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프리카 어느 곳의 한 농부가 옥수수를 보관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았다.

외양간을 만들며 그 구조물을 연장해서 옥수수를 묶어 걸어 보관함으로써 손실도 줄이고 좋다는 설명이 덧붙여 있었다.

 

그 사진을 보니 2008년 울릉도를 갔을 때가 떠올랐다.

울릉도는 그야말로 옥수수의 섬이라 할 정도로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그곳의 옥수수 보관법도 아프리카 대륙 어느 곳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공을 막론하고 옥수수는 그저 껍질을 묶어 걸어 놓는 게 공통적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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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감자밭. 꽃이 한창이다. 누구는 최대한 양분이 덩이줄기로 가도록 꽃을 제거해야 한다고도 하지만, 요즘은 그냥 두는 추세이다. 너무 일이 많기도 하여 더욱 그럴 것이다. 옛날에는 할아버지처럼 유휴 노동력이 회초리 같은 걸로 탁탁 쳐서 떨구고 다녔다고도 한다.

참, 감자밭을 보면서 김동인의 <감자>를 떠올렸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김동인이 말하는 감자는 이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를 가리킨다. 지금도 제주에서는 그러는데 감자는 고구마를 가리키고, 진짜 감자는 지실이라고 하지. 땅의 열매, 얼마나 적확한 이름인가!



강원도에서는 왜 감자를 많이 심어 먹었을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감자의 고향은 바로 안데스의 고산지대입니다. 강원도의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역도 그와 유사한 환경이죠. 다른 곡식을 농사짓기보다 감자를 심어 먹는 것이 훨씬 유리하고 감자를 먹으면 상대적으로 쉽게 배가 불렀기 때문이죠.


강원도 산간은 아시다시피 춥습니다. 일교차가 크고, 서리도 일찍 내립니다. 그래서 여타의 곡식을 심어보아야 다른 평야지대에서 하는 것보다 농사가 잘 안 됩니다. 

그런데 감자는 추위에 강한 편이기도 하고, 서늘한 기온을 좋아하니 딱인 것이죠. 실제로 감자는 섭씨 20도가 넘어가는 고온에서는 더 이상 알이 커지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참고로 감자는 14~23도 정도에서 잘 자라는 저온성 작물입니다. 18~20도에서 잎과 줄기가 자라기에 최적이고, 감자가 굵어지는 데에는 14~18도가 최고입니다. 그래서 감자는 더우면 아니 좋아요.) 다른 곡식을 심느니 감자를 심어 먹는 게 강원도 산간에서는 재배조건도 그렇고, 감자의 풍부한 탄수화물도 그렇고 훨씬 나은 것입니다.


거기에다 강원도 하면 옥수수를 빼놓을 수 없죠. 옥수수도 봄에 일찍 심어 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작물입니다. 

추위가 가시고 땅이 녹고 따뜻한 기운이 온다 싶으면 바로 옥수수를 심는 겁니다. 그러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서 매서운 산간의 추위가 닥치기 전에 일찍 수확할 수 있어요. 게다가 옥수수의 줄기는 소도 좋아하는 사료가 되고, 그대로 엮어서 세우면 좋은 담장이 되기도 합니다.


이 사진은 강원도는 아닙니다. 바로 2008년 울릉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러나 강원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옥수수를 수확하고 난 뒤 그 옥수수대는 쭉 엮어서 담장으로 세워 놓는 것이죠. 겨울의 매서운 찬바람을 막아주기에 딱입니다.



옥수수대는 칡줄기로 엮습니다. 칡이 또 이런 걸 하는 데에는 질겨서 제격이죠. 과거 석유화학제품이 나오기 전에는 칡줄기로 다양한 생활용구를 만들어 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울릉도 성인봉에서 불어오는 한겨울의 찬바람을 막는 것입니다. 집 바로 옆쪽에만 설치를 했죠. 마당이야 안 나가면 그만이니.





그렇게 강원도라는 자연조건이 "강원도!" 하면 감자와 옥수수를 떠올리게 만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 물론 강원도라고 다 똑같지는 않죠. 주로 강원 산간지방에 한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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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에 집도 몇 채 없고, 얻은 것도 얼마 없어 어지간한 집이 보이면 무조건 내려서 찾아갔다. 그러나 위에 있는 대부분의 집은 농가로만 쓰고, 사는 건 바닷가 동네에서 산다. 그렇게 찾아간 어느 집은 완전히 동물농장이었다. 이놈들이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는지 내가 들어가니 누군냐며 쳐다보고 좇아다니느라 바쁘다. 동물들 틈바구니에 나 혼자 끼어 있으니 은근히 공포스럽다. 

 

 동물농장의 알을 품는 암닭. 거푸집 아래로 오묘하게 닭둥우리가 생겼다.

 

어찌나 좇아오던지 어이 하고 쫓으니 닭들은 뒤돌아섰지만, 흑염소는 덩치값하려는지 노려보고만 있다. 내가 밥이라도 주러온 줄 아는가보다.

 

 

 

동물농장을 떠나 다시 아래로 아래로, 마을을 향해 내려간다. 저쪽 개울 건너 오래된 집 한 채가 보인다. 저기는 가면 무엇이 있겠다 싶어 징검다리를 건너 부지런히 올랐다. 가까이 다가가니 이 집도 버려진 채였다. 그런데 할아버지 두 분이 일하다 잠시 쉬고 계시는 듯 담배를 태우고 계셨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라도 붙이자. 뭔가 건질 게 나올지도 모르겠다 싶어 인사부터 하고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 토종이 뭐 없을까요?" 돌아오는 답은 이제는 나물이나 하지 그런 건 잘 없다는 말. 그래도 혹시나 하며, "울릉도에서 옛날부터 먹는 감자는 이제 아예 없나요?"

 

울릉감자의 소재를 알려주신 그 집. 정말 소중한 말씀 덕에 울릉감자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랬더니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저 구암에 서동댁이란 할머니가 토종 감자, 분홍색을 한 번씩 남양리에 사는 정수아라는 분에게 팔러 온다는 것이 아닌가! 이게 왠 횡재인가. 이렇게 귀한 정보를 얻었으니, 서둘러 가보자.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한다. 나날이 동지가 가까워지면서 저녁해는 엄청 짧아지고 있다. 그러려면 일단 남양리에 가서 정수아라는 분부터 찾아서 어찌된 사연인지 물어야겠다.

남양리 동네에 내려오자마자 난 정수아라는 분부터 찾으러 나섰다. 한참을 헤매다 동네 슈퍼에서 물어보니 할머니라고 하네. 이름이 예뻐서 요즘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참 이름도 가지각색이구나. 그런데 왜 할머니는 간난이니 예분이니 그런 이름이 많을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부르는 대로 막 갖다 붙여서 그런가? 그때는 여자는 사람도 아니었나보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건 차차 좋아지겠지.

 

 정수아 할머니를 찾으러 동네를 헤매다가 만난 동백나무. 이런 좋지 않은 곳에서 참 크게도 컸다. 울릉도 사람들도 이렇게 살기 어려운 곳에서 꿋꿋하게 살아왔다. "울릉도 사람들 비탈에 서다"란 말이 절로 나온다.

 

 

참, 동네 슈퍼에서 물으니 저 아래로 가면 옛날 교회 건물이 있는데 그 집에 살고 있으니 그리로 가라신다. 얼른 빠른 발걸음으로 집을 찾아 나섰다. 드디어 찾았다. 교회로 쓰던 건물은 현재 창고로 쓰고 있는 모양이다. 아까 할아버지들의 말씀을 들으니 이 할머니가 중간수집상 정도의 일을 하시는 듯하다. 그래서 분홍감자도 여기에 왔을 게다. 하지만 집에 아무도 없으니 뭐 물어보고 할 것도 없다. 얼마나 실망스럽던지 서둘러 걸어오느라 흘린 땀이 아까울 정도다. 앉아서 넋두리하고 있을 시간도 없다. 그새 어디 갔냐며 안완식 박사님이 채근하신다. 다시 황급히 길을 거슬러 올랐다.

 

정수아 할머니 댁. 교회도 선교사업이 어려워 나갔을까? 우리나라에는 참 교회가 많기도 하다. 절반 이상이 교회에 다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며칠 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카톨릭은 자생적으로 자라서 우리 것을 많이 수용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기독교는 외국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퍼져서 우리 것보다 그네 것이 더 좋고 훌륭하다며 따라가지는 않았을까? 장승이나 무당, 굿 등 원래 마을에서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고 떠들며 살던 것들을 미신이니 우상숭배라며 내쫓은 걸 보면 말이다.

 

 

헐레벌떡 오니 안완식 박사님께서 토종을 수집하고 계셨다. 늦게 온 관계로 여기의 주소도 할머니 이름도 모르겠다. 하긴 할머니가 이름 밝히기를 극구 꺼리셔서 결국 몰랐지만 말이다. 이 집에는 사람도 없는 듯하고 토종도 없을 것 같고 정수아 할머니를 찾는 일에 정신이 팔려 그냥 지나쳤는데, 안완식 박사님의 레이더에 딱 걸렸다. 여기서 수집하신 걸 보니 울릉강냉이, 메주콩, 참깨를 구하셨다. 무슨 쓰레그물도 아니시고 어떻게 박박 긁어내시는지 참 대단하시다.

 

 이름 모를 할머니. 마침 친구 분과 놀고 계셨다. 매실주를 담가 놓았다며 한 잔씩 주셨는데, 사진은 그 매실주에 담근 매실을 꺼내 자세를 잡으실 때 찍었다.

 

 

이제 아무 정보도 없이 무작정 구암이란 곳에 가서 분홍감자를 찾아야 한다. 어디에 사실까? 침을 잘 튀겨야 빨리 찾을 수 있겠다. 하지만 찾을 길이 막막하다.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 구암이란 곳까지는 쉽게 왔다. 여기부터 어디를 들쑤실 것인지가 문제다. 먼저 분홍감자를 재배하실 정도면 남들과 동떨어져 사시지 않을까 하여 쭉 위로 올라가 거기부터 뒤지며 내려오기로 했다. 조금 가다보니 두 갈래길이 나온다. 어디를 택할 것인가? 인생극장의 배경음악이 흐르고, ........

"그래 결심했어! 오른쪽으로 쭉 올라가요!"

그런데 이게 왠일? 차 한 대만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길로 한참을 오르다 보니 길이 깨져서 지날 수 없다. 이걸 어쩌나? 길이 좁아 차도 돌릴 수 없고, 천상 끝까지 올라가야 한다. 조심조심 미끄러지지 않게, 깨진 길에 빠지지도 않고 불쑥 튀어나온 공구리에도 걸리지 않고 지나야 한다. 일단, 조마조마 올라오느라 힘들었으니 잠시 차에서 내려 경치나 감상하고 마음 좀 돌리기로 했다. 

 

걸어서 꼭대기에 오르니 다름아닌 헬기장이었다. 이곳에서 바라본 경치는 참 끝내주는데, 차가 딱 걸려 있으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겠네. 갈 길은 멀고 맘은 바쁘고, 그래도 일단 한 숨 돌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도 저도 쉽지 않아 그대로 올라온 길을, 100m도 더 되는 길을 후진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옆으로는 구르면 즉사할 낭떠러지가 버티고 있고, 차 한 대 간신히 지나갈 길로 후진을 해야 한다니... 이러다 감자도 못 찾고, 감자가 뭐야 목숨 걸고 내려가야 하는 마당에.

차에서 내려 뒤를 봐주며 뒷걸음질쳤다. 뒷걸음질치면서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은데 차로 뒷걸음질치려면 얼마나 힘들까? 이런 길을 거침없이 다니는 건 안완식 박사님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 덕분이다. 어떻게 어떻게 다 내려와서는 길게 한숨을 내쉬신다.

 

그럼 다시 위로 올라가보자. 지체한 시간만큼 더 속력을 내신다. 쭉 오르니 서달령으로 넘어가는 옛 길임을 깨달았다. 옛날에 일주도로가 뚫리지 않았을 때는 이 길로 다녔다는데, 눈이라도 오면 꼼짝을 못하고 남과 북이 저절로 갈려서 살았겠다. 오줌이나 싸며 쉬자고 잠시 차에 내리니 대나무 밭이 조그맣게 있다. 재미 삼아 하나 꺾어 들고 푸닥거리라도 해서 감자를 찾을 수 있도록 빌었다.

그러고 다시 차에 올라 오르니 집은 하나도 없고 울릉도에 하나 있는 화장장이 나온다. 귀신이 사는 동네에서 푸닥거리 하나는 제대로 한 셈이다. 이제 잡귀도 물렀고 운이 트이려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바닷가에 있는 마을에서부터 물어가며 찾기로 방향을 바꿨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내려와서 찾아간 첫 집의 할머니가 바로 서동댁이셨다. 웃음이 참 익살스러우신 할머니인 서동댁, 곧 김종수(84) 할머니가 바로 그분이다.

 

천신만고 끝에 찾은 김종수 할머니.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울릉감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토종 씨앗을 얻을 수 있었다.

 

 

남서2리 구암마을. 거북바위가 있어 자연스레 구암이라 부르는 이 마을에서 한 60년을 사셨다는 김종수 할머니. 씨 안 떨구려고 밭도 없는데 그래도 조금이나마 감자를 심었다고 하신다. 옛날에는 주식으로 먹었다는 이 감자는, 여름이면 쌀을 조금 앉히고 그 위에는 감자를 앉혀서 배를 채웠다. 이게 겉은 그래도 껍데기를 까 밥을 하면 파그럽고 뽀얀기 맛있단다.

다니며 만난 토종이 있는 집에서는 어떻게든 씨를 떨구지 않으려고 애쓴 집뿐이다. 그 마음 덕에 토종이 가늘게나마 여지껏 살아왔다. 이런 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은 책에서나 보거나 이야기로나 전해질 수밖에 없었을 운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농민이 살아 있는 토종일지도 모르겠다.

울릉감자 말고도 진한 자주빛의 줄콩(덩굴 강낭콩), 6~8cm 정도 하지만 아주 맵다는 고추, 어릴 때부터 심으셨다는 오이를 얻었다. 이제 몸도 많이 불편하고 땅도 없어 농사는 많이 짓지 못하신다는 말에 맘이 찡하다. 건강하시라고, 건강하게 이것저것 심으시라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저 손이라도 한 번 꼭 쥐고 인사드리는 것밖에...

 

 김종수 할머니의 이웃. 할머니는 올해 몸이 아파 병원에 다녀오시느라 씨를 놓쳤다고 하신다. 대신 옆집 할머니한테 준 것이 있으니 그거를 가지고 가라며 집에서 쉬고 계시는 할머니를 데리고 오셨다. 옆집 할머니는 땅에 감자를 잘 묻어 놓으셨다. 그 움에서 감자를 꺼내주시는 모습.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올해는 몸이 아파 감자를 심지 못했다고 하신다. 그럼 어디서 구하나? 그냥 말만 듣고 이대로 끝인 것인가? 따라오라고 하셔 부지런히 따르니 옆집에 건너가 할머니를 데리고 오신다. 이 할머니도 나한테 감자를 받아서 심었으니 그거라도 가져 가라고 하신다. 참 고맙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또 다른 말을 하신다. 저기 중용이란 곳에 가면 나 말고 분홍감자를 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농사를 많이 지으니 거기에는 더 많을 거라고 하신다. 그분의 성함은 백무암. 잘 적어 놓고 꼭 들르겠다고 했다.

 

 김종수 할머니의 곡간에 갈무리되어 있는 여러 씨앗들. 올해는 할 수 없이 묵혔지만 이제 병원에도 다녀왔으니 다시 심을 거라고 하신다.

 

 구암마을에서 만난 지게 재료. 이렇듯 농민은 길을 오가며 절대 허투루 다니는 법이 없다. 개똥이라도 주워 오지.

 

 

이제 다음 마을로 넘어가야 한다. 지도에는 지통골이라고 나온다. 여기는 또 얼마나 가파른 길을 올라야 도착할까? 다행히 막상 가니 길은 그리 험하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 없다. 한 집에 사람이 있었지만, 이제 나이가 많아 몸도 가눌 수 없는 할머니셨다. 손자가 포항에서 건너와 할머니한테 오다가 그 집에서 서성거리는 우리를 보고 할머니의 상태며 주변 상황을 대강 일러주어 이 마을은 그냥 포기하고 지나기로 했다.

 

지통골에서 만난 서낭당.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임을 짐작케 한다. 지금도 누군가 관리하는 흔적인데 도무지 근처에서 사람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이제는 저 세상으로 건너갈 날만 기다리고 계신 한 할머니의 집과 그 집 옆으로 사료용 수수를 기르는 밭의 모습. 돌을 잘 쌓아서 만든 것을 보니 옛날에는 논으로 쓰던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누구에게 확인할 수 없었다. 산골에 가면 논을 이렇게 만들어 놓던데 여기도 그렇지 않을까?

 

 

이제 오늘 목표로 잡았던 곳을 얼추 다 돌았다. 시간도 벌써 해가 넘어갈 때가 다 되었다. 마지막으로 힘을 내서 서두르자. 퉁구미라는 곳만 가면 다 끝난다. 퉁구미는 지도에서 확인하니 웃퉁구미와 아랫퉁구미로 나뉘어 있다. 그만큼 사람이 많이 살던 동네라는 것이겠지.

그래도 잘 닦아 놓은 길로 한참을 오르니 남양2리 218번지 이 집 할아버지는 골개라고 부르는 곳에 도착했다. 아직도 두 내외 분이 농사지으며 살고 계시다. 이현우(69) 할아버지와 심외분(65) 할머니가 그분이다. 지도로는 웃퉁구미에 해당하는 곳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여느 분처럼 지도소에서 나왔다며 엄청 공손하게 우리를 대하신다. 할머니가 뭐라도 말할라치면 이 사람이 알지도 못하면서 말한다고 막 나무라시면서 말이다. 여러 번 본 모습이기에 이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바뀌지 않았는가. 예전에는 공무원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그 앞에서 움츠러들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촌에서는 아직 그런 모습이 남아 있겠지? 도시 사람은 이해 못할 그런 모습. 아무튼 할아버지께서 질문에 너무 성실히 답해 주셔서, 오늘 또 갈 곳이 있는데 시간이 없기에 가봐야 한다면 유월두(올콩)를 하나 얻어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어떤 옥수수냐는 물음에 친절히 답해 주시던 이현우 할아버지. 천천히 듣고 있을 시간이 없어 서둘러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이현우, 심외분 어르신 댁. 전형적인 울릉도 식 집의 모습이다.

 

 유월두로 쑨 메주. 처마 밑에 선반을 달아 올려 놓은 것도 그렇지만, 받침으로 고인 옥수수 자루가 참 재밌다.

 

 

웃퉁구미를 거쳐 이 마을을 품고 있는 언덕의 정상에 올랐다. 저쪽 편으로는 아랫퉁구미가 자리하고 있다. 해는 서산에 기울어 붉게 물들고 날은 쌀쌀해지니 뜨끈한 아랫목에 마누라 생각이 절로 난다. 마을로 내려가 몇 집을 뒤졌지만, 소만 키우는 집이거나 다른 곳에서 본 씨앗만 있어 별 수확은 없었다.

 

 고개 정상에서 바라본 아랫퉁구미. 빠듯한 시간을 쪼개 이 마을도 들렀지만 성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기 보이는 길은 그래도 양반이다. 이 마을 사람들이 몇 번을 얘기해서 번듯하게 놓은 길이라고 한다. 이 길은 그래도 차도 서로 엇갈려 지날 수 있고 반반한 것이 참 좋다. 대부분의 길은 가서 보지 못했으면 정말 말을 말아야 한다. 몇 번을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이제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백무암이란 분을 만나야 한다. 이 분이 사시는 곳이 다행히 도동항으로 가는 쪽이라 가는 길에 들르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보이지도 않고 처음 와보는 길을, 그것도 차 한 대만 지날 수 있는 동네길을 가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동네 개들은 낯선 차에 짖어대고, 어렵사리 찾은 사동3리 636번지 백무암(67) 어르신 댁. 분홍감자의 내력을 물으니 사연은 이랬다.

원래 자신도 잃어버렸던 것이 어느 날인가 우연히 밭에서 한 개씩 싹이 나더란다. 아, 이거 분홍감자구나 싶어 하나둘씩 모아 모아, 3년을 그렇게 받아서 증식을 했다고 한다. 가을에 종자를 받아 봄에 심는데, 이거 참 맛있다고 지금은 육지에서 다들 사간단다. 맛이 좋아서 시장에 내놓아도 금방 팔리고, 옛날 노인들은 울릉도 지역방송에서 광고를 보고 찾아와서 사가는 정도란다. 백무암 어르신의 표현에 따르면, 열이 먹다 아홉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이 좋다고 한다.

씨감자는 20kg 상자로 10상자를 놔두는데, 그걸로 1000평을 심을 수 있다. 지금은 땅에 묻어 저장하고 있어 꺼내기 힘들어 줄 수 없으니 나중에 봄에 심을 때 연락하면 보내주겠다며 전화번호를 주셨다. 토종으로 판로도 확보하며 농사짓는 백무암 어르신은 첫눈에도 무사 같은 풍모를 풍기셨는데, 말씀도 그렇게 하셨다. 칼을 뽑으면 무라도 베어야 도로 집어 넣으실 분이다. 그분의 집중력과 끈기로 분홍감자가 울릉도에서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니 참 다행이다.

 

이렇게 13일째의 밤이 깊었다. 숙소로 돌아와 내일 돌아갈 준비를 하고 울릉도에서 보낼 마지막 밤을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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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2월 15일. 다행히 날이 푹해 눈이 녹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훨씬 더 편하게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아침은 저동항으로 넘어가서 먹었다. 도동항에는 아침을 먹을 만한 곳이 그리 없다. 현지인도 도동보다는 저동이 아침을 먹기에는 낫다며 그곳을 소개하여 저동으로 넘어가서 먹었다. 무슨 공사가 있는지 몰라도 인부들도 함께 먹었는데 정말 괜찮았다. 어디 타지에 가면 아침 먹는 일이 걱정이다. 놀러갔다면 늦으막히 일어나니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일하는 사람은 다르다. 토종 수집을 나간 내내 걱정한 것은 어디서 아침을 먹느냐 하는 것이었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계획한 태하 쪽으로 넘어갔다. 가면서 보니 어제처럼 낙석도 없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쌓여 있던 눈도 많이 사라졌다. 달팽이관 같은 일주도로를 지나 마침내 목표로 한 서면 태하에 도착했다.

 

서면 태하에 도착해 만난 울릉도의 자랑 반건조 오징어. 울릉도에서는 피때기(?)라고 한다. 나중에 보니 이렇게 직거래로 사면 더 싼데,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서 배가 뜨기 전 오징어를 사면서 그때 살 걸 많이 후회했다.

 

 

여기에서 볼 마을은 태하라는 곳이다. 그런데 막상 오니 그냥 평범한 어촌이다. 여기 농사짓는 곳이 어디에 있을까? 일단 가장 확실한 관공서에 들렀다. 여기는 보건소. 들어가니 누군가 아주머니가 청소를 하고 계신다. 아주머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이렇게 여기를 찾아가려고 한다 하니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그런데 말을 들으니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고 하신다. 어허... 생전 처음 케이블카를 여기서 타는 것인가?

그런데 이 아주머니 뭔가 다르다. 알고 보니 보건소장이시다. 원하셨든 원하지 않으셨든 동네 아주머니 같아 보이신다. 이렇게까지 동네 사람과 하나가 되셨나 생각하니,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뒤늦게 퍼뜩 들었다. 나중에 또 간다면 다시 인사를 드리고 싶다.

 

아무튼 알려주신 대로 케이블카를 타러 정거장에 갔다. 헌데 불행하게도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케이블카가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울릉도는 정말 걷잡을 수 없구나. 강화도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었다. 강화도는 이제 섬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울릉도 만큼 뭍에서 떨어지지도 않았으니 그렇겠지. 자연환경이 어려운 곳일수록 사람보다는 신에게 기대게 마련이겠다. 울릉도에 와서 보니 그렇다. 바람만 불어도 배도 안 뜨고, 케이블카도 다니지 않으니 하늘만 쳐다봐야지 무슨 수가 있겠는가?

 

이제 케이블카로 올라가는 일은 포기하고 그냥 서달령이라는 곳에 가자고 했다. 그래도 예까지 왔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들를 수 있는 곳은 들르면서 가는 방법을 택했다. 안완식 박사님의 말씀대로 언제 여기를 또 올지 모르고, 있든 없든 들렀다는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네를 뒤지다 첫 집에 들어섰다. 허나 아무도 없었다. 무슨 장날인가? 왜 사람이 없을까?

 

 서면 태하에서 들른 첫 집.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에이,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옆집에나 들어가자. 그렇게 들른 옆집은 막 외출을 하려고 차에 타고 있었다. 이 집은 소를 많이 키우고 있었다. 종자는 별로 없을 테니 잘 다녀오라고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시커먼 소와 칡소가 함께 있어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이놈들이 카메라를 싫어하는지 계속 움직이고 어둡기까지 해서 이런 사진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돌다 서면 태하1리 528버지 박경화(78) 할머니 댁에 들렀다. 마침 할머니도 어디 나가시려고 준비하고 계셨는데, 그 전에 들러 이것저것 물을 수 있었다. 좀 건성건성 말씀해 주셨지만, 그래도 일단 검은 수수 하나는 얻었다.

 

박경화 할머니 댁의 검은 수수. 종자로 달아 놓은 이것밖에 없었다.

 

 

 

이제 바닷가를 지나 중리라고 하는 마을로 향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이보다 더 위로는 눈이 쌓여 있는 모습에 어떨지 조마조마.... 다행히 서달령까지도 괜찮았다. 거기를 지나 옛 길로 지나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는데, 서달령까진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겨우 태화리 694번지에 사시는 신계개(79) 할머니께 미역취 씨앗을 얻고 사진을 한 방 찍으려 하니, "귀신 같이 나오니 내 찍지 마소"라는 핀잔만 들었다.

 

 그래도 눈이 많이 녹아 다행이다. 오늘도 저기 같았으면 그냥 놀아야겠지.

 

 

서달령을 돌고 다시 내려왔다. 예전에 일주도로가 뚫리지 않았을 때는 여기로 넘나들었다는데, 지금은 일주도로 덕에 편하게 왔다. 일주도로가 아니었다면 어제 같은 날이 지나 오늘은 여기에 오지도 못했을 거다. 이게 참 감사한 일이기도 하면서 슬픈 일이기도 하다. 어디까지 고마워하고 어디부터 싫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삶이 다 그런 걸까?

다시 태하터널이라는 곳을 지나 학포동이란 마을에 들어섰다. 말이 쉽지 꼬불꼬불 급경사의 길에 들어섰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운전을 하고 다니는지, 더군다나 안완식 박사님은 이런 길을 어떻게 그리 잘 다니시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돌고 돌아 내려가니 바닷가 절벽에 선 몇몇 집과 교회가 보인다. 그러나 토종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대로 다시 차를 돌려 나갔다.

대신 그렇게 나와 지도에도 없는 마을에 들렀다. 여기도 여전히 태하리였는데, 원래 살던 사람들은 모두 나가고 여기에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계셨다.

 

태하2리 383번지의 김목호(83) 할아버지. 오래 간만에 온 손님에 참 반가워하셨다.

 

알고 보니 예전에는 농사 잘 짓는다고 표창까지 받은 집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런 증표를 되게 중요시한 시절이 있었나 보다.

 

 

옆집에 몇 집이 있었는데 사람이 없기에 솔직히 별 기대를 안 했다. 그런데 그런 곳에 계셔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하며 집을 둘러보았는데, 참나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아오셨는지 모르겠다. 이건 농촌의 집과도 다르고, 그렇다고 어촌의 집도 아니고, 정말 섬 마을의 외딴 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울릉도의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강한 해풍을 막고자 겉은 다 둘러 막고, 속에 집을 지었지만 방도 두 칸뿐. 시부모님과 함께였다면 참말 답답했겠다. 가부장제가 굳건하던 시절에 이런 집에 살았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자면 밤이 새도록 들어도 시간이 모자르겠다. 요즘 사람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편하게 사는 것인지 모른다.

 

 

 박연조(77) 할머니의 부엌. 부엌이라지만 따로 분리된 공간도 아니고 안방 바로 옆에 붙어 있다. 그나마도 외벽이 둘러쳐진 곳이라 독립된 공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곳. 이런 곳에서 남자들 등살을 이기며 사셨을 생각을 하니, 벽에 들러붙은 그을음만큼 고단하셨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씨앗을 들고 나와 말씀해 주시는 박연조 할머니. 참말 이렇게 살아왔으니 살았지 요즘 사람들 누가 이렇게 살겠는가?

 

 

할머니를 만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많은 씨앗을 얻었다. 할아버지는 예전만큼 힘이 없으셨다. 동물원의 기운 빠진 호랑이가 따로 없었다. 할머니의 까랑까랑한 기상에 비하면 할아버지는 예전 기세로 사시는 듯했다. 기세 등등한 할머니께 받은 씨앗은 이렇다. 빨간 걸 이웃 젊은 사람이 줬는데 그건 맛이 없어 자기의 담배잎파리 닮았다는 청상추와 아주 아주 오래됐다는 보통 12줄이 생기는 찰강냉이. 그리고 똠방하니 익으면 노랗게 되고 퍼뜩 크는 토종외(청오이), 이건 시장에 나온 오이를 사다 먹어봐도 이런 맛은 없다고 한다. 또 희고 검은 덩굴콩, 또 털이 없는 엉걱꾸(엉겅퀴)를 얻었다.

더 재밌고 더 맛깔난 말이 많았는데, 테이프에 녹음한 듯 기억이 따르지 못해 아쉽다. 대신 그 집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더 올리려고 한다. 그 어르신들의 집 앞에는 바다가 팍 트여 있다. 바다가 바라보이니 그것 땜에 우울하지 않냐고, 바다가 보이면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었던지라 그런 질문을 했다.

 

 김목호,박연조 할머니 댁에서 바라본 울릉도의 바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바다가 있어 속이 시원하다는 이야기. 여기 저기 다니면서 여러 어르신께 물었다. 바다가 보여서 우울하거나 슬프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답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바다가 있어서 속이 시원하고 뻥 뚫리며 먹을거리도 많고 좋다는 답. 그런데 왜? 난, 바다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을까? 바다를 접해 보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바다라는 걸 생각해 보지도 못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렸을 때 외가가 묵호인 덕에 그나마 바다를 자주 접했다고 생각하는데, 내 안에 있는 바다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은 극복하지 못한 것일까?

 

 

 박연조 할머니 댁 옆에 늘씬하게 자란 나무. 무슨 나무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누구 아시나요?

 

 박연조 할머니 댁에 들어서는 길에 버려져 있는 말. 나 어릴 때 타던 말은 누런 말이었는데, 이제는 백마인가? 아이도, 사람도 없어지는 시골 마을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여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것도 박연조 할머니 댁 옆에 있던 떼배의 모습. 울릉도 사람은 이런 뗏목 같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미역도 따고 해산물을 채취하여 먹고 살았다. 지금은 울릉도에 가보니 나물을 많이 재배하거나 어업에 종사했는데, 예전에는 이런 배를 타고 식구의 입을 책임졌을 것이다.

 

 

다시 차를 타고 길을 나서 바로 윗비탈에 자리한 집까지 올라갔다. 집을 예쁘게 꾸미고 사셨지만, 씨앗은 없다고 하셨다. 이 집 빨랫줄을 보니 빨래집게가 재밌게 걸려 있다.

 

 

 

 

이제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다. 서면까지 나가야 식당이라도 있을 것 같아 가는 길에 지도에 표기된 마을에 들르며 나아갔다. 삼막, 말바위, 수충동. 그러나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다. 버려진 집만 간신히 버티고 서 있고, 멀쩡해 보이는 집은 그냥 농막 식으로만 쓰이는 상태였다.

서면까지 나와 맛있게 점심을 먹고 서면 남서리 나발등이라는 곳으로 올라갔다. 지나는 길에 남서고분군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들를 수 없을 것이다. 이 고분들은 옛날 옛적 삼국시대부터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아쉽지만 그냥 지나쳐 나발등에 오른다. 여기도 길이 만만치 않다. 꼬불꼬불 이리 돌고 저리 돌고 설설 기어서 올랐다.

 

나발등의 밭과 집. 밭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이 밭을 일구는 데 얼마나 많은 힘이 들었을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행히 할머니가 사시는 집을 바로 찾았다. 그런데 나물 농사만 지어서 그런 건 없다고 하시니 헛걸음인가? 경치 하나는 끝내준다. 저쪽에 아까 우리 앞을 유유히 스쿠터를 타고 지나가신 분이 계신다. 거기라도 가보자.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설 수는 없지 않은가.

 

울릉도의 전형적인 민가. 집에 외벽으로 나무판을 덧대고, 둘레에는 밭에서 나왔음직한 돌로 담도 두르고 축대도 쌓았다. 인고의 세월을 쌓아놓은 모습에 사람의 삶과 끈기를 엿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분은 아주머니였다. 마침 잘 됐다. 서둘러 찾아가 넙죽 인사부터 드렸다. 먼저 낮추고 들어가면 경계심과 의심도 풀리는 법이다. 이곳은 서면 남서1리 196 오재식(56) 아주머니의 농막이었다. 옛날에는 여기서 살았지만 이제는 농사지으러 와서나 쓰고 살기는 아랫동네에 산다고 하신다. 지나면서 본 집들 가운데 그런 집이 꽤 있는 듯하다. 오늘은 마침 배추를 절여 김치를 담그려고 올라오셨다고 하신다. 인연이 되려면 이렇게 이어지나보다. 

 

울릉도 나발등 오재식 아주머니 농막 앞의 나무전봇대. 국민학교 다닐 때 보고 처음이다. 아직도 이걸 쓰는 데가 있구나.

 

 

텃밭을 보니 채소가 많이 띈다. 먼저 채소 종류부터 여쭈어보니, 몇 가지가 있다며 찾으러 들어가신다. 가지고 오신 통에는 열무, 청상추, 삼나물 등이 들어 있었다. 상추는 같은 동네에 사는 분한테 얻어다 계속 씨를 받아서 심는다고 하신다. 잎이 크고 고르다고 하시는 걸로 보아서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간다. 열무는 7월 초에 심어 9월 초까지 키워 먹는다. 그런데 안 뽑아 먹고 몇 포기를 놔두면 가을 10월쯤에 씨를 받을 수 있단다. 그렇게 처음에는 사온 씨앗인데 몇 년 계속해서 씨를 받아 심어 먹는다고 하신다. 이건 여름에 물김치용으로 주로 먹는다. 마지막으로 삼나물은 봄에 빨간 게 올라와 한 뼘쯤 되면 그걸 잘라 삶아 말려서 나물이나 국으로 먹는다. 초즙(초장)에 무쳐 먹어도 맛있단다. 이밖에 호콩을 한 가지 더 얻었다. 날은 맑아도 좀 쌀쌀한 편인데 찬물을 만져야 하시니 얼마나 시려울까. 어머니들은 참 대단하셨다. 추우면 찬물로 세수도 하기 싫은데.

 

나발등의 한 밭. 사료용 수수를 걷어 낟가리를 만들어 놓았다. 오른쪽 끝에 보이는 하얀 곳이 바로 콘크리트로 포장한 길이다. 여기까지는 평평하지만 곧바로 45도 비탈로 곤두박질친다. 이 길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여기 깔려 있던 모래에 미끄러져 계곡으로 굴러떨어질 뻔한 아찔한 일이 벌어진 장소다. 

 

 

이제 나발등과 작별을 고할 때가 되었다. 참고로 나발등이라는 이름은 나발처럼 동그랗게 하늘만 보이는 곳에 그래도 판판한 터가 있어서 나발등이란다. 울릉도는 비탈이 많지만 그래도 그 가파른 틈 사이에 이런 곳이 있다.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사람이 자리를 잡고 살았다. 교통수단도 좋지 않았을 옛날에는 장에 나가는 일도 힘들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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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했던 눈길을 헤치고

 

 

 

 

2008년 12월 14일 일요일. 아침까지 눈비가 내린다. 어제 저녁 괜히 모텔 컴퓨터를 건드렸다가 돈만 물어주게 생겼다. 이 정도면 병이다. 가끔은 나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벽癖이 보인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지 했다가도 그런 상황이 오면 또다시 슬그머니 치밀어오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벽.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8시 30분 아침을 다 먹은 뒤, 안완식 박사님이 울릉도에 매화나무가 있다며 그쪽으로 이동하자고 하신다. 몇 번의 통화 끝에 더듬더듬 찾아갔다. 어제 농업기술센터에 찾아갈 때 어설피 짐작은 했지만 이건 뭐 바닷가를 벗어나려면 무조건 비탈을 올라야 한다. 도착한 곳은 도동항인데 이곳에서 벗어나려 해도 비탈을 올라야 한다. 도대체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눈이 와 미끌미끌한 길을, 운전을 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바퀴가 미끄덩거리지 않았을까 싶다. 기어 올라가 저동항 쪽으로 내려갔다. 저동항에서 쭉 가다가 가게를 끼고 좌회전해서 쭉 올라가면 된다는 설명만 듣고 무작정 찾아나섰다. 과연 그대로 가니 가게가 나와 그쪽으로 꺾어져 오르다 보니, 마을 사람인데도 이 눈길에 미끄러져 쩔쩔 매고 있다. 차 안에서 잠시 지켜보다 갈 길이 바쁜데 지체할 수 없어 차에서 내려 돌을 날라다 괴어 주고 밀어 주고 힘을 써 차를 뺐다. 그리고 그 차가 빠져 있던 곳을 지나 더 위로 위로...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 건가? 울릉도는 뭐 이래... 길에 보호장치도 없고 울릉도 사람이 아니면 운전하기 참 어려운 길이다. 그런 길을 안완식 박사님은 웅웅 잘만 가신다. 옆에 앉아 맘이 조마조마할 뿐이다.

길을 오르니, 그 집으로 의심이 가는 집 몇 채가 눈에 띈다. 부지런히 가서 사람을 찾으니 아무도 없다. 첫 집부터 망치나? 비까지 오는데? 안완식 박사님이 다시 한 번 전화를 거셨다. 다행이다. 바로 아래쪽에 있는 집이란다. 살살 차를 돌려서 그 집 앞에 차를 댔다.

 

처음부터 고생하며 찾았다. 울릉도는 비탈이다. 항구는 바닷길이 열린 얼마 안 된 그때부터 사람이 있었을 뿐. 옛날에는 모두 비탈에 기대어 사람이 살았다. 

 

간신히 찾아온 저동2리 148번지 작은모시개의 배흥식(73) 할아버지 댁. 처음보는 울릉도의 독특한 집 구조에 눈이 먼저 간다. 매화나무는 뒷전이고 집 구석구석을 구경하기에 더 바빴다. 울릉도는 섬이라 그런지 집이 안에 있고 그 겉을 나무를 이용해서 덧대어 바람을 막고 있다. 무엇이든지 안에 들어가 있다. 요즘이야 함석도 나오고 그래서 조금 편해졌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면 바람을 막는 일이 참 힘들고 큰일이었겠다. 그래도 그다지 춥지 않으니 다행이다.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하다. 우리나라의 남해와 서남해에는 섬이 참 많다. 그런데 북쪽으로는 섬이 별로 없지 않은가? 동해는 한류가 흐르는 곳이 많은데, 그곳은 또 어김없이 바다뿐이지 않은가? 그런게 다 자연의 섭리인가 보다.

할아버지 댁에서 울릉도의 첫 맛을 보았다. 내가 여기에 관광을 왔다면 여기까지 와 볼 수 있었을까?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가는 여행의 참맛을 본 듯하여 기뻤다. 관광을 생각하면 참 그렇다. 놀고 먹는 데에만 집중하는 관광이라 싫다. 신혼여행은 푹 쉬는 게 좋다며 다들 관광지에 가서 놀다 오라고 추천했다. 그렇지만 그건 돈도 시간도 아까운 것 같아, 아무튼 전라도 맛기행으로 주제를 잡고 전라도를 돌았다. 결론은 참 좋았다. 푸켓이 어떻고, 거시기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추억을 남길 수 있어 좋았다.

배흥식 할아버지 댁에서 매화나무 사진도 찍고, 노란옥수수와 마늘을 얻고서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배흥식 할아버지 댁 쥐덫. 울릉도에도 쥐는 많은가?

 

 

배흥식 할아버지 댁을 나와 오늘의 첫 목적지로 잡은 천부동으로 향했다. 

비탈을 조심히 내려와 가는 길에, 저동항을 못 미쳐 옥수수를 걸어 놓은 집을 발견했다. 비가 오지만 그 집을 한 번 들르자고 차를 세웠다. 얼른 뛰어가 사람을 찾으니, 할머니가 나오신다. 저동 91번지 이정숙(70) 할머니 댁이다. 콩대도 발견했는데, 그건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어서 노란옥수수만 얻었다. 할머니는 농사보다 바다일에 더 잔뼈가 굵으신 분이셨다. 이제는 몸이 많이 불편하셨는데, 혹시 모르겠다. 예전 젊었을 때는 물질도 하신 그런 분이시지 않을까? 추측만 하며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다니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어르신들은 누가 찾아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신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해서 눌러 앉아 듣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으니 그럴 수도 없다. 적당히 이야기를 듣다가 끊고 나오는 것도 일이다.

이제 다시 저동항을 지나 울릉군청을 밑에 두고 본격적으로 해안도로로 접어든다. 여전히 빗줄기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좀 달리다 보니 이거 어제 농업기술센터에 올라간 길 부근에서 사고가 났다.

울릉도의 바위는 비에 깎이길 잘한단다. 아니나 다를까, 어제의 눈비와 바람으로 길이 막혔다. 두둥!!!

굴삭기가 굴러 떨어진 바위를 치우고 있었다. 옛날에는 이런 길로 다닐 수 없었겠지. 언제 돌이 떨어져 깔릴지 모르는데 누가 이런 길로 다녔겠는가. 지금이야 찻길이 뚫리고 중장비가 있으니 다니지, 아니면 산길로 하루 걸려 넘어 다녔을 게다.

 

돌이 굴러와 그걸 치우느라 한창이다. 울릉도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한다. 해안도로가 아니라면 그냥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일이 있었을까 모르겠다. 이런 것이 아니면, 물론 다니기에는 힘들었겠지만 토종은 더 많지 않았을까? 개발되지 않았을 때 다녔으면 더 좋았으련만...

 

 

이제 지나다가 돌이 굴러 떨어져도 모른다. 돌에 부딪치면 운명이려니 생각해야지. 차를 타고 달리는데 이건 가는 곳마다 절경이다. 이런 절경을 본 댓가로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으려나?

척박한 환경이 그런 절경을 만드나 보다. 사람이 다가가기 힘들었을 때의 울릉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뭇 궁금하다.

뱅글뱅글 돌아 오르는 길을 만났다. 이야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네. 자동차를 타고 롤러코스터처럼 길을 오르고 오르니 눈이 살짝 덮인 길... 난감하다. 이거 그냥 돌아가야 하나? 인간 네비게이션을 찾으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데, 등에서는 땀이 쭉... 난 어떻게 판단해야 하나? 돌아갈까, 아니면 그대로 직진? 난감하다. 주어진 시간도 있고,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도를 보니 오르막길이긴 한데... 에라 모르겠다. 죽으면 다 함께 죽는다. 가자!

살살살살살살살살살살...... 기어서 오른다. 기어서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오르다, 천천히 기어서 내리고 내리고 내리고 내리고 내리고 내린다. 어느 정도 안전한 곳까지 와서는, 휴~... 살았다. 이런 차로, 바퀴가 다 닳아 미끄러지는 이런 차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다행이다. 이제는 한 숨을 내쉬고 해안도로를 따라 목적지로 가자. 

울릉도의 북쪽 해안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려(이곳도 물론 말이 나오지 않는 절경이다. 눈길을 벗어나니 모두들 '이야~'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천부동에 올라가는 입구에 도달했다.

 

천부동 입구에서 본 깍새섬.

 

이제 깍새섬이 보이는 천부동 입구까지 도달했다. 여기서 더 들어가야 유람선 선착장밖에 없다. 깍새섬은 깍새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깍새는 뭐랄까, 우리나라의 날지 못하는 새라고 할까? 오스트레일리아인가 뉴질랜드에 그런 새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에도 그런 새가 있었는데, 단백질을 보충하려고 배를 타고 건너가 몽둥이로 퍽퍽 잡아다 먹었단다. 깍새는 척박한 울릉도에서 유일한 단백질 보충원이라고 한다. 하여간 그런 사연 때문에 이제는 깍새가 없다고 한다. 깍새는 깍~깍 울어댄다고 깍새라는데, 그런 소리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천부동을 오르는 길에서 차를 세우고 깍새섬을 구경한 다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를 차로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안 그래도 여기까지 오려고 고개 하나를 넘으며 목숨을 걸고 왔는데 여기에 올라가다가 이도저도 못할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 네비게이션으로서 책임이 있지 먼저 앞에 뛰어가서 길이 어떤지 보겠다고 자청했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먼저 본 배흥식 할아버지 댁과 같은 구조의 집. 울릉도의 집은 원래 이런 구조라는 걸 알게 해 준 집. 사람들은 이 집을 비우고 바로 옆에 신식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먼저 올라가 보니 차가 오를 수도 있겠다. 소리 쳐 천천히 오르라고 인도했다. 그리고는 다시 차에 올라 조심조심 비탈을, 눈이 살짝 깔린 길을 올랐다. 이런 길을 오른다는 것이 경이로울 뿐이다. 물론 신발에 의존하는 나로서는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했지만, 운전하는 분들은 이런 길을 오른다는 걸 엄청 대단하고 위험한 일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조심하여 오르고 나니 바닥에는 기온이 오르며 녹은 눈길이 질척거린다. 잠깐 내려서 이런 길을 올랐다는 걸 사진으로 남겼다.

 

 바닥에 난 바퀴자국, 눈비에 젖지 않으려 카메라를 감싼 검은비닐봉지. 이건 사진으로 봐선 모른다. 그날 함께 한 사람들은 모두들 놀랐다.

 

눈이 살짝 쌓인 길을 올라 바라본 바다. 찌뿌둥한 하늘에서는 여전히 가벼운 비를 뿌렸다.

 

 

이제 다시 차에 올라 본격적으로 마을로 들어섰다. 산꼭대기 마을에는 교회가 하나 들어서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차들은 교회 주차장에 몰려 있다. 강화도에서도 그랬지만 일요일과 장날은 피해야 마을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겠다. 특히 울릉도는 이제 산에서는 사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하다. 비탈길을 기어올라 둘러보면 빈 집이 눈에 많이 띈다.

 

울릉도에 가면 모노레일이 많이 보인다. 이제 울릉도 농사는 나물. 비탈인 지형을 고려하여 모노레일을 깔아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한다. 몇 년 전 유럽의 유기농을 보며 자동화 시스템으로 한다는 걸 봤는데,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다. 무엇이든 사람이 빠지는 만큼 몰인간성의 댓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역시나 기본은 사람이고, 짐승이며, 생명이다.

 

 

그렇게 이 집 저 집 들락거리다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을 하나 발견했다. 차로 들어가기는 어려워 길 중간에 세워놓고 걸어서 찾아갔다. 찾은 곳은 북면 천부4리 석포동 2번지, 김원길(72) 김필귀(67) 어르신 댁이다. 눈길에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며 일단 들어오라신다. 몇 번을 아니라고 했으나 결국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온몸에 퍼지는 그 짜르르한 온기... 너무 좋다. 들어가니 커피부터 타 오신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토종 이야기가 나오자, 이제 울릉도도 육지 것과 똑같고, 토종은 개량되어서 거의 없다고 하신다. 육지에서 들어온 옥수수가 울릉도의 강한 바람과 만나 거의 섞여 버렸다고 하신다.  그래도 내년에 심으려고 놔두신 것 좀 보자고 하여 함께 광으로 갔다.

 

광 입구에는 옥수수를 매달아 놓으셨다. 울릉도에서는 옥수수를 이렇게 보관하나 보다. 신기한 모습에 사진부터 한 장 찍어 놓았다.

 

 

울릉도의 옥수수 보관 방법. 다른 집에서도 거의 이런 식으로 옥수수를 보관하고 있었다.

 

 

역시 할머니. 할머니는 꼭 뭔가를 꽁꽁 동여매서 한구석에 꿍쳐 놓으신다. 어릴 적 다락문이 열리면 나오던 군것질거리를 보며 할머니는 마술사인 줄 알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게 밥에 넣어 먹는다는 울콩과 떡고물 하면 참 맛있다는 홑콩과 광 입구의 메와 찰이 섞인 강냉이를 얻었다. 좋은 거 주셔서 고맙고 차도 잘 마셨다고 인사를 드리고 이만 집을 나섰다.

 

다시 차에 올라 이번에는 곡예를 하듯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어제 모텔 주인 아줌마가 현지 사람 아니면 운전하기 힘들 거라는 말을 이제야 실감했다. 이건 가드레일이라도 만들어 놓으면 안 되나? 게다가 차까지 그리 좋지 않으니 더 위험하다.

 

이 바위들을 몇 번을 지나쳤는지 모른다. 헌데 이제와 돌이키니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여러 각도에서 보면 그때마다 다른 모습을 찾을 수 있던 재미가 있었다. 혹시 이 바위가 무슨 바위인지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좋겠다.

 

 

다음 목적지는 현포리 옥녀봉이라는 곳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온이 올라 눈도 녹았고, 지도를 보니 등고선도 그리 좁지 않으니 더 수월하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정도 오르자 여전히 눈이 쌓여 있다. 토종다운 집이 있어 먼저 그 집부터 들렀다.

문이 꼭 닫혀 있는 게 아무도 없는 듯하다. 허나 울타리부터 눈길을 잡아 끈다. 이 울타리는 거센 바닷바람을 막으려고 옥수숫대로 엮어 만든 것이 아닌가! 울릉도 사람들은 옛날에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집이다. 나리 분지에 울릉도 전통 가옥을 지어 놓았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죽은 집이다. 이 집이야말로 살아 있는 집, 그렇지만 관광지로 개발하자고 달려들면 큰일날 일이다. 관광 자가 붙자마자 곧 망가지는 걸 수도 없이 보았다. 아직은 관광=돈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이다.

 

 

 바닷바람을 막으려는 옥수숫대 울타리 너머로 눈 덮인 송곳산이 보인다. 다시 봐도 절경. 감탄만 나온다. 슥- 구경은 참 잘했다.

 

 

혹시나 하여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할머니~." 할머니가 나와야지 할아버지가 나오면 꽝이다. 잠시 뒤 부스스한 머리의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시간으로는 딱 나른한 시간을 즐길 때이다. "할머니 옛날부터 심는 씨앗, 토종 있어요?"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물끄러미 보며 생각하신다. 이때다. 있다. 다시 한 번 강하게 묻는다.

"왜, 옥수수 있잖아요?"

"있지."

됐다. 이제 됐다. 이곳은 북면 현포2리 92번지 김용호(75), 김만복(70) 어르신 댁이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여기가 토종의 집합소임을.

 

하나하나 씨앗을 꺼내 보여주시는 김만복 할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들이 토종을 지키고 이어왔다. 할머니도 그러한 분들 가운데 한 분이시다.

 

 

먼저 다 두드려 뿌렸다는 옥수수를 시작으로, 메주콩 두 종류, 검정콩, 콩나물콩이 줄줄이 나왔다. 거기에 돌아서다 본 호박에 밭에 심은 부지깽이 나물까지... 또 고추는 없냐는 물음에, "고추 있지" 하며 보여주신 광에서는 할머니의 종자 보관법까지 배울 수 있었다. 

 

김만복 할머니의 종자 보관법. 

1. 먼저 할아버지가 드신 소주 댓병을 버리지 않는다. 

2. 잘 씻어서 물기가 없도록 싹 말린다.

3. 종류별로 씨앗을 담아 서늘하고 바람 잘 통하는 곳에 걸어 놓는다. 이때 입구는 막지 않는다.(다음해 곧장 심을 테니)

 

 

돌아서려 했지만 돌아설 수 없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집에서 풍기는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완식 박사님께서 촬영에 열중이실 때, 난 여기저기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소를 키운 흔적이며, 소에 메웠던 것이 틀림 없는 후치(여기서는 훌찌라고 한다), 외양간이며, 울타리를 엮은 칡덩굴.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배울거리였다. 아, 시간이여. 언제 다시 여기를 올 수 없을까? 울릉도를 드나들기에는 너무 멀고, 여기서 살자니 집에서 쫓겨날 테다. 누가 나에게 돈을 달라! 그러면 먼저 마누라를 꼬시고, 함께 이곳에서 살며 울릉도 사람의 하루하루를 기록으로 남기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창출하겠으니! ㅋㅋ

 

 

 

외양간의 모습. 구유와 바닥은 신식으로 세멘으로 발랐다. 하지만 소는 보이지 않는 까닭은? 추워서 뒤란에 추위를 피하는 전용 공간에 모시고 있었다. 아직도 소를 고기가 아닌 식구로 대하며 함께 살고 계셨다.

 

집을 들쑤셔 놓고 떠나는 우리를 배웅하러 나오는 할머니. 할머니에게는 어쩌다 생긴 재밌는 일이시지 않을까? 언제 다시 찾아가 '저 또 왔어요'라고 말하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문득 안완식 박사님께서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신 분홍감자 할머니가 생각났다. 

 

 

옥녀봉까지는 힘들어도 내려오면서 다른 집을 들렀다. 현포2리 258번지 최분삼(78) 어르신 댁이다. 솔직히 많이 기억나지 않는다. 배가 고팠나? 밥 먹을 생각밖에 없었나? 그냥 사진에 옥수수만 매달려 있다. 너무 죄송스럽다. 김만복 할머니 댁에서 겪은 일이 너무 강했을까? 이렇게 정리하는 시간이 너무 지나서 그렇다며 스스로 위안을 삼아 본다.

 

최분삼 할머니 댁 옥수수. 노인네가 참말 대단하다.

 

마찬가지.

 

 

안 그래도 점심을 먹어야지. 매번 끼니 때를 놓치기 일수다. 하지만 덕분에 난 하루 세 끼를 먹고 다닌다. 원래는 하루 두 끼를 먹는데 이번 조사 때문에 세 끼를 먹고 있다. 그래서인지 몸이 불고 있다는 걸 느낀다. 원래 이맘때에는 먹은 만큼 안 먹어서 푹 삭히는 시기인데, 그게 되지 않고 있다. 이상하게 농사를 짓고 나서부터는 해가 뜨면 일어나고 지면 자고, 가을에는 먹고 봄에는 안 먹는 그런 삶을 산다. 이번해에 겨울잠은 글렀다.

 

 

점심을 먹은 곳에서 한 장. 날씨가 안 좋아서 그런가 쉬는 배들이 많다. 어릴 때 묵호항에서 본 바에 따르면, 쉬는 배가 있는 건 바다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런 날에 나간 배는 뭐야?? ^^

 

점심을 먹고 다시 토종을 찾아 나섰다. 지도에 표기된 곳은 거의 다 찾아가서 표시표시하고,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돌아다녔다.

역시나 농사지을 만한 곳을 빼고 다른 곳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이 문장은 한 줄 띄기이지만, 여기에 담긴 큰 의미는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토종과 관련해서...

헤매고 헤매다 마지막으로 잡은 현포항을 조금 지나 다시 도동항으로 가는 길에, 한 집에 등불이 보였다. 경험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깜깜한 어둠에 집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이 있읍면 켜 놓는 백열등 불빛.

그 불빛을 보고 감히 찾아갔다. 가니 할머니 두 분이 재밌게 부엌일을 하고 계셨다. 

예의 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리고 씨앗을 얻었다. 김순남(80) 할머니. 호박하고 보리하고 참팥하고 들깨.

 

 

 너희들 왔으면 이거 맛보라면서 주시는 김순남 할머니.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시면 좋은데...

 

 

울릉도를 다니며 남긴 기록이다.

울릉도는 구나 웃으며 반기는 분위기. 추운데 들어오라는 말은 가장 많이 들은 말. 이방인에게 경계를 품지 않는 건 왜일까? 개마저 사람을 보면 반가워 꼬리치며 좋아한다. 여기에서 사납게 짓는 개는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제 나이보다 적어도 열 살은 어려 보인다. 왜일까?

열린 마음, 따뜻한 시선, 긍정적인 사고의 힘일까? 울릉도 사람의 밝음, 환대는 확실히 도시의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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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를 향하여

 

 

 

2008년 12월 13일 토요일 새벽 2시, 알람 소리에 맞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 속에서 뭉기적거리고 싶은 맘을 꾹 누르고 세수를 하고 가방을 꾸렸다.

새벽 3시, 안철환 선생님을 집 앞에서 만나 화성 봉담의 안완식 박사님 댁으로 출발했다. 안완식 박사님 댁에서 이러저러한 짐을 챙기고, 다시 병점 근처의 박문웅 선생님 댁에 들렀다. 이제 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에서 한영미 선생님만 만나면 울릉도에 함께 갈 일행이 모두 모인다.

대전 톨게이트롤 나와 얼마 헤매지 않고 금방 한영미 선생님을 만났다. 그럼 울릉도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포항으로 Go! Go! GO!

 

울릉도에 들어가는 배는 묵호항과 포항항 두 곳에 있다. 그런데 묵호항은 여름 성수기에만 운행을 한다기에 할 수 없이 포항까지 가야 한다. 아무래도 묵호가 더 가깝고 배를 타고 가는 길도 그렇지만, 배가 뜨지 않는다니 할 수 없지 않은가?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아침도 먹고, 안철환 선생님에서 한영미 선생님으로 운전사가 바뀌었다. 나는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인간 네비게이션의 역할을 수행하고...

아침 9시 10분 포항에 도착했다. 포항을 둘러볼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어 그대로 포항항으로 직행. 바다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바다 냄새나 비린내에 민감한 나, 배멀미를 이길 자신이 없어 집에서 출발할 때 이미 멀미약을 귀 밑에 붙였다.

미리 예약했지만 돈을 지불한 것도 아니고 좀 어설프다. 안철환 선생님은 자신의 차를 가지고 울릉도에 가고자 했으나, 며칠 동안 날씨가 좋지 않아 배가 뜨지 못한 상태이기에 이미 차량 예약을 꽉 차서 어쩔 수 없단다. 할 수 없이 울릉도에 건너가 차를 빌려야 한다. 매표소에서 예약 사항을 확인하고 할인을 받았다. 한영미 선생님만 빼고는 경로우대와 복지할인 혜택을 받는다. 5명 가운데 4명이 할인이라 어디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곳에 가면 그대로 공짜 통과이다.

 

드디어 배에 올라탔다. 날씨가 흐리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울릉도도 처음이고, 섬에 가려고 배를 타는 것도 처음이라 속이 더 울렁거린다. 멀미약을 붙이길 참 잘했다. 아니나 다를까 배를 타고 갈수록 날은 더 흐려지고 바람까지 불어 배가 출렁인다. 한영미 선생님은 마지막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셨다. 후~ 올 때도 잊지 말고 멀미약을 챙겨야지.

오후 13시 30분, 울릉도에 내리니 갈매가와 거센 바람이 맞아준다. 오늘은 웬지 꼭 비가 오겠다. 내리자마자 항구 근처의 성인봉 모텔을 잡아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차를 빌리러 도동항에 나갔다. OK렌트카라는 곳에서 투싼이란 차를 빌리고 꼼꼼히 구석구석 점검했다. 타이어가 심하게 닳은 것 말고는 겉보기에 큰 이상은 없었다. 바로 계약이 성사되고 바로 옆 식당에 들어가 울릉도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시켜 먹었다. 난 오징어 내장탕. 어릴 때 외가가 묵호라서 한두 번씩 먹던 그런 국이다. 별 새로울 것이 없군.

 

오늘부터 조사에 나설 수는 없었다. 시간도 어중띠고, 긴 이동 거리에 피곤하기에 그렇다. 그리고 울릉도를 돌기 전에 미리 울릉도의 사정을 알아야 하기에 더 그랬다. 안완식 박사님의 인도로 16시 울릉군 농업기술센터를 방문했다. 그러나 토요일이라 대부분의 직원은 출근하지 않고 당직을 서는 사람 몇 명만 출근했다. 아쉬운 대로 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을 붙들고 울릉도의 농업 사정을 들었다.

 

울릉도에서는 70년대까지 옥수수와 감자가 주식이었다고 한다. 이제는 배도 다니고 특산품도 많아져서 다들 쌀을 먹고 산단다. 하지만 옛날에는 논이 적어 보리나 조금 농사지어 먹었다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짐작이 간다. 울릉도 사람들의 질긴 생존력으로 지금까지 이렇게 버텨 왔으리라.

요즘 울릉도에서는 호박과 더덕의 재배가 늘고 있다고 한다. 호박은 호박엿 덕에 그렇겠고, 더덕은 울릉도만의 독특한 맛과 향이 있다니 한 번 더덕구이라도 먹어볼 일이다. 그밖에 명이와 고추냉이는 울릉도만의 특산이고, 요즘은 산채가 특히 많이 늘었다고 한다. 실제로 울릉도를 다니면서 강원도에서 고냉지 채소를 재배하듯 산채를 재배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일천궁과 섬바디에 대해서도 들었는데, 일천궁은 자생은 아니고 육지에서 가져다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토질을 악화시키고 연작 피해로 이제는 거의 재배하지 않는다고 한다. 섬바디는 워낙 섬에서 많이 자라 그냥 사료로 쓴단다.

울릉도는 다들 알다시피 화산암 토양이다. 그래서 물이 잘 빠지고, 공기도 잘 통한다. 일조량만 적당하다면 기온과 습도도 높아 별 어려움 없이 여러 작물이 잘 자란다. 작은 섬이고 어업이 발달한 곳이기에 농사는 어려울 줄 알았는데, 어업은 요즘 들어서 활발해졌고 농사짓기 좋다니 놀랄 일이다. 이제 세상이 좋아져서 교통과 통신 수단만 받쳐주면 이런 곳에 사는 것도 그리 힘들지 않은가 보다.

그리고 울릉도의 생태계에는 뱀과 개구리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요 근래 누군가 개구리를 사육할 목적으로 가지고 들어와 생태계 교란이 일어나고 있단다. 개구리만이 아니라 꿩과 다람쥐도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아주 걱정이 많다. 꿩도 사육 목적으로 들여온 것이 태풍에 사육장이 망가지며 탈출해 이렇게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그런 생물이 하나둘이랴? 황소개구리가 그렇고, 베스나 블루길도 그렇고, 흰민들레도 그렇고, 셀 수 없이 많다. 그렇다고 서로 전혀 교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인위적으로 들어와 천적도 없이 다른 생물에 큰 피해를 끼치는 것이 문제이다. 요즘 날이 따뜻해지고 있는데, 친환경농업에서 많이 쓰고 있는 왕우렁이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대부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경험한 것이 있어 영 마음이 놓이진 않는다. 계속 지켜봐야 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울릉도에 토종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물어보았다. 그 답은? 이제 곡류는 거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옛날에는 자급을 할 때라 많았겠는데, 이제는 산에나 올라가야 있을까 잘 모르겠다고 한다. 토종의 가치는 아직 울릉도에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가 보다. 뭐 종자와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누구나 다 그렇게 답할 것이지만 말이다.

 

숙소로 돌아오려고 농업기술센터를 나섰다. 맛있다고 소개해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걱정하던 대로 과연 밤이 되자 매서운 비바람이 몰아쳤다. 설상가상 밤이 깊어지자 비는 눈발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일 조사를 다닐 일이 걱정이다. 울릉도는 비탈이 많다고 들었는데 어떨지?

 

농업기술센터에 들렀다가 내려와 잠시 바다를 구경했다.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을 넘으면 도동항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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