고 다른 건 물어보기도 힘들어 관두었다. 다음에 찾아가면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은 보목리. 일단 Keep!

그리고서는 다시 차를 타고 출발!!! 표선면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본 동백꽃. 너무 예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잘 꾸몄는데,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천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소박한 멋도 아니고, 아무튼 동백은 제주를 다니면서 안완식 박사님 덕에 참 잘 보았다. 내가 본 동백만 해도 여느 곳의 동백은 별 것 아닐 정도... 하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읍민속마을을 들렀다. 민속마을이니 뭐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돌았는데 민속 말고는 볼 것이 없었다. 똥돼지... 새를 엮어 지붕을 이은 집... 말뼈로 만들었다는 골다공증 치료제... 똥돼지 볶음이 나오는 밥... 오매기술을 기대했는데 그 집은 문을 닫아 마실 수 없었다.

 

 

똥돼지... 그래도 먹을 것도 주고 물도 주니, 그냥 전시만 한 것과는 대우가 다른 셈.

 

물이 귀한 제주는 이렇게 빗물도 활용했다. 지금 돌아다녀보니 제주는 지하수를 너무 뽑아 써서 앞으로 물 부족으로 큰일이 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다시 이 시대로 돌아가야지 뭐. 

 

 

성읍마을의 성. 이건 성이라기보다는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성이다. 성의 본연의 목적인 군사적인 방어는 하나도 없는 듯하다. 솔직히 나 같은 사람들이 달라붙으면 여기저기서 넘어갈 수 있는 정도다. 그러니 이건 목적보다 수단으로 세운 하나의 상징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주도 사람들을 이걸 통해서 눌러보자고 생각했겠지. 섬마을 사람들이 워낙 드세니 그런 권위도 필요했을지 모른다. 이런 짓을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일본놈들도 똑같이 반복했고, 그 뒤에 들어온 미군정을 업은 이승만 정권 사람들도 반복했으니... 뭍에 것들이라면 이가 갈릴 만도 하지 않는가?

 

성읍마을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다시 표선읍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 과정에서 불었던 바람, 정말 차를 흔들거리게 만드는 바람이었다. 감귤밭 사이로 난 길을 헤맨 기억, 지도에도 나오지 않아서 많이 당황했다. 마을 표시를 보고 갔건만 뜻하지 않은 폐촌, 그럴 때는 등에 땀이 쓱 흐를 정도로 같이 간 분들께 미안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이렇게 글로 푸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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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8일, 구름은 잔뜩이지만 날은 따뜻하다. 어제 질펀하게 놀았던 성락재星落齋에 잠시 들렀다. 잠시 볼일을 보러 밖에 나갔다 제주의 밤하늘에서 쏟아질 듯한 별을 보고 떠오른 것이 이 집의 이름이 되었다. 이 집의 주인 어른은 아스팔트와 관련된 큰 사업을 하고 있는 분인데, 매화에 미쳐 전국에 있는 이름난 매화는 전부 제주로 모아왔다. 오늘은 출발에 앞서 잠시 그걸 보러 온 것이다. 

 

 좋은 시설에서 건강히 자라고 있는 무수한 매화나무들. 12월 말인데 벌써 꽃망울이...

 

어떤 것은 벌써 활짝 피기까지 했다. 제주라서 가능한 일이... 

 

 

오늘은 대정읍 신평리 쪽부터 훑어 나가려 한다. 열심히, 부지런히 돌아다니지만 오늘도 별 소득은 없다. 중산간과 해안의 마을은 확실히 차이가 크다. 신평리 364번지에서 땅가지라는 것만 하나 얻었다. 그것도 주인이 자리를 비워서 대문의 명패를 살피고, 우편물을 뒤져 간신히 주소와 이름을 알아낸 것이다. 그와 함께 77번지의 김재범 씨의 집에서는 호박을 하나 얻었는데, 이 호박은 골이 없는 게 특징이다. 그 이후에는 길거리에 자라고 있던 염주와 부용, 댑싸리를 채집했다. 댑싸리는 얼마나 키가 크던지 내 키를 훌쩍 넘어 2m 이상이었다.

 

길거리에서 채집한 댑싸리. 키가 얼마나 큰지 담장 위로 삐죽 올라왔다.

 

길을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본 한 집의 창고 벽. 보통 흙만으로 벽을 치는데, 제주에서는 돌이 흔해서 그런지 돌이 박혀 있다. 

 

 제주의 돌담. 참 잘 주워다 쌓았다. 이런 일을 하는 기술자도 따로 있었다는데 다음에 만나면 재밌겠다.

 

 

이제 중산간으로 올라간다. 이번 행선지는 서광동리. 중산간으로 올라가는 만큼 뭔가 나오지 않을까 한다. 제주는 흙과 돌이 물을 잘 머금지 못하고 뱉기에 꼭 물이 있는 곳에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요즘 새로 생긴 마을이 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제주에서 마을이 있는 곳은 물과 관계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헌데 요즘 중산간에서까지 농사를 지으면서 지하수를 엄청 퍼올려 농사를 짓고 있다. 이게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언젠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제주를 다니면서 본 개천에서는 물을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 제주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지하수를 뽑아 쓰면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다.

서광동리에 올라 기대를 안고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한 할머니를 만났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 하고 말을 건네니, 이 동네도 다 감귤을 많이 하고 자기 집에 콩이 좀 있다고 하신다. 고정순(63) 할머니의 집인 서광동리 261번지에 찾아가서 두 종류의 준자리콩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는 올씨이고 다른 하나는 늦씨인데, 늦씨가 더 맛있다고 한다. 크기는 더 작고 노랗다. 이후는 더 볼 곳이 없어 다시 차를 타고 더 윗쪽인 동광리로 이동했다.

동광리 499번지에 사시는 고순조(66) 할머니 댁에서는 한창 김장을 담그고 계셨다. 딸인지 며느리인지 두세 명과 함께 열심히 속을 버무리고 계신 할머니께 맛있는 김장김치도 하나 얻어 먹고 토종에 대해 물었다. 정신 없으신 와중에 저기 콩을 예전부터 심던 것이라며 일러주셔서 몇 움큼 얻어 왔다. 이건 장콩으로 쓰는데, 올씨이고 연두색을 띠고 있다. 더 있는 건 귀찮게 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왔다.

 

 

이곳에도 일본에 나가 돈을 벌어 마을을 도운 사람의 기념비가 서 있다. 제주와 일본은 그 가까운 거리만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보다. 

 

 

 

고픈 배를 안고 잠시 식당에 들렀다. 마침 동광리 마전동에 식당 하나가 보여 생각할 것도 없이 그리로 들어갔다. 다들 국물을 먹으며 속을 풀고, 곧바로 토종 수집에 나섰다.

이번은 지도로 보면 더 윗쪽이라 뭔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드는 그런 곳이다. 바로 광평리라는 곳이다. 중산간이지만 너른 들이 있기에 광평리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 곳인만큼 예전부터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토종이 있을 법하기에 기대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이곳은 너무 높아서 외진 곳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다. 기껏해야 서너 집이 전부일 뿐이다. 이렇게 된 거 한 집 한 집 하나하나 들러서 물어보아야겠다.

광평리 200번지에 사시는 구춘옥(76) 할머니 댁에서 메밀을 하나 얻고, 광평리 192번지에 사시는 김호정(78) 할머니께는 들깨를 하나 얻고, 광평리 194번지의 박만희(75) 할머니에게는 팥을 하나 얻고, 광평리 194-2번지의 장영자(67) 할머니에게는 약콩과 덩굴강낭콩, 장콩을 얻었다.

 

구춘옥 할머니 댁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쟁기. 예전에는 전부 이걸로 밭을 일궈 농사를 지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먼지만 뽀얗게 앉아 있다. 그래도 어디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하고 계셔서 좋은 걸 볼 수 있었다.

 

 광평리 192번지의 김호정 할머니. 원래는 뭍에서 살다가 제주로 들어왔다고 하신다. 나이가 들면서 몸에 불편한 곳이 많이 생겨 농사는 많이 짓지 않는다고 하신다.

 

 광평리에서 내려오는 길에 있는 마을을 들렀으나,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대신 금송을 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봤는데 나무의 모양이 참 예뻤다.

 

동백 공원의 산책로. 광평리에서 내려오는 길에 있는 동백 XXXX 공원. 새로 조성한 산책로에 멧돌이 박혀 있어 한 장 찍었다. 어디 민속품 가게에서 한 번에 잔뜩 사다가 박아 놓았나 보다. 우리에게 과거와 전통은 이런 취급을 받고 있지 않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한참을 내려와 서귀포시 쪽의 군남동에 들렀다. 이곳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감귤나무 천지다. 다른 건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감귤 밭만 신나게 헤매고 다니다가 한 집의 텃밭에 차를 멈췄다. 저쪽 구석에 갓이 자라고 있는 걸 안완식 박사님이 놓치지 않고 발견하셨다. 그렇게 군남동 947번지 구남준(57) 씨의 집에서 적갓 씨를 얻었다. 이건 파란 것보다 맛이 좋고 향이 짙으며 맵다고 한다.

 

 군남동의 적갓. 때깔이 참 좋다.

 

이후 서귀포 쪽으로 내려가 중문 쪽에 숙소를 잡으러 가다가 보니, 마침 오늘이 중문 장날이었다. 장을 한바퀴 돌며 토종이 없나 뒤지고, 안완식 박사 님께 뜨뜻한 개량한복을 한 벌 얻어 입었다. 이거 토종보다 더 큰 수확이다. 참고로 중문 5일장은 3, 8일, 모슬포는 1, 6일, 서귀포는 4, 9일이란다.

오늘의 숙소는 천제모텔에 방을 잡았다. 밤에는 제주 여성농민회의 김정임 선생님에 찾아오셔 그동안의 성과와 결과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라도와 가파도의 농업 사정은 어떠한지 정보를 들었다. 두 섬은 어업이 주라서 별 건 없을 거라 한다. 오늘은 이렇게 하루가 지났다. 이제 사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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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2월 27일. 오랫만에 맑은 날이다. 꼽아보니 제주도에 와서 두 번째 맑은 날이다. 그동안 흐린 날씨에 고생 좀 했는데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다.

먼저 화순리 옆에 있는 덕수리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한 집을 들르고, 두 집을 들르고... 왜인지 할머니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만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집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고 다니다 가게 앞에 꼬마애들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른들은 어디 안 계시냐고.

돌아오는 답에 머리를 쳤다. 어른들은 오늘 화순리에 잔치가 있어서 모두 그곳에 가셨단다. 우리가 화순리에서 왔는데, 이 마을 어른들은 모두 거기로 간 것이다. 이런 정보를 미리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쉽지만 이 마을은 여기서 이만 접기로 했다. 

 

덕수리에서 만난 폭낭(팽나무).  

 

 

다음 마을로 건너갔다. 이번에 들른 곳은 한경면 고산리. 이곳은 밭이 있긴 한데 홑짓기가 주를 이루고 있어 별 것이 없었다. 정말 가까이서 보니 장관이다. 너른 땅에 쭉 똑같은 작물만 자라고 있다. 마늘 아니면 양파.

 

고산리에서 만난 어느 밭. 저 끝까지 모두 마늘이다. 이렇게 농사를 짓기에 농민이 적어도 그 많은 도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게다. 그러다 보니 생산량이 중요해지는 것이고...

 

 

이 마을에서 바쁘다는 할머니를 한 분 간신히 찾아서 40일깨와 50일깨를 얻었다. 40일깨는 키가 작아 무릎 정도까지 자라고, 50일깨는 그보다 커서 허리까지 자란단다. 그리고 한 창고에서 쪽파를 다듬는 어르신 내외를 만났는데, 토종 이야기를 꺼내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토종은 가져가면 농협에서 수매를 안 해줘요. 그래서 멸종이 되었어요."

그렇다. 토종은 생계와 직결된다. 생계를 완전히 다 책임지진 않아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면 토종이 뿌리를 내리는 일도 쉬워질 것이다. 이건 참 복잡다단한 문제이니 여기서는 그만두겠다.

그리고는 길가의 담장에서 나팔꽃 같은 것을 하나 채집했다.

 

다시 차에 올라 신도리로 향했다. 여기는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 구릉도 없고 길이 평탄하기만 하다. 햇빛도 따땃하고 별다른 변화도 없으니 졸립다. 차에 올라 가만히 있으면 단조롭고 한가하기만 한 시간이다.

신도리를 돌아다녔지만 별 건 없었다. 그러다 한 젊은 농부 한 분을 만났다. 이 분께 토종을 물으니, 제주도 풋마늘이라면서 한 단을 들고 나오신다. 지금 심는 건 30년 이상 되었다고 하니 눈이 번쩍 띄였다. 이건 마늘을 먹는 게 아니라 줄기를 먹는 건데, 알이 작고 잔뿌리가 많으며 가지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먹었을 때 다른 곳의 것보다 향이 좋다며 제주의 식당에서 나오는 풋마늘은 대부분 신도 1, 3리와 용수리가 주산지라고 한다. 1단에 3700~3800원을 받아 값도 나쁘지 않다고.

7월 말에서 8월 초에 심어 12월 말에서 1월 초에 거두는데, 5월이 되어야 씨가 나오니 지금은 나눠줄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나중에 그맘때 연락하기로 약속하고 말았다. 풋마늘은 농사짓기는 힘든 편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에 눈비 맞으며 일해야 하기에 그렇단다.   

 

신도리의 젊은 농부. 이 정도면 아주 아주 젊은 편에 속한다. 농사로 벌어 먹기 힘들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고향과 땅을 지키고 있다. 

 

풋마늘. 농사로 돈을 벌어 살려면 무엇보다 판로가 큰 관건이다. 토종도 그런 쪽으로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 다가온 듯하다.

 

 

신도리를 조금 더 돌다가 신도2리 1317번지에서 양이남(71)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께 갯나물(갓) 빨간 거를 얻으며 들으니, 파란 것보다 이게 더 맵다고 하신다.

다음은 중산간으로 올라갈 차례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바닷가 근처보다 중산간으로 오를수록 그나마 집에서 조금조금씩 심어 먹는 것이 많았다. 다시 말해 그만큼 토종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기대를 하며 산양리 방향으로 올랐다.  

 

 산양리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감귤. 감귤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건 제주에 와서 처음 알았다. 이건 껍질이 두껍고 단맛이 덜해서 그다지 상품성이 없는 것이지만, 길을 다니며 하나씩 까먹으면 참 맛났다.

 

한경면 산양리의 어느 농가 뒷밭의 모습. 제주는 대문만이 아니라 밭에도 이렇게 대문을 만들어 놓았다. 특히 이곳처럼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마소를 놓아먹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까 이 대문은 도둑놈을 막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을 막으려고 걸쳐 놓은 것이다.

 

 

산양리에 올라 또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다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뭐 훔치러 온 사람이거나, 아니면 땅을 보러 다니는 외지 사람인 줄 알 것이다. 그렇게 돌아다니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신다.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하다 보니, 이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사신 토박이셨다. 토종 종자를 찾는다고 말씀드리니 집으로 가보자며 이끄신다. 한경면 산양리 2441번지에 사시는 이경구(80) 어르신이다.

할아버지를 따라나서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여러 개 들었다. 제주의 장이 서는 순서는 이렇다. 제주시에서 애월로, 애월에서 한림으로, 한리에서 고산으로, 고산에서 모슬포까지 갔다가 다시 제주로 간단다. 그리고 쟁기질은 흙이 센 밭은 겨리로 갈지만, 대개는 홑머리로 밭을 갈았다. 돼지는 보통 집집마다 1마리만 키웠다. 그건 다들 아는 똥돼지다. 씨를 뿌리고 발로 밟은 것은 밭이 일어나서 그랬다. 그렇게 발로 밟은 씨는 조와 산듸(밭벼) 두 가지였다. 예전부터 옥수수나 수수 같은  건 심지 않았다고 한다. 그건 아무래도 거름 때문일까?

이런 저런 이야기만 듣고 정작 씨는 얻지 못했다. 아니, 호박 하나를 얻었긴 한데 별로 좋지 않아서 숙소에 있던 것과 바꾸었다. 그것도 같은 제주도 안인 군메오름 근처에서 얻어온 것이란다.

 

다시 차에 타 청수리 방면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감귤 하우스 재배를 하는 분을 만났다. 전문적으로 아주 열심히 농사를짓는 분이었다. 이제 제주도 하우스 감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분 밭에 있는 박을 하나 얻었다. 지난해 서귀포 농사시험장에 견학을 갔다가 얻어온 것이라고 한다. 청수리를 돌았지만 별 건 없어, 서광서리 쪽으로 향했다.

 

서광서리는 뭔가 있을 만한데 다들 감귤에만 집중하고 있어 그런지 정작 돌아보니 토종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집에서 콩을 말리고 있어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한참을 뒤지고 찾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감사의 수건 하나를 놓고, 콩을 조금 얻어왔다.

 

서광서리에서 이제 어제 잠을 잤던 숙소 쪽으로 향했다. 여기만 돌면 오늘의 일정은 끝이다. 마지막으로 돌아볼 곳은 구억리라는 곳이다. 대평면 구억리 697번지 주재희(84) 할머니 댁에서 대미를 장식할지 이 순간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는 그 윗집에 들어가 한참을 뒤졌지만 별 게 없어서 그냥 지나칠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특히 텃밭에 자라는 무와 배추가 심상치 않아 보여 실례를 무릅쓰고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참 사람을 찾는데 마당 한켠에 이런 무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무의 생김생김이 심상치 않았다. 이걸 보자마자 안완식 박사님께 달려가 보고했다.

 

 

다시 돌아오니 할머니께서 나와 계셨다. 이게 뭐하는 놈들인가 신경 안 쓰시는 척하며 유심히 보시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본인이 하실 일을 차분히 하시는데, 우린 아주 안중에도 없는 듯 행동하신다. 귀찮게 들러붙어서 이것저것 여쭈었다. 저 무는 언제부터 심은 건지? 사다 심은 것인지 아니면 씨를 받아서 심는 것인지? 자꾸 귀찮게 물으니 사람 말을 안 믿는다며 벌컥 화를 내신다. 육지 사람들은 이상하다며, 속고만 산 사람들처럼 꼬치꼬치 캐묻는다고 역정이시다. 하지만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자식들 챙겨줄 참깨를 키질하고 계신 조재희 할머니. 어머니의 마음은 언제나 자식들 챙기는 데 가 있는 걸까?  

 

 

그렇게 어렵게 물어 알아낸 것은, 이 무는 6월에 심는데 빨리 하고 늦게 하고의 차이일 뿐 모두 같은 무이다. 크기에 차이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일 뿐이다. 그리고 청춘부터 심던 것으로, 정확히는 시집와서부터이니 18살부터다. 씨를 받아서 쓰는데, 약방에서 사온 소독약을 다라에 넣어서 살살 잘 묻혀서 쓴다. 그래야 3년을 두어도 끄떡없어서 그렇게 한다. 그리고 키질하시던 깨는 40일깨로 이것도 젊어서부터 심었다. 텃밭에 있는 배추도 물론 시집와서부터 씨 받아서 계속 심는 것이다. 그래도 무보다는 좀 늦다고 한다.

할머니 성격이 장난이 아니다. 본인도 늑저분한 곳에는 있지 못하신다는데, 집 안 곳곳이 깔끔하다. 이 연세에도 몸을 놀려 집을 치워 놓으신 걸 보면 기가 막힐 뿐이다. 할머니는 나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어멍 얼굴도 모르고 자라셨단다. 그런데도 살림 솜씨는 대단하신 듯하다. 어느 정도 지나자 이제 귀찮으신지 "혼저 갑서"라고 외치시며 얼른 내보내신다. 그 등쌀에 쓱 물러나왔지만, 오늘 마지막에 큰 수확을 얻어 다행이다.

 

구억리 할머니의 배추. 그리 통이 많이 차지 않고 길쭉한 것이 토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땅에 박혀 자라고 있는 단지 무(추정)의 모습. 제주도 무는 왜 다들 이렇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같은 씨를 가지고 뭍에서 심으면 어떻게 될까?

 

 

이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했다는 대정 성터를 잠시 들렀다. 현재 수리하고 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대신 담이 낮아 밖에서 기웃거리면 충분히 볼 수 있다.

 

추사가 이런 일을 했을리는 없고 어디 있는 걸 주워다 놓지 않았을까?

 

추사가 유배생활을 했다는 집의 뒷간. 역시나 돼지가 살고 있다. 저기 돌그릇은 물그릇처럼 놓았지만 원래는 곡식을 다루는 데 쓰던 것일 듯하다. 그냥 대충 가져다 놓은 티가 난다. 

대정 성벽. 이곳은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그 사람도 그때 이곳에서 이 성벽을 보았겠지. 하지만 추사의 유배지는 저렇게 꾸며 놓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뭐 그때는 주변의 집들이 다 저런 식이여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을 게다.

 

 대정 성터에 있는 하루방. 지금의 하루방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좀 더 익살스럽고, 좀 더 몽골인과 닮았다고 할까? 확실히 하루방은 몽골인의 모습에서 온 듯하다. 모자는 아주 몽골 모자와 똑같이 생겼다.

 

 

대정 성터를 잠시 둘러보고는 바로 숙소로 이동했다. 오늘도 어제 잔 화순리의 모텔이다. 대정리에서 화순리로 넘어가는 길에는 삼방산이 있었다. 삼방산은 산이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주의 몇 안 되는 산이다. 대부분은 오름이라 하여 용암이 불룩하다 식어 산의 모양처럼 솟은 것인데, 이건 암반부터 다르다고 하니 원래 용암이 팍 터지기 전부터 삐죽하니 튀어나와 있던 곳이 아닐까? 아무튼 참 신기하다.

 

화순리로 넘어가는 길에 만난 삼방산. 구름과 하늘이 삼방산과 어우러져 너무 멋있는 모습에 취해서... 

 

 삼방산 자락에 있는 절 앞의 주차장에서 바라본 바다의 모습. 왼편에 저게 용머리라고 했던가? 그 옆에 파랗게 보이는 게 하멜이 표류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배 모양의 무엇이다. 가까이 가보지는 않았다. 어서 돌아가야 하기에.

 

 

삼방산의 웅장한 모습. 불뚝하니 참 잘 생겼다. 

 

 화순리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날이 좋아 재수 좋게 한라산을 볼 수 있었다. 신령스러운 모습이다. 2000m가 이러니 그 이상 되는 산은 얼마나 놀라울까? 저절로 눈물이 주루룩 흐르지 않을까?

 

 

이로써 오늘 하루도 끝났다. 밤에는 안완식 박사님의 지인께서 저녁에 초대하여 배터지게 먹고 재밌게 놀았다. 두 분은 매화를 매개로 귀한 인연을 맺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이런 회식은 20일 넘게 다니면서 처음이다. 덕분에 참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다음날 그 여파가 미쳐 좀 힐들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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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6일. 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비행기로 제주에 왔다. 이번 조사에는 안철환 선생님이 합류해 모두 4명이 되었다. 공항에 내려 차를 빌리고, 시내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으며 시간을 아끼고자 앞으로 어디를 돌지 미리 지도를 통해 둘러보았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다시 황사평에 단지 무를 찾으러 갔다. 전화 연결이 되는 듯하였으나 갑자기 끊어졌다. 이로써 두 번째 실패. 도대체 언제쯤 만날 수 있는 걸까?

어쩌랴, 할 수 없이 다음으로 미루고 이번 일정 안에만 만나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저 남쪽, 제주시의 반대편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여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로 이동했다.

 

 안덕면으로 가는 길에 만난 햇살. 구름을 뚫고 나오는 모습이 뭔가 앞날에 서광을 비추는듯...

 

 

모텔에 들어서니 이미 날이 어둑해지고 있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두고 쉬기로 했다. 비행기를 타고 건너온 첫날이기도 하고, 이미 1차에서 열심히 수집한 탓이기도 하다. 근처의 중앙식당을 소개받아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도 이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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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4일. 제주도 토종 수집 조사의 1차가 끝나는 날이다. 하늘은 오늘도 흐릿한 편. 햇빛이 그립다. 첫날 숙소에 남겨 놓고 왔던 내복을 다시 찾아 입고 돌아다녔다. 그만큼 제주의 날씨를 얕보았다고 할까?

마지막으로 어음리를 다시 한 번 들렀다. 이곳이야말로 그동안 다녔던 곳 가운데 뭔가 있을 만한 곳. 마지막 날까지 한숨도 돌리지 않고 토종을 찾기 위해 강행군을 했다. 그 결과 산무라는 걸 하나 발견했다.

 

어음리에서 발견한 산무의 꽃. 원래 밑에서 자라던 것이 어떻게 200m 이상 되는 곳까지 올라갔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이 마을에서는 이걸로 김치를 담가 먹곤 했단다.

 

 

 

그리곤 잠시 비행기 시간을 기다릴 겸 한림공원을 찾았다. 이곳은 고생고생하며 개발한 공원인데, 그저 그렇게 이름만 달고 있는 곳보다는 훨씬 알찬 내용을 담고 있어 재밌었다. 여러 이색적인 식물이 많았는데, 그래도 나에게는 민속촌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장식으로 가져다 놓은 것인지, 아니면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루방을 천천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좋았다. 안완식 박사님은 저쪽에서 또 분주하게 다니시며 자료를 모으시고 있다. 

 

처마를 길게 낼 수 없는 제주 집의 특성 때문에 생긴 처마랄까? 지붕에 올린 짚으로 이렇게 길게 내려면 바람에 날려 제대로 간수할 수 없었을 게다. 그래서 집집마다 이런 식으로 처마를 따로 설치했다. 

 

물허벅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진. 이전에 100살이 가깝다는 할머니 집에서 본 형태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물론 제대로 쓰이진 않는 박물관의 흔적일 뿐이지만, 이런 형태로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소중하다. 

 

 제주는 따로 아궁이를 만들지 않고 돌을 놓고 거기에 솥을 얹었다. 왜 그럴까? 한참 고민하고 묻곤 했다. 날이 따뜻해서 그런 것도 있겠고, 설명을 들으니 제주의 특성이 빨리빨리 수습해서 도망가야 하던 시절 때문에 이런 형태의 부엌이 나오지 않았겠냐는 말도 있었다. 무엇이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제주의 삶은 지금 보는 모습과 달리 엄청 척박했음이 틀림없다.

 

 제주의 말방아. 제주는 소 만큼 말이 흔해 말을 잘 부렸다. 농사를 지을 때도 그랬고, 이렇게 방아를 찧을 때도 그랬다. 물론 이런 것은 몽골의 흔적일 테다. 몽골이 고려 때 와서 남겨 놓은 것이 조선이란 사회를 지나면서도 남은 것은 섬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옛 우리말을 연구하는 사람이 제주의 말을 연구하는 것일 테다.

 

 

한림공원을 차분히 구경하고 있는 사이에 제주도 여성 농민회의 김정임 선생님이 찾아왔다.

다시 돌아가기 전에 제주에서 모은 토종 씨앗을 나눠 농민의 손에서 제대로 뿌리내리고 씨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래도 유전자원센타에서 지원을 받았으니, 거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적당히 씨앗을 남기면서 최대한 제주에서 이 씨앗들이 퍼질 수 있도록 듬뿍듬뿍 퍼서 나누어주었다. 보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만 남기고, 살아 숨쉬는 대로 제주의 땅에서 제주의 하늘 아래 제주 사람의 손으로 남는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다는 안완식 박사님의 뜻이었다.

이 작업으로 한 시간 넘게 시간을 보내고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그리 큰 뜻은 없지만 남들도 다 가족과 함께 지낸다는 하루인 크리스마스이니 우리도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뭐, 그래야 하루만 쉬고 다시 제주로 올 테지만, 그 하루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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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3일, 흐리고 곳에 따라 햇살이 비췄다.

성산봉 옆에서 잤지만 성산봉은 오르지 못하고, 그저 아침을 먹고 밑에서 구경만 하고 출발했다.

 

그 이름난 성산 일출봉. 그냥 밑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길을 떠났다.

 

송당리를 향해 가는 길. 확실히 동부가 서부보다 척박한 듯하다. 일단 사람이 별로 없다. 서부에는 그래도 사람이 꽤 살았는데, 이곳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사람들도 그나마 바닷가에 모여 산다. 중산간에서 마을을 발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오늘 찾아가는 송당리는 그나마 동부에 있는 마을이다.

 

송당리로 가는 길. 감자, 당근이 전부인 듯했다. 서부에서 보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에 놀랐다. 

 

황량한 주변 경치를 보며 송당리에 올랐다. 이곳은 꽤 마을이 커서 나름 기대를 하며 동네를 돌기 시작했다. 사람을 찾아 한참을 돌다가 송당리 1389번지의 할머니(82) 댁에 들어갔다. 이 할머니는 이곳에서 나 이곳에서 늙었다. 말씀도 잘하시고 기억도 또릿하셔 옛날 일을 묻고 자료를 얻기에 좋은 분일 듯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목적으로 찾은 것이 아니니 토종에 대해 물었는데, 지금은 별 게 없다고 하신다. 할 수 없이 이 집 건너편 집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주변을 살피다 텃밭에서 무를 발견했다. 혹시 단지무?

 

송당리에서 발견하 무. 이게 혹시 단지무는 아닐지 하는 마음에 한참 이 집을 뒤졌다. 

 

 

다시 건너편 할머니 댁으로 가서 이 집주인의 연락처를 알아보았다. 얼마나 간절하게 찾았는지 모른다. 결국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 통화를 한 결과, 주변에서 씨를 얻어다 심었다고 한다. 봄에 씨를 받으면 꼭 연락을 하기로 약속하고 이만 떠났다.

마지막으로 송당리의 사무소에 들렀다. 별 소득은 없었지만, 이 사무소 앞에서 재밌는 비석을 발견했다. 내가 번역하는 자료에 당시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에 돈을 벌러 갔다는 기록이 많이 나왔다. 그만큼 제주 사람들이 일본에 많이 갔다는 증거다. 그걸 뒷받침하는 비석을 하나 보았다. 물론 여기서만 본 것이 아니라 제주의 곳곳에 이런 비석이 많았다. 예전 양반네들을 위해 비석을 세우듯이 지역 발전을 위해 애쓴 사람을 위해 비석을 세운 것이다. 이것이 어찌 보면 나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내가 사는 고장을 좋아하고 지킨다는 뜻이니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겠다. 안산에서도 역사가 깊은 수암에나 이런 비석을 찾아볼 수 있다.

 

 이역만리 일본까지 건너가 힘들게 번 돈으로 고향의 발전을 위해 애썼다는 증표로 세운 비석. 제주에서는 다른 지방과 달리 송덕비니 공덕비 대신 이런 비석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만큼 일본과의 거리가 가까웠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제주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을 엿볼 수 있는 하나다.

 

 

송당리를 떠나면서 마지막 집을 들렀다. 멀리서 보기에도 집이 오래되어 보이고, 특히 창고가 그랬다. 그래서 들렀지만 할망에게 곶감만 얻어 먹고, 이제는 다 사다가 심는다는 말만 들었다.

 

올 가을 산에서 새를 베다가 새로 얹었다는 창고 지붕. 민속촌 같은 데서 보는 죽은 모습이 아니라 뭔가 살아 있는 듯하여 좋았다.

 

이후 씨앗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제주의 풍속은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아래는 그 풍경의 하나이다.

 

제주 가사리인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저쪽에 보이는 귤나무가 100년도 더 된 나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열매는 많이 달렸지만 확실히 크기는 별볼일 없었다. 나무도 늙어서 그런가 보다. 

 

 옛날 말방아가 남아 있다고 해야 하나, 옛날 말방아를 굳이 남겨 놓은 곳이라고 해야 하나. 나에게는 그때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은 곳이었지만, 여기에 더이상 방아 찧는 사람들은 없을 테니 죽은 공간이라고 해야 할 곳이겠다. 그래도 이런 흔적이나마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시나 죽어 있는 공간이라 슬프기만 했다.

 

 

 

 

 

이 집들도 마찬가지였다. 토종을 수집하지 못할 때는 이런 곳에 자주 들렀는데, 들를 때마다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옛날 제주의 똥간에서는 똥은 돼지에게 먹이고 오줌은 따로 모았다. 아래 보이는 거무틔틔한 공간은 똥이 떨어져 똥돼지가 즐기는 공간이고, 나무가 박혀 있는 그곳은 오줌이 닿아 주르륵 흘러 따로 모이는 공간이다.

 

 

 오줌이 주르륵 흘러 모이는 곳이 바로 저곳이다. 제주의 척박한 환경이 만든 재미난, 그렇지만 한이 서릴 법한 곳이다.

 

 

이후 이날 마지막으로 어음리를 다시 찾았다. 그곳에서 단지무를 찾은 결과 이런 무까지 보았다. 옆에 단지와 비교하여 비슷하지 않은가? 그 이후 결과는 단지무가 아니라는 것. 제주의 단지무, 전설로 남았다. 그걸 복원하려면 앞으로도 꽤 많은 나날이 걸리겠다. 뭐든지 그렇지 않을까. 잃어버리는 건 순간이지만 그걸 다시 찾는 건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린다. 잃어버리기 전에 잘 보존하면 좋으련만 사람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그날 마지막으로 어렵게 어렵게 수소문하여 만난 벌거숭이 공화국의 주인장. 산전수전 많이 겪은 듯한 주인의 저녁 대접을 잘 받고 어두운 밤길을 더듬어 숙소에 가 잤다. 이날이 마지막이다. 내일은 제주 전여농 담당자를 만나 우리가 그동안 제주에서 모은 종자를 나누고, 이 씨앗들이 제주에서 널리 퍼지길 바라며 비행기를 탔다. 그 소중한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제주에서는 토종 씨앗과 관련하여 활발한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참 소중하고 귀한 인연이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이틀 쉬고 다시 제주로 날아갔다. 그 이야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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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간밤에 비와 함께 눈이 내렸다. 제주에서 눈을 볼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이건 상서로운 조짐일 게다. 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강풍에 주의하라고, 더구나 산간으로 가는 사람들은 체인 없이는 미끄러져 책임질 수 없다고 엄포를 놓으니 시작부터 떨린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든든히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오늘은 조천읍을 돌아, 저 성산 쪽까지 달릴 예정이다.

 

바람이 많이 불고 간간이 바닷가에도 눈보라가 휘날려서 그런지 사람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거 어디로 가는지, 뭐 하러 가는지 의미도 찾지 못하고 눈보라에 휩쓸려 길 잃은 나그네 꼴이다. 신촌리라는 곳에 도착하여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다고 생각한 순간, 한 집에서 사람이 나오는 걸 보았다. 얼른 가서 사정을 말하는데, 아침 출근길이라 아줌마가 바쁘시다. 아이까지 데려다줘야 한다고 하며 난 모르겠으니 우리집 어머니와 이야기하라며 찬바람 부는 날 찬바람처럼 쌩 가버린다. 야속한 아줌마. 젊으면 저런 걸까? 난 저러지 말아야지. 아무튼 할머니께서도 잠시 마당에 뭘 하러 나오셨는데, 귀가 너무 많이 어두우시다. 아무리 크게 외쳐도 잘 못 알아들으신다. 더구나 예전에 귀가 어두워지셔서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본토박이 제주말이다. 허! 허! 웃음만 나온다. 한 나라에 살아도 이렇게 다르구나!

그래도 어찌어찌 손짓발짓 섞어가며 간신히 뜻은 통해 보리콩을 조금 얻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별 시원찮다. 벌레가 다 쪼사 놓은 것이 할머니가 문물에 밀려 찬밥 신세가 된 듯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씁쓸하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봉투에 잘 챙겼다.

 

다시 차에 올라 열심히 달렸다. 어째 여기는 감귤밭만 보이고 사람 사는 집은 보이질 않는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사전 조사가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물론 이렇게 뒤지다 남들이 찾지 못한 귀한 걸 발견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얼마 없는 상황에서는 사전 조사가 무엇보다 중요하겠다.

아무리 달려도 비바람만 거세고 사람은 없고, 선흘리 돗바령이란 곳에 잠시 차를 세웠다. 드넓은 밭에 누가 심었는지 모를 적팥과 수수가, 그나마 저절로 떨어져 자란 것이라 초라하게 몇 그루 남아 있다. 오전 내내 달려도 제대로 된 집을 찾지 못했으니 이거라도 소중하다. 일단 수집. 

다음으로 선흘리 1012번지 사시는 부옥례 할머니를 간신히 만나 육십일깨를 얻었는데,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물론 기록도 별로 없고, 사진도... 날씨도 궂고 그만큼 힘도 빠져서 그렇다.

 

여기저기 샅샅이 뒤지는 길에 잠시 동백이 우리의 눈길을 잡아끈다. 요즘 한창 동백을 수집하시고 자료를 모아 글을 쓰고 계신 안완식 박사님께서 오줌도 쌀 겸 몸도 풀고 내리자고 하신다. 그러고는 바로 동백 앞으로 달려가셔서 사진을 찍으시고 품평을 하시느라 바쁘시다. 박사님 눈에는 하나만이 아니라 몇 개가 동시에 보이나 보다. 길을 지나며 지나치는 식물 하나도 놓치지 않으신다. 이번 수집을 따라나서며 안완식 박사님의 모습에서 정말 많은 걸 배우고 느낀다.   

 

이런 동백만이 아니라 참 신기한 색의 동백이 많았다. 안완식 박사님 덕에 동백 구경은 눈알이 충혈되도록 잘했다. 

 

 

이럴 때는 잠깐 쉬는 것도 좋다. 때 늦은 점심을 해결하며 잠시 숨을 돌리고, 어제 일을 생각하며 중산간으로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물론 일기예보에서는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혹시 모른다. 괜찮을 수도 있으니 부딪쳐 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게 뭐람! 조천읍은 웬만하면 감귤밭이 전부이고, 중산간쯤 가면 목장뿐이다. 마을이라고 표시된 곳을 찾아도 이제 사람은 거의 살지 않는다. 제주시에 가까워서 그럴까? 다들 시에 모여 살면서 여기는 일만 하러 오나 보다. 보람은 없고 고생만 직싸라게 했다.

 

해발 400m쯤 오르자 바닷가에서는 비바람이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위로 오르고 오르면서 이거 이대로 올라도 될까? 내가 괜히 천국행으로 이끄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강화도에서 황청까지 다녀온 몸, 안완식 박사님을 믿으며 갈 수 있는 데까지 올랐다.

 

하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눈만 쌓여 있고 사람은 살지 않는다. 대신 목장이 드넓게 자리하고 있다. 결국 한 목장까지 올라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걸 끝까지 확인한 뒤 차를 돌렸다. 만약 확인하지 못했다면 언젠가 다시 가야 할 곳만 남기는 큰 숙제가 되어 머릿속에 맴돌았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는 끝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오길 잘했다. 암~ 목숨을 걸고 다녀오긴 했어도.

 

이대로 돌아봤다 아무 성과가 없겠다고 판단하신 안완식 박사님의 지령으로 단지무를 찾아나섰다. 단지무는 영평이란 곳에 있다고 하여 동부산업도로를 타고 영평동으로 향했다. 한창 도로 확장 공사에 여념이 없었는데, 눈이 내려 그런지 제주 사람들은 이 길로 잘 다니지 않았다. 멋모르는 외지인만 이런 곳으로 다니지 않을까? 

 

 

자 단지무다. 단지무를 찾으러 가는 게다. 영평 하동이란 곳에 안완식 박사님이 이전에 조사해서 찾은 분이 단지무를 심고 있다 한다. 전화통화를 몇 번 시도한 끝에 어떻게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데, 그분이 오늘 장날이라 자신은 집에 늦게 들어온다고 하신다. 이런... 하지만 오늘을 이렇게 끝낼 수 없어 대충 위치만 알려주면 물어물어 찾아보겠다고 했다. 돌아온 대답은 "어려울 텐데..." 하시며 알려주셨다. 대략 그 정보만 가지고 영평동에 뛰어들었다.

 

제주는 밭과 무덤이 함께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참, 그러고 보니 강화에서도 자주 보았다. 섬이라는 특징인가? 농토가 부족한데 무덤을 쓰려면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영평동에 도착하여 이곳저곳 뒤지다가...

 

 

한참을 뒤지고 뒤지다가 어떤 무밭을 발견했다. 혹시 이곳이? 인간 네비게이션이 되어 지도를 들고 길을 안내하지만 참 난감하다. 표지판도 없고, 그 길이 그 길 같고, 머릿속에 그린 것처럼 나타나지는 않고... 답답하지만 어찌어찌 이 무밭까지 왔으니 일단은 임무를 완수한 셈이다.

허나 이곳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이 산이 아니라신다.

 

꼼꼼히 단지무를 찾아 돌아보시는 안완식 박사님. 추운 날씨도 그 열정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단지무를 찾는 일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겠다. 날씨도 궂으니 오늘은 작전상 후퇴를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 내일을 위해 구좌읍 평미리 사무소로 가 제주도 동부의 농업 현황에 대해 사전 지식을 쌓기로 했다. 해안도로로 내려오니 바람만 심하지 길은 괜찮다. 바람을 가르며 씽씽 달려 구좌읍 평미리 사무소에 도착해, 제주 여성농민회 사무처장 문경숙 선생님을 만났다. 아래는 문경숙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

 

제주 동부에서는 밀감을 하다가 폐원하면서 이제는 거의 없다. 일조량이 부족한 환경 때문에 당도도 안 나오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신 당근이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하며 감자도 많이 한다. 당근은 한그루짓기로 끝인데, 동부 쪽으로 오면 대농이 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토종 종자가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주의 동쪽이 바람이 더 세다고 한다. 그래서 모래땅이 많다. 조천읍을 돌면서 느낀 것이지만 서부와 달리 사람도 별로 없고 땅도 척박하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바로 바람 때문이었나 보다. 문경숙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래서 서쪽에서는 동쪽으로 딸들 시집도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살기가 팍팍하다는 뜻. 그래서 산간에 가도 마을이나 사람이 없다. 어음리가 있던 서부의 중산간과 달리 동부의 산간은 황무지에 가깝다. 그렇다고 수심이 깊은 것도 아니여서 어항도 어판도 별로 형성되지 않았고, 성산이나 가야 겨우 있을 정도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산남과 산북은 일조량에 차이가 너무 크다. 일조량은 물론 바람과 토질, 고기잡이 등 동쪽은 확실히 살기 팍팍하다.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듣고 성산으로 가서 숙소를 잡고 저녁을 먹었다. 하루 종일 찬바람을 맞았더니 저녁을 먹으며 확 풀어진다. 오늘 묵은 숙소는 아주머니가 아직도 물질을 한단다. 흥미롭긴 하지만 그냥 오늘은 이불 덮고 푹 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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