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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동-물질문화의 개념 수정과 연구 전망.pdf


한국 민속학에서 물질문화 분야는 ‘후발주자’일 뿐만 아니라, ‘연구자층도 엷고 연구성과도 미미하다’는 것이 주요 과제이다. 필자는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물질문화에 대한 개념을 검토하여 바람직하게 정립”함으로써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더 나아가 앞으로 물질문화 연구가 갖추어야 할 “연구의 시각과 과제에 대하여 모색하고 논의하고자 한다.”

필자는 그동안의 문화 연구에서는 물질문화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으며, 물질문화를 인공물 자체로만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문제의식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물질문화는 ‘인공물과 문화의 결합체’로서, 인공물은 물질문화를 연구하는 ‘물질문화자료’이기에 물질문화 연구는 인공물 그 자체가 아닌 행위 중심의 개념을 설정하고 연구해야 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를 바탕으로 인공물 제작(생산)과 사용(소비)의 기술적·정치적·경제적·이념적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앞으로 물질문화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제시한다.

이에 따라 먼저 물질문화의 연구대상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문화의 정신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물리적 형상을 가진 대상물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하지만 필자는 물질문화란 “엄연히 우리의 생활세계를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문화를 “사람들의 생각·행위·물건들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형성된 생활방식으로 규정”한다면 성립이 가능한 용어라고 본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계점은 존재한다. 그건 바로 물질문화의 연구대상인 인공물에 대한 문제이다. 물질문화라고 했을 때 “인공물을 문화의 범주 속에 수렴한다는 뜻을 내포하지만, 인공물이 곧 문화인 것처럼 오도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곧 인공물 자체만을 물질문화의 연구대상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물질문화를 인공물 그 자체의 물리적 속상과 체계뿐만 아니라, 인공물의 제작(생산)과 사용(소비)에 관한 인식체계와 행위체계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수정하여 규정”하고, ‘인공물(물질문화자료)’과 ‘물질문화’를 구분하여 사용하자고 제창한다.

필자의 지적처럼 인공물(물질문화자료)은 인간의 문화 행위의 과정에서 나타난 산물로서, 결국 물질문화 연구는 “인공물을 포함한 행위 중심의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봐야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물질문화라는 용어 자체가 “물질중심의 개념인데다가 문화를 정신과 물질로 양분하는 것이 문제이므로, 물질문명과 정신문화를 아우”를 필요가 있다는 임재해의 지적은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물질문화가 인공물을 포함한 행위 중심의 개념이라면, 인공물과 문화에는 어떠한 경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행위의 과정을 통하여 생성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공물이 지닌 의미와 기능은 문화 행위의 과정을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밝혀져야 하는 것으로서, 문화에 선행하는 물질적 대상 또는 문화와 별개의 것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문화 연구는 정신문화와 확실히 구별되는 영역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크게 문화라는 영역 안에서 물질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문화 현상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연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임재해가 제시한 文物이란 용어는 유의미하다고 하겠다.

물론 그렇다고 민속문물이란 용어가 아주 적합하다고 하기에도 어려운 점이 있다. 필자가 주장하듯이 그동안 이루어진 문화 연구에서는 주로 정식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인공물, 특히 행위 중심의 개념으로서 물질문화의 영역을 소홀히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물이란 용어에 물질이란 개념을 뜻하는 物이란 단어가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그 용어 자체가 주로 정신문화의 산물을 뜻할 때 사용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지적하듯이 물질문화 분야의 연구는 “여타 분야에서 얻어낸 결실을 재확인”하고 “다른 분야 연구에서 파악되지 못한 사실을 추가로 찾아낼 수 있”는 것으로서, “문화연구의 영역을 확장하고, 그 이외 분야에서 해명하지 못했던 사실을 구명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

문화(culture)는 경작한다는 뜻의 ‘cultivate’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인간은 저마다 주어진 자연환경에 알맞은 경작이라는 인위적인 행위를 기반으로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현재와 같은 생활양식(문화)을 만들어 왔고, 지금도 끊임없이 그 과정 속에 있다. 그렇기에 문화 연구는 그러한 생활양식의 과정, 필자의 표현에 따르면 행위 중심의 개념을 설정하여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문화의 생성 기반인 물질문화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의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자연환경에 적합한 경작이라는 물질적 행위가 먼저 있었고, 그를 바탕으로 정신적 영역을 구축해 온 것이 인간의 문화사였다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자연환경은 그를 정복 또는 적응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문화 양식을 낳았고, 과학기술의 발전 등에 따라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각자의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따라서 문화의 정신적 측면이라 할 수 있는 정치, 경제, 사회, 사상, 의례, 신앙, 기술, 예술 등의 영역은 문화의 물질적 측면에 대한 연구를 통해 더 구체화되고 세밀한 분석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물질문화와 정신문화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민속이란 개념 아래에 물질문화와 정신문화가 그 하위영역으로 자리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논의를 전제로 필자가 제시한 물질문화 연구의 출발점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는 자신의 논의를 바탕으로 ‘자연-인공물 체계 분석’과 ‘사회-인공물 체계 분석’이란 두 가지 방법론을 제기한다. 필자가 제시한 그림에 따르면, 두 분석은 서로 겹치지 않는 영역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자연환경이란 조건이 가장 큰 영역이고 문화는 그를 정복 또는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라면, ‘자연-인공물-사회 체계 분석’이라는 더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시각으로 문화를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는 자연과 사회라는 외적인 조건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주체적인 행위와 그 산물인 인공물을 통하여 문화를 형성·유지·전승·변형해 왔는지, 더 나아가 자신의 주체적 행위와 인공물을 통하여 어떻게 자신에게 주어진 외적인 조건을 형성·유지·변형해 왔는지 탐구하는 방법을 뜻한다. 그러한 큰 틀에서 인공물의 제작(생산)과 사용(소비)의 문화 분석이 이루어질 때, 자연적·정치적·사회적·경제적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 물질문화의 온전한 모습을 조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문화를 다루면서 물질(인공물)의 문제는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그것은 인공물 자체에만 집중할 경우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가거나 문자기록의 부재를 인공물로 대신하려 할 경우 고고학의 영역과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공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물질문화의 영역에서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인공물 자체가 아닌 인공물이 놓여 있는 자연환경적,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행위 중심의 개념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인공물은 인간의 주체적 행위와의 관련 속에서만 그 존재 가치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인공물을 인공물 자체로 바라볼 때 그것은 자연과학의 연구대상일 뿐이다. 그러한 인공물은 인간의 문화적 행위과정과 연관하여 살필 때에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문화 연구의 맥락 속에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필자의 박물관에서 물질문화 분야의 연구를 진흥하고 선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사라져가는 물질문화자료를 보존한다는 측면에서 역사사료적·교육적 가치는 있을지언정, 필자가 강조한 현장의 행위 중심의 개념을 중시하는 물질문화 연구의 입장과는 다소 상충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의 “물질문화 연구가 계속 발전할 수 있는 토대”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일반인들에게 물질문화자료를 통해서도 사회와 문화에 관한 이해의 깊이와 폭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란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잔존문화에 대한 샐비지 민속학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행위 중심의 개념을 중심으로 물질문화를 연구한다면 이런 연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물질문화로 손꼽히는 ‘자동차 문화’가 그것이다. 현재 자동차는 거의 집집마다 한 대씩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와 관련하여 물질문화 연구의 소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동차의 생산양식이 자연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또 자동차의 도입과 확산이 우리의 생활양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앞으로 자원고갈과 환경파괴 등으로 인한 자동차 문화는 어떻게 바뀌어 나갈 것인지 등 현대 사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물질문화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있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제시한 “민속학에서 물질문화 연구는 전근대사회의 전통성이 짙은 물질문화자료, 신분적으로 기층민들의 물질문화자료를 주요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란 주장에도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운 바이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은 ‘전통성이 없는 기층민의 물질문화자료가 아닌 것’은 물질문화의 연구대상으로 삼기 어렵다는 말처럼 들린다. 또한 더 큰 문제는 필자가 물질문화 연구의 기본 관점으로 삼고 있는 행위 중심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는 점이다. 현재 전근대사회의 전통성이 짙은 물질문화자료는 마당이나 창고의 한구석에서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는 상황이다. 그것은 문화 행위의 현장에서 더 이상 조명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한 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유물로서 물질문화자료를 다루는 것이라면 역사학이나 고고학에서 하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 충분하지 않을까. 단순히 유물이 아닌, 곧 인공물 그 자체가 아닌 생산(제작)과 사용(소비)이라는 문화 행위 속에서 드러나는 물질문화자료의 연구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현장을 바탕으로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기층민이란 연구대상은 전근대사회에서는 유의미했을지 몰라도 신분제가 폐지된 현재에는 적합하지 않은 구분이다. 앞에 예를 든 자동차는 기층민(실제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만)이라고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문화적 차이는 존재할지언정, 더 이상 문화적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물질문화 연구가 전근대사회의 전통성이 짙은 기층민들의 물질문화자료를 주요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은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그의 주요 논지와도 걸맞지 않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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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한국민속학의 범주와 영역의 혼재.pdf


이 논문은 부제에도 달려 있듯이 ‘한국 민속학의 비속화와 아마츄어리즘’이란 문제를 전면으로 부각시켜 논의하고 있다. 필자의 주장에 따르면 비속화와 아마츄어리즘은 일반인이 아니라 학문을 전공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 민속학과 일부 중첩되는 학문 영역을 다루면서 마치 그것이 민속학의 전체인양 호도하는 다른 학문의 학자, 외국에서 수입된 이론을 맹목적으로 좇아 한국의 민속, 더 나아가 민속학을 재단하는 학자 들이 대표적이다. 민속학을 ‘아무나 민속학’으로 다루는 사람들에 의해서, 민속학은 ‘거리의 여인’과 같은 취급을 당하며 아마츄어리즘으로 전락하는 ‘방황’을 겪고 있다고 지적한다.

필자가 이러한 내부 비판에 나선 이유는 필자 스스로도 밝혔듯이 “학문에서의 발전,” 민속학의 발전을 위해서다. 필자는 학문의 발전은 ‘엄정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소신에 따라 스스로 총대를 메고 나선다. 한마디로 그동안의 비속화와 아마츄어리즘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맞는 민속학의 위상을 정립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한국 민속학의 현주소를 확인한다. 그가 파악한 한국 민속학의 위치는 첫째 아직 식민사관을 해결하지 못했고, 둘째 학문 재생산 기반이 취약하며, 셋째 민속학의 학문적 정체성이 미흡하다고 본다.

이렇게 한국 민속학의 현재를 진단한 뒤, 한국 민속학이 학문적으로 존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 그래서 민속학·민속학사·민속사라는 항목을 설정해 한국 민속학의 일반적 정황을 살펴본다. 먼저 민속학과 관련해서는 “결론적으로 한국 민속학의 학문적 정체성은 … ‘종합학문’적인 성격을 지니면서, 종내는 ‘독립학문’으로 나아가는 노정에 있다”고 파악한다. 그래서 “학문적 개방성과 독자성란 양면을 고려하는 가운데 명실상부한 ‘21세기 민속학’으로 정당한 자리매김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민속학사와 관련해서는 민속학사를 연대기적으로 크게 6개의 시기로 나눈 뒤, 북한의 민속에는 무관심한 남한 민속학의 경향성을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민속사와 관련해서는 민속학과 연관 있는 고문헌 연구와 사회변동에 따른 민속의 변화 연구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필자가 전망하는 민속학의 미래는 그가 쏟아낸 비판처럼 암울하지만은 않다. 이 논문이 갖는 의의는 바로 이 점에 내포되어 있다. 이 논문은 민속학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란 형태로 우리나라 여느 학계에나 만연해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는데, 민속학에는 아직 판도라의 상자처럼 희망이 남아 있다. 필자가 제시하는 희망은 일반인의 민속에 대한 수요 급증, 연구자의 저변 확대, 다양한 민속 관련 박물관의 등장 등이며, 그 가운데 민속학의 현장성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고 있다. 바로 이러한 민속학의 현장성을 바탕으로 앞에서 제시한 민속학의 ‘종합학문’적인 성격으로 인해 가능해지는 여러 학문과의 연계를 통한 연구를 강화하면서, 한편으로는 민속학 나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독립학문으로서의 체계를 세워나가는 일이 민속학과 그 연구자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법고창신의 길’이자 21세기 민속학의 희망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먼저 필자의 논의 전개가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점이다. 비판은 냉철함을 무기로 사실에 근거하여 이루어질 때 더욱 효과적이고 의의가 있다. 그런데 필자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듯이 감정적으로 글을 쓰고 있어 아쉽다. 그것이 필자가 전제했던 “새로운 글쓰기”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필자가 의도한 ‘논쟁의 촉발’이 아니라 ‘싸움의 촉발’로 이어질 듯하다. 다음은 북한의 민속학과 관련해서이다. 현재와 같은 정치상황에서는 북한의 민속에 관심을 기울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민속학은 필자의 지적처럼 현장성이 강조되는데 북한은 접근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필자의 ‘통일의 민속학’이란 주장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현실적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또한 처음부터 ‘봉급쟁이 연구자’나 ‘官俗’을 위한 연구를 위하여 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두 생계의 문제로 인해 일어나는 일인데, 이를 피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 수 있는지 필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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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등학-21세기 민속학의 과제와 전망.pdf


민속학계에서는 그동안 ‘민속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논의를 전개해 왔다. 필자는 그 논의의 결과, 한국 민속학은 “인접학문이 많은 것을 특징으로 하는 독립학문이며, 과거는 물론 당대의 문제를 다루며, 나아가 미래를 전망해야” 한다는 합의를 이루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제는 그 합의를 “실천에 옮기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근대 이후 형성된 “민속의 성격과 범주를 다시 검토하고 아울러 21세기 민속학이 감당할 과제를 모색”한다.

먼저 필자는 민속을 크게 ‘전통민속’과 ‘신생민속’으로 나눈다. 그에 따르면 전통민속은 생산을 담당한 피지배계급인 ‘민중’이 형성한 기층문화이고, 신생민속은 근대의 신분제 폐지와 산업화가 전개되며 도시에 사는 소시민과 서민이 형성한 범류문화이다. 필자가 범류문화에 주목한 것은 새롭게 형성된 중산층의 민속을 다루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러한 범류문화를 예술 영역 중심의 대중문화와 생활 영역 중심의 민속문화라는 두 범주로 나눈다. 필자는 이러한 범주화를 통해 기존의 민속학에서 다루던 과거의 민속에서, 사회의 변화와 함께 새로이 형성된 현재의 민속을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필자는 이러한 범주화를 바탕으로 “민속학이 나아갈 방향과 과제”를 살펴본다. 그는 “민속학계에는 과거 읽기와 현재 읽기의 두 가지 시각이 서로 다른 비중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신생민속을 다룰 때는 “그 연원이 오래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현재 읽기”와 연계되어야 한다고 본다. 근대 이전의 전통민속을 다룰 때는 과거 읽기의 방식이 알맞은데, 그러한 연구가 있어야 현재 읽기도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생활문화가 민속학의 화두”로 떠오르는 21세기 민속학에서는 현재의 생활문화를 읽는 현재 읽기의 방식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과거 읽기와 현재 읽기가 균형을 이룰 때, 민속학이 역사성을 띠는 전통민속의 흐름도 놓치지 않으면서 당대의 신생민속을 다루는 과거학이자 현재학으로 정립될 수 있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민속학의 현장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민속학이 과거학이자 현재학으로 정립될 때 비로소 인접학문의 종속학문이 아닌 독립학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제 필자의 논문을 읽으며 드는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겠다. 필자가 ‘문화적 실현주체’로 주목한 도시의 서민(민중)과 소시민 및 그들의 범류문화와 그에 대비되는 상류의 엘리트 및 상류문화라는 구분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민속학에서 다루는 대상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 그 문화라고 볼 수 있다. 헌데 그의 구분에 따르자면, 과거의 지배계급은 한반도에 살던 사람이 아닌 것인지, 또 그들에게는 민속이 없었던 것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현대의 상류층에게는 민속이 없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현대는 과거처럼 지배-피지배계급이란 구분으로 명확하게 계층을 나누기 어려운 시대다. 그만큼 어디까지가 상류문화이고 어디까지가 범류문화인지 그 경계를 나누기도 쉽지 않다. 그의 지적처럼 “현대민속은 더 이상 기층만의 문화”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필자는 여전히 ‘기층의 민중’이 ‘민속문화’를 향유한다고 보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아직도 일반 서민, 민중은 지배계급의 억압을 받으며 자신들만의 고유한 어떠한 문화를 누리고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닌가. 그의 이러한 시각은 아키바 다카시의 ‘이중구조’ 논리라는 이분법적 관점의 연장선에 있는 듯하다. 이분법은 문화현상을 我와 他로 나누어 될수록 빨리 쉽게 분류·이해하려는 데에서 온 것이다. 현대 사회와 그 문화는 다양한 사람들로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다. 그것은 교통과 통신 같은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때 현재학으로 정립하고자 하는 민속학에서는 민속문화를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필자가 언급했듯이 기능 등의 새로운 분석법이 요구되고 있는 현실이다.

또 필자도 인정하듯이, 그의 문화 구분 ―고급문화, 범류문화(대중문화, 민속문화)― 은 “주로 예술에 한정될 때만 타당하다.” 그렇다면 다양한 사람들이 영위하고 있는 현대의 생활양식은 어떻게 범주화하여 연구대상으로 다룰 것이냐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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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선-이능화 학문의 방법론적 의의와 한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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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돈희-한국민속학사의 재조명.pdf


필자는 그동안 한국 민속학사와 관련된 선행연구 들에서는 한국 민속학의 학문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기원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현 시점에 더 중요한 일은 한국 민속학이 갖는 ‘역사복원적’이고 ‘민족주의적’이라는 이론의 문제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한국 민속학이 지닌 이론적 문제점의 원인으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이다. 물론 실학이 한국 민속학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주장이 지닌 몇 가지 한계를 지적한다. 첫째 조선과 유럽의 정치경제적 상황은 차이가 있었다는 점, 둘째 유럽 민속학자와 조선 실학자의 관심이 서로 달랐다는 점, 셋째 실학자의 민속학적 관심이 과연 학문적 내용이냐는 점이다.

필자는 한국 민속학이 실학보다는 한국과 일본의 독특한 사회적 관계, 곧 식민지라는 시대적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 근거로 리차드 M. 도슨이 한국 민속학 연구의 특징으로 지적한 역사복원적이라는 점과 민족주의적인 관점이 강하다는 점을 든다. 이를 증명하고자 그는 한국 민속학의 선구자라고 평가를 받는 최남선의 민속학 연구에 주목한다. 최남선의 민속학 연구가 정치·사회적 및 지적인 상황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지성사의 측면에서 분석함으로써, 한국의 민속학이 “일본 민속학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는 종래의 민속학계 주장에서 탈피”하고자 한다.

먼저 필자는 최남선이 살았던 정치·사회적 배경을 분석한다. 그가 가장 크게 주목하는 것은 3·1운동 이후 실시된 1920년대 일제의 ‘문화동화정책’이다. 이 기간에 일련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문화운동이 활발히 일어났기 때문인데, 필자는 조선 민속학 연구가 바로 그러한 시대의 산물이라 본다. 당시 그를 통해 탄생한 문화민족주의자들 사이에 “조선사회의 개혁을 위하여 조선의 전통문화 위에 서구의 가치와 제도를 접목시킨” 신문화의 창출이란 목표가 있었는데, 그 결과 조선 고유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민속학 연구가 태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언급처럼 이때는 일제의 문화동화정책이 실시되던 시점으로, 그 정책과 민족문화운동의 상관관계를 더욱 면밀히 살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 ‘공산주의 민족주의자’는 “체계적으로 사정없이 탄압제거”한 반면 ‘문화민족운동가’는 너그러이 대했는지, 또 왜 ‘문화민족운동가’의 대다수는 이후 일제의 정책에 동조했는지 더 상세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는 이렇게 한국의 민속학 연구가 전통문화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했다고 전제한 뒤, 일본 학자들의 조선연구와 그에 대한 대응논리로 민속을 연구한 최남선을 대조하여 살펴본다. 당시 일본에는 크게 두 가지 학적 연구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에도시대에 일어나 메이지시대까지 전해진 국학자 집단의 연구로, 이들에 의해 ‘日鮮同祖論’이 확립된다. 다른 하나는 독일의 사학자에게 훈련을 받은 신진 사학자들로서 과학적 방법을 중시한 동양사학자 집단이다. 이들은 국학자 집단의 일조동조론은 부정하나, 조선의 사회와 역사를 ‘타율성’과 ‘정체론’으로 정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최남선은 이러한 연구에 대한 반발로 폭넓은 대응논리를 연구한다. 필자는 그 가운데 최남선의 대표적인 민속학 연구 분야라고 볼 수 있는 「불함문화론」, 단군에 관한 논문들, 「살만교차기」를 선택하여 ‘지성사적인 측면’에서 상세한 분석을 펼친다.

최남선은 당시 인류학계에 유행하던 ‘Age-area 가설’을 활용한 「불함문화론」을 통하여 첫째, 조선 문화는 “중국과는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별개의 문화라는 점”을 역설하여 조선인의 자주성을 고양하고, 둘째, “불함문화의 중심지가 바로 조선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일선동조론을 반박하는 동시에 조선 문화의 우월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그리고 단군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는 “조선 민족을 단결시키는 구심점”인 단군을 내세워 조선의 독자성과 역사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일선동조론을 부정한다.

마지막으로 최남선은 그러한 성격의 단군을 무당과 연결시킨다. 필자는 최남선의 그 논리에 무속은 외래종교가 아닌 조선 고유의 사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 일본의 神道처럼 “민족의 구심점을 찾아서 강력한 민족접착제를 형성”하려는 점이 깔려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의도는 최남선이 ?계명?이란 잡지에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와 자신의 「살만교차기」를 함께 실은 이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필자의 주장처럼 한국 민속학이 일본 민속학의 영향이 아니라 일제의 영향으로 민족문화의 자각에 따라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면, 왜 이렇게 최남선의 논리 전개가 일본의 그것과 유사한가 하는 점이다. 필자가 앞서 말했듯이 “사회적 관계의 긴밀성” 때문에 “민속학의 학문적 유사성”이 보이는 것뿐일까? 필자의 사회적 관계의 긴밀성에 대한 논의는 납득할 만하나, 과연 민속학의 학문적 유사성은 어떤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인지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든, 일본과 한국의 초기 민속학이 유사하다는 사실은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한국 민속학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지나치게 논리를 비약하고 있는 듯하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르면, 일제는 조선의 식민통치 등의 이유로 일선동조론이나 타율성, 정체론과 같은 논리가 필요했고, 조선은 그에 저항할 대응논리가 필요했다. 이렇게 본다면 필자가 주장하듯이 한국 민속학은 일본 민속학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필요에 따라서만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다. 최남선의 논리 전개를 통해 보이듯이, 오히려 한국 민속학은 일본 민속학의 논리를 끌어다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듯하다. 두 나라의 민속학은 제국주의와 민족국가의 형성이란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탄생한 ‘도플갱어’가 아닐까.

한국 근대 사회의 형성에 일제가 끼친 영향은 참으로 거대하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을 발전시켰다는 논리를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 사회에 이미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다는 주장이 그렇듯이, 일본의 민속학이 아닌 일본의 영향으로 한국 민속학이 태동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제대로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일본 민속학이 한국 민속학에 끼친 영향을 제대로 평가하고 반성하는 것이 한국 민속학의 정립과 발전을 위해 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한다. 그런 맥락에서 필자가 최남선의 민속학 연구에서 이어진 한국 민속학사의 흐름 ―민족주의적 관점, 무속을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보는 점― 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그때 형성된 물길이 해방 이후 그대로 한국 민속학으로 이어져 이론적 문제점을 낳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화의 이면에는 인간의 보편성과 특수성이 함께 내재해 있다고 생각한다. 학문은 그 두 측면을 살펴야 하는데, 최남선 이후 한국 민속학의 경우 필자의 지적처럼 특수성에만 빠져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최남선이 역사문헌적 방법론을 중시한 점이 야나기다 구니오의 주장과 다른 독특한 점으로서 꼽고 있는데, 일본 민속학의 방법론이 진짜 그런지 궁금하다.


임돈희-한국민속학사의 재조명.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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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민속학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일본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온 자료. 좀 정리는 된다만, 우리나라의 민속학은 도대체 무어냐?



민속학은 학문 영역의 하나. 고도의 문명을 가진 여러 나라에서 자국민의 일상생활문화의 역사를 민간전승을 주로 자료로 하여 재구성하려 하는 학문. 민족학이나 문화인류학의 근접영역.



개요


민속학은 풍속과 관습, 전설, 민담, 가요, 생활용구, 가옥 등 옛날부터 민간에서 전승되어 왔던 유무형의 민속자료를 기초로 인간의 생업 속에서 전승되어 왔던 현상의 역사적 변천을 밝히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의 생활문화를 상대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학문이다.

이 학문은 근대화에 의하여 많은 민속자료가 사라지려고 할 때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의 낭만주의적인 동경과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탄생한 젊은 학문으로,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의 민속학은 유럽, 특히 영국의 케임브리지 학파에 강한 영향을 받았고,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와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 들에 의해 근대과학으로 완성되었다. 보통은 folklore의 번역인데, folklore는 민간전승(민속) 그 자체를 가리키기에 영어권에서는 민속학을 Folklore-Studies나 Folkloristics이라고 부르는 일도 적지 않다.

인간의 생활에는 탄생부터 육아, 결혼,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식이 따른다. 이러한 통과의례와는 따르 평소의 의식주와 제례 등에도 다양한 풍습, 습관, 관습이 있다. 이러한 풍습에는 그 유래를 잊은 채, 또는 시대와 함께 변화하여 원래의 원형을 모르는 채로 행해지는 것도 있다. 민속학은 또한 이러한 습속의 철저한 검증을 통하여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해명하는 학문이기도 하다.



민속학의 학문으로서의 여러 특징


시대와 학자에 따라서 그 정의는 여러 갈래이기에 개괄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대략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 학문이다.

1. 연구의 목적은 어떤 민족의 전통적인 문화, 신앙, 풍속, 관습, 사고의 양식을 해명하는 데에 있다. 또 이러한 대상의 역사적 변천과 함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원초적 형태를 밝히려고 하는 경향을 가진다.

2. 연구의 대상이 자민족의 기층문화인 경우는 다른 민족의 사례를 자민족의 보조자료로 쓰는 경우가 많다.

3. 연구의 방법으로서 문헌자료 말고도 현대사회에 잔존한 문화, 풍습, 사고의 양식을 중시한다. 이 때문에 현지조사로 자료를 수집한다.

4. 또한 미개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민족의 문화, 풍습, 사고의 양식을 인간의 기본적인 정신활동에 나타난다고 생각하여, 이를 연구의 자료 또는 보조자료로 하는 일도 많다(이 점에 대하여 현재는 포스트-식민주의의 입장에서 비판이 일어난다). ‘미개’와 ‘고대(始原)의 동일시는 민속학의 특색 가운데 하나다.

5. 현대인이 무의식 중에 행하는 것, 또는 합리적으로 설명하면서 행하고 있는 것 안에 고대적인 의미를 발견한다는 형태의 연구가 많다.

6. 일본에서는 문학연구·비평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이 점에서 문화인류학·민족학과는 다른 특색이 있다.

7. 특히 일본의 민속학 연구에서는 그 초기에 큰 영향을 미친 야나기타 구니오, 오리쿠치 시노부 두 사람이 강렬한 개성의 소유자로, 서구에서 도래한 학문의 방법을 소화하여 일본 독자의 민속학을 완성했기에 ‘야나기다학柳田学’ ‘오리쿠치학折口学’이란 이름으로도 불린다. 또 야나기다 자신은 ‘신국학新国学’이라 부르며 민속학의 체계화를 시도하고, 근세 이후 국학의 영향도 강하다.

8. 일본 민속학은 ‘재야의 학’으로 표현되고, 다른 여러 학문과 비교할 때 가장 특이한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재야와 아카데미즘(민속학을 직업으로 하는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않는, 학력과 직업에 관계없이 민속 현상에 흥미와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학문이란 느낌으로 쓰이고 있다. 이 때문에 보통 ‘재야의 민속학자’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반대로 ‘대학의 민속학자’라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9. 일본에서는 민속 또는 민속학이란 용어가 일반에서는 통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민족학(문화인류학)과 혼동되거나 민족이란 말에서 정치적인 활동과 연구를 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 일이 많다. 언론과 출판에서도 ‘민족문화재’나 ‘민족자료관’이란 오타를 많이 볼 수 있다(물론 진짜 ‘민족자료관’도 존재한다). 대학에서는 ‘분쟁 등의 민족문재를 배우고 싶다’ ‘아이누 민족을 공부하고 싶다’는 이유로 민속학 연구회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이 있는 것도 신입생이 많은 시기에 자주 있는 모습이다(민족학에 대해서는 인접학문도 있기에 연구회와 학회 안에는 연구대상을 포함하고 있는 단체도 있다).



민속학사


일본에서 민속학이라고 할 경우 일반에서는 일본 민속학을 가리키지만, 해외를 보면 19세기 구미를 중심으로 많은 나라에서 민속학에 해당하는 학문이 탄생했다. 탄생의 경위는 나라마다 정치적·사회적 상황이나 민족학(문화인류학) 등과의 관계에 따라서 다양한데다가, 다른 사회과학과 같이 국제적 교류가 활발하지 않고 나라마다 독자적으로 진전을 해오기도 하여 통틀어 민속학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유럽의 민속학


유럽에서 민속학적 관심이 높아진 배경에는 근대화와 도시화, 또는 자본주의화에 따른 급격한 사회변화를 앞두고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과 민족의식의 고조가 존재한다.



영국, 프랑스 민속학


영국에서는 1846년 톰즈William John Thoms가 고대문화의 흔적과 민요를 folklore라고 이름을 붙이고 민속학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는데, 학문의 조직화로는 1878년 조지 로렌스 곰므George Laurence Gomme 들이 런던에 “민속학 협회Folklore Society"를 설립한 시기를 기점으로 한다. 진화주의 인류학이 파급력을 지녔던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민속학도 서민의 습속에 보이는 그리스도교 이전의 잔존(Survival)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함께, 자민족뿐만 아니라 해외 식민지를 관심에 넣는 등 인류학과의 근접성이 뚜렷하다고 인정된다. 그것은 1885년에 민속학 협회가 설립된 프랑스도 마찬가지이고, 20세기 초에 피에르 상티브Pierre Saintyves, 로베르트 에르츠Robert Hertz, 루시앙 레비브루흐Lucien Levi-Bruhl, 아놀드 반 헤넬프Arnold van Gennep라고 하는 학자가 근대적인 민속학·인류학 연구를 진행했다. 그들의 접근법에 같고 다른 점이 있다고 해도, 민간전승의 기원을 소급하여 원시적인 민족 심리를 규명하는 일을 중시한 점에서는 대체로 공통된다. 또 에르츠와 레비브루흐는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와 에밀 듀케임Emile Durkheim 등과 가깝고, 반 헤넬프도 뒤에 빅토르 터너Victor Turner에게 영향을 미치는 등 인류학이나 사회학과 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점도 프랑스 민속학 연구의 특징이다.



독일 민속학


한편 유럽에서 가장 활발히 연구했던 독일은 민속학은 폴크스쿤데Volkskunde라고 부르며, 독일민족·국민에게 공통된 정신의 발견이란 민족주의적 색깔이 짙은 학문이었다. 원래 독일어권에서는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드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와 동화작가와 학자로 유명한 그림 형제가 독일 낭만주의와 게르마니스틱, 신화학에 바탕한 민요나 설화의 민속학적 연구를 행했는데, 1850년대 폴크스쿤데란 이름으로 과학적인 학문 체계를 정비한 것은 빌헬름 하인리히 릴Wilhelm Heinrich Riehl이다. 공업의 발전에 따른 농촌의 피폐를 앞두고 릴은 사회정책적인 의도를 담아 전통 습속의 연구를 통하여 독일의 통일적인 민족정신을 발견하려는 점에 민속학의 목적을 정했다. 1891년에는 베를린에서 민속학 협회가 설립되고, 또 20세기 전반에는 처음으로 대학에서 민속학과로 나아가 오토 라우페Otto Lauffer, 『독일 민속지도』를 편집한 스위스의 에두아르드 호프만 크라이어Eduard Hoffman-Kryer, 민족심리학의 아돌프 스패머Adolf Spamer, 상층문화/기층문화의 이원이론을 제출한 한스 나오만Hans Naumann 등 많은 이론가가 나왔다.

그러나 현행 습속을 고대와 연속성(Kontinuität)이 있다고 파악하고 농촌 생활과 농민에게서 원초적 독일 민족정신을 발견하려는 민속학은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적 정치 이데올로기에 빠지기 쉬운 성격을 가지고 있어, 1933년 이후 국가사회주의 시대에는 국민 통치 및 인종주의의 국책 학문으로 빠졌다. 많은 학자는 나치즘에 동조하는 연구를 하여 적지 않은 학자가 나치당원으로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고 선전물을 만들고 민속행사를 창출하는 데 관여했다. 그 때문에 전후의 서독 민속학계는 완전히 학문으로서의 신뢰를 잃고 폴크스쿤데의 정치성을 자기비판하는 것을 원동력으로 재출발을 도모하게 된다. 뮌헨대학에서는 한스 모저Hans Moser가 중심이 되어 민족주의와 매우 친화적인 과거 소급형 방법을 버리고, 더욱 실증적인 역사민속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한다. 또 모저와 튀빙겐대학의 헤르만 바우징거Hermann Bausinger는 포크로리스무스Folklorismus란 개념을 제안하는 것으로, 관광화된 축제 행사와 새롭게 창출된 습속을 민속학의 대상으로 넣고, 변화하기 어려운 전통습속만을 고집하는 낡은 민속학에서 벗어나려 시도했다. 바우징거는 1971년 튀빙겐대학의 연구소에서 폴크스쿤데란 이름을 폐지하고, 대신 경험주의적 문화연구소(Institut fur Empirische Kulturwissenschaft)란 이름을 달았다. 이처럼 1970년대 이후 독일 민속학에서는 전쟁 이전을 청산한다는 것을 상징하듯이 폴크스쿤데란 이름이 사라지는 동시에 그 방법도 역사주의로부터 문화인류학과 역사사회학 등 사회과학 쪽으로 크게 변모하고 있다.



일본 민속학


일본의 민속학은 근세에 국학国学과 본ㅊ학本草学에서도 원류가 보이는데, 본격적인 연구가 개시된 것은 19세기 말이다. 하나의 효시가 되는 것은 츠보이 마사고로坪井正五郎가 도쿄 인류학회를 출범한 1886년으로, 민족학·민속학·자연인류학·고고학 등을 포함하는 ‘인류학’의 연구로 ‘토속土俗’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한편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 들과 촌락 연구회를 하고 있던 농상무성農商務省 관료인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는 1909년 미야자키현宮崎県 椎葉村에서 듣고 쓴 수렵이야기를「노치노카리노코토바노키後狩詞記」라는 이름으로 자비 출판하고, 야나기다柳田 민속학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1913년부터는 잡지『향토연구郷土研究』를 창간함과 함께 당시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미나카타 쿠마구스南方熊楠에게 곰므가 지은 『The handbook of folklore(민속학편람)』을 빌려 지금까지 취미오락으로 여기던 민속학을 학문으로 체계화하는 이치를 깨달았다.

유럽 민속학과 문화인류학이 잔존이란 개념에 따라 고대와의 연속성을 가진 기층문화를 밝히려고 한 반면, 야나기다柳田는 사람들의 생활향상을 초기의 동기부여로 하여 민속학의 목적은 서민 생활의 역사적 변천과 동시대의 생활문화와의 관계를 고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야나기다柳田가 민속학을 구축하려고 했던 의도는 중층적인데, 첫째는 서민의 생활사를 간과하는 기존의 문헌사학에 대한 안티테제이고, 둘째는 진화주의적인 민족학과 ‘토속학’의 구분이며, 셋째는 지방 개량운동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국내 문화정책에 대항 담론으로 시대 상황을 반영한 다양한 기도를 꾀하고 있었다고 한다.

1935년에는 야나기다柳田를 중심으로 「민간전승 모임」을 설립하고, 기관지의 발간과 민속학 강습회를 열었다. 또 그 시대에 야나기다는 개설서를 정력적으로 집필하여, 민속학사에서는 학문으로서의 조직과 방법이 정리된 1930년대 중반을 민속학의 완성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949년「민간전승 모임(民間伝承の会)」은 일본 민속학회라고 개칭하고, 이 무렵부터 대학에도 민속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지금까지의 민속학은 야나기다 저택에서 열리는 목요 모임이나 잡지에서 야나기다가 직접 민속학도를 지도하고, 그 성과가 자식을 통하여 전국으로 퍼진다고 하는 의미에서 아카데미즘 밖에서 전개한 일종의 운동체였지만, 전후의 학제 안에서 도쿄 교육대학과 국학원대학國學院大學, 성성대학成城大学 등에서 전문 교육이 시작됨에 따라 현재에까지 이르는 교육·연구의 제도적 구조가 탄생했다.



민속학 연구법


민속학의 조사방법으로는 서민의 생활을 총체적으로 파악한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농산어촌農山漁村을 중심으로 한 마을에 머물면서 듣기(듣고 쓰기) 조사와 종이 자료를 포함한 문자자료(금석문, 건물에 대한 기록표 등)의 수집, 건축물과 민구 등 물질문화의 기록, 또는 생업, 공동노동, 연중행사, 인생의례 등의 장소에 참여 관찰, 그리고 민속지의 기술이 주체가 된다.현지조사의 축적으로 민족지를 묘사하는 것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는 문화인류학의 방법과 유사하지만, マリノフスキー 이후의 근대 인류학이 연구자 개인에 의한 몇 개월~몇 년의 장기 체류 조사를 기본으로 하는 반면, 민속학에서는 며칠~몇 개월 단위로 중단기 조사를 되풀이한다는 일이 많고, 또 복수 연구자에 의한 공동조사가 실시되는 일도 많다.

초기의 민속학에서는 일본 각지에서 모은 민속자료를 유형화·비교하고, 일본 전체의 틀 안에서 민속 현상의 역사적 변천을 밝힌다는 「重出立証法」이 채택되었다. 조지 곰amGeorge L. Gomme의 저작을 바탕으로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国男가 제창한 이러한 방법론은 오랫동안 민속학의 기초 이론이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야마구치 아사타로山口麻太郎와 와카모리 타로和歌森太郎 등으로부터는 민속의 지역성의 과소평가하는 방법론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민속학사의 안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비판은 후쿠다 아지오福田アジオ에 의한 것으로, 민속을 일본 전체의 비교가 아니라 그것이 전승되는 마을과 신앙조직 등과 분리하지 않고 분석해야 한다는 「개별분석법個別分析法」을 제창했다. 구조기능주의 인류학의 영향이 짙은 후쿠다의 방법은 촌락 사회에서 민속을 파악하여 그것이 생활 속에서 서로 연관하면서 전체로서 가지고 있는 의미를 밝히려고 한다. 민족 전체 규모의 커다란 역사를 좇아 왔던 이전의 민속학에 비하여, 후쿠다의 방법론은 소규모 마을의 역사 그 자체를 더 실증적으로 그리려고 한 점에 특색이 있고, 같은 세대의 미야타宮田登가 제창한 지역민속학과 탈-야나기다 민속학의 방법론으로 영향을 미쳤다.

원래 민속학은 문화인류학과 사회학, 종교학, 역사학 등 여러 분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생활사 연구와 퍼포먼스 이론, 사회사, 신체론身体論 등 연구대상에 따라서 그 분야에 통하는 방법론이 쓰이는 일도 많다. 아무튼 민속학의 연구방법은 분석적(Analytical)이라기보다는 기술적(Descriptive)이고, 대상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두터운 기술記述(길버트 라일)을 목표로 이른바 질적質的연구의 하나로 자리매김된다.



연구대상과 자료


생활(의, 식, 민가, 민구)

풍습(가족제도, 사회제도, 통과의례, 사회집단, 생업과 생산, 사계절의 행사, 축제, 놀이, 경기, 오락)

설화·가곡·속담(전설과 옛날이야기, 민요, 속요, 격언시, 수수께끼 등)

신앙(불교, 유교, 영혼과 내세, 전조와 점, 마술, 질병과 민간요법)

위에 열거한 전승되어 온 다양한 민속 현상이 민속학의 연구대상이라 설명되는 것이 많은데, 독일의 민속학자 한스 나우만은 민속학의 연구대상을 ‘기층문화,’ 곧 표층문화에 대하여 소박하고 집단적 또 유형적인 일상생활문화, 전승성이 짙은 문화라고 한다. 아무튼 위에 제시한 각각은 민속학의 기본 자료이며, 그런 의미에서 민속자료라고 불린다.

‘민속자료’란 말의 사용은 야니기다 쿠니오가 최초이고 오니쿠치 시노부折口信夫도 쓰고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처음부터 확실히 규정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야니기다는『민간전승론民間伝承論』에서,

눈에 보이는 자료 <체비体碑>…예를 들어 연구자가 여행하면서라도 보려고 한다면 볼 수 있는 형태를 지닌 사물 행위 전승.

귀에 들리는 언어 자료 <구비口碑>…현지의 말에 통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구두전승. 언어예술.

심의心意 감각에 호소하여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자료 <심비心碑>…외지인은 알 수 없는 같은 지역사람, 같은 나라 사람의 감각에 의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심의 전승.

이라는 3분법을 제시하고, 또 이를 1. 유형문화·생활기술지―나그네의 학, 2. 언어예술·구승문예―임시거처자의 학, 3. 생활해설·생활관념·생활의 여러 양식―같은 지역사람의 학이라고 하는 식으로 취지를 설명한다.

한편 오니쿠치折口는,

1. 주기전승(연중행사)

2. 계급전승(노약老若 제도·성별·직업·천성에 따른 구별)

3. 조형전승

4. 행동전승(무용·연극)

5. 언어전승(속담, 가요, 전설·설화)

라고 민속자료를 분류하고 있다.

널리「민속자료民俗資料」란 용어가 일반에 정착하고 명확한 개념 규정이 법령으로 제정된 것은 1954년「문화재보호법」의 제1차 개정에서「의식주, 생업, 신앙, 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속관습 및 이에 쓰이는 의복, 기구, 가옥, 기타 물건에 우리 국민의 생활 추이를 이해하기 위해 빠뜨릴 수 없는 것」이란 문화재의 하나로 보호 대상이 된 이후였다. 이후 문화청 문화재보호부(현재 문화재부)에 의해서「무형 민속자료 기록」 등도 편찬되기에 이른다.

「민속자료」란 명칭과 함께 그 안에 자료 가치가 높은 것이 문화재가 되어 보호의 대상이 된다는 이유가 사회에 퍼져, 오늘날에는 문화재의 분류 명칭인 ‘민속자료’가「민속문화재民俗文化財」라고 개칭되었다. 그 한편에서 현대는 문화재 지정의 유무와 관계 없이, 민속학에서 서민 생활사의 추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한 전승자료 전반을 민속자료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 민속학의 변화


도시화에 따라 민속학이 주요 대상으로 했던 폐쇄성이 높은 농촌은 실질적으로 소멸하고, 언뜻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지역에서도 과소화와 관광개발, 산업구조의 변화 등 옛 유형의 민속조사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또 민속학의 여명기에는 일본의 인구 대다수를 점하던 농촌인구도 현재는 도시인구에 압도되어, 도시주민 및 도시의 생활양식이 일반성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상의 변화에 대하여 현대의 민속학은 다양한 새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민속의 소멸」이 활발히 논의된 1970~1980년대에 걸쳐서는, 도시민속학의 붐과 미국민속학의 영향을 받았던 도시전설 연구가 융성했다. 또 1990년대 이후는 관광인류학의 영향을 받아 지역개발·관광화의 연구, 문화재 제도의 연구 등 현대사회의 체계와 지역의 관계를 묻는 움직임이 늘었다. 더욱이 이 시기에는 국민국가론 비판의 문맥으로부터 야나기다 구니오의 민속학 관점에 대한 비판적 검증이 활발히 이루어져, 야나기다 민속학이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유랑민(漂泊民) 등의 이른바 산카サンカ,「서민이 아닌 사람」, 성性을 주제로 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는 일도 늘었다.

또한 한국과 대만, 중국, 몽골, 동남아시아 등에서 비교민속학의 관점에서 현지조사를 실시하고, 유럽의 마을을 조사하는 시도도 나타났다.



재야의 학으로서의 일본 민속학


전후 학문으로서 민속학의 체계가 대략 완성되고 대학 등에서는 연구가 활발해졌지만, 민간에서 연구활동이 수축된 것은 아니고 ‘재야’와 ‘아카데미즘’이 혼재 또는 병립하는 일본 민속학의 독특한 연구 체제가 존재한다.

‘재야’에서는 전쟁 전부터 일본 각지에 지방학회라 부르는 학회, 연구회가 조직되어, 지역에 뿌리를 둔 연구활동이 이루어지며 일본 민속학의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모임의 이름에 都道府県의 이름을 딴 단체가 많다. 석불(석조물), 특정 종파 등의 전문특화된 연구단체도 많이 설립되어, 지역과 분야 등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치단체 향토지 및 문화재 조사에도 활약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민속학 관계 대학원 교육이 충실해지고, 국학원대학과 성성대학成城大学, 카나가와神奈川대학, 츠쿠바대학筑波大学 등이 유명하다. 또 1950년대에 정규 학과, 연구과 외에 학생과 졸업생, 교직원 등을 대상으로 한 연구회, 학생 동아리가 많이 설립되었다. 정과正課 수업 등과 연계하여 연구와 교육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국학원대학, 성성대학 등의 학생동아리), 민속조사(민속채집)과 자료 수집에 특화되거나(중앙대학의 연구회 등) 형식, 목적은 다양하지만 모두 민속자료 수집과 연구자 양성에 크게 기여하는 등 일본 민속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연구단체의 대개는 입회할 때 직업, 학력, 주소 등을 따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고, 일본 민속학회도 민속학에 관심이 있고 회비납부 등의 일반적인 조건을 제하고는 회원자격을 특별히 정하지 않고 있다(단 회원에 의한 소개와 이사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회원자격을 특별히 정하지 않아, 민속 현상에 관심이 있는 것 말고는 서로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기능이 있다. 연구를 하는 사람의 직업은 민속학의 연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 말고 회사원, 공무원, 자영업, 주부, 농업, 무직(정년퇴직한 사람 등) 등 다양하고, 학생과 대학 등의 연구자에는 민속학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사람(전혀 관계 없는 분야)도 있다. 이에 의해 학회 등에서의 발표와 모임에서 자칭으로 거주하는 都道府県의 이름과 성명을 대는 관습이 행해져 왔는데, 최근에는 재적연구기관 이름을 자칭하는 사람도 나오고 있다. 덧붙여서 연구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연구자가 재직한 회사명을 직함으로 대거나 무직·주부 등의 직업명으로 자칭하는 일은 거의 없다.

연구직 이외의 사람이 연구를 계속하는 데에는 본인의 의지, 가족의 협력, 경제적 여유(연구비용은 원칙적으로 자기부담. 특히 민속 현지조사할 때 교통비와 체재비, 자료의 구입비가 많아짐), 시간적 여유 등의 일정한 요건이 필요해진다. 봉급생활자(특히 공무원)는 겸직이나 부업이라고 오해받거나 “취미에 얽매여 있다”고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직장의 이해도 필요한 경우가 있다.

민속학 연구자의 정의도 이렇게 된다면 모호해진다. 현지의 義経와 弘法大師의 전설 등이 실화라는 것을 실증하려고 자료 수집에 분주한 사람이나 이른바 향토사학자라고 불리는 사람에는 민속학 연구자를 자칭하는 사람이 가끔 있어, 누구나 ‘연구자’라고 자칭해 버리는 문제도 있다.

일본 민속학의 중심적인 기관은 일본 민속학회이고, 본격적 연구를 행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회원으로 있다(이 학회의 역사에 야나기다柳田가 크게 관여하고 있기에 “反 야나기다柳田”의 연구자 가운데는 가입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일본 민속학회 회원=민속학자라는 구도가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이 학회의 회원에는 회원명부의 정보 범위에서 최근에는 대학 등의 연구자, 박물관 학예사, 문화재 관계자 등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또 현재 이 학회의 임원은 거의 전원이 대학 등의 연구자라서 모두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다.

연구를 시작한 계기도 다양하여, 단순히 자신이 사는 지역의 문화 풍습에 관심을 가진 것에서부터 다른 분야(사회학·역사학·경제학·농학 등)의 연구자·출신자가 인접 분야로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사람, 민속 현상에 관련이 있는 취미(역사 답사, 여행, 철도, 등산, 신사와 절 순회 등)를 통하여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사람 등 다종다양하다. 민속학 자체가 다른 여러 학문 등과 밀접하게 유기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 대학생이 민속학 관계의 대학·연구실·동아리에 들어간 이유로는「시골이 좋다」, 「요괴와 도시전설에 흥미가 있다」, 「민요, 옛이야기가 좋다」, 「박물관에 취직하고 싶다」 등을 드는 사람이 많고, 입학 초기에 학문 체계로서의 민속학 자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비교적 적다.

민속학계에서 재야와 아카데미즘에 관한 논의는 직업 등에 따른 구별(차별), 일본 민속학사에서 많은 민간 연구자의 공적 등의 문제가 있기에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았다(최근에는 2005년 제57회 일본 민속학회 연보에서「재야의 학문과 아카데미즘」이 주제로 다루어졌다). 논의를 잘못하면 학력과 직업에 따라서 대립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또 대학 등의 연구자 중에는 재야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이들을 배제하고 대학 등에 소속된 직업 민속학자만 민속을 연구하는 「보통의 학문」이 되어야 하며, 고고학과 천문학과 같이 민속학자와 민속학 관심자라는 형태로 느슨하게라도 구별해야 한다는 논조도 있다.

재야성을 띤다는 특성으로 대학 관계자를 제외하고 상하관계나 사제관계도 거의 없어 다른 분야의 연구자로부터 자유로운 학풍이라 평가받는 일도 많다. 그러나 반면 “아마나 연구”라는 분위기나 특히 지방학회에서 학술연구적인 사고와 논문집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정서적·취미적이란 야유를 받거나 요괴와 사투리, 민요, 전래동화 등 “아마추어”가 하는 분야를 포함하는 것이기에 민속학을 비과학적인 것이라 파악하는 사람도 많다. 또 다른 학문 분야와 여러 취미, 해외의 민속학계 등과 연대와 공유할 수 있는 분야가 많지만, 지금까지는 그다지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일본 민속학계는 앞으로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민속학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물론, 이러한 다른 분야와 사회와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 모색하게 된다.



일본 민속학의 분야


역사민속학, 도시민속학, 종교민속학, 환경민속학, 비교민속학, 지역민속학, 불교민속학, 여성민속학, 응용민속학, 민구학, 신화학, 민속예능연구, 구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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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민속학의 濫觴>을 읽고




한국의 민속학은 1920년대에 비로소 학문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게 보면 한국 민속학은 여타의 학문과 달리 100년이 안 되는 짧은 역사를 가졌다. 하지만 근대의 학문이란 서구의 제도문물과 함께 동양으로 전래된 것이 대부분으로서 현재 대개의 학문, 특히 ‘한국의 OO학’이라 부를 수 있는 학문은 모두 역사가 짧을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 민속학사에서는 그 짧은 역사보다도 오히려 다른 문제, 곧 민속학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민속학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이식된 식민주의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더욱 문제가 될 것이다. 인권환 선생님은 이 논문을 통하여 그러한 한국 민속학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먼저 우리나라의 여느 학문 연구가 “일천한 역사”를 지녔는데, 그 가운데 특히 실학은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으로 인한 어려움까지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러한 “실학의 종합적 성격 가운데서 민속학적 성격을 추출하여” 민속학사에서 실학이 점하는 위치를 평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실학의 그런 민속학적 측면은 구한말로 단절되어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개화사상을 거쳐 최남선과 이능화와 같은 1920년대의 초기 민속학자에게 계승되면서 “형성기, 정립기에 이르는 초기 한국 민속학”의 형성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가 이 논문을 통하여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한국 민속학의 시발을 1920년대로 보고 그 원류를 외래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를 시정하고 “민속학은 자생적인 것이며, 실학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때 한국 민속학은 식민주의의 결과물이라는 딱지를 떼고 우리의 학적 전통 속에서 자생한 것이라는 점을 입증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인권환 선생님은 먼저 한국 민속학의 남상이 실학임을 입증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는 우리나라의 실학이 ‘저급문화 민족’이나 ‘일반서민’ 사이에서 “옛날부터 전래되는 전통적인 설화·가요·속담·신앙·습관 등을 그 대상”으로 하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민속학이 아니라, ‘민족의식과 민족감정의 고양’과 함께 “자신을 알고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문화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띠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민속학과 근원이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강력한 근거로 실학과 독일의 민속학이 모두 “자본주의의 대두에 따르는 중세적 가치관념과 사회체제가 붕괴되는 역사적 전환기에 그 단서를 마련”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어서 현실적·사회정책적으로 민속학을 연구한 뫼저(J. Möser)의 경우를 예로 제시한다. 뫼저는 “민속학에 대한 과학적 인식보다는 서민대중을 명확하게 파악함으로써 그들을 어떻게 구제하느냐가 일차적 목표”였던 사람으로서, “그의 궁극적 목적은 독일민족, 독일민족정신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었다. 인권환 선생님은 바로 그 점이 실학의 민속학적 경우와 비슷하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하여 그는 “실학파의 서민계급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전통문화에 대한 학적 관심을 남상기의 민속학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며, 1880년대 인류학의 일환으로 서구로부터 이입된 일본의 민속학과는 원류가 다르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로써 한국 민속학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이식된 식민주의의 결과물이란 오명을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그가 밝히듯이 그러한 실학의 민속학적 성격에는 몇 가지 한계가 존재한다. 먼저 “실학 전반에 걸치는 폭넓은 考究가 선행되어야 마땅”하나 “실학 자체의 연구에서도 아직 명확히 논파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실학의 학적 성격은 임임한 여러 학문의 연총일 뿐 어느 하나로 귀결지을 수 없”는데, 그는 “이야말로 실학이 지니는 진면목”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이 부분에서 실학의 그러한 성격이 “박학다식의 학문이니 백과사전적 학풍”을 대변한다면서, 은근슬쩍 민속학을 학문 체계가 성립된 하나의 學으로서가 아니라 잡학적인 것으로, 곧 엄밀한 학이 아닌 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실학자들이 “민속학을 과학으로서 의식하였느냐의 여부는 굳이 따질 일이 못된다. 어느 나라의 경우에도 학의 개념이 정립된 후에 민속학을 시작한 예는 없다”란 자신의 주장을 성립시키기 위한 변명인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실학의 개념과 관련한 천관우 선생님의 “전근대의식에 대립되는 근대의식 내지 근대지향의식, 몰민족의식에 대립되는 민족의식을 척도로 하여 재구성된 조선 후기 유학의 개신적 사상으로서 조선후기에 일어난 개신유학”이라는 내용을 인용한다. 이를 통하여 자신이 주장한 실학의 민속학적 성격과 독일 민속학의 유사성을 공고히 함으로써 “실학이 지니는 민족주체성, 현실성, 박학다식성 등은 앞에서 살펴본 서구민속학의 성립 여건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민속학이 자생할 수 있는 소지로서 충분한 조건”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그의 주장처럼 실학이 지니는 ‘민족주체성, 현실성, 박학다식성’ 등은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근거라기보다는 하나의 운동으로서의 근거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실학에 대해 논하면서 실학자들이 지닌 “학적 관심은 봉건주의와 성리학에 짓밟힌 서민과 그들의 생활·문화, 곧 전통문화”였다고 하여, 실학의 연구주제가 민속학의 연구주제와 같은 듯이 끼워 맞춘다. 그러나 비록 실학이 그동안 성리학에서 다루지 않던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수행한 주체는 지배권력층 또는 지배권력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는 계층이었고 그들은 한 번도 성리학적 질서에 기반하여 운영되는 조선 사회를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실학은 그의 주장처럼 ‘봉건주의와 성리학에 짓밟힌 서민과 그들의 생활문화’보다는 다른 쪽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그러하다면 그가 실학의 민속학적 성격을 논하는 것 자체가 논리에 맞지 않는 견강부회한 견해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본다면 실학의 민속학적 성격은 독일 민속학의 기원보다는 오히려 영국 민속학의 기원과 더 유사하다고 볼 수 있기에, 그의 주장의 가장 중요한 근거까지 흔들리게 된다.

인권환 선생님의 논증은 본인이 열거한 민속학의 특징과 실학의 한계를 통해 더욱 취약해진다. 그는 민속학의 주요한 특징으로 “민속학은 철저한 자기인식의 학문”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자기인식이란 타인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 비로소 필요해지는 법이다. 논문 초반에 서술했듯이 영국은 식민지민과 천한 서민층을 통해서, 독일은 특유의 정치적 상황을 통해서 자기인식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민속학이 탄생했다. 여기서 그는 본의 아니게 일제에 의해 이식된 결과물이란 한국 민속학의 식민주의를 인정하게 되는 오류에 빠진다.

그의 주장처럼 실학은 “학으로서의 민속학이 출발하기 이전 민속학의 잉태기 또는 남상기의 민속학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도 인정하듯이 실학의 민속학적 성격은 “학으로서의 명확한 독자성은 결여”되어 있고, “문헌적 방법이 그 중심”이라 “실증적 과학으로서의 민속학”으로서는 결함을 갖는다. 또한 “민속지적 자료정리의 단계에서 그 이상 연구의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며 “학적인 천착이나 이론의 체계화”도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 엄밀한 의미로서의 學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學은 아니지만, 몇 가지 근거 ―실학의 근대지향의식, 민족의식, 민족주체성, 현실성, 박학다식성 등― 를 들며 이미 실학에 민속학적 성격이 내재해 있었기에 한국 민속학은 자생적이며 실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그의 주장은 너무 지나친 면이 있다. 또한 앞에서 지적했듯이 실학이란 학문 자체를 잘못 평가함으로써 생기는 오류도 안고 있다. 실학을 봉건주의에 짓밟힌 민중의 삶과 문화를 학적 관심으로 갖는 학문이라 해석하는 것은 우리를 민족주의의 함정으로 이끌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인권환 선생님의 실학이 민속학의 “본격적인 학적 정립기라 할 1920년대 민속학에로 계승”되었는지 밝히려고 한 시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뜻하지 않게 억지로 개화되면서 스스로를 반성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근대화의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전근대와 근대의 단절로 인해 민속학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공백이 존재한다. 그가 실학의 민속학적 성격을 논하고자 한 이 글은 바로 이러한 공백을 메우려는 노력 소산일 것이다. 그가 이 논문을 쓸 당시에는 아직 실학에 대한 연구가 폭넓게 이루어지지도 않았음은 물론 명확한 평가도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그에 따른 한계가 존재한다. 실학에 대한 연구가 폭넓게 이루어지고 정확한 정의가 내려진다면, 실제로 실학에 민속학적 성격이 내재했는지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따져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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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자. 전공은 한국 연구, 농촌 연구, 개발인류학. 류큐琉球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과학 연구과 교수. 

 

약력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도東京都 릿로카立明正고등학교, 도쿄대학 교양학부를 졸업한 뒤, 1970년 됴쿄대학 대학원 사회학 연구 석사과정 수료. 같은 해 7월, 같은 대학원 박사 과정을 중퇴하고 교양학부 조수. 그 뒤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조수, 교양학부 교수,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교수. 2006년부터 류큐대학 대학원 교수. 그 사이 하버드대학 객원연구원, 서울대학교 초빙교수 등을 역임.

 

연구

떠다니며 사는 어민에 대한 민속학적인 관심 때문에 도쿄대학에서는 문화인류학을 전공. 이즈미 세이치泉靖一와 이두현李杜鉉(서울대학교 교수, 당시 도쿄대학 객원교수)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한국 연구를 개시한다. 1972년부터 30여 년에 걸쳐 전라남도 진도를 중심으로 안동과 제주도 등에서 인류학적인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농촌의 상호부조 조직, 친족, 종교의례, 새마을운동 등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

패전 이전 일본의 문화인류학에서는 식민지 정책에 따라서 한국 사회를 많이 연구했지만, 그 뒤에는 정치 상황 때문에 정지된 상태였다. 이토 아비토는 전후의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본격적인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일본의 한국 연구를 주도하는 동시에 한국 문화가 지금처럼 일본에 알려지지 않았을 당시부터 쉬운 말로 일본에 소개해 왔다. 2002년에는 한국 정부로부터 오랜 세월의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한편에서는 1990년대 이후 요사코이よさこい 마츠리(高知市)와 요사코이소란YOSAKOIソーラン 마츠리(札幌市)를 사례로 시민이 참가하는 형태의 지역 개발을 연구. 요사코이소란의 활동과 운영에 스스로 관여하면서 실천을 지항하는 개발인류학을 개척해 왔다.

 

주요 저작

『韓国』(暮らしがわかるアジア読本、河出書房新社、1996年)

『韓国珍島の民俗紀行』(青丘文化社、1999年)

『韓国夢幻―文化人類学者が見た七〇年代の情景』(新宿書房、2006年)

『文化人類学者で読む日本の民俗社会』(有斐閣、2007年)

 

감수

『朝鮮を知る事典』(平凡社、1986年)

 

편저

『もっと知りたい韓国』(弘文堂、1985年)

 

한국에 번역 출판된 책

일본 사회 일본 문화(임경택 역, 소와당, 2009년)

그리운 한국 마을(임경택 역, 일조각,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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