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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환, 이영식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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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의 농기구와 생활도구 | 경기도메모리 디지털 아카이브

2009년 11월부터 12월까지 시행한 김포지역 근.현대 역사자료 조사 및 수집사업의 결과물로 농기구와 생활도구를 중심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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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김동섭 씨의 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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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료지는 정토종 사원.

불교 사원에 붙는 호칭인 산호山号는 고다이산五台山.

본존은 석가여래. 창립 뿌리는 쵸우넨奝然(938-1016년)으로, 헤이안 시대 중기 도다이지의 삼론종 승려 출신. 983년 송나라에 가 불교를 공부하고 태종에게 대사호란 호칭을 받고, 신인대장경新印大蔵経을 가지고 986년 일본에 돌아옴. 창립자는 그 제자인 죠우산盛算.종파는 처음엔 화엄종으로 창립하고, 그 뒤 천태종, 진언종을 겸했음. 무로마치 시대부터 융통염불종融通念仏宗으로 발전함. 

 

사원이 있는 땅에는 원래 사가嵯峨 왕의 아들로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모델이라 여겨지는 좌대신左大臣 미나모토노 토오루源融(822-895)의 별장 서하관栖霞観이 있었다고 함. 그의 죽음 이후 1주기에 해당하는 896년, 그가 생전 발원하여 이루지 못한 아미타삼존상을 아들이 만들어 안치하고 서하사棲霞寺라고 불렀다고 함.

서하사를 세우고 수십년 뒤, 송나라에 다녀온 쵸우넨이 가져온 석가여래 입상을 교토의 아타고산愛宕山이 송나라의 오대산과 비슷하다며 그 기슭에 이를 안치하는 절을 건립하려고 했음.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하고 후나오카산船岡山에 있는 렌다이사蓮台寺에 일단 불상을 안치함. 그가 서하사 위치에 청량사를 건립하려던 의도는 교토 북동쪽 히에이산에 있는 엔랴쿠지延暦寺와 대항하려는 의도였다고 봄. 하지만 엔랴쿠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016년 죽음을 맞이함. 그리고 그 뜻을 이어 제자 죠우산이 결국 오대산 청량사를 건립하게 됨. 그 후, 오닌의 난으로 사원 건물이 소실되지만 1481년 재건됨. 

 

---------

열반회 및 타이마츠라는 잔치가 열려서 24년 3월 15일 방문. 매년 3월 15일에 개최되는 행사라고 한다.

 

쵸우넨이 중국 오대산에 다녀왔다고 하여 거기에서 따온 이름의 문인가 보다. 

 

 

오대산 이란 현판이 잘 보임

 

 

문만 보아도 화려하고 규모가 꽤 크다는 걸 알 수 있음.

 

 

 

경내에는 타이마츠 준비가 되어 있고.

 

 

본전에 들어가니 쵸우넨이 중국에서 받아왔다는 석가여래상과 각종 관련 그림 및 유물을 볼 수 있었음. 일본답지 않게 공짜로 공개하다니 배포가 엄청 큰 사찰이었다. 

 

 

 

타이마츠가 열리기 전에 경내 한켠에서 하던 공연

 

 

아래 검은 가면의 귀신을 물리친다는 내용인데... 어후 칼 차고 나오는 것까지는 어떻게 봐주겠는데, 싸움까지 해서 귀신의 목을 베어 들어올리는 장면에서는... 그 옛날 프랑스의 단두대 구경이 이랬을라나 싶고 그랬다. 잔인하기가 아주...

 

 

 

8시에 시작한다는 타이마츠 행사. 이제 얼마 안 남았음.

 

 

먼저 쌓아놓은 더미에 불을 붙이고...

 

 

짙은 연기를 내뿜으며 타오른다.

 

 

제대로 불이 붙자 불똥이 마구 날아다니는데, 목조 건물이 가득한 곳에서 이래도 되나 싶게 무서운 기세로 불타오른다.

 

 

 

그러더니 사단이 났다. 

원래는 타이마츠 하나하나에 사람이 불을 붙여 한꺼번에 타오르도록 하는데, 불똥이 날아가 하나에 먼저 불이 붙어 버렸다. 

이게 다 같이 활활 타올라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건데 하나가 먼저 타 버렸으니 올해는 망했다. 

 

 

 

이렇게 행사를 보고, 다 끝나기 전에 먼저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한번에 몰리면 차가 꽉 찰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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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쟁기를 끄는 소 길들이기

 

 

 

도호쿠東北 지방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되기까지 말을 써레질에 이용하는 경우는 있어도 소를 농경에 이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이유로, 간토우 지방의 무사 집단이 말을 중요시했던 데다가 모내기의 적기가 짧아서 발이 빠른 말이 필요했다는 점, 말의 두엄 발효온도가 소의 그것과 비교해 6℃ 높고 저온의 토양에서는 거름원으로 뛰어났다는 점, 말괭이보다 늦게 일본에 전래된 쟁기가 도호쿠 지방까지 전파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메이지 시기에 들어와 근대 농업이 깊이갈이를 지향하면서 안아 쥐고 서는 쟁기라고 부르는 바닥없는쟁기가 전국에 눈부시게 보급되며 이윽고 짧은바닥쟁기로 발전해 나아갔는데, 동일본에서는 역시 소가 아니라 말에 의한 쟁기질이 중심이었습니다. 그것은 "말갈이(馬耕)"라는 동일본의 쟁기 호칭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동일본에서 말을 대신해 소가 논 쟁기질의 주역이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정을 지키는 여성이 다룰 수 있는 짐승으로 도입되고나서입니다. 전쟁 이후 군마 수요가 없어진 말을 대신해 최종적으로 고기로 비싸게 팔 수 있는 소의 도입을 정부가 지원한 것도 있고, 농업이 기계화되는 쇼와 30년대(1960년 전후) 중엽까지 전국에서 소를 농경에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필자가 근무한 소 박물관이 자리잡은 이와테현岩手県은 한세이藩政 시대에는 남부의 소 산지로 알려진 도호쿠 지방의 유일한 소의 산지로, 예로부터 소를 부려 강철이나 소금의 운송이 이루어졌는데 앞에 기술한 바와 같이 농경에 소를 이용하게 된 것은 쇼와 시대에 들어와서부터입니다. 이와테현에 일본소(와규和牛)를 도입한 계기가 된 것은 쇼와 공황에 의해 피폐해진 농촌을 구제하기 위하여 실행한 농수성農水省의 농산어촌경제農山漁村経済 갱생운동입니다. 이와테현에서는 4개 마을이 지정되어 쇼와 13년(1938년)에 사쿠라가와무라佐倉河村(현 오슈시奥州市)에 검은소 종이 도입되었습니다. 일본소의 도입에 즈음하여 이와테현은 당초 거부의 자세를 취했는데, 거세우뿐이라는 조건으로 간신히 허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더욱이, 쇼와 14년(1939년)에 시가현에서 이와테현으로 부임했던 농수성 직원인 사사키 시게오佐々木成夫가 일본수의 3가지 이점으로 살이 잘 찜, 힘이 셈, 송아지(판매)를 설파했습니다. 당시를 잘 아는 히라이즈미쵸平泉町의 오가와 츠네오尾川恒夫(메이지 42년생)에 의하면, 쇼와 16년(1941년)의 일본소 도입과 함께 길들이기 기술도 도입되어서 급속히 퍼졌다고 합니다. 오가와를 포함한 5명이 이바라키현茨城県의 축산시험장에서 길들이기 기술지도를 받았는데, 그때 바둑판 위에 소를 올려놓는 기술을 선보여 경악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5명 가운데 2명은 20세의 여성이었습니다. 젊은이에게 연수를 받게 하고 싶었는데 남자는 전쟁에 징용되었기에 여성을 데려와 행한 것으로, 소 쟁기질의 전국적인 보급에는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림1>.

그림1 여성의 소 쟁기질. 1957년 10월 촬영(현 오슈시). 도호쿠 6현 축력 이용기술 교환경진대회에서(소 박물관 소장).

 

 

1944년에는 오카야마현에서 미하라 사쿠노하루三原作之治를 초빙해 다이토우마치大東町(현 이치노세키시一関市)에서 도호쿠 6현의 축산 담당기사를 대상으로 한 강습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미하라는 지금까지 지역에서 경험적으로 제각각 행해졌던 소 길들이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미하라식 길들이기의 창시자입니다. 미하라식 길들이기는 소를 부리기 위하여 필요한 '기초 길들이기'로 정자세, 앞으로, 뒤로, 좌우로 돌아, 빠른 걸음, 보통 걸음, 멈춤 등이었습니다. 한편, 오가와 등이 이바라키의 축산시험장에서 본 소의 바둑판 오르기는 오카야마현 아테츠군阿哲郡 치아무라千屋村(현 니이미시新見市)의 센야千屋 종축목장에서 근무하던 소샤시総社市의 타노 사미사부로佐野民三郎가 고안한 '고등 길들이기'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외에 선회(한 다리를 중심으로 180도 선회시키는 것으로, 전후좌우 모든 다리로 할 수 있도록 함), 횡족(소가 서 있는 위치에서 바로 옆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좌우로 움직이게 함), 다리 건너기, 경례 등이 있었습니다<그림2>. 소를 부리기만 한다면 보통은 기초 길들이기로 충분하지만, 좁은 논에서 쟁기질 등 축력 이용의 고도화에 수반해 선회나 횡족의 기술이 필요해집니다. 또한, 이와테현과 같은 말에 대한 애착이 강한 지역에서 소로 쟁기질하는 걸 보급하기 위해서는 고등 길들이기를 습득한 축산기사들이 농가의 마당에서 바둑판 오르기 등의 곡예를 선보여 소의 유용성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은 기초 길들이기를 마치면 '일소 길들이기'로 들어갑니다. 

그림2-1 소의 고등 길들이기(바둑판 서기)
그림2-2 소의 고등 길들이기(다리 건너기)
그림2-3 소의 고등 길들이기(경례). 1960년 촬영. 이와테현 에사시시江刺市(현 오슈시奥州市)

 

 

소를 부리는 경우, 길들이기에 앞서 코뚜레를 꿰어야 합니다. 코뚜레는 말의 재갈 역할을 하고, 고삐의 움직임을 소의 코로 전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수컷은 생후 10개월, 암컷은 10-13개월 무렵 나무송곳으로 코에 구멍을 뚫고 장치합니다. 일반적으로 비중격의 가장 살이 얇은 곳을 뚫는데, 위치가 너무 깊어 연골에 걸리면 소에게 심한 통증을 주게 되고, 너무 아래라 살이 두터운 곳을 뚫으면 지각이 둔해져 고삐의 효과가 나빠집니다. 상처에는 요오드팅크 등의 약품이나 된장을 발라줍니다. 코뚜레를 단 당초에는 상처를 아파하기 때문에 코뚜레에 굴레를 달아 가볍게 매달아 두었다가 1개월 정도 지나 아프지 않게 된 다음 고삐를 달아 길들이기를 시작합니다.

기본 길들이기의 요령으로 미하라는 몇 가지 주의점을 1950년 8월 오카야마현 축산 소식지에 기록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선 기본 길들이기를 행하는 장소는 평탄하고 너르며 발밑에 돌이 없는 장소를 선택합니다. 여름철 한낮이나 벌레가 덤빌 때는 소의 안정을 위하여 식후 1시간 정도 지나고나서 아침저녁 시원할 때 포만감을 가늠하여 실시하고, 휴식은 길들이기의 형태가 무엇이든 하나라도 생긴 다음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10분에서 30분 정도 취하게 합니다. 조련자와 소의 위치는 최초는 코에서 60-90cm 정도에서 고삐를 쥐고 가볍게 치고, 순차적으로 쳐져 소의 오른쪽 뒷다리의 비스듬한 곳에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소의 등선이 보일 정도가 정위치가 됩니다.

소는 코에 닿는 고삐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부릴 때 고삐의 사용법을 확실히 분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삐를 쥐는 법은 오른손 손등에 한바퀴 감은 뒤 꽉 쥡니다. 1m 정도 고삐의 뒷쪽을 남겨두고 왼손으로 가볍게 쥡니다. 고삐 치는 법의 습득은 두 사람이 고삐의 끝을 팽팽히 잡고 한쪽이 고삐를 치고 그걸 다른 사람이 어떻게 손에 느끼는지 가르쳐주며 연습합니다. 혼자서 연습할 경우는 한쪽 끝을 나무 등에 묶어두고 행합니다. 고삐 치는 법은 딱히 정해진 건 없지만, 손으로 일으킨 고삐의 파동이 정확히 앞쪽으로 전해지도록 합니다.

소를 다스리는 데에는 고삐의 도움과 함께 명령어가 쓰입니다. 이 명령어는 표1에 나와 있는 대로 전국적으로 협정되어 있고, 충분히 철저하게 하면 소는 목소리만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표1  소를 부리는 용어

 

동작   /   용어   /   적요

전진   / 싯   / '시'에 힘을 주고 조금 짧게 발음한다

가속   / 하이하이 / '하'에 힘을 주고 연속해 발음한다

오른쪽 돌기 또는 오른쪽으로 가기   / 세에 /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하는 데에도 쓴다

왼쪽 돌기 또는 왼쪽으로 가기   / 사시 / '사'에 약간 힘을 주어 발음한다. 왼쪽으로 치우치게 하는 데에도 쓴다. 왼쪽 돌기를 할 때는 2-3번 연달아서 발음한다

차차 멈추기   / 바아 / 온화하게 발음한다

정지   / 바 / 힘을 주어 짧게 발음한다

후퇴   / 아토 / '아'에 힘을 주어 발음한다

다리 들기   / 아시

주의   / 오오라 / 온화하게 발음한다

진정   / 바아바 / 온화하게 발음한다

어루만지기   / 오오라 / 온화하게 발음한다

혼내기   / 코라 / 짧고 강하게 발음한다

 

 

전진은 소의 코를 앞으로 당기는 듯한 파동을 치는 동시에 "싯"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전진하기 시작하면 고삐의 긴장을 풀어 똑바로 걷게 하고, 속도가 느릴 때는 왼손의 고삐를 흔들거나 사람의 무릎을 두드리는 등을 하며 "하이하이"라고 구호를 외쳐 가속시킵니다. 천천히 걷게 하려면 코 밑을 똑바로 아래로 당기는 듯한 고삐의 파동을 쳐 머리를 위로 들게 합니다.

정지시키려면 후방으로 약간 꽉 누르듯이 고삐를 당기는 동시에 "밧"하고 구호를 외칩니다. 팔을 움직여 크게 당기거나, 서서히 당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왼쪽으로 돌기는 소의 코를 왼쪽으로 밀듯이 파동을 보내는 동시에 "사시"라고 명령하고, 오른쪽으로 돌기는 고삐를 오른쪽으로 당기며 "세에"라고 명령합니다. 소가 돌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사람도 위치를 바꾸면서 고삐를 칩니다. 후퇴는 소의 코를 바로 뒤로 당기는 듯한 파동을 보내고, 소의 머리와 몸을 똑바로 해놓은 다음 "아토, 아토"라고 연호하면서 바로 뒤로 짧게 당깁니다.   

정지한 경우 앞다리는 모아져 있지만 뒷다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왼쪽 뒷다리를 뒤로 당기게 할 경우, 오른쪽으로 돌게 하는 고삐를 내는 동시에 후퇴의 고삐를 가볍게 칩니다. 오른쪽 뒷다리를 당기게 할 경우에는 왼쪽으로 돌기와 함께 후퇴의 고삐를 합쳐서 치며 "아시, 아시"라고 구호를 외치면서 행합니다.

기본 길들이기가 마무리되면 쟁기꾼은 비교적 간단히 일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멍에를 소의 등에 얹어서 익숙해지도록 하는 일부터 시작해, 다음으로 뱃대끈을 채웁니다. 처음에는 느슨하게 조이고 걷게 하는데, 한태를 함께 사용해 멍에가 어긋나지 않게 합니다. 소가 멍에에 충분히 익숙해지면 봇줄을 달아 가벼운 것부터 서서히 끌게 합니다. 최초는 똑바로 끌며 걷게 하고, 가능해진다면 좌우 돌기를 연습하며, 정지와 후퇴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갑자기 무거운 걸 끌게 하면 소가 일을 싫어하고 나쁜 버릇이 생기기 쉬워져 주의가 필요합니다. 기본 동작을 할 수 있게 되면 논밭으로 데리고 나와 쟁기를 달아봅니다. 최초는 얕게 쟁기질하고, 점점 쟁기를 깊게 넣어 봅니다. 

실제로 일을 시킬 때는 길들이기할 때의 줄보다 좀 굵을 걸 쓰고, 길이는 5m 정도로 합니다. 

소를 부리는 일은 농경과 운반이 있는데, 짐 싣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견인이고 그 방법은 ①몸통 끌기(뱃대끈 없음), ②몸통 끌기(뱃대끈 착용), ③어깨 끌기, ④머리 끌기, ⑤몸통과 어깨 병용해 끌기<그림3>, ⑥몸통과 머리 병용해 끌기가 있습니다<그림4>. 쟁기를 끄는 것 같은 논의 작업에서는 디딜 곳이 나쁘고 앞다리를 뽑아드는 것 같은 움직임이 필요하기 때문에, 순조롭게 당기고 다리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지는 몸통 끌기가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져 색인력의 측면에서도 ②몸통 끌기(뱃대끈 착용)이 전국적으로 널리 쓰였습니다.

 

그림3 몸통과 어깨 병용해 끌기. 1950년 무렵 촬영. 미야기현宮城県 가리타군刈田郡 시라이시쵸白石町(현 시라이시시白石市). 소 박물관 소장.

 

그림4 몸통과 머리 병용해 끌기. 1960년 10월 촬영. 이와테현岩手県 에사시시江刺市(현 오슈시奥州市). 소 박물관 소장.

 

 

더구나 머리 끌기를 행하는 경우, 멍에가 뒤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머리를 숙이고 끄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머리 끌기는 힘을 내기 쉽고, 탄력을 이용할 수 있어 평탄한 길에서 무거운 짐을 끌게 하는 경우 등에 쓰입니다. 머리를 숙이게 하려면 소에게 굴레를 착용시키고 아래쪽에 고삐를 걸어 두 다리 사이를 통과시켜 뱃대끈에 묶습니다. 최초는 위에 기록한 방법으로 멍에만을 연결해 걷게 하고, 가벼운 것부터 끌게 해 차차 무거운 것을 끌고 가게 합니다. 그러면서 소가 머리를 숙이는 것이 편하다는 걸 학습하기 때문에, 고삐를 차츰 느슨하게 하면서 멍에로 견인하고 있을 때 항상 고삐가 느슨해지면 고삐를 끄릅니다. 

또한 소의 축력 이용에 대해서는 당시 일소와 고기소였던 일본소의 품종별로 그 능력을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해 놓았습니다. 오카모토岡本(1958)에 의하면, 표2와 같습니다. 

 

표2 일본소 품종별 사역능력

품종                /         능력

검은 일본소     / 동작 경쾌하고 성질 온순, 길들이기도 용이하여 부리기에 적합, 힘은 조금 부족하지만 농경지가 좁고 힘든일을 할 기회가 적은 일본의 일반적 농가에서는 필요로 하는 충분한 능력을 가짐. 육질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음.

갈색 일본소    / 동작 경쾌함과 길들이기 용이함은 검은소와 큰 차이가 없지만, 성질은 한층 온순하여 부리기 쉬움. 힘과 내구력, 작업능률의 측면에서 약간 앞서지만 육질의 측면에선 좀 떨어짐.

뿔 없는 일본소 / 걸음걸이가 좀 경쾌함이 부족하고, 힘은 그렇게 쳐지지 않지만 지구력에서는 검은소와 갈색소보다 좀 떨어짐. 육질에서는 정평이 나 있지만 사역능력은 낮다고 평가됨.

짧은뿔 일본소 / 길들이기는 좀 어렵지만 견인력이나 걸음속도의 측면에선 그닥 다른 품종에 떨어지지 않음. 육질은 불고기용으로는 떨어지지만 빛깔이 좋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좋아함.

 

이와테현 남쪽 지방에 1930년 전후로 도입된 일본소는 확린된 길들이기의 기술을 동시에 도입함으로써 급속히 보급되어 나아갔습니다. 일부에서는 짧은뿔 계통의 소도 혼재해 있었지만 차차 당시부터 일소 겸 고기소 용도의 소로 주류를 점했던 검은소로 통일되고, 논을 갈아엎는 역축, 나아가서는 거름용으로도 빼놓을 수 없는 가축으로 정착되어 나아갑니다. 그러나 일소의 이용은 경운기와 트랙터의 보급에 의해 1960년 전후로 돌연 종언을 맞이합니다. 일소라는 큰 용도가 사라진 검은소였지만, 논농사 지대에서 거름용 가축이란 중요성과 송아지의 판매에 의한 현금 수입에 더해 길들이기에 의해 생긴 소와 인간 사이의 유대감이 계속 사육하게 하는 동기가 되어, 이와테현 남쪽 지방은 타지마但馬 지방에서 씨수소를  구입하는 등 검은소 송아지의 산지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현지의 송아지를 바탕으로 해서 비육에 나선 이사와군胆沢郡 마에사와쵸前沢町(현 오슈시)에서 출하된 소의 육질이 시장에서 고평가를 받고 '마에사와 소'라는 상표화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소의 길들이기에 대해 미하라는 "소의 마음을 잘 알아 휴식과 어루만지기를 게을리하지 말 것"이란 말을 남겼는데, 마에사화 소의 비육 농가에서 농림수산대신상을 수상한 오이카와 우메오及川梅男도 소 사육의 비결은 "소의 말을 알아듣는 비육"이라 합니다. 길들이기에 의하여 생긴 소와 인간 사이의 유대감이 현재의 브랜드 소의 비육기술로 살아나고 있는 겁니다. 일본소의 고기는 다른 축산물과 차별화되어 '예술품'에 비견되는 일이 있는데, 그 요인의 하나가 두 사례의 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일소 부리기는 행해지지 않지만, 길들이기는 가축 공진회 등에서 소에게 정자세를 취하게 하는 등 지금도 필요한 기술입니다. 최근에는 2012년 10월에 개최된 제10회 전국 일본소 능력 공진회 나가사키현 대회에서 오카야마현의 신미 고등학교와 기후현의 가모 농림고등학교의 학생들에 의해 소의 바둑판 오르기가 선보여져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그림5>. 

 

그림5 소의 바둑판 오르기. 제10회 전국 일본소 능력 공진회 나가사키현 대회. 오카야마현립 신미新見 고등학교(좌), 기후현립 가모加茂 농림고등학교(우).

 

 

소의 고등 길들이기는 검은소를 단순히 고기용 가축으로 취급하지 않고 애정을 들여 사육하는 일본의 소와 인간 사이의 유대감을 상징하는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진귀한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기본 길들이기와 함께 고등 길들이기 기술이 전해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참고문헌〉

赤木廸朗, 牛調教のあらまし、岡山畜産便り 第二巻 第五号(おかやま畜産ひろば ホームページ), 1951

岡本正幹, 畜産体系 第十九編 役肉牛、養賢堂(東京), 1958

川田啓介, 「調査記録」, 1994

河野通明, 近代農業と長床犁 「中世名主=犁、近世小農=鍬」説の再検討(下 - 二), 商経論業 第四六巻 第

一号, 75〜118p, 神奈川大学 経済学会 (http://hdl.handle.net/10487/9402), 2010

三原作之治, 和牛調教のコツ, 岡山畜産便り 第九号(おかやま畜産ひろば ホームページ), 1950

吉田武紀, 牛の調教から使役まで (1)畜産の研究 第九巻 第一号, 19~22p, 1955

吉田武紀, 牛の調教から使役まで (2)畜産の研究 第九巻 第二号, 27~30p, 1955

吉田武紀, 牛の調教から使役まで (3)畜産の研究 第九巻 第三号, 41~42p, 1955

吉田武紀, 畜産体系 第二十八編 牛の畜力利用, 養賢堂(東京), 1960

 

 

글쓴이 카와다 케이스케川田啓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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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쟁기

 

1.  쟁기의 기원

 

 

 

쟁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괭이가 기원인지 가래가 기원인지 세계적으로 논의되어 왔습니다. 가래 안에는 (그림1-A)①처럼 가래에 부착한 끈을 도우미가 당겨서 경운을 돕는 것이 있고, 그것을 ②처럼 사람이 앞쪽으로 끌어서 인걸이가 생기며, ③처럼 소에 멍에를 지워 소갈이 쟁기가 발생한다는 설도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보습의 변화에 주목하면, B그림처럼 괭이는 콱 찍어 넣어 흙을 일으키고 찍어 넣어 일으키는 걸 반복하고, 가래도 밟아 넣어 흙을 일으키고 밟아 넣어 일으키는 걸 반복하여, 날끝은 공중-땅속을 왕복하는 "간헐 경운"인데 반해 쟁기의 보습은 C그림처럼 소가 끌어서 땅속을 잠수함처럼 잠항하는 "연속 경운"이라 기술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계통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쟁기는 괭이나 가래와는 전혀 관계없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림2 쟁기의 기원

 

 

"인걸이 쟁기 → 소갈이 쟁기"라는 전개에는 한 가지 큰 오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걸이 쟁기는 그림2의 AB와 같이 일본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 점재해 있는데, 그것들은 호리쟁기를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이 무언가 사정이 생겨 소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 할 수 없이 사람이 끌기 시작했다고 생각되며, 이는 소가 끄는 쟁기의 '파생형'으로 '원형'은 아닙니다.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라는 발전 패턴이 예상되지만, 간단한 것에는 퇴행적인 파생형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최초의 형은 D그림 같이 겨리쟁기로 긴 성에를 2마리 소의 머리에 걸쳐놓은 멍에에 묶어서 당기게 했습니다. 그런데 2마리 소의 머리에 걸친 멍에와 긴 성에는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달구지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달구지는 C그림처럼 큰 바퀴를 갖춘 이륜차로서, 이 달구지가 주행하는 걸 바라보던 사람들 가운데 차체 대신 철제 날을 부착한 자루를 부착하면 소의 힘으로 연속해 경운할 수 있겠다는 발상을 떠올려 D그림 같은 겨리쟁기가 탄생했다고 생각됩니다.  

 

 

2. 겨리쟁기에서 호리쟁기로

 

 

 

<그림3>처럼 서아시아, 인도 서북부에서 발생한 겨리쟁기는 서쪽으로 나아가 이집트와 로마 등 지중해 주변으로 퍼졌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들어간 쟁기는 게르만 민족의 손에 의해 중후한 바퀴쟁기로 개량되어 4마리가 끄는 쟁기도 나타나며 중세 유럽 사회를 뒷받침했습니다. 

중앙아시아부터 실크로드를 경유해 중국 화북지방으로 들어간 겨리쟁기는 진과 한의 중국 통일을 생산력 면에서 뒷받침하고, 또 동쪽으로 나아가 조선 북부의 고구려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유라시아, 북아프리카는 겨리쟁기권이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무렵부터 호리쟁기가 출현했습니다. 3세기 초에 황하 유역은 유목민에게 점령되어 진晉나라가 멸망하고, 화북에서 쫓겨난 한족은 장강 유역으로 달아나 남조를 건설하는데, 이 과정에서 화북의 밭농사 용구는 강남 지방의 논에서 논농사용으로 개조되어 호리쟁기의 굽은성에긴바닥(曲轅長床) 쟁기가 태어났습니다. 조선반도에서는 고구려에서 남쪽의 백제와 신라로 전해지는 과정에 호리쟁기의 곧은성에삼각틀바닥없는(直轅三角枠無床) 쟁기가 태어났습니다. 이리하여 동아시아는 호리쟁기권이 되고, 여기에서 일본으로 호리쟁기가 전해졌습니다. 

 

 

3. 쟁기의 형태와 분류

 

호펜의 다섯 분류

 

그림4 호펜의 다섯 분류

 

 

H. J. 호펜은 FAO(유엔 식량농업기구)에서발행한 책에서 쟁기의 골격구조를 기준으로 다섯 분류를 제시했습니다. 별로 알려져 있지 않기에 <그림4>에서 소개해보겠습니다.

(A) 성에 쟁기는 소를 향해 쭉 뻗은 성에(beam)가 기본 골격=본체가 되고, 거기에 쟁기날을 붙인 쟁기술이 끼워진 쟁기.

(B) 술 쟁기는 쟁기날을 붙인 쟁기술(body)가 본체가 되고, 거기에 성에가 끼워진 쟁기.

(C) 바닥 쟁기는 쟁기바닥(sole)이 본체가 되고, 성에와 쟁기날이 붙은 쟁기술이 따로따로 끼워진 쟁기. 바닥은 신발바닥의 sole과 동어로 일본에서는 쟁기바닥이라 부르는데, '바닥(床)'은 원래 사각의 침상을 가리키는 한자이기에 '쟁기바닥'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농학에서도 쟁기바닥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 형태는 인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중해 지역 등에서 쓰여 왔던 겨리쟁기입니다.

(D) 사각틀 쟁기는 성에, 쟁기바닥, 한마루, 자부지라는 네 부재가 사각틀을 구성하는 쟁기.

(E) 삼각틀 쟁기는 한마루와 쟁기자루가 교차하여 삼각틀을 만드는 유형으로, 모두 중국에서 발생한 호리쟁기입니다. 다만 삼각틀 쟁기는 동아시아에서는 F에 나오는 역삼각틀을 갖춘 조선반도의 삼각틀바닥없는 쟁기(三角枠無床犁)가 주류로 E 유형은 소수파입니다.

일본에서는 조선반도에서 F의 삼각틀 쟁기를 5세기 후반 이후에 도래인이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또한 타이카大化 개신改新 정부는 견당사遣唐使에게서 D의 사각틀 쟁기를 손에 넣어 전국에 모형을 배포해 재래 쟁기가 되었습니다.  

 

 

 

4. 유전자의 발견

일본의 농기구가 각지에서 모양이 다른 건 예전부터 알려져 있어, 대대로 농민들이 그 토지의 지형이나 토질에 맞추어 개량한 결과 다양한 형태로 부화했다는 "지형, 토질 결정론"이 믿어져 왔습니다. 쟁기의 기원에 대해서도 농학자들은 "도구는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다"는 생각에 바탕하여 <그림 5A> <그림 5B>와 같이 일본 국내의 발달계통도가 몇 가지 만들어졌습니다. 다만 이들은 현지조사를 행하지 않고 그린 계통도로서 근거가 희박하고, 거의 상상의 산물입니다.

그림5 농학자에 의한 쟁기의 일본 국내 발달계통도

 

그런데 쟁기는 "카라스키からすき"라는 호칭으로 보아도 일본의 발명이 아니라 카라(당나라, 한국), 즉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이며, 일본 국내에서 간단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각지의 재래 쟁기를 조사해 보면, <그림6>에서 보는 것처럼 후쿠오카현의 안아 쥐고 조종하는 쟁기(抱持立犁)는 조선계의 삼각틀바닥없는 쟁기, 간사이 지방의 굽은술긴바닥 쟁기는 중국계의 사각틀긴바닥 쟁기로, 전래의 계보에 의하여 각지의 재래 쟁기의 모양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림6 후쿠오카현 쟁기는 조선계, 나라현 쟁기는 중국계

  

 

전통적인 농촌사회에서 농기구는 파손되는 것과 똑같은 형태로 복사됩니다. 가령 쟁기의 내용년수를 20년이라 한다면 100년에 5번, 1000년에 50번 갱신되는데, 똑같은 형태로 복사된 결과 개체는 교체되어도 형태는 1000년을 넘어서 계승되기 때문에, 그 땅에 조선계 도래인이 와 있었는지 어떤지 등을 알 수 있습니다. 민간의 도구에도 유전자가 있던 것입니다. <고사기> <일본서기>에는 지방 서민의 사정은 써 있지 않지만, 재래 쟁기의 전국 조사를 하면 발굴하지 않아도 시정촌들의 고대사가 복원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민간의 도구를 통한 역사학"이라 명명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5. 민간의 도구 조사에서 본 쟁기의 일본 전래

민간 도구의 조사로부터 일본으로 쟁기가 전래된 것을 알아봤습니다. <그림7>을 보러 가지요.

 

삼각틀 쟁기는 도래인이 가지고 옴 ; 조선반도에서 온 도래인은 4세기 말-5세기 초의 제1기, 5세기 후바부터 6세기에 걸쳐 제2기, 7세기 후반의 제3기로 분류되는데, 조선반도 남부의 호리쟁기의 성립이 늦었기 때문에 소와 쟁기를 가지고 온 것은 제2기 이후의 도래인이라 생각됩니다.

타이카大化 개신 정부가 중국계 긴바닥 쟁기를 도입함 ; 중국계 긴바닥쟁기는 큐슈부터 간토우까지 확인할 수 있고, <와묘루이쥬쇼和名類聚抄>에 인용된 8세기 초두의 "양씨楊氏 한어초漢語抄"라는 고사서에는 쟁기바닥의 기술이 있기에 7세기에는 전해졌단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는 아직 중국과 일본 사이의 민간 교류가 없어 견수사, 견당사의 외교 시대이기에 정부에 의한 기술 도입이라 생각됩니다. 일본의 긴바닥쟁기는 쟁기들의 형태로 보아 강남계이고, 7세기 후반에 강남 지방에 갔던 견당사는 661년 하카다에 되돌아왔던 제4차 견당사뿐이라 이때 중국계 긴바닥쟁기를 가지고 돌아와 그것을 기본으로 다이카 개신 정부는 500대 정도의 정부 모델 쟁기를 만들어 각지의 코오리노카미評督(이후의 군지郡司)에게 보내 복제하게 하여 보급을 시도했다고 생각됩니다.

혼혈형 쟁기의 탄생 ; 이미 쟁기를 사용하고 있던 마을에서는 중국계 긴바닥쟁기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왔기에 손에 익은 조선계 쟁기와의 혼혈이 일어납니다. 조선-중국 혼혈형 쟁기는 각지에서 검출되고 있습니다. 

조선계 그대로인 난민 쟁기 ; 663년의 백제 멸망, 669년의 고구려 멸망 시기에는 많은 난민이 일본으로 왔습니다. 정부의 모델 쟁기 배부는 이미 끝났기 때문에, 난민들이 제작한 쟁기는 혼혈형이 되지 않고 조선계 그대로입니다. 난민의 쟁기는 키타큐슈나 시가현滋賀県, 야마나시현山梨県에서 검출되고 있습니다. 

7세기 후반에 성립된 다양한 쟁기는 망가져도 동일한 형태로 갱신되어 민간 도구에까지 계승되었습니다. 

 

그림7 민간 도구의 조사를 바탕으로 한 쟁기의 전래 연표

 

 

6. 쟁기 농학자의 3분법과 지역사를 읽고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3분법

일본의 농학에서는 메이지 이래 <그림8A>처럼 쟁기바닥의 유무, 장단에 의하여 "바닥없는쟁기(無床犁)" "짧은바닥쟁기(短床犁)" "긴바닥쟁기(長床犁)"라는 3분법이 널리 쓰여 왔습니다. 안아 쥐고 조종하는 쟁기로 대표되는 바닥없는쟁기는 안정성이 나쁘고 다루기 어렵지만 깊이갈이가 가능한 데 반해, 긴바닥쟁기는 안정성은 좋지만 얕이갈이밖에 할 수 없는 단점을 가짐. 이 양자의 장단을 취합한 것이 근대 짧은바닥 쟁기라는 분류입니다. 이 분류법에서는 깊이갈이가 가능한지 어떤지를 결정짓는 것은 소와 말의 견인력이라는 중요한 점이 누락되어 있는데, 농업의 생산력 향상에서 근대 일본을 뒷받침했던 농학계의 불타는 의욕을 반영한 분류법으로 이제는 문화재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쟁기는 1950년대 중엽부터 경운기로 교체가 진행되어, 지금은 박물관이나 자료관의 수장고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들 제1선을 은퇴한 도구류는 '민간 도구'라 부르고 있으며, 민간 도구가 된 쟁기의 역할은 토지를 경운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를 후세에게 전하는 이야기꾼으로 보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쟁기의 역할이 지역 역사의 이야기꾼이라면 그것에 상응하는 분류법이 있을 터입니다. 그리 생각해 제기한 것이 <그림8B>에 나오는 '조선계 삼각틀 쟁기' '중국계 사각틀 쟁기' '조선, 중국 혼혈형 쟁기'라는 "새로운 3분법"입니다. 이들은 6-7세기 역사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이기에 재래 쟁기의 형태를 알 수 있다면 그 지역의 6-7세기 역사를 복원할 수 있고, 다음과 같은 "쟁기 형태로부터 지역 고대사를 복원하는 공식"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조선계 삼각틀 쟁기가 사용되고 있던 지역 ...... 백제, 고구려 난민이 건너와 개척한 땅과 그 주변

중국계 사각틀 쟁기가 사용되고 있던 지역 ...... 정권을 지지하는 지역 또는 도래인이 오지 않았던 지역

한중 혼혈형 쟁기가 사용되고 있던 지역 ...... 5-6세기 제2기 도래인이 건너와 개척한 땅과 그 주변

 

그림8 쟁기의 3분법

 

다음 장에서는 이 공식을 단서로 도쿄 농업대학이 수집한 쟁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 도쿄 농업대학이 수집한 쟁기

도쿄 농업대학의 민간 도구는 이른 시기에 전국 규모로 수집했기 때문에 좋은 자료가 모여 있습니다. 그 뒤 시정촌 합병이 진행되었는데, 수집지를 세밀하게 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옛 시정촌으로 표기하겠습니다.

 

●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중국계 사각틀 쟁기

 <그림9>에 게재된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쟁기는 성에, 한마루, 자부지, 쟁기바닥의 4부재로 구성된 사각틀긴바닥 쟁기로 E의 강남 쟁기가 모델입니다. 강남 쟁기의 특징인 무지개 같이 구부러진 굽은성에는 F그림처럼 소의 목과 쟁기 끝을 연결한 힘의 작용선까지 견인점을 낮추어 안정된 자세로 주행할 수 있도록 한 고안입니다. 

나라현 쟁기의 성에, 손잡이의 교점에 4개의 쐐기가 겹쳐 보이는 건 D그림의 경운 깊이의 조절장치로, 현상에서 4개의 쐐기는 성에의 윗쪽에 박아 넣기 떄문에 성에 끝쪽의 견인점은 올라가 소가 끌게 하면 쟁기 끝은 내려가서 깊이갈이하는 경향이 되고, 그 반대로 쐐기를 아랫쪽에 박아 바꾸면 얕이갈이하는 경향이 되는 이치입니다.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쟁기에서 서로 다른 것이 손잡이의 모양. 나라현 쟁기는 T자형 손잡이로 타카이 개신 정부가 보급한 키나이畿内의 정부 모델 쟁기의 충실한 복제로서, 정권 측근의 정권 지지율이 높았던 걸 반영합니다. 교토 쟁기의 손잡이가 위로 늘어난 것은 조선계 삼각틀 쟁기의 자부지를 모방한 것. 아마 이 주변에는 도래인이 와 있어서 삼각틀바닥없는쟁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손에 익은 조선계 손잡이를 남긴 것으로, 중국계 90%, 조선계 10%의 혼혈형입니다. 와가야마현 쟁기는 별도의 자재로 손잡이를 붙였는데, 이것도 자부지의 뒤에서 잡는 방식이 남아 있는 것으로 중국계 90%, 조선계 10%의 혼혈형입니다.

90%가 중국계, 즉 정부 모델 쟁기 계통이란 것은 정권 지지율이 높다는 반영으로, 탄바丹波도 키이紀伊도 키나이 주변 지역으로 7세기 아스카飛鳥 정권의 지지자들이 있었던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9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중국계 사각틀 쟁기

 

 

● 가고시마현 도쿠노시마徳之島의 사각틀긴바닥쟁기

<그림10A>은 가고시마현 도쿠노시마의 쟁기로, 사탕수수밭의 사이갈이 김매기용으로 1950년 무렵까지 사용되던 것. 전장 131cm의 작은 것으로, 위의 나라현 쟁기의 전장은 281.5cm와 비교해 절반 이하로 작습니다. 이 유형의 쟁기는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부터 오키나와沖縄 본섬, 사키시마先島 제도까지 널리 쓰였으며 "남쪽 섬(南島) 쟁기"라고 불렸습니다. 그럼 이 쟁기는 어떤 사정으로 생겼던 것일까?

남도 쟁기는 성에, 한마루, 자부지, 쟁기바닥의 네 부재로 구성된 사각틀 쟁기로서, 이것은 중국계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남도의 사람들이 중국에 나갔다면 보았을 쟁기가 <그림10B>의 강남 쟁기로 똑같은 쟁기가 가고시마현의 일부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남도 쟁기와는 상당히 형태가 다릅니다. 중국 쟁기는 무지개 같이 구부러진 성에를 가지고 있는데 남도 쟁기는 비스듬히 상향한 곧은성에입니다. 상향한 곧은성에는 C그림처럼 소의 멍에를 겨냥한 각도로, 남도 쟁기의 제작자는 중국 쟁기의 실물 견본이 수중에 없이 막연한 이미지에 바탕해 재현 제작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상향한 곧은쟁기를 소에게 끌게 하면 C그림 같이 쟁기 몸체는 앞으로 젖혀지게 되고,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자부지를 앞으로 당겨야 하며, 그에 적응한 자부지가 ②의 앞으로 기운 자부지입니다. B그림의 강남 쟁기에서는 흙덩이를 오른쪽으로 넘기는 볏이 달려 있는데, 남도 쟁기에는 볏이 없습니다. 

⑥은 펜촉형 보습으로 중국 쟁기는 주물의 껍질이 붙은 삼각판이지만, 남도 쟁기는 단조품으로 모양도 다릅니다. 쟁기 제작제가 중국 보습의 견본을 보지 않고 대장간에서 두드렸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남도에서는 소가 먼저 부려졌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는 소로 논밭을 갈고 있으니 이것에 쟁기를 끌게 하자"라고 생각해, 어슴푸레한 기억에 기반하여 재현 제작한 쟁기가 이 남도 쟁기로서, 그것이 아마미오시마부터 오키나와 본섬과 사키시마 제도까지 퍼졌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림10 가고시마 도쿠노지마의 사각틀 쟁기

 

 

카가와현香川県의 외다리바닥있는쟁기

<그림11A>는 카가와현 미토요군三豊郡 오노하라쵸大野原町(현 칸논지시観音寺市)에서 사용되던 쟁기로 호칭은 소괭이. 이 쟁기는 윗부분은 성에, 자부지, 한마루의 삼각틀로서 조선계 삼각틀 쟁기 그것입니다. 그런데 아랫부분에는 길이 93.7cm의 완전한 쟁기바닥이 붙어 있어, 이 쟁기바닥은 중국계 사각틀 쟁기의 기본적인 부품입니다. 즉 오노하라 쟁기는 C그림에서 보듯이 조선계 삼각틀 쟁기의 구조에 중국계 쟁기바닥을 붙여준 전형적인 혼혈형입니다. 중국계 사각틀 쟁기는 한마루와 자부지가 쟁기바닥과 접합되어 사각틀을 구성하고 있는데 반하여, 이 외다리바닥있는 쟁기가 가진 정보로부터 카가와현의 6-7세기 역사를 복원해 보겠습니다. 

5세기 말부터 6세기 무렵, 카가와현의 평야부에 조선반도에서 온 도래인이 정착했습니다. 야마토 정권 아래 조선반도로 출병했던 현지 호족들이 초빙한 것이겠죠. 그들은 소와 삼각틀바닥없는 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미 말로 말괭이를 끌게 하던 현지 사람들은 처음 본 쟁기를 '소괭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난 7세기 후반, 타이카 개신 정부는 반전수수班田収授를 실행하기 위하여 관련 정책으로 중국계 사각틀 쟁기의 실물 모형=정부 모델 쟁기를 각지의 코오리노카미(이후의 군지)에게 보내 보급을 명했습니다. 정부 모델의 긴 쟁기바닥은 보기에도 안정감이 좋을 듯하여, 사람들은 손에 익은 삼각틀바닥없는 쟁기에 쟁기바닥을 붙였다. 혼혈형 외다리바닥있는 쟁기의 탄생입니다. 평야부의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헤이안 시대 무렵, 분가해 이주함에 따라 산간부의 개척이 왕성해졌습니다. 도쿠시마현, 에히메현과 접한 산간의 오노하라 마을에는 이 시기에 가지고 들어온 것이겠지요.

B그림의 코토히라쵸琴平町 쟁기도 같은 형태의 외다리바닥있는 쟁기로, 이쪽은 한마루가 철제 볼트인 개량형입니다.

 

그림11 카가와현 외다리바닥있는쟁기

   

 

사이타마현埼玉県과 도치키현今市市의 널판지 볏 부착 삼각틀 쟁기

<그림12A>의 사이타마현 가조시加須市의 쟁기는 전장 281cm인 장대한 몸체로, 구조를 보면 조선계 삼각틀이지만 쟁기날의 뒷면 부근은 길이 54cm의 쟁기바닥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조선계 삼각틀 쟁기에 쟁기바닥을 더한 혼혈형입니다. 또한 경운되는 흙덩이를 왼쪽으로 뒤집는 널판지 볏이 붙어 있는데, 이 목제 볏도 정부 모델 쟁기인 일목一木 볏의 각색으로 조선계 70%, 중국계 30%의 혼혈형입니다.

 

가조시 쟁기는 삼각틀 쟁기로 조선계이지만, 쟁기 몸체는 장대하며 그 원인을 D그림으로 보러 가겠습니다. 조선반도의 삼각틀바닥없는쟁기는 자부지가 서 있어 보습은 급한 각도로 지면에 닿아 있습니다. 이 조선반도 쟁기의 보습은 주조품으로 뒷면은 껍질로 되어 있어, 나무 부분인 자부지를 꽂아 쐐기로 고정하기 때문에 급한 각도로 지면에 닿아도 경운할 수 있습니다. 자부지가 서 있기에 쟁기 몸체는 짧은 쟁기가 됩니다. 짧은몸체 쟁기에 익숙한 도래인은 일본에 와서 보니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주조 보습이 없고, 단조 보습만 손에 넣을 수 없어서 당황했습니다. 단조 보습은 목요공 괭이처럼 나무 부분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끼워넣기 때문에 급한 각도로 지면에 닿으면 떨어져나갑니다. 그래서 얕은 각도로 지면에 닿도록 한 결과, 쟁기 몸체가 길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긴몸체삼각틀 쟁기는 조선반도에는 없는 모양으로, 도래 제1세대의 노고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림12B>의 도치키현 이마이치시今市市의 쟁기는 조선계 삼각틀 쟁기로 쟁기 몸체는 그리 길지 않지만 몸체가 누워 보습은 얕은 각도로 지면에 닿아 있으며, 도래 당시의 단조 보습에 맞춘 것입니다. 

A의 가조시 쟁기도 B의 이마이치시 쟁기도 현재는 C그림처럼 주조 보습이 붙어 있습니다. 이거슨 14-15세기 무렵에 주조꾼이 농촌을 영업하며 돌아다녀 주조 보습으로 교체된 것으로, 단조 보습의 모양이 남아서 큰 표지가 되었습니다. 중국과 조선반도의 주조 보습에는 큰 목덜미 선이 없습니다.  

 

그림12 사이타마현과 도치키현의 삼각틀바닥있는쟁기

 

 

 

군마현群馬県 다카사키시高崎市의 카이형甲斐型 쟁기

<그림13>의 AB 모두 다카사키시 카미나미에上並榎의 쟁기이고, 어느쪽이든 조선계 삼각틀 쟁기로 정부 모델인 사각틀긴바닥쟁기의 영향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회성인 정부 모델 쟁기의 배포가 끝난 뒤에 도래했기 때문이라 생각되며, 마지막 도래의 파도인 백제, 고구려 멸망에 따라 난민이 가지고 들어왔다고 생각됩니다.

다카사키시의 쟁기는 2대 모두 큼직하고, 키타큐슈의 안아 쥐고 서는 쟁기의 자부지 높이가 100cm 안팎인데 반하여 A쟁기의 자부지 높이는 128cm로 이상한 크기입니다. 사실 이것과 흡사한 쟁기가 C그림처럼 야마나시현에서 많이 보입니다. 유사점은 ①순수 조선계 삼각틀 쟁기이고, ②자부지의 높이가 120-130cm에 이른다는 점, ③성에와 자부지의 교차점의 약간 아래에 짧은 좌우 손잡이가 있는 점, ④자부지의 하부는 귀이개 모양 보습인 점 등으로부터 다카사키 쟁기 AB는 카이국에서 온 이주민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마나시현에서 이 큼직한 삼각틀 쟁기는 '부부 쟁기'라 부르며, 아내가 소 대신 어깨끈으로 끌고 남편은 자부지를 감싸안듯이 어깨에 걸치고 좌우 손잡이를 쥐고서 쟁기를 조종하면서 앞으로 기운 자세로 넘어질듯이 쟁기를 밀며 쟁기질했습니다. 남편이 자부지를 감싸안기 때문에 자부지는 길고 높아졌습니다. 이로부터 카이국에서의 개척은 당초 소와 말을 구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말로도 끌게 했지만, 큰 쟁기 몸체는 그대로 20세기까지 계승되었습니다. 

야마나시현에 분포된 중심은 남알프스 산록으로 고마군巨麻郡(고려군高麗郡)이라 불렀던 지역입니다. 고대에 고려라고 하면 고구려로서, 고구려 난민이 소와 말을 구하지 못한 와중에 개발한 것이 야마나시현의 큼직한 부부 쟁기입니다. 전국시대에 반농반무半農半武의 지방 토착 무사는 무장을 따라서 각지를 옮겨다니며 싸웠습니다. 다카사키시의 카이형 쟁기는 그러한 전국시대 무사가 이동한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그림13 군마현 다카사키시의 카이형 쟁기

 

 

키타큐슈의 안아 쥐고 서는 쟁기와 그 전파

<그림14>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라 부르는 키타큐슈계의 쟁기이고, <그림13>의 카이형 쟁기와 똑같이 조선계 삼각틀 쟁기로 정부 모델인 사각형긴바닥쟁기의 영향은 전혀 볼 수 없는,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에 따라 난민이 가지고 왔다고 생각됩니다. A는 나가사키현의 쓰시마에서 사용되던 재래 쟁기로 작은 조선계 삼각틀 쟁기입니다. 이 삼각틀바닥없는쟁기는 후쿠오카 평야에도 널리 분포하고 있어 '안아 쥐고 서는 쟁기'라 불러 왔습니다. 지리적 위치로 미루어보면, 663년에 멸망한 백제의 난민이 가지고 왔다고 생각됩니다.

메이지 초기의 일본에서 소와 말 쟁기질의 보급율은 서고동저로, 도호쿠 지방에서는 소와 말 쟁기질을 행하지 않고 츄우부中部와 칸토우関東 지방에서도 소와 말 쟁기질의 보급율은 낮았으며, 또 쟁기를 쓰지 않는 습논도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후쿠오카현 독농가 하나시온리林遠里는 현지에서 사용해 왔던 안아 쥐고 서는 쟁기가 깊이갈이에 뛰어나다는 점 때문에 이를 보급해 근대 일본을 지탱하고자 사설 칸노우샤(勸農社)를 결성, 젊은이를 모아 말 쟁기질 교사를 육성하고 '마른논 말 쟁기질'이란 구호 아래 말 쟁기질 교사를 전구으로 파견해 쟁기질의 보급에 힘썼습니다. 안아 쥐고 서는 쟁기는 쟁기질이 없던 도호쿠 지방이나 보급율이 낮았던 츄우부와 칸토우 지방에서 환영받아 소와 말 쟁기질이 침투해 나아갔습니다. 

도쿄 농업대학에서는 이 시기에 동일본에 퍼졌던 안아 쥐고 서는 쟁기가 수집되어 있습니다. B는 아키타현 유리군由利郡의 것, C는 이바라키현茨城県 미토시水戸市, D는 니이가타현新潟県 사도군佐渡郡의 것입니다. 근대 일본을 짊어지고 각지로 향한 말 쟁기질 교사의 활동 흔적을 수집된 쟁기로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것이 도쿄 농대 수집품의 훌륭한 점입니다. 

D의 배경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안아 쥐고 서는 쟁기에는 긴 수평 막대가 좌우로 튀어나와 있고, 좌우의 손을 바꿔 쥐며 흙덩이를 좌우로 뒤집었습니다. 안아 쥐고 서는 쟁기는 미흡하지만 양손용 쟁기였습니다. 또한 안아 쥐고 서는 쟁기는 바닥없는쟁기의 대표처럼 이야기되지만, 짧은바닥 쟁기 유형도 있었던 점을 수집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림14 키타큐슈의 안아 쥐고 서는 쟁기와 그 전파

 

 

 

근대 짧은바닥쟁기

<그림15>에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를 대신해 근대 쟁기질의 주역이 된 근대 짧은바닥쟁기를 모아 보겠습니다. 큐슈에서는 고대 이래 바닥없이 안아 쥐고 서는 쟁기 외에 짧은바닥 쟁기 유형의 쟁기도 사용되어 왔습니다. 1900년 쿠마모토현 오쓰 스에지로大津末次郎가 짧은바닥 쟁기 유형의 재래 쟁기를 기반으로 D그림 같이 한마루를 철제 볼트로 만들고 나사를 조여 깊이갈이와 얕이갈이의 조절이 가능하도록 하며, 성에와 자부지의 접합부는 철제 접합부로 만들어 나사로 쟁기질 너비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한 근대 짧은바닥 쟁기를 개발, 특허를 받았습니다. 

볼트 한마루의 나사를 조이면 성에 끝의 봇줄걸이가 내려가고, 소와 말이 끌면 성에의 끝은 끌어올려져 그와 연동해 보습이 올라가 얕이갈이하게 된다. 그 반대로 나사를 풀면 깊이갈이하게 됩니다. 철제 접합부의 나사를 움직여 성에의 근원을 중심위치로부터 벗어나게 하면, 성에의 끝이 좌우로 틀어지기 때문에 소와 말이 끌면 보습은 약간 좌우로 벗어나게 되어 쟁기질 너비가 넓어집니다. 

오쓰의 특허는 A유형의 왼쪽 뒤집기 전용 고정형 쟁기였는데, 이듬해에는 나가노현의 마츠야마 하라조松山原造가 지렛대를 움직여 좌우 어느쪽으로도 뒤집을 수 있는 B와 같은 전환형 쟁기의 특허를 받았습니다. 근대 짧은바닥쟁기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를 대신하는 근대 쟁기가 되어, 다이쇼大正와 쇼와昭和 시기에 서서히 안아 쥐고 서는 쟁기나 재래 쟁기를 대신해 나아갔습니다. 

E의 사진에서 보면, 고정형 쟁기에서는 쟁기꾼이 왼손으로 자부지 상단을 쥐고 오른손으로 비스듬한 손잡이를 아래에서 잡고 들어올리는 듯이 하여 쟁기 몸체를 왼쪽으로 기울이면서 주행해 흙덩이를 왼쪽으로 뒤집어 나아갑니다. 전환형 쟁기에서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로부터 계승한 수평 손잡이가 있어 쟁기꾼은 지렛대로 볏을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자부지 상단과 수평 손잡이를 쥐고서 자부지를 기울여 좌우 어느쪽으로도 뒤집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C는 깊이갈이를 목표로 한 3단 갈이 쟁기. 일반적으로는 2단 갈이 쟁기이지만 이것은 3단으로, 근대 짧은바닥 쟁기의 궁극적인 형태입니다. 

 

그림15 근대 짧은바닥쟁기

 

 

● 개량 재래 쟁기

메이지 말기에 개발되어 다이쇼, 쇼와 시기에 보급된 근대 짧은바닥 쟁기는 재래 쟁기에 비해 작고 회전 반경이 작으며 다소 경운 깊이가 깊어지는 이점이 있는 반면, 안정성에서는 재래 쟁기 특히 사각틀긴바닥쟁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맥류의 두둑짓기도 재래 긴바닥쟁기처럼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없었습니다. 학계에서는 근대 짧은바닥쟁기의 등장으로 재래 쟁기가 일제히 모습을 감추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경운기가 출현할 때까지 근대 짧은바닥쟁기와 재래 쟁기를 구별해 사용하던 지역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재래 쟁기에는 근대 짧은바닥쟁기에 없는 장점도 있었기에, 근대 짧은바닥쟁기의 장단을 취하는 형태로 개량된 개량 재래 쟁기가 각지에서 제작되었습니다.

<그림16>의 A는 도야마현에서 제작된 미치즈카三塚 쟁기로, 보습을 앞뒤 반대로 장착하여 볏으로 만든 건 안아 쥐고 서는 쟁기의 아이디어입니다. B는 후쿠이현에서 사용되던 쟁기로, 성에를 굽은성에로 바꾸기만 한 미치즈카 쟁기의 모방 쟁기. 평판이 좋았던 미치즈카 쟁기의 복제 쟁기입니다.

D그림에서는 고삐걸이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호쿠리쿠北陸 지방은 말쟁기 지대로 에도시대부터 말에게 재갈을 물리고 2개의 고삐로 조종했습니다. 고삐가 늘어지면 말의 다리에 걸려 위험하기에 한마루를 꿰는 나무못을 직사각형 널의 고삐걸이로 삼고, 왼쪽 고삐는 구멍을 통과시키고 오른쪽 고삐는 벗어나는 걸 방지하는 갈고리가 달린 가로대로 받치고 있었는데, 귀여운 물고기 모양도 나타났습니다. 물고기 모양은 이로리囲炉裏의 냄비 갈고리에 자주 사용되는 디자인으로, B의 후쿠이 쟁기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C는 다카사키의 개량 재래 쟁기로 수수한 쟁기이지만 판자 볏으로 바꾸어 철제 곡면의 볏을 일으켜세운 점과 2.5m를 넘었던 재래 쟁기의 전장을 1.7m 안파의 크기로 줄인 점이 개량점이겠지요.

이외에도 효고현兵庫県 이타미시伊丹市에는 재래 긴바닥쟁기에 철제 접합부를 붙인 개량 긴바닥쟁기가 있고, 시가현 고토湖東의 좀 작은 가을갈이 쟁기 등 각지에서 개량 쟁기가 제작되어 현지의 경제를 뒷받침했습니다. 

 

그림16 개량 재래 쟁기

 

 

 

8. 민간 도구는 역사자료

지금까지 재래 쟁기와 근대 짧은바닥쟁기, 개량 재래 쟁기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도쿄 농업대학 수집자료의 훌륭함은 전국 각지의 쟁기를 모은 것이기에 도쿄 농업대학 자료만으로도 고대부터 근대까지 일본 각지의 쟁기질 역사, 농업기술사, 나아가서는 지역 고대사나 전국시대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재래 쟁기로부터 지역마다의 개성 있는 고대사를 복원할 수 있었던 건 "민간 도구를 통한 역사학"입니다. 지금까지 일본의 농기구가 각지에서 모양이 다른 건 그 토지의 지형이나 토질에 맞추어 개량을 거듭한 결과라는 "지형, 토질 결정론"이 믿어져 왔습니다. 그것이 실수라는 걸 깨달은 각지의 자료관 수장고를 조사해 역학적으로 불합리한 쟁기를 개량하지도 않고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보고나서입니다. 왜 개량하지 않은 걸까, 그것은 전통적 농촌사회에서는 농기구가 망가지면 동일한 모양으로 갱신한다는 원리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민간 도구 유전자의 발견으로 이어졌습니다.

전국적인 재래 쟁기 조사로부터 타이카 개신 정부의 긴바닥쟁기 도입 정책을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타이카 개신 정부는 견당사에게 입수한 쟁기를 바탕으로 중국계 사각틀 정부 모델 쟁기를 만들어 각지의 코오리노카미(이후의 군지)에게 보내서 보급을 도모했습니다. 그 때문에 쟁기질의 처녀지에서는 정부 모델 쟁기가 계승되어 도래인이 조선계 삼각틀 쟁기를 쓰고 있던 지역에서는 혼혈형이 탄생하고, 정책 시행 뒤에 도래한 백제와 고구려 난민이 정착한 곳에서는 정부 모델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조선계 삼각틀 쟁기가 그대로 남았습니다. 민간 도구는 지금까지 유형민속문화재로 취급되어 조부모 시대의 삶을 전하는 민속자료로 여겨져 왔는데, "민간 도구를 통한 역사학"에서 재래 쟁기의 형태로부터 시정촌별 개성 있는 고대사가 복원될 수 있었습니다. 민간 도구는 역사자료입니다. 지역 유산으로서 모두의 손으로 지켜 나아갑시다. 

 

 

 

코우노 미치아키河野通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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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가 확 불을 질렀다는 그 절. 

교토이 건설과 함께 자리잡아 일본의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맺어 왔다는 그 절.

일본의 내로라하는 유명한 승려를 배출했다는 그 절.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그 절. 

 

엔라쿠지에 가는 방법의 하나. 에이잔 전철을 이용한다.

 

데마치야나기 역에서 전철을 타고 가면 된다. 참고로, 이 노선을 이용하면 구라마데라까지도 갈 수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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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세강 인근이 인기라고 한다.

그 기원은 개인 사업가가 판 운하라고 하는데... 대단하다.

아무튼 이 주변에 좋은 카페도 많고 운치도 좋다고. 벚꽃이 20일 정도부터 개화해 4월 초에 만개한다니 꼭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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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삶이 얼마나 피곤한지 살짝 맛본 나로서는 엄청 공감되더라는.

영화에 나오는 탈북민들은 도대체 얼마나 힘든 길을 걷고 있을지, 그리고 과거 일제의 침략으로 고향을 등졌던 조선 동포들은 어땠을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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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에 출국 확인도장이 없다며 사람을 불법체류자로 의심하며 아동수당 못 준다고 그러더니...

도교 재류관리청에 우편으로 직접 출입국기록 서류를 신청해 받아서 제출하니, 다른 담당자가 그제서야 의심을 풀면서도 그럼 작년 10월에 무얼하러 온 거냐고 재차 묻더라.

관광이라 답하니 관광이요? 하던 얼굴.

아무튼 우리는 제대로 대응했고 결국 승리했다. 지난 1월분 아동수당부터 지급한다는 통지가 왔구만.

처음 국민의 세금 외국인 운운하던 그놈의 얼굴을 봐야 하는데.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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