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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 유전자원센터에 방문했다가 한국에서 발굴된 각종 탄화 종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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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다음 논문을 참조...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98-019-41293-z



북유럽 연구 지역의 설정과 현장 위치.




고고학적 발견.





연대기 및 방사성 탄소 연대 추정한 보리 곡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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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의 고고학> http://www.yes24.com/Product/Goods/9181378


한국에서 농경 문화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딱 여기까지 와 있다. 

농업도, 고고학도 잘 팔리지 않는데 둘을 모아 놓았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나중에 누가 좀 더 집대성해서 잘 정리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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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de van Andel 씨가 수리남의 Paramaribo에 있는 시장에서 도정하지 않은 쌀 한 봉지를 구매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노예제의 가거를 새롭게 검토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현재 네덜란드 Leiden에 있는 Naturalis Biodiversity Center의 민족학자는 2006년 수리남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약용 및 제례용 식물을 조사했다. 그녀는 쌀을 포함한 약초와 제례용 식물을 판매하는 수백 명의 마룬Maroon 여성들로 붐비는 수도의 시장을 발견했다.

수리남의 마룬은 그 국가의 내륙에 있는 열대우림을 피난처로 정하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도주 노예들의 후손이다. 이질적인 경관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초기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마룬들은 살아남아 그 문화를 지속해 올 수 있었다. 오늘날 20만 이상의 마룬들이 있고, 대부분은 수리남과 프랑스령 기아나에 살고 있으며 네덜란드에도 적은 수가 있다.  

역사가들은 350년이란 대서양 횡단 무역 기간 동안 12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이 강제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야 했다고 추정한다. 이 항해에서 살아남은 1070만 명 가운데 약 30만 명의 노예들이 1668년부터 1823년 사이에 라틴아메리카 북동부에 있는 수리남의 네덜란드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급증하는 커피와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강제로 노동해야 했다.  

수리남에서 van Andel 씨는 노예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론 -쌀을 포함하여- 이 논의되고 있는 걸 알지 못했다. 아프리카인 노예가 북미의 수익성 좋은 쌀 플랜테이션을 도왔던 벼와 농사법을 가져왔는가? 기존 이론의 대부분은 노예는 주인이 시킨 일을 수행한 무지한 노동자일 뿐이라고 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벼 해안"에 있는 국가에서 잡혀온 노예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작물에 대한 지식을 가져왔다. Wageningen University


그 논쟁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번서아는 벼 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아프리카인 노예의 사례를 제시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벼 역사학자이지 지리학 교수인 Judith Carney 씨가 2002년 저술한 책 Black Rice에 의해 촉발되었다. 벼는 식민지 시대 초기의 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작물의 하나였으며, 최대 25%의 수익을 올렸다. 아프리카의 쌀은 짙은색의 겉껍질이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3개월의 항해 동안 배에 가득 실린 노예들을 먹이기 위해 사용된 단단한 곡물로 제공되었다. 다수확의 아시아의 벼가 결국 플랜테이션을 장악하였지만, 아프리카의 쌀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도 안정적으로 재배되었다.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은 신세계에서 탄탄히 뿌리내리기 위해 필요한 경작술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들이 오랫동안 활용하던 전통적 벼 농사법을 문서화하며 서아프리카에서 시간을 보낸 Carney 씨는 신세계에서 벼농사의 과정을 분석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노예들이 파종, 도정, 요리하던 방법만이 아니라 벼를 경작한 미소환경을 아프리카 여성들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그녀는 노예 소유주들의희소하고 편향된 역사적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서 신세계와 구세계 사이의 흥미로운 유사점을 공들여 짜맞추었다."미국 혁명까지 노예들은 아프리카의 농촌 지역처럼 절구와 절구공이로 도정을 했다."고 그녀는 지적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 내려온 전설에서는, 배를 타기 전에 여성들이 머리카락 속에 아직 도정하지 않아 씨앗으로 쓸 수 있던 볍씨를 어떻게 숨겼는지 알려준다. 그녀의 연구는 "아프리카 대리인(African agency)"이라는 개념 -노예들이 적어도 그들의 행동에 대한 언어 구사력을 가졌다는 개념- 을 뒷받침했다. 

Carney 씨의 조사는 최초로 노예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농업의 성공을 위해 더 많은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주장한 듀크 대학의 노예사학자 Peter Wood 씨의 연구에 기초한다. "1974년에 그것은 진보적 개념이었고, 수십 년 동안 열띤 반응이 나타났다."고 Carney 씨는 이야기한다.

Carney 씨 역시 학술적 비판에 시달렸다.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없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노예 소유주는 아무도 자신의 노예가 벼를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그녀는 덧붙인다.

그러다 van Andel 씨의 연구에 관한 말이 나왔다. 2006년 그녀의 수리남 여행에 관한 강연을 한 이후에 van Andel 씨는 Black Rice를 읽은 대학원생 청중에게 그곳에서 벼를 수집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녀가 잠시 생각해 보니, 사실 어딘가에서 제례용 쌀 봉지를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여기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는 그 샘플이 아프리카의 쌀이라고 결정되었을 때 나중에 외쳤다. 명백한 증거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추적이 가능한 총알이었다. 


마론으로 알려진 도주 노예들은 수리남의 열대우림에 숨어서 독립을 유지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공동체와 문화를 확립했다. Tinde van Andel


van Andel 씨를 비롯한 학자들은 북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친숙한 흰쌀인 아시아의 벼가 미국의 플랜테이션에서 재배되고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널리 믿었다.  Van Andel 씨는 아프리카의 벼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식물 자체가 수리남에서 재배되었으며 쌀이 수입되지 않았다는 걸 문서화해야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그녀는 수리남의 약용식물에 대한 현지조사를 끝마쳤다. 

운이 좋았는지, 그녀는 2008년 Paramaribo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표본을 찾기 위해 하루 만에 그녀는 약용식물 목록을 조사한 마을인 Mundje Kreek에 사는 친구 Berto Poeketie 씨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지역에서 검은쌀을 재배한다고 알려진 여성인 Emelina Koese 씨와 연결해 주었다. Koese 씨는 —그 지방에서 가장 널리 믿는 Winti 같은 종교를 지닌 여러 마을 주민들처럼— 외부인을 의심했고, 따라서 그녀의 지식을 낯선 이와공유하길 주저했다. 숲에서 오랫동안 산책하면서 Koese 씨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농지로 가는 길에“나무에 걸어 놓고 도난 방지용으로 쓰이는 약초, 뼈, 천조각 같은 것들이 있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논 밖에서 큰삼각머리독사와 맞닥뜨리면 백인은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는 신호라고 Koese 씨는 해석했다. 결국 van Andel 씨는 식물체 하나와 사진 한 장만 원하며 댓가를 지불하겠다고 하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곳은 내가 모든 중요한 제례용 식물이 뿌리째 뽑혔다고 생각했던 똑같은 마을의 바깥에 있었다."고 van Andel 씨는 회상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 쌀의 활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량의 아프리카 쌀이 조상에게 제물로 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이 '마법' 식물과 어떻게 작용하는지. 당신이 특별하게 하나에 관해 묻는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을 기꺼이 나누고 싶어한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그들이 당신도 무언가 알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면 당신과 대화하는 걸 가치 있다고 결정한다." 

van Andel 씨가 수리남에서 현재 아프리카 벼를 재배한다는 걸 확인했을 때, 아프리카의 벼가 노예 무역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고 그와 관련된 쌀 농사법이 아프리카인에 의해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 Carney 씨의 이론이 지지를 받았다고 2010년 그 발견에 대해 발표한 Economic Botany의 편집장 Robert Voeks 씨는말한다. 

그러나 그 발견은 시작에 불과했다. 벼가 어떻게 수리남에 이르렀는지 탐험하고자 했던 van Andel 씨는 언어학과 벼 유전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노예들의 이동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창이 열렸다.

van Andel 씨가 수리남에 있으면서 떨칠 수 없던 한 가지 질문이 있었다. 왜 마룬들은 인근의 토착민들과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식물을 이용했을까? 그녀는 다른 이름과 응용법 및 준비는 아프리카의 유산과 혼합되었을 가능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추측했다. 2010-2012년, 그녀는 가나와 베냉, 가봉을 방문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았다. 수백 만 명의 노예가 강제 이주된 350년 동안 식물학적 이해에는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무엇을 잊었으며, 무엇을 기억했고, 어떤 적응이 필요했는가?


Tinde van Ande 씨의 수리남의 벼에 대한 연구는 그녀를 서아프리카의 해안으로 데리고 갔고, 수리남에서 아직도 사용되는 식물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들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Christiaan van der Hoeven


서아프리카의 국가들을 다니면서 van Andel 씨는 수리남의 식물 이름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수리남의 수많은 식물명은 아프리카에 기반하고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전체적으로 그녀는 수리남의 식물명 2350개를 서아프리카의 그것과 비교했다. 마룬의 토착어 가운데 40% 이상이 소리, 구조, 의미에서 아프리카의 식물명과 닮았다. Van Andel 씨는 "아프리카인의 눈을 통해" 식물군을 보았다고 한다. 학술 문헌을 활용해 그녀는 다른 나라의 식물명과도 비교했다. 가장 이목을 끄는 유사함은 네덜란드가 노예를 구매한 주요 지역인 가봉과 앙골라의 식물명에서 발견되었다. 2014년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발표된 그녀의 논문은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 식물군의 상당 부분을 인지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노예가 신세계에 왔고 아무 역사가 없으며 텅빈 석판이었다는 건 구식의 사고방식이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van Andel 씨는 말한다. 당신이 기억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다면, 그것이 당신의 정체성이 된다. 열대의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매우 다르지만, 식물 군집에는 겹치는 부분이 조금 있다. "열대우림의 종에 대한 아프리카인의 지식이 마룬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van Andel 씨는 말한다. Voeks 씨도 동의한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을 가져와서 남아 있는 종이나 속과 유사한 것들을 이에 겹치게 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들은 생태학적 변화의 중요한 대리인이었다."

Van Andel 씨는 마룬의 벼가 유전자만 얻을 수 있다면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걸 추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2015년 남아프리카 Western Cape에서 열린 회이에서 van Andel 씨는 뉴욕대학의 박사후 연구원 Rachel Meyer 씨를 만나 마룬과 아프리카의 토종 벼의 게놈의 염기서열이 일치하는지 함께 확인하기로 약속했다. 2016년 10월,  Carney 씨를 포함한 연구진은 마룬 벼의 기원이 기니아 고원의 국가들, 특히 코트디부아르 서부에 있다고 제시하는 연구결과를  Nature Plants에 발표했다. 네덜란드는 가나와 베냉, 중앙 아프리카에서 노예의 대부분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노예선의 기록에 의하면,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식료품을 확보했다고 나온다.

"우리의 연구는 인구 이동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해 식물의 염기서열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그녀는말한다.

마룬 벼의 기원에 대한 발견은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분야 -역사학에 빛을 비추기 위해 식물을 활용- 의 흥미로운 사례이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생물분자 고고학자 Terry Brown 씨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예의 작물의 기원을 정확히 찾아내고자 유전학이 사용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인간 이주에 대한 대용물로 식물이 사용된 건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마룬이 재배하는 수리남의 여러 벼 품종은 서아프리카에 유전적 뿌리를 두고 있다. Tinde van Andel


인간의 이주를 추적하고자 식물의 유전학을 활용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식물의 재생산은 인간의 그것보다 덜 복잡하며, 경작의 흔적은 인간에게 식물의 가치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인간은 '토요일 밤의 효과'가 있다. 수컷은 짧은 거리를 가서 이주하지 않고도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그러나 식물은 땅에 붙어 있어 식물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가 어떻게 확산되는지 보여준다. 

노예가 경작한 신세계의 벼와 아프리카에 있는 그 기원 사이의 연결고리를 밝히는 일 외에도, 새로운 유전적 기술들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서 농업의 기원이 갑자기 발명도었다는 개념을 뒤집었다. "우리는 이제 농업의 기원이 초기의 수렵채집민이 야생 식물을 더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다루기 시작하면서 농업이 확립되기까지 8000-9000년이 걸린 오래 계속된 과정이라고 믿는다."고  Brown 씨는 말한다. 그와 다른 사람들은 작물화된 보리와 밀의 게놈을 이용하여 그것이 단일한 근원의 개체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 지방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교잡된 것임을 증명한다. 

van Andel 씨에게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노예제의 이야기가 더 많이 있다. 그녀는 오크라부터 얌과 바나나에 이르기까지 더 노력하여 다른 작물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수리남의 마룬들은) 자신의 조상에 대하여 정말로 알고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더 많이 물어봐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그녀는 마룬이 자신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일을 돕길 희망한다. 

이를 위하여 van Andel 씨는 최근 프랑스 국립 자연사박물관의 민족식물학자 Marie Fleury 씨와 함께 수리남 동부에 이웃한 프랑스령 기아나의 마룬 공동체를 탐사하기 위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과학 및 탐사 프로그램 기금을 지원받았다. 이 연구진은 올해 여름 벼가 익었을 때 현지조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마룬의 문화는 그녀가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수리남 마룬의 작은 집단이 네덜란드에서 그녀 근처에 살고 있다. 사실, 제례에 사용된 신성한 식물은 두 나라 사이에서 활발히 교역되었다. 예를 들어 Winti가 1971년까지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관습이 살아 있는 건 놀라운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수리남의 마룬들은 차별을 당했고, 때로는 숲에 살고 있는 퇴보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그녀의 노력이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밝혀준다면, 마룬은 식물에 대해 세대를 뛰어넘는 특별한 지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더구나 이들 간과된 작물 품종은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마룬의 경우, 벼 재배는 전통 종교 뿐만 아니라 역사도 살아 있어 사람들이 역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노예 국가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https://www.sapiens.org/culture/african-rice-new-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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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북서부의 Mantai라는 항구도시에서 600-800년 무렵의 것으로 추산되는 포도 씨앗이 발굴되었단다.


이는 당시 유명한 무역항이었던 이곳에서 로마의 상인이 가져왔을지 모를 포도가 재배되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고.


너무나 흥미롭지 않은가.


https://www.sciencemag.org/news/2018/12/ancient-grape-seeds-may-link-sri-lankan-trading-port-roman-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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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궁금하던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기사.

만일 내가 뿌린 씨를 내가 거둘 수 없다면…


[토요판] 최정규의 우울하지 않은 과학
(4) 기술이냐 제도냐

고구마의 도입으로 오랫동안 유지되던 평등주의적 질서가 깨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뉴기니 고산지대 엥가 부족의 사례는 기술이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동력이라는 낯익은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라 할 만하다. 사진은 엥가 부족 모습. 위키피디아

농경의 시작은 인류의 역사에서 혁명적인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어떤 이들은 초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농업이 결국에는 잉여를 가져다주었고 인구를 증가시켰으며, 거대 국가와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은 농업의 시작이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로의 문을 연 계기였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농업은 누구의 눈에는 인류의 번영을 위한 축복의 계기였고, 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저주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농업을 바라보는 시각은 서로 달라도, 농경의 시작이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혁명적 사건 중 하나라는 점에는 아마도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인류는 왜, 어떻게 농부가 되었을까?

농업은 지금으로부터 약 1만1000년 전에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지구상의 마지막 빙하기가 막 물러갔을 때이다. 농업의 최초 흔적은 현재 중동 지방(시리아·레바논·요르단·이스라엘 지역)과 터키 남부 지역에서 발견됐다. 이 지역은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만으로 이어지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주변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지중해 동부 요르단 강 유역을 아우르는데, 그 모양이 초승달을 닮았다 해서 “비옥한 초승달”이라고 불린다. 이곳에서 밀과 보리를 경작하는 농부들이 출현했다.


마르크스, “기계방아가 자본주의 낳았다”

농경의 등장 전후로 큰 변화들이 있었다. 우선 이 시기는 인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정착해 살기 시작한 거주형태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사적 소유권이 자리잡게 된 시점도 농업의 등장 시점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래서 농업과 정착, 그리고 사적 소유 이 세 가지는 하나의 묶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시점에 따라 혹은 장소에 따라 이 선후 관계가 달리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큰 틀에서 보면 이 셋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인류 사회의 불평등의 씨앗도 이 세 가지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데 많은 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농업이 생산성을 증대시켰다고 보면 모든 게 간단히 설명된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자. 인류가 농업이라는 생산 방법을 채택하게 됨에 따라 인류의 생산력은 증대했고, 비로소 인류는 이른바 ‘잉여’를 갖게 되었다. 겨우 먹고사는 데 그쳤던 이전과 달리 잉여가 발생했고 사적 소유라는 게 생겼고 이로부터 일 안 하고 남이 일한 것을 착취해서 살아가는 지배계층이 등장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생산기술이 나타나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그에 따라 새로운 경제적 (지배)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는 가설하에서 만들어진 시나리오이다. 기술이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주된 동력이라는 관념은 매우 익숙한 관념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손방아(맷돌)가 지주와 농노로 이루어진 봉건제를 낳았고, 기계방아가 자본가와 노동자로 이루어진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말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서도 이러한 관념에 잘 들어맞는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심스 올리버는 미국 중부지역 평원에 살던 인디언 부족에 말이 도입되면서 평등했던 관계가 위계적인 관계로 변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그에 따르면 말의 도입은 버팔로 사냥을 수월하게 만들었고, 버팔로의 이동 경로를 따라 부족도 함께 이동하는 거주 패턴을 가능하게 했다. 말이 도입되면서 정착해 생활하던 부족들에 비해 거주지를 옮겨다니며 사냥을 주업으로 삼았던 부족들이 더 강성해졌다. 다른 부족을 습격해서 말을 획득하는 능력이야말로 용맹함의 척도이고 지도력의 척도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말은 부의 축적 수단으로 등장했고, 말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부와 권력이 결정됐다.

또 다른 예로 폴리 위즈너는 뉴기니 고산지대 엥가 부족을 연구하면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평등주의적 질서가 고구마의 도입으로 인해 균열이 생기면서 불평등하게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 바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고구마 경작이 가져온 높은 생산성이 사회적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간명해 보이는 이 가설은 몇몇 사례에서는 잘 들어맞을지 몰라도, 적어도 농경의 출발을 설명하기에는 힘든 것 같다. 인류는 농부가 되기 훨씬 전부터 야생 상태에서 곡물이 어떻게 자라는지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다만 본격적으로 농부가 되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고 있었을 뿐. 농부로의 전환을 꺼렸던 이유는 농업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그 대체 방식으로서의 수렵 및 채취에 비해 생산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고인류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초기 농업은 수렵·채취 방식에 비해 훨씬 더 고된 작업이었는데도, 같은 시간을 일했을 때 얻어지는 칼로리의 양은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사냥을 하고 열매를 따 먹던 시절에 비하면, 허리 부러지도록 일하고 얻는 영양소도 다양하지 못했다.

페르시아만에서 요르단강 유역에 이르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 이외에도 농경이 독자적으로 등장한 곳은 꽤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서도 ‘자발적으로’ 농업으로 전환한 사례가 거의 없음을 보여주는 연구가 잇따르고 있다. 사진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농사 현장 모습. 위키피디아


‘제도의 실패’를 보여주는 바텍 사례

카를레스 보익스와 프랜시스 로젠블루스는 고고학자들의 유골 분석 결과를 요약하면서, 초기 농부들의 신장이 수렵·채취를 기반으로 살았던 이들에 비해 작았음을, 그리고 영양상태가 안 좋았음을 드러내주는 흔적들을 보았다. 빈혈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는, 뼈에 나타난 병변현상이나 골 질량 손실의 증거들, 그리고 치아를 둘러싸고 있는 에나멜의 부족 등이 그 증거였다. 샌타페이연구소의 새뮤얼 볼스는 현존하는 수렵·채취 부족들과 손도구를 이용해 농업을 하고 있는(그래서 초기 농부들과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농부들의 노동생산성을 계산해 보았다. 한 시간의 노동으로 얻어낼 수 있는 열량으로 비교해본 결과, 이들 농부들의 생산성은 수렵·채취 부족민들의 생산성의 63%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초기 농업의 경우, 노동생산성에서는 수렵·채취에 비해 떨어졌더라도 토지를 집약적으로 사용했을 터이니 토지 단위 면적당 생산성은 더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풍부했던 토지를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기술(수렵·채취)을 포기하고 토지 절약적인 기술(농업)을 채택한 것은 적어도 경제학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증거들을 토대로, 잭 할런은 1992년 저서 <작물과 인간>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농업을 도입했을까? 주당 20시간만 사냥하면 나머지 시간을 즐길 수 있는데도, 굳이 태양볕 아래서 고생해야 했던 이유가 뭘까? 영양소도 풍부하지 못하고 또 공급도 안정적이지 않았던 작물들을 얻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농업이 도입된 이래 기아, 질병, 전염병이 등장했고, 밀집된 공간에 사느라 생활환경도 극히 안 좋아졌을 텐데도?”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아담에게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는 벌을 내리면서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농사란 그만큼 고된 일이었을 거란 증거다.

지금까지 발견된 바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농경이 독자적으로 등장했던 곳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 외에도 중국, 멕시코, 북부 페루, 고지대 뉴기니, 서부 아프리카 사헬 지역, 북미 동부 등 7개 지역 정도이다. 그 외 지역의 농경은 다른 곳으로부터의 정복이나 교류 혹은 농부들의 이주의 결과라는 말이다. 유사한 기후조건과 토양조건을 가졌더라도, 야생 작물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혹은 화전 농법을 사용하면서 농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졌더라도, 실제로 ‘자발적으로’ 농부로 전환한 부족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1770년 오스트레일리아 북단 케이프 요크에 도착했던 제임스 쿡 선장은 그 지역이 토레스 해협 건너 뉴기니와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도, 뉴기니에서와 달리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북단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 의아해했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농경은 높은 생산성 때문에 자연스레 시작된 것은 아니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는 쪽으로 견해가 모아지는 듯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끔 만들어 준 (선행)요인으로서 환경과 인구가 아니라, 규범과 제도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농경이란 기술적 지식만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이미 지식은 충분했다) 제도적 조건이 갖춰질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오래전 인류학자인 커크 엔디컷은 말레이시아 수렵·채취 부족인 바텍 원주민들 사이에서 벌어진 해프닝을 보고한 적이 있다. 이야기인즉슨, 바텍 주민 두 사람이 농사짓는 법을 전수받아 볍씨를 뿌리고 농사를 시작했는데, 추수가 가까워질 즈음 다른 마을 주민들이 와서 맘대로 곡식을 추수해 가더라는 것이다. 벼농사를 지어보겠다던 이 두 사람은 몇 년 거푸 동일한 일이 생기자 결국 농사짓기를 포기하고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이는 농경의 도입 실패는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제도의 실패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바텍 원주민들은 자연자원은 누구도 소유하지 못하며, 가족의 필요를 넘어서는 잉여는 다른 이와 나눈다는 규범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 주민들은 두 사람의 벼도 마찬가지로 간주했던 것이다.

농사란 추수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그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농사란 당시 기술로는 손을 엄청 필요로 했기에 일년 내내 노력을 기울여도 좋은 결과가 나올지 확실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심한 불확실성은 제도적 요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땀 흘려 만들어낸 생산물이 내게 돌아오리라는 보장이 없으면 1년 내내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요컨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려면 바로 그런 점에서 확실한 보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농사가 제대로 될지 불확실성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최소한 내가 뿌린 씨는 내가 거둘 수 있다는.


사적 소유가 농경에 선행했다

터키 서부지역에서 클라우스 슈미트가 발굴한 유적지인 괴베클리 테페와, 현재의 시리아 부근에서 앤드루 무어가 발굴한 아부 후레이라 유적지는 인류가 농부가 되는 이른바 ‘제도적’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둘은 농경이 시작되기 전부터 오랫동안 정착촌을 이루고 있었던 증거와 함께, 집집마다 야생 곡물을 보관할 식량창고를 갖는 등 상당한 정도의 사적 소유가 갖춰졌음을 보여주는 유적들이다. 경제학자인 대런 아제모을루는 그의 책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괴베클리 테페에서 발견된 초기 의식용 건물을 보면서 이 지역에서는 농경이 도입되기 이전부터 불평등이 상당히 진전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불평등하에서 엘리트층이 착취를 손쉽게 하기 위해 저장이 가능한 곡물 생산으로의 이전을 강제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 두 곳에서 발견되는 사적 소유의 흔적들이 얼마나 불평등의 심화를 말해주고 있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논란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농경사회로의 전환 이전에 이미 이를 위한 제도적 여건으로서의 사적 소유가 꽤 진전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새뮤얼 볼스와 필자는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수리 모형을 짠 후 이를 기초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농업과 사적 소유의 진화를 재현해본 적이 있다. 우리의 시뮬레이션 결과는 다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1) 농업의 발생이 1000번 시행에 31번 일어날 정도로 쉽지 않았던 사건이었고, (2) 그 31번의 이행은 모두 사적 소유권과 함께 진화했으며, (3) 사적 소유가 농경에 선행해 농업생산을 이끌더라는 것. 말하자면, 아부 후레이라에서 나타났음직한 모습이었다. 농경의 시작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여러 사회적 변화는 생산기술과 사회적 제도와 관련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식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기술과 제도의 상호작용을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취 사회에서 주로 발견되는 평등적 관계와 공유의 규범이 어떻게 유지되었고, 어떻게 해체되면서 위계와 사적 소유와 불평등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기술은 그대로인데, 규범 등의 제도가 변하고 새로운 제도가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의 길을 열 가능성들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제도의 변화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때, 인류가 농부가 되는 과정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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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된 고대의 곡물을 분석하니, 그 곡물들이 부족한 양분으로 재배했다는 결과가 나옴. 그를 통해 그 당시 사회가 농업의 집약화가 아니라 농경지의 확대를 통해 도시의 밀집화를 해결했다는 그림을 그리는 논문. 하지만 곡물을 재배하는 환경의 변화나 광대한 토지를 이용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면 더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예전에 경제학 강의에서 세종의 대단함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고 평가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세종은 성장하는 인구의 더 많은 식량 수요를 외연 확대 -영토의 확장, 이웃 국가로의 진출, 침략 등- 가 아니라 농업의 집약화 -농서 간행, 농법 개량 등- 를 통해 해결했다는 점이라고 말이다.

흥미롭다.농사에 이용할 수 있는 자원 -분뇨, 퇴비 등- 은 한정되어 있는데 경작할 수 있는 토지는 넓었던 당시엔 이런 선택이 당연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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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 행한 고고학 발굴은 세계의 초기 도시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발전했는지 기록된 고대의 수확물을 밝혀냈다. 


Nature Plants에 발표된 연구는 현재 시리아의 북부인 메소포타미아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농업과 정치경제적 측면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옥스포드 대학의 연구진은 고대 곡물을 탄소 및 질소 동위원소를 이용해 분석하여 작물이 재배될 당시의 을 재구성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려냈다.  

그들은 초기 도시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량 수요가 늘어나자, 농민들은 더 집약적으로 관리된 기존 농지로 자원들 —분뇨 같은— 을투하하기보다는, 더 넓은 면적의 토지를 경작하려고 노력했다. 

광활한 토지에 굶주린 농업은 강력한 가족관계와 사회제도에 의해 독점될 수 있는 경작지에 접근하고, 쟁기질에 전문화된 가축을 이용하는 능력에 크게 의존했다.  

따라서 이 연구의 결론은 소수의 통치자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 경작지의 중요성이 어떻게 커졌으며, 도시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사회적 불평등으로 이어졌는지 밝혔다. 

프로젝트를 이끈 옥수포드 고고학 학교의 교수 Amy Bogaard 씨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고고학 유적지에 묻혔다 발견된 각각의 곡물들은 그것이 재배된환경조건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여러 고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많은 곡물 샘플들을 연구하면 초기 도시들의 성장과 쇠퇴에 따라 농업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특히 성장하는 도시의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대처한 방법을 그려볼 수 있다. 우린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초기 도시들의 성장이 농업 규모의 급진적 확장에 의존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 결과, 곡물들은 점차 열악한 토양 조건에서 재배되었다. 예를 들어, 거름과 양분의 보충이 더 적어졌다. 그건 광대한 도시 밀집지대를 개발할 수 있는 해결책이었지만, 환경이나 정치 상황이 바뀌면 위험에 빠졌다. 선사시대의 농민들이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조사하는 일은 현재 인구 증가와 환경 변화라는 유사한 압력에 직면해 있는 오늘날에도 유용한 조언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읽을거리: Manure used by Europe's first farmers 8,000 years ago

    더 많은 정보: Amy K. Styring et al. Isotope evidence for agricultural extensification reveals how the world's first cities were fed, Nature Plants (2017). DOI: 10.1038/nplants.2017.76



출처: https://phys.org/news/2017-06-ancient-grain-tale-ancestors-cities.html#j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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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한국의 농업 관련된 사람들을 흥분시켰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의 발견. 

물론 그것이 의미는 있으나 가장 오래된 재배 벼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그 볍씨를 가지고 한반도가 최고의 벼농사 지역이었다는 둥, 그래서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는 둥 하는 류의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다. 그러니 너무 흥분하지 마시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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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5644


소로리볍씨 비해 가와지볍씨는 확실한 재배벼
소로리볍씨는 반재배단계와 초기농경단계 사이 순화벼
[1190호] 2014년 09월 18일 (목) 12:04:03이병우 기자  woo@mygoyang.com

1회 가와지볍씨, 발굴에서 출토까지 
2회 벼농사 기원, 청동기에서 신석기로
3회 3천년 여주 흔암리볍씨와 뭐가 다른가  
4회 1만5천년 청원 소로리 볍씨와 뭐가 다른가   
5회 5천년 가와지볍씨, 지역문화브랜드를 향해

<기획> 5천년 가와지볍씨, 한반도 벼농사 기원을 밝히다

1991년 일산신도시 문화유적조사(단장 손보기)로 발굴된 가와지볍씨 12톨은 약 5020년 전의 것으로 밝혀진 볍씨로 큰 브랜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지난 3월에는 ‘고양 가와지볍씨 박물관’을 개관해 시민들에게 가와지볍씨를 알리면서 브랜드화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고양 가와지볍씨는 1991년 6월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 가와지 유적의 신석기시대 토층에서 발굴된 4340전인 B.C 2300년 경의 자포니카 볍씨 4톨로, 미국 베타연구소의 연도측정 결과 5000년 전의 볍씨임이 확인됐다. 

고양시는 이 가와지볍씨가 ‘한반도 최초의 재배볍씨’임을 뒷받침하는 여러 연구논문과 함께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벼농사 가능성까지 열어주는 연구결과와 고고학적 성과들을 발표하며 발빠른 콘텐츠 선점 행보를 지속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청원 소로리볍씨가 한반도에서 발견된 최고 오래된 볍씨로 학계에 주목을 받아왔다. 이에 고양 가와지볍씨와 청원 소로리볍씨는 어떤 다른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본다. 

소로리볍씨, 가장 오래된 볍씨 확인돼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볍씨가 출토됐다. 바로 청원 소로리 볍씨다. 청원 소로리 볍씨는 1997~1998년 오창과학산업단지 건설 예정지인 옥산면 소로리 문화유적 지표조사 과정에서 발견됐다. 당시 출토된 볍씨는 고대벼 18톨, 유사벼 41톨 등 모두 59톨로 확인됐다. 볍씨뿐만이 아니라 이 유적 일대에는 찍개, 긁개, 홈날, 몸돌, 격지 등의 구석기 유물이 넓은 범위에 걸쳐 수습됐다.

  
▲ 고대볍씨(자포니카)의 출토 상태 모습



특히 출토된 볍씨는 바로 서울대학교 AMS(방사선탄소연대측정) 연구실과 미국의 지오크론(Geochron Lab)연구실로 보내져, 1만3000년 ~ 1만5000년 전의 절대연대값을 얻어 청원 소로리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볍씨임이 판명됐다. 

청원 소로리 볍씨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 고고학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알려진 것은 중국 호남성 옥첨암 동굴의 순화볍씨였다. 청원 소로리 볍씨는 이보다 3000~4000년 전의 볍씨로 밝혀진 것이다.  

소로리 볍씨가 1만 5000년전 것으로 판명되자 일부 학계에서 의문이 제기됐다. 그 의문은 크게 2가지였는데, 하나는 ‘1만 5000년 전은 구석기말 빙기의 끝무렵인데 한반도에서 아열대 식물로 알려진 벼가 추운 기후에서 자랄 수 있었을까’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또 그 벼가 야생벼인지, 재배벼인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 소로리볍씨의 소지경이 잘라진 모습.


그 고증을 얻기 위해 당시 청주MBC 취재팀이 국립 작물시험장 춘천출장소에서 냉해실험을 통해 벼가 자랄 수 있는 온도를 실험한 결과, 벼가 자연상태에서 최저 발아온도가 섭씨 20도로 알려졌지만, 실험결과 13도에서도 70%이상이 발아되어 생성되는 연구 결과를 얻게되었다. 냉해실험을 통해 따뜻한 기후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진 벼가 기후적응을 잘하는 식물로 1만5000년전의 학설이 긍정적으로 무게가 실려진 것이다.

이융조 교수 “재배벼 단정할 수 없다”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은 “청원 소로리 볍씨는 고대벼의 소지경 형태는 야생벼의 길쭉하고 뾰족한 것과는 다르게 짤림이 잘 되지 않았다. SEM 촬영결과 외부의 힘에 의해 잘라진 특징이 관찰되어, 재배벼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융조 이사장은 “청원 소로리 볍씨는 그동안 1만3920bp(before present)의 연대값을 기초해 ‘약 1만5000년 전’으로 발표했으나, 이를 다시 미국 캠브리지대의 세계 공용 측정프로그램으로 계산한 결과 BC 1만5118년전으로 밝혀져 그 연대를 ‘약 1만7000년 전’으로 수정한다”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또한 “지금까지는 학명없이 ‘소로리볍씨’로만 불렀으나 ‘Oryza sative coreaca(오리자 사티바 코레아카)’ 즉, ‘한국의 고대벼’ 라는 학명을 부여했다”고 밝혔다. 

이융조 이사장은 청원 소로리 볍씨에 대해 “재배벼의 특징은 가지고 있지만 재배벼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단지 재배벼 이전 단계인 ‘순화벼’라는 명칭을 청원 소로리 볍씨에 부여했다. 이 이사장은 “소로리 볍씨의 연대가 1만7000년 전으로 측정된 것, 아생벼와는 다르게 인위적으로 보이는 소지경의 절단면이 SEM으로 관찰된 점, 토탄 출토지점 옆에서 많은 구석기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점 등 반재배단계와 초기 농경단계 사이의 순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벼라고 생각된다. 즉 소로리 볍씨는 한국 재배벼의 조상이며,순화초기의 벼라고 보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조용구 충북대 식물자원학과 교수는 “현재 국내에는 잡초벼가 있을 뿐 벼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야생벼가 존재하지 않는 점, 또한 소로리볍씨는 현존하는 유적 실물 중 가장 연대가 높은 점 등을 비추어 볼 때, 이는 인간이 야생상태의 벼로부터 차츰 파종하고 수확하는 과정에서 자연 선발되는 단계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서학수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교수는 “청원 소로리 볍씨의 DNA분석 결과, 현재의 재배벼·유사벼와는 다른 39.6%의 낮은 유전적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소로리볍씨와 야생벼와는 57% 정도의 유사도를 보이는 연구도 있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야생벼는 낟알이 소지경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잘 떨어지는 탈립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야생벼의 소지경은 매우 매끄럽다. 이에 반해 재배벼는 소지경 상태가 매우 거칠다. 가와지볍씨의 소지경 상태를 전자주사현미경(SEM)으로 촬영한 결과 재배벼의 특성인 거친 단면이 나타났다.  
이러한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청원 소로리 볍씨는 재배벼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재배벼라고 단정할 수 없다.  

  
▲ BBC 뉴스(인터넷판)에 소개된 "세계 최고의 벼가 발견되다"(2013.10.21)
  

 

소로리볍씨가 가와지볍씨로 맥 이어져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을 비롯해 고 박태식 박사,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은 비록 적은 개체수이긴 하지만 온전한 청원 소로리 출토 볍씨 13톨과 고양 가와지 출토 볍씨의 크기와 볍씨 형태를 비교했다. 그 결과 소로리 출토 볍씨는 유전적으로 변이가 크게 분포하고 있으며,고양 가와지 출토 볍씨보다 약간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소로리 볍씨는 자포니카(japonica)에 가까운 편이었고,인디카(indica)에 가까운 것이 1톨,자포니카(javanica)로 추정되는 것이 1톨이었다.

  
▲ 볍씨의 유입경로(이융조, 박태식, 우종윤. 2013)
자포니카(japonica) 쌀은 모양새가 둥글고 굵은 단립형 쌀이다. 자포니카 쌀은 한반도, 일본, 중국 북부에서만 주로 소비가 되며,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쌀 중 10% 가량뿐이다. 이에 반해 인디카(Indica) 쌀은 전 세계 쌀의 90%를 차지하는, 쌀의 대표적인 품종으로 ‘안남미’라고도 부른다. 태국쌀, 필리핀쌀, 베트남쌀 등이 모두 안남미이다. 인디카는 모양이 길쭉하고, 찰기가 없어서 밥알이 분리된다. 따라서, 밥그릇을 한 손으로 들고 기다란 나무젓가락을 사용해 마시는 방식으로 먹는다. 

이들 연구자들은 소로리와 가와지의 두 출토 볍씨 사이에 있던 긴 공백에도 소로리 출토 볍씨가 가와지 출토 볍씨로 맥이 이어져 약간 작고 약간 긴 쪽으로 균일화되었다고 추정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에 의한 선택, 또는 벼를 재배해야 할 충분한 생존의 압력이 작용했으리라 추정되지만 앞으로 좀 더 많은 유물이 또 여러 곳에서 나와야 보다 확실한 추론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여겼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들 연구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남쪽지방에서 유입된 여러 가지 벼(고대벼와 유사벼의 4종류)가 우리 선조의 지혜와 자연선택에 의하여 자포니카에 가까운  재배벼인 고대벼로 종의 분화에 이르른 가와지벼는 당시 사회변화에 큰 영향을 주어 고조선을 비롯한 여러 국가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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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누에보레온(Nuevo Leon) 주에서 기원전 3500~3000년 무렵의 것으로 계산되는 수렵채집인의 씨앗, 옥수수자루, 옥수수 잎이 발견되었다. 


아직 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유적은 발견되지 않은 상태인데, 이 증거물들이 유목하는 수렵채집인의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1950~1960년대 타마울리파스와 오악사카, 푸에블라 주의 동굴에서 발굴된 기원전 7000~3000년 전의 세 작물(옥수수, 호박, 콩)이 가장 오래된 주요한 작물로 등록되어 있다. 



바위의 은신처에서 발견된 옥수수 속과 깍지들.



옥수수와 관련된 증거만이 아니라 바위의 은신처에서는 벽화도 발견되었다니 당시의 생활상과 관련된 상징들도 읽어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누에보레온 엘모로(El Morro)에서 발견된 초기 농업의 증거인 옥수수자루. 이것이 무려 5000년도 더 된 것이라니 놀랍다. 17~18cm 정도이니까 한뼘이 채 되지 않는 크기.





포장된 옥수수 껍질.



http://archaeologynewsnetwork.blogspot.de/2013/11/proto-agricultural-activity-found-in.html#.UqjlGWRdW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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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historic "pantries": This illustration is based on archaeological findings in Jordan of structures built to store extra grain some 11,000-12,000 years ago.


For decades, scientists have believed our ancestors took up farming some 12,000 years ago because it was a more efficient way of getting food. But a growing body of research suggests that wasn't the case at all.


"We know that the first farmers were shorter, they were more prone to disease than the hunter-gatherers," says Samuel Bowles, the director of the Behavioral Sciences Program at the Santa Fe Institute in New Mexico, describing recent archaeological research.Bowles' own work has found that the earliest farmers expended way more calories in growing food than they did in hunting and gathering it. "When you add it all up, it was not a bargain," says Bowles.


So why farm? Bowles lays out his theory in a new study in the journal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The reasons are complex, but they revolve around the concept of private property.


Think of these early farmers as prehistoric suburbanites of sorts. The first farmers emerged in less than a dozen spots in Asia and South America. Bowles says they were already living in small villages. They owned their houses and other objects, like jewelry, boats and a range of tools, including fishing gear.


They still hunted and foraged, but they didn't have to venture far for food: They had picked fertile places to settle down, and so food was abundant. For example, one group in what is present-day Iraq lived close to a gazelle migration route. During migration season, it was easy pickings — they killed more animals than they could eat in one sitting. They also harvested more grain from wild plants than they knew what to do with. And so, they built "pantries" — structures where they could store the extra food.




This granary uncovered in Jordan shows that people stored wild grain even before they were farming it.


These societies had seen the value of owning stuff — they were already recognizing "private property rights," says Bowles. That's a big transition from nomadic cultures, which by and large don't recognize individual property. All resources, even in modern day hunter-gatherers, are shared with everyone in the community.


But the good times didn't last forever in these prehistoric villages. In some places, the weather changed for the worse. In other places, the animals either changed their migratory route or dwindled in numbers.


At this point, Bowles says these communities had a choice: They could either return to a nomadic lifestyle, or stay put in the villages they had built and "use their knowledge of seeds and how they grow, and the possibility of domesticating animals."


Stay put, they did. And over time, they also grew in numbers. Why? Because the early farmers had one advantage over their nomadic cousins: Raising kids is much less work when one isn't constantly on the move. And so, they could and did have more children.


In other words, Bowles thinks early cultures that recognized private property gave people a reason to plant roots in one place and invent farming — and stick with it despite its initial failures.


Bowles admits that this is just an informed theory. But to test it, he and his colleague Jung-Kyoo Choi built a mathematical model that simulated social and environmental conditions among early hunter-gatherers. In this simulation, farming evolved only in groups that recognized private property rights. What's more, in the simulations, once farming met private property, the two reinforced each other and spread through the world.


Bowles' theory offers a more nuanced explanation that ties together cultural, environmental and technological realities facing those first farmers, says Ian Kuijt, an anthropologist at the University of Notre Dame who specializes in the origins of agriculture.


But, he says, the challenge is to figure out who owned the property back then and how they ran it. "Was it owned by one individual?" Kuijt says. "Was it a mother and father and their children? ... Does it represent community or village prop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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