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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郎

 

시작하며

 

갈다라는 행위는 초기 인류의 식량 생산, 식량 확보의 과정에 없었던 행위이다. 수백만 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하는데, 이 대부분의 시간 인류는 '수렵'과 '채집'이란 방법으로 식량을 얻어 왔다. 수렵이란 활이나 덫 등의 도구를 써서 야생 동물을 잡는 행위이다. 채집이란 야생 식물이나 이동성이 부족한 소동물 등을 채취하는(또는 잡는) 행위이다. 이들에게 공통으로 깔려 있는 건 대략적인 계절성을 별도로 한다면 언제 무엇을 입수할 수 있을지가 예견하기 곤란하다는 점, 또 자원이 고갈되면 거주지를 떠나 집단별로 이동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까?

이것에 갈다라는 행위(농경)이 더해진 것은 오래된 것을 어림잡으면 수만년 전, 새로운 걸 어림잡으면 1만년 전의 일로 여기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다만, 수만년-1만년이란 폭이 있는 이유는 나중에 기술하겠다.

인류는 언제 갈다라는 일을 떠올렸던 것일까? 이런 점을 생각하는 분야를 "농경기원론"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등장한 가설은 많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농경이 시작된 시기를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정도 전의 '신석기시대'의 시작 무렵으로 상정했다. 특히 고든 차일드가 제창한 '신석기 혁명' 또는 '농업혁명'이란 개념은 농경기원을 하나의 '이벤트'로 해석하는 사고방식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농경기원을 느린 변화라고 보는 사고방식이 최근엔 꽤 유력하다. 영국 저널리스트 콜린 텃지Colin Tudge는 Neanderthals, Bandis and Farmers: How Aqriculture Really Began이란 팜플렛을 내고 거기에서 농경의 기원을 좀 더 오랜 시기부터 서서히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이것은 "농업은 인간의 원죄"라는 번역서로 출판되었다. 

두 가지 사고방식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하나는 '농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크게 관계되어 있다.  차일드의 생각에 의하면, 농경이란 사회의 발전에 의하여 인간집단이 갈다라는 복잡한 행위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진화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한편 텃지는 인간의 집단이 어느 장소에 정주해 생태계에 교란을 가한 것이 넓은 의미로 보면 농경기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차일드의 설이 고전적인 고고학의 학설인데 반해, 텃지가 현대 저널리스트로서 여러 학문 분야와 교섭하고 있다는 학문적 배경의 차이도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이 논쟁은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일본에서는 농경이라고 하면 논 벼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농경기원론은 오랫동안 벼농사 기원론, 그것도 논 벼농사 기원론이었다. 대부분의 연구자가 벼농사는 외래의 문화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일본의 농경기원론은 오로지 벼농사가 언제 도입되었는지를 논해 왔다. 1990년대에 아오모리현 산나이마루야마三内丸山 유적의 재발견 등을 계기로 조문시대 사람들의 삶이 관심을 끈 무렵부터 상황이 변했다. 논의의 흐름을 바꾼 것은 일본에서는 고고학의 독무대였던 이 분야에 환경고고학, 식생사학, 농학 등 자연과학의 흐름을 이어받은 학제가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 크다.

일본에서도 농경의 기원을 이벤트가 아닌 천천히 변화한 것이라 생각하는 연구자가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면 사사키 다카아키佐々木高明는 이 변화를 '과정(Process)'이라 부르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농경기원론에서 특기할 만한 건 "씨앗을 심는 조몬인"을 저술한 오바타 히로키小畑弘己의 업적일 것이다. 오바타는 고고학자이지만 다른 학문 분야의 성과에도 밝아, 그것을 흡수하여 조문시대의 일본열도에서는 원시적인 대두 재배를 조직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증명해 보였다.

 

 

1. 인간은 왜 갈게 되었을까?  

 

갈다라는 행위

그런데 갈다라는 행위는 어떠한 행위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자. 갈다라는 건, 협의로는 도구를 써서 초목을 베어내고 나아가서는 불을 지르거나 물을 넣는 등으로 밭을 만들고, 그곳에서 종자나 모종 등을 심어 밭에 침입하는 방해되는 식물이나 심어놓은 모종에 붙는 곤충 등을 제거해 최대한으로 수확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이다.

다만 이 행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술이나 그것을 뒷받침할 도구가 필요하다. 우선 초목을 베어내는 도구가 있다. 유물로 출토된 도구류를 연구하는 고고학은 출토된 농경도구 등을 유형화하여 그 옛것과 새것으로부터 도구의 기원이나 전파를 연구해 왔다. 또한 현재도 각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농기구류를 유형화하는 수법도 사용해 왔다. 이 방법은 문화인류학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세계적인 성과의 집적도 인정된다(예를 들면, 벨트 1968).

불을 놓더라도 그에 곁들인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 정확한 지식 없이 산림이나 초지에 불을 놓으면 제어할 수 없어 큰 산불을 일으키게 된다. 안 좋으면 인명을 잃기도 한다. 갈게 된 토지가 경작지인데, 경작지나 그 주변의 환경은 생태학적으로는 교란 환경이다. 교란의 요인은 물론 인간 행위이다. 즉, 인간에 의한 교란 환경의 출현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연구는 주로 생태학의 수법이 쓰여 왔다. 

심는 대상, 즉 재배되는 식물은 야생 식물이 아닌 작물(재배식물)이다. 재배식물의 기원을 농경의 기원이라 생각해 왔던 것이 농학의 분야이다. 이 분야에서는 러시아의 유전학자 바빌로프 이래 고고학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을 연구해 왔다. 최근에는 농학과 고고학의 수법을 합친 식물고고학이라 부르는 새로운 연구방법도 등장했다. 이는 출토 유물에 자연과학의 분석기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필자가 1996년 제창한 'DNA 고고학'도 또한 그 하나이다. 

간다는 행위에는 제사 등의 행사가 수반된다. 이들 여러 행사 등을 유형화하고 상호비교하는 것으로 농경의 기원이나 전파를 좇는다는 연구도 옛날부터 행해져 왔다. 이들은 주로 문화인류학이나 민속학의 연구방법으로, 특히 일본에서는 방대한 성과의 축적이 인정된다. 

 

 

농경의 시작

그런데 인류는 왜 농경을 시작했을까? 즉, 갈게 되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어 있는데, 모두 결정적인 근거를 가지고 제시된 것은 아니다. '왜'라고 하는 질문은 그 사람 개인이나 사회의 이상이나 기호를 묻는 것이지, 만일 그것이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를 묻는 것일지라도 그 이유를 명시적으로 설명하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하물며 기록조차 없던 시대의 행위이다. 아무래도 유추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게 된다. 

"사람은 왜 갈게 되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크게 구분하면 내인설과 외인설로 나눌 수 있다. 내인설은 인간 사회의 내부에 원인이 있다는 견해로, 예를 들면 차일드도 그 하나이다. 예를 들면, 큰 종교시설에 인간이 정기적으로 모일 때 그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한편, 외적인 요인을 고려한 설도 있다. 1980년대 이후 부활을 보인 환경결정론은 그 대표이다. 이전에는 농경의 개시 요인으로 1만3700년 정도 전의 '영거 드라이아스기'라고 부르는, 짧지만 급격한 한랭기를 드는 견해가 있었다. 그 뒤 농경의 시작이 이 시기보다 늦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또한 농경이 천천히 진전되었다는 견해가 최근 들어 등장하고 있다. 

어느 설이나 배경에 인구 증가와 식량난이 있다고 생각되는 점에서 동일하다. 식량의 압박이 사회를 농경으로 몰고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일종의 인과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과론은 종교적 사고와도 관계되어 어느 시대에나 받아들여지기 쉬운 사고방식이다. 불교는 현세의 사건을 전생의 결과(업)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구성하는 것도 일종의 인과론이다. 더욱이 현대의 과학기술을 뒷받침한 사상적 배경인 서양의 근대 합리주의 또한 기독교 사상이 뒷받침하는 인과론 위에 성립되어 있다. 인과론은 "모든 사건에는 반드시 바탕이 되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인류는 그 무엇인가를 반드시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농경의 시작을 어떠한 사건의 결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으로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브라이언 사이크스Bryan Sykes의 소설 <이브의 일곱 딸>에서는 현생 인류의 근원이 된 일곱 여인을 가정하고, 그들의 일생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물론 수만년 전의 이름 없는 여성의 삶을 증거로 복원하는 등은 현 단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그건 '이야기'로, 사이크스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이나 이야기를 사실무근으로 치부해도 될까? 현대 학문은 상상이나 이야기를 부당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은가? 확실히 상상에 근거는 없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에서 100년 동안 정당한 설로 믿어졌던 설 등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근거 없는 이야기가 거짓말인가 하면, 그리 생각할 근거도 또한 없다. 상상의 산물은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가설로 취급하는 것이 좋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이브의 일곱 딸>에 등장하는 일곱번째 여성 자스민은 자기 근처의 꽃이나 식물에 흥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이 이야기가 진짜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증거는 없지만- 갈다라는 행위의 시작은 이 여성의 일시적 기분이 시작이었다는 것이 된다. 즉 "우연히" 시작되었다는 설, "우연의 가설"이다. 나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인과론을 근대 합리주의에 따른 생각이라 한다면, "우연의 가설"은 양자론적 사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를 위해 경작한 것일까?

갈다라는 행위는 그 뒤 꽤 일반화된 것 같다. 어느 토지에 있던 집단이 주변에서 식재료를 입수할 수 없게 된 때, 그때까지의 해결법은 그 집단 전부 또는 집단의 일부가 그 장소를 떠나 신천지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세계 거의 모든 땅은 1만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 집단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자원 고갈에 대응하는 방법은 갈다라는 것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변덕스러운 농경이 인류의 생존에 필수 행위가 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갈다라는 행위가 다음의 전기를 맞이한 것은 도시가 탄생했을 때이다. 그때까지 갈다라는 행위는 자기 자신, 자기의 가족 또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위한 행위였다. 모든 개인이 자신과 그 집단의 먹을거리에 책임을 지고 있었다. 도시의 출현은 도시민, 즉 특정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출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경작하지 않는다. 물론 그때까지 겸업하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 먹을거리를 스스로 완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먹을거리를 부양하는 생업이 새로 생겼다. 그것이 농업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농업이란 다른 사람의 식재료를 생산하는 생업이다(佐藤 2016).

그 뒤 도시의 규모는 점점 확대되었다. 일본에는 이미 고대에 최초의 본격적인 도시인 헤이조쿄平城京가 출현한 이후, 중세까지 교토, 가마쿠라 등의 도시가 탄생했다. 그리고 주로 그 근교에 농업 인구가 집중되는 지역이 생겨났다. 지방에는 조세로 농산물 등을 납부할 의무가 부과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똑같은 힘이 작용했다. 즉, 지방의 농업은 조세 때문에 식료품 생산을 위한 것으로 발전해 왔다고 할 수도 있다.

다시 세계로 눈을 돌리자. 농업은 대륙마다, 또 같은 대륙 안에서도 지역마다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농경 도구나 작물의 종류는 지역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예를 들면, 작물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면 유라시아 동부에서는 벼, 대두나 토란 등이, 서부에서는 맥류와 십자화과의 작물 등이 우점했다. 반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옥수수, 감자, 토마토, 고추 등이 재배되었다. 

농경 기술에서도 큰 지역차가 인정된다. 유라시아 중앙부부터 서부에 걸친 반건조지대에서는 관개기술을 발달시켜 물을 조달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동부의 몬순지대에서는 홍수 대책 등 '너무 많은 물'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었다. 연간 강수량이 400mm가 되지 않는 "갈" 수 없는 토지에서는 무리지어 사는 대형 초식 포유류를 길들여 그 젖이나 고기 등을 이용하는 유목이 발생했다. 이 생업은 그 뒤 수천년을 거쳐 농업과 융합해 목축이라는 형태의 새로운 생업을 낳았다. 

유라시아와 남북 아메리카 사이에 작물의 교환이 일어난 건 콜럼버스 등에서 시작된 대항해시대가 도래하면서이다. 그리고 대륙을 넘나드는 교역은 세계적인 대도시를 낳았다. 일본에도 히라도平戸, 나가사키長崎, 사카이堺 등의 도시가 융성했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시들을 이동하는 교역자들의 먹을거리 또한 주변 지역의 농업 생산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2010년 세계의 도시 인구가 세계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고 보도되었다. 즉,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자신이 먹는 식재료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가축을 위해 갈다

그런데 농업생산물은 인간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이해는 농업의 성격을 아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농업생산물의 상당 부분이 가축의 사료가 된다. 농림수산성 자료에 의하면, 유럽연합 28개국의 1억8150만 헥타르의 농지 중 4%인 7만6100헥타르가 사료작물을 생산하는 경작지나 방목지로 사용되고 있다. 작물별 생산성이 다르기에 토지면적과 생산량이 완전히 비례하지는 않겠지만, 유럽의 농업생산물 가운데 40% 정도가 가축을 위해 생산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수치가 불과 6.5%에 불과해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유럽의 목축은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에 중앙아시아부터 서아시아에 기원한다고 생각되는 유목에서 발단하고 있다. 유목은 가축의 무리를 무리마다 관리하는 형태로, 원래 농경에 적합하지 않은 초지에 입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유럽에 전개된 뒤, 그 먹이(사료)는 점차 농업으로 조달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연중 안정적으로 가축을 사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축은 일본 열도에도 있었는데, 그 절대적 수가 적었던 것 등이 관계되어 농경지의 대부분이 인간을 위한 작물 생산에 이용되어 왔다. 특히 쌀은 일본인에게는 특별한 작물이란 것이 오랜 기간에 걸친 '진리'였다. 1970년대 무렵, '초다수확 쌀'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에 반대하는 이유의 하나가 '인간의 식량인 쌀을 가축에게 먹이는 것'에 있었다. 결국 이때의 초다수확 쌀은 정착되지 못했다. 그러나 2010년 무렵부터 가축 사육을 위한 쌀을 개발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급속히 확산되려 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쌀 기피현상이 심화되면서 쌀을 신성한 음식으로 여기는 인식 또한 희미해졌음을 보여준다. 

 

 

 

먹을거리 패키지

 

당질과 단백질

동물로서의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수 영양소가 있다. 그중에서도 당질, 지질, 단백질은 3대 영양소라고 이야기되어 왔다. 인간은 이들을 균형있게 섭취하지 않으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당질은 식물성 식품에서, 지질과 단백질은 동물성 식품에서 섭취해 왔다. 물론 여기에는 예외도 있어 당질을 젖 등 동물성 식재료에서 섭취하기도 하고, 지질이나 단백질을 콩이나 밀 등 식물성 식재료에서 섭취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예외가 생긴 이유의 하나가 동식물 분포의 불균일함이다. 극지나 고산지대, 사막 주변의 건조지대에서는 식생이 부족해 안정적으로 입수할 수 있는 식재료는 동물성으로 한정된다. 젖 등의 동물성 식재료에서 당질을 섭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는 극지에는 지질을 에너지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의 이유 등으로 특정 식재료를 입에 대지 않는, 이른바 '금기'에 의해 동물성 식재료를 입에 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동물 종을 기피하는지는 종교에 따라 제각각이다. 이슬람교도는 돼지고기를 매우 강하게 기피한다. 힌두교도 대부분이 동물성 식재료를 섭취하지 않는다. 자연히 그들은 단백질을 콩과 같은 식물성 식사를 통해 섭취하게 된다.  

3대 영양소를 무엇을 통해 섭취할지는 토지에 따라 다양하다. 왜냐하면 동물상과 식물상은 그 토지에 고유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대륙의 중앙부에 바다의 물고기는 없으며 19세기에 들어서기까지 홋카이도에는 벼가 없었다. 식재료의 토지 고유성은 프랑스에선 테루아terroir 등으로 불린다. 일ㄹ본어로 고치자면 "풍토風土"일까?

 

 

당질과 단백질의 패키지

매우 흥미로운 점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는 당질과 단백질(그리고 지질도)을 같은 곳에서 생산해 왔다. 이 현상을 당질과 단백질의 동질성이라 부르기로 하자. 일례로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에서는 논이라는 생산의 장에서 벼(쌀)와 물고기(민물고기)를 생산하던 "벼논양어"가 그것이다. 그것을 '벼와 물고기의 패키지'라고 부르기로 하자.

게다가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의 장에서도 동일성이 유지되어 온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벼와 물고기의 패키지'는 밥상 위에서, 예를 들어 '초밥'이란 요리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말하는 초밥은 물론 지금 같은 초밥이 아니라 식해 같은 초밥 형태이다. 이와 같은 패키지는 일본 열도만이 아니라 대륙부 동남아시아부터 중국 남부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당질과 단백질 패키지는 세계 각지에 다양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대륙부 동남아시아부터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넓은 지역에서는 쌀 대신 서류(고구마, 토란, 빵나무, 마, 바나나 등)이 쓰였다. 또 동북아시아에서는 쌀을 대신해 잡곡이 사용되었다.

유럽에선 '보리와 젖'이란 패키지가 생겼다. 중세 이후에 등장한 삼포식 농업은 여름작물, 겨울작물, 휴한(휴경)이란 작부방식을 차례로 반복하는 농법으로, 이 휴한지에서 가축을 방목한다. 이렇게 하여 2회 경작하고 지력을 잃은 토지에 가축의 배설물을 비료로 주어 지력의 회복을 도모한다. 

반면, 식탁에서 단백질은 가축에서 유래하는데 그 중심은 젖과 유제품이고, 고기는 그 다음의 식재료였다. 유럽의 북부에서는 귀리와 젖을 조화시킨 '오트밀'로 요리되었다. 신대륙에서 감자가 도래하고부터는 '감자와 젖'의 패키지도 생겼다. 

중부 이남의 유럽에서는 맬과 젖을 조화시킨 여러 요리가 생겼다. 밀은 가루로 빻아 빵이나 파스타로 가공되었다. 덧붙여 파스타의 원료는 빵을 만드는 밀(학명 Triticum aestivum)과는 다른 마카로니 밀(Triticum durum)이라 부르는 밀이다. 

'쌀과 물고기' 등 단백질을 물고기에 의존하는 패키지와 '맥류와 젖'처럼 그것을 가축에게 의존하는 패키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을까? 전자에서 물고기는 천연자원이다. 그리고 후자에서 가축은 '인간이 만든 동물'이다. 이 차이는 사회의 구조나 그곳에서 거주하는 인간들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자연을 따른다'는 사상이, 그리고 가축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자연을 지배'하려 하는 사상이 뿌리를 내렸다. 

 

 

 

식물 소재의 패키지 

앞에서도 적었듯이, 단백질 공급원이 되는 식물성 식재료가 있다. 대두 등 일부의 두류나 밀이 그 대표일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제약으로 동물성 식재료를 생산, 소비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당질만이 아니라 지질, 단백질도 그러한 식물성 소재를 통해 섭취하고 있다. 마에다 카즈미前田和美에 의하면, 인도의 데칸 고원에서는 잡곡과 두류의 섞어짓기가 흔히 관찰된다. 인도는 잡곡의 세계적인 중심 가운데 하나로 아시아에서 기원하는 잡곡 등이 재배된다. 그리고 쌀 또한 이러한 잡곡과 함께 재배되는 경우가 많다(이러한 재배 시스템을 농학 분야에서는 섞어짓기라 함).

두류의 식물, 특히 덩굴성 종은 지주를 따라 위로 자라면서 생육하는데 잡곡이 그 지주 역할을 한다. 두류의 많은 종이 대기 중의 질소를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질소 고정균'과 공생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질소거름의 일부는 지주가 되는 잡곡에게 제공된다. 즉, 잡곡과 콩은 질소 고정균을 통해 공생하고 있다. 

밥상 위에서도 곡류와 두류는 동소성이 있다. 달 카레(콩 카레)나 프라오라 부르는 콩이나 채소를 섞어 지은 밥(프라오의 어원은 필라프인가 싶음) 등 곡류와 콩을 조화시킨 요리는 매우 많다. 

일본에서도 곡류와 두류의 패키지가 있다. 인절미는 쌀과 대두의, 팥떡은 쌀과 팥의 패키지이다. 세금도 그 일본식의 기본형이라 하는 '국 하나 채소반찬 셋'의 스타일인 '밥과 된장국'은 쌀과 콩의 패키지가 구현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형 가축의 전래가 늦고, 또 원시종교 및 밀교와 절충된 일본 불교는 일본 요리의 한 형태인 정진요리 스타일이 되기도 했다. 

 

 

 

변화하는 당질과 단백질 패키지

이와 같은 먹을거리의 패키지는 그 토지의 풍토를 반영하고 있는데, 사회나 경제의 세계화에 수반해 그 형태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이후에 일반화된 육식(특히 가축의 고기를 먹는 식문화)가 '쌀과 고기'라는 패키지를 만들어냈다. 이른바 '양식'의 메뉴인 '돈카츠 정식'이나 덮밥인 '소고기덮밥', 거기에 해군이 발명한 카레라이스 등이 그것이다. 싸과 고기의 패키지는 중앙아시아 기원이라 생각되는 양고기 스프로 섞어 만든 '필라프', 또는 '쌀과 젖'의 패키지아고도 할 수 있는 리조또 등을 들 수 있다. 

남아메리카 태생의 감자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최초에 감자는 유럽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18세기에 유럽 북부에서 당질 공급원의 중심이 되었다. 이제 독일은 감자 요리의 메카처럼 불리고, 영국의 '피시앤칩스' 같은 '감자와 생선'이란 패키지도 낳았다. 

이처럼 먹을거리의 세계에 초래된 세계화는 일면에서는 조합(패키지)을 다양화시켰다. 요리인의 창의력으로 새로운 요리가 점점 등장했다. 그동안 한정된 땅에만 있던 식재료와 그 조합이 이제 전세계의 식재료를 자유롭게 조합시키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이란 시대는 매우 풍요로운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도 식재료가 세계를 돌아다니게 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식재료 운반에 많은 에너지가 쓰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공업화하는 경작

 

관개와 화학비료

갈다라는 행위는 인간 행위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자연 영위의 범위 안이었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고(즉 관개하지 않고), 거름도 식물의 부식이나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배설물, 사체였다. 지금 말하는 '유기비료'이다. 관개 기술이 없으면, 경지는 제한된다. 거름이 제한되면 단위면적당 생산은 늘지 않는다. 

인류가 관개를 발명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정도 전, 중앙아시아부터 지금의 이란에 걸친 지역이었다고 생각된다(종합지구환경학 연구소 2012). 일본에선 카와치河内 평야에 큰 고분이 조영된 뒤에 팠던 '고시대구古市大溝'가 최고의 본격적인 수로가 아닐까 이야기되는 것 같다. 오사카 평야의 남부에 있는 사야마이케狭山池는 일본 최고의 댐식 저수지라고도 하며, 그 건조 시기는 7세기 초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일본에서 관개는 15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것이 된다(사토佐藤 2020).

비료를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단초가 된 것이 1906년에 하버와 보슈에 의하여 발명된 하버-보슈법이다. 이에 의하여 인류는 대기 중의 질소를 인공적으로 비료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에 의하여 작물의 단위면적당 생산을 극적으로 증가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 화학비료의 다용은 환경에 부하를 주어 지구환경의 지속성을 해쳐 왔다. 비료의 제조에 다량의 석유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또, 비료 반응성이 좋은 작물이나 품종만이 남아서 대량 생산되고, 기타 작물, 품종은 차례로 배제되어 갔다. 이것이 작물종이나 품종의 다양성을 빼앗고, 식문화의 균일화, 세계화를 일으켰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갈다라는 작업 그것도 변화시켰다. 이전까지는 갈다라는 작업은 문자 그대로 흙을 갈고, 그 흙과 물과 태양광으로 작물을 키우는 작업이었는데, 비닐을 쓴 비닐하우스에서의 촉성재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윽과 비닐하우스는 대형화되고, 또 유리온실이 등장한다. 온실이라고는 하지만, 가랭하면 저온 온실도 된다. 이윽고 흙은 수경액으로 대체되어 지금은 LED를 사용한 밀폐형 '식물공장'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는 재배의 3요소로 꼽히던 흙, 물, 태양광 가운데 흙과 태양광은 사용되지 않는다. 농업은 대지와 자연으로 뒷받침되던 산업에서 공업으로 전환되고 있다.

동물성 식재료의 생산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축산업은 원래 유목 문화가 발명한 착유나 거세 등의 기술을 이어받은 산업이었는데, 주로 유럽에서 가축의 먹이를 농업이 지원하는 산업으로 전환된다. 그 뒤에도 사육 기간의 단축이나, 또 많은 개체를 더 좁은 사육사에서 사육하는 밀식 사육이 점점 진행되었다. 

축산업도 또 동물의 생명을 먹는 산업에서 공장에서의 식육이나 우유 생산이란 산업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다. 그 윤리적인 과제에 대해서는 한층 더 검토되어야 한다. 

 

 

갈다에서 가공하다, 운반하다

대량 생산된 식재료는 멀리 떨어진 대소비지 주변에 대량으로 운반되어 그것에서 가공하게 되었다. 공업화가 경작부터 요리하는 작업에까지 이른 것이다. 대량으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규격인 것을 한번에 생산해야 한다. 휘어진 오이나 크기가 제각각인 사과는 환영받지 못한다. 또 대량 생산은 생산되는 작물의 수와 품종의 수를 줄였다. 다양성이 줄어든 것이다. 

가공기술의 진보는 보존기술의 진보였다. 인류가 태고부터 알고 있던 가공기술은 가열, 건조, 소금이나 설탕 절임, 발효 등이었다. 공업화는 이들을 대대적으로 하는 동시에, 통조림과 병조림, 플라스틱 용기나 식품보존료의 개발을 가져왔다. 일본에서는 발효를 이용한 가공기술은 무로마치 시대에 이미 확립되었고, 특히 술이나 간장 등의 조리료엣는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된장은 지금도 약간은 자가 제조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술이나 간장은 거의 외부화되었다(양조는 면허와 신고가 필요). 병조림이나 통조림은 19세기 초의 발명품인데, 플라스틱 용기나 보존료는 석유화학공업의 융성 이후, 즉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급격히 보급되었다. 이러한 기술은 저장성이나 수송거리를 뚜렷하게 향상시켰다. 

또한 병조림과 통조림은 전쟁터에서 식량을 확보한다는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군대는 식량의 생산, 가공, 수송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제 현대 일본인의 음식은 이러한 기술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가공은 더욱 중첩되고, 가공과 다음 가공 사이에는 수송이라는 과정이 끼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건 이렇게 여러 겹으로 가공되고 운반된 결과이다. 다시 말해, 먹을거리는 이제 에너지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식재료의 장거리 이동에는 배나 항공기가 이용되지만, 수송을 맡고 있는 건 석유 등의 화석연료이다. 배로 이동될 때 식재료는 냉장 또는 냉동되어 운반된다. 냉장과 냉동에 쓰이는 전기도 현대사회에서는 화석연료를 이용해 만들어진다. 전기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라는 표현은 표면적인 시각이다. 내침 김에 쓰자면, 원자력 발전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온난화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원자로를 냉각하는 데에는 공기나 해수가 사용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원자로가 발하는 열은 대기나 해수를 따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략 인간의 활동 중에서 열을 발하지 않는 것 따위는 없다. 

이와 같은 먹을거리 시스템이 과연 지속가능한지 아닌지 이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경작하는 인간과 먹는 인간을 연결하다

인류가 '갈다'라는 작업을 익혔을 때, 함께 먹는 집단(사람수)는 몇 십에서 많게는 몇 백까지였다. 갈다라는 작업이 나라를 만들게 되자, 그 수는 단숨에 늘어났다. 고분시대에 조영된 다이센大仙 고분(오사카시 사카이시)에서는 본체 공사에 2000명 이상이 종사했다고 한다. 그 주변에서 일했던 사람의 수는 아마 만 명을 훌쩍 넘었을 것이다. 이러하다면, 경작하는 사람들은 만 명 단위의 사람들의 먹을거리를 지원하게 된다. 당연히 먹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또 먹는 사람도 경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둘 사이를 잇는 새로운 모습이 등장한다. 이는 식자재의 집하, 운반, 판매나 가공, 보존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형태로, 현대에는 이러한 형태가 극단적으로 비대해지고 있다. 그리고 소비자의 일이었던 요리 부분을 '가공'의 영역이 점점 대신하고 있다. 큰 역할을 한 것이 전자렌지 등의 가전제품이다. 손질한 재료를 냉동한 것을 전자렌지로 가열하면 요리가 완성된다. 전기와 가스 밥솥의 보급은 밭솥의 간편화를 가져왔다. 

더욱이 최근에는 완성된 반찬을 사오는 점심이 크게 늘고 있다. 또 점심의 대구어처럼 쓰이는 외식도 현대인의 먹을거리에서 빠질 수 없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 책의 다른 장에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기에 여기에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최후의 경작 -맺음말을 대신하여

인류가 갈다라는 행위를 익힌 지 만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 이후 인류는 지상의 미개척지를 차례로 개척해 농지로 바꾸어왔다. 그때까지 미개척지였던 곳은 차례차례 개척되어 마을땅, 마을바다가 되어 갔다. 이 시점에서 '자연'은 '인간의 손이 닿은 자연'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경작되지 않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바다이다.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식재료는 지금까지 대부분 천연자원이었는데, 최근 반세기 정도 사이에 큰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그것은 양식의 확대이다. 양식기술 자체는 300년에 이르는 역사가 있다고 하는데,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950년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그 뒤의 성장은 급속해, 현재는 총 어획고의 20%를 넘을 정도까지 되었다. 자원의 고갈이 알려진 가운데 양식은 앞으로도 그 어종과 생산량을 늘릴 것이다. 자원 관리라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육지에 사는 사람들의 이치만으로 바다를 경작할 수는 없다. 이 공간에서 계속 살아간 해양 민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의 삶이라고 해도 바닷물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니다. 대양에 산재한 섬들이 삶의 무대였다. 이런 사람들의 사람을 살피지 않는다는 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을 수탈의 장소로 삼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일본에서도 해안지대에는 반드시 이러한 해양 민족과의 접촉이 있고 교역을 통해 삶을 지탱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의 일본 식문화가 이렇게 성립되어 온 것도 생각하면서 바다를 경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Colin Tudge(竹内久美子 번역), 2002, 『農業は人類の原罪である』, 新潮社
小畑弘己, 2016, 『タネをまく縄文人』, 吉川弘文館
総合地球環境学研究所(편집), 2012, 『地球環境学辞典』, 弘文堂
Emil Werth(藪内芳彦・飯沼二郎 번역), 1968, 『農業文化の起源 -堀棒と鍬と犂』, 岩波書店
佐藤洋一郎, 2016, 『食の人類史』, 中公新書、中央公論新社。
Bryan Sykes(野晶子 번역), 2006, 『イヴの七人の娘たち』, ヴィレッジブック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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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de van Andel 씨가 수리남의 Paramaribo에 있는 시장에서 도정하지 않은 쌀 한 봉지를 구매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노예제의 가거를 새롭게 검토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현재 네덜란드 Leiden에 있는 Naturalis Biodiversity Center의 민족학자는 2006년 수리남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약용 및 제례용 식물을 조사했다. 그녀는 쌀을 포함한 약초와 제례용 식물을 판매하는 수백 명의 마룬Maroon 여성들로 붐비는 수도의 시장을 발견했다.

수리남의 마룬은 그 국가의 내륙에 있는 열대우림을 피난처로 정하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도주 노예들의 후손이다. 이질적인 경관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초기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마룬들은 살아남아 그 문화를 지속해 올 수 있었다. 오늘날 20만 이상의 마룬들이 있고, 대부분은 수리남과 프랑스령 기아나에 살고 있으며 네덜란드에도 적은 수가 있다.  

역사가들은 350년이란 대서양 횡단 무역 기간 동안 12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이 강제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야 했다고 추정한다. 이 항해에서 살아남은 1070만 명 가운데 약 30만 명의 노예들이 1668년부터 1823년 사이에 라틴아메리카 북동부에 있는 수리남의 네덜란드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급증하는 커피와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강제로 노동해야 했다.  

수리남에서 van Andel 씨는 노예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론 -쌀을 포함하여- 이 논의되고 있는 걸 알지 못했다. 아프리카인 노예가 북미의 수익성 좋은 쌀 플랜테이션을 도왔던 벼와 농사법을 가져왔는가? 기존 이론의 대부분은 노예는 주인이 시킨 일을 수행한 무지한 노동자일 뿐이라고 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벼 해안"에 있는 국가에서 잡혀온 노예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작물에 대한 지식을 가져왔다. Wageningen University


그 논쟁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번서아는 벼 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아프리카인 노예의 사례를 제시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벼 역사학자이지 지리학 교수인 Judith Carney 씨가 2002년 저술한 책 Black Rice에 의해 촉발되었다. 벼는 식민지 시대 초기의 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작물의 하나였으며, 최대 25%의 수익을 올렸다. 아프리카의 쌀은 짙은색의 겉껍질이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3개월의 항해 동안 배에 가득 실린 노예들을 먹이기 위해 사용된 단단한 곡물로 제공되었다. 다수확의 아시아의 벼가 결국 플랜테이션을 장악하였지만, 아프리카의 쌀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도 안정적으로 재배되었다.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은 신세계에서 탄탄히 뿌리내리기 위해 필요한 경작술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들이 오랫동안 활용하던 전통적 벼 농사법을 문서화하며 서아프리카에서 시간을 보낸 Carney 씨는 신세계에서 벼농사의 과정을 분석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노예들이 파종, 도정, 요리하던 방법만이 아니라 벼를 경작한 미소환경을 아프리카 여성들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그녀는 노예 소유주들의희소하고 편향된 역사적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서 신세계와 구세계 사이의 흥미로운 유사점을 공들여 짜맞추었다."미국 혁명까지 노예들은 아프리카의 농촌 지역처럼 절구와 절구공이로 도정을 했다."고 그녀는 지적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 내려온 전설에서는, 배를 타기 전에 여성들이 머리카락 속에 아직 도정하지 않아 씨앗으로 쓸 수 있던 볍씨를 어떻게 숨겼는지 알려준다. 그녀의 연구는 "아프리카 대리인(African agency)"이라는 개념 -노예들이 적어도 그들의 행동에 대한 언어 구사력을 가졌다는 개념- 을 뒷받침했다. 

Carney 씨의 조사는 최초로 노예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농업의 성공을 위해 더 많은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주장한 듀크 대학의 노예사학자 Peter Wood 씨의 연구에 기초한다. "1974년에 그것은 진보적 개념이었고, 수십 년 동안 열띤 반응이 나타났다."고 Carney 씨는 이야기한다.

Carney 씨 역시 학술적 비판에 시달렸다.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없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노예 소유주는 아무도 자신의 노예가 벼를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그녀는 덧붙인다.

그러다 van Andel 씨의 연구에 관한 말이 나왔다. 2006년 그녀의 수리남 여행에 관한 강연을 한 이후에 van Andel 씨는 Black Rice를 읽은 대학원생 청중에게 그곳에서 벼를 수집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녀가 잠시 생각해 보니, 사실 어딘가에서 제례용 쌀 봉지를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여기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는 그 샘플이 아프리카의 쌀이라고 결정되었을 때 나중에 외쳤다. 명백한 증거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추적이 가능한 총알이었다. 


마론으로 알려진 도주 노예들은 수리남의 열대우림에 숨어서 독립을 유지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공동체와 문화를 확립했다. Tinde van Andel


van Andel 씨를 비롯한 학자들은 북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친숙한 흰쌀인 아시아의 벼가 미국의 플랜테이션에서 재배되고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널리 믿었다.  Van Andel 씨는 아프리카의 벼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식물 자체가 수리남에서 재배되었으며 쌀이 수입되지 않았다는 걸 문서화해야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그녀는 수리남의 약용식물에 대한 현지조사를 끝마쳤다. 

운이 좋았는지, 그녀는 2008년 Paramaribo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표본을 찾기 위해 하루 만에 그녀는 약용식물 목록을 조사한 마을인 Mundje Kreek에 사는 친구 Berto Poeketie 씨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지역에서 검은쌀을 재배한다고 알려진 여성인 Emelina Koese 씨와 연결해 주었다. Koese 씨는 —그 지방에서 가장 널리 믿는 Winti 같은 종교를 지닌 여러 마을 주민들처럼— 외부인을 의심했고, 따라서 그녀의 지식을 낯선 이와공유하길 주저했다. 숲에서 오랫동안 산책하면서 Koese 씨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농지로 가는 길에“나무에 걸어 놓고 도난 방지용으로 쓰이는 약초, 뼈, 천조각 같은 것들이 있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논 밖에서 큰삼각머리독사와 맞닥뜨리면 백인은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는 신호라고 Koese 씨는 해석했다. 결국 van Andel 씨는 식물체 하나와 사진 한 장만 원하며 댓가를 지불하겠다고 하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곳은 내가 모든 중요한 제례용 식물이 뿌리째 뽑혔다고 생각했던 똑같은 마을의 바깥에 있었다."고 van Andel 씨는 회상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 쌀의 활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량의 아프리카 쌀이 조상에게 제물로 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이 '마법' 식물과 어떻게 작용하는지. 당신이 특별하게 하나에 관해 묻는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을 기꺼이 나누고 싶어한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그들이 당신도 무언가 알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면 당신과 대화하는 걸 가치 있다고 결정한다." 

van Andel 씨가 수리남에서 현재 아프리카 벼를 재배한다는 걸 확인했을 때, 아프리카의 벼가 노예 무역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고 그와 관련된 쌀 농사법이 아프리카인에 의해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 Carney 씨의 이론이 지지를 받았다고 2010년 그 발견에 대해 발표한 Economic Botany의 편집장 Robert Voeks 씨는말한다. 

그러나 그 발견은 시작에 불과했다. 벼가 어떻게 수리남에 이르렀는지 탐험하고자 했던 van Andel 씨는 언어학과 벼 유전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노예들의 이동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창이 열렸다.

van Andel 씨가 수리남에 있으면서 떨칠 수 없던 한 가지 질문이 있었다. 왜 마룬들은 인근의 토착민들과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식물을 이용했을까? 그녀는 다른 이름과 응용법 및 준비는 아프리카의 유산과 혼합되었을 가능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추측했다. 2010-2012년, 그녀는 가나와 베냉, 가봉을 방문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았다. 수백 만 명의 노예가 강제 이주된 350년 동안 식물학적 이해에는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무엇을 잊었으며, 무엇을 기억했고, 어떤 적응이 필요했는가?


Tinde van Ande 씨의 수리남의 벼에 대한 연구는 그녀를 서아프리카의 해안으로 데리고 갔고, 수리남에서 아직도 사용되는 식물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들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Christiaan van der Hoeven


서아프리카의 국가들을 다니면서 van Andel 씨는 수리남의 식물 이름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수리남의 수많은 식물명은 아프리카에 기반하고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전체적으로 그녀는 수리남의 식물명 2350개를 서아프리카의 그것과 비교했다. 마룬의 토착어 가운데 40% 이상이 소리, 구조, 의미에서 아프리카의 식물명과 닮았다. Van Andel 씨는 "아프리카인의 눈을 통해" 식물군을 보았다고 한다. 학술 문헌을 활용해 그녀는 다른 나라의 식물명과도 비교했다. 가장 이목을 끄는 유사함은 네덜란드가 노예를 구매한 주요 지역인 가봉과 앙골라의 식물명에서 발견되었다. 2014년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발표된 그녀의 논문은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 식물군의 상당 부분을 인지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노예가 신세계에 왔고 아무 역사가 없으며 텅빈 석판이었다는 건 구식의 사고방식이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van Andel 씨는 말한다. 당신이 기억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다면, 그것이 당신의 정체성이 된다. 열대의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매우 다르지만, 식물 군집에는 겹치는 부분이 조금 있다. "열대우림의 종에 대한 아프리카인의 지식이 마룬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van Andel 씨는 말한다. Voeks 씨도 동의한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을 가져와서 남아 있는 종이나 속과 유사한 것들을 이에 겹치게 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들은 생태학적 변화의 중요한 대리인이었다."

Van Andel 씨는 마룬의 벼가 유전자만 얻을 수 있다면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걸 추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2015년 남아프리카 Western Cape에서 열린 회이에서 van Andel 씨는 뉴욕대학의 박사후 연구원 Rachel Meyer 씨를 만나 마룬과 아프리카의 토종 벼의 게놈의 염기서열이 일치하는지 함께 확인하기로 약속했다. 2016년 10월,  Carney 씨를 포함한 연구진은 마룬 벼의 기원이 기니아 고원의 국가들, 특히 코트디부아르 서부에 있다고 제시하는 연구결과를  Nature Plants에 발표했다. 네덜란드는 가나와 베냉, 중앙 아프리카에서 노예의 대부분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노예선의 기록에 의하면,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식료품을 확보했다고 나온다.

"우리의 연구는 인구 이동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해 식물의 염기서열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그녀는말한다.

마룬 벼의 기원에 대한 발견은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분야 -역사학에 빛을 비추기 위해 식물을 활용- 의 흥미로운 사례이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생물분자 고고학자 Terry Brown 씨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예의 작물의 기원을 정확히 찾아내고자 유전학이 사용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인간 이주에 대한 대용물로 식물이 사용된 건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마룬이 재배하는 수리남의 여러 벼 품종은 서아프리카에 유전적 뿌리를 두고 있다. Tinde van Andel


인간의 이주를 추적하고자 식물의 유전학을 활용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식물의 재생산은 인간의 그것보다 덜 복잡하며, 경작의 흔적은 인간에게 식물의 가치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인간은 '토요일 밤의 효과'가 있다. 수컷은 짧은 거리를 가서 이주하지 않고도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그러나 식물은 땅에 붙어 있어 식물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가 어떻게 확산되는지 보여준다. 

노예가 경작한 신세계의 벼와 아프리카에 있는 그 기원 사이의 연결고리를 밝히는 일 외에도, 새로운 유전적 기술들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서 농업의 기원이 갑자기 발명도었다는 개념을 뒤집었다. "우리는 이제 농업의 기원이 초기의 수렵채집민이 야생 식물을 더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다루기 시작하면서 농업이 확립되기까지 8000-9000년이 걸린 오래 계속된 과정이라고 믿는다."고  Brown 씨는 말한다. 그와 다른 사람들은 작물화된 보리와 밀의 게놈을 이용하여 그것이 단일한 근원의 개체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 지방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교잡된 것임을 증명한다. 

van Andel 씨에게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노예제의 이야기가 더 많이 있다. 그녀는 오크라부터 얌과 바나나에 이르기까지 더 노력하여 다른 작물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수리남의 마룬들은) 자신의 조상에 대하여 정말로 알고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더 많이 물어봐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그녀는 마룬이 자신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일을 돕길 희망한다. 

이를 위하여 van Andel 씨는 최근 프랑스 국립 자연사박물관의 민족식물학자 Marie Fleury 씨와 함께 수리남 동부에 이웃한 프랑스령 기아나의 마룬 공동체를 탐사하기 위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과학 및 탐사 프로그램 기금을 지원받았다. 이 연구진은 올해 여름 벼가 익었을 때 현지조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마룬의 문화는 그녀가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수리남 마룬의 작은 집단이 네덜란드에서 그녀 근처에 살고 있다. 사실, 제례에 사용된 신성한 식물은 두 나라 사이에서 활발히 교역되었다. 예를 들어 Winti가 1971년까지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관습이 살아 있는 건 놀라운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수리남의 마룬들은 차별을 당했고, 때로는 숲에 살고 있는 퇴보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그녀의 노력이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밝혀준다면, 마룬은 식물에 대해 세대를 뛰어넘는 특별한 지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더구나 이들 간과된 작물 품종은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마룬의 경우, 벼 재배는 전통 종교 뿐만 아니라 역사도 살아 있어 사람들이 역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노예 국가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https://www.sapiens.org/culture/african-rice-new-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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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제1장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농경 문화       아리무라 마코토有村誠

 

 

 

 

 

서아시아에 있는 농경 문화의 기원

 

인류는 그 탄생부터 수백만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서 야생의 동식물을 이용하며 생존해 왔다. 그동안 동식물 이용에 관한 다양한 기술혁신과 지식의 누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초기 단계에서는 민첩하게 움직이는 동물을 잡지는 못하고 죽은 동물의 고기를 찾아다니던 인류는 마침내 동물을 몰아넣는 기술을 깨우치고, 게다가 창과 화살같은 수렵용구를 마련해 뛰어난 수렵민이 되었다. 시행착오의 마지막, 신변에 자생하는 유용식물의 수를 확장하여 다종다양한 식물을 활용하는 지식을 축적해 나아갔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 년 전을 경계로, 인류는 농경과 목축에 의하여 자신의 식량을 생산하는 생계로 생활의 기반을 바꾸어 나아갔다. 일찍이 G. 차일드가 '신석기혁명'이라 부르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듯이, 이 식량 획득양식의 변화에 의하여 사람들의 생활은 온갖 방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고고학에서는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목축 사회로 변천한 것을 신석기화(Neolithisation)라고 부르며 그것이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 진행되어 갔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최초에 신석기화가 시작된 지역이 서아시아이다. 이 장에서는 서아시아에서 일어난 신석기화, 즉 농경 문화의 시초에 대하여 개관하려고 한다.

 

 

 

그림1-1 서아시아의 지도

 

 

 

서아시아는 유라시아 대륙 서부의 중위도 지방에 위치하고, 그 지형은 매우 기복이 많다(그림1-1). 레반트 지방(지중해 연안)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대지구대에 이어진 사해 지구대라고 부르는 깊은 골짜기 지형을 볼 수 있다. 이 지구대를 따라서 레바논 산맥 등의 1000-3000미터급의 산들이 남북으로 이어진다. 북부로 눈을 돌리면 아나톨리아부터 이란에 걸쳐서 3000미터급의 산들을 거느리는 타우로스 산맥과 자그로스 산맥이 우뚝 솟는다. 이들 산맥의 앞은 아나톨리아 고원, 아르메니아 고원, 이란 고원 같은 표고 1000미터 안팎의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아나톨리아 남동부를 수원으로 하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는 두 개의 큰강이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간다. 이 두 큰강에 의하여 형성된 충적평야가 메소포타미아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서아시아의 내륙부,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에는 광대한 사막이 펼쳐진다.

 

이러한 기복이 많은 지형은 다양한 기후를 만들어낸다. 레반트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적은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이고, 강우량도 연평균 600밀리미터 안팎에 이른다. 이에 반하여 내륙부는 기온의일교차가 크고, 강우량도 매우 적은 사막 기후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경관이 다채로운 동식물상을 만들어내는 바탕이 되었다. 서아시아에는 사람들이 재배화, 가축화하게 되는 동식물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 장에서 다루는 서아시아의 시대 호칭과 배경에 대해서 간단히 서술하겠다(그림1-2, 그림1-3). 여기에서 관련되는 건 고고학의 용어에서 말하는 구석기시대의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에 걸친 기간으로, 대략 기원전 12000년부터 기원전 6000년 무렵까지의 기간이다. 이것은 지질학에서 말하는 갱신세의 말부터 완신세의 초 무렵에 상당한다.

 

 

그림1-2 서아시아, 레반트 지방의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의 편년

 

 

 

 

그림1-3 본문에서 언급한 신석기시대 유적의 위치

 

 

 

구석기시대 말기(기원전 12500-10000년)의 서아시아에는 레반트 지방의 나투프 문화로 대표되는 정주하는 수렵채집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구석기시대 말기의 사람들은 그 이전의 수렵채집민보다도 정주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그것은 이 문화의 고고학적인 증거, 예를 들면 초석을 사용한 견고한 주거, 식량을 저장하는 구덩이, 주거에 비치된 무거운 석기류의 존재 등으로부터 유추된다. 인구의 증가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떡갈나무와피스타치오로 이루어진 레반트 지방의 산림지대에서는 그때까지는 없는 규모(1000평방킬로미터를 넘는다)의 마을이 출현했다.

 

서아시아 고고학에서는 기원전 1만 년 무렵부터 신석기시대라고 부르는 시대가 된다. 차일드는 신석기시대의 특징으로, 재배식물과 가축의 출현, 마을의 출현, 직업의 시작, 간석기의 사용, 토기의 사용 등을 드는데, 서아시아의 신석기 문화는 토기를 가지지 않는 문화로 발생했다. 토기가 보급된 건, 신석기시대가 시작하고 수천 년 지난 대략 기원전 7000년 무렵의 일이다. 일반적으로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는 토기의 유무를 기준으로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와 토기 신석기시대로 구분된다. 또한 레반트 지방의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는 다시 몇 개의 시기로 세분된다. 오래된 순으로, PPNA기, PPNB전기, PPNB중기, PPNB후기 같은 방식이다(그림1-2).

 

그리고 현재는 신석기시대라고 이야기하면 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하여 식량 생산을 시작한 시대라고 하는 정의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언급하듯이, 농경목축이 탄생한 서아시아에서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곧바로 농경목축에 의존한 사회가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 대부분은 매우 정주적인 마을로 이루어진다. 그 주거는 흙반죽 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하여 지었다. 신석기시대도 후반이 되면 광장과 도로, 공동시설 등을 갖춘 마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을의 시설을 만들 때 동네 구획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유적은 구석기시대의 유적보다 훨씬 크다. 그중에서도 3만 평을 넘는 것은 메가 사이트라고 부르고, 후대의 유적과 비교해도 두드러지게 크다. 만약 유적 전체에 마을이 펼쳐지고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메가 사이트는 읍이라 할 만한 규모의 마을이었다고 할 수있다. 이러한 유적 규모의 대형화는 인구 증가와 특정 마을로 인구가 집중되었다는 걸 나타낼 것이다. 이 시대에는 제사와 의례, 공예, 교역 등 사회의 다방면에 걸친 활동에서 그때까지와는 다른 전개가 발견된다. 이들의 고고학 정보에서 신석기시대에 사회의 복잡화가 급격히 진전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재배식물이 나타나다

 

서아시아는 실로 다양한 식물이 재배화된 지역이다. 밀, 보리, 호밀 등의 맥류를 시작으로, 누에콩, 렌즈콩, 병아리콩 등의 콩류, 포도, 올리브, 아몬드 등 우리에게 친근한 채소와 과일이 이 땅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최초로 재배화된 식물로 맥류와 콩류가 있다.

 

농경의 기원을 찾으려면 물론 유적에서 출토되는 식물 유존체(탄화물이 많음)의 연구가 가장 중요한 정보원이다.이러한 식물 유존체를 대상으로 하는 고고식물학의 연구에 의하여 재배 맥류의 기원지와 맥류 농경의 기원에 대해서 최근 눈부신 성과를 올리고 있다. 재배 맥류의 기원지가 서아시아에 있다는 건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지만, 언제, 어디에서라는 물음에 대하여 최근의 연구는 더욱 상세하게 답하고 있다(丹野 2008).

 

서아시아에서 맥류의 재배화는 언제쯤 시작되었을까? 예전에는 신석기시대의 개시와 함께 농경이 사작되었다고 하여, PPNA기의 유적에서 재배 맥류가 출토된다고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PPNA기의 맥류를 정성껏 조사해 보면, 재배 맥류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밝혀졌다. 재배 맥류가 출토되기 시작한 건 신석기시대가 되고 1000년 이상 경과한 기원전 8500년 무렵(PPNB 전기)의 유적에서이다.

 

다음으로 맥류가 재배화된 지역을 살펴보자. 지금까지 행한 연구에서 레반트 지방이 그 유력한 후보지라고 알려져 왔다. 이 지방에서 신석기시대에 재배화된 맥류에는 일립밀, 엠머밀(그림1-4), 보리 등이 있다.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맥류를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출토된 맥류의 종류는 지역에 따라서 다른 경향이 있으며, 각각의 종류가 각지에서 재배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Willcox 2005). 즉, 재배 맥류의 기원지는 단일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립밀은 레반트 지방에서도 북부(터키 남동부와 시리아 북부)의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데, 남부(요르단과 팔레스타인)에서 출토된 건 거의 없다. 이것은 이 맥류 본래의 자연분포가 레반트 북부에 있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일립밀은 터키 남동부에 자생하고 있다(그림1-5). 최근의 DNA 연구에 의해서도 고고학적 자료를 증명하듯이, 일립밀의 기원지는 터키 남동부에 있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림1-4 시리아 북서부 케르크Kerkh  유적(토기 신석기 시기) 출토의 엠머밀

 

 

 

그림1-5 터키 남동부에 자생하는 야생 일립밀

 

 

 

 

언제, 어디에서 맥류가 재배화되었는지 하는 기원지의 문제와 함께, 어떻게 맥류 농경이 정착되어 갔는지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단노丹野와 윌콕스는 신석기시대의 다른 시기의 유적을 대상으로 출토된 맥류의 야생형과 재배형의 비율을 검토했다(Tanno and Willcox 2006a). 그에 의하면, 신석기시대의 전반(기원전 8500년 무렵)에 나타난 재배 맥류는 곧바로 야생 맥류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재배형이 야생형보다 우세해지는 데 3000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비교적 단기간(수십 년부터 수백 년)에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던 야생형에서 재배형으로의 치환이 매우 서서히 진행되었다는 견해는 흥미롭다.

 

콩류의 재배화에 대해서는 맥류만큼 분명하지는 않다. 적어도 PPNB전기에는 시리아와 터키에서 이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시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케르크 유적에서는 병아리콩과 누에콩이 대량으로 출토되어, 이 종의 콩에 대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례의 하나가 되었다(Tanno and Willcox 2006b). 또한 터키 남동부의 네발리 코리Nevalı Çori 유적에서는 출토된 인골에 포함된 탄소와 질소의 안정동위체를 조사한 바, 질소안정동위대비(δ15N)이 매우 낮고, 렌즈콩 등의 콩류를 상당히 소비했다는 것이 추측되다(Lösch 외. 2006).

 

 

 

 

도구에서 본 농경의 시작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맥류의 재배와 가공에 관련된 도구(유물)와 설비(유구)가 자주 발견된다. 이와 같은 맥류 농경에 관련된 유물과 유구에서도 맥류 농경의 정착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을 앞에서 기술한 식물 유존체의 연구와 비교함으로써 농경의 시초가 어떠했는지 그 실상에 더욱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맥류 농경에 관련된 도구로는 토지를 갈아엎는 경기용과 수확용 도구 등이 있다. 경기용 도구에 대해서는 우리가그것을 알 법한 유물은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것은 드물고, 존재했는지 어떤지 불분명하다. 수확용 도구에는 서아시아의 선사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낫날이라 불리는 석기가 있다(그림1-6). 이 석기는 벼과 등의 식물을 베는 데 사용하고, 날 부분에 벼과 식물을 자를 때 붙는 규소 성분에 의한 광택을 볼 수 있다. 통상은 목제와 골제의 자루에 하나 내지 여러 개를 장착해 사용했다. 낫날과 자루의 장착에는 비튜멘(천연 아스팔트)과 나뭇진 등이 접착제로 사용되었다. 

그림1-6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낫날.
① 와디 헤메

Wadi 27호 유적 출토(Edwards 1991: Fig. 12에서)

② 할룰라

Halula 유적 출토(Ferran Borrell 씨 제공)

③ 무레이베트

Mureybet 유적 출토의 석회암제 낫의 자루(Anderson-Gefaud 외. 1991: Fig. 6에서)

④ 복제된 플린트로 만든 낫날을 장착한 석회암제 자루(

Anderson-Gefaud 외. 1991: Fig. 6에서)






수확된 맥류 이삭에서 씨앗을 얻을 때는 이삭에서 잔이삭을 분리하는 탈곡과 각각의 잔이삭에서 알곡을 골라내 씨앗을 얻는 매조미 같은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에 이용된 일립밀과 엠머밀 등 옛 유형의 밀은 탈곡이 어려운 성질이라 씨앗을 골라내기까지 탈곡과 매조미라는 작업에 수고를 들여야 한다. 탈곡과 매조미에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도구에 절구가 있다. 절구는 바리 모양의 돌절구와 돌공이의 묶음으로 이루어지고, 공이를 위아래로 움직여서 사용한다(그림1-7-①, 그림1-7-②).

그림1-7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돌절구① ② 나투프

Natuf 문화의 돌절구와 돌공이(BarYosef 1983: Fig. 5에서)

③ ④ 신석기 문화의 갈판과 갈돌(아부 고쉬Abu Ghosh 유적 출토, Khalaily and Marder 2003: Fig. 6. 1.에서)

⑤ ⑥ 신석기 문화의 안장형 갈판(saddle quern)과 갈돌(케르크 유적 출토, Yoshizawa 2003: Fig. 43에서)

 

 

 

그리고 이러한 씨앗을 골라내 결국 먹을 수 있게 되는데,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맥류를먹었는지 증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서아시아의 역사시대와 현대의 사례에서 생각하면, 아마 신석기시대에 빵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빵 이외의 먹는 법으로 볶은밀이나 죽으로 먹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지만, 서아시아에서는 증거가 없다. 밀을 가루로 내려면 돌절구가 필요하다. 서아시아에서 사용된 돌절구에는 앞에 기술한 절구에 더하여 맷돌도 있었다. 맷돌은 평평한 면을 가진 갈판과 그 위에 얹는 갈돌의 묶음으로 이루어져, 갈돌을 갈판 위에서 전후좌우로 움직여서 사용한다(그림1-7-③, 그림1-7-④). 이렇게 만든 밀가루에서 빵을 만들 수 있는데,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는 빵 그것의 출토 사례는 거의 없다. 상상하기에, 현재의 서아시아에서 먹고 있는 것 같은, 얇은 무발효 빵이었지 않을까? 빵을 굽는다고 한다면 달군 돌이나 가마 같은 설비가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도구와 설비가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에 걸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아래에 그 발달사를 개관해보자.


구석기시대 말기
우선 맥류 농경 관련 도구의 발달사에서 중요하고 새로운 기원을 여는 시기가 되는 건 구석기시대 말기(기원전 12500-10000년)이다. 맥류의 수확을 보여주는 낫날, 매조미와 제분에 사용된 돌절구와 갈판 등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낫날은 구석기시대 말기의 나투프 문화에서 증가한다. 낫날의 대부분은 길이 2-3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돌조각을, 동물의 뼈와 뿔을 이용한 자루에 여러 개, 한 줄 드물게 두 줄로 줄지어 장착했다(그림1-6-①). 나투프 문화의 유적에서는 낫의 자루가 비교적 많이 출토되고, 그 대부분은 길이 30센티미터 정도의 직선 낫이다. 구석기시대 말기의 유적에서는 아직 맥류의 재배종은 출토되지 않았기에, 이들 낫은 야생종의 수확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낫날에 남은 사용흔의 분석에서도 추측되고 있다. 
절구(돌절구, 돌공이)도 낫날과 똑같이, 나투프 문화에서 많이 만들어졌다(그림1-7-①, 그림1-7-②). 절구는 나투프 문화에서 제작된 간석기 중에서 주류의 도구이며, 깊이 몇십 센티미터나 되는 거대한 돌절구가 자주 제작되었다. 이러한 절구는 맥류의 탈곡, 매조미, 제분에 사용된다. 절구에 비하여 수는 많지 않지만, 맷돌(갈판, 갈돌)도 구석기시대 말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들 절구와 맷돌은 용도가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석기를 제작하여 사용한 실험에 의하면, 절구의 장점은 제분 작업보다 매조미이며 제분 작업에 더 적합한 도구는 맷돌 쪽인 것 같다. 물론 맷돌이 언제나 맥류의 제분에 사용되었을 리는 없고, 콩류를 시작으로 다른 식물의 제분, 그리고 안료의 제작에도 종종 사용되었음은 틀림이 없지만, 구석기시대 말기의 맷돌의 사용흔과 잔재를 분석해 보면,이 시대에 맷돌을 사용한 맥류의 제분이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Dubreuil 2004). 구석기시대 말기에 곧바로 맥류의 탈곡, 매조미와 제분 작업이 절구와 맷돌 같은 도구로 분화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석기시대 말기에 나타난 낫날과 돌절구의 존재는 이 시기에 그때까지와 비교하여 훨씬 맥류 이용이 활발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일은 뒤따르는 신석기시대에 맥류 농경이 시작된 점을 생각하면, 맥류 농경 개시 직전의 모습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생각된다. 그러나 식물 유존체의 분석 결과에 의하면,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 초 무렵에 걸쳐서 맥류 이용이 활발해졌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Savard 외. 2006). 오히려 맥류는 이 시기 대부분의 유적에서 양적으로 제한되며, 콩류와 견과류 등 다양한 식물을 이용하는 상태가 일반적인 듯하다. 이처럼 도구와 식물 유존체의 정보를 맞추면 맥류는 구석기시대 말기에 먹을거리의 한 날개를 담당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중요한 식량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에 들어가면 맥류 농경과 관련된 도구에 변화가 보이고, 또 새로운 유형의 도구가 나타난다.
먼저 눈에 띄는 변화로, 맥류의 수확을 보여주는 낫날의 증가를 들 수 있다(그림1-8). 앞에 기술했듯이, 낫날은 구석기시대 말기에는 곧바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석기 가운데 점하는 비율은 약 2-3%로 높지 않다. 신석기시대 초 무렵에는 점점 증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큰 변화는 아니다. 뚜렷한 변화가 발견되는 건 PPNB중기부터이다.석기 가운데 10-20%를 점하는 데까지 증가한다.

그림1-8 레반트 지방의 유적에서 낫날의 수량 변화와 낫의 형태 변화. Sayej 2004 등에서.


낫의 형태 변화에 대해서 통시적으로 검토해 보면, 신석기시대 전반(PPNA기-PPNB전기)에서는 구석기시대 말기와 마찬가지로, 낫날이 여러 개 장착된 직선 낫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큰 돌조각을 한 개체로 활용하여 칼처럼 사용한 것도 있었다. 석기를 그대로 손에 쥐든지, 또는 석기에 손잡이를 붙이든지 하여 사용했던 듯하다. 드문 사례이지만, 유프라테스 강가의 무레이베트 유적에서는 수확 칼의 자루라고 생각되는 석회암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그림1-6-③, 그림1-6-④). PPNB중기가 되면 활처럼 굽은 낫이 사용되기 시작한다(그림1-6-②).
이 직선에서 활처럼 굽은 모양으로 낫의 형태가 변화한 건 중요하며(그림1-8), 아마 수확 작업의 효율화에 연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직선 낫은 한 손으로 이삭을 모아 이삭 다발을 비벼서 자르는, 또는 낫을 대는 도구로 삼아 꺾어 거두는 식으로 사용한다. 한편, 활처럼 굽은 낫은 이삭을 모아서 베어 거둘 수 있고, 직선 낫에 비하여 수확 속도가 높아 짧은 시간에 더 많이 수확할 수 있다. 현대의 철제 낫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활처럼 굽은 낫은 베어 거두는 작업에 매우 적당한 형태이다. 또한 활처럼 굽은 낫이 출현한 배경에, 당시의 석기 제작기술의 발달이 있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원석에서 길이 10센티미터 정도의 규격성이 높은 돌날을 연속하여 벗겨내는 기술이 발달했다. 이리하여 제작된 돌날을 그대로든지, 또는 적당한 길이로 정돈하여 분할한 것(그림1-9)을 장착하여 더 간단하게 칼날의 길이가 긴 활처럼 굽은 낫을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림1-9 시리아 케르크 유적(PPNB 후기) 출토의 낫날



그 한쪽에서 탈곡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유형의 도구가 발달되고 있다. 하나는 염소와 양의견갑골을 이용한 도구이다(그림1-10). 견갑골의 얇고 평평한 부분을 깎아서 두 갈래로 가공하고, 그 안쪽에 몇 개의 홈을 새긴다. 한 다발의 이삭을 두 갈래의 사이에 통과시키면 잔이삭이 홈에 걸려 탈곡되는 구조이다. 이 홈과 그 주변에 광택과 선상흔 등 이삭 다발을 통과시킬 때 닿았다고 생각되는 흔적이 관찰되었다. 유례는 적지만, 재미난 발명품이다.

그림1-10 골제 탈곡 도구. Stordeur and AndersonGerfaud 1985: Fig 2, 4, 8에서.
간즈 다르흐

Ganj Dareh 유적 출토 유물(좌)와 추정되는 그 사용방법(우)

 

 

 

또 하나, 탈곡 썰매라는 도구가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지중해 세계의 각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도구이다. 보통 길이 1.5미터 안팎의 목제 썰매이고, 그 뒷면에 돌과 철제 날이 박혀 있다(그림1-11). 이 썰매를 수확한 맥류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서 동물에게 끌게 하면, 썰매의 무게(썰매 위에 사람이나 무거운 걸 올림)도 더해져 상당한 마찰이 썰매와 이삭 사이에 일어나 탈곡이 이루어진다. 또 이 방법에서는 탈곡만이 아니라 동시에 맥류의 짚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도 특별히 적는다. 맥류의 짚은 가축의 먹이와 햇볕에 말리는 벽돌을 만들 때 혼합물 등에 사용된다. 똑같은 도구는 고대의 서아시아에서도 사용되었다. P. 앤더슨Anderson 씨의 일련의 연구에 의하면, 탈곡 썰매의 이용은 확실히 청동기시대 전기(기원전 3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Anderson 2000 등).이 시대의 유적에서 탈곡 썰매에 장착된 석기가 자주 발견된다. 앤더슨에 의하면, 이런 유의 탈곡 썰매에 장착된 석기는 신석기시대의 유적(기원전 8000년대 후반부터 7000년대 전반의 유적)에서도 출토되며, 탈곡 썰매의 사용은 신석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신석기시대가 되어 대규모로 탈곡 작업하는 듯한 규모의농경이나, 또는 건축재와 토기의 바탕흙에 끈지게 하는 재료로 섞는 등 맥류 짚의 적극적인 이용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탈곡 썰매가 신석기시대에 곧바로 등장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림1-11 현재 튀니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탈곡 썰매. Patricia Anderson 씨 제공.

 

 

그리고 탈곡, 매조미, 제분의 도구인 돌절구에서 변화는 발견할 수 있을까? 이미 많은 연구자가 지적하듯이, 신석기시대가 되면 절구(돌절구, 돌공이)가 감소하고, 대신에 맷돌(갈판, 갈돌)이 증가한다(그림1-7-③, ④). 맷돌은제분에 적합한 도구이기에, 신석기시대가 되어 맥류의 제분이 활발해졌음을 상정할 수 있다. 다만, 여전히 안료의 제작에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갈판도 많이 발견되기에, PPNB전기까지의 맷돌은 다목적 제분 도구로 이용된것이 많았을 것이다. 맥류의 제분에 특화된 도구라고 생각되는 건 안장형 갈판이다. 갈판에 비교하여 대형이고, 가늘고 긴 윗돌(갈돌)을 두 손으로 잡고 체중을 실어서 앞뒤로 움직여 효율적인 제분을 행한다. 그 가장 오래된 건 구석기시대 말기에 출현하고, PPNA기에 이미 대부분의 유적에서 발견된다(그림1-12). PPNA기에는 아직 재배 맥류가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의 안장형 갈판은 야생 맥류의 제분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PPNB중기부터 후기에 걸쳐서 대부분의 유적에서 일반적이게 된다(그림1-7-⑤, 그림1-7-⑥). 이 뒤, 안장형 갈판은 회전 갈판이 출현하기까지 오랫동안 제분 도구의 주역이었다. 신석기시대에 보급된 안장형 갈판이 얼마나 제분 도구로서 완성도가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그림1-12 시리아 와디 툼바크(PPNA기) 출토의 안장형 갈판과 갈돌(화살표). 

Frédéric Abbès 씨 제공.





빵을 굽는 설비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까? 빵 굽는 가마라고 보이는 유구가 나타난 건 PPNB 중기이며(舟田 1998, 藤本 2007), 유례가 늘어나는 건 토기 신석기시대가 되고 나서로 더욱 늦다. 이들의 대부분은 돔 모양의 상부구조를 가진 가마로서 현대의 서아시아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며, 아마 지금과 마찬가지로 가마의 내벽에 빵을 붙여서 구웠을 것이다. 또, 빵을 굽는 다른 방법으로 숯불을 이용한 땅을 옴폭 판 화로가 사용되었을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田 1998, 藤本 2006). 이와 같은 땅을 판 화로는 구석기시대 말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견도 있다. 빵을 먹는다고 하는 문화 그것은, 오랜 옛날 맥류 이용의 개시와 함께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에 걸쳐서, 맥류 농경에 관련된 도구와 설비의 변천을 좇아 왔다. 낫날과 돌절구는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출현하며, 맥류 이용이 조금씩이지만 이 무렵부터 활발해졌단 것을 보여준다. 
맥류의 재배와 이용에 관한 다양한 도구, 설비가 시대의 추이와 함께 증가, 출현 또는 충실해지는 걸 생각하면, PPNB 중기부터 후기(기원전 8000-7000년) 즈음을 맥류 농경이 정착한 시기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도구와 설비의 발달사에서 얻을 수 있는 견해는 앞에 기술한 야생 맥류에서 재배 맥류로 이행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단노와 윌콕스의 설에 긍정적이다.


동물의 가축화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농경문화의 다른 하나의 중요한 측면에 동물 사육의 시작이 있다. 서아시아 원산의 동물에는 양, 염소, 말, 돼지, 낙타(단봉)이 있다. 낙타를 제외한 다른 4종의 우제류는 모두 신석기시대에 가축화되었다.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우리의 생활이 이들 가축이 생산해 내는 자원에 의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들 동물이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에 가축화된 의의는 크다.
위에 4종의 우제류보다 전에 가축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동물에 개와 고양이가 있다. 개는 구석기시대 말기의 나투프 문화에서 몇 가지 사례가 알려져 있다. 모두 사람의 매장에 동반하여 발견된 것으로, 사람과 개의 특별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고양이의 사례는 최근 고양이의 기원을 새롭게 하는 발견으로 화제가 되었던, 신석기시대 초 무렵의 키프로스섬에 있다(Vigne 외. 2004). 이 섬의 실로로캄보스

Shillourokambos 유적에서 기원전 8천 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양이의 매장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반려동물 고양이의 사례이며, 고양이의 사육이 신석기시대의 서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최근의 DNA 연구에 의해서도 고양이의 기원이 서아시아에 있다고 한다.

 

서아시아에서 우제류를 가축화한 기원은 재배식물의 기원에 비교해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우제류에서 최초로 가축화된 것이 염소, 양이며, 그것은 터키와 이라크의 산간지대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이것에 조금 뒤늦게 소와 돼지가 가축화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또한 동물의 가축화는 시간적으로 식물의 재배화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석기시대의 후반(기원전 7500-6000년 무렵)에 걸쳐서 일어났던 일이라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통설은 최근의 키프로스섬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에 의해 재고하게 되었다(Peltenbeurg and Wasse 2004 등). 지중해에 떠 있는 이 섬에서는 기원전 85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실로로캄보스, 미로크티아 등)이 발견되어, 그곳에서 원래부터 섬에 생식하지 않는 소, 염소, 양, 돼지, 사슴 등의 동물뼈가 출토되었다. 이들은 분명히 육지(레반트나 아나톨리아)에서 가지고 들어온 것이며, 가축화된 동물이 일거에 섬으로 데려왔다는 신석기시대판 '노아의 방주'로 평가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발견된 동물에 명료한 가축화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점, 사슴 등 끝까지 가축화되지 않았던 동물이 포함되어 있는 점 등에서, 키프로스섬에 데려온 동물은 야생동물이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다. 왜 야생동물을 섬에 데려왔을까 하는 물음에 답하는 건 어렵지만, 섬을 방문한 사람들이 식량원 또는 상징적 의미로 동물을 섬에 풀어놓고, 그것을 수렵했다는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키프로스섬에서 발견된 동물군이 야생이었는지 가축이었는지 하는 문제를 일단 차치하더라도, 이들 동물이 육지에서 데려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시대의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나타내고도 있다. 기존의 생각과 달리, 신석기시대의 전반에 벌써 동물의 가축화가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검토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레반트 북부의 PPNB전기의 동물뼈를 상세하게 분석해 보면, 몇 곳의 유적에서 크기의 축소화, 성별의 편중 등이 확인된다고한다(Peters 외. 1999). 최근에는 터키 남동부에서 양과 염소의 가축화, 시리아와 유프라테스강 중류 지역에서 소의 가축화 등, 최초로 우제류를 가축화한 것은 PPNB 전기의 레반트 북부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견해가 계속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면 가축화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가축화의 과정을 검토하려면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 조성의 변화를 보는 게 유효하다. 그림1-13은 레반트 남부의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PPNB기에 걸친 동물 조성의 변천이다.  이것을 보면, 구석기시대 말기(나투프 시기)부터 신석기시대 초 무렵(PPNA기)에 걸쳐서 압도적으로 많은 건 야생동물인 가젤이다. 그러나 PPNB기가 되면 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양과 염소가 점하는 비율이 급증하는 것이다.
그림1-13 레반트 남부의 나투프 시기부터 PPNB기까지 동물상의 변천. Bar-Yosef 1998: Fig. 8에서


PPNB기에 동물상의 변화는 어떠했을까? 그림1-14는 레반트 북부와 키프로스섬의 PPNB기에 동물상의 변천을 정리한 그래프이다. 이 그래프에 의하면, PPNB전기 10-20% 정도였던 가축이 서서히 증가해, PPNB 후기에는 그 점하는 비율이 80-90%에 이르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1-14 PPNB기의 야생종과 가축종의 비율 변천. 

야생; 가젤, 사슴, 야생 염소 등. 가축; 염소, 양, 소, 돼지Machecoul 외 2008: 그림5에서

 

 

 

터키 남동부에 위치하는 차요누

Çayönü 유적에서는 가축화의 과정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本鄕 2002). 이 유적은 PPNA기부터 토기 신석기에 이르는 오랜 기간 거주한 유적으로, 한 유적에서 통시적으로 가축화의 과정을 검토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동물 조성의 변화가 관찰되었다. 가축화되는 염소, 양, 소, 돼지 4종이 거주 기간을 거치며 서서히 증가해 나아가는 경향이 발견되고, 특히 염소와 양은 PPNB 후반부터 PN이 되면 출토되는동물뼈의 절반을 넘을 정도로 늘어난다. 가축화의 지표가 되는 크기의 축소화, 사망연령 구성의 변화에 대해서는먼저 PPNB 중기 무렵에 그 특징이 보이기 시작해, PPNB기가 끝날 무렵에는 뚜렷해진다. 차요누 유적의 성과로중요한 건 가축화가 단기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서 1천 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서 천천히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레반트 지방의 동물뼈 분석에서는 이하와 같은 가축화의 시나리오가 그려질 것이다. 먼저 PPNB 전기까지 어느 정도 염소와 양, 소 등의 우제류의 관리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 시기의 몇 곳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동물뼈크기의 축소화와 성비 편중에서 추측된다. 그러나 가축종은 급속히 늘어나지는 않았다. 출토된 동물뼈의 조성에 나타나듯이(그림1-14), PPNB 중기까지 가젤 등의 야생동물이 점하는 비율은 여전히 높고, 염소와 양을 중심으로 하는 가축의 비율이 높아진 건 PPNB 후기부터이다. 차요누 유적에서 분명해지듯이, 야생종에서 가축종으로 이행한 것도 맥류의 재배화와 똑같이 오랜 시간이 걸린 완만한 변화이며, 가축을 사양하는 일이 주요한 생업이 된 것은 PPNB 후기 이후의 일이라 생각한다.



유물이 말하는 가축화
맥류의 재배와 이용이 다양한 도구, 설비를 필요로 하며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유물과 유구가 비교적 풍부한 데비하여, 가축 사육에 관련된 유물과 유구는 거의 없다. 그 때문에 동물뼈 이외에서 가축화의 과정을 탐색하는 건 어렵지만 그 시도를 두 가지 정도 들어보겠다.


찌르개(尖頭器)의 변천


하나는 수렵 도구인 찌르개(창날, 화살촉)의 변천에서 간접적으로 가축화를 검토하는 시도이다.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찌르개가 제작되었다. 이들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 형태와 제작방법에 차이가 발견되기 때문에 편년을 위한 시기 구분과 지역 문화를 설정할 때 지표가 되고 있다. 
신석기시대를 거치며 찌르개의 중요한 변화로 대형화가 있다. 그림1-15는 시리아 북서부 케르크 유적의 사례이다. PPNB전기(그림1-15-①)의 것은 길이 5센티미터, 너비 1.5센티미터 정도의 것이 많고, 아마 화살촉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상정된다. 이것이 토기 신석기 시기(그림1-15-②)가 되면 길이 10센티미터, 너비 2센터미터 정도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두께도 1센티미터 정도의 두꺼운 것이 많다. 그 크기로부터 창날로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림1-15 시리아 케르크 유적 출토의 찌르개
①PPNB 전기 ②토기 신석기 시기


크기의 변화 이외에도 가공(수정)의 방식에도 변화가 발견된다. PPNB 전기의 찌르개는 끝, 가장자리, 밑 부분으로 한정된 부분에 가공이 이루어진다(그림1-15-①). 끝은 튀어나와 찌르는 부분이기에 날카롭도록 가공한다. 가장자리 부분의 가공은 멀리서 공격하는 무기로서 빼놓을 수 없는 석기의 모양을 좌우대칭으로 모양을 가지런히 할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밑 부분의 가공은 자루 부분과 장착하는 것에 관련된다. 이와 같은 가공의 방식은 찌르개의 기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토기 신석기 시기의 찌르개는 가공된 부분이 매우 많다. 그림1-15-②에서는 찌르개 하반분의 전면에 가공이 이루어진다. 그림1-16은 거의 같은 시기의 시리아 크데일 유적에서 발견된 찌르개이다. 압압떼기(

押壓剝離)라는 기법으로 행해진 가공은 석기의 한 면 전체를 뒤덮고 있다. 가공의 의미가 기능적인 것에서 장식적인 것으로 변화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림1-16 시리아 크데일 유적(PPNB 종말기) 출토의 찌르개. Frédéric Abbès 씨 제공.

 




한편 그 수량에 대해서도 변화가 발견된다. 유적에서 제작된 찌르개의 수량이 감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찌르개가감소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유적(또는 지역)에 따라서 차이를 보인다. 이 현상은 빠른 유적에서는 PPNB 후기부터 시작되지만, 시리아 북서부 등에서는 토기 신석기 시기의 중반부터 후반(기원전 7000년대)으로 상당히 늦다.그 시초에 대해서는 유적에 따라서 시기차가 발견되기는 하지만, 대체로 찌르개의 감소는 PPNB 후기부터 토기 신석기 시기(기원전 8000년대 후반부터 기원전 7000년대)에 걸쳐서 레반트 지방 전역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신석기시대를 거치며 일어난 찌르개의 변화는 대형화, 가공도의 증가, 수량의 감소라는 세 가지로 정리할수 있다. 대형화에 대해서는 PPNA기부터 PPNB기에 걸쳐서 서서히 진행되는 경향을 볼 수 있고, PPNB 중기에 돌날 제작기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그때까지 없던 너비가 넓고 두꺼운 대형 찌르개가 등장한다. 가공에 대해서는 PPNB 후기 이후 그 정도가 늘어난다. 그리고 수량의 감소는 PPNB 후기부터 토기 신석기 시기에 걸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상의 찌르개에서 볼 수 있는 변화를 통시적으로 정리하면, PPNB 중기까지 대형화되고 있던 찌르개가 PPNB 후기 이후 차츰 만들지 못하게 됨에 따라 기능적인 이유를 넘어서 과도하게 가공되는 것처럼 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찌르개의 변화 상태는 수렵도구인 찌르개의 상징적, 경제적인 사정이 변화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시기적으로 보아도 PPNB 후기 이후의 야생동물의 수렵에서 가축 사육으로 동물 자원의 비중이 이동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동물 표현
유물에서 가축화의 추이를 탐색하는 다른 하나의 시도는 조각과 조형에서 보는 동물 표현의 변천에 주목한 연구이다(Helmer 외. 2004). 

그림1-17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에 동물 표현의 변천. Helmer 외. 2004:tableau 2에서.

 

 

 

 

그림1-17은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에 표현되어 있는 동물의 변천에 대하여 정리한 것이다. 신석기시대 전반(PPNA기-PPNB전기)에는 표현되는 동물은 소, 고양이과의 동물, 새, 뱀 등 변화가 풍부하다. 이 시대, 동물 표현으로서 석제의 우상과 돌에 묘사한 선각화 등이 있는데, 그와 같은 조형물이 수없이 발견된 유적에 터키 남동부의 괴베클리

Göbekli 유적이 있다. 이 유적에서는 원형 또는 직사각형의 제사용이라 생각되는 건물이 한데 모여 발견되었는데, 이들 건물에는 몇 개의 T자 모양 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다. 기둥은 바위 하나를 가공하여 만들었고, 그 크기는 큰것은 높이 5미터, 무게 10톤이나 된다. 팔레스티나의 예리코에서 발견된 '타와'와 비교되는, 서아시아의 초기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거석 기념물이다. 인식된 동물은 10종류에 이르고, 특히 뱀과 여우, 멧돼지 등이빈번하게 묘사된다(Peters and Schmidt 2004). 그림1-18은 T자 모양 돌기둥의 한 예로, 측면에 소, 여우, 학 세마리가 표현되어 있다. 또한 다른 면에는 소의 머리라고 생각되는 표현도 있다. 중요한 건 이와 같은 T자 모양 돌기둥에 표현된 동물종의 대부분이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뼈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식량 또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획득된 동물이 T자 모양 돌기둥에 묘사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림1-18 터키 괴베클리 유적에서 발견된 T자 모양 돌기둥. Cauvin 2000: Fig. 70에서.

 

 

 

이처럼 신석기시대 전반에 발견된 동물 표현의 다양성은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사라져 간다. PPNB 중기 이후 염소, 양 등의 가축을 표현했다고 생각되는 포유동물의 조형이 많아진다. 특히 늘어난 건 이들 동물을 표현한 토우이다. 그림1-19는 터키 아칼차이 테페アカルチャイ・テペ 유적(PPNB 중기)에서 출토된 양 모양 토우인데, 이것에서 볼 수 있듯이 손바닥에 들어갈 듯한 크기로 만들었다.

 

 

그림1-19 터키 아칼차이 테페 유적 출토의 양 모양 토우

 

 

 

이와 같이 통시적으로 보면, PPNB 중기 무렵부터 표현의 대상이 되는 동물이 사람들이 포획했던 다양한 야생동물에서 가축으로 옮겨가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동물 표현의 변화에서 간파할 수 있는 건 신석기시대 후반이 되면 가축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역시 PPNB 후기 이후에 가축 사육이 본격화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농경목축 문화의 정착과 그 이후

 


여기까지 최근의 동식물 유존체의 성과와 그에 관련된 고고유물을 다루어서 식물의 재배화와 동물의 가축화 과정에 대하여 생각했다. 재배화와 가축화는 모두, 신석기시대 최초의 무렵이 아니라, 조금 시간이 경과한 PPNB 전기에 레반트 북부에서 그 최초의 징후가 발견된다. 그러나 농경목축에 강하게 의존하는 듯한 사회가 탄생한 건 PPNB 후기 이후의 일이며, 최초의 재배화와 가축화가 일어나고 나서 100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재배화와 가축화의 실태란, '신석기 혁명'이라는 명칭에서 상상되는 것처럼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완만한 이행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그림1-20). 이것은 오랫동안 계속해 왔던 수렵채집생활을 그만두고 전례가 없는 생활양식을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니며, 신석기화의 과정은 다양한 시행착오의 반복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1-20 서아시아의 신석기화 개념도



요동치는 영거 드라이아스 시기라는 설
재배화와 가축화에 관한 의문 가운데 가장 답하기가 어려운 건 '왜'라는 물음일 것이다. 농경의 기원에 대하여 요새 20년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설은 이 책 제2장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영거 드라이아스기(기원전 1만1000-기원전 1만 년 무렵)에 일어났던 기후가 다시 한랭해진 영향을 주요한 요인이라 하는 것이다. 이 설에서는 구석기시대 말기에 원래 맥류의 이용을 시작했던 나투프 문화의 사람들이 영거 드라이아스기의 한랭화가 원인이 되어식물자원의 감소에 직면하고, 그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서 맥류로 확 기울어져, 그것이 재배화로 이어졌다고 한다.그러나 앞에 언급했듯이 맥류의 재배화는 매우 천천히 진행되었고, 또 가장 오래된 재배종이 출토된 것도 영거 드라이아스기에 상당하는 구석기시대 말기는 커녕 신석기시대 초반(PPNA기)도 아닌PPNB전기이기 때문이다. 영거 드라이아스기라는 설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점이 많다. 
동물의 가축화에 대해서는 동물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여 가축화된 것이냐는 문제에 직결된다. 적어도 육식만을 목적으로 가축화가 행해졌을 리는 없다고 대부분의 연구자가 지적해 왔다. 그 대신 젖 이용이 그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三宅 1999)과 동물을 소유하는 것에 사회적 의미가 있었다는 설(本鄕 2002, 

Machecoul 외. 2008) 등이 제안되고 있다. 

 

그렇다 치더라도, 왜 농경목축은 구석기시대(갱신세)가 아니라, 신석기시대(완신세)가 되어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왜 서아시아처럼 독자적으로 농경목축이 시작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 있을까? 이 오래되고 새로운 문제는 항상 흥미가 떨어지지 않는 '수수께끼'(

Diamond 2000)이다.

 

 

 

서아시아 초기 농경문화의 그 이후 -기원전 7000년대의 변화
PPNB 후기에 이어진 기원전 7000년대는 마을의 재편기에 해당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PPNB 문화의 붕괴'라고 표현되는 대형 마을의 방기이다. 'PPNB 문화의 붕괴'설에서는 자주 레반트 남부에서 PPNB 후기에 성립된 대형 마을이, 주변 환경의 악화에 의하여 파탄되었다고 이야기된다.
이 설이 최초로 주장된 건 요르단의 아인 가잘 유적의 사례였다(Rollefson and 

Köhler-Rollefson 1989). 이 유적에서는 PPNB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서 마을의 대형화가 발견된다. PPNB 후기까지 3만 평을 넘는 규모로까지 확대된다. PPNB 후기에는 양과 염소의 사육과 보리의 재배 등에 중점을 둔 생업이 행해지고, 이에 더하여 주변의 다양한 야생 동식물도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다음 시기(PPNC기=기원전 7000년대 전반)가 되면 마을 규모가 축소되고, 주거 형태와 석기 제작, 매장 등 여러 방면에서 변화가 발견된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요인으로 PPNB 후기의 인구 증가에 수반한 농지 확대, 염소의 방목, 연료 획득을 목적으로 한 산림벌채 등 마을 주변의 환경에 계속 주었던 압박이 불러온 주변 자원의 고갈이 지적되었다. 아인 가잘 유적과 때를 같이하여 레반트 남부에서는 PPNB 후기의 몇몇 대형 마을(메가 사이트)가 방기되는 것으로부터 'PPNB 문화의 붕괴'가 일어났다고 알려졌다.  'PPNB 문화의 붕괴'는 레반트 지방 일대에서 확인되는 현상인 것처럼 이야기되는 일이 적지 않지만, PPNB 후기부터 토기 신석기 시기에 걸쳐서 존속했던 유적은 수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레반트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대저 신석기시대에 한하지 않고 고대 서아시아에서 수천 년에 걸쳐서 영속되었던 마을과 읍은 대부분이 없다. 다양한 요인으로 수십 년이나 수백 년으로 마을이 방기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마을 방기를 문화 붕괴라고 간주해도 좋을지에도 의문이 남는다. PPNB 후기에 발견되는 마을 방기를 새삼스레 크게 평가할 만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기존의 인류사에 없는 규모로 발달한 PPNB기의 몇몇 대형 마을에서는 그때까지의 수렵채집을 기반으로 하여 농경목축을 도입했던 것으로, 마을 주변의 자연환경을 크게 손상시키는 난개발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주변 자원의 고갈에 대응하여 너무 크게 구성된 마을을 해체하고, 더 소규모 마을로 나누는 형태로 마을 재편이 행해졌을 것이다. 이 기원전 7000년대의 마을 재편도 신석기화의 과정에서 겪은 인간의 시행착오, 환경에 적응하기의 하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외에 기원전 7000년대에 발견되는 중요한 유적 동태의 변화에 농경목축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된 것이 있다.
확산의 방향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서아시아 내륙부의 반건조지대로 확산된 것이다. 기원전 7000년대 전반에 가축인 양과 염소를 동반한 야영지라고 생각되는 유적이 반건조지대에서 출현하기 시작한다. 가축을 동반한 유목민이 등장했던 증거라고 한다. 시리아 내륙부의 크데일 유적은 그러한 최초의 유목민이 남긴 야영지의 하나이다. 동물뼈와 함께 플린트 석기의 제작터가 발견되었다. 건물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지만, 석기와 동물뼈의 면적인 확장을 꼼꼼히 살펴보면 천막이 설치되었다고 생각되는 장소가 추정되었다(그림1-21). 이 유적에서 발견된 동물뼈의 분석에 의하면, 크데일의 사람들은 가축 양을 소유하고, 내륙 초원 지대에서 생식하는가젤 등의 야생동물을 수렵하면서 살아갔다. 매우 조금이지만, 낫날과 곡물이 출토되기 때문에, 맥류의 재배도 행했다고 생각한다. 유목민의 출현은 PPNB 후기에 성립한 초기의 농경 마을에서 탄생한 새로운 과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림1-21 시리아 크데일 유적(PPNB 종말기)에서 유물의 출토 상황도(위)와 크데일 유적에서 사람들의 활동 복원도(아래). 

Frédéric Abbès 씨 제공.

 

 

 


또 하나는 서아시아에 인접한 지역으로 확산된 것이다. 기원전 7000년대를 경계로, 맥류 재배와 염소, 양, 소를 사육하는 생업은 동으로는 유럽으로, 서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더스 방면이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로 퍼져 나갔다. 이 농경목축이 확산되는 실태란 대규모 농민의 이주였거나, 농민과 접촉한 현지의 수렵채집민이 농경목축이란 신기술을 받아들이거나 하는 등 지역에 따라 다양했을 것이라 생각한다(벨우드 2008). 그것은 또한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농경문화가 각지의 풍토에 걸맞게 변용되어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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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대담   유라시아의 풍토와 농경


사사키 타카아키佐々木高明

사토 요우이치로佐藤洋一郞




풍토와 농경


사토; 오늘은 많은 사람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사키 선생에게도 참석해 주셔서 매우 고맙습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빨리 시작하겠습니다. 우리의 연구 프로젝트에서는 농업이란 것을 다시 한번 근본에서부터 생각해보자는 큰 주제의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1만 년 동안의 농업과 환경이란 것이 지금까지 인류에게 본질적으로 어떤 것으로 이어져 왔을까?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앞으로 미래의 농업의 자세,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생각하기 위한 대비를 하고 싶다. 즉, 후속세대의 농업을 어떤 방법으로 하면 좋을지를 고안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좀 역설적인 주제를 내세운 연구 프로젝트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라는 주제이고……


사사키; 매우 선풍적이네요.


사토; 원죄론이란 사고방식이 있어서 대저 농업은 인류에게 나쁜 것이란 사고방식이 있지만, 그렇게 말해 버리면 너무 노골적이라 맛도 정취도 없기에…… 아까 이야기에서는 없었지만 뭐가 어떻게 되면 맛이 없을까, 뒤집어 생각하면 무엇을 어떻게 놔두면 환경과 어느 정도 조화를 꾀할 수 있고, 또는 잘 해내지 않을까 하는 걸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세계의 …… 라고 하더라도 아프리카와 신대륙까지를 포함하여 의론할 만한 힘도 시간도 지금은 없기 때문에, 우선 유라시아에만 주목하여 이야기를 진행하려 생각합니다.


사사키; 일본의 농경을 생각만 해도 유라시아, 즉 유럽부터 아시아에 걸친 대륙과 그 남쪽에 있는 여러 도서의 전체를 시야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역의 1만 년 정도의 역사를 배경으로 고려하면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더구나 미래는 어떻게 내다볼지가 이 <유라시아 농경사> 전체의 문제 같네요. 따라서 오늘은 조금 큰 시야부터 유라시아의 농경사, 농경문화사 같은 전체적 문제를, 프로젝트의 지도자인 귀하를 상대로 하여 생각해 나아가도록 하겠네요.


사토;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시작으로, 한 장의 지도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사사키; 유라시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도네요.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사토; 이것은 독일의 기후학자 W. 쾨펜(1846-1940)이 고안한 '기후 구분도' 등을 바탕으로 작성한 지도입니다. 이 유라시아의 기후도에 와츠지 데츠로(1889-1960)의 <풍토 -인간학의 고찰>에서 문제삼는 세 가지 '풍토'를 기재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본의 남쪽 반부터 중국의 남부, 동남아시아의 대륙부를 지나서 인도의 동부에 걸친 지역이 '계절풍 풍토'. 그 다음에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즉 유럽을 포함한 지역이 와츠지의 말을 빌리면 '목장의 풍토'. 그 다음 그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 '사막의 풍토'. 이 세 가지 정도를 무대로 하여 농경이란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사키; 어쨌든 농경이란 건 기본적으로 식물을 재배하는 것이기에 자연조건의 특색을 배경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기후조건을 고려하는 것이 유라시아의 농경을 생각할 때 대략적인 틀 짜기가 되기에 이 그림이 이번 토론에서는 기본적인 지도라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지금 말씀드렸듯이 쾨펜이라든지 누구든지 좋습니다만, 기후 구분이란 건 전체적으로 추운 곳, 따뜻한 곳, 더운 곳이란 온도 조건과 비가 많은 습윤한 곳과 건조한 곳이란 건습 조건(기타 강수 계절도 있지만) 두 가지를 조합하여 생각합니다.

한편, 와츠지 데츠로라는 철학자가 1927년에 유럽으로 유학을 갔을 때는 배로 쭉 프랑스의 마르세이유까지 갔습니다. 그 길에 인도양과 인도에서는 혹서로,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공기가 매우 건조하다. 그 다음에 유럽에 도착하면 지중해 연안은 매우 환하다. 그렇지만 독일에 가면 그곳은 아주 음울하고, 숲의 세계이다. 그와 같은 인상을 바탕으로 '풍토'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그리고 그 '풍토'가 인간의 존재든지, 문명이든지에 주는 영향을 몸으로 직접 느끼게 되었죠. 그 인상을 바탕으로 <풍토>라는 책을 쓴 것이죠. 위의 지도는 그러한 와츠지 씨의 생각을 배경으로 하면서, 이러한 모습을 크게 나누어 본 것이죠.

그래서 사토 씨, 문제는 지도 안의 굵은 선인데 이건 무엇입니까?


사토; 지도에서 일본 열도의 중앙부부터 중국을 통하여 히말라야 남단을 서쪽으로 이어진 굵은 선 말입니까? 그건 보리의 품종을 구분하는 선입니다. 보리의 이삭을 보십시오(그림4-1). 이건 옛날부터 유라시아에 있는 작물입니다. 보리는 그림의 가장 왼쪽 끝에 있습니다만, 이들을 대학원생에게 그 이름을 말해 보라고 하면 재밌어요. 반 정도는 틀립니다.



그림4-1 유라시아의 주요 곡물. 오른쪽부터 벼, 조, 피, 향모, 기장, 수수, 밀, 보리.



사사키; 요즘 농학부 학생은 반도 모를 거예요. (웃음)


사토; 반 이상 모를 거예요. (웃음) 가장 왼쪽이 밀이고, 오른쪽이 보리입니다. 타카하시 류헤이高橋隆平(1912-1999)라는 선생이 말씀하셨는데, 당시의 말로 '동아시아형' 보리와 '서구형' 보리 두 종류가 있다는 유명한 논문을 1955년에 발표했습니다.


사사키; 오카야마 대학의 선생이셨죠. 확실히 보리의 탈립성을 방지하는 유전자 조합의 연구에서 세계의 보리 품종에 서쪽(W)형과 동쪽(E)형이 있다고 기술되었죠.


사토; 그러한 것을 말하고 계십니다. 여러 보리 품종의 유전적 성질을 조사하면, 몇 가지 성질과 그 유전자의 분포에 지리적인 특이성이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E형의 품종군에만 있는 유전자가 몇 가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찰보리라든지 쌀보리라든지……


사사키; 쌀보리라는 건 보리의 껍집이 잘 떨어지는 것이죠.


사토; 그렇습니다. 반대의 성질인 겉보리에서 종자는 풀 같은 물질로 '겉껍질'에 달라붙어 있는데, 쌀보리에서는 성숙기에 이 풀의 힘이 약해져 종자가 '겉껍질' 안에서 벗겨지듯 떨어집니다. 그래서 익은 이삭을 떨면 버석버석 소리가 나지요. '미숫가루'라든지 '보릿가루'로 쓰는 것이 쌀보리, 보리차로 쓰는 것이 겉보리입니다. 우선 굵은 선의 남동쪽에도 쌀보리 외에 겉보리와 메보리도 존재한다는 걸 주의하세요.


사사키; 유라시아 대륙의 쭉 서쪽부터 북쪽에 걸쳐서가 'W형 보리'의 분포 지역이고, 그 선보다 동쪽이 대략 'E형 보리'가 분포하는 지역이며, 이 선이 계절풍 지역과 건조 지역을 나누고 있는 선에 약간 가까운……


사토; 아뇨, 약간 가깝다기보다는 매우 잘 맞습니다. 잘 찾아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잘 맞습니다. 


사사키; 요컨대 계절풍 지대는 기후가 온난하고 여름에 자주 비가 내리지요. 지도에서는 연간 강수량 400mm 선이 그려져 있네요. 이 400mm 선의 안쪽, 즉 강수량이 그 이하인 지역이 와츠지 씨 식으로 말하면 '사막의 풍토'입니다. 다만 이 지역 전부가 사막은 아니고, 반건조의 초원 지대도 꽤 넓죠. 맥류의 원산지도 이 안에 포함되어 있지요.


사토; 네, 대개 들어 있습니다. 보리와 밀의 원산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부르는 지대로, 이 지도에서는 카스피해의 남부에서 서쪽의 400mm 선을 따라서 겹쳐져 있습니다. 밀 가운데 '보통 밀'이라 부르는 우리가 지금 빵과 라면으로 먹는 밀에 대해서는 여기보다 약간 동쪽, 아나톨리아부터 카스피해의 남안에 해당한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사사키; 400mm 선보다도 서쪽의 '목장의 풍토', 즉 지중해 연안의 지대는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나무가 드문 지대이고, 거기부터 알프스를 넘어 북쪽은 일반적으로는 산림 지대, 구체적으로는 졸참나무와 너도밤나무를 주체로 하는 낙엽광엽수림이네요. 이 산림대는 쭉 유라시아의 북쪽부터 동북아시아까지 뻗어 있지요.


사토; 유라시아의 쭉 북쪽을 타고 그 낙엽광엽수림대는 옛 만주(중국 동북부)와 조선반도 북부를 거쳐 일본 열도의 동북부까지 닿아 있습니다.


사사키; 대충 그렇게 큰 범위 안에서 와츠지 씨가 전혀 문제 삼지 않은 건 동남아시아 섬들의 세계. 와츠지 씨는 그곳에는 가 보지 않았다. 유럽으로 배로 유학을 갈 때 여기는 들르지 않았다.


사토; 아뇨, 들렀죠.


사사키; 뭐, 싱가포르 정도는 들렀을지 모르지만, 섬에는 가지 않았다. 지구연(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의 타치모토立本 소장 등이 조사한 인도네시아 등은 간 적이 없다. (웃음)


사토; 옆은 스쳐 갔을지도요. (웃음)



종자번식과 영양번식


사사키; 그런데 지도에는 동남아시아 대륙부터 도서부에 걸쳐서 큰 원이 있으며 여기에 '뿌리작물 농경의 풍토'라고 적혀 있고, 그 옆으로 '종자번식'과 '영양번식'이란 굵은 녹색의 화살표 사선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조금 설명해 주세요. 


사토; 이건 최근 내가 고안한 축입니다. 갖가지 재배식물이 어디에서 생겼는지 조사해 보면 맥류가 생긴 곳, 맥류는 완전히 한해살이인데 대부분은 가을에 그 종자를 뿌린다. 매우 추운 곳에서는 봄에 종자를 뿌리는 곳도 있습니다. 그렇게 봄에 뿌리면 가을에, 가을에 뿌리면 봄에 꽃이 피어서 종자를 얻을 수 있다. 종자를 얻으면 부모인 식물은 완전히 죽습니다. 맥류만이 아니라 잡곡류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식물을 한해살이 식물이라 부르는데, 이런 식물이 생긴 곳이 유라시아에서는 지도의 왼쪽 윗부분입니다. 


사사키; 위라고 하기보다는 한가운데 왼쪽 부근. '사막'이라는 문자 위에 해당하네요. 그런데 일본어는 편리하여 맥류라 하면 보리도 밀도 모두 포함하지만, 영어 등의 서구어에서는 맥류란 단어는 없지요(표4-1).




잡곡에 관한 이름의 분화

맥류에 관한 이름의 분화

잡곡 농경문화

벼, 조, 수수, 기장, 피 등 종류마다 한자로 표시하는 개별 이름이 있고, 총칭하는 명사가 없다.

맥류란 총칭 명사만 있고, 개별 종류에는 대, 소, 연 등의 형용사를 붙여서 구별한다.

맥류 농경문화

millet이란 총칭 명사만 있고, 개별 종류에는 여우꼬리, 보통, 손가락, 농가 마당 등의 형용사를 붙여서 구별한다.

보리, 밀, 귀리, 호밀 등 종류마다 개별 명칭이 있고, 맥류에 해당하는 총칭 면사가 없다. 

표4-1 잡곡 문화와 맥류 문화에서 작물 이름의 분화. 잡곡 농경문화권의 언어를 중국어, 맥류 농경문화권의 언어를 영어로 대표하여 대비했다.



사토; 없지요. 그런데 최근 저는 무리하게 맥류라고 말하거나 적어 보는데, 이것이 제법 외국인에게 받아들여지네요. (웃음)


사사키; 원래 서구어에는 밀이라든지 보리라든지 호밀이라든지 귀리 등 각각의 개별 식물 이름이 있고, 맥류라는 총칭 명사는 없다.


사토; 그 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이 잡곡이네요. 일본어에서는 피, 기장, 조 등 정확하게 개별 이름이 있는데, 영어 등에서는 개별 이름이 아니라 '밀렛'이라 총칭한다.


사사키; 지금 '맥류'의 산지라고 하는 곳은 밀도 보리도 포함하고 있지요.


사토; 그렇습니다. 아마 귀리 등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과연. 그들은 모두 한해살이이고. 


사토; 종자로 증식한다. 그래서 한해살이라면 부모가 죽어 버린다. 그러한 종류이지요. 그런데 오른쪽 아래의 동남아시아 쪽을 보면……


사사키; 영양번식 식물의 세계이다.


사토; 그렇습니다.


사사키; 영양번식이란 건 어떤 것?


사토; 종자가 아니고 뿌리 나눔이나 포기 나눔 등으로 증식하는 겁니다.


사사키 ; 뿌리 나눔이라든지 포기 나눔이네요. 경우에 따라서는 접붙임 같은 것이네요.


사토; 접붙이기나 꺾꽂이 같은 겁니다. 꽃을 피워서 다음 세대를 만드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그와 같은 식물입니다.


사사키; 종자가 없는 건?


사토; 종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용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종자를 만들지 않는다. 혹은 종자는 이용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것이지요. 전형적인 것으로는 토란이라든지 참마(그림4-3), 바나나 등입니다.



토란의 다양한 형태. A: 기는 줄기를 가진 야생형. B: 열대에서 많이 재배되는 어미토란형. C: 동아시아 온대권에 많은 새끼토란형.



통가의 참마 A-H: Dioscorea alata. I: D. pentaphylla. J: D. nummularia K: D. euculenta


그림4-3 대표적인 영양번식 식물 <덩이뿌리와 인간(イモとヒト) -인류의 생존을 뒷받침한 뿌리식물 농경>에서




사사키; 바나나는 전형적인 영양번식 식물이라 하겠네요. 바나나는 과실 안에 종자의 흔적이 있긴 하지만, 종자로는 번식하지 않고 포기 나눔으로 대를 늘려 간다.


사토; 그렇네요. 일반적으로 영양번식 작물을 '뿌리 재배 작물'이라 합니다만, 이용하는 부분은 다르다. 어느 쪽이든 뿌리 나눔이나 포기 나눔 등으로 증식하는 것이 '영양번식' 식물입니다. 그래서 이들 작물의 선조종의 존재는 필시 남쪽 섬들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사키; 요컨대 '영양번식'이란 연중 고온이고 다습한 열대 산림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번식의 양식이죠. 


사토; 어지간하면 계절풍 지대와 열대 아시아 섬들의 토지에서는 무엇인가 식물이 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곳에서 작은 종자가 탁 떨어지거나, 사람이 그것을 뿌리거나 해도 좀처럼 살아 남지 못하지요.


사사키; 그러니까 그러한 곳에서는 종자번식과 다른 영양번식 식물을 주체로 한 '뿌리작물 농경'이 발달했다는 것이네요. 그에 대해서는 또 나중에 문제로 삼고 싶습니다.

어쨌든 건조 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종자번식의 농경에서는 주작물로 맥류와 잡곡과 콩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뿌리작물 농경에서는 토란과 참마와 바나나와 사탕수수와 빵나무 등이 대표적인 작물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계절풍 지대는 어느 농경 유형에 속하는 겁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벼가 많은 곳은 계절풍 지대이지요. 벼라는 식물은 어느쪽입니까?


사토; 이것은 재미난 문제이네요. 둘 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르다는 사람도 있겠지요. 벼라는 건 옛날부터 말하듯이 자포니카와 인디카라는 두 가지 집단이 있지요. 자포니카라는 장강 유역에서 발생한 유형의 벼는 작물로는 한해살이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는데, 가을에 벼베기를 하면 밑동에서 '움돋이'가 생기지요. 그 움돋이에 바로 몇 센치미터 정도의 이삭이 생길 수 있습니다(그림4-4). 



그림4-4 움돋이



사사키; 예를 들면, 타네가시마 등에서는 움돋이를 '힛쯔'라 부르고, 예전에는 그것을 키워서 움돋이의 종자를 수확했습니다. 그러한 사실도 있기에 벼라는 건 원래 여러해살이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사토; 자포니카 벼는 여러해살이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또 하나의 집단은 인디카인데, 자포니카 등에 비하여 움돋이가 나오는 게 좀 적다. 더욱이 거기에 이삭이 나오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결국 인디카라는 벼는 한해살이에 가깝다. 그래서 지도의 녹색 선 위로 가면, 뿌리작물 농경의 풍토에 더 가까운 곳의 자포니카는 약간 여러해살이의 성질을 가진다.


사사키; 이 지도에서 말하면, 계절풍의 풍이란 글자 근처의 둥그런 부분인데 그에 해당하는, 즉 장강 중하류가 자포니카의 기원지라고 사토 씨는 생각하고 있지요.


사토;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벼란 작물은 아시아의 계절풍 지대, 즉 인도 아대륙부터 중국 대륙, 일본 열도, 동남아시아까지 오늘날에는 널리 재배되고 있지만, 어느 쪽이냐 하면 자포니카는 원래 영양번식을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에 대하여 인도에서 그 뒤에 재배된 인디카는 자포니카에서 나왔다는 가설을 사토 씨는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인디카는 자포니카에 견주어 영양번식을 하는 성질이 꽤 적다는 것이네요.


사토; '자포니카에서 나왔다'란 것은 아니고, 자포니카의 유전자를 '획득한다'는 겁니다.


사사키; 어렵네요…… '유전자를 획득한다'라는 표현을 한다면,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렵네요. (웃음) 여하튼 자포니카란 벼는 원래 영양번식의 성질이 있다. 그러나 벼로 먹고 있는 건 종자를 먹는 것이고, 지금 우리는 자포니카의 종자를 심어서 재배하며, 포기 나눔으로 증식하거나 하지 않는다. 왜 원래 영양번식의 성질을 지닌 자포니카가 종자번식으로 바뀐 것입니까? 벼농사 기원론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점은 어떻습니까?


사토; 그것이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인데, 하나의 가설로 이는 벼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식물에게 공통의 성질이지만 영양번식을 하는 식물이 기후가 나빠진다든지, 건조해진다든지……


사사키; 압박을 받는 거네요.


사토; 그렇습니다. 그러하면 지금까지는 푸르러서 자주 종자를 맺지 않던 식물이 서둘러 종자를 맺게 된다. 이것은 여러 가지 식물에게도 공통입니다. 그럼 자포니카의 벼가 종자번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냐면, 영거 드라이아스기라고 부르는 시대의 기후 한랭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만 1천 년 정도 전에 지구는 급격하게 추워졌다. 그러한 시기에 그때까지는 포기 나눔으로 번식을 했던 자포니카의 원시적인 유형이, 영거 드라이아스 한랭기에 이르러서 종자를 맺게 되었다.


사사키; 어쨌든 그러한 모양으로 종자번식을 하게 된 벼가 그 뒤 계절풍 지대에 퍼져 그 주작물이 된 것이네요.


사토; 그리고 그것이 수 천 년을 지나 1만 년 정도 전의 일이죠. 대략 이야기하여 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만, 자포니카 유형의 재배 벼가 열대 쪽으로 전파되어 가서 그때에 열대에 있던 야생 벼와 자연교배하여 생긴 것이 인디카였다고 생각합니다. 인디카의 벼는 한해살이인 본래의 야생 벼의 성질을 이어받아 한해살이 풀이 된 것이 아닐까? 요컨대 유라시아 대륙 서부의 건조 지대에 있던 맥류부터 동남의 도서 세계의 뿌리작물 농경권의 영양번식 식물에 이르기까지 깨끗하게 선 위에서 경향이 생겼을 겁니다.



농경과 가축의 결합


사사키; 그렇다면 유라시아의 농경을 크게 나누자면, 서쪽에서는 건조 지대 기원의 맥류를 주작물로 하는 농경이 퍼져서 맥류농사 농경 지대가 되었다. 동쪽은 종자번식을 하는 자포니카 벼를 중심으로 하면서 벼농사가 퍼져, 그 속에서 인도 아대륙에서는 인디카도 생겨나고, 계절풍 지대 전체로서는 벼농사 지대가 되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도서부는 원래 영양번식 식물의 지대로, 바나나와 토란 또는 참마 종류 등을 중심으로 한 뿌리작물 농경이 옛날부터 성립되었다. 큰 배치는 그런 것이네요.


사토; 지도의 한가운데부터 오른쪽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다시 한번 이야기로 돌아가, 지도의 왼쪽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와츠지 씨가 이에 대해 '목장의 풍토'라고 했지만, 몇 번 읽어도 감이 오지 않습니다. 다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있지만 와츠지 씨는 '목장'이란 단어로 유럽은 일본과 달리 유축농업이 성행하고,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가축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해 그 강한 인상을 기술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독일 북부의 호텔 등에 묵으면 햄과 소세지 등은 정말로 여러 종류가 나오더군요.


사토; 대체로 맛있지요.


사사키; 확실히 유럽의 문화, 그 기초가 되는 서아시아 기원의 맥류 농경문화는 우리처럼 그다지 목축과 관계 없는 민족문화와는 크게 다를 겁니다. 이 맥류를 주작물로 삼는 농경은 밭농사 문화이고, 밭농사만 지으면 양분이 고갈되어 황폐해진다. 그래서 목축과 결합하여 돌려짓기하는 농법이 필요해진다. 중세 독일사에서 유명한 삼포농법이란 건 여름 작물과 겨울 작물의 경지 구역에서 곡물을 재배하고, 휴한지에서 가축을 방목하는 것이지요. 그 휴한지에는 개인 소유의 농지가 있어도 휴한기에는 완전히 공동의 목초지가 된다. 그와 같은 관계에서 공유라는 제도가 유럽 안에서는 나온 것인데, 그러한 휴한 방목, 즉 가축 사육과 결합된 농경이 있는 것이지요.


사토; 가축이라 하는 건 어느 의미에서는 맥류 농경의 시작부터 어른어른 보였다 안 보였다 하지요.


사사키; 어른어른이라기보다 염소와 양은 맥류 농경의 기원 단계부터 확실히 나타납니다. 이 농경은 시작부터 가축과 결합된 것이 특색이라 생각합니다. 맥류를 재배화하는 것과 그 초원에서 무리로 이동하는 동물(양, 염소)를 가축화하는 것이 병행하여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토; 그렇네요. 어느 쪽이 빠른지는 의론이 있겠지만, 저도 그것은 완전히 병행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맥류 농경이란 건 주로 양과 염소를 중심으로 하는 목축이 시작되는 것과 병행하여 시작했다.


사사키; 그 다음에 나중에 소가 가축화되어 맥류농사 농경에 더해집니다. 어느 쪽이든 이들 가축은 모두 무리 동물이란 것이 특징이지요. 유명한 <농업의 기원>을 쓴 C. O. 사우어Sauer(1889-1975)라는 지리학자가 있는데, 세계의 가축을 두 종류로 나누어 무리 동물과 가축으로 분류했습니다. 가축, 즉 마을 안의 각 세대에서 사육하는 가축의 전형이 돼지와 닭 등입니다. 그에 반해 무리 동물은 주로 초원에서 가축군으로 방목의 형태로 사육하는 발굽 동물로, 건조지대의 초원에 결합됩니다.

돼지를 대표로 하는 가축은 어느 쪽이냐 하면 산림 지대에 결합된다. 유럽의 북쪽은 산림 지대이기에 돼지 사육이 성행하고, 그 산림대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쭉 동쪽까지 연속되어 동북아시아에서도 잡곡과 돼지 사육이 결합된 문화가 나옵니다. 그외에 아시아의 계절풍 지역의 벼농사 지대와 그 남쪽의 열대 산림대의 뿌리작물 농경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 가축=돼지 사육입니다. 유라시아의 농업이란 것은 서쪽에서는 양과 염소 등의 무리 동물, 동쪽의 벼농사 지대는 돼지를 주로 한 가축 지대입니다.

또 말하는 걸 잊었는데, 서쪽 건조지대에서는 양과 염소 외에 나중에 소와 말 등의 대형 짐승도 가축화되어 이들 무리 가축의 사육과 밀접하게 결합된 중요한 문화가 젖의 문화입니다. 실은 동쪽 문화에서는 본래 젖의 문화가 빠져 있습니다.


사토; 동과 서의 차이이지요.


사사키; 중국 호남성 장사長沙 근처 소산韶山이란 곳에 모택동 씨의 생가가 있습니다. 조엽수림대입니다. 가서 보면, 모택동 씨가 태어난 집에는 꽤 큰 돼지우리가 있다. (웃음) 역시 저 주변의 벼농사 지대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두 돼지를 키우고 있습니다(그림4-5).



그림4-5 소산에 있는 전통 농가. 어느 농가에나 큰 돼지우리가 있다.



사토; 동쪽의 벼농사 지대에서는 돼지와 가금류(닭과 집오리 등)이지요. 새도 매우 특징적입니다. 그것과 식물화로는 물고기가 지닌 역할도 참으로 크다고 생각하네요. 벼논양어라는 말이 있는데, 저건 계절풍 아시아의 벼 생산의 장에서는 항상 물고기 -물론 이것은 밀물고기이지만- 를 잡았다. 저는 이것을 '쌀과 물고기의 동소성'이라 쓰고 있습니다만, 이 벼논양어도 조엽수림대부터 남쪽으로 펼쳐진 지역의 특징이라 생각합니다.



논의 시작과 벼농사 문화

 

사사키; 문제는 벼는 앞에서도 논했듯이, 종자번식을 하게 되어 작물로 성립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논에서 재배되었던 것입니까?


사토; 벼의 근간이 된 식물, 적어도 자포니카의 원종에 관한 한은 물이 철벅철벅한 곳이 생육 적지이지요.


사사키; 철벅철벅한 곳에서 재배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사토; 아뇨, 단지 그것만으로는 재배화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하네요. 그렇다는 건, 계절풍 지대의 그런 철벅철벅한 곳은 동시에 악어 등의 동물도 있겠죠. 그 다음 말라리아도 있을 것이고, 기타 여러 가지 천적도 있을 겁니다. 인간이 살기 쉬운 곳에는 없겠네요. 벼에게도 경쟁상대가 잔뜩 있을 겁니다.


사사키; 인간이 살기 쉬운 곳이라 하면?


사토; 음. 인간이 살게 된 곳은 좀 더 건조하다. 더구나 그곳에서 계절풍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물이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는 겁니다. 우기가 되면 물이 모이고, 건기가 되면 빠진다. 그러한 곳은 한해살이 풀밖에 적응할 수 없겠죠. 숲에서는 우기에는 물이 고여서 안 되고, 수생식물에게는 건기에는 강한 건조함 때문에 안 된다. 한해살이 풀만이 지면이 노출되어 있는 곳에서 생육할 수 있는 토지이기에, 아마 그런 곳이 최초의 벼농사가 시작된 곳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즉, 건기의 수위가 조금 오르지요. 그러한 곳이 아닌 한 재배 벼는 기르지 못한다. 역시 늘 습지인 곳은 벼농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매우 원시적인 것은 별도로 하고, '벼농사 문화'라고 말할 정도의 벼농사는 그러한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사사키; 저는 '벼농사 문화'라고 할 때는 논두렁과 수로를 지닌 정비된 논이 그 기초에 있는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논이란 특유의 생산기반에서 성립하는 논벼농사 농경이라는 것과 논벼농사 농경 이전의 농경은 대단히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논벼농사 농경이란 생산형태가 확립되고, 처음으로 벼농사 사회가 형성되어 벼농사 문화, 벼농사 문명이 나온다. 논벼농사 이전의 농경이란 것은 꽤 원시적인 것으로, 수렵채집 경제와 아직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토; 어제까지 채집하던 사람이 오늘부터 갑자기 벼농사를 개시하는 등과 같은 일은 생각할 수 없다고 보지요.


사사키; 이 시리즈의 안에 나카무라 신이치中村慎一 씨(가나자와 대학) 등도 서술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동아시아의 고고학자 의견이 거의 일치하고 있는 바는 논벼농사 농경이 완성된 건 양저문화 무렵. 기원전 3300년 무렵부터 2200년 무렵까지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상세한 건 여기에서는 생략하지만, 유적과 유물의 상황으로 판단하여 이 무렵이 되면 정비된 논을 지닌 벼농사 농경이 확립하고, 벼농사 문화가 형성되어 지방의 국가도 성립되지 않았나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에 거의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렇다면 그 이전의 벼농사는 벼는 농사지었지만 의지하지 않는, 사실 지금까지도 동남아시아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데 저는 '원초적 천수답'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만, 벼와 잡곡을 함께 심어서 비가 내린 해에는 벼가 자라지만 비가 적은 해에는 잡곡이 자란다. 밭인지 논인지 알 수 없는 듯한 경지가 많이 있습니다.


사토; 밭과 논이란 명확한 구별은 없었다고 생각하지요. 예전, 미야자키 대학에 계셨던 후지와라 히로시藤原宏志 씨가 강소성 소주시의 좀 동쪽에 있는 초혜산 유적에서 논터를 발견했다고 하여……


사사키; 저, 후지와라 씨가 불러서 그곳에 견학하러 갔습니다.


사토; 아, 가셨습니까? 6200-6300년 전의 유적이지요. 대략 지금의 논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사사키; 정말로 작지요. 제2장 그림2-7과 그림2-8이 그 유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 구획이 몇 평방미터 정도인 것이 쭉 붙어 있다.


사토; 게다가 움푹하지요.


사사키; 움푹합니다. 그곳이 논 유적이라 하지만, 논이라 좋을지 어떨지 좀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웃음)


사토; 무리라고 저도 말합니다. (웃음) 그렇지만 이른바 벼잎 세포화석은 나왔지요. 그러니까 후지와라 씨 들은 잎의 세포화석이 나왔기에 이것은 논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벼잎 세포화석의 존재는 다른 생물종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과 마름 등 벼과 이외의 수생식물에는 잎의 세포화석이 없지요. 잎의 세포화석만으로는 다른 생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벼가 벼가 있었다고 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벼 이외의 것이 없었다고 하는 증명은 아닙니다. 벼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그곳에서 물을 펐을지도 모르고, 수생 동식물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것을 저는 역시 상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네요.


사사키; 잎의 세포화석이란 건 벼과의 주로 잎 안에 있는 규산체이지요.


사토; 잠깐 사진을 보시지요(제2장 그림 2-2). 이것이 벼잎 안의 기동세포라는 세포에 모인 실리카와 유리질 덩어리입니다(그걸 규산체라고 합니다). 그것이 잎이 말라 버린 뒤에도 흙속에 남아 있다.


사사키; 잎의 세포화석은 벼의 종류마다 다양한 형태로 정해져 있어, 유리질이면서 썩지 않아 잘 남아 있다. 따라서 벼과의 어떤 식물이 있었는지를 고고학으로 실증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사토; 그렇지요. 그래서 대나무에는 대나무 잎의 세포화석, 벼에는 벼 잎의 세포화석이 있다. 그렇기에 벼 잎의 세포화석이 나오면 곧 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벼가 있었다는 증명이기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다른 것이 없었다는 걸 유감스럽게도 증명할 수 없다. 그 주변이 어렵지요.


사사키; 이 유적의 상황은 매우 원시적이며, 논이라 말하고 싶은 사람은 그래도 좋겠지만. (웃음) 이후 시대의 논두렁이라든지 수로로 정확히 구획된 정비된 논과는 다릅니다.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러니까 잘 정리된 논, 논두렁과 수로로 구획된 생산성 높은 논이 나온 건 동아시아에서는 앞에 서술했듯이 양저문화의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중에 일본 열도의 이야기도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만, 조몬시대의 말기부터 야요이 문화의 시작 무렵에 큐슈 북부 지역에서 출현하는, 예를 들면 이타즈케板付 유적의 논 등은 정말로 멋지게 정비된 것입니다.


사토; 그렇지요. 일본에는 완성형 논벼농사가 생긴 겁니다.


사사키; 그렇지만 그러한 논이 전래하기 이전에도 벼농사는 영위되고 있었기에,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유라시아 전체를 보면 서쪽은 어느 쪽이냐 하면 밭농사로 목축과 젖 문화에 결합된 농경이 있다. 동쪽은 논을 경영하고 무리 동물이 아닌 가축의 사육과 결합된 벼농사 문화가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조금 까다롭게 했습니다만, 문제는 인도 아대륙입니다.


사토; 인도와 인도의 북쪽이지요.

사사키; 네. 인도의 문제는 매우 어렵지만, 인도 아대륙의 농업 지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북서부의 펀자브부터 갠지스 상류에 걸친 맥류농사 지대, 중앙부의 데칸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잡곡(조) 지대, 수수와 향모 및 잡곡류가 재배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인도 아대륙의 아삼과 갠지스강 중하류에 펼쳐지고, 인도 반도의 동서해안에도 분포하고 있는 것이 벼농사 지대입니다.

이처럼 아라칸 산맥에서 서쪽의 벼농사 지대는 매우 큰 논벼농사 지대입니다만 재배하는 벼는 자포니카가 아닌 인디카가 많고, 게다가 잡곡과 맥류농사가 중첩되어 있는 곳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인도의 벼농사는 파종과 탈곡의 방법, 젖 문화와의 관계와 가공 쌀 만드는 법 등에서 맥류농사 농경과 잡곡 농경 등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며, 아라칸 산맥에서 동쪽의 벼농사와는 꽤나 다르지요. 


사토; 아라칸에서 서쪽 지역의 벼농사는 동쪽의 벼농사와 완전히 이질적이라 생각하네요.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 씨가 말했는데, '"인도에는 벼농사 문화라고 하는 것이 없다"라는 건 역시 확실하네요. 동아시아의 벼농사 문화, 인도의 벼농사 문화라는 건 언뜻 비슷하나 다른 것으로, 둘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 벼농사 문화라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라시아 농경의 북쪽과 남쪽의 퍼짐새


사사키; 에전에 유라시아의 농경을 생각할 때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것이 유라시아 북부를 동서로 잇는 농경지대의 존재입니다.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북극해로 들어가는 큰강으로 오비강, 에니세이강이 있습니다. 이 두 강의 가장 상류는 알타이산까지 이르고, 그 가운데 오비강의 가장 상류 지역에는 기원전 3-5세기 무렵의 유명한 동결 고분군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파지리크 고분은 고분의 도굴 구덩이 등에서 물이 들어와 그 물이 얼었던 겁니다.


사토; 동결된 맘모스 같은 것이죠.


사사키; 그렇습니다. 큰 목재를 쓴 대형 목곽 무덤에 동결되었기 때문에 안에 있는 유물이 깨끗하게 남았던 겁니다. 그곳에서 페르시아산 커다란 양탄자를 시작으로 마구류와 장식품, 기타 나릇이 달린 마차 등도 출토되고, 말도 몇 십 마리가 묻혀 있었습니다.


사토; 말도 함께 남아 있었던 겁니까?


사사키; 일부는 미이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북방 유라시아 학회를 중심으로 1991년에 러시아와 공동으로 알타이의 우코크 고분을 조사하여, 저도 다른 고고학자와 함께 견학하러 갔습니다(그림4-6). 발굴된 고분은 완전히 동결되지 않아서 잘 되지 않았지만, (웃음) 여하튼 이 부근 알타이산의 북사면부터 산기슭 일대는 쭉 완전한 초원지대입니다.

기원전 3000년대 말 무렵부터 2000년대에 걸쳐서 아파나시에보 문화가 영위되었습니다. 특히 안드로노보 문화는 흑해와 카스피해의 북쪽부터 알타이산에 걸쳐 초원지대에 전개된 스키타이계의 청동기 문화로 가축으로 말을 소유하고, 쿠르간(옛 몽고 무덤)을 만들며, 소규모 농경도 경영하는 목축민의 문화입니다. 그 뒤 이 지역의 문화는 목축의 요소를 차츰 강화하는데, 그래도 관개 조직을 수반한 기장과 조 등의 재배 전통은 기원후 상당히 이후의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림4-6 알타이산의 초원과 유목민 천막. 알타이산과 그 북쪽 기슭에는 광대한 초원이 펼쳐진다. (사진: 사사키타카아키)



사토; 보리는 어떻습니까?


사사키; 물론 보리도 있었습니다. 기장과 조 등도 재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을 부장한 동결 고분은 목축귀족의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만, 그들도 농경민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초원지대에 농경이 서쪽부터 동쪽으로 쭉 이어져 있었던 겁니다.


사토; 확실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선생은 북쪽의 농목문화의 회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농목문화의 길이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사막이었는지는 잘 조사해 보지 않아서 알지 못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사키; 지금 어느 사막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잖습니까?  S. A. 헤딘(1865-1952)이 탐험한 20세기 초 무렵에는 현재는 말라 붙어 있는 로프노르 호수는 가득한 물로 칭송되었기 때문에……


사토; 네, 오래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조사하고 있는 건 타림 분지의 동쪽 끝입니다. 여기는 실크로드의 길가이고, 예전에는 꽤 인구밀도가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아까 알타이 산맥의 남쪽에 동서로 지나는 천산산맥이 있고, 그것과 티벳 고원의 북쪽을 경계짓는 곤륜산맥 사이에 있는 타밀 분지는 지금은 아주 건조한 지대이지만, 2000년 정도 전에는 분지의 동쪽 끝에 누란왕국이란 오아시스 국가가 번영했던……


사토; 그렇습니다. 게다가 누란의 아직 전의 시대에, 역시 맥류 농경이 있었지요. '소하묘'라는 유적인데(그림4-7), 새삼스럽게 강좌에 몇 번이나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밀의 종자와 기장의 종자와 함께 소의 모피와 머리뼈, 양과 염소의 뼈가 다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막이라 부르는 저 풍토에도 역시 역사성이 있어서 누란 시기는 이미 건조함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는 꽤 많은 사람이 농경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목축도 하고 있었겠네요.



그림4-7 소하묘 유적(2008년 9월 촬영)




사사키; 그래서 조금 뒤의 당나라 때에 인도로 향하던 현장삼장도 지금 같은 상태의 사막을 지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토; 그렇게 생각하네요. 그가 고창국高昌國을 지났던 때 마중을 많은 사람이 왔지요. 환영 인파에는 여성이 수십 명이나 왔고, 스님도 수천 명이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만약 그 이야기가 어느 정도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한 나라를 뒷받침하는 농목업이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타림 분지를 지나 '인도로 가는 길'도 천산산맥의 남과 북쪽 기슭을 지나는 '비단의 길'도 예전에는 풍요로운 오아시스와 초원을 동반하는 것으로, 그곳에서는 맥류와 함께 기장과 조 등의 잡곡류가 재배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도 북쪽은 지금은 밀 지대이지만, 원래는 호밀과 귀리를 농사짓고, 오트밀 같은 거친 죽, 거기에 조와 기장 등이 들어간 걸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북방 유라시아의 동서는 이처럼 맥류와 잡곡의 거친 죽이란 식문화를 가진 농경지대와 결합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사토; 그렇지요. 그 위에 사막이란 건조의 풍토가 올라타서 목축업 같은 것이 들어왔다. 


사사키; 북쪽에 관하여 말하면, 에니세이강 상류의 타가르 문화기(기원전 10-8세기)에 말이 나오게 되지요. 그 무렵에는 재갈(말의 입에 물려 고삐를 붙이는 도구)이 출현하고, 승마 기술이 발달하며, 그것과 단궁을 쓰는 '기사'의 전술이 한묶음이 되어 전투적인 기마유목민족 문화가 형성된다. 그 뒤 몇몇 민족의 흥망을 거쳐 기원전후에는 어느 종의 목축민에 의한 권력구조가 생겨납니다. 그와 함께 그 권력구조를 뒷받침하는 맥류와 잡곡의 농경이 북방의 초원지대에 존재하고, 그 농경이 동북아시아까지 도달한다는 데 주목하고 싶네요.

여기에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앞에 기술했듯이 동남아시아의 도서부는 원래 뿌리작물 농경의 지역입니다. 저는 그 일부, 동인도네시아의 핼마헤라섬이란 곳에서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적도에 가까운 섬으로, 바나나와 덩이뿌리 종류를 주작물로 하는 전형적인 뿌리작물형 화전 농업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보면, 카사바를 재배하는 밭에 할머니가 수확하러 와서 수확한 카사바의 일부를 그곳에 곧바로 심는 겁니다(그림4-8). 고온다습한 열대 산림 지역이면서 1년 내내 언제나 심기와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수확과 심기가 연속하는 농법이 가능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바나나 등도 그러한 재배법에 가깝죠. 바나나에는 고정된 수확기란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얻을 수 있고, 언제나 포기 나눔을 할 수 있습니다. 즉, 뿌리작물 농경이란 것에는 기본적으로 명료한 수확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장도 없다.

그런데 종자 작물의 지대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종자 작물에는 반드시 정해진 파종기와 수확기가 있어서, 그 수확기를 중심으로 해서 수확 축제가 있고, 수확의 풍성함을 기원하는 의례가 영위되며, 그것을 주관하는 사제가 생긴다. 그래서 그 사제와 왕이 한묶음이 된 사제왕 같은 것이 출현해 왕권이 형성된다.



그림4-8 화전에서 카사바의 수확과 심기(인도네시아 핼마헤라섬 1976년, 사진: 사사키 다카아키) 카사바의 덩이뿌리를 수확한 뒤 이어서 그 일부를 잘라서 심는다. 수확과 심기 작업이 여기에서는 일련의 작업으로 행해진다.



사토; 그렇죠. 또, 종자번식 식물의 경우에는 종자를 저장할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하지요. 


사사키; 네 네, 그 저장을 대량으로 껴안은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지요. 그런데 수확기가 확실하지 않고, 저장도 안 하는 뿌리작물 농경의 세계에서는 권력이 발생하는 계기가 부족하다. 따라서 왕권이 발생하고, 왕국이 나타나는 일이 거의 없다. 본래 뿌리작물 농경 지대에는 그러한 권력구조가 나오지 않는 것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토; 뿌리작물 식물은 진화가 매우 느리네요. 식물학적으로 말하더라도 그렇고, 영양번식을 되풀이하는 한 예외는 없겠지만 대부분 진화하지 않지요. 즉, 포기 나눔을 하면 몇 번을 반복해도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조합은 쭉 마찬가지이지요. 그러하면 유전적인 개량, 즉 품종개량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것도 역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종자번식 식물에서는 인간이 품종개량을 하겠다는 의지가 작용하면 그에 응하여 유전자의 조합이 얼마든지 변화하여, 그것으로 생산성을 유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왕권의 기초가 되는 수확물의 저장이라든지 증식이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잘 반응하는 거지요.


사사키; 그러니까 그러한 점에서는 유라시아 전체를 보아, 농경이 크게는 동과 서, 서의 맥류, 동의 벼라는 모습으로 대비할 수 있겠는데, 벼라는 건 어딘가에 영양번식적인 성격을 끌어당기고 있는 바가 있다. 그것에 대해 남쪽은 완전한 뿌리작물 농경 지대, 북쪽은 목축에 상당히 의존한 농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문제는 잡곡입니다.


사토; 잡곡에서 일본인에게 가장 친숙한 것이 피와 조이죠. 피에 대해서는 이전 교토대학에 계신 사카모토 사다오阪本寧男 씨가 일본 원산설을 발표했는데, 조도 동북아시아 기원이란 설이 한때 강했지만 저는 저것은 의심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요즘 미국에서 인도를 연구하고 있는 동료의 연구실에 갔더니 "나는 25년 전 태국에서 조사했을 때의 조 종자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 수확물을 보았는데 확실히 조 같습디다. 그것에 사사키 선생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조는 동남아시아부터 남아시아에 걸친 지역에서도 매우 흔하게 재배하고 있습니다.


사사키; 조는 조금 전 사진에서도 있었네요. 


사토; 네, 그림4-1의 오른쪽에서 두번째입니다. 분명히 조는 한편으로는 어쩐지 북방 문화의 정취가 있지요. 그런데 아까 태국에서 행한 연구에서는 열대에도 조가 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간단히 북방기원설이 좋을지.


사사키; 조의 분포는 열대 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다고 이전부터 잘 알려져 있어서, 제가 조사한 핼마헤라섬에도 재래종 조가 있습니다. 아무튼 조라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도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어요.


사토; 그런 것 같네요. 그리고 기장도 그렇지요. 도대체 잡곡의 계통은 어떻게 생각하면 좋습니까?


사사키; 간단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좀 더 정리하자면 피는 분명히 아주 오래된 것은 아시아 대륙에서 출토되지 않는다. 홋카이도 대학에 계신 요시자키 쇼吉崎昌一(1931-2007) 씨는 부유선별법이란 방법으로 발굴된토양을 물로 씻어서 그것을 0.45mm라는 매우 가느다란 망으로 선별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 가지 종자의 파편 등이 나와서, 그것을 현미경으로 보고 동정하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 요시자키 씨에 의하면, 홋카이도에서 도호쿠 지방의 북부에 걸쳐서 조몬시대의 전기 무렵부터 피가 출토되기 시작한다. 그 출토 종자는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커져, 조몬 중기부터 후기가 되면 재배 피라고 생각되는 것이 출토된다. 그것을 '조몬 피'라고 그는 부르고 있습니다. 피는 꽤 일찍부터 일본 열도에서 재배화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연해주까지 넣어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사사키; 조에 대해서는 사카모토 씨는 광범위한 현장조사와 재배실험을 행하여, 아프가니스탄부터 인도 북부에 걸친 지역이 지원지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북의 황토 대지의 페이리강裴李崗과 츠산磁山 등 약 7000년전이라 하는 옛 유적에서도 조 또는 피라고 추정되는 잡곡이 돼지의 유골과 함께 출토되고 있습니다.


사토; 요녕성 인근에서도 매우 오래된 조가 출토되고 있지요.


사사키; 유라시아의 여기저기에서 조는 오래전 시대의 것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것은 다시 한번 DNA라든지 무언가로 정확히 그 품종과 계통을 재조사하면 좋겠다.


사토; 조금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최종 빙하기 이전의 작물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사사키; 그건 있다고도 없다고도, 잘 말하겠지만서도. (웃음) 아무튼 조라는 작물이 꽤 오래된 것이고, 유라시아 농경사에서도 중요한 작물이란 점은 틀림없다. 그러나 현재 재배되고 있는 옛 품종이 없어졌기 때문이죠. 일찍 조사하지 않았고……. 어쨌든 유라시아 대륙의 조는 북쪽으로 분포가 확산된 조와 남쪽으로 확산된 조라는, 최소한 두 계통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사토; 그건 사카모토 씨도 이야기하셨죠. 그리고 피도 그렇나요?


사사키; 사카모토 씨는 아이누에서 재배되는 옛 피를 보면, 그것은 아프가니스탄 인근에서 재배되는 피와 매우 비슷하다고 합니다. 즉, 북회노선의 조, 피와 남회노선의 그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꼭 조사해 주세요.


사토; 그것은 많이 있지 않습니까? 밀도 아무리 보아도 북회노선, 즉 지금의 실크로드보다 더 북쪽의 경로로 전파되었다고 생각되는 계통의 것과 남쪽에서 왔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사키; 예를 들어서, 최초로 이야기를 꺼냈던 타카하시 류헤이 씨가 연구한 보리의 E형과 W형이 있는데, W형의 보리는 유라시아의 북쪽 회랑을 지나서 동쪽, 즉 동북 일본에까지 왔지요. 한편 남회노선의 E형이란 건 중국 대륙에서 서일본으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다.



남북으로 나눌 수 있는 일본의 농경


사사키; 그러한 점을 생각하면 일본이란 곳은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데도, 그 까닭에 유라시아의 농경사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네요. 그림4-9는 동아시아의 식생을 주로 <중국식피中國植被>(1980년)을 참고하여 그렸는데, 중국 대륙에서는 장강 유역을 경계로 그 북쪽이 낙엽광엽수림대(졸참나무숲지대. 전형적인 건 신갈나무≒물참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온대낙엽광엽수림대), 그 남쪽은 상록광엽수림대(조엽수림대)를 이루고, 그 졸참나무숲지대와 조엽수림대는 일본 열도의 동북부와 서남부에도 이르며, 이 열도의 문화와 농경의 지역차를 만들어내는 기초적인 조건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몬시대의 인구 분포를 보아도 그 인구의 대부분이 동북일본의 졸참나무숲지대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확실히 정주를 하고 식량 비축이 풍부한 그 문화의 특색은 동북아시아의 졸참나무숲지대의 풍요로운 수렵채집민 문화의 그것과 공통되는 점이 많고, 동북아시아와 깊은 관련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림4-9 동아시아의 식생과 조엽수림 문화와 졸참나무숲 문화의 분포. 식생의 분포는 주로 <중국식피>에 따른다. 옛 만주를 중심으로 한 낙엽광엽수림대는 물참나무와 비슷한 신갈나무를 중심으로 한 산림대이고, 아무르강 유역과 연해주와 사할린의 아한대침엽수림도 실제로는 침광금강수림의 모양을 취하는 곳이 많고, 일부는 신갈나무를 중심으로 한 졸참나무숲지대와 비슷한 경관을 나타내는 곳이 적지 않다.




사토; 서장의 그림-2는 일본 열도에서 전개된 전통적인 농경의 지역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곳에 실선③이란 선이 있지요. 이것이 위의 지도에서 보시듯 보리의 W형과 E형의 경계선이고, 선의 동북쪽이 W형, 서남쪽이 E형인 보리의 분포 구역입니다.


사사키; 그밖에도 선과 표시가 적혀 있지요?


사토; 네,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느 시기인지에 따라서 이세만과 와카사만을 연결한 선으로 경계를 이루고, 태평양 쪽과 일본해 쪽을 나누는 선으로 구분된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구별하여 정리한 겁니다.

그런데 우선 명확한 건 벼이지요. 조몬 벼농사의 존재가 증명된 유적은 '이세만-와카사만' 선(실선②)의 서쪽이네요. 동쪽에 요시자키 씨가 찾아낸 조몬의 쌀이 하나 있지만, 전체의 경향으로 말하자면 조몬의 벼농사는 이 선의 서쪽에서 전개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요시자키 씨가 발견한 건 실선②의 동쪽 가운데 가장 북쪽, 하치노헤시 카자하리風張 유적의 조몬 후기 주거터에서 나온 쌀인데, 벼가 출토된 건 없어요. 아마 그 쌀은 서일본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몬의 벼농사는 동북일본에는 없었다고 생각해도 좋은 거지요.


사토; 쌀은 있어도 벼농사가 있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몬시대에 벼가 재배되었단 건 이 서쪽, 즉 서일본에서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사키; 그러니까, 조몬시대의 곡물에 대하여 말하면 일본 열도의 동북쪽은 피였을지도 모른다.


사토; 피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피에도 두 가지가 있어서, 동(북)의 피는 돌피(Echinochloa crus-galli)라는 재배형 피입니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4배체입니다. 한편, 서쪽의 피는 물피(Echinochloa oryzicola)라는 논의 잡초, 6배체의 종이란 구별이 있습니다.


사사키; 이 동쪽의 피, 서쪽의 벼라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요시자키 씨가 이미 기술해 놓았지요.


사토; 그 다음에 재래종 보리 가운데 좀 전의 E형 보리라는 것이 서남서 일본에 주로 분포하고, W형 보리가 동북 일본, 특히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의 북부에 퍼져 있었어요.


사사키; 맥류만이 아니고 아시다시피 야마가타 대학 교수였던 아오바 타카시青葉高(1916-1999) 씨가 연구한 재래종 순무에 대해서도 서양종 계통의 순무와 일본종 계통의 순무라는 두 종류가 있어서(그림4-10), 서양종 계통의 순무는 보리의 W형과 마찬가지로 시베리아에 연결되고, 일본종 계통의 순무 그것은 중국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밖에도 우엉이라든지 삼, 파, 유채 종류 등은 산나이마루야마三內丸山 유적을 시작으로 몇 개의 조몬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림4-10 서양종과 일본종 계통의 순무 분포. 서양종 계통의 순무는 지도의 바깥, 도호쿠 지방의 일본해 연안에 많은 걸 알 수 있고, 옛날 대륙엣 직접 건너왔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일본종 순무는 서일본에 퍼져 있다. 교토의 전통식 절임인 센마이즈케千枚漬는 이 일본종 순무로 만든다.



  

 그러한 것은 모두 북쪽에 계통적으로 이어지는 작물이고, 저는 이들에 북회노선의 조와 피 등을 더하여 '북방계 작물군'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이 북방계 작물군으로 상징되는 북쪽에서의 농경이 있었지요. 그것은 일본 열도에서는 낙엽광엽수림대, 즉 졸참나무숲 지대의 동일본부터 북일본에 펼쳐지고, 벼를 중심으로 일본종 계통의 순무와 쌀보리(E형 보리) 또는 남회노선 계통의 조와 피 및 토란 등으로 상징되는 농경이 조엽수림대, 즉 서쪽부터 남쪽으로 이어졌다고 하는 것이네요. 


사토; 그리고 생쥐의 계통 안에 무스(Mus)형이라 부르는 것과 카스타네우스(castaneus)형이라 부르는 것 두 가지 유형이 있어서, 쥐의 유전학을 연구하고 있는 이화학연구소의 모리와키 카즈오森脇和郞 씨에 의하면, 도호쿠 지방을 남북으로 분단하고 있는 선의 북쪽은 카스타네우스형이고 남쪽은 무스형이라고 합니다.


사사키; 일본의 농경은 전통적인 재래 작물의 특색으로 보아 북쪽 계통과 남쪽 계통 두 가지에 의하여 이루어져 왔지요. 그런데 조몬시대의 말, 야요이 시대의 시작 무렵에 아까도 서술했던 논벼농사를 수반한 벼농사 문화가 건너와서 일본 열도의 서쪽부터 퍼졌기 때문에, 재래 작물의 동서차, 남북차가 매우 희박해져 버렸던 겁니다. 어느 쪽이든 일본 열도 농경문화의 기층에는 유라시아의 북과 남으로 연결되는 계통의 서로 다른 두 가지 농경의 전통이 있다고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하네요.


사토; 그렇지요. 그 차이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이상으로 크다고 생각하네요. 그래서 도호쿠예술공과대학의 아카사카 노리오赤坂憲雄 씨가 "여러 가지 일본"이라 말하듯이 똑같은 일이 재배식물과 식문화, 농경문화 같은 측면에서 보아도 역시 동북 일본의 문화와 남서 일본의 문화라는 명확히 이질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어요.  


사사키; 동일본과 서일본에서 언어와 습속, 사회 및 그외의 여러 가지 점에서 지역차가 있는 건 모두 많은 사람에의하여 지적되지만, 그 배후에는 유라시아 농경문화의 계통 차이가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토; 그렇지요, 반영되어 있습니다. 일본 열도에서는 말에도, 문화에도, 인간에도 지역차가 있었을 텐데, 대립 등이란 것을 말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구별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일종의 세계화에 의하여 뒤섞여 버렸겠죠. 


사사키; 서일본의 농경문화라고 하면, 일본 열도에서 뿌리작물 농경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됩니다. 

뿌리작물 농경에 상세한 서남일본식물정보연구소의 소장 홋타 미츠루堀田滿 씨에 의하면, 열대 계통의 2배체 미가시키ミガシキ군의 토란과 열대 계통 참마 다이죠ダイジョ의 분포가 중국 남부지방과 필리핀부터 류큐 열도를 따라서 북쪽으로 뻗어서 큐슈와 시코쿠 남부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실 고치현 해안부를 중심으로 열대 계통의 참마 야생종의 하나인 니가카시우이모ニガカシウイモ가 식물로 분포하고, 예전에는 물에 담가서 식용으로 이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 열대 계통의 덩이류는 아마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대만과 류쿠에서 전파되어 온 것으로, 열대에서기원하는 뿌리작물 농경문화의 일부가 직접적으로 남방에서 전래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정말로 일본이란 곳은 아시아 안에서 경계인 곳이지요.


사토; 그렇네요. 경계인데, 경계이기 때문에 농경문화 그것이 매우 풍부하다고 생각되네요.



'풍부한 농경'이란?


사사키; 지금 농경이 '풍부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어떠한 농경이 '풍부한' 것입니까? 예를 들면, 미국의 면화 지대, 옥수수 지대에서는 옥수수와 면화를 집중적이고 대량으로 농사짓고 있습니다. 생산량은 세계에서 가장 풍부합니다. 그것은 농경으로서 '풍부하다'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사토; 이 프로젝트를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에서 시작한 의향은 지금의 농업은 단기적(몇 십 년)으로는 풍부할지 모르지만, 백 년, 몇 백 년이란 단위에서 보면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는 측면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냉해가 있어 돌연 병과 해충에 의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괴멸적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죠.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즉 백 년, 이백 년, 삼백 년 같은 기간으로 생각해 보면, 이러한 대규모 단작(모노컬쳐)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하네요. 이것은 현대의 일본 논을 고려해도 그렇습니다. 논벼농사는 매우 지속적이라고 모두 말씀하십니다. 그럼 지금의 논을 보고 지속적이냐고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저는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사키; 그래서 다시 한번 묻고 싶은데, 지금 우리는 옛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느 쪽이냐 하면 역사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시야에서 본 농경이란 것을 생각하면, 농경이란 것은 순환형이고 안정되어 있는 것을 본래 농경의 모습이라 생각해요. 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입니다. 밭농사의 경우에는 앞에도 기술했듯이 유럽 중세의 삼포농법에서는 돌려짓기를 행해 농지를 묵혀 가축을 방목하여 농지의 비옥도를 유지했다. 삼포농법은 유럽만이 아니라 네팔에서도 논과 밭의 그루터기에 방목을 행하여 일종의 삼포농법을 하고 있습니다(그림4-11). 휴한지 방목을 하는 겁니다. 



그림 4-11 네팔의 농목 경관(사진: 사사키 다카아키)

(위) 밭의 구역을 나누는 가축담. 중부 네팔 시카 마을의 가축담과 경지(1963년 9월). 마을 아래에 가로로 길게 이어지는 곳이 농지 구역을 나누는 나무 울타리에 해당하는 돌담. 돌담 아랫부분의 농지 구역에서는 옥수수의 수확이 끝나고, 그루터기에 가축 무리를 넣는다. 돌담보다 위는 향모의 경지로 아직 수확이 끝나지 않았다.

(아래) 논 그루터기의 방목. 가라 마을의 논 그루터기 방목(1963년 10월). 논의 그루터기에 일제히 방목하는 소의 무리. 가설된 가축의 우리가 두 개 보인다. 방목은 밀의 파종기까지 이어진다.




사사키; 소와 물소를 베어낸 그루터기에 넣는 겁니다. 마을 안에서 가축담으로 에워싼 농지 구역이란 곳이 몇 군데 있고 그 농지 구역마다 작물의 재배와 휴한 방목에 대한 규칙이 있어 휴한기에는 가설한 가축의 우리를 설치해 방목하는 일종의 삼포농법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밭농사라는 건 어떠한 형태로 목축과 연결되어서 경작과 휴한 체계가 있고, 그것이 정확히 기능하는 한 농경은 안정적으로 영위될 수 있는 것이지요.

화전 등에서도 그렇습니다. 화전은 최근에는 환경파괴의 원흉 등이라 이야기되고 있지만……


사토; 그건 터무니 없이 잘못된 의론이네요.


사사키; 전통적인 화전을 보면 숲을 벌채하고 불을 놓아서 화전 경지를 만드는데, 전통적인 화전민들은 벌채하기 전에 의례를 하는 게 보통입니다. 예를 들어 고치현의 이케가와 마을(池川町) 등에서 조사한 바로는 불을 놓기 전에 '오타노미おたのみ'라고 부르는 산신에게 기도합니다.

"기어서 도망가는 건 기어서 도망가 주시고, 날아서 도망가는 건 날아서 도망가 주세요. 산신 님, 땅신 님, 부디 지켜 주세요."라고(그림4-12).

화전민들은 화전을 하는 동안만 산신에게 토지를 빌린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땅 동냥'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그동안 예를 들어 큐슈의 화전민은 산신을 '세비せび의 가지에 모신다. 그 세비의 가지라는 건 화전 경지의 가장 큰 나무의 꼭대기입니다. 그곳에서 산신이 잠깐 쉰다. 화전의 경작을 마치면 산신에게 다시 한번 원래의 산과 숲으로 돌려준다고 화전민들은 생각합니다. 결코 산과 숲의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를 잠시만 신에게서 빌려 화전을 경영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림4-12 화전의 불을 놓기 전 산신에게 간절히 기도(고치현 이케가와 마을 츠바야마椿山 1970년 4월, 사진: 사사키 다카아키) 전통적인 화전민들은 화전을 만들기 전에 산신에게 잠시 물러나 주기를 기원하고, 작업의 안전을 기원한다.




사토; 그림4-13은 라오스의 사진인데, 저도 역시 보러 갔지만 숲을 벌채하기 전과 씨앗을 뿌리기 전에 반드시 의례를 하고 있지요. 라오스의 사람들은 '피'라는 정령을 믿어서, 화전 전에는 꼭 피에게 기도를 드린다. 기도를 드려 피에게 힘을 빌린다는 허락을 얻는 겁니다.



그림4-13 하늘에서 본 화전 경지. 라오스 루앙프라방 부근에서




사사키; 그것은 제가 조사한 핼마헤라섬의 화전민들 역시 똑같았죠. 그곳에서는 숲에 모로라든지 멧키라는 숲의 정령이 있어서 이 숲의 정령에게 "화전을 하는 동안만 토지를 빌려 주세요. 화전이 끝나면 돌려주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화전 경지 안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를 '왕의 나무'라 부르며 벌채하지 않고 남겨 놓는다. 화전을 경영하는 동안 그곳에서 정령들이 잠을 잔다는 관행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제사를 잘 남기고 있는 화전민의 바탕에는 반드시 휴한기간을 충분히 두어서 화전이 버려진 뒤에 숲의 식생이 잘 회복되어 다시 숲으로 돌아가서 화전을 또 할 수 있게 됩니다.


사토; 즉, 가축의 대신에 식물이 윤회하는 거지요.


사사키; 그런데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자바섬의 인구가 매우 과잉이 되어 그곳에서 농업 이민이 칼리만탄 등으로 송출되네요. 그런데, 농업 이민은 신을 모두 고향에 놔둔다. 그래서 신이나 정령과 관계없이 숲을 벌채하고 불을 붙여 태우고, 그곳에서 농지를 만들어 농경을 합니다. 그들은 개척민이기에 숲을 신과 정령에게서 빌려서 이용이 끝나면 또 돌려준다는 정신이 없는 겁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개간을 하기 때문에 순환적인 농법이 아니게 되고, 그 결과 숲이 사라져 못쓰게 된다. 이런 종류의 영구적인 경지를 만드는 농업 개간(개척)에 따르는 불 놓기와 본래의 화전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화전 농경이란 건 본래는 순환형으로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농법입니다.


사토; 그렇습니다. 그림4-13은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근처를 지나며 비행기에서 찍은 것인데, 허옇게 보이는 곳이 올해 벼를 심은 곳이지요. 조금 색이 옅은 곳이 지난해 그 전에 벼를 재배하고 올해는 휴한을 하는 곳이고, 좀 더 색이 짙은 곳이 몇 년 전에 화전이었던 곳입니다.


사사키; 더 짙은 곳은 식생이 완전히 회복되어 숲이 되었다.


사토; 그렇지요. 휴한하고 십 년, 십오 년이 되었다. 


사사키; 그러나 이 풍경은 화전으로 이용하는 장소가 양으로는 좀 너무 많네요.


사토; 좀 너무 지나칩니다.


사사키; 좀더 숲의 식생이 풍부하고, 숲의 면적이 넓은 곳에서 화전을 하는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화전의 비율이 과밀하지는……


사토; 않지요.


사사키; 이곳은 좀 토지이용이 과잉이고, 지나친 경작으로 좋은 숲이 점점 사라진다.


사토; 그렇지요.


사사키; 사실은 양호한 숲의 비율이 더 많으면 더욱 풍부한 화전을 경영한다. 본래 화전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완전한 순환형 농경일 텐데.


사토; 완전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삼포식 농업의 경우에는 가축의 배설물을 썼다. 동남아시아(계절풍 아시아)의 경우에는 무리 가축의 사육이 적기에 배설물도 적을 테지요. 그것을 대신하려고 식물성 소재를 쓰는 농경 체계를 탄생시킨다. 


사사키; 네 네, 식물의 힘으로 토지의 비옥도를 원래로 되돌린다. 그를 위해서는 휴한기간이란 것이 의외로 의미가 있지요. 휴한지에는 여러 가지가 생겨 납니다. 


사토; 약을 얻는다든지, 지붕의 재료를 얻는다든지, 새끼줄과 고삐가 되는 식물 섬유를 모은다든지 하지요. 그러니까 그 지역 사람들은 휴경지가 생산성이 없는 토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사키; 차가 자란다든지, 고사리와 칡이 자란다든지, 그것을 먹을거리로도 삼지만 두드려서 의복의 재료로도 쓰는 쐐기풀 따위가 자라기도 하지요. 휴한기간이란 건 숲 그곳이 회복함과 함께 그동안에 생활필수품을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전이란 곳은 일반적으로 작물을 한 종류만 키우지 않고 주작물 외에 다양한 작물을 뿌리거나 심거나 합니다.


사토; 그림4-14 같은 상태이지요.



그림4-14 화전 작물의 다양성. 라오스 루앙프라방 근처에서.




사사키; 여러 가지 있지요.


사토; 조금 조사해 보았습니다. 타로 토란이 있고, 카사바, 오이, 참깨, 레몬그라스, 10가지 종류 정도의 작물은 간단히 꼽을 수 있지요.


사사키; 화전에서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은 매우 다양하고, 전체가 균형을 잘 이룬다.


사토; 그렇습니다. 게다가 콩류와 곡물을 함께 재배하면 콩이 공기의 질소를 고정시켜 좋은 거름으로 바꾸어주기에 그러한 힘도 빌리면서 현명하게 농업을 하게 되지요.


사사키; 화전만이 아니라 본래의 농업이란 것은 매우 다양성을 가지고 순환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논 이야기로 돌아가서, 논도 지금은 벼만 농사지어 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사토; 옛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요. 가장 큰 건 수생 동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그림4-15의 사진을 보아 주세요. 이것은 아십니까? 인도네시아의 셀레베스섬에서 찍은 건데, 논 한가운데에 둥근 구멍이 있고 그곳만 깊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모내기할 때 물고기도 함께 놓아주고, 물고기에게 잡초를 먹게 합니다. 물고기가 똥을 싸기에 벼에도 좋다. 가을이 되어 수확철이 되어 벼를 수확하고 물을 빼면 물고기는 깊은 구멍의 양어지인 곳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림4-15 셀레베스섬의 벼논양어




사사키; 그리고 꼼짝않고 월동한다. 구멍 속에서 이듬해의 모내기까지 기다리지요.


사토; 그렇습니다. 때로는 이 작은 못에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새가 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안에 마른 대나무 가지를 놔두지요. 대나무의 마른 가지를 두어, 이것이 아프기에 새가 오지 않는다. 잘 되고 있어요.


사사키; 아무튼 벼논양어라는 건 계절풍 아시아의 논 지대에서는 어디에서나 하고 있다. 중국 서남부의 소수민족, 특히 구이저우의 묘족 등은 그 논에서 기른 물고기를 재료로 하여 식해를 만듭니다. 이와 같은 식해가 오늘날 초밥의 원조이지요.


사토; 논에서 전분도 얻고, 단백질도 얻는다. 이 체계가 계절풍 아시아의 농경 방식이라고 생각하네요. 저는 '쌀과 물고기의 동소성'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사키; 그래서 순환형이 되어 균형이 잡힌다고 하지요. 그런데 농약 등을 넣으면 그 균형이 무너져 사라진다. 그러니까 그러한 균형 잡힌 순형형이고 다양성을 잘 보전하는 것이 농경의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하네요.



농업의 다양성


사토;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을 말하면 생산성이 어떻다든지, 일본의 총인구를 먹여살리는 방책이 아니라든지, 곧바로 불만스런 이야기를 듣겠지만, 생각해 보면 농약을 치는 돈도 들지 않고, 농약이 소비하는 이산화탄소도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환경을 위해서는 결코 나쁘지 않을 거예요. 잘 생각할 수 있다.


사사키; 그러한 본래의 순환형 농경의 상태는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상에 입각하면 부정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럼 대규모 단작으로 앞에 서술한 미국의 옥수수 지대와 면화 지대 같이 되어 버리면 이번은 인공 비료를 연속적으로 계속 투입하게 되는데, 그래서 결국 토지가 피폐해져 생산성이 견디지 못하게 되어 버리죠.


사토; 그렇습니다. 견디지 못하게 되고, 생산량은 오르지만 투입량도 굉장하지요. 그래서 머지않아 파탄날 때가 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대규모 단작으로 놔두면 무엇인가 있었을 때에……


사사키; 한번 병이 발생하면 모두 쓸모없게 됩니다.


사토; 그것을 인류는 언제나 경험해 왔지요.


사사키; 당신의 연구 프로젝트 제목은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라는 것이었지요.


사토; 네. 우리들의 프로젝트는 환경의 역사를 차근차근 밝혀서 인류의 미래 가능성을 생각한다는 지구연의 '문명·환경사'라는 프로그램(연구영역)에 속하고, 특히 여기 1만 년의 농업과 환경의 관계를 밝히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연구반을 가동하기 전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인데, 인류사 가운데 농업생산은 언제나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고, 때로는 대기근과 그에 수반한 인구의 격감, 유출 같은 이른바 '붕괴' 사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들 '붕괴' 사례를 상세히 조사하면 농업이 무언가 나쁜 일을 하여 그를 빌미로 그렇게 된 사례가 많습니다. 연구반으로서는 여러 가지 풍토를 기반으로 그러한 붕괴가 왜 생겼는지 그 과정을 해명하는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요인 하나하나의 인과관계를 시계열로 정리해 간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농업이 나쁜 일을 한다고 생각되는 사례 가운데 큰 이유가 되는 것의 하나로 '다양성의 상실'이 있습니다. 다양성이란 생태계 안에 여러 가지 생물이 있는 상태, 또는 하나의 작물 안에도 여러 가지 품종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사라질 때 붕괴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가설을 세운 겁니다. 그리고 대규모 단작은 그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가설인 표현이지만……


사사키; 그래서 농업에서 다양성이 사라지고, 순환적 안정성이 사라질 때에는 정말로 그것 자체가 환경을 파괴하게 된다.


사토; 그렇습니다.


사사키; 그러하다면 현재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웃음)


사토; 그것은 이 프로젝트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3년이 남아서 3년 안에 생각한다는 건데, (웃음) 잘 나아가는 것이 그럼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냐고 비판하지만 그런 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란 건 최근 여러 가지가 개발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벼를 예로 들면 갖가지 품종을 뒤섞어 놓는다. 이것만으로도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콩과 벼를 함께 심어 놓는 새로운 방식도 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예전의 생활 속에 남아 있던 다양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전통적인 지혜를 어떤 방법으로 잘 현대에 살릴지 하는 것이겠네요. 적어도 부시 전 대통령처럼 "옥수수를 모두 연료로 만들어 돈을 버세요"라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세계의 식량이 충분하지 않을 때 옥수수를 연료로 쓴다고 하는 건 상식을 벗어난 발상이라 생각합니다. 저것은 옥수수의 가격이 싸기 때문에 그걸 높이려고 한 말인 듯한데, 그렇다면 말이 안 됩니다. 중요한 건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농업과 먹을거리 전체의 균형을 어떤 식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인지가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토; 그렇지 않으면 지속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요. 그림4-16을 보아 주시겠습니까? 사사키 선생도 이 그림을 기억하고 계실 거라 생각하는데, 나카니시 타츠토시中西立太 씨라는 화가에게 야요이 시대의 논벼농사 복원도를 그려 달라고 한 것이지요. 아래가 옛날판이고, 위가 최신판입니다.



그림4-16 야요이 시대의 논벼농사 상상도


사사키; 이것은 주간 아사히 백과의 <일본의 역사>에 저와 고고학자인 사하라 마코토佐原眞(1932-2002) 씨가 야요이 시대에 행해진 벼농사의 구체적 모습을 그려 달라고 한 것으로, 맨 먼저 나카니시 씨에게 그려 달라고 한 게아래 그림이고 약 20년 전의 초판(1987년)에 게재했습니다. 위의 그림은 그 뒤 사토 씨와 함께 작업한 것으로, 2003년 신정증보판에 게재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그림에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위 그림의 오른쪽 아래와 중앙부의 윗부분에는 잡초가 가득 자라고 있습니다. 20년 전의 아래 그림에서는 휴경 논이 있다는 등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논은 온통벼를 농사짓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꽤 휴경을 하여 그 휴경 논에는 잡초가 가득 자라고 있었단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잡초가 자란 휴경 논이 있는 모습의 그림으로 변경된 겁니다. 


사토; 예, 휴경 논의 발견이네요.


사사키; 그와 같은 점을 우리는 매우 강조한 겁니다. 기존에는, 라기보다 지금도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일본의 논에서는 휴경지 등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토; 저것은 어떤 것이죠. 난폭하군요.


사사키; 그건 열심히 해서 제가 발굴하고, 그곳이 휴경 논으로 벼를 재배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실망하지 않을까요?


사토;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하루나리 히데지春成秀爾 씨에게 혼났습니다. (웃음) "벼를 재배하지 않는 논이 있는 등, 당신은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합니까"라고 이야기를 들었네요. 뭐, 그럴지도 모릅니다. 


사사키; 그런데요, 우리도 포함해서 지금 일본의 모두는 논이라 말할 때 떠올리는 인상은 황금빛으로 익어서 눈에 들어오는 논입니다.


사토; 그렇지요. 저것은 농약과 화학비료와 트랙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즉, 지금의 농업은 완전히 석유로 만들어진다. 그 세 가지가 몰수된다면 에도시대의 농민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납작 엎드려 김매기를 계속 하지 않으면……


사사키; 에도시대의 논에는 말린 정어리 등의 거름을 꽤 넣고 있었지요.


사토; 물론 넣었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환경이란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벼농사를 계속 할 수 있을지 하는 것이지요.


사사키; 이것은 그림에는 없었던 것이지만, 당시의 벼농사라는 건 홑짓기가 아니다. 많은 종류의 벼를 하나의 논에서 재배하고 있었다. 그 많은 종류의 벼는 수확할 때 밑동을 베는 게 아니라 이삭을 베었던 것이 확실해요.


사토; 밑동을 베게 된 것은 좀더 뒤의 일이었지요. 옛 시대는 이삭 베기였죠. 


사사키; 저는 일찍이 네팔에서 향모의 이삭 베기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작물 각각의 익음때가 다르다. 지금처럼 품종이 통일되어 있지 않기에, 알곡이 성숙하는 시기가 제각각이지요. 이건 덜 익었으니 앞으로 일주일 뒤에 베는 등으로 이삭을 보고 베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삭 베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옛 시대의 벼도 익음때가 일치하지 않아, 이삭 베기를 했습니다. 실제로 이삭을 베는 용도의 돌칼도 많이 출토되어 있습니다. 거기까지 이 그림4-16에는 묘사할 수 없었지만, 벼의 품종은 매우 다양했을 겁니다.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오스의 화전에서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하나의 밭 안에 적어도 아홉 종류의 벼가 검출된 일이 있습니다. 사정은 예전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리고 잡초가 가득 자란 논, 즉 휴경 논이 그 근처 안에 많이 있었던 게 실태이지요.


사토; 그렇습니다. 잡초 투성이라서 다양합니다. 그리고 해충이 오는 등으로 말하면, 그것을 일망타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 아마 논과 수로에서 물고기도 많이 잡혔을 테죠. 


사사키; 물고기를 잡는 건 쓰지 않았는데요. (웃음)


사토; 어떻습니까. 다음에 나카니시 씨에게 의뢰할 때에는 통발 등을 사용해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그려 달라고 하는 것이요. (웃음)


사사키; 그렇지만, 예를 들면 모내기도 아주 제각각인 방향으로 모내기를 한다. 이것 등도 그림을 그릴 때 아무쪼록 나카니시 씨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논두렁이 아주 똑바르지 않습니다. 사실 논두렁은 좀더 구부러져 있어서 믿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모두의 인상은 현대의 논이지요. 


사토; 저도 나카니시 씨에게 좀더 어지럽게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역시 화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웃음)


사사키; 저도 여러 주문을 했습니다. 큰 논두렁만이 아니라 작은 논두렁도 있다든지, 나카니시 씨는 대단히 이쪽의 주문에 응해 주셨지요.


사토; 확실히 꽤 현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것이 예전의 논벼농사의 구체적인 모습이어서, 이른바 생태학적으로 말하는 다양한 상황이 보존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사사키; 현재의 논벼농사는 완전한 홑짓기 형식이고 인공적인 면이 매우 높은데, 예전의 논은 그렇지 않고 그 자체 귀하가 말했듯이 생태학적으로 매우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슬슬 시간이 되어가는데, 역시 농경이 다양성을 복원하고 순환적인 특성을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것은환경문제를 생각해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때 무엇을 참고할지 이야기하자면, 우리 인류는 1만 년에 걸쳐 농경을 해 왔고, 그 안에 축적된 여러 가지 지혜가 있을 테지요. 예를 들면 돌려짓기와 휴한을 한다든지, 대규모 단작이 아니라 다양한 작물을 섞어짓기하는 등 많은 지혜가 있습니다. 그 전통적인 지혜를 얼마나 잘 사용하여 새로운 안정적인 농경을 만들어내는지가 앞으로의 큰 방향성이라고 생각해요.


사토; 그래요. 그것은 농사짓는 쪽도 그렇고, 역시 먹는 쪽도 그렇다고 해야 한다. 지금은 슈퍼 등에 가면 일년 내내 토마토를 구할 수 있지요. 그것은 역시 이상합니다.


사사키; 역시 '제철'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래서 저런 똑바른 오이만 파는 건 저 같은 전쟁 중 태어난 인간에게는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소비자도그러한 것을 잘 생각하여, 한번 더 풍부한 농경이 만들어지는 조건을 곰곰히 따져야 한다.


사토; 가치관을 포함하여 재고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프로젝트 안에는 철학자도 들어가고, 여러 사람을 넣고 있는 겁니다. 


사사키; 그것을 이 프로젝트의 지도자인 사토 씨, 당신이 열심히 잘 지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웃음) 


사토; 고맙습니다. (웃음) 그럼 시간이 되었기에 이 정도로 마치려고 합니다.




2008년 5월 17일 도시샤同志社 대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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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Centro de Ciencias Agropecuarias, Universidad Autonoma de Aguascalientes, Aguascalientes, Mexico
  • 2The Southwest Center, University of Arizona, Tucson, AZ, United States
  • 3Centro de Investigaciones Tropicales, Universidad Veracruzana, Xalapa, Mexico

We propose that comparisons of wild and domesticated Capsicum species can serve as a model system for elucidating how crop domestication influences biotic and abiotic interactions mediated by plant chemical defenses. Perhaps no set of secondary metabolites (SMs) used for plant defenses and human health have been better studied in the wild and in milpa agro-habitats than those found in Capsicum species. However, very few scientific studies on SM variation have been conducted in both the domesticated landraces of chile peppers and in their wild relatives in the Neotropics. In particular, capsaicinoids in Capsicum fruits and on their seeds differ in the specificity of their ecological effects from broad-spectrum toxins in other members of the Solanaceae. They do so in a manner that mediates specific ecological interactions with a variety of sympatric Neotropical vertebrates, invertebrates, nurse plants and microbes. Specifically, capsaicin is a secondary metabolite (SM) in the placental tissues of the chile fruit that mediates interactions with seed dispersers such as birds, and with seed predators, ranging from fungi to insects and rodents. As with other Solanaceae, a wide range of SMs in Capsicum spp. function to ecologically mediate the effects of a variety of biotic and abiotic stresses on wild chile peppers in certain tropical and subtropical habitats. However, species in the genus Capsicum are the only ones found within any solanaceous genus that utilize capsaicinoids as their primary means of chemical defense. We demonstrate how exploring in tandem the evolutionary ecology and the ethnobotany of human-chile interactions can generate and test novel hypotheses with regard to how the domestication process shifts plant chemical defense strategies in a variety of tropical crops. To do so, we draw upon recent advances regarding the chemical ecology of a number of wild Capsicum species found in the Neotropics. We articulate three hypotheses regarding the ways in which incipient domestication through “balancing selection” in wild Capsicum annuum populations may have led to the release of selective biotic and abiotic pressures. We then analyze which shifts under cultivation generated the emergence of Capsicum chemotypes, morphotypes and ecotypes not found in high frequencies in the wild. We hypothesize that this “competitive release” can lead to a diversification of the domesticate's investment in a greater diversity of SM potency across different cultural uses, cropping systems and ecogeographic regions. While most studies of plant domestication processes focus on morphological changes that confer greater utility or productivity in human-managed environments, we conclude that changes in the chemical ecology of a useful plant can be of paramount importance to their cultivators. The genus Capsicum can therefore provide an unprecedented opportunity to compare the roles of SMs in wild plants grown in natural Neotropical ecosystems with their domesticated relatives in the milpa agro-ecosystems of Mesoamerica. Even with the current depth of knowledge available for crop species in the genus Capsicum and Solanum, our understanding of how particular SMs affect the reproduction and survival of wild vs. domesticated solanaceous plants remains in its infancy.

Introduction

What changes occur in a Neotropical plant's chemical defenses when it is domesticated for crop production as a food, medicine, vermifuge or condiment, or for all four of these uses? There is remarkably little tested ecological theory regarding how domestication affects plant chemical defenses (Rindos, 1984Johns, 1990Casas et al., 2015). This may be because most phytogeographic, agroecological, and archaeobotanical studies of plant domestication have largely used morphological indicators to track the domestication process rather than identifying phytochemical indicators of changes in ecological interactions. As recently argued by Zeder (2017), ecologists need to identify tractable model systems that allows for an assessment of the core assumptions of the Extended Evolutionary Synthesis (EES).

The domestication of crop plants by human cultures provides one such case study opportunity. That is why we propose that the genus Capsicum can serve as important model system for discerning how changes in secondary metabolites (SMs) reveal shifts in plant chemical defenses that have occurred with domestication. In the case of domesticated chile peppers, these shifts influenced both (1) antagonistic interactions with predators and abiotic pressures, and (2) facilitated (including mutualistic) interactions among chiles, their avian dispersers, nurse plants and human cultures. The integration of ethnobotanical, paleoecological, archeological, linguistic, genetic and evolutionary perspectives on chile domestication that has been in process for the last two decades (Tewksbury and Nabhan, 2001Pickersgill, 2007Tewksbury et al., 2008bAguilar-Meléndez et al., 2009Haak et al., 2012Kraft et al., 2014Carrizo-García et al., 2016) has already contributed substantively to the possibilities of such an EES.

For these reasons, we have chosen to integrate ecological studies of wild Capsicum species in natural habitats of the Neotropics with ethnobotanical, agroecological and nutritional studies of domesticated Capsicum landraces in culturally-managed milpa habitats and indigenous diets of Mesoamerica. By doing so, we wish to further test hypotheses underpinning the theory that a major trend in crop evolution in the Neotropics has been a dramatic shift in the ecological functionality of plant chemical defenses (Johns, 1990). We propose that testing the following three hypotheses can help identify the most parsimonious fit with data and trends involving the evolutionary transition from wild Capsicum annuum var. grabriusculum to domesticated Capsicum annuum var. annuum:

(H1) a reduction and simplification of the potency of plant chemical defenses against seed predators, foliage herbivores and disease microbes with greater reliance on human intervention to protect the plants;

(H2) a diversification of the levels of potency and mixes of defense chemicals, given the wider range of habitats, cultural management and uses, and broader geography to which the crop chile plants are exposed;

(H3) an intensification of the potency of certain plant chemical defenses, given the need to protect the plants in agro-habitats where they occur at higher density and without as much beta diversity of neighboring plant species to slow the spread of predators, herbivores, competing weeds or diseases.

Crop plants in the Solanaceae (including Capsicum chile peppers) may be extremely useful models for looking at changes in potency, diversity or effectiveness of plant chemical defenses which occur with domestication. This is because their SMs and the ecological roles which these plant defenses play have been intensively investigated in the field and in the laboratory for well over two centuries (Johns, 1990Eich, 2008). Neverthless, it remains clear that we lack the detailed knowledge needed to determine how particular plant chemical defenses (e.g., specific capsaicinoids) function in repelling (or attracting) various sets of vertebrates, invertebrates and fungi which serve as seed predators, seed dispersers, fruit and foliage consumers or root parasites on various solanaceous crops. Even with the current depth of knowledge available for crop species in the genus Capsicum and Solanum, our understanding of how particular SMs affect the reproduction and survival of wild vs. domesticated solanaceous plants remains in its infancy.

Of the 97–102 genera represented by 2300–2460 distinct species documented in the Solanaceae (Hunziker, 2001Eich, 2008), SMs (such as the ornithine-derived alkaloids which function as the primary chemical defenses of most of these species) have so far been documented in more than 61 genera (Eich, 2008). Many of the SMs commonly found in the Solanaceae—such as tropane, nicotinoid, pyridine and terpenoid alkaloids—can be toxic or at least repellant to a broad variety of insects as well as to vertebrate herbivores; some also reduce fungal or bacterial infestations of seeds, fruit or foliage. We will focus the rest of this inquiry on the ecological and ethnobotanical consequences of these chemical defenses as found in seeds and fruits of solanaceous crops, with particular focus on chile peppers (Capsicum annuum).

These broad-spectrum alkaloids function as primary chemical defenses in a number of solanaceous crop plants, and in their wild relatives as well. We have therefore placed the domestication of Capsicum species in the context of other domestication studies for the following genera: Jaltomata (xaltomatl, sogorome); Lycium (goji berry); Nicotiana (tobacco); Solanum(potato, tomato, eggplant, garden huckleberry/chichiquelite); Physalis (tomatillo/ground cherry, cape gooseberry/uchuva) (e.g., Johns, 1990Pickersgill, 2007 among many others). While some of the same alkaloids characteristic of many species in the Solanaceace are present in extremely low concentrations in the foliage of Capsicum species, nearly all the species in this genus have taken up an altogether different strategy—Capsaicinoids, for defending their seeds and fruits from biotic stresses.

Departing from the norm in the Solanaceae—where species principally use broad-spectrum and highly toxic glyco-alkaloids for defense—most Capsicum species instead employ another, unique set of SMs that are not appreciably toxic to animals. In contrast to all other genera and species in the nightshade family, both wild and domesticated chile peppers produce several of the 22 known capsaicinoids, with capsaicin, dihydrocapsaicin and nordihydrocapsaicin being the most prevalent, widely-studied and economically important ones. However, it is likely that each distinct capsaicinoid functions in varying degrees to direct avian seed dispersal or to repel and reduce damage by insects, mammals, bacteria and fungi (esp. Fusarium) (Tewksbury and Nabhan, 2001Tewksbury et al., 2008bHaak et al., 2012). Unfortunately, to arrive at a comprehensive EES (Zeder, 2017), we will require more detailed knowledge on the specific ecological effects of 19 of those distinctive capsaicinoids on various faunal and fungal species found in Neotropical habitats.

The ability to produce capsaicinoids is a monophyletic synapomorphic carácter shared by most of the 35 + wild Capsicum species. The exceptions are few, and are found in the wild Andean clade (C. ciliatum = C. rhomboideum, C. scolnikianum, C. geminifolium, C. lanceolatum, and C. dimorphum), and the Longidentatum clade (C. longidentatum) (Eich, 2008Haak et al., 2012Carrizo-García et al., 2016).

Pungency in all other wild chile peppers has a simple genetic basis that is expressed only in glands within the placental fruit, where it serves to protect viable seeds from predation by granivorous mammals, or from microbial infestation. It also facilitates the directed dispersal of seeds by frugivorous birds such as thrashers, cardinals, and finches to safe sites for germination and recruitment under nurse plants, providing an unusually direct ecological link to changes in reproductive fitness that is often missing from studies of chemical ecology (Nabhan, 2004Tewksbury et al., 2008a). Pungency is polymorphic in several wild chile species (Carrizo-García et al., 2016), and such polymorphic populations have been identified along natural environmental gradients (Haak et al., 2012Carrizo-García et al., 2016). These polymorphisms provide unique opportunities to advance an extended evolutionary synthesis from field comparisons of wild and domesticated subspecies in the same crop species and economic genus (Hernández-Verdugo et al., 2001aHaak et al., 2012Chen et al., 2015).

These attributes make chile peppers excellent systems through which to investigate the evolution of adaptive constraints found under various levels of domestication.

Ironically, consumption of the very same capsaicinoids that function as chemical defenses for chile plants have long been used by Mesoamerican cultures as defenses against microbial and invertebrates challenging human health (Nabhan, 2004). Their many indigenous uses as food or medicine has likely benefited overall human health and reproductive fitness in Neotropical environments for well over six millennia (Perry and Flannery, 2007Kraft et al., 2014); these biomedically-significant ethnobotanical uses mediated by SMs (Mostafa-Kamal et al., 2015) possibly triggered the domestication and diversification of chile peppers.

Capsaicinoids are now the most widely used SMs in the world, even though their commercial production is dominated by landraces of just five species in the genus Capsicum. Now culturally-dispersed far beyond the Neotropics, each continent and its biomes favors different ecotypes of place-based landraces such as the tabasco pepper, ghost pepper, piri-piri, aji, habanero, jalapeño, and long green New Mexican chile. Today, more than a third of the world's human population daily consume food products derived from 2500+ landraces, standard varieties and modern hybrids of chile peppers (Tewksbury et al., 2008b). In fact, we predict that if one includes the number of human daily ingesting and topically-applying chile peppers as pharmaceuticals and folk medicinals then over half the world's population are currently consuming some form of chile peppers for nourishment, health and ultimately, reproductive fitness.

We will focus most of our analysis on discerning historic shifts in plant chemical defenses in the most widely-used Capsicum species – C. annuum L., domesticated in the dry subtropical habitats of Mesoamerica over 6,500 years ago (Kraft et al., 2014). We posit that these shifts in SM enhanced, or at least diversified, the mutualistic relationships among chile peppers and indigenous Mesoamerican cultures, as a result of relatively rapid selection and linguistically-traceable diffussion, that intensified around 6,500 years B.P. (Brown, 2010Kraft et al., 2014).

It appears that Homo sapiens is one of the few mammalian species which routinely overcome a deep-seated aversion to the consumption of pungent chile peppers (Rozin and Schiller, 1980Nabhan, 2004), perhaps because the evolutionary benefits of consuming chile fruits outweighed the costs when exposed to environmental challenges, commonly exhibited in certain Neotropical habitats.

Crop Domestication

Domestication is the outcome of both conscious and unconcious selection processes that lead to increased co-evolutionary adaptation of plants to cultivation and utilization by humans in managed environments (Gepts, 2010). Paleolithic cultures developed tools, food preparation and plant selection techniques for detoxifying certain plant foods rich in SMs (Johns and Kubo, 1988Johns, 1990). As such, the coevolutionary response of Mesoamerican cultures to chile peppers certainly included memes, but may also have included the selection of “non-taster” genes in humans for organoleptic tolerance of pungency and bitterness (Nabhan, 2004).

On the other hand, the suite of traits that marks the divergence from its wild ancestor(s) has been defined as the “domestication syndrome” (Harlan, 1992). A domestication syndrome may include selection for combinations of several different morphological and phytochemical traits, including seed retention (non-shattering), increased fruit and/or seed size, changes in branching and stature, changes in reproductive strategy, and, importantly, changes in SMs (Pickersgill, 2007Gepts, 2010Meyer et al., 2012).

Often, domestication selects against traits that formerly increased the plant's defensive or reproductive successes in natural environments (Meyer et al., 2012). However, this generalization may not completely fit for SMs such as capsaicinoids in C. annuum in the Neotropics, where a high diversity of landraces and wild populations express some degree of pungency as a natural defense against predators.

Cultural selection can therefore work in opposition to natural selection, and certain domesticated crops may exhibit reduced fitness, or, in some cases, an inability to survive outside of cultivation (Pickersgill, 2007Gepts, 2010). The very act of moving plants from natural habitats into culturally-managed habitats such as milpas alters the mix of selection pressures, leading to increased adaptation to cultivation, and to actual physical protection from pests and predators by cultural managers, potentially at the expense of traits conferring fitness in the natural environment (Meyer et al., 2012). In the very least, selection pressures for plant chemical defenses against predators might be relaxed if human intervention with the same predators (eg., rodents) is consistently offered to the crop variety over multiple generations.

Secondary Metabolites in Plants

Plant chemicals can be divided into two major categories: primary metabolites (PMs) and secondary metabolites (SMs). PMs are substances produced by all plant cells that are directly involved in growth, development, or reproduction (sugars, proteins, amino acids, and nucleic acids). PMs function in basic anabolic and catabolic processes required for respiration, nutrient assimilation, and growth/development (Kliebenstein, 2004Freeman and Beattie, 2008).

SMs may not be directly involved in growth or reproduction, but they are often involved with plant defense (Freeman and Beattie, 2008), particularly in the case of Capsicum species (Tewksbury et al., 2008b). SMs are considered the major mediators of ecological interactions of plants as a result of their large and diverse biological functions in nature. SMs are produced in response to certain biotic and/or abiotic stress signals or stimuli. They function in the defense against herbivores, microbes, viruses or competing plants, and also as signal compounds to attract pollinating or seed dispersing animals (Wink, 2003). Thus, SMs are very important for plant's survival and reproductive fitness. This complex multirole of SM has led plants to synthesize many different chemical compounds in nature during evolution (Kliebenstein, 2004).

According to their role in plant's defense, SMs have been classified on the basis of their host protection and fostering of beneficial biotic interactions. According to Freeman and Beattie (2008), SMs usually belong to one of three large chemical classes: terpenoids, phenolics, and alkaloids.

Terpenoids include a series of toxic and non-toxic phytochemicals produced in different plant organs that inhibit, repel, or attract other living organisms, such as predators (plant pathogens, herbivores invertebrates, vertebrates) and non-predators (dispersers, pollinators, pest-enemies).

Phenolics include a series of toxic and non-toxic compounds such as flavonoids, isoflavonoids, and phenolic monomers produced in different organs (roots, stems, leaves, flowers, fruits, and seeds). Phenolics and their derivatives have different functions in nature (UV-protectan, antifungal, antibiotic, insecticidal, and others).

Alkaloids are N-compounds produced and aggregated in different organs such as roots, leaves, fruits and seeds. Alkaloid-based SMs may function as bactericides, fungicides, insecticides and allelopathics. Alkaloids may have degrading and digestive effects on different tissues of predators and pathogens. Examples of this type of SM include cafeine, cocaine, morphine, nicotine, atrophine, plus capsaicine and other capsaicinoids. Other N-compounds important for plant chemical defense include cyanogenic glucosides, defensins, lectins, and hydrolitic enzymes.

Therefore, SMs in chile peppers and other solanaceous plants in Neotropical habitats have evolved as defense mechanisms against microorganisms (viruses, bacteria, fungi), herbivores (molluscs, hemipteran insects, vertebrates), and competing plants. They may also function to attraction of pollinators and seed dispersers by virtue of their fragrances and colors they express in the plants. Regardless of the efficacy of such benefits, SMs require a great deal of plant resources and energy to be produced. Consequently, they may be synthesized and translocated after a pathogen or pest has attacked the plant and triggered their activation. once activated, these chemical defensive compounds are usually very effective inhibitors of fungi, bacteria, nematodes, and hemipteran insect herbivores.

Chemical Ecology of Wild Capsicum in Neotropical Habitats

To address the changes in plant chemical defenses that have occurred with the domestication of Capsicum annuum, we must briefly establish the context through which wild chile peppers and other solanaceous plants deal with biotic and abiotic stresses prevalent in the Neotropics. In particular, we will focus on the biotic interactions as well as the biotic and abiotic stresses that wild chile plants may particularly respond to in dry subtropical thornscrub and tropical deciduous forest vegetation types, characteristic of the Sierra Madre Oriental and the Trans-Volcanic Belt in Mesoamerica. At least one EES-style integration has determined that these vegetation types are among the most likely Neotropical habitats where C. annuum domestication and diffusion may have occurred (Kraft et al., 2014). However, because there has been considerable change in the areas covered by these habitat types over the last 6500 years (Kraft et al., 2014), other proposed geographic areas such as the Yucatan peninsula remain viable enough as putative centers of chile pepper domestication that we do not wish to rule them out (Aguilar-Meléndez et al., 2009).

In contrast, the pungency of wild chile pepper fruit repels small mammals that function as seed predators, but directs their dispersal to safe sites under nurse trees where germination, recruitment and establishment have higher probabilities (Tewksbury and Nabhan, 2001Carlo and Tewksbury, 2014). The seeds from these pungent wild chiles are also protected from “predation” by Fusarium fungi that might otherwise leave the infected seeds inviable (as evidence shows for C. chacoense). Thus, the directed dispersal adaptations of wild chile peppers afforded to them by the pungency of their specialized SMs–their capsaicinoids—have conferred to them a level of reproductive fitness that has incidentally allowed them to be present in abundance and accessible to human foragers in the Neotropics for millennia.

Changes in Secondary Metabolite Intensity With Chile Domestication

What are the traits that have been modified as a result of selection under cultivation that have made modern and fully domesticated varieties of chile peppers so poorly adapted to the natural Neotropical habitats? We propose that the morphological and/or phenotypic changes which occurred during cultural selection and domestication of C. annuum have been accompanied by (if not surpassed in importance by) corresponding changes in SMs that regulate ecological interactions of chile peppers with their surrounding abiotic and biotic environments. The complexity and specificity of SMs as chemical mediators of biotic interactions of both wild and domesticated C. annuum in the Neotropics are summarized in Figure 1.

FIGUR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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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Ecological and cultural interactions shaping diversity of chile peppers (Capsicum annuum L.) across Mexico. (A) Graphic illustration of SMs as chemical mediators of ecological interactions with wild C. annuum in natural and semi-managed habitats. (Illustration designed by Frida Isabel Luna-Vallejo). (B) Map of Mexico showing indigenous territories, contrasted by colors. The symbols identify particular ecological zones where certain indigenous groups have persisted in modern times. All indigenous groups represented here have documented uses of chile peppers. (Map elaborated by Andres Lira Noriega and Araceli Aguilar-Melendez based on data from the authors, SINAREFI-SNICS-SAGARPA and SNIB/CONABIO 2016; the layer of indigenous territories was provided by Eckard Boege). (C) A representative sample of the wider array current morpho-typic diversity and levels of domestication of chile peppers across Mexico. (Photos by Ivan Montes de Oca Cacheux and Miguel Angel Sicilia Manzo/Image repository CONABIO).

Wild populations of chile pepper have coexisted and coevolved with many different organisms of tropical origin. Figure 1A focuses on two types of biotic interactions with wild Capsicum species: mutualistic and antagonistic. Every particular plant interaction is regulated by some SM produced and expressed in a particular organ, at a certain phenological stage, in response to specific biotic or abiotic signals. Chile pepper interactions have been strongly influenced by humans and cultural diversity in Mesoamerica over the last 10,000 years. The cultural diversity present in modern Mexico, and a sample of the wide morphological variation and levels of domestication that are currently found in Mexican chile peppers are shown in Figures 1B,C. The variation in Mexican chile peppers also applies to the chemical compounds, which may help explain the wide differences in fruit taste and flavor for different purposes and uses across Mexico.

Chen et al. (2015) indicated that among their various functions, SMs play particularly important roles in insect-plant interactions. Studies that have compared chemical defense traits in wild crop relatives and their cultivated counterparts are increasing in number, and their outcomes consistently show that domesticated plants provide a better food resource for herbivores than their more toxic wild progenitors. Several studies provide evidence of such changes in the chemical ecology and biotic interactions along a domestication gradient (Holt and Birch, 1984Benrey et al., 1998Rodriguez-Saona et al., 2011Dávila-Flores et al., 2013). These widely-observed trends seem to contextualize, if not explain, shifts in the chemical defenses of C. annuum during its domestication in certain but not all, Neotropical habitats of Mesoamerica.

To date, most studies of SMs in C. annuum in Mesoamerica have been focused on fruits of fully domesticated commercial varieties for consumption as fresh fruits (jalapeño, serrano, ancho and sweet pepper morphotypes). In addition, there are few ecological field studies of how capsaicinoids in wild Capsicum species of arid North America and tropical South America mediate relationships with native fauna, but they do not specify which capsaicinoid(s) drive those interactions (Tewksbury and Nabhan, 2001Tewksbury et al., 2008aCarlo and Tewksbury, 2014Haak et al., 2014). Most analyses have concentrated on capsaicinoids and few have included other SMs, such as phenolics and carotenoids. The literature available on SMs in chile peppers is focused on their presence in both, vegetative organs and in fruits and seeds (Do Rêgo et al., 2012Kim et al., 2014). The presence of SMs in different organs and genotypic backgrounds may help explain the existence of natural sources of genetic resistance in Capsicum to particular herbivorous pests and seed predators.

The identities of most SMs remains incomplete among wild C. annuum var. glabriusculum from the Neotropics. However, genetic resistance to Huasteco pepper virus has been documented for wild C. annuum from Nortwest Mexico (Hernández-Verdugo et al., 2001bRetes-Manjarrez, 2016). Of the known cases of genetic resistance among domesticated chile peppers are their tolerance to Phytophthora capsici and root knot nematodes, first documented in the Criollo de Morelos landrace—CM-334 (Pegard et al., 2005) also, leaf phenolic extracts from domesticated chile landraces have been used to control Alternaria altata in tomatoes.

Crop domestication can lead to a decrease in SMs associated with pest resistance, a trend corroborated by Meyer et al. (2012); they found a decline in levels of some SMs across 203 separate crop varieties, relative to levels in their wild progenitors, including C. annuum. However, other SMs, such as capsaicinoids, have dramatically increased within some natural and domesticated chile pepper landraces (e.g., Bhut Jolokia; Bosland and Baral, 2007), so that these changes are not unidirectional.

Given that “original” contexts for how wild Capsicum species function and survive in the Neotropics, Table S1 proposes a set of differences that may have been triggered by “balancing selection” during the domestication process. Balancing selection operated in ways that transformed some wild polymorphic populations into fully-domesticated but still heterogeneous C. annuum landraces. We place particular emphasis on levels of SMs and other adaptations that appear to confer reproductive fitness to Capsicum populations in Neotropical habitats.

Other Changes Occurring With Domestication of Chile Peppers

We do not wish to presume that shifts in SMs were the only changes which have occurred with the domestication of Capsicum species in Neotropical habitats. We wish to briefly mention several other traits of adaptive significance in Neotropical habitats.

Loss of Dispersal Mechanisms

Wild chile peppers are naturally dispersed by frugivorous birds to the understory of selected nurse plants (Tewksbury and Nabhan, 2001Carlo and Tewksbury, 2014), while domesticated chiles depend on human intervention for dispersal. Seed dispersal often involves lost of an abscission zone from some part of the plant. Fruits of wild chile peppers separate easily from the receptacle at maturity. Fruits of domesticated peppers remain firmly attached to the plant. Mature wild chile pepper fruits are consumed and effectively dispersed by a variety of frugivorous Neotropical birds. Domesticated peppers are either too large, or are not attractive to nor dispersed by most Neotropical birds. Different SMs may mediate seed dispersal in wild chiles, but carotenoids in the fruit pulp probably are likely the most important due to bird attraction by their red color. The pyrazine fragrances of chile peppers may also serve to attract certain birds.

Loss of Seed Dormancy

Most wild chile pepper seeds have staggered seed dormancy, which allows germination and recruitment when optimal conditions occur in a more variable and uncertain environment. Domesticated chiles do not exhibit any seed dormancy (Pickersgill, 2007). Therefore, domesticated chiles would likely have poor recruitment, survival and fitness if placed in most naturally wild environments. Seed dormancy in most wild Capsicum species is mediated by SMs such as ABA, a plant regulator that inhibits seed germination (Marrush et al., 1998Sariyildiz et al., 2005Nambara et al., 2010), and lignin, a structurally protective and hydrophobic compound of the seed coat (Randle and Honma, 1981Tewksbury et al., 2008bNambara et al., 2010).

Wild chile pepper seeds with thick lignified testas become increasingly impermeable to water on drying. This feature is disadvantageous for—if not absent from—most domesticated crop seeds, not only because these seeds germinate slowly, but also because they may require prolonged soaking to remove inhibitors from the seed coat (Randle and Honma, 1981Pickersgill, 2007Carlo and Tewksbury, 2014). Therefore, domesticated chile peppers generally have thinner testae than their wild progenitors.

Changes in Organ Size and Quantity

As part of the domestication syndrome, changes in secondary metabolite content may be correlated with other physical and chemical traits, such as nutrient content, size, or biomass (Chen et al., 2015). Compared to most domesticated landraces, wild Capsicum species exhibit smaller leaves, flowers, fruits and seeds, but a larger number of these organs per plant (Pickersgill, 2007). These characteristics—such small but numerous leaves and seeds—confer adaptability, stress reduction, survivability, and bet-hedging strategies to wild chile peppers for the production and dispersal of their seeds in Neotropical habitats (Tewksbury et al., 2008b).

Increased Morphological Variation

According to Chen et al. (2015), morphological changes arising from domestication can disrupt plant-herbivore-natural enemy interactions, however domesticated chile landraces now exhibit enormous inter-varietal and some intra-varietal heterogeneity in morphological traits.

This factor also is especially marked in the parts of the chile pepper plant used by Mesoamerican cultures. While domesticated chile peppers vary greatly in fruit size and shape, and to a lesser extent in color, wild C. annuum var. glabriusculum populations show little morphological variation in fruit size, shape, and color. In certain coastal Neotropical habitats, chile pepper fruits are selected for particular colors and shapes, said to be the best for seasoning turtle meat, while others, of different color and shape, are known as perfume peppers because they have a fragrant aroma as well as pungency. Pickersgill (2007) and Boster (1985) suggest that such traits result from cultural “selection for perceptual distinctiveness.”

In short, the different landraces of chile peppers grown and consumed across Mesoamerica display an astounding range of morphological variation in plant architecture and fruit shape, as well as in fruit color, pungency, and particular cultural uses (Bosland and Votava, 2000). All SMs in Capsicum species, including carotenoids, flavonoids, capsaicinoids, and ascorbic acid, are to some extent, linked with these morphological traits. Boster (1985) has deftly summarized the many references documenting the pronounced differences in morphology between wild and domesticated peppers.

Changes in Plant Habit Related to Resource Partitioning

Selection for increased harvest index (ratio of harvested to total biomass produced per plant) may result in reduced or suppressed lateral branching (Pickersgill, 2007). Reduced number of inflorescences per plant and producing more synchronous fruit ripening on an individual plant and within a stand, facilitating harvesting of the stand as a whole. Fewer nodes and shorter internodes, greater synchronization of maturation of vegetative branches and fruit ripening is also favored by a determinate habit.

The transition from the perennial indeterminate habit of wild chile peppers to the annualized compact habit of domesticated peppers has been triggered by selection for earliness, larger fruits, compact growth/reduced branching with reduced number of fruits per plant, and more synchronous fruit ripening. Loss of perennial plant habit may be the final/accumulated result of human selection for non-dormant seed, which probably modified fruit and seed morphologies, and SM potencies.

Changes in Reproduction

In Capsicum species, floral phenology and pollination, as well as fruit and seed development are influenced by different SMs. For example, carotenoid and flavonoid derivatives are secondary metabolites in the flower that attract pollinators. Similarly, fruit and seed dispersal are mediated by SMs which serve to attract seed dispersers. Simultaneously, fruit and seed protection is mediated by particular SMs (capsaicinoids and phenolics) that repel predators of fruits and seeds.

Wild C. annuum is an autogamous plant with protaginous flowers (exerted stigmas) and high rates of outcrossing by insect pollinators, and indeterminate growth in neotropical Mesoamerica. Flower initiation is late, but once initiated is persistent and very prolific, with overlapping stages of flower and fruit development over the season. Fully domesticated C. annuum land races can also be autogamous, but exhibit much lower rates of outcrossing, probably due to more synchrony in anther and stigma maturation. Most of the fully domesticated chile pepper land races exhibit determinate growth under cultivation, with more rapid onset of flower initiation, fruit development and ripening. For such reasons, fruit and seed production of fully domesticated chile landraces would be almost impossible under natural wild environments in the Neotropics.

Loss of Chemical or Physical Protection Against Biotic and Abiotic Stresses

Many other domesticated crops have partially or completely lost the SMs that protect their wild relatives against predators (herbivores, plant pests and pathogens), and abiotic stresses (drought, salinity, heat, frost, daming radiation, etc.). However, this trend does not necessarily hold true for most domesticated C. annuum land races. Capsaicinoids and other SMs are synthesized in the placental tissue of domesticated chile fruits after flowering as part of fruit development. In other words, in domesticated chiles, SMs may play a small role in chemical defense of plant tissues before fruit and seed development (Meyer et al., 2012Fernández-Marín et al., 2014).

Protection of wild chile pepper fruits in populations against predators is mostly conferred by capsaicinoids, although flavonoids and phenolics may also play protective roles against predators. However, protection against hervibory in wild chile plants (prior to their flowering) is also facilitated by the “prey refugia” offered by the dense thorny canopies of certain nurse plants. Where they lack nurse plant protection in Mesomerican milpas, domesticated chile peppers must rely on farmers themselves to evict (or to reduce the damage potentially wreaked by) mammalian predators and browsers (Pickersgill, 2007Gepts, 2010Padilha and Barbieri, 2016).

With regard to protection against abiotic stresses, wild chile pepper plants employ SMs such as flavonoids, phenolics and vitamin C for protection against drought, heat and daming radiation. In particular, carotenoid derivatives confer protection against plant cell oxidative reactions caused by lethal radiation, such as direct sunlight and UV light (Wahyuni et al., 2013).

Fully domesticated C. annuum landraces express widely varying concentrations of capsaicinoids compared to pungency levels in wild populations. Today, the mildest to most pungent domesticated chiles vary in the capsaicin and pungency content (~5,000–300,000 SHU); with most (but not all) wild populations being in the medium-to-high range (~100,000 SHU) of pungency (Eich, 2008). The hottest chile peppers belong to C. chinense and currently there are some cultivars of this species such as “Bhut Jolokia” and “Trinidad Scorpion” which have around 1.0 million SHU (Bosland and Baral, 2007), and “Carolina Reaper,” the hottest pepper in the world exceeding 1.5 million SHU (Padilha and Barbieri, 2016). Domesticated landraces of C. annuum may also have larger but more variable amounts of other SMs, including more antioxidant capacity (Wahyuni et al., 2011).

Agroecological Context of Milpa Cultivation as a Selective Pressure

Lack of both seed dormancy and a facultatively perennial plant habit probably enabled the shift from avian dispersal of fruits under nurse plant canopies in the wild to open cultivation of annual plants with non-dormant seeds in milpa agro-ecosystems. The loss of ecological interactions with birds and nurse plants due to intentional seed-saving and dispersal by humans must have generated incidental changes in SMs. Shifting the patterns of SMs through such selection could explain, in part, the emergence of new chemotypes, genotypes and morphotype landraces under cultivation in milpas within the Neotropics. The Mesoamerican milpa agroecosystem may have gradually replaced the nurse plants in agroforestry systems during the early domestication of C. annuum, but as it did, it likely accelerated unconscious selection away from wild chemotypes and morphotypes.

Synthesis of Coevolutionary Shifts Occurring With Domestication

We suggest that incipient cultivation and “re-balancing” selection of seed germinability in polymorphic founder populations of C. annuum var. glabrisculum in Mesoamerica around 6500 BP rapidly led to changes in gene frequencies associated with other adaptive traits. Curiously, this is roughly the time period when a new meme –a chile-processing technology and associated culinary techniques–first became evident in the prehistoric cultures of south-central Mexico. This technology was called mollicaxtli in Nahuatl (now molcajete today in Spanish, and consists of a round three-legged, grinding bowl and pestle for crushing dried spices, made out of fired clay or volcanic stone (Vela, 2009).

The molcajete's sudden emergence and wide diffusion suggests that domesticated chile pepper were not merely being eaten fresh, but surplus harvests were being dried and stored between growing seasons for use as a dried spice, condiment, medicine or vermifuge. Undoubtedly, these multiple uses of small, dried chile “pods” emerged long before the selection for larger fleshier fruits, which could be used as a vegetable that was stuffed with meats, fruits or other spices. Thus, a new technology (molcajetes) and its associated culinary uses, as well as seed saving and trade beyond their ancestral habitats may have accelerated selection for a wider range of Neotropical habitats and overall diversification of domesticated chile pepper landraces.

Most remarkably, chile pepper fruits of some cultivated landraces are many times hotter or milder than those of wild populations, suggesting that domestication has not only diversified, but shifted total pungency in both directions—to higher “heat levels” in some varieties (e.g., ghost peppers), and to lesser levels in nearly non-pungent varieties (e.g., bell peppers). There is limited evidence that the mixes of capsaicinoids found in cultivated chile varieties are also more variable than those in wild populations, but comparable sampling has been poor. Neverthless, we see evidence for both (H2)—a diversification of the levels of potency—and (H3)—an intensification of potency of selected SMs with chile pepper domestication.

In the case of milder (less pungent) chile peppers, we assume that farmers' protection of the plants compensates to some extent for lower levels of chemical defenses. Haak et al. (2012) have confirmed tradeoffs between expression of capsaicinoid pungency, and yield under water-stressed conditions. While capsaicinoids remain the most important plant chemical defenses in most domesticated chiles as they are in wild peppers, the roles of other secondary metabolites found in lower concentrations should not be dismissed.

Mesoamerican Human/Chile Pepper Coevolution in Relation to Benefits of Chemical Defenses

According to paleobiolinguistic reconstructions of the presumed origins and diffusion of domesticated chile peppers in Mesoamerica, the oldest reconstructed term for cultivated chiles is found in proto-Otomanguean from south-central Mexico, estimated to be in transcultural circulation by 6592 B.P. (Brown et al., 2013Kraft et al., 2014). This evidence is supported by archeological analyses that confirm the presence of domesticated chile fruit and spice-grinding molcajetes at sites along the Sierra Madre Oriental/Trans-Volcanic by 6000 years ago, especially in seasonally dry subtropical thornscrub (Kraft et al., 2014).

Nevertheless, several lines of research agree that the origin of the domesticated C. annuumlandraces may have also occurred elsewhere within the broader Mesoamerican region (Eshbaugh, 1970Hernández-Verdugo et al., 2001aPerry and Flannery, 2007Pickersgill, 2007Aguilar-Meléndez et al., 2009). In other words, the precise location or locations of domestication of C. annuum in Mesoamerica still remains unknown.

Based on linguistic analyses, Brown (2010) suggests that the earliest plant management in Mesoamerica was of grain, succulent and oil crops; they became cultivated as staples no later than 7000 years ago. The earliest cultivation of spices (including chiles) for seasoning these staples came centuries later.

In short, staples such as maize, maguey, nopal and avocado were probably cultivated to provide seasonal surpluses for storage and consumption at least a thousand years before the earliest detectable onset of chile pepper cultivation as a spice, anthelmentic medicine, vermifuge or condiment (but most likely not as a fresh green vegetable).

The pervasiveness of the use of chile peppers in treating illnesses in Mesoamerica and Aridoamerica (N Mexico and SW USA) is without peer, among any of the other crops domesticated in these regions. This fact alone suggests that the culinary uses of Capsicum were not the only catalysts to domestication. Table S2 shows several ancient medicinal uses derived from extensive studies of indigenous farming cultures in Mesoamerica. Collectively, this information suggests that a “Mesoamerican intellectual tradition” of indigenous medicinal-culinary knowledge (López Austin, 2001Good, 2005) may have guided the selection of SMs and other traits in chile pepper landraces. The very cultural persistence of chile plants (as well as maize, etc.) within milpas and dooryard gardens in this modern globalized world, is clear evidence that ancestral cultural traditions spanning 6000–7000 years, still have adaptive value today.

In addition, the milpa management traditions have been culturally maintained to keep alive what is culturally perceived as a sacred agroecosystem that maintains and regenerates everyday life, community values and collective identities among many Mesoamerican societies (Bonfil-Batalla, 2012Good, 2015). The medicinal, ceremonial and culinary uses of chile peppers by over 60 native cultures in Mesoamerica are embedded a small but inseparable and integral part of a broader cosmovision, one that persists up through this present moment (Alcorn, 1984Long-Solís, 1986López Austin, 2001de Avila, 2008). Any true EES that attempts to use chile pepper domestication as a model system must inevitably take these cultural memes into account.

There is no reason to assume that chiles were first gathered, then cultivated, for a single use, given that tobacco, cacao and other early crops also had multiple uses. However, as staple crops grew in yields and diets became more redundant, chile peppers may have played critically-important roles in protecting grains and legumes aggregated in storage facilities from post-harvest consumption by insect pests and fungi common in the Neotropics. Some of these same chemical defenses in chile peppers may have protected humans who were aggregated into increasingly dense habitations from intestinal parasites, and from body lice or fleas. Finally, the SMs in chile peppers may also have become increasingly necessary elements of the traditional diets and pharmacopeia as “nutraceuticals” that counteracted the greater redundancy in agricultural diets.

The pharmacological utility of SMs in chile peppers is not restricted to the control of fleas, lice and intestinal microbes. They have recently been demonstrated to be effective in reducing intestinal infections by aquatic helminthes of the same group as the intestinal worms that cause ill health and sluggishness among one third of the world's population, especially children in tropical climes (Mostafa-Kamal et al., 2015). This is a clear example of how plant chemical defenses have proven efficacy for “defending” human health against various biotic stresses among those who consume the same plant as a food, a medicine or both (Mostafa-Kamal et al., 2015).

In Table S2, we wish to underscore the myriad medicinal uses retrieved from historical documents that persist to this day in Mesoamerican intellectual traditions. Out of 47 ailments to which chile peppers were applied, 24 of these were recorded among Maya communities. In 2000, fieldwork in Yucatecan Mayan communities documented the persistence of medicinal uses of at least seven different types of chiles (Aguilar-Meléndez and Lira-Noriega, 2018), suggesting that the diversification of chile peppers may continue to generate direct benefits to human health.

Conclusions

In this paper three hypothesis were evaluated and discussed:

(H1) A reduction and simplification of the potency of plant chemical defenses against seed predators, foliage herbivores and disease microbes with greater reliance on human intervention to protect the plants. This assumes that fully domesticated modern and commercial varieties of peppers under intense monoculture are more susceptible to predators (insect pests and diseases), than their wild progenitors, because they produce less number and concentration of SM in fruits, seeds, and leaves.

(H2) A diversification of the levels of potency and mixes of defense chemicals, given the wider range of habitats and broader geography to which the crop plants are exposed. This assumes that different C. annuum landraces in different agroecosystems produce variable amounts and types of SM.

(H3) An intensification of the potency of certain plant chemical defenses, given the need to protect the plants in agro-habitats where they occur at higher density and without as much beta diversity of neighboring plant species to slow the spread of predators, herbivores, competing weeds or diseases. This assumes that some domesticated landraces and modern varieties produce larger concentrations of valued SMs (capsaicinoids and carotenoids) under intense monoculture, compared to their wild progenitors.

Of these three hypotheses, we see more evidence supporting both H2 and H3, with respect to the diversification and heightening of pungency through chile pepper domestication. H2– the diversification of levels in SMs under domestication– seems to fit with the mechanism of “balancing selection,” in the sense of maintaining polymorphisms in Mesoamerican chile pepper landraces. The H3 trend has mostly been in more recently advanced cultivars of chile peppers outside their area of Neotropical origins. The H1 trend toward a reduction in pungency and other SMs such as phenolics and carotenoids in fruits and other organs is most evident in the recently advanced “bell pepper” group of chile landraces and cultivars, which are also most popular outside of the Neotropics. There is no question that sweet bell pepper cultivars of C. annuummust rely on human protection to survive against different predators that may prey on roots, leaves, fruits, and seeds. While birds may damage bell peppers grown in temperate climates outside of the Neotropics, they are virtually ineffective in dispersing the fruit (or most seeds within the fruit) to safe sites for germination and recruitment.

We conclude that contrary to trends in other crops, domestication has not necessarily reduced potency or homogenized the levels of chemical defenses—or at least of capsaicinoids—in chile pepper fruits. It has diversified capsaicinoid potency levels among and across domesticated varieties, compared to those found in most wild chile peppers. However, scientists still lack sufficient evidence to conclude that such diversification has occurred in any other SMs involved in chile pepper plant defense.

The likely diversification of SM production and/or concentration in domesticated C. annuum is the result of differential human selection of different allelic combinations—including selection of many recessive genes, under different environments and managed ecosystems—that are only rarely expressed in truly wild populations (Haak et al., 2014).

Higher concentrations of pungent compounds such as capsaicin may confer better adaptation and fitness to chile pepper crops under novel environments. These highly pungent varieties are now finding new uses in pharmacological and culinary uses, but the majority of the world's human inhabitants continues to directly use wild or domesticated landraces of chile peppers medicinally and gastronomically as they have for centuries.

There is plausible evidence from diverse cultures in Mexico that the SMs expressed in C. annuumfruits have been efficacious in reducing human diseases as well as infestations of internal and external parasites. This may in part explain why so many of the distinctive medicinal uses of chiles persist in nearly every Mesoamerican and Aridoamerican culture today. The nutritional and medicinal benefits of chiles may initially appear diffuse or minor to evolutionary ecologists, but their collective benefits as perceived by their “co-evolved” Mesoamerican cultivators, curanderas, cooks and consumers are impressive.

The extraordinary potency and the current intensity of gastronomic and pharmacological uses of chile peppers (Bosland and Votava, 2000) suggest that chile peppers should no longer be relegated the status of a “minor crop” as standard economic botany references and global agricultural statistics have done in the past. By 2010, global production of domesticated Capsicum fruits had reached 1.8 million ha, with more than 29 million metric tons annually harvested (Wahyuni et al., 2013). Their production continues to expand, while their culinary as well as medicinal and pest-repellent uses continue to diversify.

We should acknowledge that the current efficacy and economic significance of chile peppers' secondary metabolities in our diets and pharmocopieas is not merely due to the historic inventiveness of and mutualistic interactions with our own kind. It has benefited from the selective pressures by fungi, hemipteran insects, nematodes and rodents, as well as the directed dispersal of chile seeds by numerous bird species in the Neotropics. As such, there remains much to be learned by further advancing analyses of chile domestication to serve as a model for extended evolutionary synthesis.

Author Contributions

JL-R: designed research and wrote the paper; GN: designed research and wrote the paper; AA-M: wrote the paper.

Funding

Funding for this publication comes in part from Programa de Fortalecimiento a la Calidad Educativa (PFCE) of the Universidad Autónoma de Aguascalientes, México.

Conflict of Interest Statement

The authors declare that the research was conducted in the absence of any commercial or financial relationships that could be construed as a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The reviewer, DP, and handling Editor declared their shared affiliation.

Supplementary Material

The Supplementary Material for this article can be found online at: https://www.frontiersin.org/articles/10.3389/fevo.2018.00048/full#supplementary-mate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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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s: Capsicum annuum, plant domestication, secondary metabolites, plant chemical defenses, Neotropics, Mesoamerica

Citation: Luna-Ruiz JdJ, Nabhan GP and Aguilar-Meléndez A (2018) Shifts in Plant Chemical Defenses of Chile Pepper (Capsicum annuum L.) Due to Domestication in Mesoamerica. Front. Ecol. Evol. 6:48. doi: 10.3389/fevo.2018.00048

Received: 31 August 2017; Accepted: 05 April 2018;
Published: 24 April 2018.

Edited by:

Alejandro Casas, Instituto de Investigaciones en Ecosistemas y Sustentabilidad, 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 Mexico

Reviewed by:

Daniel Pinero, 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 Mexico
Rosa Lia Barbieri, Embrapa Clima Temperado, Brazil

Copyright © 2018 Luna-Ruiz, Nabhan and Aguilar-Meléndez.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License (CC BY). The use, distribution or reproduction in other forums is permitted, provided the original author(s) and the copyright owner are credited and that the original publication in this journal is cited, in accordance with accepted academic practice. No use, distribution or reproduction is permitted which does not comply with these terms.

*Correspondence: Jose de Jesus Luna-Ruiz, joselunaruiz11@yahoo.com.m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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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기고 3. 어디까지 쓰이는가? DNA        나카무라 이쿠오中村郁郞




이 기고문에 주어진 제목 "어디까지 쓰이는가? DNA"는 농경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DNA 해석이 어디까지 쓰이는지 하는 것이다. 농경사에 관한 생물학적인 측면은 인류가 농경을 개시한 이래 어떤 생물(식물, 동물, 곤충, 미생물)을 생활을 위하여 이용해 왔느냐는 것이다. 이 기고문에서는 농경사 연구에서 DNA 해석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인간은 수렵채집을 영위했던 시대부터 여러 가지 생물을 생활에 이용해 왔다. 먹을거리, 약초, 의복, 건축재, 파수를 보는 개 등이다. 그 뒤 농경 정주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작물의 재배화 및 야생동물의 가축화이다. 작물의 재배와 가축의 사육으로 먹을거리가 안정되었던 것이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고, 농경 문명사회를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각의 농경 문명을 반영한 작물 및 가축의 품종개량이 행해져 왔다. 즉, 작물 및 가축의 시대 변천을 조사하는 건 농경사를 해명하는 데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인간이 어떠한 재배 식물 및 가축을 이용해 왔는지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생물 유체에서 얻을 수 있는 자료가 가장 좋은 증거이다. 생물 유체의 형태 해석, 원소 분석 및 연대측정은 중요한 해석 수단인데, DNA 해석도 유력한 수단이 되고 있다. DNA는 생체를 구성하는 물질 안에서도 비교적 안정되어 있기에 보존상태가 좋은 생물 유체를 찾아낼 수 있으면, 그 DNA를 추출할 수 있다. 미량의 DNA에서 다량의 DNA를 증폭시킬 수 있는 PCR(polymerase chain reaction) 방법의 등장으로(Saiki 외, 1985) 생물 유체의 특정 DNA 단편을 증폭하여 염기배열을 해독할 수 있다.


최근 뉴잉글랜드 바이오사에서 PreCR Repair Mix라는 시약이 판매되고 있다. 이 시약에는 미생물 DNA 수복효소의 혼합물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중 가닥 DNA의 패인 곳(상처)을 수복할 수 있다. 생물 유체의 이중 가닥 DNA에는 산화에 의하여 다수의 패인 곳이 들어 있기 때문에, PCR 방법으로 긴 DNA 단편을 증폭할 수 없어서 이 시약은 앞으로 DNA 해석을 행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고대 생물 유체의 DNA 해석을 행하려면, 현생 생물과는 다른 문제점이 있다. 현생 생물의 DNA를 해석할 경우에는 다수의 DNA 표지자를 해석하거나 긴 염기배열을 해석하거나 할 수 있는데, 고대의 생물 유체에서 추출할 수 있는 DNA는 매우 미량이며 단편화되어 있어서 어떤 염기배열을 목표로 해석해야 할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즉, 소수이며 짧은 염기배열을 해석하는 것으로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Nakamura 외(1997)는 엽록체 DNA의 rpl16 유전자와 rpl14 유전자 사이의 염기배열을 해석하는 것으로 고등식물의 종을 추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plastid subtype identity(PSID) 배열이라 명명했다(그림1). PSID배열은 100-300 염기로 짧고, 식물의 조직에는 다수의 엽록체 DNA가 포함되어 있어서 고대의 식물 유체 및 종자의 DNA 해석에 적합하다. 실제로 벼와 돌콩, 메론 등의 고대 종자의 DNA 해석에 이용되고 있다. 또한 범죄 수사에서 식물 증거물 및 식물 원료의 종을 감정하는 등에도 응용되고 있다.



그림1 엽록체 DNA의 PSID(plastid subtype identity) 배열. PSID 배열은 rpl16 유전자의 마지막 코돈의 T에서 rpl114 유전자의 바로앞까지. 한 대의 프라이머(rpl5P 및 rpl3P)를 써서 염기배열을 증폭, 해독한다.



그러나 PSID 배열은 엽록체 DNA의 염기배열이기에 식물에서 많이 인지되는 배수체와 종간 잡종 등의 판정을 할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예를 들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약 3000년 전의 소하묘 유적에서는 다량의 밀 종자가 발굴되었는데(그림2), 엽록체의 PSID 배열의 해석에서는 몇 배체의 밀인지 해명할 수 없다. 밀에는 2배체와 4배체, 6배체의 재배종이 있다고 알려져 있고 종자의 크기를 통해 어느 정도의 배수성인지 예측할 수 있지만, 혹시 핵 DNA의 해석으로 게놈 구성을 해석할 수 있다면 훨씬 유익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그림2 신장 위구르 소하묘 유적에서 출토된 미이라와 밀 종자



생물의 진화는 미토콘드리아 및 엽록체 DNA보다도 핵 DNA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밝혀졌기에, 핵 DNA(게놈)을 특정할 수 있는 염기배열을 발견할 수 있다면 생물고고학에 매우 유익한 도구가 된다. 세균 분야와 고세균에서는 16S rRNA 유전자의 염기배열을 이용한 분류가 실용화되고 있다. 또한 진핵생물에서도 18S 및 28S rRNA 유전자를 이용한 분류가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핵 안에 다수의 rRNA 유전자가 늘어서 있거나 또는 군데군데 존재하여, 얼마 안 되지만 염기배열의 변화가 인지된다고 엄밀한 의미에서 rRNA 유전자의 염기배열을 추정할 수는 없다. 


그럼 생물 유체에서 어떤 핵 DNA 배열을 해석하면 좋을까? 이 문제는 현재의 생물학이 안고 있는 난제 "종이란 무엇인가?"와 동일한 문제이다. 린네는 생물 형태의 차이에 기반을 하여 종을 구분하고, 이명법으로 체계화했다. 이 경우 종이란 형태가 유사한 집단이다. 또 이밖에도 교잡친화성에 기반을 한 생물학적 종 개념, 지리적인 격리에 기반을 한 지리적 종 개념 등이 있다.


한편 최근 DNA 해석기술의 진전에 따라, 대량으로 집적된 DNA 배열 정보를 사용하여 종을 식별하려는 연구가 성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연구 -예를 들면, 분자계통수에 기반한 Phylocode(Gauthier and Queiroz 1990)와 미토콘드리아의 COI 유전자 배열에 기반한 DNA barcoding(Herbert 외 2003)은 기존의 분류체계와는 독립된 개념이라, 린네 이후 250년 동안 방대해진 자료와의 관련성이 의문시되고 있다. 특히 식물에는 동물과 진균류에는 몇 안 되는 종간 교잡 및 복이배체가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Phylocode와 DNA barcoding으로는 분류가 곤란한 경우가 있다. 


현재 생물 유체의 DNA 해석에 장벽이 되는 건 린네의 형태적인 종 개념과 대응하는 핵 DNA 표지자가 발견되지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몇몇 군데의 짧은(50-200bp) 염기배열을 해석하여 생물의 종(아종)과 게놈 구성을 특정할 수 있다면, 농경이 기원한 이후 1만년 동안의 생물 유체 DNA 해석은 알맞은 연구대상이 될 것이다. 생물 유체는 그 형태를 가지고 속 정도는 판정할 수 있는데, DNA 해석으로 종과 게놈 구성을 해명할 수 있다면 더욱 상세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앞에 기술한 소하묘 유적에서는 밀 종자가 세 종류의 벼과식물로 짠 바구니 안에 담겨 있었다(그림3). 이 세 종의 벼과식물의 종명을 특정할 수 있다면, 소하묘 유적 주변의 당시 환경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재배되었던 밀의 게놈 구성을 알 수 있으면, 밀의 생산량과 용도를 밝힐 수 있다. 게다가 소하묘 유적에서는 다수의 소 머리뼈가 출토되었는데, 어떤 소인지를 특정하여 소하묘 유적을 남긴 민족이 어느 지역에서 이동해 왔는지를 추정할 수 있다. 



그림3 출토된 밀 종자가 담겨 있던 3종류의 벼과 풀로 짠 바구니



최근 DNA 해석을 쉽게 행할 수 있게 되면서 종과 아종을 구별하지 않고 유전자형만 해석하는 연구가 여럿 인정된다. 예를 들면, 재배 벼는 자포니카와 인디카라는 생태형으로 분화되는데 둘에 찰 유전자자리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만일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구별하지 않고 찰 유전자자리의 유전자형만 조사하는 연구를 행한다면,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그것은 민족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혈액형만 조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 기고문의 '어디까지 쓰이는가? DNA'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종과 게놈을 특정할 수 있는 핵 DNA 배열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걸 전제조건으로 내세워야 하는데, 생물 유체의 DNA 해석은 농경사를 해명하기 위하여 앞으로 없어서는 안 될 해석 수단이 된다고 답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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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1장  벼농사와 벼농사 문화의 시작  中村愼一




들어가며


2008년 1월, 중국에서 벼농사 고고학 연구의 전문가 4명을 일본에 초청해 최신 연구성과에 대한 보고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점은 중국의 벼농사 기원론이 이미 "언제, 어디에서?"의 단계에서 빠져나가 "왜, 어떻게?"의 단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 야생 벼가 자생하지 않는 일본의 경우와 달리, 그것이 자생하는 중국에서는 벼 자료의 출토=벼의 인공 재배가 아니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의 연구자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야생인지 재배인지를 분간하는 판단기준을 딱 정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결과적으로 '재배종이기를 바란다'는 확신이 때로는 연구자의 눈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림1-1 중국의 초기 벼 자료 출토 유적

1. 하남성 무양舞陽 가호賈湖 유적

2. 호남성 풍현澧縣 팽두산彭頭山 유적, 팔십당八十 유적

3. 강서성 만년현萬年縣 조통환桶環 유적, 선인동仙人洞 유적  

4. 절강성 포강浦江 상산上山 유적

5. 절강성 승주嵊州 소황산小黃山 유적

6. 절강성 소산蕭山 과호교跨湖橋 유적

7. 절강성 여도 하모도河姆渡 유적

8. 절강성 여도 전라산田螺山 유적

9. 절강성 동향桐鄕 라가각羅家角 유적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확실한 판단기준을 어떻게든지 수립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는 야생, 여기서부터는 재배라고 딱 잘라 버리지 않고 양자를 일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학계에도 꽤나 퍼졌다고 느낀다. 


아시아 벼농사 기원의 문제는 완신세完新世의 환경변화에 야생 벼가 어떤 대응을 보였는지,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문화적 적응으로 그에 응했느냐는 관점에서 추진해야 할 터이다. 그를 위하여 고정도高精度의 옛 환경 복원과 동식물 유존체의 정성, 정량 분석 등 자연과학 여러 분야와 고고학의 협동이 필수이다. 본론에서는 그러한 접근으로부터 지금까지 어떤 것이 밝혀졌는지에 대하여, 일본과 중국 공동 연구의 성과 등도 나누면서 개관하겠다.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벼농사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학계에서 아시아 벼농사 기원 연구를 주도한 건 농학과 민족식물학이었다. 거기에서는 '운남-아삼 기원설'이 제창되어(渡部 1977), 한때는 정설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고고학의 증거는 그 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30년 사이에 축적된 고고학 자료는 그것이 동시대의 자료인 만큼 압도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가 중국의 장강 유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다만, 그 구체적인 연대를 어디에 둘지에 대한 의론이 분분하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재배종인지 어떤지 판단하는 지표가 연구자에 따라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 설에 대하여 하나하나 상세히 살필 여유는 없다. 관심이 있는 분에게는 졸저(中村 2002)를 보시라 권하고, 여기에서는 개요만 소개하고자 한다.


1만 년을 넘는 오래된 벼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던 유적은 장강 중류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강서성의 조통환, 선인동 유적(모두 잎의 세포화석), 호남성의 옥섬암玉蟾岩 유적(잎의 세포화석과 꽃가루) 등이다(그림1-1). 잎의 세포화석이란 벼잎의 기동세포라는 특수한 세포 안에 남아 있는 일종의 유리이다. 생리적, 화학적으로 강하고, 장기간 토양 속에서 보존된다. 토양 속에 벼잎의 세포화석이 존재하는 것은 그곳에 벼가 있었단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것이 곧 재배 벼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 여러 유적은 모두 동굴 유적이고, 그곳에서 벼가 살았을 리는 만무하나, 조통환 동굴처럼 주위의 평지에서 수십 미터나 위로 솟아 있다면, 마른풀이 바람에 날려 들어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완신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이전에 사람에 의해 무언인가 형성된 벼의 이용 -땔감이나 깔개로 이용하는 것도 포함- 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장강 하류로 눈을 돌리면, 이번 세기에 들어와서부터 발굴조사가 행해진 절강성의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소황산 유적(약 9천 년 전)에서는 토기의 바탕흙 안에 대량의 알곡이 섞여 있었다(그림1-2). 식물규산체가 발견된 것만으로 벼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벼의 열매=알곡을 이용했다는 건 아닌데, 이쪽은 틀림없는 알곡이다. 그것이 속의 쌀을 꺼낸 뒤의 왕겨인지 쌀이 들어 있던 채로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혼합재로 이용하기 위해서만 알곡을 모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먹을거리로 쌀을 이용하고 나머지 왕겨를 유효하게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일리가 있다.


토기 바탕흙의 혼합재로 왕겨를 이용하는 일은 조금 늦게 장강 중류에서도 시작된다. 호남성 풍현에 있는 팽두산 유적과 팔십당 유적 같은 팽두산 문화(8000-7000년 전)의 토기가 그것이다. 토기 종류의 구성을 보아도 그 이전의 것에 비하여 상당히 분화가 진행된 데다가, 명확하게 요리도구라고 할 수 있는 '솥'의 수량이 많아진다. 식물질 먹을거리 의존도가 증대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림1-2 상산 유적 출토 토기. 단면에 검게 보이는 것이 혼합재의 왕겨.



거의 동시대에 놓인 하남성의 가호 유적과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에서는 왕겨가 토기의 혼합재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유적에서는 탄화미, 붉게 탄 흙(紅燒土)에 알곡 압흔, 그리고 잎의 세포 화석 같은 여러 가지 형태로 벼 자료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현재 있는 고고자료로 미루어 보는 한, 지금으로부터 8000년쯤 전에 벼 이용이 강화된 동시에 지리적으로도 확대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약 7000년 전쯤 되면, 장강 하류에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가 전개된다. 토기의 종류 분화는 더욱 진행되고, 쌀 조리에 특화된 종류인 '시루(=찜기)'가 출현한다. 또한 농기구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뼈삽날(骨耜)도 다수 출토되고, 이외에도 벼농사 의례에 관련된 것이라 생각되는 기물도 적지 않다. 논의 검출 사례는 현재로서는 약 6000년 전의 마가빈 문화 후기까지로만 거슬러 올라가는데, 앞으로 오래된 사례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즉, 여러 가지 상황증거로 미루어 보는 한, 하모도/마가빈 문화기에는 그 이전부터의 채집에 더해 벼의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이 7000년 전이란 연대를 중국 벼농사 개시의 하한년대로 잡는다(나의 이러한 견해는 학계에서 '신중론'이라 친다. 벼농사의 시작을 1만 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학계의 추세라는 점을 굳이 덧붙여 놓는다). 그에 대하여 일찍이 아시아 벼농사의 원향이라 여겨지고 있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연대는 그보다도 몇 천 년 늦다. 구체적으로, 인도 아대륙에서는 5000년 전쯤, 동남아시아 대륙부에서는 4000년 전쯤이다.


중국으로부터 일원적으로 이들 지역에 벼농사가 확산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벼농사 보급의 파도가 운남과 광서 같은 화남의 주변부에 도달한 연대는 오래되었다고 어림잡아도 5000년 전이다. 특히 인도의 경우 3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주변부에 도달하는 연대와 거의 동시에 벼농사가 시작된다. 동심원적인 파급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 인도, 그리고 가능성으로는 동남아시아에서도 시기를 달리 하여 저마다 벼의 재배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어쨌든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전 벼농사가 시작된 곳은 중국이다. 그곳에서 중국의 대지를 무대로 전개된 인간과 벼의 관계의 역사를, 환경고고학과 식물고고학의 시점을 섞어 넣으면서 계속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빙하기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유럽과 북아메리카가 빙상에 덮힌 한랭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인다. 빙하기라 해도끊임없이 추위가 계속된 것은 아니고, 한랭한 시기와 온난한 시기가 반복하여 미세하게 변동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질시대에서 가장 새로운 빙기는 뷔름 빙기(아메리카에서는 위스콘신 빙기)라고 부르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7만 년 전부터 약 1만5천 년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바닷물에서 증발된 수분이 눈이 되어 육지에 내려 쌓이는데, 그것이 녹지 않고 곧바로 빙하로 발달한다. 증발한 물이 되돌아오지 않기에 해수면은 낮아진다. 뷔름 빙기의 가장 한랭기(1만6천 년 전쯤)에 해수면은 현재보다 120미터나 낮았다고 여겨진다.


이 최종 빙기가 종언을 고한 뒤 기온이 단숨에 상승했는데, 그 뒤 재차 '영거 드리아스기'라고 부르는 추위가 1300년 정도 이어진다. 그러나 그 추위도 1만1600년 전을 경계로 급격한 온난화로 뒤바뀐다. 지질시대라 말하는 완신세의 시작이다. 그 뒤 기온은 상승의 한 길을 걸어, 6000년 전쯤에 최고온기('힙시서멀기' 또는 '기후적기'라 부른다)를 맞이한다. 이 시기, 예를 들어 중국의 장강 하류에서는 기온이 현재보다 2-3도 높고, 강수량은 500-600mm 많았다고 복원되어 있다(王, 張 1981).


중국 장강 유역에서 벼의 채집이 시작되어, 이윽고 재배로 진전된 건 영거 드리아스기와 힙시서멀기 사이의 기후격변기의 일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의 옛 환경과 지리에 관한 정밀한 복원 연구는 매우 부족하기에 여기서부터는 상상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은데, 나는 그 과정을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완신세 전반의 급격한 온난화는 비가 자주 오도록 만들었다. 최종빙기에는 낙엽수의 숲과 건조한 초원이 탁월하던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가 광대한 늪과 호수와 습원으로 순식간에 그 모습이 변했다. 기온이 높은 비가 많이 오면, 야생 벼에게는 절호의 생식환경이다. 최종빙기에는 추위로부터 도망와 화남과 동남아시아에 후퇴하여 숨을 죽이고 있던 야생 벼가 나갈 차례가 도래했다.


재배 벼의 선조에 해당하는 Oryza rufipogon이란 야생 벼, 그중에서도 특히 자포니카형인 것은 여러해살이의 경향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폭넓은 변이가 존재하여 한해살이에 강하게 기운 그룹도 있다. 아마 그러한 그룹이 그 탁월한 이주능력을 무기로 재빨리 북상을 시작해 곧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에 대규모 군락을 형성했을 것이다. '쌀알만큼'이라 하면 작은 것의 예이다. 한 알, 두 알 먹는 걸로는 배를 채울 수도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모두 벼의 군락이 펼쳐져 있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로 그때 해수면의 급속한 상승으로 육지면적이 맹속력으로 감소했다. 동중국해에 면한 절강성과 강소성 부근에서는 6000년 정도 사이에 해안선이 500-700킬로미터나 내륙으로 후퇴했다. 즉, 해마다 100미터씩 육지가 수몰되어 사라졌다고 계산된다. 거주할 수 있는 토지의 면적이 좁아지면 야생 먹을거리 자원에 대한 인구압이 높아진다. 그때까지는 먹지 않던 야생 벼의 종자가 수렵채집민의 눈에 매력적인 먹을거리로 비춰지게 되었다.


단 하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았다. 장강 중하류의 대습원지대, 예를 들면 고대에 '운몽택雲夢澤'이라 부르던 양호 평야(호북성의 강한江漢 평야와 호남성의 동정호 평야)의 중심부 등에서는 끊임없이 수위가 크게 변동하기 때문에, 정주생활을 영위하기란 매우 곤란했다. 그래서 홍수의 피해를 받는 일이 없고, 또 습지와 산야의 양쪽에 접근할 수 있는 저지/구릉의 이행지대나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강서성 조통환과 선인동, 호남성 옥섬암, 절강성 상산과 소황산 등의 여러 유적은 바로 그러한 입지에 있다.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그건 아직 매우 한정적인 일이었다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8000년-7000년 전쯤이 되면 물 환경이 불안정한 저지로 진출하는 선구자가 나타난다.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과 하모도 유적(모두 해발고도는 약 4m)이 그 대표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일본의 연구진이 베이징 대학,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와 공동조사를 실시했던 절강성 전라산 유적에 대하여 소개하려 한다.


영소寧紹 평야의 동단 근처에 위치한 이 유적은 하모도 문화에 속하여, 중심적인 문화층의 연대는 약 7000-6500년 전으로 짐작된다(그림1-3). 유명한 하모도 유적에서 7킬로미터 정도만 떨어져 있다. 하모도 유적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저지대 유적이고, 인골과 동물뼈, 목재, 식물 종자 등의 유기질 유물의 보존상황은 꽤나 양호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자연과학적 분석을 실시했는데, 그 가운데 나라 교육대학의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가 행한 규조 분석의 결과는 대단히 흥미롭다(金原 최근 출간).



그림1-3 전라산 유적 원경(가운데 돔이 유적 박물관)




규조란 단세포의 조류로, 바닷물과 민물, 그리고 일부는 토양에서도 생식한다. 그 이름은 규산질의 단단한 껍질을 가진 데에서 유래하는데, 규조 본체가 죽어도 그 껍질만은 수백 년, 수천 년을 남아 있는다. 또 똑같이 바닷물이어도 난바다, 내만, 개펄 등에 생식하는 종류가 다르다. 껍질의 크기나 형태, 표면의 모양 등을 조사하여 종을 동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와 비율에 따라 규조의 껍질이 퇴적된 당시의 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분석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유적에 사람이 거주하기 직전의 시기, 그곳에는 개펄이 펼쳐져 있었다. 해수면 높이는 현재보다 1미터 정도 낮았다고 추정된다. 그 뒤 해수준은 마이너스 2.0미터 이하까지 낮아진 걸로 보이고, 이 땅은 육지화되어 인간의 거주가 시작된다. 당시 유적은 해수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강가 습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해수면이 다시 상승을 시작해 최고기에는 현재보다 약 2미터 높아졌다(힙시서멀기의 최고 해수준). 토지는 해면 아래로 가라앉고, 마을은 방기되었다. 즉 이 유적은 완신세의 해진기에 영위된 유적인데, 해진기에도 해수면이 변동하여 끊임없이 계속 상승하던 해수면이 일단 조금만 물러난 시기에 출현했던 육지에 입지하고 있었다.


유기라 하더라도 그곳은 민물 유역의 가장자리여서, 습지 같은 장소였을 것이다. 이 전라산 유적에서도 하모도 유적에서도 주거는 고상식(역주; 마루를 높게 쌓은 형태)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저습지에 거주하기 위한 하나의 적응 수단이었다. 고상식 주거의 주변에는 수많은 목제품이 남아 있다. 건조한 지면 위에 남아 있던 목제품은 거의 곤충, 균류, 박테리아 등에 의해 분해되어 버려서 몇 년만 지나면 흔적도 남지 않는 게 보통이다. 많은 목제품이 양호한 보존상태였던 건 마을 자체가 저습지 안에 있어 버려진 목제품이 늘 물에 잠긴 상태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덧붙여서, 고상식 주거의 근처에서 목제 노가 8점 출토된 것은 일상의 교통수단으로 통나무배가 애용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유감스럽게도 이 유적에서는 통나무배 자체가 아직 출토되지 않았는데, 이 유적보다도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 통나무배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하모도 문화기에 통나무배가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고상식 주거와 통나무배라는 두 가지 물품, 그것은 저습지에 정주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과호교 유적에서 검출된 집터는 흙벽을 세운 평지식 주거였는데(절강성 문물고고학연구 외 2004), 이 유적에서는 나무 하나로 만든 사다리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주거 부분은 2층이었거나 또는 적어도 먹을거리 창고는 고상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저습지로 진출하는 데에는 그것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벼도 도토리도 종이 한 장 차이


앞에 기술했듯이, 벼를 이용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저습/구릉의 이행지대와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절강성의 유적을 예로 들면, 상산 유적과 소황산 유적은 전라산과 하모도 등의 하모도 문화기의 유적과 그보다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 비하여 훨씬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표고도 50미터 안팎으로 상당히 높다. 과호교 문화와 하모도 문화의 시기, 사람들은 산간의 분지를 떠나 해안 근처의 평야부로 진출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지역에서 1만 년 전의 해안선은 현재의 그것보다 몇 백 킬로미터나 난바다 쪽에 있었기 때문에 해안 근처에 사람의 거주가 있었더라도 그 유적은 깊은 해저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이제 와서 보면 찾아낼 길이 없다. 그러한 불확실함이 남아 있는 건, 어느 시기부터 '물가'라는 경관이 중요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일본과 중국 공동 프로젝트에서는 출토 종실에 대해서도 상세히 분석했다(傳, 趙 최근 출간).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전라산 유적에서는 확실히 벼의 종자도 수없이 출토되지만, 마름의 알곡과 도토리(대부분은 개가시나무) 쪽이 수량에서는 벼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출토 종자의 수에서는 벼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종자의 크기를 고려하면 가시연 알곡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출토된 종자의 숫자 비율이 각 식물이 당시의 식생활에서 점했던 비중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니더라도, 벼가 출토되었다는 걸 곧바로 날마다 쌀만 먹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건 현대에 갖다 붙인 해석이어서 그러한 선험적 발상은 확실히 위험하다. 장강 유역에서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하모도 문화기에 이르기까지 벌써 몇 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벼는 아직 '보물의 하나'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벼농사의 기원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장기에걸친 완만한 과정이었다는 걸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결과에 눈을 돌려 보자. 꽃가루도 또 산과 알칼리에도 침범되기 어려운 단단한 외막으로 덮여 있어, 흙속에서 장기간 보존된다. 토양 표본 안에 포함된 꽃가루의 식물종 수량비를 통해 당시의 식생을 복원하는 것이 꽃가루 분석의 원리이다.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을 담당했던 사람이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이다. 유적이 거주하고 있던 당시의지층에서는 부들과와 벼과 식물의 꽃가루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벼과 식물은 꽃가루의 형태만으로는 종까지 특정하기 어려운데, 잎의 세포 화석 분석 결과 등을 감안하면 그 대부분은 갈대와 벼였다고 생각해도 좋다. 부들도 갈대도 벼도 습지의 식물이며, 규조 분석의 결과와도 부합한다. 이러한 물가 식물과 함께 많이 산출된 것이 북가시나무 아속을 주로 하는 조엽수의 꽃가루이다. 습지를 에둘러싼 높이 100미터 정도의 좀 높은 산들은 조엽수가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걸 말한다. 그곳에서는 가을이 되면 도토리가 가지가 휘도록 열매를 달았을 것이다(개가시나무도 북가시나무 아속인 식물이다).


갈대와 부들이 습지의 가장자리에 군락을 형성하는 데 반해, 조금 수심이 잎은 곳에는 마름과 가시연이 많이 살고 있었다. 유적에서는 잉어와 붕어 같은 민물고기, 거북과 자라 같은 파충류, 오리와 기러기 같은 조류의 뼈도 무수히 출토되었는데,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에 대해서도 늪과 못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수렵의 대상이었던 포유류로는 물소와 각종 사슴 종류가 주체를 점하였는데, 이들도 물가에 모이는 습성을지닌다. 이미 벼의 재배도 시작되고 돼지도 사육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물가의 환경에서 수렵, 어로, 채집으로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가 식생활의 대부분을 점하며 도토리 같은 산야의 산물이 그것을 보충하는 생업경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종다양한 자원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생업경제의 상태를 고고학, 인류학의 분야에서는 '다각적 경제(broad-spectrum economy)'라고 부른다.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최후의 빙하기를 극복한 뒤에 비로소 이 다각적 경제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일반 독자는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식물의 종자와 뿌리를 통해 탄수화물을 얻고 물고기와 물새의 고기에서 단백질을 얻는 식생활은 기껏해야 1만 년 정도의 역사밖에안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신기원이었다.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이 시작된 건 특히 중요하다. 그 결과 일어난 물질문화의 커다란 변혁이 토기의 발명이며, 사회적인 크나큰 변혁이 정주생활의 개시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와 아울러 가장 일찍 농경이 시작되었던 서아시아에서 토기는 출현 당초 주로 저장용기로 사용된 것 같다.  그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는 취사의 도구로 시작되었다. 중국 남반부에서는 벼, 북반부에서는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이 우선 재배되었는데, 그 이전 단계인 채집단계에서도 녹말을 알파화하여 소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열이 필요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토기에 넣고 펄펄 끓이는 것이다. 도토리의 경우 생식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모밀잣밤나무와 개가시나무) 가열하면 맛이 좋아지고 해충이 구제되고 오래 보존할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며, 탄닌을 많이 포함해서 떫어 먹을 수 없는 종류의 도토리에서 떫은맛 제거를 촉진하는 효과도 있었다.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토기 제작의 개시는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과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용되는 식물의 종류가 달랐을 뿐이다. 일본에서 도토리 종류에 더해 밤, 칠엽수 같은 견과류와 좀처럼 증명하긴 어렵지만 각종 근경류가 대상이 되었던 듯하다. 한편 중국에서도 일본과 거의 같은 종류의 견과류와근경류가 존재했는데, 거기에 벼와 조, 기장 등의 벼과 초본과 대두(중국 동북지방부터 화중에 걸친 지역이 원산지일 가능성이 높음)가 더해져 있었다. 그 뒤의 두 가지가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식물질 먹을거리에 대한 의존이 강해진 결과 정주화가 촉진되고, 인구는 증가한다. 그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전에상세히 서술했기 때문에(中村 2002), 여기에서는 반복하지 않는다. 특히 정주 마을의 형성이란 점에서는 중국보다 일본 쪽이 선행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인구는 변동을 반복하면서도 서서히 우상향으로 계속 증가해 머지않아 국가의 형성과 도시의 발생 -문명의 탄생이라 바꾸어 말해도 좋은- 으로 우여곡절 끝에이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에서는 기원전 4천년대의 후반부터 3천년대의 후반까지 1천 년 사이에 각지에서 그것이 달성되었다. 일본의 조몬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친 시기에 해당한다. 확실히 일본에서도 조몬시대 중기에는 수많은 마을이 경영되어 이 시기의 인구도 상당히 많아졌다고 추정된다(今村 1997). 환경조건에 혜택을 입었던 '풍요로운 수렵채집민(affluent forager)'의 한 도달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중기에 정점에 이르른 조몬인의 번영도 오래가지 않았다. 후기에 들어서면 적어도 동일본에서는 급격한 인구 감소가 있었던 것이 출토 주거터 수의 분석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반드시 명확한 건 아니지만, 힙시서멀기 이후 기후의 한랭화, 건조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자연의 은혜에 전면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수렵채집민의 한계가 있었다. 


일본에서도 완신세 당초부터 식물질원의 이용이 시작된 것은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벼, 조, 기장, 대두 같은 한해살이 초본의 야생종이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 열도에서는 채집의 대상이 견과류와 근경류였다. 견과를 다는 목본류는 종자번식이라 하여 생장이 느리고, 근경을 이용할 수 있는 초본류는 영양번식이었다. 인간이 활용하기 좋은 형질을 선택하고 그것을 재배종으로 고정시켜 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결과적으로 오래 채집 단계에 멈출 수 없었다. 도토리를 먹든지 벼를 먹든지 출발점에서 차이는 종이 한 장임에도 불구하고, 재배화가 가능한 야생의 한해살이 초본의 유무가 몇 천 년의 시간을 거쳐 일본과 중국 두 곳의 사회 진화에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벼의 재배화에 성공했던 중국에서는 관개논의 창출에 의하여 기후의 악화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인구가 급감한 조몬시대 후기의 일본 열도에서는 주술에 관한 각종 기물이 성행한다. 거기에는 자연을 두려워하고 주술에 침잠하여 자연의 은혜에 매달리려 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일본 열도의 주민이 자연의 위력이 지닌 주문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두려워하게 되는 데에는 야요이 시대 초기에 열도의 밖에서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이주를 기다려야 했다. 



① 야생 벼의 채집 -토기, 석제 갈판, 목제 절구

② 야생 벼 종자의 인위적 파종


③ 재배 벼 형질(비탈립성)의 출현


④ 재배 벼 형질의 확립(=야생 벼와 유전적 격리) -논


⑤ '벼농사 문화'의 성립 -벼농사 제사 관련 유물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

그림1-4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로




벼농사 사회 성립까지 지나는 길


채집에서 재배로


벼가 출토되면, 당시 사람들이 벼(쌀)를 주식으로 삼았을 것 같다고 하는 생각의 위험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벼가 재배된다고 하면 그 문화는 '벼농사 문화'이고, 그 사회는 '벼농사 사회'라고 하는 것도 대단히 난폭하고 안이한 의론이다.


그림1-4는 벼 이용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강화되어 나아가는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인간에 의하여 식용이된 야생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특히 벼과 식물처럼 종자가 작고, 또 먹기 위해 전처리가 귀찮은(왕겨를 벗기고, 게다가 가열해야 함) 경우는 대량으로 채집하기가 쉬워야 한다. 광대한 초원에서 여기 한 포기, 저기 또 한 포기 식으로 자라서는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완신세 전반의 온난화 시기에 장강 유역에서 대규모 야생 벼의 군락이 출현했음이 틀림없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야생 벼를 채집하는 데에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는 않다. 야생 벼는 탈립성을 지니고 있다. 탈립성이란 익은 알곡이 자연스럽게 훌훌 이삭에서 떨어지는 성질이다. 알곡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벼 포기를 밀어 헤치면서 익은 알곡을 손바닥으로 훑어서 모으는 게 좋다. 그럼 효율이 나쁘다고 하면, 큰 소쿠리라든지 천을 마련하여 이삭을 쳐서 그 안에 알곡을 모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돌칼이나 돌낫 같은 도구는 필요 없다고 하기보다 쓸데가 없기 때문에 유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즉, 야생 벼의 채집 단계는 존재했음이 틀림없지만, 그것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꽤나 성가시다. 다만, 상황증거가 되는 것이 탈부脫稃(왕겨를 제거하는 일)를 위한 목제 절구나석제 갈판 같은 도구류와 쌀을 가열하는 데 쓰인 토기의 존재이다. 토기와 갈판은 완신세의 개시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장강 유역에도 출현한다. 지금으로서는 쌀을 끓이고, 알곡을 찧는 도구 등의 유물 자체를 직접 증거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모순은 없다. 


대저 야생 벼가 탈립성을 가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익은 알곡이 언제나 이삭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동물에게 먹혀 버려 자손을 남길 수 없다. 운 좋게 동물에게 먹히지 않더라도, 알곡이 그대로 달린 이삭이 지면에 이르면 한곳에서 많은 종자의 싹이 나게 되어 이후 생장에 불리해진다. 그러므로 익은 알곡은 저절로 지면에 떨어지게 할 수 있다.


야생 벼가 탈립되는 장치는 벼알가지와 붙어 있는 알곡의 아랫부분에 떨켜라는 조직이 생김으로써 작동한다. 알곡이 익으면 그곳에서 맥없이 떨어진다. 그때 알곡의 아랫부분에는 표면의 매끄럽고 얕은 우묵한 곳이 남는다. 그에 반하여 탈립성을 잃은 재배 벼는 이삭에서 알곡을 억지로 잡아당겨 뗄 경우에 알곡의 아랫부분에 작은 혹 모양의 돌기가 남는다. 


이런 알곡 아랫부분 형상의 차이에서 야생 벼와 재배 벼를 구별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이 책의 감수자인 사토 요이치佐藤洋一 씨였다(佐藤 1996). 사토 씨는 하모도 유적에서 출토된 벼 알곡을 전자현미경으로 공들여 관찰하고, 그곳에 야생형과 재배형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걸 밝혔다. 이 판별법은 그뒤 중국인과 미국인 연구자에게 이어져, 절강성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을 대상으로 활발한 연구가 행해지게 된다.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의 정위엔페이鄭雲飛 씨 등은 전라산 유적과 그와 거의 동시기의 동향라가각 유적(마가빈 문화)에서는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며, 이 두 유적보다 1000년쯤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는 약6대4의 비율이라고 보고한다(鄭, 孫, 陳 2007). 정씨 등에 의하면,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은 현재의 자포니카형 재배 벼의 그에 합치한다고 한다. 그것이 확실하다면 자포니카형과 인디카형의 재배 벼는 각각 독립하여 재배화되었을 것이고, 중국 장강 유역에서 가장 일찍 재배화된 것은 자포니카형이라는 상정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또 정위엔페이 씨는 다른 논문에서 상산 유적의 출토품을 다루어, 그곳에서도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을 지닌 알곡이 존재한다고 기술하고 있다(鄭, 孫 2007). 매우 흥미로운 자료인데, 표본의 수가 지극히 적은 것 같아 결론을 내기에는 조금 더 비슷한 사례의 증가를 기다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미국인으로 현재는 영국 런던대학에서 일하는 D. 풀러(중국 이름 博稻鎌) 씨 등도 전라산 유적 출토 알곡의 분석을 직접 다루고 있다. 그들은 1185알의 알곡을 조사해, 그 가운데 39%가 야생형, 24%가 재배형, 그리고 나머지대부분(25%)은 야생형인지 재배형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미성숙 알곡이라고 한다.


미성숙 알곡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풀러 씨 등의 생각은 이러하다. 야생 벼의 등숙 시기에는 차이가 있다. 모든 알곡이 완전히 익는 것을 기다려 채집하려고 하면 이미 그때에는 대부분의 알곡이 떨어지게 된다. 효율 좋게 대량으로 모으려면 일부는 거의 익었지만, 미성숙인 것도 꽤 남아 있는 단계에 채집하는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채집한 알곡 안에는 미성숙인 것이 일정량 섞이게 된다. 


미성숙인 알곡까지 함께 훑어 버린 듯한 야생 벼의 수확법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진화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벼가 아닌 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힐먼 등의 외알밀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등숙 시기 직전의 외알밀을 계속 베어 그 가운데 일부를 파종하면 몇 십 년이란 단기간에 탈립성을 상실한다는 의미를 지닌 '재배종'이 출현하는 일이 나타난다(Hilman and Davies 1992). 이것이 벼에도 해당된다고 하면, 야생 벼를 채집하는 선사인의 평범한 욕심쟁이가 우연히 야생 벼에서 비탈립성이란 형질의 진화를 재촉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게다가 그것은 매우 단기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야생 벼 채집의 개시와 거의 동시에 '재배종'이 출현했다고 적어도 겉보기는 그렇게 보인다는 걸 암시한다. 즉, 그럼1-4의 ①-③의 여러 단계는 존재했을 것이고, 이 순서로 연달아 일어났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재빠른 연쇄반응으로 단기간에 연속하여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을 고고자료로 완전하게 확보하는 것이 어렵다.


탈립성을 잃은 재배형이 출현해도 그주변에 아직 많은 야생종이 자생하고 있다면, 선사인들은 변함없이 그 두 가지를 계속 수확했을 것이다. 그 결과 유적에서도 두 유형이 남아 있다. 전라산 유적과 하모도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알곡이 이삭에 달린 채로 남아 있는 포기 쪽이 더 많은 종자를 회수할 가능성이높기 때문에, 재배형의 비율은 서서히 증가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재배형이 늘어나더라도 야생종과 혼재하는 상태에 있는 한 수확된 알곡에 야생종의 그것이 일정량 포함되는 일은피할 수 없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고 기본적으로 제꽃가루받이를 하지만, 약간은 자연교잡이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야생 벼의 탈립성 형질은 재배 벼의 비탈립성 형질에 대하여 우성이기 때문에, 둘이 교잡할 경우 다음세대의 포기는 탈립성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배종과 야생종이 같은 장소에서 자라고 있으면, 재배종의 종자만 수확하는 일이 곤란하고 그렇게 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현재 장강 유역의 벼농사 지대를 다녀도 실제로 보이는 건 논에 심는 재배종뿐이다. 논 안은 물론, 농수로의 주변과 늪과 호수 주위에도 야생 벼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모도 문화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7000년 사이의 어딘가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출현한 것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6000년 전쯤을 정점으로하는 온난기, 힙시서멀기 이후 기온이 서서히 냉량, 건조해지면서 야생 벼의 군락은 완신세 초기에 북상했던 것과 반대로 서서히 남하하여, 이윽고 장강 유역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원래 야생 벼가 번성했던 토지가 논과 양어장으로 조성되어 간신히 남아 있던 군락도 '잡초'로 여겨져 구제되어 버렸다는 인위적 영향이다. 아마 이 두 가지가 야생 벼의 소멸에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적에 남아 있던 알곡의 형상을 조사하여 이 문제에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있는 고고자료는 아직 그것을 허락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더구나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의 경우에는 또 다른 선입관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 선입관이란 마을 주변의 자연습지에는 아직 야생 벼가 생육하고 있더라도 이미 그것을 채집하는 일은 거의 없고, 오직 인공 논에서 재배된 재배종만 수확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유적에서는 재배종의 알곡밖에 출토되지 않는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다. 꽃가루의 수명은 몇 분 정도로 짧아 멀리까지 날아가서 다른 꽃을 수분시킬 수는 없다. 이삭 패는 시기가 같은 품종이어도 20미터 떨어져 있으면 교잡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재배형의 포기를 야생종이 자생하는 자연습지가 아닌 그것과는 별도로 인공적으로 조성한 농지 -이곳을 '논'이라 불러도 좋다- 에 재배하게 되면, 탈립성이란 형질도 유전적으로 고정된다. 또한 인공 농지가 있으면 물높이도 조절할 수 있고, 벼와 경합하는 잡초도 제거하기 쉽다. 결과적으로 자연습지에 야생 벼와 섞어 심는 경우와 비교하여, 더욱 안정적으로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것을 사람의 쪽에서 바라보면, 벼를 재배하기 위하여 투하하는 노동력의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지난해 수확한 알곡을 봄에 습지에 파종한 다음 가을의 수확을 기다릴 뿐과 같은 정도라면 일다운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익은 알곡을 수확하는 것도, 마름과 가시연의 열매를 모으거나 산에서 도토리를 줍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산야의 은혜를 받아들인다는 감상이지 자신들이 만들어 냈다는 의식은 희박하지 않았을까?


그에 반하여 인공 농지=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걸 생각하면, 먼저 그 조성에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점이 무엇보다도 큰 차이이다. 논이 완성되면 그것으로 끝날 리가 없다. 수로와 논두렁을 수복하거나, 물높이를 조절하거나, 잡초를 뽑거나 하는 일상적인 작업의 연속이다. 자연히 쌀은 다른 채집 식물 먹을거리와는 별개로 특별해지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이란 의식이 싹텄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벼농사 문화란 '벼농사를 영위하는 민족 사이에서 대부분 공통으로 인정되는 벼농사와 복합된 문화 요소, 즉 생산기술과 사회양식, 신앙과 의례, 생활양식 등에 대하여 보편성을 가진 하나의 문화 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渡部 1987). '벼농사 문화'란 단어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논에서 인공 재배를 개시한 이후가 되어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베어 거둘 뿐, 그것을 벼농사의 '생산기술'이라 할 수 있을까?


'신앙과 의례'에 대해서는 한술 더 뜬다. 벼농사 농경민은 1년을 통틀어 벼농사에 관한 제사를 집행한다. 정원의 예축의례를 시작으로 파종과 모내기, 벌레 쫓기, 베어 거두기와 절일마다 그를 행한다. 이와 같이 하나로 이어진 의례의 배경에는 벼의 풍양을 관장하는 신들의 체계가 있고, 그 유래를 이야기하는 신화가 있다. 그래야 벼농사에 관한 '신앙과 의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논농사가 시작되어 벼를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한 생업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단계에서 처음으로 '벼농사 문화'가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단 그 단계가 되어도 사람들은 생명의 양식을 벼(쌀)에만 의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산야의 식물을 모으고, 동물을 잡고, 물고기를 붙잡는 일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 돼지 등의 가축 사육도 있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에 따라 다른 생업이 점하는 비중은 서서히 줄어들고,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더욱더 급해져 갔다.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급해졌다는 건 무슨 말일까? 한 가지는 농지의 확대이다. 마을 주변은 이윽고 벼이삭이 파도를 치는 논으로 가득해졌다. 그 이상으로 경작 적지를 얻을 수 없게 되거나, 구할 수 있어도 거기까지 거리가너무 멀거나 하면 마을사람 가운데 일부가 신천지를 구하러 마을을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벼농사의 '전파'라든지 '확산'이라 할 수 있는 현상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새로 마을을 만드는 일을 반복한 결과이다. 


또 다른 한 방법은 집약화이다. 인구가 2배로 늘었다고 해서 반드시 논 면적도 2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같은 면적에서 지금까지보다 2배의 수확량을 올릴 수 있다면 따로 농지를 확대하지 않아도 된다. 단숨에 2배라고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벼는 그러한 인간의 방자함에 답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돌연변이에 의하여 생긴 다수성의 계통을 찾아내, 그것을 보호하면 수확량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똑같은 일을 다른 채집식물과 수렵동물에게도 행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주변의 나무 가운데 2배의 열매를 다는 도토리 나무가 때마침 있었다고 하자. 그것을 늘리기 위하여 다른 나무를 뽑아 버리고 대신에 그 도토리를 심는 일 등을 누가 시도할까?아무튼 산이 그 도토리의 숲으로 덮이는 데에는 10년이나 20년 전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수렵과 어로의 대상이 되는 야생동물의 경우는 더욱 곤란하다. 사람들이 지금의 2배로 사슴을 얻고 싶다고 염원해도 도대체 어떤 방책이 있을까? 다른 일을 팽개치고 날마다 사슴 사냥에 몰두하면 단기적으로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항상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슴의 수는 해마다 감소 일로를 걸을 것이다. 


집약화가 가능하다는 이 특성이야말로 벼를 비롯한 한해살이 초본 작물의 최대 이점인 동시에, 두려운 올가미이기도 하다. 인구의 증가와 작물에 대한 의존도 증대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이고,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개미지옥'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머지않아 그것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그와 같은 사회의 상태를 '벼농사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그림1-4로 되돌아가 정리하도록 하자. ③의 단게에서 재배 벼의 형질이 출현하는데, 이것은 논에서 벼를 재배했다는 것을 의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날마다 쌀만 먹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획기적이라 부르는 건 다음 ④의 단계이다. 출토 알곡의 형상이 재배형으로 거의 통일된 건 벼의 재배가 야생 벼의 생식지에서 공간적으로 격리된 결과 생식적인 격리도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벼 전용 농지, 이른바 논은 기술문화사의 큰 혁신이며, 문화 전반의 양상도 차례로 벼농사 중심으로 편성되어 나아간다. 그것을 일러 ⑤'벼농사 문화'의 성립이라 한다. 벼농사라는 생업은 자기증식적으로 비대화되어, 어느 사이에 벼농사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사회가 이루어진다.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이다. 이 ④의 단계부터 ⑥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도 자연계의 여러 변동과 이변에 따른 대폭적인 인구 감소가 아닌 한 비교적 빠르게 진전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①부터 ③까지와 ④부터 ⑥까지가 각각 하나의 결말이 되어 그 둘의 사이에는 몇 천 년이란 상당히 오랜 시간적 동떨어짐이 존재하는 것이다.



벼농사 문명으로 가는 길


여기에서는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의 성립에 이르는 과정을 실제 고고자료에 대조하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절강성에서 최근 들어 점점 구석기시대 유적의 탐색이 시작된 참이어서 지금으로서는 정보가 매우 부족하다.태호 서남의 구릉과 저산지대에 몇 개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 시대적 자리매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토기와 간석기를 가진다는 의미를 지닌 신석기 문화는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포강浦江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승주嵊州 소황산 유적(약 9000년 전)이 있다. 모두 토기 바탕흙에 대량의 벼 알곡이 섞여 있으며 유적 토양에서도 벼잎의 세포 화석이 검출되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먹을거리로 벼를이용하기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재배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가 나뉘고 있다. 대량으로 출토된 석제 갈판과 갈돌이 벼의 알곡을 가는 데 쓰였는지, 또는 견과 등을 갈아 으깨기 위하여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토기의 다수를 점하는 건 입구가 크고 밖으로 벌어지는 세면기 같은 모양으로, 표면에는 붉은색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상식적으로는 끓이는 용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유적에서 주먹 크기의냇돌이 많이 출토되었기에, 그것을 달구어 '세면기'에 넣어 끓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 일본의 농촌 요리 등에도 있는 이른바 스톤 보일링이란 방법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국을 끓이는 데에는 적합하더라도 밥을 짓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산과 소황산 두 유적이 표고 50미터 정도의 산간 분지에 위치하는 것에 대하여, 약 8000년 전부터 거주가 시작된 소산蕭山 과호교 유적의 현재 지표면의 높이는 불과 표고 4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당연히 당시 거주면의 높이는 가장 낮아진다. 이 유적은 가을의 사리일 때 바닷물이 역류하는 것으로 유명한 전당강의 바로 옆에 있다. 8000년 전이라면 해수면의 높이가 현재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유적은 7000년 전쯤까지는 바다 속에 잠겨 버렸다. 그것을 굳이 저지대에 마을을 이룬 건 '물가'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는 생업양식이 이 무렵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출토된 동물뼈를 보아도 포유류로는 사슴류와 물소(야생이라 생각됨), 파충류로는 거북류와 양자강 악어, 조류로는 기러기와 오리류 및 두루미가 주체를 점하고 있어, 그 상정을 뒷받침한다. 출토된 식물의 씨앗을 보아도, 남방멧대추, 복숭아, 각종 견과류 같은 산의 산물과 함께 마름과 가시연이 출토된다.


벼도 마름이나 가시연과 마찬가지로 '물가'의 채집 식물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정위엔페이 씨 등은 알곡의 형상에 대하여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약 6대4라고 보고한다. 재배형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탈립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고, 채집을 계속하면서 자연히 출현할 수 있는 형질이다. 기본적으로는 벼도 모두 채집된 것이라 생각해도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상산과 소황산을 비교하면, 토기의 기종 분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명확하게 끓이는 용도의 그릇이라 할 수 있는 기종인 '솥'도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식생활에서 식물질 먹을거리 중에서도 쌀의 비중이 꽤 상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인공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가능성도버리지 못한다.


그 뒤를 잇는 것이 7000-5500년 전이라 연대를 부여하는 하모도 문화이다. 하모도와 전라산 같은 유적이 늘 물에 잠길 듯한 저습지에서 경영되었다는 건 앞에서 서술했다. 기본적으로 과호교 문화와 마찬가지로 '물가'의 생업 전략을 취했다. 벼잎의 세포 화석 밀도가 높은 토층이 몇 층이나 발견된다는 것을 중시한다면, 이 시기에 이미야생 벼의 생식지로부터 공간적으로 격리된 '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토기에 대해 말하면 '솥'이 주체를 점할 뿐만 아니라 조금이지만 쌀을 찌기 위한 전용 그릇이라 할 수 있는 시루가 출현하기 때문에, 먹을거리로서 쌀의 중요성이 다른 채집 식물에 비해 한 등급 위의 존재라고 간주할 수 있게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하모도 문화라고 하면 곧바로 상기되는 것이 물소와 사슴의 견갑골로 만든 '뼈보습'이다. 이것은 기둥 구멍과 저장 구덩이의 굴삭, 물가의 둑 등의 토목작업에도 쓰인 도구로서 일괄적으로 농기구라고 단정지을수는 없는데, 흙을 쌓아 올려 간단한 두둑을 만드는 농작업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하모도 문화가 그것 이전의 여러 문화와 크게 다른 점은 정신생활에 관한 기물이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토제와 골제 상 또는 토기 표면의 선각화로 직접 지각할 수 있는 형태의 동식물과 인물의 묘사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그림1-5). 토제 동물상에는 돼지(멧돼지), 양(?), 물소, 코끼리, 새, 물고기 등이 있다. 토기 표면에 선각된 사례와 함께 그들 동물이 가축 또는 수렵 대상으로 많이 구할 수 있기를 기구하는 유감주술에 관한 주물이라 생각한다.  


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주발의 외면에 묘사된 '벼이삭 문양'(그림1-5의 7)은 벼의 풍년 기원에 관련된다. 이른바 '오엽 문양'(그림1-5의 8)에 대해서는 제사용 길상물인 '만년청 분재' 또는 어떠한 약초라는 견해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이삭 패는 시기의 벼이삭이라 하는 설이 있다. '물고기와 물풀 문양'(그림1-5의 9)에 대해서는 짝을 이루는 동물이 새인지 물고기인지 견해가 나뉘는데, 적어도 오른쪽 그림에 대해서는 물고기와 벼를 같은 화면에 묘사해 둘 모두 풍부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란 설이 옮게 여겨진다. 식물 중에는 특히 벼가 중시되었다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림1-5. 하모도/ 마가빈 문화의 제사 관련 유물(3, 6 라가각 유적, 기타는 하모도 유적)




하모도 문화가 항주만 남쪽 기슭의 영소寧紹 평야에 전개된 데 비해, 항주만 북쪽 기슭의 항가호杭嘉湖 평야는 마가빈 문화의 분포 구역이다. 연대로 보면 7000-5800년 전으로 둘 수 있다. 이 지역은 영소 평야와는 달리, 산과 구릉이 거의 없는 낮은 평지이다. 한번 홍수라도 일어나면 도망갈 곳이 없을 것이다. 출토 유물을 통해 보는 한, 생업경제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하모도 문화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지만, '물가' 그리고 벼로 기울어짐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이 확실한 '논'이 이 마가빈 문화의 후기(6000년 전쯤)의 유적에서 발견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초혜산草鞋山과 곤산시昆山市의 작돈綽墩 유적이다. 상세한 건 이 책에 실린 우다 노츠宇田津 논문을 보시길 바란다. 물론 이 연대는 늦어도 그 시기까지에 '논'이 출현했다는 걸 보여준다. 그것이 1000년 또는 2000년 더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은 남아 있다.


마가빈 문화 전기의 유적인 동향 라가각 유적에서는 토제 남성 전신상이 출토되었다(그림1-5의 6). 그 과장된 남성기의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농지를 여성, 경운도구를 남성이라 보는 성적 상징주의는 세계 각지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Eliade 1968).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는 특이한 목제품으로 '남경형'이란 기물이 있다. 문자 그대로 남근을 본뜬 것인데, 이것도 똑같은 상징주의에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中村 1999). 그러한 점에서 마가빈 문화 전기까지로 논의 창시가 거슬러 올라가 수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에 이어지는 것이 송택崧澤 문화로 5800-5300년 전의 연대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동물 유존체에수렵대상 짐승이 점하는 비율이 뚜렷하게 저하되고, 가축인 돼지의 비율이 증가한다. 저습지 유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식물질 유물이 남기가 나쁜 데에도 기인할 것인데, 벼 이외의 채집 식물의 검출 사례는 매우 적다. 이런 점은 생업형태가 다각적 경제에서 벼농사 전업 경제로 이행해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에 보조를 맞추듯 쌀 조리 전용 도구인 시루와 세발솥이 끓이는 용도의 토기를 주로 점하게 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징호澄湖 유적에서는 논터가 검출된다.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가늘고 긴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데, 논 한 배미당 면적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 


정신생활면으로 눈을 돌리면,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에서 성행하던 토제상과 토기 회화가 거의 모습을 감추는 것과 함께, 형상 토기(그 일부에 동물과 인물을 본뜬 토기)와 채색 토기, 그리고 토기 표면의 추상부호가 눈에띈다. 채색과 조소, 선각이 장신된 것은 이질泥質 회도灰陶(불순물을 제거한 점토를 써서 환원염소성한 회색 토기)또는 흑피도(이질 회도의 표면에 탄소를 부착한 흑색 토기)의 두, 호, 관 같은 저장, 공헌供献 토기류이다. 아마 벼의 풍작을 신에게 감사하는 의식에 관련된 기물이라 생각한다.


이들 특이한 토기류는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데, 그러한 무덤에는 귀걸이와 목걸이 같은 초현기初現期의 연옥 제품이 동반되는 일이 많고, 또 그와 같은 무덤이 공동묘지 안의 한 구획에 집중되어 설치된 경우가 많다. 즉, 이 시기에는 제사의 복잡화와 제사집행자가 되는 특정집단의 분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동묘지는 하모도 문화, 마가빈 문화의 시기부터 존재하는데, 그 단계에서는 무덤의 배열, 부장품의 종류, 많고 적음, 정교함과 조잡함 등으로 집단의 차이를 유추하기가 곤란했다는 점이 큰 차이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송택 문화의 물질문화를 계승하여 5300년 전쯤에 시작되고, 그로부터 800년 정도 이어진 것이 양저良渚 문화이다. 무덤에 대량의 옥기(=연옥 제품)를 부장한 집단은 자신들만의 묘지를 영위하게 된다. 그것은 종종 대규모 봉분(흙을 쌓아 올린 흙더미)과 대상묘(산비탈을 깎아낸 테라스)의 형태를 취한다. 제사를 집행하는 집단이 일반 서민과 동떨어진 지위를 손에 넣고 묘지의 조성에 대량 노동력을 자의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보여준다. 


옥기에는 매우 정세한 문양이 새겨진다(그림1-6). 아직 금속기가 없던 시대이다. 석영 같은 단단한 돌조각이라든지 상어의 이빨을 사용하여 조각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한 점의 옥기를 제작하는 데에만 적어도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무덤에 그것을 수십 점이나 넣기도 했기에, 전문 공인이 언제나 그 제작에 종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고도의 전업생산이 행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옥기만이 아니다. 복잡, 정치한 음각선 문양을 장식한 토기류와 각종 석기류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 공인에 의한 수공업 생산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 벼농사 농업의 집약화였다. 돌쟁기는 송택 문화기 후반부터 출현하는데, 양저 문화기에는 대형화되어 그중에는 길이 60cm에 이르는 것도 있다. 가축(아마 물소)이 견인하지 않았을까 한다. 쟁기를 끌고 다니려면 작은 면적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 논에서는 사정이 나쁘다. 현대의 논과 그만큼 차이가 없는 논이 이 시기쯤에는 출현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고고학적으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수확 도구인 돌낫이 널리 분포하게 된 점의 의미도 크다. 논 안에는 이미 탈립성의 그루는 존재하지 않고 품종개량의 진전에 의하여 벼의 익음때도 균일화되어 벼 그루를 묶음으로 잡아서 밑동을 벨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돌쟁기와 돌낫 등의 석기에 대해서도 특정 생산지에서 전업생산이 이루어졌으리라 상정할 수 있는데, 석제 농기구의 생산과 분배를 정치적 지배자가 좌지우지하고, 공납품으로 받는 벼의 증산을 도모했을 가능성까지 있다. 그 보상으로 지방의 지배층에게 하사한 것이 각종 옥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Nakamura 2005).


이 시기의 제사, 종교를 특징짓는 핵심어가 '신인수면문神人獸面紋(신의 체구와 괴수의 안면을 본뜬 문양)'이다(그림1-6의 2). 주로 옥기에 도상으로 등장하는데, 상아기와 토기에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 그것은 흉악한 짐승 신을 통제하고 자유롭게 천공을 비약할 수 있는 신성神聖 왕=현인신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신인수면문 옥기의 분포는 양저 문화 분포지역의 전체에 퍼져 있다. 물론 시대적 변천은 있지만, 옥기의 형태, 문양의 지역을 뛰어넘는 공통성은 일관되게 계속 유지된다. 양저 문화기에 신 관념이 통일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크다. 미국의 정치학자 찰즈 메리엄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면(메리엄 1973), 신인수면문은 지배를 시각적으로 납득시키는 일종의 미란다 원칙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그림1-6. 양저 문화의 옥기(모두 절강성 여항 반산 유적 출토)





옥기와 석기의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정치적 지배자가 거주한 곳이 절강성 항주시의 서교에 전개된 양저 유적군이다. 동서 약 10킬로미터, 남북 약 6킬로미터의 범위 안에서 지금까지 130여 곳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면적 약 30평방미터의 막각산莫角山 토대, 길이 5킬로미터에 달하는 당산塘山 토루, 거기에 반산反山 봉분, 요산瑤山대상묘 등의 옥기 후장묘는 특히 유명하다. 


이 양저 유적군에서 최근 큰 발견이 있었다. 막각산 토대와 반산 봉분을 둘러싼 위치에 동서 1500m, 남북 1800m, 면적 270헥타르의 흙을 쌓은 위벽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그 규모는 산서성의 도사陶寺 유적과 견줄 신석기시대 중국 최대의 위벽 마을이다.(연대로는 도사 유적보다 몇 백 년 빠를 가능성이 높다). 양저 유적군의 경우 위벽 밖에도 유적이 농밀하게 분포하기 때문에, 실제 거주 구역은 더욱 넓을 것이 확실하다. 그 넓이는'하왕조'의 왕도로 보이는 하남성 이리두二里頭 유적(기원전 1750-1520년쯤)의 300헥타르를 능가한다. 이것을 도시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문명(civilization)이란 단어는 라틴어 civilisa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엇보다 도시(civitas)와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이다(伊東 1985). 그 도시란 농업이 집약화되어 어느새 직접 농경에 종사하지 않는 '사회잉여'(=도시민)이 생겨나는 곳에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양저 문화의 돌쟁기와 돌낫 같은 농기구를 그냥 단순히 농업기술사의 관점으로만 고찰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특별히 사회, 정치사적인 검토 과제라 할 수 있다. 


금속기가 출현하기 이전의 중국에서는 옥기가 최고의 예기로 기능했다. 그 제작과 사용을 전단하는 자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고 옥기 분배를 통하여 정치적 권력을 수중에 넣었다. 그와 같은 정권의 상태를 나는 '옥의 왕권'이라 부른다(中村 2003). 장강 하류에서 꽃이 핀 그 신석기시대 문명은 말할 것도 없이 벼농사에 기반을 둔 문명이었다. 그것은 결국 장강 유역의 다른 지역만이 아니라 황하 유역으로도 파급되어 나아갔다. 그곳은 원래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의 재배지대이다. 더구나 시기적으로는 힙시서멀기 이후의 서늘하고 건조한 시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농사는 북상하고 있었다. 벼농사 인간의 인구 증가에 따른 이주라고 단순하게 단정지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아마 벼(쌀)는 종교의례에 필수 요소로서, 바꾸어 말하면 문명의 한 요소로서 전해졌던 것이다(中村 2006). 여기에서 우리는 벼농사의 전파와 확산이라고 하는 현상에는 인구학적인 메카니즘과는 또 다른 정치, 종교적 메카니즘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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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서장  계절풍 농경권의 사람들과 식물






들어가며



왜 지금 농경인가


인간은 왜, 농경이라 하는 '귀찮은' 일을 시작한 것일까? 그 전의 생업인 '수렵채집'과 어째서 결별하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답은, 사실 필요 없다. 여러 가지 가설은 있지만 모두 '넘고처지어' 결정적으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지금까지 이 물음은, 말하자면 연구자의 놀이 같은 것이라 어떠한 결론을 내려도 일반 사회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농경이라는 생업은 -여기에서는 목축을 포함하여 농경이란 용어를 쓴다- 일단 시작하고 나면 다시는 그만둘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나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금단의 사과에서 '금단'이란 의미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농업을 시작하고 난 뒤 1만 년 사이에 인간 집단은 여러 번 실패를 겪으며 인구의 대부분이 사라지거나 사회가 큰 혼란에 빠져 생산활동이 마비되어 버리는 '붕괴' 현상을 되풀이해 왔다. 게다가 이러한 실패를 되풀이해 왔다. 예를 들면, 사막의 풍토(와츠지和辻 1935)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왕조(우르 제3왕조) 무렵부터 염해가 반복되었다고 한다. Maekawa(1974)에 의하면, 인간은 염해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에 필요한 대처수단을 강구하지 못했다. 그 뒤에도 염해를 입어 붕괴한 사회가 잇따랐다. 2000년 전쯤 루란 왕국도 염해로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루란 왕국의 사람들은 우르 제3왕조의 붕괴에 대해 몰랐을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객관적으로는 잘못을 되풀이한 셈이다. 인류는 최근이 되어서야 겨우 역사라는 개념을 갖추어, 과거의 선배들이 저지른 이상한 실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농경의 역사를 아는 것은 단순히 교양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배들이 과거에 무엇을 했고, 어떻게 했을 때 농업생산이 붕괴되었는지를 아는 길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무엇을 해서는 안 될지, 혹시 가령 불행하게도 붕괴가 찾아왔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등을 알 수 있다. 


그 뒤쪽 끝부분은 특히 중요하다. 인류는 제2차대전 이후 반 세기 이상 지역적인 재해와 사회적 혼란은 이외에 큰 붕괴를 경험하지 않았다. 반 세기 이상이란 시간은 현재 인류의 평균수명으로 보면 한 세대를 넘는 것이다. 즉, 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큰 붕괴 현상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붕괴가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되면 붕괴라는 사실은 구전되든지 문서에 기록되든지 하는 것 말고 영원히 잊혀진다.




농경 -그 연구사  


농경과 목축에 관하여 포괄적인 연구를 행한 연구자가 세계에 몇 명 있다. Sauer(1952)와 나카오中尾(1996)은 세계의 농업 체계를 분류하는 작업을 행했다. Harlan(1975)도 유사한 연구를 행했는데, 나카오 등에게 없었던 점은 농업 이전 인류 집단의 생업에대하여 거론한 바이다. 20세기 말쯤부터 농업이 환경의 개변과 문명 발상에 근본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농업의 기원을 종합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도가 몇 번이나 행해졌다. 콜린 텃지는 농경의 기원을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현생 인류) 사이의 생태적 지위를 둘러싼 불화라고 파악한다(텃지 2002).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문명붕괴>, 피터 벨우드Peter Bellwood의 <농경 기원의 인류사>도 분야를 횡단하는 시각으로 쓰여진 훌륭한 저작이다.


재배식물과 가축의 기원, 전파에 관하여 연구한 연구자는 각론을 포함하면 여러 명이다. 오래된 것은 <재배식물의 기원>(de candolle 1953)을 시작으로, 그 뒤를 이은 같은 이름의 책(바빌로프의 <재배식물의 기원에 관한 연구(1928)>) 등이 고전으로 꼽힌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The Cambridge World History of Food는 인용이 좀 오래된 것이지만 비주류 작물까지 다룬 좋은 책이다. 벼에서는 가토 시게카네加藤茂苞에 이어 岡彦一과 그 공동연구자가 행한 품종의 유전적 분화에 관한 일련의 연구가 있다(Oka 외, 1953). 또 중국에서는 周拾錄(1957), 丁頴(1961) 등이, 특히 중국의 벼 기원에 대하여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1980년대부터 일련의 분자생물학 성과도 벼의 기원 연구에 크게 공헌했다. 그 상세한 내용은 이 책의 石川隆二, 中村郁郞 등의 논문에서 다룬다. 밀에 대해서는 水原均과 그 공동연구자들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다. 보리는 세계에서 생산량이 4위인 작물로서, 高橋隆平과 그 공동연구자가 많은 연구를 남겼다. 먼저 이른바 '맥麥'에 대해서는 2009년 봄 맥류 연구의 전문가들이 직접 <맥의 자연사(麥の自然史)>라는 책을 홋카이도 대학 출판회에서 간행했다. 이외에도 서류에 대해서는 <서류와 인간(イモとヒト)>(吉田, 堀田, 印東 2003)과 Salaman(1949)의 The History and Social Influence of the Potato 등의 훌륭한 저작이 있다. 


세계를 석권한 가축 종의 수는 아마 주요 곡물 종의 수와 같을 정도로 소수일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소, 양, 염소, 돼지, 말 5종을 '주요 5종'이라 부른다. 이외에도 분포 지역이 제한된 가축(다이아몬드는 남미의 알파카, 라마 2종과 낙타, 순록, 당나귀, 물소 등14종을 들고 있다)이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도 분자유전학의 수법을 이용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유라시아에서 기원한 농경의 요소



농경은 녹말과 단백질을 얻기 위한 한 수단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 가운데 기본적인 것은 에너지 공급원인 당분과 신체를 만드는 단백질이다. 당은 보존이 꽤 어렵기 때문에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당의 분자가 중합되어 생성된 '녹말'을 쓴다. 그 때문에 필요한 영양소는 녹말과 단백질이라 바꾸어도된다. 녹말원으로는 쌀, 밀 등 곡류나 타로, 바나나, 백합 등의 뿌리채소류, 밤, 도토리 등의 견과류가 알려져 있다. 단백질원으로는 가축과 그 야생종인 포유류, 어패류, 조류, 곤충 등이 이용되고 있다.


어느 토지의 녹말원과 단백질원을 결정하는 것은 그 토지의 기후와 풍토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후와 풍토에 의하여 규정되어 온 생태계이다. 농경 이전의 사회에서는 그 토지에 살고 있던 동식물이 이용되었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에는 여기에 가축과 작물이추가되었다. 가축도, 작물도 그 풍토에 살던 야생의 동식물을 인간이 가축화(재배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라시아 각지의 녹말원과 단백질원이 어떻게 조합되는지에 대한 佐藤(2008a)의 작업을 그림 1에 실어 놓았다. 그림에 보이듯이, 녹말원과 단백질원의 조합은 토지마다 뚜렷하게 다르다. 



그림1


흥미로운 점은 그 조합의 지역성이 크게는 和辻(1935)가 주장한 풍토와 매우 합치한다는 것이다. 계절풍 풍토에서 성립된 녹말과단백질의 기본적인 조합은 '쌀+물고기"이다(佐藤 2008a). 인도는 여기에 특수하게 '잡곡+콩'이 조합된다. 다른 곳에서는 단백질원으로 쓰인 동물성 단백질이 종교적 이유 때문에 쓰이지 않고, 대신 고단백질의 콩류가 활용되고 있다. 한편, 사막의 풍토와 목장의 풍토에서 생긴 것은 '밀+고기·젖'의 조합이다. 목장의 풍토에서 북쪽에서는 녹말 공급원으로 16세기 이후 감자가 추가되었다.또 북유럽에서는 보리·감자+물고기라는 조합이 등장한다. 유라시아의 북쪽에서는 '잡곡+고기·물고기'라는 조합도 볼 수 있다. 일본 열도의 동북부도 역사적으로는 이러한 지역에 속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녹말의 공급원은 크게 변천해 왔다. 그 일반적 경향으로는 (1)영양번식하는 것에서 종자번식하는 것으로, (2)목본을 시작으로 하는 여러해살이 식물에서 두해살이 초본으로라고 하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녹말의 특성은 그 운반과 보존이 쉬운 성질이 장점이다. 이 두 가지에 뛰어난 것이 옮겨져 결국 세계에 퍼진 것이다. 이 두 특성이 식물의 진화 방향과 비슷해 보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덩이줄기를 이용하는 감자는 유럽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퍼져 있다.


한편 단백질 공급원은 썩기 쉽고(보존성이 떨어짐), 또 운반도 어렵다. 그 때문에 최근까지 그 토지에 고유한 단백질 공급원이 있었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영국의 고고학자였던 고든 차일드는 인류사를 고찰하여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전환한 시점을 신석기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는 산업혁명에 대비될만한 인류 역사의 대변혁이란 의미이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사이에는 인간 활동에 확실히 크나큰 차이가 있다. 특히 토기의 등장은 먹을거리의 저장과 조리와도 관련되어, 인류의 식생활을 크게 바꾸었을 것이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먹을거리의 저장이 농업의 발달에 따랐을 것이라는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농업의 발달과 그에 따른 사회 체계의 변화, 토기의 등장과 보급, 식생활의 변화라고 하는 대변혁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을지에 대해서는 의론의 여지가 있다.


일찍이 佐佐木은 인류가 농경을 받아들인 과정을 '프로세스'라고 불렀다(佐佐木 1993). 즉 佐佐木은 농경문화의 수용이 혁명과도같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수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천천히 진행된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고학적인 자료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중국 장쑤성의 룡큐쩡龍虬莊 유적에서는 7000년 전에서 5200년 전까지 1800년에 걸쳐서 수렵채집 경제로부터 벼농사 경제로 이행한 경향을 살필 수 있다(龍虬莊 1999). 그와 같은 점은 밀의 진화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Tanno와 Willcox(2006)는 서아시아 네 곳의 유적에서 출토된 밀(아마 사배성 밀로 여겨짐) 이삭의 가운데 축에 남아 있던 탈립의 자취를 상세하게 살펴, 주력이 야생형(탈립형)에서 재배형(비탈립형)으로 이행하는 데에 30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발표했다. 그러하다면, 농업을 수용하는 과정이 '프로세스'라는 佐佐木의 지적은 동아시아 벼에 고유한 현상이 아니라 서아시아의 밀에도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 된다.


'프로세스'론은 농업을 수용하는 과정을 일직선으로 점점 올라가는 과정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다. 왔다리 갔다리 하는 과정을 엉성한 그물코를 통하여 보았기 때문에 일직선의 과정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의 학문에서는 그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지를 말할 뿐 정확히는 아직 모른다.


또한, 룡큐쩡 유적의 자료와 그 해석에 대해서는 졸저 <벼의 역사(イネの歴史)>(佐藤 2008b)에 상세하게 기술했기에 거기에서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농경이 기원하기 이전 시기


대저 현생인류가 생겨 그 한 무리가 아프리카를 떠난 것이 10만 년 전에서 15만 년 전 무렵이다. 아프리카를 떠날 당시 인류에게 농경 문화는 없었다. 그 뒤 그들은 급속하게 온 세계로 퍼졌지만, 그들의 행선지마다 선주민들과 만나 여러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그들의 일파가 서아시아, 곧 레반트 회랑 일대, 투르크 동남부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의 원류부 일대에 도달한 것은 몇 만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篠田 2007). 텃지에 의하면, 이때 현생인류는 네안데르탈인과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다만 그 시기는 추위와 더위가 자주 오락가락하고, 지금의 페르시아만도 육지였다고 한다. 현생인류는 그 뒤 사방으로 이동해, 동으로 이동한 한 일파는 5만 년 조금 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순다랜드라고 불리는 남중국해 일대에도 이르렀다.


텃지는 인류가 최초로 농경과 비슷한 행위를 행한 곳이 네안데르탈인과 만났던 페르시아만부터 서아시아가 아닐까 한다(텃지 2002). 도대체 인류는 왜 이동한 것일까? 그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 가운데 하나인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을 채택하려고 한다. 보통 생태계 안에서는 거기에 사는 동물과 식물의 수가 엄밀한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 선주하던 인류도 또한 순수하게 생태계의 한 구성원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지금은 '현생인류'라고 불리는 집단이 침입해 왔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유사한 생태적 지위에 있던 선주민과 현생인류 사이에 긴장관계가 발생했다. 그러나 두 집단이 무기를 가지고 싸웠던 것은 아니다. 텃지는 현생인류의 승리는 그들이 더 농경과 목축에 가까운 생업 양식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현생인류는 토지의 한 귀퉁이를 점유하고 그곳을 갈아엎거나 간단한 울타리를 만들어 동물의 새끼를 기르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밀고 들어간 생태계는 현생인류의 '체취가 풍기는' 생태계가 되었다. 그곳은 어쩌면 야생동물에게도 선주민에게도 살기 어려운 환경이었을 것 같다. 신인류의 시치미 떼고 대수롭지 않게 하는 행위가 선주민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비슷한 일이 현생인류가 가는 곳곳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현생인류가 그와 같은 일, 즉 농경과 목축의 선구와 같은 생업을 확립할 수 있었다면, 그 성공담의 숫자만큼 '농경 기원'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어쨌든 현생인류는 순수한 수렵채집인이었다기보다 유용한 식물에 눈을 돌려 그것을 확보하거나, 또는 길들이기 쉬운 동물을 길들이거나 새끼를 사육하는 일을 통하여 차차 주변의 생태계를 만들어 바꾸어 나갔다고 생각한다. 야생동물과 선주인류의 집단은 점점 현생인류의 영역에서 점점 멀어져 가지 않았을까 한다. 



농경의 완성까지 지난 길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농경이란 작업을 완성했을까? 이에 대해 몇몇 연구자가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하고 있다.


완성된 농경이란 먼저 (1)사람들에게 동식물을 관리한다는 명확한 의도와 지식이 있고, (2)그에 필요한 도구와 장치를 사회적으로 지니며, 또한 생활에 필요한 자재 가운데 적어도 일부를 그 행위에 의하여 획득하고, 더하여 (3)이러한 행위에 적응하는 전용 동물과 식물(곧 가축과 작물)을 지니고 있을 것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아마 인류가 가장 먼저 손에 넣은 것은 첫 번째 조건, 즉 동식물을 관리하는 의도와 지식이었을 것이다. 농경의 첫 번째 단계는 사람에 의해 동식물이 관리되는 것이다. 다만 이 단계는 이전의 수렵, 채집과 고고학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2)의 도구와 장치로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덫이나, 숲과 초원에 불을 놓아서 식물의 발아를 유인하거나 그에 의하여 동물을 꾀어내는 행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새끼를 포획하여 사육하는 일 등도 이 단계에 들어갈지 모른다. 이러한 행위는 고고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조몬繩文 시대의 일본과 신석기시대의 중국에서는 멧돼지 새끼의 뼈가 출현하는 빈도가 높은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內山 2007, 龍虬莊 1999). 이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의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최초의 두 단계까지는 생태계의 개변이 정주에 의하여 느리지만 착실히 진행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세 번째 단계에 들어가면 인류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가축과 작물이 무게 중심이 되면, 수렵·채집 경제로 회귀하는 일은 절망적일 정도로 어렵다. 그것은 가축과 작물은 사람의 손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그 무렵에는 인류의 주변에 수렵·채집의 대상이 되는 식량자원이 바닥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있다.




풍토·기후와 농경


풍토와 기후


농경은 이전 시대인 '수렵과 채집'이란 생업을 이어받아 성립했다고 생각한다. 수렵과 채집은 완전히 자연에 의존하는 생업 형태이기에, 그곳에 어떠한 양식의 수렵·채집이 성립하는지는 자연식생과 마찬가지로 그 토지의 기후에 의하여 거의 일차적으로 정해진다. 기후학자 쾨펜Köppen은 이 관계를 기초로 하여 식생 등을 가미하면서 세계를 31개의 기후구분대로 나누는 발상을 발표했다(발견은 1920년 무렵). 이것은 지금도 쓰이는 개념으로, 교과서 등에 종종 등장한다. 또 키라吉良(1949)은 식생을 결정하는 큰 요인으로 온도(기온)을 들어 '따뜻함의 지수'(온량지수라고도 함)라는 개념을 발표했다. 뒤에는 여기에 추위의 지수도 추가해, 이들을 조합하여 온도의 월 변화라는 자료로 식생을 설명하는 방책으로 삼는다. 이와 같은 발상으로 '추위의 지수'도 고안된다. 따뜻함(추위)의 지표란 달마다 평균기온이 5도 이상(이하)이 되는 달에 대하여, 각각의 월 평균기온으로부터 5를 뺀 값(5에서 월 평균기온을 감한 값)의 합이라고 정의한다. 쾨펜의 기후 구분도 키라의 온량지수도 모두 식생을 온도와 강수량이라는 간단한 지표로설명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각각 그에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와츠지가 <풍토>의 집필을 시작한 것이 1928년 무렵으로, 이는 쾨펜보다 약간 늦다. <풍토>는 와츠지가 유럽 유학(1927~1928년) 때 견문한 각지의 모습을 기초로 썼는데, 이 유럽 유학 중에 쾨펜 또는 그의 학설과 접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풍토>에는 구체적인 기후의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만큼 거론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토>가 규정하는 세 가지 풍토는 쾨펜을 시작으로 하는 기후지리학의 구분과 놀랄 만큼 일치한다. 그 정도까지 기후를 구분하는 경계가 명확하고, 또 그것이 자연식생만이 아니라 토지에 살고 있는 인간 집단의 농경과 문화를 규정하고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풍토는 -그것을 기후 구분이라는 의미로 쓰든지 인간적 고찰과 와츠지 자신이 고안한 '풍토'라는 의미로 쓰든지- 각각의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농경이란 요소를 강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기후와 농경


농경이 성립하고 나서도 기후가 농경의 요소를 규정한다는 골조에 큰 변화는 없었다. 예를 들면 벼는 냉대에서는 최근까지 재배되지 않았고, 또는 보리가 열대 평야에서 재배되는 일도 없다. 


작물의 번식, 즉 개화와 결실을 결정하는 큰 요인으로 온도와 함께 일장(낮의 길이)을 빼놓을 수 없다. 이것은 야생식물에게도 공통인데, 식물에게는 크게 단일식물과 장일식물의 차이가 있다. 앞의 것은 가을에 해가 짧아지는 것에 감응하여 꽃을 피우고, 뒤의 것은 봄에 해가 길어지는 것에 감응하여 꽃을 피운다. 낮의 길이는 그 토지의 위도에 따라서 엄밀하게 결정된다. 그 때문에 위도대를 횡단하는 방향(즉 남북 방향으로)으로 식물을 이동시키면 개화하는 시기가 변하여 큰 어려움이 따른다. 식물은 동서 방향으로는 비교적 쉽게 이동하지만 남북 방향으로는 쉬이 이동하지 못한다.


그런데 인간은 작물의 품종개량을 거듭하여 몇몇 작물에서는 위도대를 뛰어넘는 일이 가능해지는 큰 유전적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면 벼가 기원한 곳은 북위 20도에서 30도 사이의 아열대 지역인데, 현재는 적도 바로 아래에서부터 북위 45도에 이르는 냉대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이것은 '일장중위성日長中位性' 또는 '불감광성'이라 하는 단일성(또는 장일성)을 잃은 특수한 유형의 출현에 따르는 바가 크다. 나중에 기술할 '북쪽 회랑'에서는 가을에 심어서 추위를 겪고 나서 꽃을 피우는 것이 본래의 성질이었던 보리의 종류에 '춘파'라고 하여 여름철에 생육하는 특수한 품종군이 분화되어 있다.


인간에 의한 품종개량은 저지대부터 고산지대에까지 적응하도록 만들었다. 대부분의 곡물이 이에 해당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고산에서 살았던 작물이 산을 내려온 사례도 있다(예를 들면 감자). 원래는 반건조지대에서 기원한 보리인데 습윤에 강한 '동아시아형'이 분화된 것도, 또 원래는 수생식물이었던 벼가 밭벼라고 불리는 밭농사용 품종으로 분화된 것도 인간의 노력으로 품종개량이 된 바이다. 이러하면 어떠한 작물(또는 품종)이 어디에 적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인간 집단의 선호와 문화가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동물에도 식물과 비슷하게 일장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많이 알려져 있다. 일장 시간이 길어지는 시기에 번식 시기가 겹치는 동물을장일동물(말 등)이라 하고, 또 그 반대의 동물을 단일동물(양, 염소 등이 해당됨)이라 부른다. 또한 그들도 위도대를 넘어가는 이동은 번식 시기를 변경시키게 되어, 그에는 큰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다. 유라시아는 본래 동서로 긴 대륙이라서 동물과 식물도 주로 동서 방향으로 이동하고 남북으로는 이동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장, 나아가 위도를 넘어가는 일의 어려움 때문이다.



풍토의 개념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풍토란 단순히 기후풍토라는 의미의 풍토(영어로는 climate)가 아니라, 그것을 기초로 하면서 기후의 요소에규정되는 각각의 생태적 요소와 나아가서는 그러한 자연의 요소에 의하여 강하게 규제를 받는 인간 사회의 구조와 문화, 그에 더하여 인간 집단의 자연관, 종교 등 사상도 포함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싶다. 이 풍토관은 말할 것도 없이 와츠지 테츠로우和辻哲郎가 말하는 '풍토'를 의식한 것이지만, 그것을 완전히 답습하는 것은 아니다. 와츠지의 풍토는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풍토>에 '인간적고찰'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풍토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기질까지도 근본적으로 설명하려는 조금은 거칠다고 말할 수 있는 사상이다. 그러나 와츠지의 이 사상은 그 이후의 연구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바타 토요노鯖田豊之의 <육식의 사상>, 스즈키 히데오鈴木秀夫의 <삼림의 사고·사막의 사고> 등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그리고 이들은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러한 인과관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대해서 더욱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와츠지의 풍토론을 참조하려고 하는 것은 그 세 가지 풍토가 농경과 농경사의 지역성을 논할 경우에는 참으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년 강수량 400mm의 선을 넣어 놓았다. 물론 와츠지 본인은 세 가지 풍토의 경계선 등은 넣지 않았다. 그러나 편의상 이 선을 세 가지 풍토의 경계선으로 놓겠다. 


다음의 '계절풍' '사막' '목장'이란 세 가지 풍토의 농경에 대하여 그 역사와 함께 더욱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계절풍 풍토와 농경



계절풍 농경의 중심은 벼농사 


와츠지의 풍토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것이 계절풍 풍토이다. 이곳은 대략적으로는 일본 열도의 남반부부터 중국의 남반부, 인도차이나 반도의 대부분을 포함하며 인도의 동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벼, 그것도 자포니카 벼의 기원지가 있는 곳이자, 또 그 대부분이 벼농사 지대인 곳이다. 벼의 다른 종류 가운데 하나인 인디카의 기원지는 아직 불명확한데 아마도 열대 아시아에 있다고 한다면, 계절풍 풍토는 벼의 벼의 풍토이며, 또한 온대지역과 열대지역 가운데 산간의 화전지대가 자포니카의 풍토이고 열대 평지가 인디카의 풍토라고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열대 도서의 벼는 전통적으로는 자포니카의 지대인데 최근의 개량종에는 인디카에 속하는 것이 많다(盛永, 1959).


화전지에서는 벼 외에 최근에는 옥수수와 율무의 재배가 성행한다. 화전지에서 벼농사는 벼농사라고는 해도 여러 가지 작물을 섞어짓기해 왔다. 섞어짓기하는 것은 조 등의 잡곡, 메론과 호박 등의 박과 작물 외에, 바나나와 참깨 등의 유지작물, 허브 종류 등 다채롭다. 다만 화전은 겉으로 볼 때 생산성이 낮은 데 더하여, '숲 파괴'와 '환경에 나쁘다'는 등의 이유 없는 비판으로 급속히 그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열대 저지대에서는 뜬벼라고 부르는 것을, 수심이 몇 미터나 되는 땅에서 농사짓고 있다. 뜬벼만큼은 아니어도, 우기에는 수심이 1미터 가까이 되는 곳이 많다. 이러한 곳에서는 현재 벼논양어가 행해지고 있다. 


미얀마 중부와 인도의 데칸 고원에는 약간 건조한 지역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잡곡이나 잡곡과 콩의 농사가 전개되고 있다. 



계절풍 풍토의 농경사


온대의 계절풍 풍토는 1만 년에 이르는 벼농사 지역이지만, 자세히 보면 농경의 양식에 큰 지역차가 있다. 일본 열도에서 벼농사를 수용한 것은 조몬시대 후기는 확실시되고 있지만, 열도의 동반부(이세만伊勢湾-와카사만若狹湾을 연결한 선의 동쪽)에서는 더디게 수용했다. 중기 이전의 일본 열도의 조몬문화는 초원의 농경과 수렵·채집을 조합한 형태였다고 생각한다. 나중에도 기술하겠지만, 농경의 요소는 중국으로부터가 아니라 북쪽에서 전해졌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서 논농사의 수용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잡초 방제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온대 계절풍에 속하는 일본 열도에서는(특히 그 남서부에서는) 농경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잡초이다. 사람들은 잡초 방제에 관심을 쏟아 왔다. 그러나 결국에는 논에 납작 엎드려 뽑는 것 말고는 유효한 수단이 없었다. 땅에 여유가 있던 중세까지는 잡초의 대책으로 아마 지금은 휴경 또는 경작방기라고 하는 일을 행하였을 것이다(宇野 2001, 佐藤 2003). 또 고대 이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도 벼농사로 회귀하는 일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대의 왕조는 종종 포고를 통해 육식의 금지령을 내렸지만, 그것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면서도 실은 벼농사의 비중을 높이려는 일종의 경제정책이었다고 한다(原田 2005). 그것은 걸핏하면 이동이 따르는 수렵과 채집 경제로 회귀하는 일을 막는 측면을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구조를 벼농사로 전환하는 일에는그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장강 유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벼농사가 행해져 온 지역으로, 그 역사는 1만 년을 넘는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조차 벼가 사람들의 주요한 전분 공급원이 된 것은 양저문화기 이후의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양저문화기 무렵에 장강 유역은 중국에서 북쪽의 문명이던 황하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시기로서, 깊이 파고들어 이야기하자면 이 시기가 되어 처음으로 현재의 논벼농사의 원형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다. 현대의 논을 방불케 하는 장치가 최근에는 장강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많이 발견된다. 이는 논이라는 장치가 나중에 이야기할 황하문명의 강한 영향을 받아 발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한다.


그 이전의 '벼농사'는 아마 매우 조방한 양식을 띠고 있었다. 논벼농사의 시초에 대하여 후지와라藤原(1998)는 장쑤성의 초혜산草鞋山 유적(약 6400년 전)의 논 흔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하고 논벼농사의 기원을 이 시기에서 찾고 있는데, 여기에는 의론이 있다. 왜냐하면 '논'이란 장치를 오로지 벼농사를 위해 물을 담기 위한 논두렁과 관개를 위한 수로 등을 수반하는 구조물이라고 고려한다면, 그러한 장치는 일본 열도에서도 근세에 이르기까지 완성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시대에는 그러한 논이 지극히 한정적이며, 벼를 심을 수 있는 논은 다른 수생동식물이 공존하는 다양한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중국이라는 풍토


계절풍의 농경을 생각하면 특필할 만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중국'이다. 와츠지 또한 중국을 '계절풍 풍토의 특수 형태'로 취급한다. 중국 농경의 기원과 전파를 고려할 때, 회하 또는 장강을 경계로 남북의 차이가 당연한 문제가 된다. 이 경계의 남북에서는 지금도 '북쪽의 맥류, 남쪽의 벼'라고 할 정도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생긴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남북'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변함이 없었다고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이 선의 남쪽은 벼농사 지대이며 계절풍 풍토에 속하고, 북쪽은 밭농사 지대인 데다 그 서쪽은 방목 등을 수반하는 건조, 반건조 지대를 지나 사막의 풍토로 이어진다.


이 밭농사 지대의 작물은 옛날에는 조, 수수 등의 여러 잡곡이었다. 이들은 황하문명의 옛 유적에서도 출토되며, 최근에는 요녕성과 내몽골 자치구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출토되는 일이 보고되고 있다. 다만 조와 수수의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설이 없다.특히 수수는 여전히 불명이다. 또 피도 동북아시아에서 기원한 잡곡이라고 하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사카모토阪本의 '일본 열도기원설' 이외에는 뚜렷한 논고가 없다(佐々木 2007을 참조). 여기에서 열거한 잡곡류는 맥류와 같이 한해살이인데, 여름농사라는점에서 맥류와는 매우 다르다. 


아무튼 황하문명은 그 뒤 차례로 그 주곡을 잡곡에서 밀로 바꾸어 간다. 이 전환은 밀이 생산성에 더 뛰어났다는 사정이 있는지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앞에 서술했듯이, 여기에서 재배되었던 잡곡은 모두 여름작물인데 이 지방에서 밀은 겨울작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름작물과 겨울작물의 전환은 인더스 문명기의 하라파Harappa 유적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Weber 1991). 관개 체계 또는 물의 수입과 지출을 고려하면, 이 전환은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전환을 가져왔을지 흥미로운 문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밀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서아시아에서 기원한다. 그것은 5000년 전쯤에 육로, 지금의 신장 위구르를 통하여 중국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데, 당시 그곳은 중국 문화가 아직 미치지 않았던 시대이다. 밀이 도래한 당시의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포함하여 중앙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기대되는 바이다.


더구나 최근 중국에서 행한 농경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서는 민족주의를 시사하는 듯한 '하나의 중국론'에 입각한 논조가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허난성의 가호賈湖 유적(8000년 전)에서 볍씨가 출토되었는데, 그것이 야생 벼인지 재배 벼인지를 둘러싼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만약 거기에 야생 벼가 있는 동시에 그곳이 벼농사의 기원지 가운데 하나에 포함된다고 한다면, 벼농사의 기원지는장강 유역에서 단숨에 황하 유역에도 이를 만큼 넓은 지역을 포함하게 된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고려하면, 가호 유적 일대에 야생 벼가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열대에서 벼농사의 개시


열대 계절풍 풍토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도서 지역의 열대우림으로 이어지는 '우록림雨綠林'의 풍토이다. 이곳은 우기와 건기가 비교적 뚜렷하게 구별되어, 건기에는 상당히 건조하다. 이 강한 건조함이 우록림의 나무들이 건기에 낙엽이 지게 하는 원인일 것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버마(미얀마)부터 서부 지역에서는 똑같은 열대 계절풍이라 해도 기후 요소가 꽤 다르다. 왜냐하면 인도차이나 반도는 그 위도가 북위 20도에서 10도에 넓게 걸쳐 있는 데 반하여, 버마부터 서부 지역은 남단이 북위 8도에서 인도차이나 반도와 늘어서 있으면서 북으로는 북회귀선(북위 23.5도)을 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벼는 갠지스 유역 일대에 주로 분포한다. 남부는 데칸 고원의 반건조지대이다. 


그러나 열대 아시아에서 농경의 시작은 온대의 그것보다 훨씬 뒤쳐진다고 생각한다. 열대 아시아의 고고학 유적의 발굴이 온대의 그것보다 훨씬 뒤쳐져 있다고 해도, 농경의 증거를 남긴 옛 시대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인간의 집단이 큰강 하구의 삼각주에서 침입했던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태국에서는 지금의 수도 방콕이 개발된 것은 겨우 18세기의 일이었고, 그전에는 정치경제의 중심이 70킬로미터 북쪽의 아유타야였다. 아유타야 이전에는 차오프라야강을 더 거슬러올라간 수코타이가 수도였다. 아유타야 왕조 시절에 아유타야는 운하를 통하여 곧바로 바다로 나갔다. 방콕 평원이 지금처럼 된 것은 겨우 200-300년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일이 메콩강 삼각주에서도 있었다. 메콩강 삼각주는 현재 개발되어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인데, 여기에 사람들이 이주한 건 불과 200-300년 전의 일에 지나지 않다. 인도차이나에서 인간 집단은 강의 상류에서 하류로 이동했을 것이다.


인도차이나 대륙부에서는 전통적으로 화전으로 벼농사를 행해 왔다. 단, 고고학적으로 화전을 증명하기란 어려워서 그것이 어느 시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에서 농경을 시작한 걸 고고학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앞으로의 큰 과제이다. 


인도차이나부터 열대 도서에서 농경은 아마 4000년 전쯤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긴 하지만, 파퓨아뉴기니에서는 9000년 전쯤 인간이 활동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어 지금까지의 학설이 확 바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국을 출발해 태평양으로 확산된 몽골로이드 이전 인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과 몽골로이드에 의한 원시적 농경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갠지스강 유역의 이른바 강가Gaṅgā 평원 북서부의 유적에서 8600년 전쯤의 볍씨가 출토되어 그것이 재배 벼인지 야생 벼인지를 둘러싼 논의가 있다.




사막의 풍토와 농경



사막의 풍토

 

와츠지의 '사막'은 꽤나 개념적이다. 왜냐하면 그가 보았던 '사막'은 아덴 부근(즉, 아라비아 반도의 아주 일부)의 사막이어서, 유라시아 내륙부의 사막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막의 풍토'는 이 책에 끼워 넣은 지도의 연 강수량 400mm 선 안쪽의 건조, 반건조 지대이다. 


이 지대 안에는 예를 들면 다클라마칸 사막 같이 연 강수량이 겨우 몇 밀리미터에서 몇십 밀리미터인 극단의 건조지대가 있어서, 식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사막'의 경관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그곳보다는 강수량이 많은 토지도 있어 약간의 식생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이른바 사막은 건조만이 문제인 토지가 아니라, 그 강한 염성에 의하여 식생의 생육을 방해받는 토지가 많다. 


사막의 풍토에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경이 유목이다. 이는 약간의 식생을 필요로 하여, 양 등의 무리를 이루는 가축을 이동시키면서 사육한다. 더구나 사막의 풍토에서는 양과 염소 외에 소와 말, 낙타 등 다른 대형 가축이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 강수량이 400mm 이하면 밀을 재배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도 보리는 300mm 정도인 곳에서는 재배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기장과 조 등의 잡곡은 더욱 소량의 강수로도 재배할 수 있다.


사막의 풍토가 지닌 한 특징은 오아시스이다. 오아시스는 지하에 있는 수맥이 지표에 이르는 곳에 생기는 녹지로서, 큰 오아시스에서는 벼농사까지 이루어진다. 


한편, 토양의 염성화를 불러온 이유로 유력한 설의 하나가 염해이다. 그것은 관개수에 포함된 미량의 염분이 농경지에 축적되거나,아니면 태고부터 지하에 괴어 있었던지 하여 일어난다고 한다. 염해가 생기면 그 토지는 염분을 씻어내지 않는 한 농경지로 사용할수 없다. 중앙아시아의 아랄해 주변에서는 옛소련이 호수로 흘러들어오는 아무다리야강의 물을 끌어다 대규모 면화밭을 개간했다.그로 인해 아랄해로 흘러들어오는 수량이 줄어 호수의 면적이 뚜렷하게 감소했다. 또 면화밭에서는 토양의 염성화에 의해 광대한 면적이 사막화되었다. 그렇게 하여 사막의 면적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중국에서 사막의 풍토


다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근처에서 발견된 소하묘小河墓 유적(3000여 년 전)은 묘의 유적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미라가 담긴 관이 발견되었다. 그 관은 호양나무(야생 포플러)의 나무판을 짜맞추어 만든 것으로, 그 뚜껑 부분은 살아 있는 소의 생가죽으로 덮어 놓았다. 관 안에는 풀로 엮은 바구니가 있고, 그 바구니 안에 보통 밀과 기장으로 여겨지는 식물의 씨앗이 들어가 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3000년 전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는 밀 등과 소, 양 등을 조합한 복합적인 농업+목축 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또한 문헌에서도 과거 2000년에 걸쳐서 건조화가 진행되었음이 밝혀졌다. 뒤에 서술하듯이, 풍토에는 역사성이 있어 그 기후와 생태계의 상태는 시간에 따라서 시시각각 변화한다. 조금 대담한 추측을 더하자면, 사막의 풍토 가운데 적어도 그 일부는 지금과 같은 건조 상태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설은 누란왕국의 발굴조사에서도 밝혀졌다. 누란왕국은 기원전 4000년 전쯤에 기록에 나타나, 그 뒤 약 800년에 걸쳐서 존속했다고 한다. 누란왕국의 위치는 고고학적으로 엄밀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공작강孔雀川의 하류에서 발견된 몇 곳의 유적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른바 뤄부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일찍이 호수의 기슭이었다. 누란왕국은 인구가 1만4천 아니면 1만7천이라고 기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에 상당하는 규모의 마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스웨덴의 탐험가 S. 헤딘이 탐험할 때 카누로 내려갔던 공작강에는 이제 거의 물이 없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타클라마칸 사막의 건조화는 이 100년 사이에도 진행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타클라마칸에서부터 1500킬로미터 동쪽의 헤이허 유역에서는 이 1500년 사이 강물을 이용을 둘러싸고 유목민과 농민의 이해 대립이 있었다(日高, 中尾 2006). 반건조지대에서는 이처럼 수리권을 둘러싼 다툼이 늘 발생한다.  



고대 문명과 염해


그런데 '사막'의 풍토에서 사막화는 어떻게 하여 발생하고, 또 진행되는가?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부분은 오랜 기간의 기후변동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사막화는 인위적인 요인이 크다는 설도 있다.


Maekawa(1974)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기(우르 제3왕조)에 앞에 언급한 메카니즘에 의해 염해가 발생해 겨우 25년 사이에 그때까지 경작할 수 있었던 밀을 재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며 염해설을 지지했다. 그와 같은 일은 고대 인더스 문명에서도 일어났다고 한다. 또 누란왕국이 쇠망한 원인으로 이 염해를 드는 연구자도 있다(山田 2006). 다만, 예를 들면 오사카교육대학의 이토 토시오伊藤敏雄 씨와 같이 이에 이론을 제기하는 연구자도 있다. 인더스 문명의 범위에서도 특히 남부의 구자라트 지방에서 토양의 염성화가 심각하다고 한다. 누란왕국의 쇠망처럼 염해가 인더스 문명이 붕괴한 직접적 원인이었는지, 아니면 그것과 인과관계가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장래의 기후변동 등에 의하여 강수량이 늘어났던 곳에서 풍요로운 대지가 회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확실하다.


이러한 과거의 염해가 정말이었다면, 토양의 염화에 의한 사막화는 인위적 색채가 짙은 현상이었던 셈이다. 사막화와 같은 전 지구수준의 환경문제는 지금까지 걸핏하면 기후변동 등의 자연현상이라고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생각은 어쩔 수 없이 재검토하고 있다. 





목장의 풍토와 농경



목장의 풍토


목장의 풍토는 대개 유럽과 겹친다. 유럽에서 농경의 확산은 벨우드(2008)에 의하면 1만 년 전에 시작되어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7600년 전쯤에, 영국에서는 6000년 전쯤에, 그리고 북유럽에서는 2500년 전쯤에 전해졌다. 이러한 시간차와 함께, 재배되었던 작물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달라진다. 지중해 연안 지방에서는 지금도 사배체인 듀럼밀이 널리 재배되고 있다. 미국 농무성의 통계에의하면, 지중해 지방에서 가장 마카로니밀을 많이 생산하는 곳은 이탈리아(연간 약 400만 톤), 터키(230만 톤), 스페인(210만 톤), 알제리(200만 톤), 프랑스(140만 톤) 순이다. 이에 대하여 같은 유럽에서도 독일은 겨우 2톤밖에 안 된다. 한편 빵밀 쪽은 전 유럽에서 대개 널리 재배되고 있다.


마카로니밀과 대조되는 것이 감자이다. 감자의 생산량은 유럽에서 우크라이나, 독일, 폴란드, 벨라루시, 네덜란드, 프랑스 순으로서 '북고남저'의 경향이 뚜렷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감자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 특히 북유럽에 전해진 건남유럽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감자 이전의' 유럽, 특히 북유럽에서 주곡은 보리와 호밀, 귀리 등 이른바 '맥류'라는 잡곡의 무리였다(벨우드 2008).


그러나 목장의 풍토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목축이다. 목장의 풍토에서 그 근간이 되는 생업은 이른바 '무리 가축'이라는 큰 무리를 단위로 이동하는 가축을 이용한 목축이다. 이것은 원래 서아시아에서 발단한 일이다.



목장의 풍토를 바꾼 신대륙의 농경 요소


목장의 풍토는 16세기까지 맥류+젖, 육류가 조합을 이룬 풍토였다. 그러나 그 생산성이 반드시 높은 건 아니고, 특히 북유럽의 식량생산은 비참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 16세기에 도입된 감자였다. 감자는 남아메리카 원산으로, 신대륙의 '발견'에 의하여 유럽에 전해진 신참 식량이다. 신참이지만 감자는 유럽의 풍토에 잘 적응했다. 밀레의 '만종'에는 저녁에 교회 종소리에 기도를 드리는 농부들의 발 밑에 감자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자는 생산성이 매우 낮았던 유럽 북부에서는 남부보다 아주 빨리 전파되었다. 다만 감자는 그 덩이줄기에 의하여, 즉 영양번식에 의하여 자손을 늘리게 된다. 물론 씨앗으로 번식하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싹 부분을 남기며 자른 씨감자로 늘리게 된다. 씨감자로 늘어난 각 개체는 말하자면 복제물로서, 유전적 다양성이 부족한 집단이 급속하게 늘어나는 셈이다.


1980년대 감자는 영국부터 아일랜드에서도 주요 작물로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감자에 역병이란 질병이 발생했다. 질병은 순식간에 섬 전체로 퍼지고, 감자를 파멸시켰다. 절반이 감자였던 섬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기근에 빠졌다. 역병은 이듬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발생하여 혼란이 이어졌다. 이후 몇 년 동안 아일랜드를 빠져나온 난민이 200만을 넘었다고 한다(Zuckerman 2003).


그밖에도 남미 원산으로 세계를 돌아다닌 식량이 있다. 옥수수와 토마토, 고추 등이 그것인데, 이들은 감자와 마찬가지로 겨우 400년 사이에 세계를 돌아다녔다.



목장의 풍토와 사막의 풍토가 갖는 일체성


풍토에는 역사성이 있다. 즉 영원히 불변하는 풍토란 없다. 와츠지는 '풍토의 역사성'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이를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썼듯이,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과 우즈베키스탄 남부에서는 건조함이 지금에 비하여 아주 경미했다. 현장 3세의 여행기에서도 그 행보가 이르른 곳에 나라가 있거나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長沢 1998). 사막의 풍토의 전역이 그러했는지 어땠는지, 일찍이 그곳은 농업, 목축업이 행해진 풍토였던 것을 살필 수 있다.


그곳에 있었던 작물과 가축이 현재 목장의 풍토와 유사한 걸 보면, 사막의 풍토가 예전에는 목장의 풍토와 유사한 경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또 그림1에 보이듯이, 중국 북서부에서는 마치 사막의 풍토와 계절풍의 풍토에 끼어 있는 모양으로 목장과 비슷한 풍토를 볼 수 있다. 상상을 마음껏 한다면, 사막의 풍토는 3000년쯤 전에는 현재 목장의 풍토 같은 경관을 나타내고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어떤 이유로 인해 바다에서먼 일부 지역에서 건조함이 진행되어 지금 같은 사막의 풍토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점에 대한 상세한 건 앞으로 연구할 주제의 하나로 남겨두고 싶다. 또 이 시리즈에서는 사막의 풍토와 목장의 풍토를 합쳐서 '맥류의 풍토'라고 부르고 싶다.


여기에서 계절풍의 풍토와 맥류의 풍토에 있는 농경 요소를 비교해 보자.


먼저 곡류에 대하여. 계절풍 풍토에서 곡물은 먼저 뭐니뭐니 해도 벼이다. 다음 메밀도 중국에서 생겼다고 한다. 백합, 칡 등 일부 뿌리식물도 계절풍에서 생겼을 것이다. 한편 맥류의 풍토에서 생긴 것은 밀, 보리, 귀리, 호밀 등 여러 '맥류'이다. 콩과에 대해서는 대두, 팥 종류가 계절풍 풍토에서 생긴 콩임에 대해, 맥류의 풍토에서는 누에콩, 병아리콩 등이 생겼다.


가축으로는 계절풍에서 생긴 건 무리를 이루지 않는 여러 '집 가축'인 돼지나 가금류 외에 물소, 인도 혹소 정도이고, 나머지는 눈에 띄는 것이 없다. 한편 맥류의 풍토에서는 세계의 주요한 무리 가축의 주축인 소, 말, 양, 염소가 기원하고 있다. 


식품의 보존기술의 하나인 발효에 대해서도 두 풍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계절풍 풍토에서 발효는 대부분 곰팡이 종류인 누룩곰팡이가 쓰인다. 이 지역의 양조주와 증류주(모두 곡물을 원료로 함) 대부분은 이 방법으로 만든다. 또 된장, 간장, 청국장 같은 고유한 발효식품도 대부분이 미생물을 이용한 발효법으로 만들고 있다. 다만식해나 어간장 같은 식품에서는 그 방법이 조금 다르다. 한편 맥류의 풍토에서 발효법은 유산균을 이용하거나 또는 체내의 효소를 이용하는 것이 중심이다. 이집트에서 기원한 맥주는 엠머밀의 빵을 설구워서 그대로 살아남은 아밀라아제의 힘을 이용하여 녹말을 당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맥주를 만든다.




남단과 북단의 풍토



북쪽 회랑


유라시아의 북단은 북극해에 접한 매우 추운 땅이다. 토지는 영구동토이고, 지표에는 지의류 이외의 식물은 거의 없다. 여기는 쾨펜의 기후구분도에 따르면 한대(E 지역)이다. 여기에서는 순록을 사육하는 것 말고는 농경의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남쪽에는 타이가라고 부르는 침엽수를 중심으로 한 숲이 펼쳐진다. 쾨펜의 냉대(D 지역)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서는 봄밀, 호밀, 순무, 메밀 등이 재배되어 왔다. 겨울철은 어떠한 경작도 할 수 없고, 여름철도 짧다. 봄밀이란 초봄에 심어서 여름철에 생육하고, 가을에 수확하는 재배방식을 취하는 밀로서, 그 전용 품종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지역은 계절풍 북부에 농경이 건너오게 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왜냐하면 몇 가지 재배식물이 여기를 통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운송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지역을 '북쪽 회랑'이라 부르면 좋겠다. 구체적으로 작물의 이름을 들자면, 순무와 보리, 우엉, 메밀 등이다. 이 가운데 보리와 순무는 다른 위도대에서 적응하는 여타의 품종군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 여러 경로를 거쳐 전파되었다고 생각한다. 상세한 건 '일본의 풍토'에서 이야기하자.




인도의 풍토와 농경


인도의 풍토도 흥미로운 연구 주제의 하나이다. 인도는 계절풍 권역이지만, 그 광대함과 기후, 지형의 다양성 때문에 한마디로 '계절풍'이라고 묶을 수 없는 존재이다. 특히 반건조지대에 걸쳐 있는 남인도에서는 이곳 고유의 작물이 옛날부터 재배되어 왔다.  또한 이 지역은 일찍이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작물을 유라시아에 최초로 들여온 장소라고 지목되며, 독자의 농경문화를 형성해 왔다. 


와츠지는 인도를 '계절풍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토지'라고 하는데, 그의 풍토론과 마찬가지로 풍토에 주목하여 비교문명론의 논의를 전개한 우메사오 다다오梅棹忠夫는 인도를 동양과 서양에 대비해 '중양中洋'이라고 불러 두 지역과 구별한다.


계절풍 풍토의 벼, 사막과 목장, 즉 맥류 풍토의 맥류와 마찬가지로 인도의 풍토를 특징하는 작물을 들자면 '잡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 피, 기장 등의 종으로 대표되는 'millet' 외에 인도 고유의 잡곡도 있다. 또 콩 종류에서도 인도 고유의 종이 있다(前田, 1987). 특히 다양한 콩 종류는 그 종교적 금지에 의하여 육류(때로는 알까지도)를 입에 대지 않는 많은 인도 사람들에게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콩과작물과 벼과작물을 섞어심는 재배양식이 있다고도 한다. 콩과식물의 대부분이 공기 중의 질소를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화시키는 '질소 고정'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콩과작물이 지주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질소 성분의 공급을 받아서 자라는 벼과작물을 함께 재배하여 서로 돕는 관계를 구축하는 독특한 농법이다. 벼농사에 대해 말하자면, 인도에서도 벼농사가 행해졌는데 인도의 벼농사는 계절풍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논할 수 없다(이 점에 대해서는 이 책 말미의 대담에 나온다).


인도의 '중양적' 성격은 그 지리적 위치와도 관계가 있다. 우리들의 프로젝트와 같이 지구연에 속한 '인더스 프로젝트'의 오사다 토시키長田俊樹 교수에 의하면, 인더스 문명은 벼와 맥류를 모두 수용한 문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도의 독자적 풍토에 대해서는 농경과의 관련성부터 더 상세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열대 도서부의 풍토와 작물의 진화


열대 도서의 농경 풍토는 '뿌리작물 농경의 풍토'라고 말할 것이다. 그곳은 토란, 얌 등 덩이줄기 식물, 빵나무와 바나나, 판다누스 등의 보고임과 함께 그것들 가운데 몇 가지는 이곳이 원산지이다. 이러한 식물들은 말할 것도 없이 영양번식을 하는 식물이다. 그것은 계절풍이나 맥류 풍토의 주요 작물, 특히 맥류가 한해살이 작물인 것과 대조적이다. 


한해살이 작물은 1년에 1회, 반드시 번식을 행한다. 종자는 통상 3년쯤 지나면 발아력을 잃기 때문에, 어느 종의 품종이나 종자인 채로 오래 놔둘 수가 없다. 종자를 저온, 건조 등의 조건으로 놔두면 장기간 보존할 수 있다는 건 20세기 후반에 발명된 기술이다. 게다가 한해살이 식물의 종자는 뿌리면 다음 농사철에는 반드시 죽기 때문에, 그 농사철의 마지막에 파종했던 것에서 다음 세대의 종자를 확보해야 하는 숙명이 있다. 즉 어느 문화가 한해살이 작물을 가지고 있다는 건 파종과 채종의 주기를 끊임없이 계속 행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곳에서 한해살이 작물의 농경이 일단 시작되면 이제 원래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동시에 이런 점은 한해살이 작물이 1년에 1회의 유성생식으로 급속히 진화하는 기회를 획득한다는 걸 의미한다. 한해살이 식물 가운데에는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유형과 딴꽃가루받이를 하는 유형이 있다.  이 가운데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유형은 많은 품종을 만들어내기 쉽고, 그만큼 환경이 상이한 여러 지역에 전파되기 쉽다.


한편 여러해살이 풀은 극단적으로 말해 몇 백 년, 몇 천 년에 걸쳐 유성생식하지 않기 때문에 진화적으로는 몇 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적으로는 이동도 느리고, 높은 토착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풍토



일본의 남북


일본 열도의 문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지적은 이미 상록활엽수림 문화를 둘러싼 논의 안에서 발생했다. 이 지적은 일본의 숲이 동북부의 낙엽활엽수림대와 남서부의 상록활엽수림대로 크게 양분될 수 있다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농경 문화에 대해서도 이 지적은 그대로 해당된다. 다만 남북(또는 동서라 하는 것이 적당할지 모름)을 나누는 선은 문화 요소에 따라 조금 다르다. 남북의 다른 농경 요소와 그에 관련된 요소를 그림2에 표시해 놓았다.



그림2


요소

경계

동(북)

서(남)

조몬 벼농사

순무 품종

보리 품종

보리 품종(겉보리)

파 품종

잠재식생(숲의 수종)

생쥐의 계통


매우 드묾

서양종 순무

W형이 있음

겉보리

흰파(카가加賀 파)

낙엽수림

식용(E. crus-galli)

mus 형

있음

일본 순무

E형

쌀보리

청파(9줄 파 등)

상록활엽수림

잡초 피(E. oryzicola)가 많음

castaneus 형


'남북'의 경계가 가장 북쪽에 있는 요소로는 생쥐, 왕대 등이 있다. 왕대 분포의 북방한계는 아키타현 부근이라든지, 쓰가루 해협이라든지, 또는 후쿠시마현 부근이라 일컬어진다. 경계선이 그 다음으로 북쪽에 치우쳐 있는 것이 순무, 파, 보리 등이다. 순무를 예로 들면, 순무에는 아종 수준에서 2가지 품종군이 있다. 이 가운데 서일본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품종은 일본 순무라고 부르며, 잎 등에 가느다란 털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북일본 등에 분포하는 품종은 서양종 순무라고 부른다. 야마가타현의 쇼나이庄内 지방을 중심으로 재배되는 이른바 '붉은 순무'가 그 전형이다(靑葉, 2000). 파의 분포도 이와 유사하여 북(동)일본에는 이른바 흰파가, 반대로 남(서)일본에는 9줄 파 형의 녹색 부분이 많은 유형이 분포해 있었다. 경계선이 가장 서(남)쪽에 있는 것이 피, 수종 등이다. 조몬 토기의 한 유형인 돌대문 토기의 분포도 이 선과 같다. 또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다고 생각되는 사투리의 동서 차이, 간장의 기호성 차이 등도 대체로 이 선이거나, 약간 동쪽 지역에 경계를 가진다고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 열도에서 남북(서동)의 요소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유라시아에서 동서의 요소와 일치하는 것이 많다는 점이다. 서양종 순무의 분포역은 시베리아에서 더 서쪽에 이른다. 한편 일본 순무의 분포역은 중국의 강남 지방이 중심이다. 거의 마찬가지로 보리도 이에 해당한다. 즉, 이러한 재배식물들을 똑같은 순무, 보리라고 하지만, 실은 두 가지 다른 유형이 건너와 적어도 하나는 중국의 강남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라시아의 서쪽에서 각각 따로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즉, 일본 열도의 풍토는 그 남(서)반분은 계절풍 풍토이고 북(동)반분은 훨씬 목장의 풍토와 유사성을 나타낸다. 그런 맥락에서 일본은 일면이 아니다. <여러 가지 일본(いくつもの日本)>(赤坂, 2000)이란 발상은 풍토의 입장에서도 정당성을 갖는다.



일본에서 농경의 시작


일본 열도에서 농경의 시작은 언제로 잡으면 좋을까? 이전에는 고고학을 중심으로 조몬시대는 수렵채집의 시대, 야요이시대 이후는 논을 수반한 농경의 시대라고 단순하게 생각해 왔다. '조몬 농경론'도 되풀이하며 나왔지만, 지금까지는 어느 것도 세상에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점점 '조몬-야요이'를 재검토하자는 기운이 높아지고 있다. 조몬 농경론에 부정적인 견해는 주로 논의 유적이 조몬시대의 만기의 종말기까지 출현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농경이라 하면 벼농사, 게다가 논벼농사라는 견해가 마치 상식인 것처럼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말하자면 '벼농사 지상주의'라고 할 만한 무대에서 조몬 농경에는 의론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홋카이도에서 피를 재배했을 가능성이 지적되는 점, 아오모리현과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에서 밤나무의 재배에 대한 연구 등에 의하여 농경이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의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서일본(여기에서는 와카사만과 이세만을 잇는 선의 서쪽)에서는 조몬시대 후기에 들어오면 여러 유적에서 벼잎의 세포 화석이 검출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벼농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동일본에 언제 벼농사가 전해졌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앞에서 기술했듯이 조몬시대의 일본 열도는 크게 남북(동서)으로 양분할 수 있고, 북쪽 조몬은 훨씬 맥류의 풍토와 상관되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풍토와 지구 환경문제



풍토에 적응하기


앞에서 와츠지의 풍토론이 지닌 문제점의 하나로 사람의 기질이나 사상 같은 것을 너무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이나 사회의 기질과 사상이 그 풍토의 기후, 생태계나 농업 등의 영향을 완전히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아니, 기질이나 사상 같은 것은 확실히 그 풍토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또 풍토에 적응한 생활이나 농경문화의 생성에도 관여해 왔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토착 애니미즘적인 자연관과 세계관의 영향이 뿌리 깊었다고 생각하는데, 고대 이후에 건너온 불교는 이 애니미즘적인 사상을 받아들여 독자적 불교를 형성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일본 특유의 사상이 적어도 중세까지 사람들의 넉넉함, 또는 자연에 따르는 생활방식의 기반이 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 시리즈 5권에서 소개하는 오사카부의 이케시마池島와 후쿠만지福万寺 유적에서 검출된 중세의 '시마바타島畑'는 그 구체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시마바타는 특히 큰 홍수 이후 등에 퇴적된 모래를 쌓아올려 두렁을 만들고 밭작물을 심고, 또 낮은 곳에는 벼를 심을 수 있도록 한 장치이다. 홍수라는 자연의 맹위를 헤어나기 위한 '견딤의 기술'이라 해도 좋다. 현대의 발상으로 홍수의 방지는 오로지 치수사업에 의한 것인데, 실제로 나중에는 이케시마와 후쿠만지 유적의 부근에서도 '자주 넘치는 강'이란 이명을 가지고 있던 야마토강을 바꾸어 놓는 공사가 행해져(1703년) 홍수 피해는 경감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형 공공투자를 할 수 없었던 시대에는 시마바타는 흔히 생각할 수 있던 '견딤의 기술'이었다.



농학적 적응과 공학적 대응


동남아시아의 벼농사에서도 '견딤의 기술' 같은 방식이 있다. 그 좋은 예가 '뜬벼'이다. 뜬벼는 앞에서도 적었듯이, 동남아시아 평야부에서 우기에 몇 미터나 되는 수심에서도 살아가는 벼이다. 벼는 그 줄기에 생기는 마디와 마디의 사이에 있는 분열조직의 세포를 늘려서, 그로 인해 수심에 따라 키를 변화시킨다. 교토대학 동남아시아 연구센터에 있던 타카야 요시카즈高谷好一 씨는 이러한 벼가 지닌 적응력을 이용한 적응 방법을 '농학적 적응'이라 불렀다. 한편, 이외에도 댐을 만들어서 수량을 조절하거나 배수로를 만들어서 물빠짐을 좋게 하면 일반적인 벼를 농사지을 수 있다. 이것을 농학적 적응에 대비해 '공학적 적응'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태국의 방콕 평원에서는 지금까지 광대한 뜬벼의 논이 펼쳐져 있었다. 즉 농학적 적응을 하여 사람들은 벼농사를 영위해 왔다. 최근 이곳을 흐르는 차오프라야강의 상류에 거대한 댐을 만들어 홍수를 일으키지 않고 토지를 '유효하게' 사용한다는 시도가, 곧 공학적 적응이 검토되기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정말 평원의 광대한 토지는 우기와 건기에 관계없이 이용할 수 있고, 계속해서 벼농사도 가능하다. 생산성도 향상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학적 적응이 도입됨에 따라 기존의 뜬벼를 심던 논에 성립되어 있던, 사람들의 삶과 이어져 있던 생태계는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뜬벼의 논은 어로의 장으로 사용되어 거기에서는 벼만이 아니라 잉어과나 메기과의 담수어 등을 잡았다. 또 그들의 배설물이나 물에 녹은 영양분이 뜬벼의 논에서는 거름이 필요 없다고 할 정도로 공급되었다. 뜬벼를 폐지하면 이와 같은 체계를 단숨에 사라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공학적 적응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우수한 적응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투자되는 에너지도 많아지는 데다가 예기치 않은 재해 등에는 적응할 수 없는, 유연성이 떨어지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그에 반하여 농학적 적응에서는 생산성은 낮지만 생태계의 안정을 손상시키지 않고, 높은 지속성을 가지고 생산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모두 풍토에 적응하기라 할 수 있는데, 어느 쪽이 풍토의 실태에 꼭 맞는 것인지는 명확할 것이다. 


농학적 적응이 계절풍 풍토의 고유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훨씬 예전에 쓸모없어진, 유럽의 중세에 널리 행해졌던 '삼포식 농업'도 일종의 농학적 적응이었다. 그럼 공학적 적응은 단순히 근대화의 산물로 도입된 것뿐일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일본을 비롯한 계절풍 풍토에서는 애니미즘 사상을 현재에 이어받아, 그만큼 농학적 적응을 이어받으려는 행동규범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풍토의 사상적 우열을 이야기할 요량은 아니지만, 풍토와의 관련에서 생긴 사상이 풍토에 적응하기란 방식에 대하여 지닌 의의를 새로이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지구 환경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처음에 적었던 농업 생산의 모순과 붕괴로 가는 길은 풍토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물을 둘러싼 문제를 예로 들자면 계절풍 풍토처럼 남아도는 물이 홍수와 습해를 일으키는 곳도 있다면, 사막의 풍토처럼 물의 절대량이 부족하건, 그것을 완화하기 위한 관개가 가져온 염해로 고생하는 곳도 있다. 또한 같은 계절풍 풍토에서도 홍수의 상습 지대(일본에서는 수향水郷 지대나 키소산센木曾三川 지대)도 있다면, 반대로 여름철의 적은 비로 가뭄의 피해를 받기 쉬운 지대(일본에서는 사누키讃岐 평야나 오사카 평야의 남부)도 있다. 문제는 매우 지역적이다.


기후변화, 특히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온난화에 대해서도 어느 작물의 재배 적지가 고위도 지대로 이동해 버린다는 문제가 있는 토지(일본처럼 남북으로 긴 나라는 그렇다)도 있다면, 빙하의 해빙으로 홍수가 빈발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지역도 있다. 강수의 패턴이 변하여 작부체계에 영향이 나타나는 지역도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지구 환경문제는 그 근본은 동일한 원인에 지배되더라도, 나타나는 바는 풍토에 따라 여러 모습이 된다.


해결을 목표로 방책을 채택하는 법도 또한 풍토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뜬벼의 체계를 채택해 온 열대 계절풍의 사람들은 해마다 홍수에 대해 체념하는 듯한 대응을 채택한다. 2008년 여름, 나는 라오스의 비엔티엔에 있었다. 40년 만에 메콩강의 홍수가 난다 하였는데, 사실 일부에서는 제방이 터져 무너져 침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비엔티엔 시당국은 군을 동원하여 제방 위에 모래부대를 쌓는 대책을 채택했는데, 시 안에서는 양동이와 바가지를 사서 그때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수위가 예상을 뛰어넘으면 재산의 일부를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강이 범람하면 물고기가 시 안으로 흘러 들어와 생각하지 않게 고기를 잡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관공서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예전에는 짚신을 신고 통근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회의 규범의 문제 등이 아니라, 언제 물이 넘을지 모르는 풍토에 사는 사람들이 적응한 모습이었다. 


한편, 공학적으로 적응해 버렸던 일본에서는 일단 홍수가 일어나면 넘친 물도, 고기도, 토사도 모든 것이 재해의 원인이 된다. 물이나 아스팔트 위의 모래는 교통의 장애가 되고, 물고기는 죽어서 부패해 위생 문제를 일으킨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적응에 대한 사고방식으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처가 바뀐다는 걸 우리는 깨닫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지구 환경문제의 역사도,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 왔느냐 하는 인간의 역사도 잘 모른 채로 현재에 이르렀는데, 지금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풍토에 적응하는 방식 하나만 해도 이미 크게 변용하려고 하고 있어서, 올바르게 과거를 인식하고 현재와 미래에 도움이 되는 앎을 획득하려 한다는 역사적 시점의 의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해도 좋다. 풍토와 그 역사라는 관점(이것을 환경사의 관점이라 해도 좋다)에서 환경문제를 재검토하는 일은 지구 환경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한 중요한 과제이다.




마치며


이 시리즈 <유라시아 농경사>는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의 연구 프로젝트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의 연구 성과를 공개하는 일환으로 프로젝트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의 연속 공개강좌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서적의 형식을 위하여 새롭게 저술을 부탁한 부분도 많다. 프로젝트의 이름인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라는 주제는 조금 역설적인 말이지만, 인간에 의한 농업(목축을 포함)이란 행위와 주위의 환경, 특히 생태계와 관계를 맺어 온 역사를 연구하려고 한 것이다. 근저에 있는 발상은 우리들은 이 관계에 대하여, 특히 그 역사에 대한 긴요함을모르는 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역사의 연구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연구 대상으로 한다. 역사 연구의 기초에 있는 문서만으로는 이 '관계'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다. 여러 가지 자연과학의 방법과 조합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문자가 없는 시대의 일은 고고학의 방법이 유력하다. 이와 같이 농업과 환경의 관계사의 해명에는 분야의 제한을 넘어 학문의 융합이 필요하다. 


지구연의 프로젝트는 그 대부분이 이러한 분야를 횡단하는 양식을 지니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도 모두 80명 정도의 연구자가 있는데, 그 전문 분야는 여러 갈래이다. 분야의 제한을 넘는 건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일보다어려울 때도 많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뛰어넘어 기대한 바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분야의 장벽을 넘은 대화를 시도했다. 이 시리즈도 또한 그러한 대화를 시도한 하나로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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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학과 기술을 동기간으로, 아마도 쌍둥이로, 줄기의 일부( “과학, 기술, 공학, 수학”)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 세계의 가장 빛나는 경이로움에 관해서라면 —주머니 속의 슈퍼컴퓨터가 위성과 통신하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은 긴밀히 결탁해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대부분에서 과학과 기술은 아무 관련이 없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많은 발명품이 과학적 방법과는 무관한 순수한 도구이다. 바퀴와 우물, 크랭크와 방아, 기어와 배의 돛대, 시계와  방향타 및 작물의 돌려짓기 등은 모두 인류와 경제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 생각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우리가 날마다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물건의 일부는 과학적 방법을 채택하기 오래전부터 발명되었다. 나는 컴퓨터와 아이폰, 에코,  G.P.S.를 좋아하지만,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고 처음 사용할 때부터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으며 깨어 있는 모든 시간에 늘 의지하고 있는 지금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때도 의지하는 13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안경이 있다. 비누는 페니실린보다 더 많은 죽음을 예방했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이다.


“정상이 아니다(Against the Grain): 초기 국가의 내밀한 역사”에서 예일대학 정치학 교수 제임스 C. 스콧James C. Scott 씨는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인 기술에 대하여 그럴듯한 이야기를 제시한다. 그 기술은 호모 사피엔스에 선행하며 우리의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에게 속하니 매우 오래되었다. 그 기술은 불이다.  우린 두 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불을 사용했다. 첫 번째로 가장 확실한 건 요리이다. Richard Wrangham 씨가 그의 책 “점화(Catching Fire)”에서 주장했듯이 우리가 요리를 하게 된 능력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게 해주고, 훨씬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근연종의 동물인 침팬지는 우리보다 3배나 큰 결장이 있다. 소화시키기 더 어려운 생식을 할 때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리한 음식에서 얻는 여분의 열량은 우리가 소비하는 에너지의 약 1/5을 흡수하는 커다란 두뇌를 개발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대부분의 포유 동물의 두뇌는 이의 1/10에 불과하다. 그 차이가 인간을 지구를 지배하는 종으로 만들었다. 

불이 인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현대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경관을 우리의 목적에 맞게 변경하고자 불을 사용했다. 수렵채집인들은 이동하면서 불을 놓아 토지를 정리하고, 빨리 자라면서 먹이를 유인하는 새로운 식물이 자리를 잡도록 했다.  또 그들은 불로 동물들도 몰아냈다. 스콧 씨는 우리의 조상이 이 새로운 도구에 숙달된 시기부터 이러한 기술을 너무 많이 사용하여 이른바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르는 인간이 지배하는 시기가 열렸다고 생각한다. 

스콧 씨는 우리가 불이란 기술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다고 제시한다. 인류 역사의 95%를 차지하는 수렵채집인의 기간을 보낸 우리 조상의 독창성을 그리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콧 씨는 “인간의 불이 경관 건축의 수단으로 역사적인 기록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 결과가 ‘야만인’이라고 알려진 ‘문명화 이전’의 사람들이 수천 년에 걸쳐 퍼뜨리며 성취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불의 중요성을 입증하고자, 그는 아프리카 남부의 특정 동굴에서 발견된 걸 지적한다. 동굴의 가장 초기의, 가장 오래된 지층에는 육식동물의 뼈 전체와 인간을 포함해 그들이 씹어 먹었던 여러 뼛조각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가 불을 발견하고 동굴의 소유권이 이전된 층이 나타난다. 인간의 뼈가 전체가 되고, 육식동물이 뼛조각이 된다. 불은 점심으로 먹느냐 점심거리가 되느냐의 차이를 만든다.


해부학적으로 현대 인류는 대략 20만 년 전부터 존재했다. 우리는 그 대부분의 시간을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다. 그 뒤 약 1만2천 년 전, 지구를 지배하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일반적으로 합의된 신석기혁명(Neolithic Revolution)이 일어난다. 스콧 씨의 말을 인용하자면, 소와 돼지 같은 동물을 가축화하고 수렵채집에서 작물의 파종과 재배로 전환하는 농업 혁신의 “꾸러미”를 채용한 것이다. 이러한 작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지금도 인류의 주식이 되는 밀, 보리, 벼, 옥수수 같은 곡식이었다.곡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의 탄생을 이끌었고, 그에 따라 국가가 발전하고 복잡한 사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정상이 아니다”에서는 널리 퍼진 이 이야기를 확 뒤집고 있다.  스콧 씨의 전공은 초기 인류의 역사가 아니다. 그의 작업은 국가의 형성에 대하여 회의적이며 농민의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의 관심사가 그리는 궤적은 “농민의 도덕경제(The Moral Economy of the Peasant)”부터 “지배 당하지 않는 기술(The Art of Not Being Governed)” 같은 그의 저서 제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국가처럼 보기(Seeing Like a State)”는 정치학자들의 초석이 되었으며, 국가의 중심에 있는 관료들이 자신들이 관리하는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식의 중앙집권적 계획과 “하이 모더니즘(high modernism)”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스콧 씨는 국가의 관심사와 주체의 관심사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정반대라고 주장한다. 스탈린의 집단농장 프로젝트는 “국가가 농법을 결정하고, 농촌의 실제 임금을 결정하며, 생산된 어떤 곡물이라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걸 타당화시키고, 정치적으로 농촌을 황폐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또한 수백만의 농민을 학살했다.

스콧 씨의 새 책은 이러한 생각을 오래된 과거로 확장시키고, 우리의 역사가 일직선으로 진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기존 연구를 끌어온다. 우리의 연대표는 훨씬 더 복잡하며, 표준적인 설명의 인과관계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순박한 상태’의 국가 중의 국가이기에, 오늘날 이라크 지역이기도 한 메소포타미아에 집중한다.  여기에서 “순박한 상태”라는 단어는 초기의 정착으로부터 오염되는 일 없이 이러한 국가가 탄생하고, 어떠한 사회 조직이 처음으로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기록을 작성한 최초의 국가였고, 이후의 역사에 이중으로 관련이 있는 근동과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다른 국가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최근 고고학 연구에서 들리는 중요한 소식은 “정착문화권” 또는 정착한 공동체에서 사는 일과 농업을 채택한 일 사이의 시간차에 관한 것이다.  예전 연구에서는 농업이 발명되면서 정착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여러 증거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동물과 곡식에 기반한 최초의 농경 경제에서 “두 가지 주요한 요소의 길들임 -가축화와 작물화-” 사이에는 4천 년이란 엄청난 격차가 있다.우리의 조상은 이 새로운 생활방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농업의 가능성을 심사숙고하며 살펴보았다. 그들이 살아왔던 생활이 놀랄만큼 풍요로웠기에 오랫동안 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중국 황하의 초기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 이름들이 암시하듯 습지대였다. 신석기 시대에 메소포타미아는 바다가 현재의 해안보다 더 내륙 쪽으로 들어오는 삼각주의 습지대였다.

이곳은 인간에게 관대한 경관이었다. 물고기와 그를 먹이로 삼는 동물, 주기적인 홍수 이후에 남는 비옥한 흙, 철새와 강가를 돌아다니는 이동성 먹이 등을 제공했다.  초기의 정착 공동체는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 대지가 다양한 먹을거리의 원천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어떤 해에 어느 먹을거리의 원천이 부족해도 다른 원천이 존재했다. 고고학은 길들임과 농업이란 “신석기 시대의 꾸러미”가 우리의 현대 마을과 도시 및 국가의 조상인 정착 공동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한 공동체는 인류가 집약적 농업을 행하기 이전에 습지대의 풍족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수천 년 동안 이어졌다. 하나만 집중적으로 재배하는 곡식 작물에 의존하는 게 훨씬 위험했으니, 사람들이 변화를 일으키는 데 수천 년이 걸린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조상은 이러한 복잡한 식량 공급의 그물망에서 한 가지 작물을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것으로 전환했을까? 스콧 씨는 기후의 압박 때문일 것이라 추측했지만, 우린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가지는 명확하다. 첫째는 수천 년 동안 농업 혁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앙이 되었다는 점이다. 화석의 기록에 의하면 농경민의 생활은 수렵채집인의 그것보다 더 힘들었다는 게 드러난다. 그들의 뼈는 먹을거리의 압박이 있었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그들은 더 작고, 자주 아팠으며, 사망률은 더 높았다. 가축과 가까이에서 살아가면서 종의 장벽을 뛰어넘는 질병이 발생하여 인구밀도가 높은 정착 공동체에 혼란이 야기되었다. 스콧 씨는 그걸 마을이 아니라 “후기 신선기 시대의 다종 재정착 야영지(late-Neolithic multispecies resettlement camps)”라고 부른다. 누가 그곳 중 한 곳에 살기를 선택했을까? 제러드 다이아몬드 씨는 신석기 혁명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에 관하여 놀랄만한 사실은, 이 시대의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스콧 씨가 말하기를, 우리가 증거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또 다른 결론은 곡식 작물의 경작과 초기 국가의 탄생 사이에는 중요하고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이다. 곡식이 인류의 유일한 주식이었던 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형성을 장려한 유일한 존재였다. 그는 “역사는 카사바 국가와 사고, 얌, 토란, 플랜틴 바나나, 빵나무 열매 또는 고구마 국가를 기록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곡식의 무엇이 특별했을까? 연말정산서를 작성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작물과달리 곡식은 과세하기 쉬웠다. 어떤 작물(감자, 고구마, 카사바)은 땅속에 달려서 세금징수원에게서 숨길 수 있으며, 발견되더라도 하나하나 캐서 보아야 한다. 다른 작물(특히 콩과)은 서로 다른 시기에 익거나, 덜 익은 것이 익기까지 고정된 궤적을 따르기보다는 성장기를 살펴서 수확량을 산출해야 한다. 즉, 세금징수원이 한 번 와서는 안 되며 적당한 세금을 받기 어렵다는 뜻이다. 스콧의 말에 의하면, 오직 곡식만이 “볼 수 있고, 나눌 수 있고, 과세할 수 있고, 저장할 수 있으며, 운반할 수 있고, ‘배급할 수 있다.’ ” 다른 작물이 이런 장점의 일부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곡식만이 그 전부를 가지고 있기에 곡식이 “주요한 식용 전분이자, 현물 과세의 단위이며, 지배권을 지닌 농경 달력의 기초”가 되었다. 세금징수원이 와서 농지를 평가하고 과세의 수준을 정한 뒤, 다음에 돌아와 제대로 수확량이 나왔는지 확인했다.

스콧 씨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이 농산물에 과세를 하고 잉여를 추출하는 능력으로서 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계급제와 분업, 전문직(군인, 사제, 하인, 관료 등) 및 그들을 통할하는 엘리트를 지닌 복잡한 사회를 만들었다. 새로운 국가는 곡식 작물에 관개를 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노예제를 포함한 강제노동의 형태를 요구했다. 노예를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을 그들을 사로잡는 것이었기에, 국가는 전쟁을 벌이는 새로운 경향을 나타냈다. 메소포타미아의 최초 국가들에서 보이는 인류 역사의 가장 초기의 이미지 중 일부는 목에 쇠고랑을 차고 행진하는 노예들이다. 여기에 초기의 정착 공동체에 빈번했던 전염병과 일반적으로 좋지 않은 건강 상태를 더하면, 왜 신석기 혁명이 그 당시 살아오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재앙이었다는 최근의 합의가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전쟁, 노예제, 엘리트에 의한 통치—모두가 또 다른 새로운 통제술인 글쓰기를 통해 더 쉬워졌다. 스콧 씨는 “수치 기록을 관리하는 체계적인 기술 없이는 초기 국가를 상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글쓰기와 관련되었다고 하는 모든 좋은 것들 —그걸 문화와 오락과 소통과 집단의 기억을 위해 사용하는— 은 현재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그것이 발명된 지 반세기 동안, 글쓰기는 전적으로 부기에 사용되었다.  “사회와 그 인적자원 및 생산물을 통치자와 신전 관리인들이 판독하기 쉽게 만들고, 그로부터 곡식과 노동력을 끌어내기 위한 표기 체계를 만들고자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스콧 씨는 초기의 점토판은 “목록과 목록, 그리고 또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빈도 순으로 기록의 주제를 보면 “보리(배급과 세금으로), 전쟁 포로, 남성과 여성 노예”였다고 한다.  나치가 지배하는 유럽을 탈출하고자 자살한 독일의 위대한 유대인 문화평론가 Walter Benjamin 씨는 “문명의 기록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말을 남겼다. 인류가 만든 복잡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에는 충분히 오래 바라보면 억압의 역사라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는 뜻이다. 명백한 역사적 사실의 문제로서, 그것은 옳은 듯하다. 글쓰기의 발명부터 여러분의 독서모임까지 오래되고 충격적인 여행이었다.  

고대의 “암흑시대”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스콧 씨의 질문은 날카롭다. “누구에게, 어떤 점에서 ‘암흑’이었는가?” 역사의 기록에서는 초기 도시와 국가가 갑자기 파열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스콧 씨는 “국가 이전의 약 5천 년에 걸친 산발적인 정착문화권에서(일본과 우크라이나의 농경 이전 정착문화권까지 포함시킨다면 7천 년), 고고학자들은 정착했다가 버려지고 다시 정착했다가 또 버려진 수백 곳의 위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을 보통 “붕괴”라 일컫지만,  스콧 씨는 그 용어를 면밀히 검토하자고 요구한다. 국가가 붕괴하면 멋진 건축물은 건설이 중단되고, 엘리트가 더 이상 운영하지 않고, 쓰여진 기록은 보관되지 않으며,  대중은 다른 곳에서 살기 위해 이동한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활수준이란 측면에서 붕괴일까? 인간이란 존재는 스콧 씨가 계산한 바에 의하면 약 1600년 무렵까지 주로 국가의 범위를 벗어나 살았다.  인류 정치 생활의 0.2%라 표시되는 그때까지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은 국가의 특징인 세금징수원을 만난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정착문화 외부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인류 역사를 전반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토마스 홉스가 말했듯이 만약 그 삶이 “괴롭고 잔인하며 짧다”면, 이는 우리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작성하는 데 중요한 정보의 조각이다.  본질적으로 인류의 역사는 진보를 향한 이야기라 될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그 시기에 가장 비참했으며, 우리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모든 것이 나아졌을 것이다. 만약 그 시기에 우리 대부분이 가장 비참하지 않았다면, 문명의 도래는 더욱 모호한 사건이 된다. 회계원부의 한 세로행에서, 우리는 현대 과학과 의학의 영광 및 축적된 예술의 경이로움을 허용하는 복잡한 물질문화의 발전을 가져왔을 것이다. 또 다른 세로행에서는 전염병과 전쟁, 노예제, 사회의 계급화 및 무자비하게 전용하는 엘리트에 의한 지배와 사이몬 코웰(Simon Cowell) 같은 좋지 않은 것들을 가져왔을 것이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살았던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전통적인 수렵채집의 방식이 여전히 살아 있는 장소의 하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단편적인 모습만 보지 않고 살아 있는 경험을 얻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지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으로는  수렵채집인과 매우 유사하지만 다르게 살았던 사람들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과학적인  “통제”를 통하여 환경의 지역적 우연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인류학자 James Suzman 씨가 정확히 그 일을 행했다. 그는 20년 넘게 아프리카 서남부의 칼라하리에 사는 부시맨들을 방문하여 그들 사이에서 살아가며 연구를 수행했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저서 “풍요로움 없는 풍부함(Affluence Without Abundance): 부시맨의 사라지고 있는 세계(The Disappearing World of the Bushmen)”에서 자세히 서술한 이야기이다.

부시맨은 오랫동안 인류학자와 과학자 들의 관심대상이었다. 약 15만 년 전, 최초의 해부학적 현대 인류가 출현한 지 5만 년 뒤호모 사피엔스의 한 무리가 아프리카 남부에 살고 있었다. 부시맨, 또는 코이산은 아직도 거기에 있다. 인간의 가계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the oldest growth on the human family tree. (Suzman 씨는 한때 경멸적으로 사용된 “부시맨”이란 단어는 현재 그들 스스로와 비영리단체에 의해 사용되며, 낭만적인 뜻으로 긍정적 측면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론 일부의 코이산은 “산San”이란 단어를 쓰는 걸 선호한다고 지적한다.) 유전적 증거에 의하면, 15만 년의 대부분 동안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현대 인류의 가장 큰 개체군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구개음의 혀를 차는 소리를 이용한다. 부드럽게 공기를 흡입하면서 앞니의 뒤쪽에 혀를 대고, 입천장에 혀를 밀면서 찬 다음 갑자기 아래쪽으로 보내는 식이다.  이는 혀를 차는 소리의 언어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언어 능력이라는 놀라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Suzman 씨가 처음 부시맨을 방문한 건 1992년이다. 2년 동안 박사 과정의 연구로 그들과 함께 지냈다. 그가 가장 잘 아는 무리는 나미비아와 보츠와나 사이의 국경지대에 거주하며 8천에서 1만 명이 살고 있는  Ju/’hoansi이다.  (표음 기호 /’은 tsk를 나타냄)  Ju/’hoansi는 아프리카 남부에 사는 전체 부시맨 인구의 약 10%를 차지한다.  그들은 전통적인 토지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여 여전히 수렵채집을 실천할 능력이 있는 북부의 무리와 자신들의 땅을 빼앗겨 현대의 생활방식으로 재정착한 남부의 무리로 나뉜다. 

주목할 만한 범위에서, Suzman 씨의 부시맨 연구는 “정상이 아니다(Against the Grain)”의 생각을 지지한다.  근대성과 만난 부시맨들은 비참해졌다. Suzman 씨는 비참한 재정착 야영지에서 쫓겨나고 소외를 당하고 고통을 받는 Ju/’hoansi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책에서는 글쓰기라 불리는 사악한 새로운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하고 있다. Suzman 씨의 부시맨 멘토인  !A/ae 씨는 “어떤 새로운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마다 자신의 이름이 농장의 Ju/’hoansi  사이에서 수십 년에 걸쳐 위대하고 신비한 힘을 지녔다고 추정되는 고용 원부와 문서에 기입되었다고 언급했다. 이 원부가 지닌 비밀은 급여를 주거나 보류하고, 배급량을 지급하며, 어떤 특정 농장에 머물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결정할 권한을 지녔다.

수렵채집이 좋은 생활방식임이 밝혀졌다. 1966년의 연구에 의하면, Ju/’hoansi가 충분한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 일주일에 평균 17시간만 소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19시간은 가정의 활동과 잡일을 하며 보냈다. 수렵채집인의 평균 칼로리 섭취량은 하루에 2300으로, 권장량에 가깝다. 이 수치가 처음 확립된 당시, 미국에서는 일주일에 40시간의 노동과 36시간의 가사노동에 종사했다.  Ju/’hoansi 는 잉여를 축적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한 먹을거리를 모두 취하면 그만둔다. 그들은  그들의 환경이 자신들의 필요를 제공할 것이란, Suzman 씨가 “단호한 신뢰라 부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렵채집을 하는 Ju/’hoansi가 먹을거리 공급의 그물망으로 활용하는 것은 스콧 씨가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다양한 동물성 단백질과 함께 복잡한 먹을거리를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거기에는  계절별 주기와 생태학적 적소, 기상 변화에 대한 반응이 서로 다른 호저, 쿠두, 영양, 코끼리 및 125종의 식용 식물이 포함된다. 수렵채집인은 먹을거리의 지식에 관한 기록되지 않은 달력뿐만 아니라, 스콧 씨가 “달력의 도서관”이라 부르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가 제안하듯이,수렵과 채집과 길들여진 농업 사이의 복잡성 감소는 길들여진 농업과 생산라인의 판에 박힌 조립 작업 사이의 감소만큼 크다. 

여기의 뉴스는 우리 선조들의 생활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가 너무 무섭고, 우리의 현대적이고 문명화된 생활이 상대적으로 훨씬 위대하다고 믿음으로써 우쭐대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고 있으며, 수렵채집을 하던 조상에 관하여 해명하는 지식이 우리에게 유용한지 궁금해 할 수 있다. Suzman 씨도 똑같은 걸 궁금해 한다. 그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유명한 1930년의 에세이 “우리 후대의 경제적 가능성(The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에 대해 논의한다. 케인스는 세계가 계속해서 더욱 부유해지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높은 생활수준을 즐기면서 노동은더 적게 할 것이라 추측했다. 그는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도록“경제 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생존을 위한 투쟁”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부의 축적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을 때, 도덕률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200년 동안 우리를 괴롭힌 많은 사이비 도덕률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가장 높은 미덕의 지위에 인간의 특성 가운데 가장 싫은 어떤 것을 높이게 된다. 우리는 그것의 진정한 가치로 화폐의 동기를 감히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물로 돈을 사랑하는 것 -생활의 즐거움과 현실에 대한 수단으로 돈을 사랑하는 것과 구별되는- 은 반쯤은 범죄이며 반쯤은 병에 걸린 다소 구역질나는 병적 상태라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세계는 실제로 더 부유해졌지만, 도덕과 가치관에서 그러한 변화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것의 획득을 둘러싼 돈과 가치의 체계는 완전히 손상되지 않았다. 탐욕이 여전히 정당하다. 

그날을 위해 살며 잉여를 축적하지 않는 수렵채집인에 대한 연구는 케인스의 제안처럼, 인간성이 더 많이 또는 더 조금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하지 않기로 결정할 뿐이다. Suzman 씨는 잃어버린, 또는 그만둔 능력에 대한 열쇠는 수렵채집인의 맹렬한 평등주의에 있다고 제시한다. 예를 들어 사냥꾼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고기와 함께 돌아오는 것이다. 수익이“공유에 대한 엄격한 협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채집된 식물과는 달리 사냥한 고기는 의례에 따라 매우 신중하게 분배되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무례하게 굴면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의식을“고기를 모욕하기”라 부르며, 사냥꾼이 거만하게 굴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한 부시맨이 인류학자 Richard B. Lee 씨에게“젋은이가 고기를 많이 죽이면, 그는 자신을 우두머리나 큰 사람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는 자기의 하인이나 열등한 사람으로 여긴다. . . . 우린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모욕은 “그의 마음을 식히고 그를 부드럽게 만들기”위해 설계되었다.  Suzman 씨는 이러한 수렵채집인에 대하여“이익이 되는 교환과 계급제, 뚜렷한 물질적 불평등이 용인되지 않는 그곳은 치열한 평등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개인의 이기심과 경계심의 총합”이라고 적는다. 


Suzman 씨는 이러한 평등주의에 대한 충동이 부유함과 과잉과 경쟁적인 획득은 없지만 자신의 조건에 맞게 풍족한 삶을 사는 수렵채집인의 능력 가운데 핵심이라고 제시한다. 비밀 재료는 부러워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충동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말하듯이, “만약 이런 종류의 평등주의가 노동의 세계 이후를 포용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면, 나는 그것이 깨지기 매우 어려운 너트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일족에게서 배울 점이 많지만, 우리가 그 지식을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부러움을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활용하면 불만큼 유용한 기술이 될 것이다.♦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7/09/18/the-case-against-civilization/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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