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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의 농기구와 생활도구 | 경기도메모리 디지털 아카이브

2009년 11월부터 12월까지 시행한 김포지역 근.현대 역사자료 조사 및 수집사업의 결과물로 농기구와 생활도구를 중심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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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전래 농기구 연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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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김동섭 씨의 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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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쟁기

 

1.  쟁기의 기원

 

 

 

쟁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괭이가 기원인지 가래가 기원인지 세계적으로 논의되어 왔습니다. 가래 안에는 (그림1-A)①처럼 가래에 부착한 끈을 도우미가 당겨서 경운을 돕는 것이 있고, 그것을 ②처럼 사람이 앞쪽으로 끌어서 인걸이가 생기며, ③처럼 소에 멍에를 지워 소갈이 쟁기가 발생한다는 설도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보습의 변화에 주목하면, B그림처럼 괭이는 콱 찍어 넣어 흙을 일으키고 찍어 넣어 일으키는 걸 반복하고, 가래도 밟아 넣어 흙을 일으키고 밟아 넣어 일으키는 걸 반복하여, 날끝은 공중-땅속을 왕복하는 "간헐 경운"인데 반해 쟁기의 보습은 C그림처럼 소가 끌어서 땅속을 잠수함처럼 잠항하는 "연속 경운"이라 기술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계통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쟁기는 괭이나 가래와는 전혀 관계없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림2 쟁기의 기원

 

 

"인걸이 쟁기 → 소갈이 쟁기"라는 전개에는 한 가지 큰 오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걸이 쟁기는 그림2의 AB와 같이 일본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 점재해 있는데, 그것들은 호리쟁기를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이 무언가 사정이 생겨 소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 할 수 없이 사람이 끌기 시작했다고 생각되며, 이는 소가 끄는 쟁기의 '파생형'으로 '원형'은 아닙니다.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라는 발전 패턴이 예상되지만, 간단한 것에는 퇴행적인 파생형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최초의 형은 D그림 같이 겨리쟁기로 긴 성에를 2마리 소의 머리에 걸쳐놓은 멍에에 묶어서 당기게 했습니다. 그런데 2마리 소의 머리에 걸친 멍에와 긴 성에는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달구지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달구지는 C그림처럼 큰 바퀴를 갖춘 이륜차로서, 이 달구지가 주행하는 걸 바라보던 사람들 가운데 차체 대신 철제 날을 부착한 자루를 부착하면 소의 힘으로 연속해 경운할 수 있겠다는 발상을 떠올려 D그림 같은 겨리쟁기가 탄생했다고 생각됩니다.  

 

 

2. 겨리쟁기에서 호리쟁기로

 

 

 

<그림3>처럼 서아시아, 인도 서북부에서 발생한 겨리쟁기는 서쪽으로 나아가 이집트와 로마 등 지중해 주변으로 퍼졌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들어간 쟁기는 게르만 민족의 손에 의해 중후한 바퀴쟁기로 개량되어 4마리가 끄는 쟁기도 나타나며 중세 유럽 사회를 뒷받침했습니다. 

중앙아시아부터 실크로드를 경유해 중국 화북지방으로 들어간 겨리쟁기는 진과 한의 중국 통일을 생산력 면에서 뒷받침하고, 또 동쪽으로 나아가 조선 북부의 고구려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유라시아, 북아프리카는 겨리쟁기권이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무렵부터 호리쟁기가 출현했습니다. 3세기 초에 황하 유역은 유목민에게 점령되어 진晉나라가 멸망하고, 화북에서 쫓겨난 한족은 장강 유역으로 달아나 남조를 건설하는데, 이 과정에서 화북의 밭농사 용구는 강남 지방의 논에서 논농사용으로 개조되어 호리쟁기의 굽은성에긴바닥(曲轅長床) 쟁기가 태어났습니다. 조선반도에서는 고구려에서 남쪽의 백제와 신라로 전해지는 과정에 호리쟁기의 곧은성에삼각틀바닥없는(直轅三角枠無床) 쟁기가 태어났습니다. 이리하여 동아시아는 호리쟁기권이 되고, 여기에서 일본으로 호리쟁기가 전해졌습니다. 

 

 

3. 쟁기의 형태와 분류

 

호펜의 다섯 분류

 

그림4 호펜의 다섯 분류

 

 

H. J. 호펜은 FAO(유엔 식량농업기구)에서발행한 책에서 쟁기의 골격구조를 기준으로 다섯 분류를 제시했습니다. 별로 알려져 있지 않기에 <그림4>에서 소개해보겠습니다.

(A) 성에 쟁기는 소를 향해 쭉 뻗은 성에(beam)가 기본 골격=본체가 되고, 거기에 쟁기날을 붙인 쟁기술이 끼워진 쟁기.

(B) 술 쟁기는 쟁기날을 붙인 쟁기술(body)가 본체가 되고, 거기에 성에가 끼워진 쟁기.

(C) 바닥 쟁기는 쟁기바닥(sole)이 본체가 되고, 성에와 쟁기날이 붙은 쟁기술이 따로따로 끼워진 쟁기. 바닥은 신발바닥의 sole과 동어로 일본에서는 쟁기바닥이라 부르는데, '바닥(床)'은 원래 사각의 침상을 가리키는 한자이기에 '쟁기바닥'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농학에서도 쟁기바닥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 형태는 인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중해 지역 등에서 쓰여 왔던 겨리쟁기입니다.

(D) 사각틀 쟁기는 성에, 쟁기바닥, 한마루, 자부지라는 네 부재가 사각틀을 구성하는 쟁기.

(E) 삼각틀 쟁기는 한마루와 쟁기자루가 교차하여 삼각틀을 만드는 유형으로, 모두 중국에서 발생한 호리쟁기입니다. 다만 삼각틀 쟁기는 동아시아에서는 F에 나오는 역삼각틀을 갖춘 조선반도의 삼각틀바닥없는 쟁기(三角枠無床犁)가 주류로 E 유형은 소수파입니다.

일본에서는 조선반도에서 F의 삼각틀 쟁기를 5세기 후반 이후에 도래인이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또한 타이카大化 개신改新 정부는 견당사遣唐使에게서 D의 사각틀 쟁기를 손에 넣어 전국에 모형을 배포해 재래 쟁기가 되었습니다.  

 

 

 

4. 유전자의 발견

일본의 농기구가 각지에서 모양이 다른 건 예전부터 알려져 있어, 대대로 농민들이 그 토지의 지형이나 토질에 맞추어 개량한 결과 다양한 형태로 부화했다는 "지형, 토질 결정론"이 믿어져 왔습니다. 쟁기의 기원에 대해서도 농학자들은 "도구는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다"는 생각에 바탕하여 <그림 5A> <그림 5B>와 같이 일본 국내의 발달계통도가 몇 가지 만들어졌습니다. 다만 이들은 현지조사를 행하지 않고 그린 계통도로서 근거가 희박하고, 거의 상상의 산물입니다.

그림5 농학자에 의한 쟁기의 일본 국내 발달계통도

 

그런데 쟁기는 "카라스키からすき"라는 호칭으로 보아도 일본의 발명이 아니라 카라(당나라, 한국), 즉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이며, 일본 국내에서 간단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각지의 재래 쟁기를 조사해 보면, <그림6>에서 보는 것처럼 후쿠오카현의 안아 쥐고 조종하는 쟁기(抱持立犁)는 조선계의 삼각틀바닥없는 쟁기, 간사이 지방의 굽은술긴바닥 쟁기는 중국계의 사각틀긴바닥 쟁기로, 전래의 계보에 의하여 각지의 재래 쟁기의 모양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림6 후쿠오카현 쟁기는 조선계, 나라현 쟁기는 중국계

  

 

전통적인 농촌사회에서 농기구는 파손되는 것과 똑같은 형태로 복사됩니다. 가령 쟁기의 내용년수를 20년이라 한다면 100년에 5번, 1000년에 50번 갱신되는데, 똑같은 형태로 복사된 결과 개체는 교체되어도 형태는 1000년을 넘어서 계승되기 때문에, 그 땅에 조선계 도래인이 와 있었는지 어떤지 등을 알 수 있습니다. 민간의 도구에도 유전자가 있던 것입니다. <고사기> <일본서기>에는 지방 서민의 사정은 써 있지 않지만, 재래 쟁기의 전국 조사를 하면 발굴하지 않아도 시정촌들의 고대사가 복원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민간의 도구를 통한 역사학"이라 명명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5. 민간의 도구 조사에서 본 쟁기의 일본 전래

민간 도구의 조사로부터 일본으로 쟁기가 전래된 것을 알아봤습니다. <그림7>을 보러 가지요.

 

삼각틀 쟁기는 도래인이 가지고 옴 ; 조선반도에서 온 도래인은 4세기 말-5세기 초의 제1기, 5세기 후바부터 6세기에 걸쳐 제2기, 7세기 후반의 제3기로 분류되는데, 조선반도 남부의 호리쟁기의 성립이 늦었기 때문에 소와 쟁기를 가지고 온 것은 제2기 이후의 도래인이라 생각됩니다.

타이카大化 개신 정부가 중국계 긴바닥 쟁기를 도입함 ; 중국계 긴바닥쟁기는 큐슈부터 간토우까지 확인할 수 있고, <와묘루이쥬쇼和名類聚抄>에 인용된 8세기 초두의 "양씨楊氏 한어초漢語抄"라는 고사서에는 쟁기바닥의 기술이 있기에 7세기에는 전해졌단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는 아직 중국과 일본 사이의 민간 교류가 없어 견수사, 견당사의 외교 시대이기에 정부에 의한 기술 도입이라 생각됩니다. 일본의 긴바닥쟁기는 쟁기들의 형태로 보아 강남계이고, 7세기 후반에 강남 지방에 갔던 견당사는 661년 하카다에 되돌아왔던 제4차 견당사뿐이라 이때 중국계 긴바닥쟁기를 가지고 돌아와 그것을 기본으로 다이카 개신 정부는 500대 정도의 정부 모델 쟁기를 만들어 각지의 코오리노카미評督(이후의 군지郡司)에게 보내 복제하게 하여 보급을 시도했다고 생각됩니다.

혼혈형 쟁기의 탄생 ; 이미 쟁기를 사용하고 있던 마을에서는 중국계 긴바닥쟁기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왔기에 손에 익은 조선계 쟁기와의 혼혈이 일어납니다. 조선-중국 혼혈형 쟁기는 각지에서 검출되고 있습니다. 

조선계 그대로인 난민 쟁기 ; 663년의 백제 멸망, 669년의 고구려 멸망 시기에는 많은 난민이 일본으로 왔습니다. 정부의 모델 쟁기 배부는 이미 끝났기 때문에, 난민들이 제작한 쟁기는 혼혈형이 되지 않고 조선계 그대로입니다. 난민의 쟁기는 키타큐슈나 시가현滋賀県, 야마나시현山梨県에서 검출되고 있습니다. 

7세기 후반에 성립된 다양한 쟁기는 망가져도 동일한 형태로 갱신되어 민간 도구에까지 계승되었습니다. 

 

그림7 민간 도구의 조사를 바탕으로 한 쟁기의 전래 연표

 

 

6. 쟁기 농학자의 3분법과 지역사를 읽고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3분법

일본의 농학에서는 메이지 이래 <그림8A>처럼 쟁기바닥의 유무, 장단에 의하여 "바닥없는쟁기(無床犁)" "짧은바닥쟁기(短床犁)" "긴바닥쟁기(長床犁)"라는 3분법이 널리 쓰여 왔습니다. 안아 쥐고 조종하는 쟁기로 대표되는 바닥없는쟁기는 안정성이 나쁘고 다루기 어렵지만 깊이갈이가 가능한 데 반해, 긴바닥쟁기는 안정성은 좋지만 얕이갈이밖에 할 수 없는 단점을 가짐. 이 양자의 장단을 취합한 것이 근대 짧은바닥 쟁기라는 분류입니다. 이 분류법에서는 깊이갈이가 가능한지 어떤지를 결정짓는 것은 소와 말의 견인력이라는 중요한 점이 누락되어 있는데, 농업의 생산력 향상에서 근대 일본을 뒷받침했던 농학계의 불타는 의욕을 반영한 분류법으로 이제는 문화재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쟁기는 1950년대 중엽부터 경운기로 교체가 진행되어, 지금은 박물관이나 자료관의 수장고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들 제1선을 은퇴한 도구류는 '민간 도구'라 부르고 있으며, 민간 도구가 된 쟁기의 역할은 토지를 경운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를 후세에게 전하는 이야기꾼으로 보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쟁기의 역할이 지역 역사의 이야기꾼이라면 그것에 상응하는 분류법이 있을 터입니다. 그리 생각해 제기한 것이 <그림8B>에 나오는 '조선계 삼각틀 쟁기' '중국계 사각틀 쟁기' '조선, 중국 혼혈형 쟁기'라는 "새로운 3분법"입니다. 이들은 6-7세기 역사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이기에 재래 쟁기의 형태를 알 수 있다면 그 지역의 6-7세기 역사를 복원할 수 있고, 다음과 같은 "쟁기 형태로부터 지역 고대사를 복원하는 공식"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조선계 삼각틀 쟁기가 사용되고 있던 지역 ...... 백제, 고구려 난민이 건너와 개척한 땅과 그 주변

중국계 사각틀 쟁기가 사용되고 있던 지역 ...... 정권을 지지하는 지역 또는 도래인이 오지 않았던 지역

한중 혼혈형 쟁기가 사용되고 있던 지역 ...... 5-6세기 제2기 도래인이 건너와 개척한 땅과 그 주변

 

그림8 쟁기의 3분법

 

다음 장에서는 이 공식을 단서로 도쿄 농업대학이 수집한 쟁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 도쿄 농업대학이 수집한 쟁기

도쿄 농업대학의 민간 도구는 이른 시기에 전국 규모로 수집했기 때문에 좋은 자료가 모여 있습니다. 그 뒤 시정촌 합병이 진행되었는데, 수집지를 세밀하게 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옛 시정촌으로 표기하겠습니다.

 

●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중국계 사각틀 쟁기

 <그림9>에 게재된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쟁기는 성에, 한마루, 자부지, 쟁기바닥의 4부재로 구성된 사각틀긴바닥 쟁기로 E의 강남 쟁기가 모델입니다. 강남 쟁기의 특징인 무지개 같이 구부러진 굽은성에는 F그림처럼 소의 목과 쟁기 끝을 연결한 힘의 작용선까지 견인점을 낮추어 안정된 자세로 주행할 수 있도록 한 고안입니다. 

나라현 쟁기의 성에, 손잡이의 교점에 4개의 쐐기가 겹쳐 보이는 건 D그림의 경운 깊이의 조절장치로, 현상에서 4개의 쐐기는 성에의 윗쪽에 박아 넣기 떄문에 성에 끝쪽의 견인점은 올라가 소가 끌게 하면 쟁기 끝은 내려가서 깊이갈이하는 경향이 되고, 그 반대로 쐐기를 아랫쪽에 박아 바꾸면 얕이갈이하는 경향이 되는 이치입니다.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쟁기에서 서로 다른 것이 손잡이의 모양. 나라현 쟁기는 T자형 손잡이로 타카이 개신 정부가 보급한 키나이畿内의 정부 모델 쟁기의 충실한 복제로서, 정권 측근의 정권 지지율이 높았던 걸 반영합니다. 교토 쟁기의 손잡이가 위로 늘어난 것은 조선계 삼각틀 쟁기의 자부지를 모방한 것. 아마 이 주변에는 도래인이 와 있어서 삼각틀바닥없는쟁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손에 익은 조선계 손잡이를 남긴 것으로, 중국계 90%, 조선계 10%의 혼혈형입니다. 와가야마현 쟁기는 별도의 자재로 손잡이를 붙였는데, 이것도 자부지의 뒤에서 잡는 방식이 남아 있는 것으로 중국계 90%, 조선계 10%의 혼혈형입니다.

90%가 중국계, 즉 정부 모델 쟁기 계통이란 것은 정권 지지율이 높다는 반영으로, 탄바丹波도 키이紀伊도 키나이 주변 지역으로 7세기 아스카飛鳥 정권의 지지자들이 있었던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9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중국계 사각틀 쟁기

 

 

● 가고시마현 도쿠노시마徳之島의 사각틀긴바닥쟁기

<그림10A>은 가고시마현 도쿠노시마의 쟁기로, 사탕수수밭의 사이갈이 김매기용으로 1950년 무렵까지 사용되던 것. 전장 131cm의 작은 것으로, 위의 나라현 쟁기의 전장은 281.5cm와 비교해 절반 이하로 작습니다. 이 유형의 쟁기는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부터 오키나와沖縄 본섬, 사키시마先島 제도까지 널리 쓰였으며 "남쪽 섬(南島) 쟁기"라고 불렸습니다. 그럼 이 쟁기는 어떤 사정으로 생겼던 것일까?

남도 쟁기는 성에, 한마루, 자부지, 쟁기바닥의 네 부재로 구성된 사각틀 쟁기로서, 이것은 중국계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남도의 사람들이 중국에 나갔다면 보았을 쟁기가 <그림10B>의 강남 쟁기로 똑같은 쟁기가 가고시마현의 일부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남도 쟁기와는 상당히 형태가 다릅니다. 중국 쟁기는 무지개 같이 구부러진 성에를 가지고 있는데 남도 쟁기는 비스듬히 상향한 곧은성에입니다. 상향한 곧은성에는 C그림처럼 소의 멍에를 겨냥한 각도로, 남도 쟁기의 제작자는 중국 쟁기의 실물 견본이 수중에 없이 막연한 이미지에 바탕해 재현 제작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상향한 곧은쟁기를 소에게 끌게 하면 C그림 같이 쟁기 몸체는 앞으로 젖혀지게 되고,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자부지를 앞으로 당겨야 하며, 그에 적응한 자부지가 ②의 앞으로 기운 자부지입니다. B그림의 강남 쟁기에서는 흙덩이를 오른쪽으로 넘기는 볏이 달려 있는데, 남도 쟁기에는 볏이 없습니다. 

⑥은 펜촉형 보습으로 중국 쟁기는 주물의 껍질이 붙은 삼각판이지만, 남도 쟁기는 단조품으로 모양도 다릅니다. 쟁기 제작제가 중국 보습의 견본을 보지 않고 대장간에서 두드렸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남도에서는 소가 먼저 부려졌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는 소로 논밭을 갈고 있으니 이것에 쟁기를 끌게 하자"라고 생각해, 어슴푸레한 기억에 기반하여 재현 제작한 쟁기가 이 남도 쟁기로서, 그것이 아마미오시마부터 오키나와 본섬과 사키시마 제도까지 퍼졌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림10 가고시마 도쿠노지마의 사각틀 쟁기

 

 

카가와현香川県의 외다리바닥있는쟁기

<그림11A>는 카가와현 미토요군三豊郡 오노하라쵸大野原町(현 칸논지시観音寺市)에서 사용되던 쟁기로 호칭은 소괭이. 이 쟁기는 윗부분은 성에, 자부지, 한마루의 삼각틀로서 조선계 삼각틀 쟁기 그것입니다. 그런데 아랫부분에는 길이 93.7cm의 완전한 쟁기바닥이 붙어 있어, 이 쟁기바닥은 중국계 사각틀 쟁기의 기본적인 부품입니다. 즉 오노하라 쟁기는 C그림에서 보듯이 조선계 삼각틀 쟁기의 구조에 중국계 쟁기바닥을 붙여준 전형적인 혼혈형입니다. 중국계 사각틀 쟁기는 한마루와 자부지가 쟁기바닥과 접합되어 사각틀을 구성하고 있는데 반하여, 이 외다리바닥있는 쟁기가 가진 정보로부터 카가와현의 6-7세기 역사를 복원해 보겠습니다. 

5세기 말부터 6세기 무렵, 카가와현의 평야부에 조선반도에서 온 도래인이 정착했습니다. 야마토 정권 아래 조선반도로 출병했던 현지 호족들이 초빙한 것이겠죠. 그들은 소와 삼각틀바닥없는 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미 말로 말괭이를 끌게 하던 현지 사람들은 처음 본 쟁기를 '소괭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난 7세기 후반, 타이카 개신 정부는 반전수수班田収授를 실행하기 위하여 관련 정책으로 중국계 사각틀 쟁기의 실물 모형=정부 모델 쟁기를 각지의 코오리노카미(이후의 군지)에게 보내 보급을 명했습니다. 정부 모델의 긴 쟁기바닥은 보기에도 안정감이 좋을 듯하여, 사람들은 손에 익은 삼각틀바닥없는 쟁기에 쟁기바닥을 붙였다. 혼혈형 외다리바닥있는 쟁기의 탄생입니다. 평야부의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헤이안 시대 무렵, 분가해 이주함에 따라 산간부의 개척이 왕성해졌습니다. 도쿠시마현, 에히메현과 접한 산간의 오노하라 마을에는 이 시기에 가지고 들어온 것이겠지요.

B그림의 코토히라쵸琴平町 쟁기도 같은 형태의 외다리바닥있는 쟁기로, 이쪽은 한마루가 철제 볼트인 개량형입니다.

 

그림11 카가와현 외다리바닥있는쟁기

   

 

사이타마현埼玉県과 도치키현今市市의 널판지 볏 부착 삼각틀 쟁기

<그림12A>의 사이타마현 가조시加須市의 쟁기는 전장 281cm인 장대한 몸체로, 구조를 보면 조선계 삼각틀이지만 쟁기날의 뒷면 부근은 길이 54cm의 쟁기바닥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조선계 삼각틀 쟁기에 쟁기바닥을 더한 혼혈형입니다. 또한 경운되는 흙덩이를 왼쪽으로 뒤집는 널판지 볏이 붙어 있는데, 이 목제 볏도 정부 모델 쟁기인 일목一木 볏의 각색으로 조선계 70%, 중국계 30%의 혼혈형입니다.

 

가조시 쟁기는 삼각틀 쟁기로 조선계이지만, 쟁기 몸체는 장대하며 그 원인을 D그림으로 보러 가겠습니다. 조선반도의 삼각틀바닥없는쟁기는 자부지가 서 있어 보습은 급한 각도로 지면에 닿아 있습니다. 이 조선반도 쟁기의 보습은 주조품으로 뒷면은 껍질로 되어 있어, 나무 부분인 자부지를 꽂아 쐐기로 고정하기 때문에 급한 각도로 지면에 닿아도 경운할 수 있습니다. 자부지가 서 있기에 쟁기 몸체는 짧은 쟁기가 됩니다. 짧은몸체 쟁기에 익숙한 도래인은 일본에 와서 보니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주조 보습이 없고, 단조 보습만 손에 넣을 수 없어서 당황했습니다. 단조 보습은 목요공 괭이처럼 나무 부분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끼워넣기 때문에 급한 각도로 지면에 닿으면 떨어져나갑니다. 그래서 얕은 각도로 지면에 닿도록 한 결과, 쟁기 몸체가 길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긴몸체삼각틀 쟁기는 조선반도에는 없는 모양으로, 도래 제1세대의 노고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림12B>의 도치키현 이마이치시今市市의 쟁기는 조선계 삼각틀 쟁기로 쟁기 몸체는 그리 길지 않지만 몸체가 누워 보습은 얕은 각도로 지면에 닿아 있으며, 도래 당시의 단조 보습에 맞춘 것입니다. 

A의 가조시 쟁기도 B의 이마이치시 쟁기도 현재는 C그림처럼 주조 보습이 붙어 있습니다. 이거슨 14-15세기 무렵에 주조꾼이 농촌을 영업하며 돌아다녀 주조 보습으로 교체된 것으로, 단조 보습의 모양이 남아서 큰 표지가 되었습니다. 중국과 조선반도의 주조 보습에는 큰 목덜미 선이 없습니다.  

 

그림12 사이타마현과 도치키현의 삼각틀바닥있는쟁기

 

 

 

군마현群馬県 다카사키시高崎市의 카이형甲斐型 쟁기

<그림13>의 AB 모두 다카사키시 카미나미에上並榎의 쟁기이고, 어느쪽이든 조선계 삼각틀 쟁기로 정부 모델인 사각틀긴바닥쟁기의 영향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회성인 정부 모델 쟁기의 배포가 끝난 뒤에 도래했기 때문이라 생각되며, 마지막 도래의 파도인 백제, 고구려 멸망에 따라 난민이 가지고 들어왔다고 생각됩니다.

다카사키시의 쟁기는 2대 모두 큼직하고, 키타큐슈의 안아 쥐고 서는 쟁기의 자부지 높이가 100cm 안팎인데 반하여 A쟁기의 자부지 높이는 128cm로 이상한 크기입니다. 사실 이것과 흡사한 쟁기가 C그림처럼 야마나시현에서 많이 보입니다. 유사점은 ①순수 조선계 삼각틀 쟁기이고, ②자부지의 높이가 120-130cm에 이른다는 점, ③성에와 자부지의 교차점의 약간 아래에 짧은 좌우 손잡이가 있는 점, ④자부지의 하부는 귀이개 모양 보습인 점 등으로부터 다카사키 쟁기 AB는 카이국에서 온 이주민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마나시현에서 이 큼직한 삼각틀 쟁기는 '부부 쟁기'라 부르며, 아내가 소 대신 어깨끈으로 끌고 남편은 자부지를 감싸안듯이 어깨에 걸치고 좌우 손잡이를 쥐고서 쟁기를 조종하면서 앞으로 기운 자세로 넘어질듯이 쟁기를 밀며 쟁기질했습니다. 남편이 자부지를 감싸안기 때문에 자부지는 길고 높아졌습니다. 이로부터 카이국에서의 개척은 당초 소와 말을 구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말로도 끌게 했지만, 큰 쟁기 몸체는 그대로 20세기까지 계승되었습니다. 

야마나시현에 분포된 중심은 남알프스 산록으로 고마군巨麻郡(고려군高麗郡)이라 불렀던 지역입니다. 고대에 고려라고 하면 고구려로서, 고구려 난민이 소와 말을 구하지 못한 와중에 개발한 것이 야마나시현의 큼직한 부부 쟁기입니다. 전국시대에 반농반무半農半武의 지방 토착 무사는 무장을 따라서 각지를 옮겨다니며 싸웠습니다. 다카사키시의 카이형 쟁기는 그러한 전국시대 무사가 이동한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그림13 군마현 다카사키시의 카이형 쟁기

 

 

키타큐슈의 안아 쥐고 서는 쟁기와 그 전파

<그림14>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라 부르는 키타큐슈계의 쟁기이고, <그림13>의 카이형 쟁기와 똑같이 조선계 삼각틀 쟁기로 정부 모델인 사각형긴바닥쟁기의 영향은 전혀 볼 수 없는,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에 따라 난민이 가지고 왔다고 생각됩니다. A는 나가사키현의 쓰시마에서 사용되던 재래 쟁기로 작은 조선계 삼각틀 쟁기입니다. 이 삼각틀바닥없는쟁기는 후쿠오카 평야에도 널리 분포하고 있어 '안아 쥐고 서는 쟁기'라 불러 왔습니다. 지리적 위치로 미루어보면, 663년에 멸망한 백제의 난민이 가지고 왔다고 생각됩니다.

메이지 초기의 일본에서 소와 말 쟁기질의 보급율은 서고동저로, 도호쿠 지방에서는 소와 말 쟁기질을 행하지 않고 츄우부中部와 칸토우関東 지방에서도 소와 말 쟁기질의 보급율은 낮았으며, 또 쟁기를 쓰지 않는 습논도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후쿠오카현 독농가 하나시온리林遠里는 현지에서 사용해 왔던 안아 쥐고 서는 쟁기가 깊이갈이에 뛰어나다는 점 때문에 이를 보급해 근대 일본을 지탱하고자 사설 칸노우샤(勸農社)를 결성, 젊은이를 모아 말 쟁기질 교사를 육성하고 '마른논 말 쟁기질'이란 구호 아래 말 쟁기질 교사를 전구으로 파견해 쟁기질의 보급에 힘썼습니다. 안아 쥐고 서는 쟁기는 쟁기질이 없던 도호쿠 지방이나 보급율이 낮았던 츄우부와 칸토우 지방에서 환영받아 소와 말 쟁기질이 침투해 나아갔습니다. 

도쿄 농업대학에서는 이 시기에 동일본에 퍼졌던 안아 쥐고 서는 쟁기가 수집되어 있습니다. B는 아키타현 유리군由利郡의 것, C는 이바라키현茨城県 미토시水戸市, D는 니이가타현新潟県 사도군佐渡郡의 것입니다. 근대 일본을 짊어지고 각지로 향한 말 쟁기질 교사의 활동 흔적을 수집된 쟁기로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것이 도쿄 농대 수집품의 훌륭한 점입니다. 

D의 배경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안아 쥐고 서는 쟁기에는 긴 수평 막대가 좌우로 튀어나와 있고, 좌우의 손을 바꿔 쥐며 흙덩이를 좌우로 뒤집었습니다. 안아 쥐고 서는 쟁기는 미흡하지만 양손용 쟁기였습니다. 또한 안아 쥐고 서는 쟁기는 바닥없는쟁기의 대표처럼 이야기되지만, 짧은바닥 쟁기 유형도 있었던 점을 수집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림14 키타큐슈의 안아 쥐고 서는 쟁기와 그 전파

 

 

 

근대 짧은바닥쟁기

<그림15>에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를 대신해 근대 쟁기질의 주역이 된 근대 짧은바닥쟁기를 모아 보겠습니다. 큐슈에서는 고대 이래 바닥없이 안아 쥐고 서는 쟁기 외에 짧은바닥 쟁기 유형의 쟁기도 사용되어 왔습니다. 1900년 쿠마모토현 오쓰 스에지로大津末次郎가 짧은바닥 쟁기 유형의 재래 쟁기를 기반으로 D그림 같이 한마루를 철제 볼트로 만들고 나사를 조여 깊이갈이와 얕이갈이의 조절이 가능하도록 하며, 성에와 자부지의 접합부는 철제 접합부로 만들어 나사로 쟁기질 너비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한 근대 짧은바닥 쟁기를 개발, 특허를 받았습니다. 

볼트 한마루의 나사를 조이면 성에 끝의 봇줄걸이가 내려가고, 소와 말이 끌면 성에의 끝은 끌어올려져 그와 연동해 보습이 올라가 얕이갈이하게 된다. 그 반대로 나사를 풀면 깊이갈이하게 됩니다. 철제 접합부의 나사를 움직여 성에의 근원을 중심위치로부터 벗어나게 하면, 성에의 끝이 좌우로 틀어지기 때문에 소와 말이 끌면 보습은 약간 좌우로 벗어나게 되어 쟁기질 너비가 넓어집니다. 

오쓰의 특허는 A유형의 왼쪽 뒤집기 전용 고정형 쟁기였는데, 이듬해에는 나가노현의 마츠야마 하라조松山原造가 지렛대를 움직여 좌우 어느쪽으로도 뒤집을 수 있는 B와 같은 전환형 쟁기의 특허를 받았습니다. 근대 짧은바닥쟁기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를 대신하는 근대 쟁기가 되어, 다이쇼大正와 쇼와昭和 시기에 서서히 안아 쥐고 서는 쟁기나 재래 쟁기를 대신해 나아갔습니다. 

E의 사진에서 보면, 고정형 쟁기에서는 쟁기꾼이 왼손으로 자부지 상단을 쥐고 오른손으로 비스듬한 손잡이를 아래에서 잡고 들어올리는 듯이 하여 쟁기 몸체를 왼쪽으로 기울이면서 주행해 흙덩이를 왼쪽으로 뒤집어 나아갑니다. 전환형 쟁기에서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로부터 계승한 수평 손잡이가 있어 쟁기꾼은 지렛대로 볏을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자부지 상단과 수평 손잡이를 쥐고서 자부지를 기울여 좌우 어느쪽으로도 뒤집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C는 깊이갈이를 목표로 한 3단 갈이 쟁기. 일반적으로는 2단 갈이 쟁기이지만 이것은 3단으로, 근대 짧은바닥 쟁기의 궁극적인 형태입니다. 

 

그림15 근대 짧은바닥쟁기

 

 

● 개량 재래 쟁기

메이지 말기에 개발되어 다이쇼, 쇼와 시기에 보급된 근대 짧은바닥 쟁기는 재래 쟁기에 비해 작고 회전 반경이 작으며 다소 경운 깊이가 깊어지는 이점이 있는 반면, 안정성에서는 재래 쟁기 특히 사각틀긴바닥쟁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맥류의 두둑짓기도 재래 긴바닥쟁기처럼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없었습니다. 학계에서는 근대 짧은바닥쟁기의 등장으로 재래 쟁기가 일제히 모습을 감추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경운기가 출현할 때까지 근대 짧은바닥쟁기와 재래 쟁기를 구별해 사용하던 지역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재래 쟁기에는 근대 짧은바닥쟁기에 없는 장점도 있었기에, 근대 짧은바닥쟁기의 장단을 취하는 형태로 개량된 개량 재래 쟁기가 각지에서 제작되었습니다.

<그림16>의 A는 도야마현에서 제작된 미치즈카三塚 쟁기로, 보습을 앞뒤 반대로 장착하여 볏으로 만든 건 안아 쥐고 서는 쟁기의 아이디어입니다. B는 후쿠이현에서 사용되던 쟁기로, 성에를 굽은성에로 바꾸기만 한 미치즈카 쟁기의 모방 쟁기. 평판이 좋았던 미치즈카 쟁기의 복제 쟁기입니다.

D그림에서는 고삐걸이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호쿠리쿠北陸 지방은 말쟁기 지대로 에도시대부터 말에게 재갈을 물리고 2개의 고삐로 조종했습니다. 고삐가 늘어지면 말의 다리에 걸려 위험하기에 한마루를 꿰는 나무못을 직사각형 널의 고삐걸이로 삼고, 왼쪽 고삐는 구멍을 통과시키고 오른쪽 고삐는 벗어나는 걸 방지하는 갈고리가 달린 가로대로 받치고 있었는데, 귀여운 물고기 모양도 나타났습니다. 물고기 모양은 이로리囲炉裏의 냄비 갈고리에 자주 사용되는 디자인으로, B의 후쿠이 쟁기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C는 다카사키의 개량 재래 쟁기로 수수한 쟁기이지만 판자 볏으로 바꾸어 철제 곡면의 볏을 일으켜세운 점과 2.5m를 넘었던 재래 쟁기의 전장을 1.7m 안파의 크기로 줄인 점이 개량점이겠지요.

이외에도 효고현兵庫県 이타미시伊丹市에는 재래 긴바닥쟁기에 철제 접합부를 붙인 개량 긴바닥쟁기가 있고, 시가현 고토湖東의 좀 작은 가을갈이 쟁기 등 각지에서 개량 쟁기가 제작되어 현지의 경제를 뒷받침했습니다. 

 

그림16 개량 재래 쟁기

 

 

 

8. 민간 도구는 역사자료

지금까지 재래 쟁기와 근대 짧은바닥쟁기, 개량 재래 쟁기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도쿄 농업대학 수집자료의 훌륭함은 전국 각지의 쟁기를 모은 것이기에 도쿄 농업대학 자료만으로도 고대부터 근대까지 일본 각지의 쟁기질 역사, 농업기술사, 나아가서는 지역 고대사나 전국시대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재래 쟁기로부터 지역마다의 개성 있는 고대사를 복원할 수 있었던 건 "민간 도구를 통한 역사학"입니다. 지금까지 일본의 농기구가 각지에서 모양이 다른 건 그 토지의 지형이나 토질에 맞추어 개량을 거듭한 결과라는 "지형, 토질 결정론"이 믿어져 왔습니다. 그것이 실수라는 걸 깨달은 각지의 자료관 수장고를 조사해 역학적으로 불합리한 쟁기를 개량하지도 않고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보고나서입니다. 왜 개량하지 않은 걸까, 그것은 전통적 농촌사회에서는 농기구가 망가지면 동일한 모양으로 갱신한다는 원리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민간 도구 유전자의 발견으로 이어졌습니다.

전국적인 재래 쟁기 조사로부터 타이카 개신 정부의 긴바닥쟁기 도입 정책을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타이카 개신 정부는 견당사에게 입수한 쟁기를 바탕으로 중국계 사각틀 정부 모델 쟁기를 만들어 각지의 코오리노카미(이후의 군지)에게 보내서 보급을 도모했습니다. 그 때문에 쟁기질의 처녀지에서는 정부 모델 쟁기가 계승되어 도래인이 조선계 삼각틀 쟁기를 쓰고 있던 지역에서는 혼혈형이 탄생하고, 정책 시행 뒤에 도래한 백제와 고구려 난민이 정착한 곳에서는 정부 모델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조선계 삼각틀 쟁기가 그대로 남았습니다. 민간 도구는 지금까지 유형민속문화재로 취급되어 조부모 시대의 삶을 전하는 민속자료로 여겨져 왔는데, "민간 도구를 통한 역사학"에서 재래 쟁기의 형태로부터 시정촌별 개성 있는 고대사가 복원될 수 있었습니다. 민간 도구는 역사자료입니다. 지역 유산으로서 모두의 손으로 지켜 나아갑시다. 

 

 

 

코우노 미치아키河野通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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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농기구란? 그 역사

 

 

온고지신 - 일본인은 메이지 시기까지는 중국, 메이지 이후는 서양, 그리고 전후에는 미국의 문화를 도입한 것이 일본의 근대화라고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그때 좁은 일본에서 오래된 도구를 보존하고 있었던 것은 선진국의 기술, 도구를 도입하는 데 곤란을 준다고 생각되었습니다. 1957년 池田 내각 시대는 농가의 소득이 도시 급여소득자의 절반쯤입니다. 그래서 농가의 소득도 급여소득자와 마찬가지로 높이려 하여 농가의 소득 배증을 어떻게 할까. 1960년에 농업기본법이 제정되어 이에 기반하여 1962년에 전국에서 제1차 농업구조개선사업이 개시되었습니다. 농작업의 효율화를 도모하기 위해 농지의 경지정리, 습지의 암거 구축, 두렁의 정비, 용배수로의 정비, 관개시설의 설치, 농기구의 정비 등이 행해졌습니다. 이때까지 동력원으로서 인력과 축력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경지정리에 의하여 동력원이 석유발동기나 가솔린엔진을 휴대한 경운기, 트랙터 등을 도입해 작업의 효율화와 하나의 경지당 재배면적이 확대되었습니다.

 

벼농사를 보면 1945년 전반까지는 물못자리에서 온탕소독과 싹틔우기를 행하고 수온이 20도 정도가 되고나서 파종을 행했습니다. 그 뒤 기름종이에 파종한 모판에 왕겨훈탄을 뿌려 그 위를 덮었다. 그에 의하여 서리 피해를 막고, 모의 발육을 촉진하며, 지역에 따라서는 종래보다도 10일에서 20일 모내기를 일찍 할 수 있었습니다.

 

보온 절충 못자리의 최초인(나가노현 카루이자와軽井沢 하기와라 토요지萩原豊次 씨가 1931년에 개시) 기름종이는 1회나 2회밖에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 폴리에틸렌 필름이 도입되어 몇 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 뒤 1955년 전반에는 농업용 비닐 필름이 도입되어 대나무대를 이용해 비닐 터널 재배로 변했습니다. 보온 절충 못자리가 도입되고나서부터 손모내기 모는 파종 뒤 45일 전후에 모내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약 1달 정도 모내기가 빨라졌습니다. 모든 농작업도 빨라져 태풍이 오는 철을 약간 피할 수 있게 되어 수확량 증대가 예상된 한 요인이기도 합니다. 

 

그 뒤 농촌의 생활양식에도 변화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생활개선의 일환으로 정월에 장식용 소나무를 없애고 종이에 소나무 그림을 인쇄해 그걸 대용으로 붙였습니다. 농작업복은 일본식에서 서양식으로 변했습니다. 주거도 서서히 고쳐 지어서 일본식에서 서양식으로 일부는 남았지만 변화했습니다. 

 

주거나 농막의 개조에 의하여 사용하지 않게 된 농기구는 폐품이 되어 철제품은 철 부스러기로 재이용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초등학교에서 이를 모아 문방구 등의 구입비로 충당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 속에서 종래 사용되었던 농기구는 급속히 소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작물 재배, 가축의 사육에서는 그 기본이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크게 변화한 것은 동력원이 인력과 축력에서 동력으로 변화한 것, 또 플라스틱 필름이 개발되어 농업에 도입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농기구 기능은 바야흐로 "옛것을 찾아 새로운 것을 안다." 이것의 기본이 되는 도구가 옛 농기구입니다. 1967년 제2차 농업궂개선사업이 개시되고, 더욱 농촌이 정비되어 잉여노동력은 도시노동자로 이행되었습니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는 줄어들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농촌의 자연환경은 서서히 부정적 방향으로 향한 것입니다. 겨울철에는 논에서 물이 사라져 마른논이 되어 종래의 겨울 담수 논은 사라졌고, 많은 생물들이 서식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농작업의 효율화, 농산물의 생산 증대를 목적으로 한 농업이 지금 재검토되고 있습니다.

 

농기구를 통하여 인간은 자연 속의 일원으로 공생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크게 통감할 수 있습니다.

 

 

 

우메무로 히데오梅室英夫 

    

 

 

2장   그림에서 보는 땅을 가는 농업기술

 

농서는 근대 농학이 성립하기 이전의 농업기술이나 농민의 생활에 대한 저작물입니다. 근대 이후는 농학서이지 농서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농서의 성립은 중국 농서의 영향을 받았고, 당연한 일이지만 조선과 류큐의 농서가 성립되는 데에도 지극히 큰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남북조 시대인 6세기 전반의 북위北魏에서 성립한 가사협의 <제민요술>은 밭농사 농업의 기술을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나라 시대의 육구몽陸龜蒙의 <뢰사경耒耜經>은 강남의 논에서 사용한 역축 농기구의 해설입니다. 1154년에 남송南宋에서 간행된 진부陳旉의 <농서農書>는 논 농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313년 왕정王禎의 <농서農書>는 화북, 화중의 농법을 비교한 재래 농기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639년 간행된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는 고래의 농학자의 설과 당시 유럽의 농업기술을 소개한 농정의 집대성입니다. 이상이 중국의 논과 밭농사에 관한 농기구를 일본에 소개한 농서입니다.

 

한편, 일본에서 농서의 성립은 16세기 후반인 1629년부터 1654년 사이의 전국시대 이요伊予의 무장 도이키 요요시土居淸良가 마츠우라 소우안松浦宗案에게 농업에 대하여 설문하여 그에 답한 것을 마츠우라가 적어 올린 <청량기淸良記> 30권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특히 제7권은 농업에 대하여 기재되어 이를 <친민감월집親民鑑月集>이라고 별도로 부르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1682년에는 미카와三河, 엔슈遠州 지방의 농업기술을 정리한 전15권 작자 미상의 <백성전기百姓伝記>. 1684년에 사세 요지에몬佐瀬与次右衛門이 지은 <아이즈농서会津農書>는 상권은 벼농사, 중권은 밭농사, 하권은 농가경영의 3권으로 구성되어 아이즈의 농업기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697년 미야자키 야수사다宮崎安貞가 지은 <농업전서農業全書>는 키나이畿内를 중심으로 해 산요우도山陽道, 키이紀伊 지방 등을 조사해 농민에게서 듣고 적은 걸 바탕으로 전10권을 저술하여 일본 최초의 종합적 농서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농학자 서광계의 영향을 받아 농기구 그림은 그려놓았지만 그 사용법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에도江戶 시대의 3대 농학자(미야자키 야수사다,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 오쿠라 나가츠네大蔵永常)의 한 사람인 오쿠라 나가츠네는 미야자키 야수사의 영향을 받아, 1822년에 각지를 여행한 견문에 기반하여 42종류, 110점의 농기구에 대하여 <농구편리론農具便利論>(그림1)을 저술했습니다. 그 내용은 농기구의 각 부분의 치수, 각도 및 무게와 지면에서부터 자루의 끝까지의 길이, 사용처의 토성까지 농기구와의 관계를 농민도 읽기 쉬운 가나로 기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사용법이 난해한 농기구에 대해서는 그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지금까지 없던 획기적인 농서로 메이지明治 30년대까지 복각간행되었습니다. 그 이후도 서양 농기구에 관한 서적이 출판되었는데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농구편리론>(그림2)이 인용되어, 명저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1
그림2

 

 

이 이전에 사츠마薩摩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의 의향에 의해 1804년 소한曾槃이 지은 <성형도설成形圖說>은 농업의 백과전서라 불리는데, 그곳의 해설은 만엽집과 농정전서로부터 인용하고, 번의 식산흥업을 위한 서적이기도 하며, 무사의 교양서라고도 불렸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농업에 정통한 지방의 독농가, 즉 메이지 시대의 3대 노농의 하나인 <노농만경록老農晩耕錄>의 저자 이시카와 리치노스케石川理紀之助는 아키타현秋田県 센보쿠仙北 지방의 가난한 마을에서 구제 지도를 행했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는 벼농사, 밭농사 등에 대하여 다수의 농서가 간행되어 농업기술을 다루고 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 이후 근대까지, 농민은 풍년만작豊年滿作(그림3)을 염원하고 사계절마다 벼농사의 농경방법을 그린 <사계경작도四季耕作圖>가 그림의 첫머리에 받아들여져 각지의 신사에 봉납되어 그 몇 개인가가 현존해 있습니다. <타와라카사네たわらかさね 경작 두루말이 그림>(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두, 작자 미상)은 성형도설과 마찬가지로 다이묘와 무가의 자제에게 농업의 과정을 가르치기 위하여 농경의 연중행사를 그렸습니다. <광익국산고広益国産考>(1844년 오쿠라 나가츠네 저)는 전7권, 그의 생애의 견문이 집대성된 서적입니다. 

 

 

그리고 메이지 6년 일본은 4월부터 8월까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각 부현에서 박물국에 제출된 출품물의 도설을 박물국  여러 산물의 제조과정을 중심으로 도해한 <교초敎草>(그림 4, 5)가 있습니다. 

 

 

 

메이지 벼농사 농법은 토지개량에 의한 습논의 건논화, 쟁기를 이용하던 우마에 의한 깊이갈이, 시비 기술의 개량, 볍씨의 소금물가리기나 좁고 긴 장방형 물못자리 등이 보급되어 종래에 비해 그 수확량과 노동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이 농법을 교초에 의하여 보급하려고 시도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이 다나카 요시오田中芳男(1838-1916)입니다. 또 다나카는 일본에 박물관을 탄생시킨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다나카 요시오(농대의 전신 도쿄 고등농학교의 초대 교장)은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물에 즉한 지식의 개명"으로, 더 상세한 자료정보의 제공방법으로 서적이나 그림(그림 6, 7, 8, 9, 10)이 필요하다고 기술합니다. <교초>는 그에 해당하는 것의 하나입니다. 올바른 정보란 실물과 활자와 그림이 조합되어야 진실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 사상은 농대의 도서관 창설 당시부터 표본(실물자료), 도서, 도해(족자에 탁본, 현재는 사진, 영상)의 세 기둥으로 정보가 성립된다는 점을 개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학을 최우선으로 삼는 농학, 농업에서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으로,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농업의 발전에는 "옛것을 익혀서 새로운 걸 안다"는 이념에 따라 전통의 기초 위에 세우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독창적인 실학이 되는 것입니다(그림 11, 12, 13).

 

 

 

 

 

 

 

제3장   괭이

 

   1.  괭이의 기원

 

지금으로부터 약 1만5천 년 전에 농경 기원의 하나로 뿌리채소 농경문화가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얌이나 타로를 재배, 수확하기 위한 도구로 봉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뒤지개掘棒(하라노 코오조原野耕三 씨에 의하면 동남아시아의 화전 농경을 행하는 소수민족이 현재도 사용하고 있음)라 부르고, 현재도 사용하는 소수민족이 있습니다. 현재의 괭이는 이 뒤지개의 끝부분이 넓어지고 현재의 발쟁기(踏鋤) 형태가 된 뒤, 결국은 자루에 날판(刃床) 부분이 덧붙여진 괭이가 되었습니다.  그뒤 뿌리채소 재배는 서남아시아에 도달하고, 맥류 농사와 우마의 가축화가 행해져 말과 소에 의한 쟁기질에 의한 경작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그럼 일본에서는 언제쯤부터 괭이가 존재했을까? 지금으로부터 대략 1400년 전 야요이 시대에 벼농사 농경이 존재했습니다. 야요이 시대의 전기에는 목욕통(날판 부분)에 구멍을 뚫고, 곧은 자루를 장착한 괭이가 후쿠오카현의 이타즈케板付 유적, 시즈오카의 토로登呂 유적, 미에현 츠시津市의 노소納所 유적, 비사이시尾西市 오카시마岡島 유적, 토요하시시豊橋市 우리고爪郷 유적, 토요타시豊田市 가와하라川原 유적 등에서 목제 괭이가 출토되었습니다. 아이치현 기요스시淸須市의 아사히朝日 유적(중기 후엽)에서 출토된 괭이에 양끝을 접어 구부린 철날을 장착한 흔적이라 생각되는 목욕통 부분이 보고되었습니다. 이들 출토품의 재질은 북가시나무, 가시나무, 주목 등입니다. 현재도 날판 부분의 철을 제하면 목욕통과 자루의 재질은 야요이 시대와 바뀌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타즈케 유적에서 발굴하다 도랑의 벽면에서도 철날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그리고 철기시대로 변천했다고 합니다만, 일본에서는 청동기 시대(야요이 후기부터 일본제 청동기가 나타남)가 없이 야요이 시대에 철기문화가 벼농사와 함께 한반도로부터 이입된 것이라 합니다. 

 

그럼 야요이 문화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물으면 오카자키 타카시岡崎敬 씨의 고고학적인 자료에 기반하면 양자강 하류(강남 지방)에서 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산동반도, 조선의 서남해안을 거쳐서 북규슈에 전해졌다는 설이 정설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설을 이시게 나오미치石毛直道 씨는 돌칼을 이삭 자르는 데 사용하며 이는 동남아시아에는 없는 도구이고, 세계에서 동아시아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석기라고 지지하고 있습니다. 또, 야요이 시대에는 목제의 괭이는 갈이용과 진흙을 뒤섞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진 것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키노시타 타다시木下忠 씨의 일본의 고고학 3권 <농구農具>에 의하면 경운용 찍는괭이(打鍬)는 자루와 날판 사이 부분의 폭이 좁고 두터우며 자루가 이루는 각도는 60-80도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인 진흙을 뒤섞고 고르는 데 쓰는 건 자루와 날판 사이 부분의 폭이 찍는괭이에 비해 넓고 얇으며, 자루가 이루는 각도는 40도 정도의 당기는쟁기(引鍬)입니다. 이외에 날이 몇 개인 갈래괭이(股鍬)나 흙의 이동, 구멍 파기 등에 쓰는 발쟁기 등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시기의 출토품은 모두 목제입니다.

 

그럼 언제쯤부터 철이 괭이나 낫에 쓰였는가 하면 츠데 히로시都出比呂志 씨에 의하면 1세기 말에 한반도에는 그 유사품이 없고 일본 독자의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에서는 철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이입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일반에는 보급되지 않고 일부의 계층만이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5세기가 되면 한반도의 삼국시대(신라)의 철제 낫과 같은 것이 일본에도 존재했습니다. 중국 화북의 전국시대에는 철제 농기구가 이미 존재하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도래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중국의 가래(鋤)는 일본의 괭이에 해당하고, 괭이는 거꾸로 가래로서 의미가 정반대입니다.

 

 

   2.  괭이의 형태

괭이는 용도나 흙의 성질에 의해, 날판 부분의 모양과 자루의 길이, 자루의 각도, 무게 등이 그 형태를 다르게 만든다고 합니다. 기본으로 하는 모양은 괭이 자루의 끝이 지면에서부터 사용자가 직립한 자세로 허리 높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업을 계속해도 쉬이 피곤해지지 않는 자세입니다. 즉 어떤 각도를 가진 괭이라도 이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다만 어떤 일에도 예외가 있듯이, 히고肥後 괭이나 사츠마薩摩 괭이는 날판 부분과 자루의 길이가 동일하든지, 또는 자루의 길이가 조금 깁니다. 자루의 끝은 허리의 위치에 있지만 허리를 구부려 쭈그린 자세의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날판 부분의 재질과 형태에 의한 분류(그림14)

 

 

 

-나무 괭이 ... 목욕통, 자루는 가시나무나 북가시나무, 주목, 참가시나무, 밤나무. 일부 지역에서는 두렁치기용으로 사용(그림15).

 

-목욕통 괭이 ... 날끝은 철로 자루 및 목욕통은 목제. 두둑짓기, 북주기, 사이갈이 김매기, 경운, 수확, 두렁깎기, 두렁치기, 옮겨심기, 흙 다지기 등

 

-삽괭이 ... 자루는 목제이고 날 부분은 철. 또 날 부분에 2-3개의 구멍이 있어 이것을 창문괭이라 한다. 용도는 목욕통 괭이에 준한다(그림16).

 

-빗츄備中 괭이 ... 자루는 목제이고 날 부분은 철로 2-5개의 갈래. 주로 논의 경운, 흙부수기, 두렁치기할 때 진흙을 두렁에 붙인다. 점토질의 밭, 논의 경운

 

 

   3.  특수한 용도

 

-죽순 캐기 ... 삽괭이

-나무 심기, 개간용 괭이 ... 날판 부분은 두텁고 은행잎 모양을 하며, 날끝은 포물선을 그린다(그림17).

 

 

-연근 캐기 ... 목욕통 쟁기로 자루가 짧고 자루의 각도가 예각

-고구마, 토란 캐기 ... 빗츄 괭이를 쓰고, 줄기 부분의 손상을 막습니다. 

-벼 그루 자르기 ... 벼 그루를 한 그루씩 지면으로부터 잘라 해충 등의 월동을 방지하는 삽괭이

-땅 다지기 행사, 나무심기 행사, 건축의 지형 ... 나무 괭이

-점토와 자른 볏짚을 반죽해 흙벽을 만든다 ... 삽괭이

-석회, 마, 종이 등의 여물과 바닷풀을 쪄서 반죽해 회반죽을 만든다 ... 나무 괭이

 

 

 

   4.  자루와 날 부분의 각도에 의한 분류

-찍는괭이 ... 경운, 개간, 모종의 옮겨심기를 목적으로 하고, 그 자루의 각도는 60-70도, 자루 길이는 60-120cm, 자루의 끝은 두꺼워져 미끄러짐을 방지합니다. 삽괭이에 속하고, 중점토나 모래자갈에 적합합니다. 

-당기는괭이 ... 가볍고 다루기 쉬우며, 자루의 각도는 40-45도이고 약간 사질토양에 적합한 괭이입니다. 

-찍고당기는괭이 ... 주로 밭의 두둑짓기를 하고(그림18), 흙 붙이기, 사이갈이 김매기를 목적으로 한 괭이로, 자루의 각도는 50도 정도이고 자루 길이는 40-150cm.

 

 

   5.  특수한 형태의 괭이. 아마쿠사天草 괭이, 사츠마薩摩 괭이

 

특수한 형태의 괭이 아마쿠사 괭이, 사츠마 괭이는 목욕통 괭이에 속하고, 주로 논밭의 경운, 밭의 사이갈이 김매기, 두둑짓기를 목적으로 합니다. 자루의 각도는 20-35도이고 자루 길이는 40-60cm로 날판 부분과 자루의 길이가 동일합니다(그림19).

 

 

 

   6.  토양 성질에 의한 괭이의 형태

토양 알갱이의 조성에 의하여 입자를 아래와 같이 분류합니다.

-거친 모래 : 0.25-2mm ... 목욕통 괭이, 삽괭이의 찍는괭이, 찍고당기는괭이, 당기는괭이 모두 사용 가능. 

-가는 모래 : 0.05-0.2mm ... 당기는괭이, 찍는괭이, 삽괭이, 목욕통 괭이의 사용이 적합합니다. 

-미세 모래 : 0.01-0.05mm ... 당기는괭이, 찍는괭이, 삽괭이, 목욕통 괭이의 사용 가능.

-점토 : 0.01mm 이하 ... 찍는괭이, 빗츄 괭이가 적합합니다.

-가는흙 ... (굵기 2mm 이하의 토양 입자) 내부의 점토 함량에 의한다. 

-모래흙 ... 12.5% 이하 ... 찍는괭이, 당기는괭이, 찍고당기는괭이, 목욕통 괭이, 삽괭이의 사용이 적합합니다.

-사양토 ... 12.5-25% ... 찍는괭이, 당기는괭이, 찍고당기는괭이, 삽괭이의 사용이 적합합니다.

-양토 ... 37.5-50% ... 찍는괭이, 빗츄 괭이의 사용이 적합합니다.

 

 

   7.  괭이의 무게에 의한 분류(총중량)

-찍는괭이 ... 2.8kg 이상 ... 빗츄 괭이, 목욕통 괭이

-당기는괭이 ... 1.3kg 이상 ... 삽괭이, 목욕통 괭이

-찍고당기는괭이 ... 앞 두 가지의 중간 ... 빗츄 괭이, 목욕통 괭이

*남성과 여성이 사용하는 괭이의 중량 차이는 여성이 약 10% 가볍다. 

 

 

   8.  괭이를 사용하는 사람의 진행방향에 의한 분류

-전진 ... 논밭의 경운(그림20), 밭의 김매기, 벼의 포기 자르기, 두렁치기(그림21), 논의 쟁기질한 흙 부수기, 뿌리채소의 수확 등 ... 찍는괭이, 빗츄 괭이, 삽괭이, 목욕통 괭이를 사용.

 

-후퇴 ... 두둑짓기(그림22), 북주기, 뿌리채소의 수확, 옮겨심기 등 ... 찍고당기는괭이, 당기는괭이, 목욕통 괭이, 삽괭이, 빗츄 괭이를 사용합니다. 

 

*습논 경운을 할 경우, 진흙이 앞으로 튀어 자루와 사용자에게 걸려 작업효율을 손상시킵니다. 그래서 빗츄 괭이의 날 부분 끝보다 약간 큰 구멍의 대나무로 짠 판 모양의 것(치바에서는 다테라고 함)을 자루의 아래쪽에 장착하고, 진흙이 튀는 걸 막습니다(그림23). 종려나무의 잎자루를 장착하는 지역도 있습니다. 

 

 

 

 

   9.  괭이의 사용법

 

-찍는괭이 ... 오른손잡이 ... 왼손으로 자루의 끝(미끄럼 방지 부분)을 잡고 오른손은 왼손에서 어깨너비 정도 떨어진 부분을 잡으며 괭이를 휘두릅니다. 지면에 괭이가 박히는 동시에 오른손은 왼손의 앞으로 미끄러집니다. 두발은 어깨너비의 1.5배로 벌립니다. ... 빗츄 괭이, 목욕통, 삽괭이

                    왼손잡이 ... 오른손잡이의 반대가 됩니다.

 

-찍고당기는괭이 ... 오른손잡이 ... 왼손으로 자루의 끝을 잡고 오른손은 왼손에서 어깨너비의 위치를 잡으며, 괭이로 흙을 1 또는 2회 정도 파고 날 부분에 흙을 얹어 오른쪽으로 흙을 북돋아 두둑짓기를 행합니다. 발은 두둑 너비로 벌리고 오른발을 앞으로, 왼발을 뒤로 하고서 후퇴하면서 북돋우기를 합니다. ... 목욕통 괭이, 삽괭이, 창문괭이를 사용합니다.

                              왼손잡이 ... 오른손잡이와 반대로 합니다.

 

-당기는괭이 ... 오른손잡이, 왼손잡이 ... 찍고당기는 괭이에 준합니다. ... 목욕통 괭이, 삽괭이, 창문괭이를 사용.

 

*괭이자루의 잡는 위치와 발의 위치 관계

경운(논밭) ... 주로 쓰는 손은 괭이자루의 끝에서 어깨너비를 잡고, 다른 손은 괭이자루의 끝을 잡아 고정합니다. 괭이의 날 부분이 흙에 꽂히는 시점에는 주로 쓰는 손은 끝을 잡은 손과 가까이 인접해 있습니다. 또 괭이를 휘두르는 시점에는 주로 쓰는 손을 어깨너비의 위치로 되돌려 휘두릅니다. 즉, 주로 쓰는 손은 내리꽂을 때마다 다른 손과의 사이를 왕복하며 움직입니다. 

두발의 위치는 경운 진행방향으로 어깨너비의 1.5배로 벌리고 평행하게 섭니다. 괭이는 순차적으로 120cm 정도의 너비로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또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한 괭이씩 경운합니다.

이외에 오른손잡이는 논의 경운에 빗츄 괭이를 사용하는 경우, 두둑 3개를 기준으로 왼쪽의 4번째 그루를 일으켜 뒤집고, 다음으로 오른쪽의 2번째 그루를 일으켜 뒤집습니다. 이렇게 연속하며 전진하기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옵니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와 반대로 시작점으로 되돌아와 전진합니다. 

또한 1년 내내 물이 있는 논의 경운 방법으로, 두둑 4개를 기준으로 왼쪽 그루를 1그루씩 뿌리부터 자르며 2그루를 하나로 겹쳐 앞쪽으로 북돋으면서 전진합니다. 오른쪽 그루도 똑같이 합니다.  이 작업의 그루 북돋우기는 왼쪽과 오른쪽을 교대로 행하기 때문에 주로 쓰는 손의 지점이 바뀌어 양손잡이가 아니면 효율적으로 경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괭이는 목욕통(치바현 도가네시東金市에서는 갑페라カッペラ라고 부름) 괭이입니다. 

갑페라

 

 

두둑짓기, 북돋우기(밭). 주로 쓰는 손은 경운의 자루 쥐는 법과 동일하지만 다른 손과의 사이를 왕복하는 건 별로 없고 거의 고정됩니다. 오른손잡이는 오른발을 두둑짓기가 종료된 고랑의 앞쪽에 놓습니다. 다른 발은 고랑을 교차하는 위치에서 오른발에서의 보폭과 같은 위치에 놓습니다. 즉, 왼발은 괭이 끝보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고, 두둑을 넘은 자세로 후퇴합니다. 

오른손잡이는 흙으로 오른쪽에 북돋우기를 하고, 한 두둑을 마칠 때마다 시작점으로 되돌아갑니다. 왼손잡이는 왼쪽으로 북돋우기를 하며 반복해 시작점으로 되돌아갑니다. 요령 좋은 양손잡이는 시작점으로 돌아가지 않고 왕복하여 효율적입니다.

 

두렁치기(논두렁치기) ... 물이 새거나 무너진 두렁은 삽괭이, 목욕통 괭이로 풀 등을 깎아내고, 경운하지 않은 두렁 아래의 벼그루와 진흙(단단할 경우에는 발의 측면에서 가닥을 붙이면 블록 모양을 취하기 쉬움)을 빗츄 괭이로 두렁의 측면과 윗면에 놓습니다. 또, 그 뒷면을 사용해 진흙을 평평하게 하며 벼그루는 진흙 속으로 밀어넣습니다. 그런 다음, 삽괭이 또는 목욕통 괭이의 뒷면을 사용해 진흙을 문질러 평평하게 만듭니다. 맑은 날 작업하면 진흙이 건조해지기 쉬워서 신속해 작업해야 합니다. 만약 마른다면 다리로 물을 끼얹어 수분을 보충해 부드럽게 만든 다음 평평하게 합니다. 

 

 

 

   10.  괭이의 유지

괭이의 수리 ... 괭이의 날 부분은 바탕쇠에 강철을 연결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사용 빈도가 높으면 날끝 양단의 마모는 흙과의 마찰로 서서히 둥글어지고 강철이 사라집니다. 날끝 강철 부분의 너비는 약 9cm 정도입니다. 또한 자갈이 섞인 농지를 갈면 날끝이 자갈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을 경우 대장간에서 오래된 날끝을 제거하고 새로운 강철의 날끝으로 교환합니다. 이를 날걸이(先掛け)라고 합니다(그림24, 25).

그림24 원래 날은 점선까지 있었지만 닳아 없어져 날걸이를 한다

 

 

 

괭이는 신품을 한번 구입하면 날걸이로 수리하며 대대로 이어가게 됩니다. 괭이를 사용한 뒤에는 녹 방지를 위하여 흙을 털어내고, 수분을 제거합니다. 보관은 땅에 세워두지 않고, 벽에 걸대를 만들어 그곳에 걸어놓는 것이 최선입니다. 장기로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철 부분에 기름을 칠하여 녹을 방지합니다. 괭이는 사용하면 사용하는 만큼 번쩍입니다. 녹슨 괭이는 흙일에 나쁘고, 점질 토양에서는 날 부분의 앞뒤, 자루와 날 부분의 연결부 안쪽에 흙이 붙어 작업 효율이 떨어집니다. 달라붙은 흙을 떼어내려면 대나무 주걱 등으로 떼어냅니다. 주걱은 괭이자루의 아랫부분에 철사를 감아서 꽂아놓습니다(그림26). 또 괭이의 사용자가 허리에 끈을 매고 그 끝에 주걱을 묶어 놓습니다.

그림26 흙 제거용 주걱

 

 

 

   11.  갈이용 도구인 발가래(踏鋤)

발가래는 뒤지개에서 발달한 도구입니다. 뒤지개 끝부분의 너비를 넓힌 도구입니다. 뒤지개는 씨뿌리기, 옮겨심기, 수확 등에 사용하는데, 발가래는 뒤지개의 기능 이외에 경운, 흙의 이동, 구멍 파기, 주걱 등으로도 사용합니다. 발가래는 자루와 날판 부분이 일체이고 그 자루의 각도는 180도-160도이며 손잡이가 자루에 접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고우슈江州 가래(오우미近江의 나라), 교우京 가래 등이라 불렸습니다(그림27). 발가래는 현재의 가늘고 긴 삽에 해당합니다. 자루와 목욕통이 일체화되어 그 끝에 날을 끼웠습니다. 이 형태의 발가래는 주로 습논의 경운, 배수용 도랑 파기 등에 사용됩니다. 또 나무 심을 때 옮겨심기, 캐기, 구멍 파기 등에도 쓰입니다. 사용법은 가래날의 어깨 부분을 발로 밟으면서 날끝을 흙에 찔러넣고, 자루 끝의 손잡이를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비틀며 앞면으로 쟁기를 넘어뜨립니다.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순차적으로 이동하고, 후퇴하면서 사용합니다. 날판 부분은 길이가 40-50cm이고 깊이갈이할 수 있습니다. 시가현滋賀県의 코토湖東에서는 고우슈 가래라 부르며 남자가 논을 경운하는 면적은 하루에 150평이었습니다. 이 지방에서는 경운을 깊이갈이, 거친갈이, 써리기의 3단계로 나누어 각각 발가래, 빗츄 괭이, 고무래(柄ぶり)로 행합니다. 그 뒤 말린풀(마른풀, 풋거름 등)을 갈아 넣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는 평년작으로 300평당 10가마의 수확을 올린다고 합니다.

그림27 발가래

 

 

나막신 빗츄 가래

충적지의 논 경운에 사용합니다. 날판 부분의 길이는 60cm, 날 너비는 24cm, 자루 길이는 60cm, 날판 부분은 44cm. 날판 부분을 흙에 꽂아넣습니다. 

오른발 또는 왼발로 옆의 밟는 부분인 길이 60cm의 끝부분(나막신을 고정)을 밟고, 자루를 앞으로 끌어내리면서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비틉니다. 즉, 지레의 효과입니다. 여성도 깊이갈이하기가 쉽습니다(그림28).

그림28 나막신 가래

 

 

 

 

발가래

발가래는 밭의 전면을 경운할 때 사용합니다. 자루 각도는 60-20도. 자루 길이는 110-230cm. 날판 부분의 길이는 80-110cm. 날 너비는 15-27cm. 날끝은 주물 또는 강철을 사용합니다. 자루와 날판 부분은 자루와 턱을 괴는 곳, 새끼줄(철사)로 고정합니다(그림29, 30).

그림29 여자아이의 발쟁기

 

그림30 개량 발가래

 

사용방법은 오른손잡이는 오른발로 날판 부분의 오른쪽 어깨를 오른발로 밟고, 오른손은 자루의 앞쪽을, 왼손은 자루의 뒷쪽에서 어깨 위치의 높이로 쥐고 흙에 밟아 넣습니다. 자루를 앞쪽으로 밀어올리고 왼쪽으로 뒤집습니다. 

왼손잡이는 발쟁기의 쥐는 방법, 뒤집는 방법도 오른손잡이와 거꾸로입니다. 작업 자세는 거의 똑바로 서서 하기 때문에 다른 괭이에 비해 피로가 덜합니다. 자루괭이, 큰괭이, 주조 괭이, 손괭이, 삽, 텐가天鍬 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가래(타니히키谷引き, 텐가, 두둑짓기畝立て, 겐고헤에源五兵衛<사츠마> 가래, 통자루가래ずんがら鋤, 인걸이二挺掛け)

자루의 길이 150-180cm, 가래판의 길이 40-90cm, 한 줄기의 가래판 너비 9-15cm, 두 줄기의 가래판 너비 35cm, 용도는 사양토, 사토 지대의 밭 경운, 두둑짓기, 사이갈이 등에 손잡이를 쥐고, 후퇴하면서 사용합니다(그림31).

그림31 <농구편리론>에서

 

<참고문헌>
飯沼二郎, 堀尾尚志, <ものと人間の文化史 「農具」 > 1976년 재단법인 法政大学出版局
菊池俊彦, <図譜江戸時代の技術上> 1988년 주식회사 恒和出版
熊本日日新聞社編集局編集, <農魂 熊本の農具> 1977년 熊本日日新聞
東京農業大学図書館標本室 소장, <古農器具類写真目録> 1978년 東京農業大学図書館
埼玉県立歴史資料館, <麦作りとその用具> 1985년
長野県教育委員会 편집, <信州の民俗> 1969년 第一法規

 

 

참고

 

-일본 괭이의 변화상

 

 

-일본의 괭이별 날의 너비와 자루의 각도

 

-일본의 발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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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의 낫과 초기 철기 시대의 낫을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하다. 
만듦새는 비슷할지 몰라도 소재가 확연히 달라진다.



위의 사진은 모두 한국고고학콘텐츠연구원의 것.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건 청동기는 지배층의 전유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의례나 장식을 위해서 쓰인 유물들이 대부분이다. 반면 철기는 서민에게까지 그 혜택이 돌아간다. 일상생활의, 특히 농사용 도구로도 철기가 쓰이게 되는 걸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청동기 시대에는 일상용품이 여전히 석기시대의 돌을 주요한 소재로 이용했는데, 철기 시대에 들어가면 돌은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철이 대신하게 되는 걸 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에 청동을 다루던 기술력 덕분에 철기 시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되려나?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논에서 각각 돌낫과 철낫으로 벼를 베는 실험을 해보면 재밌겠다. 얼마나 더 효율이 높아졌는지 말이다.



아무튼 검색을 통해 한국에도 한국고고학콘텐츠연구원 같은 곳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해외에는 선사시대의 유물을 실제로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과 단체가 있다는 걸 알고 한국에는 없을까 했는데 이제야 발견했다. 흥미로운 실험과 제작을 많이 하고 있다. http://blog.daum.net/plascamp/655?fbclid=IwAR1aLFSIUpE4yYTs7egF5Je9wU6JS_uSx4CJAedBRVC3u_0YegCQ8IAbKec


아는 사람은 알았겠지만 좀 더 홍보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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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대평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 시대의 농기구 돌괭이. 길이는 24.4cm라고 한다. 






다음은 경남 산청에서 출토된 돌낫. 반달 돌칼과는 다른 형식으로 출토량은 적지만 한반도 전역에서 고르게 나온다. 날은 양쪽에서 갈아서 다듬었는데 안쪽으로 약간 휘어져 들어가 있어 끌어당기며 베는 데 적합하다. 길이는 보통 20-25cm 정도, 두께는 1cm 정도.





청동기 시대의 돌낫을 재현한 모습을 보면 상당히 정교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공력이 많이 들어가는 도구를 만든 이유는, 당연히 이런 도구가 매우 필요했기 때문이겠다. 돌낫의 길이 약 25cm, 자루를 포함한 전체 길이 48cm.




이상 사진은 모두 한국고고학콘텐츠연구원의 것이다. http://blog.daum.net/plascamp/655?fbclid=IwAR1aLFSIUpE4yYTs7egF5Je9wU6JS_uSx4CJAedBRVC3u_0YegCQ8IAbK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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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호미가 미국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소식. 

이걸 보면서 우리는 무얼 생각하게 될까?

'우와, 호미가 역시 엄청나게 우수한 농기구였다. 과학적으로도 뛰어나다는 게 이로써 증명되는 것이다.'와 같은 반응이 나올 수도 있고, '미국 애들은 왜 이런 걸 좋아하고 그래, 우리보다 한참 못하구나.'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나는 또 다른 측면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거라 본다.

왜 호미와, 그를 만드는 대장장이와, 그들이 일하는 대장간은 사라지고 있는가?
왜 몇 십 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호미 한 자루가 4천원이고, 직원은 비상근의 고령자들 뿐인가?
젊은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기피하기 때문에 안 하려는 것일 뿐인가?
그렇다면 과연, 호미와 호미를 만드는 기술은 지속가능한가?

이렇게 질문하다 보면, "호미라는 도구는 당분간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호미를 만드는 기술과 그를 지닌 사람은 서서히 절멸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에서 기사에 나오는 수제 원예용품은 수십만 원에 이르는 것까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호미는 성능도 좋고 손으로 만들면서 가격은 1-2만원 밖에 안 한다. 이런데 미국의 원예 애호가들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한국의 호미를 만드는 일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미국에서 호미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며 어떻게 해야 이를 되살릴 수 있을지, 기자라면 여기에 주목하여 후속기사를 써 주었으면 한다.

나는 정말 호미를 만드는 장인과 그들이 일하는 곳이 사라지는 게 아쉽고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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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1장  벼농사와 벼농사 문화의 시작  中村愼一




들어가며


2008년 1월, 중국에서 벼농사 고고학 연구의 전문가 4명을 일본에 초청해 최신 연구성과에 대한 보고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점은 중국의 벼농사 기원론이 이미 "언제, 어디에서?"의 단계에서 빠져나가 "왜, 어떻게?"의 단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 야생 벼가 자생하지 않는 일본의 경우와 달리, 그것이 자생하는 중국에서는 벼 자료의 출토=벼의 인공 재배가 아니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의 연구자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야생인지 재배인지를 분간하는 판단기준을 딱 정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결과적으로 '재배종이기를 바란다'는 확신이 때로는 연구자의 눈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림1-1 중국의 초기 벼 자료 출토 유적

1. 하남성 무양舞陽 가호賈湖 유적

2. 호남성 풍현澧縣 팽두산彭頭山 유적, 팔십당八十 유적

3. 강서성 만년현萬年縣 조통환桶環 유적, 선인동仙人洞 유적  

4. 절강성 포강浦江 상산上山 유적

5. 절강성 승주嵊州 소황산小黃山 유적

6. 절강성 소산蕭山 과호교跨湖橋 유적

7. 절강성 여도 하모도河姆渡 유적

8. 절강성 여도 전라산田螺山 유적

9. 절강성 동향桐鄕 라가각羅家角 유적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확실한 판단기준을 어떻게든지 수립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는 야생, 여기서부터는 재배라고 딱 잘라 버리지 않고 양자를 일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학계에도 꽤나 퍼졌다고 느낀다. 


아시아 벼농사 기원의 문제는 완신세完新世의 환경변화에 야생 벼가 어떤 대응을 보였는지,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문화적 적응으로 그에 응했느냐는 관점에서 추진해야 할 터이다. 그를 위하여 고정도高精度의 옛 환경 복원과 동식물 유존체의 정성, 정량 분석 등 자연과학 여러 분야와 고고학의 협동이 필수이다. 본론에서는 그러한 접근으로부터 지금까지 어떤 것이 밝혀졌는지에 대하여, 일본과 중국 공동 연구의 성과 등도 나누면서 개관하겠다.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벼농사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학계에서 아시아 벼농사 기원 연구를 주도한 건 농학과 민족식물학이었다. 거기에서는 '운남-아삼 기원설'이 제창되어(渡部 1977), 한때는 정설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고고학의 증거는 그 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30년 사이에 축적된 고고학 자료는 그것이 동시대의 자료인 만큼 압도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가 중국의 장강 유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다만, 그 구체적인 연대를 어디에 둘지에 대한 의론이 분분하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재배종인지 어떤지 판단하는 지표가 연구자에 따라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 설에 대하여 하나하나 상세히 살필 여유는 없다. 관심이 있는 분에게는 졸저(中村 2002)를 보시라 권하고, 여기에서는 개요만 소개하고자 한다.


1만 년을 넘는 오래된 벼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던 유적은 장강 중류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강서성의 조통환, 선인동 유적(모두 잎의 세포화석), 호남성의 옥섬암玉蟾岩 유적(잎의 세포화석과 꽃가루) 등이다(그림1-1). 잎의 세포화석이란 벼잎의 기동세포라는 특수한 세포 안에 남아 있는 일종의 유리이다. 생리적, 화학적으로 강하고, 장기간 토양 속에서 보존된다. 토양 속에 벼잎의 세포화석이 존재하는 것은 그곳에 벼가 있었단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것이 곧 재배 벼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 여러 유적은 모두 동굴 유적이고, 그곳에서 벼가 살았을 리는 만무하나, 조통환 동굴처럼 주위의 평지에서 수십 미터나 위로 솟아 있다면, 마른풀이 바람에 날려 들어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완신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이전에 사람에 의해 무언인가 형성된 벼의 이용 -땔감이나 깔개로 이용하는 것도 포함- 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장강 하류로 눈을 돌리면, 이번 세기에 들어와서부터 발굴조사가 행해진 절강성의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소황산 유적(약 9천 년 전)에서는 토기의 바탕흙 안에 대량의 알곡이 섞여 있었다(그림1-2). 식물규산체가 발견된 것만으로 벼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벼의 열매=알곡을 이용했다는 건 아닌데, 이쪽은 틀림없는 알곡이다. 그것이 속의 쌀을 꺼낸 뒤의 왕겨인지 쌀이 들어 있던 채로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혼합재로 이용하기 위해서만 알곡을 모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먹을거리로 쌀을 이용하고 나머지 왕겨를 유효하게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일리가 있다.


토기 바탕흙의 혼합재로 왕겨를 이용하는 일은 조금 늦게 장강 중류에서도 시작된다. 호남성 풍현에 있는 팽두산 유적과 팔십당 유적 같은 팽두산 문화(8000-7000년 전)의 토기가 그것이다. 토기 종류의 구성을 보아도 그 이전의 것에 비하여 상당히 분화가 진행된 데다가, 명확하게 요리도구라고 할 수 있는 '솥'의 수량이 많아진다. 식물질 먹을거리 의존도가 증대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림1-2 상산 유적 출토 토기. 단면에 검게 보이는 것이 혼합재의 왕겨.



거의 동시대에 놓인 하남성의 가호 유적과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에서는 왕겨가 토기의 혼합재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유적에서는 탄화미, 붉게 탄 흙(紅燒土)에 알곡 압흔, 그리고 잎의 세포 화석 같은 여러 가지 형태로 벼 자료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현재 있는 고고자료로 미루어 보는 한, 지금으로부터 8000년쯤 전에 벼 이용이 강화된 동시에 지리적으로도 확대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약 7000년 전쯤 되면, 장강 하류에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가 전개된다. 토기의 종류 분화는 더욱 진행되고, 쌀 조리에 특화된 종류인 '시루(=찜기)'가 출현한다. 또한 농기구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뼈삽날(骨耜)도 다수 출토되고, 이외에도 벼농사 의례에 관련된 것이라 생각되는 기물도 적지 않다. 논의 검출 사례는 현재로서는 약 6000년 전의 마가빈 문화 후기까지로만 거슬러 올라가는데, 앞으로 오래된 사례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즉, 여러 가지 상황증거로 미루어 보는 한, 하모도/마가빈 문화기에는 그 이전부터의 채집에 더해 벼의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이 7000년 전이란 연대를 중국 벼농사 개시의 하한년대로 잡는다(나의 이러한 견해는 학계에서 '신중론'이라 친다. 벼농사의 시작을 1만 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학계의 추세라는 점을 굳이 덧붙여 놓는다). 그에 대하여 일찍이 아시아 벼농사의 원향이라 여겨지고 있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연대는 그보다도 몇 천 년 늦다. 구체적으로, 인도 아대륙에서는 5000년 전쯤, 동남아시아 대륙부에서는 4000년 전쯤이다.


중국으로부터 일원적으로 이들 지역에 벼농사가 확산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벼농사 보급의 파도가 운남과 광서 같은 화남의 주변부에 도달한 연대는 오래되었다고 어림잡아도 5000년 전이다. 특히 인도의 경우 3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주변부에 도달하는 연대와 거의 동시에 벼농사가 시작된다. 동심원적인 파급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 인도, 그리고 가능성으로는 동남아시아에서도 시기를 달리 하여 저마다 벼의 재배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어쨌든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전 벼농사가 시작된 곳은 중국이다. 그곳에서 중국의 대지를 무대로 전개된 인간과 벼의 관계의 역사를, 환경고고학과 식물고고학의 시점을 섞어 넣으면서 계속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빙하기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유럽과 북아메리카가 빙상에 덮힌 한랭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인다. 빙하기라 해도끊임없이 추위가 계속된 것은 아니고, 한랭한 시기와 온난한 시기가 반복하여 미세하게 변동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질시대에서 가장 새로운 빙기는 뷔름 빙기(아메리카에서는 위스콘신 빙기)라고 부르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7만 년 전부터 약 1만5천 년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바닷물에서 증발된 수분이 눈이 되어 육지에 내려 쌓이는데, 그것이 녹지 않고 곧바로 빙하로 발달한다. 증발한 물이 되돌아오지 않기에 해수면은 낮아진다. 뷔름 빙기의 가장 한랭기(1만6천 년 전쯤)에 해수면은 현재보다 120미터나 낮았다고 여겨진다.


이 최종 빙기가 종언을 고한 뒤 기온이 단숨에 상승했는데, 그 뒤 재차 '영거 드리아스기'라고 부르는 추위가 1300년 정도 이어진다. 그러나 그 추위도 1만1600년 전을 경계로 급격한 온난화로 뒤바뀐다. 지질시대라 말하는 완신세의 시작이다. 그 뒤 기온은 상승의 한 길을 걸어, 6000년 전쯤에 최고온기('힙시서멀기' 또는 '기후적기'라 부른다)를 맞이한다. 이 시기, 예를 들어 중국의 장강 하류에서는 기온이 현재보다 2-3도 높고, 강수량은 500-600mm 많았다고 복원되어 있다(王, 張 1981).


중국 장강 유역에서 벼의 채집이 시작되어, 이윽고 재배로 진전된 건 영거 드리아스기와 힙시서멀기 사이의 기후격변기의 일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의 옛 환경과 지리에 관한 정밀한 복원 연구는 매우 부족하기에 여기서부터는 상상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은데, 나는 그 과정을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완신세 전반의 급격한 온난화는 비가 자주 오도록 만들었다. 최종빙기에는 낙엽수의 숲과 건조한 초원이 탁월하던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가 광대한 늪과 호수와 습원으로 순식간에 그 모습이 변했다. 기온이 높은 비가 많이 오면, 야생 벼에게는 절호의 생식환경이다. 최종빙기에는 추위로부터 도망와 화남과 동남아시아에 후퇴하여 숨을 죽이고 있던 야생 벼가 나갈 차례가 도래했다.


재배 벼의 선조에 해당하는 Oryza rufipogon이란 야생 벼, 그중에서도 특히 자포니카형인 것은 여러해살이의 경향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폭넓은 변이가 존재하여 한해살이에 강하게 기운 그룹도 있다. 아마 그러한 그룹이 그 탁월한 이주능력을 무기로 재빨리 북상을 시작해 곧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에 대규모 군락을 형성했을 것이다. '쌀알만큼'이라 하면 작은 것의 예이다. 한 알, 두 알 먹는 걸로는 배를 채울 수도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모두 벼의 군락이 펼쳐져 있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로 그때 해수면의 급속한 상승으로 육지면적이 맹속력으로 감소했다. 동중국해에 면한 절강성과 강소성 부근에서는 6000년 정도 사이에 해안선이 500-700킬로미터나 내륙으로 후퇴했다. 즉, 해마다 100미터씩 육지가 수몰되어 사라졌다고 계산된다. 거주할 수 있는 토지의 면적이 좁아지면 야생 먹을거리 자원에 대한 인구압이 높아진다. 그때까지는 먹지 않던 야생 벼의 종자가 수렵채집민의 눈에 매력적인 먹을거리로 비춰지게 되었다.


단 하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았다. 장강 중하류의 대습원지대, 예를 들면 고대에 '운몽택雲夢澤'이라 부르던 양호 평야(호북성의 강한江漢 평야와 호남성의 동정호 평야)의 중심부 등에서는 끊임없이 수위가 크게 변동하기 때문에, 정주생활을 영위하기란 매우 곤란했다. 그래서 홍수의 피해를 받는 일이 없고, 또 습지와 산야의 양쪽에 접근할 수 있는 저지/구릉의 이행지대나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강서성 조통환과 선인동, 호남성 옥섬암, 절강성 상산과 소황산 등의 여러 유적은 바로 그러한 입지에 있다.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그건 아직 매우 한정적인 일이었다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8000년-7000년 전쯤이 되면 물 환경이 불안정한 저지로 진출하는 선구자가 나타난다.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과 하모도 유적(모두 해발고도는 약 4m)이 그 대표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일본의 연구진이 베이징 대학,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와 공동조사를 실시했던 절강성 전라산 유적에 대하여 소개하려 한다.


영소寧紹 평야의 동단 근처에 위치한 이 유적은 하모도 문화에 속하여, 중심적인 문화층의 연대는 약 7000-6500년 전으로 짐작된다(그림1-3). 유명한 하모도 유적에서 7킬로미터 정도만 떨어져 있다. 하모도 유적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저지대 유적이고, 인골과 동물뼈, 목재, 식물 종자 등의 유기질 유물의 보존상황은 꽤나 양호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자연과학적 분석을 실시했는데, 그 가운데 나라 교육대학의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가 행한 규조 분석의 결과는 대단히 흥미롭다(金原 최근 출간).



그림1-3 전라산 유적 원경(가운데 돔이 유적 박물관)




규조란 단세포의 조류로, 바닷물과 민물, 그리고 일부는 토양에서도 생식한다. 그 이름은 규산질의 단단한 껍질을 가진 데에서 유래하는데, 규조 본체가 죽어도 그 껍질만은 수백 년, 수천 년을 남아 있는다. 또 똑같이 바닷물이어도 난바다, 내만, 개펄 등에 생식하는 종류가 다르다. 껍질의 크기나 형태, 표면의 모양 등을 조사하여 종을 동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와 비율에 따라 규조의 껍질이 퇴적된 당시의 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분석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유적에 사람이 거주하기 직전의 시기, 그곳에는 개펄이 펼쳐져 있었다. 해수면 높이는 현재보다 1미터 정도 낮았다고 추정된다. 그 뒤 해수준은 마이너스 2.0미터 이하까지 낮아진 걸로 보이고, 이 땅은 육지화되어 인간의 거주가 시작된다. 당시 유적은 해수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강가 습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해수면이 다시 상승을 시작해 최고기에는 현재보다 약 2미터 높아졌다(힙시서멀기의 최고 해수준). 토지는 해면 아래로 가라앉고, 마을은 방기되었다. 즉 이 유적은 완신세의 해진기에 영위된 유적인데, 해진기에도 해수면이 변동하여 끊임없이 계속 상승하던 해수면이 일단 조금만 물러난 시기에 출현했던 육지에 입지하고 있었다.


유기라 하더라도 그곳은 민물 유역의 가장자리여서, 습지 같은 장소였을 것이다. 이 전라산 유적에서도 하모도 유적에서도 주거는 고상식(역주; 마루를 높게 쌓은 형태)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저습지에 거주하기 위한 하나의 적응 수단이었다. 고상식 주거의 주변에는 수많은 목제품이 남아 있다. 건조한 지면 위에 남아 있던 목제품은 거의 곤충, 균류, 박테리아 등에 의해 분해되어 버려서 몇 년만 지나면 흔적도 남지 않는 게 보통이다. 많은 목제품이 양호한 보존상태였던 건 마을 자체가 저습지 안에 있어 버려진 목제품이 늘 물에 잠긴 상태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덧붙여서, 고상식 주거의 근처에서 목제 노가 8점 출토된 것은 일상의 교통수단으로 통나무배가 애용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유감스럽게도 이 유적에서는 통나무배 자체가 아직 출토되지 않았는데, 이 유적보다도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 통나무배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하모도 문화기에 통나무배가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고상식 주거와 통나무배라는 두 가지 물품, 그것은 저습지에 정주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과호교 유적에서 검출된 집터는 흙벽을 세운 평지식 주거였는데(절강성 문물고고학연구 외 2004), 이 유적에서는 나무 하나로 만든 사다리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주거 부분은 2층이었거나 또는 적어도 먹을거리 창고는 고상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저습지로 진출하는 데에는 그것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벼도 도토리도 종이 한 장 차이


앞에 기술했듯이, 벼를 이용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저습/구릉의 이행지대와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절강성의 유적을 예로 들면, 상산 유적과 소황산 유적은 전라산과 하모도 등의 하모도 문화기의 유적과 그보다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 비하여 훨씬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표고도 50미터 안팎으로 상당히 높다. 과호교 문화와 하모도 문화의 시기, 사람들은 산간의 분지를 떠나 해안 근처의 평야부로 진출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지역에서 1만 년 전의 해안선은 현재의 그것보다 몇 백 킬로미터나 난바다 쪽에 있었기 때문에 해안 근처에 사람의 거주가 있었더라도 그 유적은 깊은 해저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이제 와서 보면 찾아낼 길이 없다. 그러한 불확실함이 남아 있는 건, 어느 시기부터 '물가'라는 경관이 중요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일본과 중국 공동 프로젝트에서는 출토 종실에 대해서도 상세히 분석했다(傳, 趙 최근 출간).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전라산 유적에서는 확실히 벼의 종자도 수없이 출토되지만, 마름의 알곡과 도토리(대부분은 개가시나무) 쪽이 수량에서는 벼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출토 종자의 수에서는 벼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종자의 크기를 고려하면 가시연 알곡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출토된 종자의 숫자 비율이 각 식물이 당시의 식생활에서 점했던 비중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니더라도, 벼가 출토되었다는 걸 곧바로 날마다 쌀만 먹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건 현대에 갖다 붙인 해석이어서 그러한 선험적 발상은 확실히 위험하다. 장강 유역에서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하모도 문화기에 이르기까지 벌써 몇 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벼는 아직 '보물의 하나'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벼농사의 기원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장기에걸친 완만한 과정이었다는 걸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결과에 눈을 돌려 보자. 꽃가루도 또 산과 알칼리에도 침범되기 어려운 단단한 외막으로 덮여 있어, 흙속에서 장기간 보존된다. 토양 표본 안에 포함된 꽃가루의 식물종 수량비를 통해 당시의 식생을 복원하는 것이 꽃가루 분석의 원리이다.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을 담당했던 사람이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이다. 유적이 거주하고 있던 당시의지층에서는 부들과와 벼과 식물의 꽃가루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벼과 식물은 꽃가루의 형태만으로는 종까지 특정하기 어려운데, 잎의 세포 화석 분석 결과 등을 감안하면 그 대부분은 갈대와 벼였다고 생각해도 좋다. 부들도 갈대도 벼도 습지의 식물이며, 규조 분석의 결과와도 부합한다. 이러한 물가 식물과 함께 많이 산출된 것이 북가시나무 아속을 주로 하는 조엽수의 꽃가루이다. 습지를 에둘러싼 높이 100미터 정도의 좀 높은 산들은 조엽수가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걸 말한다. 그곳에서는 가을이 되면 도토리가 가지가 휘도록 열매를 달았을 것이다(개가시나무도 북가시나무 아속인 식물이다).


갈대와 부들이 습지의 가장자리에 군락을 형성하는 데 반해, 조금 수심이 잎은 곳에는 마름과 가시연이 많이 살고 있었다. 유적에서는 잉어와 붕어 같은 민물고기, 거북과 자라 같은 파충류, 오리와 기러기 같은 조류의 뼈도 무수히 출토되었는데,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에 대해서도 늪과 못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수렵의 대상이었던 포유류로는 물소와 각종 사슴 종류가 주체를 점하였는데, 이들도 물가에 모이는 습성을지닌다. 이미 벼의 재배도 시작되고 돼지도 사육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물가의 환경에서 수렵, 어로, 채집으로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가 식생활의 대부분을 점하며 도토리 같은 산야의 산물이 그것을 보충하는 생업경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종다양한 자원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생업경제의 상태를 고고학, 인류학의 분야에서는 '다각적 경제(broad-spectrum economy)'라고 부른다.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최후의 빙하기를 극복한 뒤에 비로소 이 다각적 경제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일반 독자는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식물의 종자와 뿌리를 통해 탄수화물을 얻고 물고기와 물새의 고기에서 단백질을 얻는 식생활은 기껏해야 1만 년 정도의 역사밖에안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신기원이었다.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이 시작된 건 특히 중요하다. 그 결과 일어난 물질문화의 커다란 변혁이 토기의 발명이며, 사회적인 크나큰 변혁이 정주생활의 개시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와 아울러 가장 일찍 농경이 시작되었던 서아시아에서 토기는 출현 당초 주로 저장용기로 사용된 것 같다.  그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는 취사의 도구로 시작되었다. 중국 남반부에서는 벼, 북반부에서는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이 우선 재배되었는데, 그 이전 단계인 채집단계에서도 녹말을 알파화하여 소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열이 필요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토기에 넣고 펄펄 끓이는 것이다. 도토리의 경우 생식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모밀잣밤나무와 개가시나무) 가열하면 맛이 좋아지고 해충이 구제되고 오래 보존할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며, 탄닌을 많이 포함해서 떫어 먹을 수 없는 종류의 도토리에서 떫은맛 제거를 촉진하는 효과도 있었다.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토기 제작의 개시는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과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용되는 식물의 종류가 달랐을 뿐이다. 일본에서 도토리 종류에 더해 밤, 칠엽수 같은 견과류와 좀처럼 증명하긴 어렵지만 각종 근경류가 대상이 되었던 듯하다. 한편 중국에서도 일본과 거의 같은 종류의 견과류와근경류가 존재했는데, 거기에 벼와 조, 기장 등의 벼과 초본과 대두(중국 동북지방부터 화중에 걸친 지역이 원산지일 가능성이 높음)가 더해져 있었다. 그 뒤의 두 가지가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식물질 먹을거리에 대한 의존이 강해진 결과 정주화가 촉진되고, 인구는 증가한다. 그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전에상세히 서술했기 때문에(中村 2002), 여기에서는 반복하지 않는다. 특히 정주 마을의 형성이란 점에서는 중국보다 일본 쪽이 선행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인구는 변동을 반복하면서도 서서히 우상향으로 계속 증가해 머지않아 국가의 형성과 도시의 발생 -문명의 탄생이라 바꾸어 말해도 좋은- 으로 우여곡절 끝에이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에서는 기원전 4천년대의 후반부터 3천년대의 후반까지 1천 년 사이에 각지에서 그것이 달성되었다. 일본의 조몬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친 시기에 해당한다. 확실히 일본에서도 조몬시대 중기에는 수많은 마을이 경영되어 이 시기의 인구도 상당히 많아졌다고 추정된다(今村 1997). 환경조건에 혜택을 입었던 '풍요로운 수렵채집민(affluent forager)'의 한 도달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중기에 정점에 이르른 조몬인의 번영도 오래가지 않았다. 후기에 들어서면 적어도 동일본에서는 급격한 인구 감소가 있었던 것이 출토 주거터 수의 분석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반드시 명확한 건 아니지만, 힙시서멀기 이후 기후의 한랭화, 건조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자연의 은혜에 전면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수렵채집민의 한계가 있었다. 


일본에서도 완신세 당초부터 식물질원의 이용이 시작된 것은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벼, 조, 기장, 대두 같은 한해살이 초본의 야생종이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 열도에서는 채집의 대상이 견과류와 근경류였다. 견과를 다는 목본류는 종자번식이라 하여 생장이 느리고, 근경을 이용할 수 있는 초본류는 영양번식이었다. 인간이 활용하기 좋은 형질을 선택하고 그것을 재배종으로 고정시켜 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결과적으로 오래 채집 단계에 멈출 수 없었다. 도토리를 먹든지 벼를 먹든지 출발점에서 차이는 종이 한 장임에도 불구하고, 재배화가 가능한 야생의 한해살이 초본의 유무가 몇 천 년의 시간을 거쳐 일본과 중국 두 곳의 사회 진화에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벼의 재배화에 성공했던 중국에서는 관개논의 창출에 의하여 기후의 악화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인구가 급감한 조몬시대 후기의 일본 열도에서는 주술에 관한 각종 기물이 성행한다. 거기에는 자연을 두려워하고 주술에 침잠하여 자연의 은혜에 매달리려 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일본 열도의 주민이 자연의 위력이 지닌 주문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두려워하게 되는 데에는 야요이 시대 초기에 열도의 밖에서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이주를 기다려야 했다. 



① 야생 벼의 채집 -토기, 석제 갈판, 목제 절구

② 야생 벼 종자의 인위적 파종


③ 재배 벼 형질(비탈립성)의 출현


④ 재배 벼 형질의 확립(=야생 벼와 유전적 격리) -논


⑤ '벼농사 문화'의 성립 -벼농사 제사 관련 유물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

그림1-4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로




벼농사 사회 성립까지 지나는 길


채집에서 재배로


벼가 출토되면, 당시 사람들이 벼(쌀)를 주식으로 삼았을 것 같다고 하는 생각의 위험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벼가 재배된다고 하면 그 문화는 '벼농사 문화'이고, 그 사회는 '벼농사 사회'라고 하는 것도 대단히 난폭하고 안이한 의론이다.


그림1-4는 벼 이용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강화되어 나아가는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인간에 의하여 식용이된 야생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특히 벼과 식물처럼 종자가 작고, 또 먹기 위해 전처리가 귀찮은(왕겨를 벗기고, 게다가 가열해야 함) 경우는 대량으로 채집하기가 쉬워야 한다. 광대한 초원에서 여기 한 포기, 저기 또 한 포기 식으로 자라서는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완신세 전반의 온난화 시기에 장강 유역에서 대규모 야생 벼의 군락이 출현했음이 틀림없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야생 벼를 채집하는 데에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는 않다. 야생 벼는 탈립성을 지니고 있다. 탈립성이란 익은 알곡이 자연스럽게 훌훌 이삭에서 떨어지는 성질이다. 알곡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벼 포기를 밀어 헤치면서 익은 알곡을 손바닥으로 훑어서 모으는 게 좋다. 그럼 효율이 나쁘다고 하면, 큰 소쿠리라든지 천을 마련하여 이삭을 쳐서 그 안에 알곡을 모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돌칼이나 돌낫 같은 도구는 필요 없다고 하기보다 쓸데가 없기 때문에 유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즉, 야생 벼의 채집 단계는 존재했음이 틀림없지만, 그것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꽤나 성가시다. 다만, 상황증거가 되는 것이 탈부脫稃(왕겨를 제거하는 일)를 위한 목제 절구나석제 갈판 같은 도구류와 쌀을 가열하는 데 쓰인 토기의 존재이다. 토기와 갈판은 완신세의 개시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장강 유역에도 출현한다. 지금으로서는 쌀을 끓이고, 알곡을 찧는 도구 등의 유물 자체를 직접 증거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모순은 없다. 


대저 야생 벼가 탈립성을 가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익은 알곡이 언제나 이삭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동물에게 먹혀 버려 자손을 남길 수 없다. 운 좋게 동물에게 먹히지 않더라도, 알곡이 그대로 달린 이삭이 지면에 이르면 한곳에서 많은 종자의 싹이 나게 되어 이후 생장에 불리해진다. 그러므로 익은 알곡은 저절로 지면에 떨어지게 할 수 있다.


야생 벼가 탈립되는 장치는 벼알가지와 붙어 있는 알곡의 아랫부분에 떨켜라는 조직이 생김으로써 작동한다. 알곡이 익으면 그곳에서 맥없이 떨어진다. 그때 알곡의 아랫부분에는 표면의 매끄럽고 얕은 우묵한 곳이 남는다. 그에 반하여 탈립성을 잃은 재배 벼는 이삭에서 알곡을 억지로 잡아당겨 뗄 경우에 알곡의 아랫부분에 작은 혹 모양의 돌기가 남는다. 


이런 알곡 아랫부분 형상의 차이에서 야생 벼와 재배 벼를 구별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이 책의 감수자인 사토 요이치佐藤洋一 씨였다(佐藤 1996). 사토 씨는 하모도 유적에서 출토된 벼 알곡을 전자현미경으로 공들여 관찰하고, 그곳에 야생형과 재배형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걸 밝혔다. 이 판별법은 그뒤 중국인과 미국인 연구자에게 이어져, 절강성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을 대상으로 활발한 연구가 행해지게 된다.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의 정위엔페이鄭雲飛 씨 등은 전라산 유적과 그와 거의 동시기의 동향라가각 유적(마가빈 문화)에서는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며, 이 두 유적보다 1000년쯤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는 약6대4의 비율이라고 보고한다(鄭, 孫, 陳 2007). 정씨 등에 의하면,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은 현재의 자포니카형 재배 벼의 그에 합치한다고 한다. 그것이 확실하다면 자포니카형과 인디카형의 재배 벼는 각각 독립하여 재배화되었을 것이고, 중국 장강 유역에서 가장 일찍 재배화된 것은 자포니카형이라는 상정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또 정위엔페이 씨는 다른 논문에서 상산 유적의 출토품을 다루어, 그곳에서도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을 지닌 알곡이 존재한다고 기술하고 있다(鄭, 孫 2007). 매우 흥미로운 자료인데, 표본의 수가 지극히 적은 것 같아 결론을 내기에는 조금 더 비슷한 사례의 증가를 기다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미국인으로 현재는 영국 런던대학에서 일하는 D. 풀러(중국 이름 博稻鎌) 씨 등도 전라산 유적 출토 알곡의 분석을 직접 다루고 있다. 그들은 1185알의 알곡을 조사해, 그 가운데 39%가 야생형, 24%가 재배형, 그리고 나머지대부분(25%)은 야생형인지 재배형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미성숙 알곡이라고 한다.


미성숙 알곡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풀러 씨 등의 생각은 이러하다. 야생 벼의 등숙 시기에는 차이가 있다. 모든 알곡이 완전히 익는 것을 기다려 채집하려고 하면 이미 그때에는 대부분의 알곡이 떨어지게 된다. 효율 좋게 대량으로 모으려면 일부는 거의 익었지만, 미성숙인 것도 꽤 남아 있는 단계에 채집하는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채집한 알곡 안에는 미성숙인 것이 일정량 섞이게 된다. 


미성숙인 알곡까지 함께 훑어 버린 듯한 야생 벼의 수확법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진화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벼가 아닌 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힐먼 등의 외알밀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등숙 시기 직전의 외알밀을 계속 베어 그 가운데 일부를 파종하면 몇 십 년이란 단기간에 탈립성을 상실한다는 의미를 지닌 '재배종'이 출현하는 일이 나타난다(Hilman and Davies 1992). 이것이 벼에도 해당된다고 하면, 야생 벼를 채집하는 선사인의 평범한 욕심쟁이가 우연히 야생 벼에서 비탈립성이란 형질의 진화를 재촉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게다가 그것은 매우 단기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야생 벼 채집의 개시와 거의 동시에 '재배종'이 출현했다고 적어도 겉보기는 그렇게 보인다는 걸 암시한다. 즉, 그럼1-4의 ①-③의 여러 단계는 존재했을 것이고, 이 순서로 연달아 일어났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재빠른 연쇄반응으로 단기간에 연속하여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을 고고자료로 완전하게 확보하는 것이 어렵다.


탈립성을 잃은 재배형이 출현해도 그주변에 아직 많은 야생종이 자생하고 있다면, 선사인들은 변함없이 그 두 가지를 계속 수확했을 것이다. 그 결과 유적에서도 두 유형이 남아 있다. 전라산 유적과 하모도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알곡이 이삭에 달린 채로 남아 있는 포기 쪽이 더 많은 종자를 회수할 가능성이높기 때문에, 재배형의 비율은 서서히 증가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재배형이 늘어나더라도 야생종과 혼재하는 상태에 있는 한 수확된 알곡에 야생종의 그것이 일정량 포함되는 일은피할 수 없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고 기본적으로 제꽃가루받이를 하지만, 약간은 자연교잡이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야생 벼의 탈립성 형질은 재배 벼의 비탈립성 형질에 대하여 우성이기 때문에, 둘이 교잡할 경우 다음세대의 포기는 탈립성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배종과 야생종이 같은 장소에서 자라고 있으면, 재배종의 종자만 수확하는 일이 곤란하고 그렇게 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현재 장강 유역의 벼농사 지대를 다녀도 실제로 보이는 건 논에 심는 재배종뿐이다. 논 안은 물론, 농수로의 주변과 늪과 호수 주위에도 야생 벼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모도 문화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7000년 사이의 어딘가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출현한 것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6000년 전쯤을 정점으로하는 온난기, 힙시서멀기 이후 기온이 서서히 냉량, 건조해지면서 야생 벼의 군락은 완신세 초기에 북상했던 것과 반대로 서서히 남하하여, 이윽고 장강 유역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원래 야생 벼가 번성했던 토지가 논과 양어장으로 조성되어 간신히 남아 있던 군락도 '잡초'로 여겨져 구제되어 버렸다는 인위적 영향이다. 아마 이 두 가지가 야생 벼의 소멸에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적에 남아 있던 알곡의 형상을 조사하여 이 문제에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있는 고고자료는 아직 그것을 허락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더구나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의 경우에는 또 다른 선입관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 선입관이란 마을 주변의 자연습지에는 아직 야생 벼가 생육하고 있더라도 이미 그것을 채집하는 일은 거의 없고, 오직 인공 논에서 재배된 재배종만 수확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유적에서는 재배종의 알곡밖에 출토되지 않는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다. 꽃가루의 수명은 몇 분 정도로 짧아 멀리까지 날아가서 다른 꽃을 수분시킬 수는 없다. 이삭 패는 시기가 같은 품종이어도 20미터 떨어져 있으면 교잡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재배형의 포기를 야생종이 자생하는 자연습지가 아닌 그것과는 별도로 인공적으로 조성한 농지 -이곳을 '논'이라 불러도 좋다- 에 재배하게 되면, 탈립성이란 형질도 유전적으로 고정된다. 또한 인공 농지가 있으면 물높이도 조절할 수 있고, 벼와 경합하는 잡초도 제거하기 쉽다. 결과적으로 자연습지에 야생 벼와 섞어 심는 경우와 비교하여, 더욱 안정적으로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것을 사람의 쪽에서 바라보면, 벼를 재배하기 위하여 투하하는 노동력의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지난해 수확한 알곡을 봄에 습지에 파종한 다음 가을의 수확을 기다릴 뿐과 같은 정도라면 일다운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익은 알곡을 수확하는 것도, 마름과 가시연의 열매를 모으거나 산에서 도토리를 줍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산야의 은혜를 받아들인다는 감상이지 자신들이 만들어 냈다는 의식은 희박하지 않았을까?


그에 반하여 인공 농지=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걸 생각하면, 먼저 그 조성에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점이 무엇보다도 큰 차이이다. 논이 완성되면 그것으로 끝날 리가 없다. 수로와 논두렁을 수복하거나, 물높이를 조절하거나, 잡초를 뽑거나 하는 일상적인 작업의 연속이다. 자연히 쌀은 다른 채집 식물 먹을거리와는 별개로 특별해지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이란 의식이 싹텄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벼농사 문화란 '벼농사를 영위하는 민족 사이에서 대부분 공통으로 인정되는 벼농사와 복합된 문화 요소, 즉 생산기술과 사회양식, 신앙과 의례, 생활양식 등에 대하여 보편성을 가진 하나의 문화 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渡部 1987). '벼농사 문화'란 단어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논에서 인공 재배를 개시한 이후가 되어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베어 거둘 뿐, 그것을 벼농사의 '생산기술'이라 할 수 있을까?


'신앙과 의례'에 대해서는 한술 더 뜬다. 벼농사 농경민은 1년을 통틀어 벼농사에 관한 제사를 집행한다. 정원의 예축의례를 시작으로 파종과 모내기, 벌레 쫓기, 베어 거두기와 절일마다 그를 행한다. 이와 같이 하나로 이어진 의례의 배경에는 벼의 풍양을 관장하는 신들의 체계가 있고, 그 유래를 이야기하는 신화가 있다. 그래야 벼농사에 관한 '신앙과 의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논농사가 시작되어 벼를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한 생업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단계에서 처음으로 '벼농사 문화'가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단 그 단계가 되어도 사람들은 생명의 양식을 벼(쌀)에만 의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산야의 식물을 모으고, 동물을 잡고, 물고기를 붙잡는 일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 돼지 등의 가축 사육도 있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에 따라 다른 생업이 점하는 비중은 서서히 줄어들고,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더욱더 급해져 갔다.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급해졌다는 건 무슨 말일까? 한 가지는 농지의 확대이다. 마을 주변은 이윽고 벼이삭이 파도를 치는 논으로 가득해졌다. 그 이상으로 경작 적지를 얻을 수 없게 되거나, 구할 수 있어도 거기까지 거리가너무 멀거나 하면 마을사람 가운데 일부가 신천지를 구하러 마을을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벼농사의 '전파'라든지 '확산'이라 할 수 있는 현상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새로 마을을 만드는 일을 반복한 결과이다. 


또 다른 한 방법은 집약화이다. 인구가 2배로 늘었다고 해서 반드시 논 면적도 2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같은 면적에서 지금까지보다 2배의 수확량을 올릴 수 있다면 따로 농지를 확대하지 않아도 된다. 단숨에 2배라고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벼는 그러한 인간의 방자함에 답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돌연변이에 의하여 생긴 다수성의 계통을 찾아내, 그것을 보호하면 수확량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똑같은 일을 다른 채집식물과 수렵동물에게도 행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주변의 나무 가운데 2배의 열매를 다는 도토리 나무가 때마침 있었다고 하자. 그것을 늘리기 위하여 다른 나무를 뽑아 버리고 대신에 그 도토리를 심는 일 등을 누가 시도할까?아무튼 산이 그 도토리의 숲으로 덮이는 데에는 10년이나 20년 전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수렵과 어로의 대상이 되는 야생동물의 경우는 더욱 곤란하다. 사람들이 지금의 2배로 사슴을 얻고 싶다고 염원해도 도대체 어떤 방책이 있을까? 다른 일을 팽개치고 날마다 사슴 사냥에 몰두하면 단기적으로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항상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슴의 수는 해마다 감소 일로를 걸을 것이다. 


집약화가 가능하다는 이 특성이야말로 벼를 비롯한 한해살이 초본 작물의 최대 이점인 동시에, 두려운 올가미이기도 하다. 인구의 증가와 작물에 대한 의존도 증대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이고,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개미지옥'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머지않아 그것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그와 같은 사회의 상태를 '벼농사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그림1-4로 되돌아가 정리하도록 하자. ③의 단게에서 재배 벼의 형질이 출현하는데, 이것은 논에서 벼를 재배했다는 것을 의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날마다 쌀만 먹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획기적이라 부르는 건 다음 ④의 단계이다. 출토 알곡의 형상이 재배형으로 거의 통일된 건 벼의 재배가 야생 벼의 생식지에서 공간적으로 격리된 결과 생식적인 격리도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벼 전용 농지, 이른바 논은 기술문화사의 큰 혁신이며, 문화 전반의 양상도 차례로 벼농사 중심으로 편성되어 나아간다. 그것을 일러 ⑤'벼농사 문화'의 성립이라 한다. 벼농사라는 생업은 자기증식적으로 비대화되어, 어느 사이에 벼농사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사회가 이루어진다.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이다. 이 ④의 단계부터 ⑥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도 자연계의 여러 변동과 이변에 따른 대폭적인 인구 감소가 아닌 한 비교적 빠르게 진전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①부터 ③까지와 ④부터 ⑥까지가 각각 하나의 결말이 되어 그 둘의 사이에는 몇 천 년이란 상당히 오랜 시간적 동떨어짐이 존재하는 것이다.



벼농사 문명으로 가는 길


여기에서는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의 성립에 이르는 과정을 실제 고고자료에 대조하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절강성에서 최근 들어 점점 구석기시대 유적의 탐색이 시작된 참이어서 지금으로서는 정보가 매우 부족하다.태호 서남의 구릉과 저산지대에 몇 개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 시대적 자리매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토기와 간석기를 가진다는 의미를 지닌 신석기 문화는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포강浦江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승주嵊州 소황산 유적(약 9000년 전)이 있다. 모두 토기 바탕흙에 대량의 벼 알곡이 섞여 있으며 유적 토양에서도 벼잎의 세포 화석이 검출되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먹을거리로 벼를이용하기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재배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가 나뉘고 있다. 대량으로 출토된 석제 갈판과 갈돌이 벼의 알곡을 가는 데 쓰였는지, 또는 견과 등을 갈아 으깨기 위하여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토기의 다수를 점하는 건 입구가 크고 밖으로 벌어지는 세면기 같은 모양으로, 표면에는 붉은색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상식적으로는 끓이는 용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유적에서 주먹 크기의냇돌이 많이 출토되었기에, 그것을 달구어 '세면기'에 넣어 끓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 일본의 농촌 요리 등에도 있는 이른바 스톤 보일링이란 방법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국을 끓이는 데에는 적합하더라도 밥을 짓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산과 소황산 두 유적이 표고 50미터 정도의 산간 분지에 위치하는 것에 대하여, 약 8000년 전부터 거주가 시작된 소산蕭山 과호교 유적의 현재 지표면의 높이는 불과 표고 4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당연히 당시 거주면의 높이는 가장 낮아진다. 이 유적은 가을의 사리일 때 바닷물이 역류하는 것으로 유명한 전당강의 바로 옆에 있다. 8000년 전이라면 해수면의 높이가 현재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유적은 7000년 전쯤까지는 바다 속에 잠겨 버렸다. 그것을 굳이 저지대에 마을을 이룬 건 '물가'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는 생업양식이 이 무렵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출토된 동물뼈를 보아도 포유류로는 사슴류와 물소(야생이라 생각됨), 파충류로는 거북류와 양자강 악어, 조류로는 기러기와 오리류 및 두루미가 주체를 점하고 있어, 그 상정을 뒷받침한다. 출토된 식물의 씨앗을 보아도, 남방멧대추, 복숭아, 각종 견과류 같은 산의 산물과 함께 마름과 가시연이 출토된다.


벼도 마름이나 가시연과 마찬가지로 '물가'의 채집 식물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정위엔페이 씨 등은 알곡의 형상에 대하여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약 6대4라고 보고한다. 재배형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탈립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고, 채집을 계속하면서 자연히 출현할 수 있는 형질이다. 기본적으로는 벼도 모두 채집된 것이라 생각해도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상산과 소황산을 비교하면, 토기의 기종 분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명확하게 끓이는 용도의 그릇이라 할 수 있는 기종인 '솥'도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식생활에서 식물질 먹을거리 중에서도 쌀의 비중이 꽤 상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인공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가능성도버리지 못한다.


그 뒤를 잇는 것이 7000-5500년 전이라 연대를 부여하는 하모도 문화이다. 하모도와 전라산 같은 유적이 늘 물에 잠길 듯한 저습지에서 경영되었다는 건 앞에서 서술했다. 기본적으로 과호교 문화와 마찬가지로 '물가'의 생업 전략을 취했다. 벼잎의 세포 화석 밀도가 높은 토층이 몇 층이나 발견된다는 것을 중시한다면, 이 시기에 이미야생 벼의 생식지로부터 공간적으로 격리된 '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토기에 대해 말하면 '솥'이 주체를 점할 뿐만 아니라 조금이지만 쌀을 찌기 위한 전용 그릇이라 할 수 있는 시루가 출현하기 때문에, 먹을거리로서 쌀의 중요성이 다른 채집 식물에 비해 한 등급 위의 존재라고 간주할 수 있게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하모도 문화라고 하면 곧바로 상기되는 것이 물소와 사슴의 견갑골로 만든 '뼈보습'이다. 이것은 기둥 구멍과 저장 구덩이의 굴삭, 물가의 둑 등의 토목작업에도 쓰인 도구로서 일괄적으로 농기구라고 단정지을수는 없는데, 흙을 쌓아 올려 간단한 두둑을 만드는 농작업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하모도 문화가 그것 이전의 여러 문화와 크게 다른 점은 정신생활에 관한 기물이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토제와 골제 상 또는 토기 표면의 선각화로 직접 지각할 수 있는 형태의 동식물과 인물의 묘사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그림1-5). 토제 동물상에는 돼지(멧돼지), 양(?), 물소, 코끼리, 새, 물고기 등이 있다. 토기 표면에 선각된 사례와 함께 그들 동물이 가축 또는 수렵 대상으로 많이 구할 수 있기를 기구하는 유감주술에 관한 주물이라 생각한다.  


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주발의 외면에 묘사된 '벼이삭 문양'(그림1-5의 7)은 벼의 풍년 기원에 관련된다. 이른바 '오엽 문양'(그림1-5의 8)에 대해서는 제사용 길상물인 '만년청 분재' 또는 어떠한 약초라는 견해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이삭 패는 시기의 벼이삭이라 하는 설이 있다. '물고기와 물풀 문양'(그림1-5의 9)에 대해서는 짝을 이루는 동물이 새인지 물고기인지 견해가 나뉘는데, 적어도 오른쪽 그림에 대해서는 물고기와 벼를 같은 화면에 묘사해 둘 모두 풍부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란 설이 옮게 여겨진다. 식물 중에는 특히 벼가 중시되었다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림1-5. 하모도/ 마가빈 문화의 제사 관련 유물(3, 6 라가각 유적, 기타는 하모도 유적)




하모도 문화가 항주만 남쪽 기슭의 영소寧紹 평야에 전개된 데 비해, 항주만 북쪽 기슭의 항가호杭嘉湖 평야는 마가빈 문화의 분포 구역이다. 연대로 보면 7000-5800년 전으로 둘 수 있다. 이 지역은 영소 평야와는 달리, 산과 구릉이 거의 없는 낮은 평지이다. 한번 홍수라도 일어나면 도망갈 곳이 없을 것이다. 출토 유물을 통해 보는 한, 생업경제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하모도 문화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지만, '물가' 그리고 벼로 기울어짐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이 확실한 '논'이 이 마가빈 문화의 후기(6000년 전쯤)의 유적에서 발견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초혜산草鞋山과 곤산시昆山市의 작돈綽墩 유적이다. 상세한 건 이 책에 실린 우다 노츠宇田津 논문을 보시길 바란다. 물론 이 연대는 늦어도 그 시기까지에 '논'이 출현했다는 걸 보여준다. 그것이 1000년 또는 2000년 더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은 남아 있다.


마가빈 문화 전기의 유적인 동향 라가각 유적에서는 토제 남성 전신상이 출토되었다(그림1-5의 6). 그 과장된 남성기의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농지를 여성, 경운도구를 남성이라 보는 성적 상징주의는 세계 각지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Eliade 1968).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는 특이한 목제품으로 '남경형'이란 기물이 있다. 문자 그대로 남근을 본뜬 것인데, 이것도 똑같은 상징주의에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中村 1999). 그러한 점에서 마가빈 문화 전기까지로 논의 창시가 거슬러 올라가 수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에 이어지는 것이 송택崧澤 문화로 5800-5300년 전의 연대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동물 유존체에수렵대상 짐승이 점하는 비율이 뚜렷하게 저하되고, 가축인 돼지의 비율이 증가한다. 저습지 유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식물질 유물이 남기가 나쁜 데에도 기인할 것인데, 벼 이외의 채집 식물의 검출 사례는 매우 적다. 이런 점은 생업형태가 다각적 경제에서 벼농사 전업 경제로 이행해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에 보조를 맞추듯 쌀 조리 전용 도구인 시루와 세발솥이 끓이는 용도의 토기를 주로 점하게 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징호澄湖 유적에서는 논터가 검출된다.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가늘고 긴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데, 논 한 배미당 면적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 


정신생활면으로 눈을 돌리면,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에서 성행하던 토제상과 토기 회화가 거의 모습을 감추는 것과 함께, 형상 토기(그 일부에 동물과 인물을 본뜬 토기)와 채색 토기, 그리고 토기 표면의 추상부호가 눈에띈다. 채색과 조소, 선각이 장신된 것은 이질泥質 회도灰陶(불순물을 제거한 점토를 써서 환원염소성한 회색 토기)또는 흑피도(이질 회도의 표면에 탄소를 부착한 흑색 토기)의 두, 호, 관 같은 저장, 공헌供献 토기류이다. 아마 벼의 풍작을 신에게 감사하는 의식에 관련된 기물이라 생각한다.


이들 특이한 토기류는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데, 그러한 무덤에는 귀걸이와 목걸이 같은 초현기初現期의 연옥 제품이 동반되는 일이 많고, 또 그와 같은 무덤이 공동묘지 안의 한 구획에 집중되어 설치된 경우가 많다. 즉, 이 시기에는 제사의 복잡화와 제사집행자가 되는 특정집단의 분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동묘지는 하모도 문화, 마가빈 문화의 시기부터 존재하는데, 그 단계에서는 무덤의 배열, 부장품의 종류, 많고 적음, 정교함과 조잡함 등으로 집단의 차이를 유추하기가 곤란했다는 점이 큰 차이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송택 문화의 물질문화를 계승하여 5300년 전쯤에 시작되고, 그로부터 800년 정도 이어진 것이 양저良渚 문화이다. 무덤에 대량의 옥기(=연옥 제품)를 부장한 집단은 자신들만의 묘지를 영위하게 된다. 그것은 종종 대규모 봉분(흙을 쌓아 올린 흙더미)과 대상묘(산비탈을 깎아낸 테라스)의 형태를 취한다. 제사를 집행하는 집단이 일반 서민과 동떨어진 지위를 손에 넣고 묘지의 조성에 대량 노동력을 자의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보여준다. 


옥기에는 매우 정세한 문양이 새겨진다(그림1-6). 아직 금속기가 없던 시대이다. 석영 같은 단단한 돌조각이라든지 상어의 이빨을 사용하여 조각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한 점의 옥기를 제작하는 데에만 적어도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무덤에 그것을 수십 점이나 넣기도 했기에, 전문 공인이 언제나 그 제작에 종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고도의 전업생산이 행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옥기만이 아니다. 복잡, 정치한 음각선 문양을 장식한 토기류와 각종 석기류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 공인에 의한 수공업 생산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 벼농사 농업의 집약화였다. 돌쟁기는 송택 문화기 후반부터 출현하는데, 양저 문화기에는 대형화되어 그중에는 길이 60cm에 이르는 것도 있다. 가축(아마 물소)이 견인하지 않았을까 한다. 쟁기를 끌고 다니려면 작은 면적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 논에서는 사정이 나쁘다. 현대의 논과 그만큼 차이가 없는 논이 이 시기쯤에는 출현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고고학적으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수확 도구인 돌낫이 널리 분포하게 된 점의 의미도 크다. 논 안에는 이미 탈립성의 그루는 존재하지 않고 품종개량의 진전에 의하여 벼의 익음때도 균일화되어 벼 그루를 묶음으로 잡아서 밑동을 벨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돌쟁기와 돌낫 등의 석기에 대해서도 특정 생산지에서 전업생산이 이루어졌으리라 상정할 수 있는데, 석제 농기구의 생산과 분배를 정치적 지배자가 좌지우지하고, 공납품으로 받는 벼의 증산을 도모했을 가능성까지 있다. 그 보상으로 지방의 지배층에게 하사한 것이 각종 옥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Nakamura 2005).


이 시기의 제사, 종교를 특징짓는 핵심어가 '신인수면문神人獸面紋(신의 체구와 괴수의 안면을 본뜬 문양)'이다(그림1-6의 2). 주로 옥기에 도상으로 등장하는데, 상아기와 토기에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 그것은 흉악한 짐승 신을 통제하고 자유롭게 천공을 비약할 수 있는 신성神聖 왕=현인신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신인수면문 옥기의 분포는 양저 문화 분포지역의 전체에 퍼져 있다. 물론 시대적 변천은 있지만, 옥기의 형태, 문양의 지역을 뛰어넘는 공통성은 일관되게 계속 유지된다. 양저 문화기에 신 관념이 통일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크다. 미국의 정치학자 찰즈 메리엄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면(메리엄 1973), 신인수면문은 지배를 시각적으로 납득시키는 일종의 미란다 원칙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그림1-6. 양저 문화의 옥기(모두 절강성 여항 반산 유적 출토)





옥기와 석기의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정치적 지배자가 거주한 곳이 절강성 항주시의 서교에 전개된 양저 유적군이다. 동서 약 10킬로미터, 남북 약 6킬로미터의 범위 안에서 지금까지 130여 곳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면적 약 30평방미터의 막각산莫角山 토대, 길이 5킬로미터에 달하는 당산塘山 토루, 거기에 반산反山 봉분, 요산瑤山대상묘 등의 옥기 후장묘는 특히 유명하다. 


이 양저 유적군에서 최근 큰 발견이 있었다. 막각산 토대와 반산 봉분을 둘러싼 위치에 동서 1500m, 남북 1800m, 면적 270헥타르의 흙을 쌓은 위벽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그 규모는 산서성의 도사陶寺 유적과 견줄 신석기시대 중국 최대의 위벽 마을이다.(연대로는 도사 유적보다 몇 백 년 빠를 가능성이 높다). 양저 유적군의 경우 위벽 밖에도 유적이 농밀하게 분포하기 때문에, 실제 거주 구역은 더욱 넓을 것이 확실하다. 그 넓이는'하왕조'의 왕도로 보이는 하남성 이리두二里頭 유적(기원전 1750-1520년쯤)의 300헥타르를 능가한다. 이것을 도시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문명(civilization)이란 단어는 라틴어 civilisa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엇보다 도시(civitas)와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이다(伊東 1985). 그 도시란 농업이 집약화되어 어느새 직접 농경에 종사하지 않는 '사회잉여'(=도시민)이 생겨나는 곳에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양저 문화의 돌쟁기와 돌낫 같은 농기구를 그냥 단순히 농업기술사의 관점으로만 고찰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특별히 사회, 정치사적인 검토 과제라 할 수 있다. 


금속기가 출현하기 이전의 중국에서는 옥기가 최고의 예기로 기능했다. 그 제작과 사용을 전단하는 자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고 옥기 분배를 통하여 정치적 권력을 수중에 넣었다. 그와 같은 정권의 상태를 나는 '옥의 왕권'이라 부른다(中村 2003). 장강 하류에서 꽃이 핀 그 신석기시대 문명은 말할 것도 없이 벼농사에 기반을 둔 문명이었다. 그것은 결국 장강 유역의 다른 지역만이 아니라 황하 유역으로도 파급되어 나아갔다. 그곳은 원래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의 재배지대이다. 더구나 시기적으로는 힙시서멀기 이후의 서늘하고 건조한 시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농사는 북상하고 있었다. 벼농사 인간의 인구 증가에 따른 이주라고 단순하게 단정지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아마 벼(쌀)는 종교의례에 필수 요소로서, 바꾸어 말하면 문명의 한 요소로서 전해졌던 것이다(中村 2006). 여기에서 우리는 벼농사의 전파와 확산이라고 하는 현상에는 인구학적인 메카니즘과는 또 다른 정치, 종교적 메카니즘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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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농민대회에서 '모터 달린 호미'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여, 이걸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혹시 외국에는 없을까 찾아보았다.

호미라는 형태가 조선만의 독특한 농기구이니 그보다 보편적인 괭이를 검색어로 하여 찾으니, 생각보다 많은 제품들이 나온다! 내가 이 땅 조선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저런 농기구를 손쉽게 구입해서 사용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

모터 달린 호미는 없지만, 모터 달린 괭이는 많다. 우리도 이제 농부병의 주원인인 쪼그려앉아 일하는 관습을 버리자. 호미를 버리고 괭이를 쓰자.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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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토종 벼를 베어 이삭을 터는 모습이 자주 보이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벼 이삭을 떨 때 자주 쓰는 농기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통적으로 이삭을 떨 때는 주로 '개상'이라는 농기구를 사용했습니다. 말이 농기구지 그다지 정교할 건 없지요. 그냥 절구통이나 돌덩이 또는 통나무를 가져다 놓고 거기에 볏단을 탁탁 때려서 이삭을 떨어내는 방식을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일본 농학자들이 들어와서 보고는 '으아, 이 조센징들 미개하기 짝이 없스무니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고 합니다.

개상질을 하려면 먼저 타작마당을 만들어야 합니다. 집 앞의 너른 공터인 마당에 깨끗한 새흙을 이고 지고 가져다가 싹 깔고, 발로 밟고 공이로 쿵쿵 다져서 반반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타작마당을 잘 만들수록 나중에 벼를 수확하고 쓸어서 담을 때 흙이나 돌이 적게 들어가기에 있는 집일수록 타작마당을 만드는 일에 신경을 썼지요. 물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남의 집 일이나 해주러 다니기에 바쁘지 정작 자기집 일은 제대로 하기 어려웠지만요.

그런 모습을 관찰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조선의 벼농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그들은 무언가 수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본국으로 쌀을 많이 가져갈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06년부터 새로운 벼 수확 농기구를 보급하기 시작합니다. 그네(흔히 서유구 선생의 아버지 서호수 선생의 <해동농서>에 나온다고 하는데 거기에서는 稻箸, 즉 벼 젓가락이 나온다. 그네와는 다른 농기구인 것 같다. 아무튼 일의 능률을 높이고자 이 농기구의 아래쪽에 새끼줄을 걸고 판자를 걸쳐놓아 흡사 그네를 타는 것처럼 일하기에 붙인 이름인 것 같음), 도급기(벼를 훑는 기구라는 뜻의 한자어), 훌태, 홀태(말 그대로 벼를 훑는 모습을 이름으로 붙인 것), 천치(천개의 이빨이란 한자어로 일본에서 쓰던 이름) 등등 지역마다 사람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그 농기구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농기구를 공짜로 분배해 주었습니다. 1909년 통감부에서 배부한 자료를 보면 그네가 1,026개 분배되었다고 합니다. 뭐 누구 코에 붙이냐 하겠지만, 최첨단 농기구였다는 걸 감안하면 이걸 받은 사람을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마치 '옆집 김씨네 100마력짜리 트랙터를 샀다네' 하는 심정이지 않았겠습니까? 

이 농기구의 효율이 얼마나 좋았냐면, 오인급이라고 하여 다섯 사람의 몫을 해낸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거 한 대만 있으면 다섯 사람이 하루종일 개상질한 것과 맞먹는 양의 일을 했다는 소리겠죠. 나중에 발로 밟는 족답식 탈곡기가 나올 때까지 이 농기구가 널리 쓰이곤 했답니다.

나락 거두느라 모두들 고생이십니다.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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