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농민의 통제
(1) 토지와 농민의 결합
농민의 도망과 막부의 대응
검지는 토지를 측량해 공조의 기초를 정하는 이외에, 농민을 그 토지에 결부시킬 목젹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앞에서 기술했다. 토지와 농민이 결부되어야 비로소 생산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농민이 그 경지를 버리고 가는 일은 허락되지 않고, 만약 도망가면 다시 끌어오고, 돌아오지 않으면 대체 백성(跡百姓)을 양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전국 말기, 전란 때문에 경지를 버리고 가재를 버리고서 유랑하던 농민을 다시 끌어오는, 이른바 환주책還住策이 강구되었다. 퇴전退転 백성이 환주했을 때에는 차전차미借銭借米를 면제하든지, 쌀을 빌려주든지 하는 혜택을 주어 이것을 권장했다. 호우죠우北条 씨의 경우는 결락자欠落者의 행방을 조사해 그 소환을 명하거나 했다. 그 한편으로는 당연, 농민의 이동을 금지해야 한다. 다테伊達 씨는 이미 텐분天文 연간 백성이 타령으로 이동하는 걸 금지하고 그러한 예는 수많은데,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백개조百箇条에서는 하시리모노走り者(도망자)는 본인은 물론 친척까지 처분하고, 밀고자에게는 포상을 준다고 했다.
에도 막부에서는 케이쵸우慶長 8년(1603)에, 막부령 및 사령의 백성이 그 다이칸이나 영주에게 비분非分이 있기 때문에 장소를 떠났을 때에는, 설령 그 주인에게서 신고가 있더라도 함부로 환부해서는 안 된다. 연공미의 미납 등이 있으면, 이웃 향의 부과율을 가지고 부교우소에서 서로의 출납을 감정시킨다고 하며, 영주 측에 비분이 있을 때는 그 떠남을 승인했다.
그런데 칸에이寛永 20년(1643) 막부의 「토착 주민 처벌 각서(土民仕置覚)」에서는 백성이 연공에 관한 소송 때문에 거처를 비우거나, 도망하거나 한 자의 숙박을 시키는 걸 금지하는 한편으로는, 지토우地頭와 다이칸代官의 처벌이 나빠 백성이 감내할 수 없을 때는 연공을 완납하고 이주하도록 하고, 미납이 없으면 지토우와 다이칸도 방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연공 완납을 할 수 있도록 하면, 농민이 도망하는 일은 거의 없다. 처벌이 나빠서 감내할 수 없다는 건 연공을 납부하는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집을 버리고 논밭을 버리고서, 아는 사람도 없는 다른 향으로 이주한다는 건 마지못한 일이다. 막부의 명령은 지토우와 다이칸의 악정에 대해 약간의 견제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농민을 구제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막부에서는 영주 측에 도리에 어긋남이 있을 때는 그 이동을 인정한 것이다. 그것이 다이묘 등의 일반 영주의 경우에는 대부분 그 여지가 사라지는 것이 예이다.
여러 번의 대응
케이쵸우 9년(1604)에 요네자와번米沢藩에서는 도망인을 잡은 자에게는 포상을 준다 하고, 같은 연호 20년 카나자와번金沢藩에서는 도주 백성을 숨겨 둔 자는 사형에 처하고 밀고자에게는 금전 1장을 준다고 하며, 같은 연호 15년의 오카자키번岡崎藩의 법령에서는 백성이 도망하면 남은 백성 전부의 처자를 감옥에 가두고 기한을 정해 다시 찾아서 오도록 한다고 했다. 오바마번小浜藩의 쿄우고쿠京極 씨가 발령한 칸에이 5년(1628)의 명령에서도 도주한 백성은 5일 안에 알아낼 것, 늦더라도 논밭은 버려두지 말 것, 버려두더라도 연공과 여러 부역은 부담할 것, 도주한 자의 숙박을 도운 자는 벌금으로 쌀 5섬을 내고, 사안에 따라서는 처형한다. 숙박한 곳의 두 이웃은 쌀 1섬, 그 마을도 쌀 1섬씩 낼 것, 도주한 자의 도구를 맡은 자는 쌀 2섬, 도주한 자를 낸 마을의 백성은 사정에 따라 처분한다고 했다. 쿄우고쿠 씨의 가신 타가多賀 씨가 겐나元和 8년(1622) 와카사국若狭国 미카타군三方郡의 사가키佐柿에서 발령한 각서 안에는 도주한 백성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니 조속히 그 거처로 돌아오도록 하면 2년 동안은 여러 부역을 면제한다고 했다. 도주한 백성을 엄금하는 한편, 그 돌아옴을 장려하고 있는 것이다. 케이쵸우 16년의 오우미近江 아자이군浅井郡의 조원의 연판 청원서(組中連判請書)는 5인조 장부 형식을 갖춘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인데, 그것에는 연판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도망을 한다면 조들이 책임지고 찾아낼 것, 찾아낼 수 없다면 그 자에 못지 않을 정도의 백성을 교체하여 경작과 공역을 명령한다고 했다.
오오가키번大垣藩에서는 토다戸田 씨가 입국했던 칸에이 13년(1636)에 특히 「도주 백성 금지령(走り百姓御法度)」을 내놓는다. 그에 의하면 백성이 한 사람이라도 도주했을 때는 5인조 및 토무라조十村組가 불러올 것, 만약 돌아오지 않는다면 친척과 연고자, 그 마을 및 토무라조가 어디까지든지 찾아오게 한다. 도주한 백성의 논밭은 몰수해 이웃 향의 자에게도 누구에게라도 준다. 도주한 백성은 그 마을로 영원히 다시 불러들이지 않는다. 도주한 백성에게 하룻밤이라도 숙박을 제공한 자는 영지 안은 물론, 막부령과 하타모토旗本의 봉록지라 하더라도 상대에게 통보하고 엄중히 조사한다. 도주한 백성이 본국 또는 타국에 있는 것을 듣는 즉시 고발한다면 포상으로 금전을 주고 그 자의 가재를 준다. 도주한 백성의 가옥은 그 마을 및 토무라조에서 변통하고, 영지 안에서든 다른 영지에서든 유능한 백성을 들여서 남은 논밭을 황폐하지 않도록 정성을 들일 것.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메이레키明暦 3년(1657)에도 반복한다. 이 번에서는 쇼우호우正保 4년(1647)에 도망자의 수색 방식이 충분하지 않다고 하여, 유능한 신규 백성의 집 2~3간 들보에 5~6간의 것을 공사하게 해 백성을 들이는 걸 명하고, 만지 원년(1658)에는 다른 곳에서 온 도주 백성을 숨겨 두었다고 하여 기둥에 묶어 3일 동안 경비소에 놔둔 일이 있다.
센다이번의 죠우오우承応 원년(1652) 8월의 「마을의 온갖 규정(御村方万 御定)」에 의하면 도망 백성의 숙박을 제공한 자로부터 앞서와 같이 벌금 5량을 징수하고, 그 5인조에게는 1인 1량씩, 도망 백성의 5인조에게도 1인 1량씩, 합쳐서 13량 징수한다고 했다. 도망 백성의 5인조인 자가 도망 백성을 다시 데려왔다면, 당사자는 50일 수감을 명한 뒤에 백성이 되게 한다. 수감된 동안 먹을 쌀은 5인조의 자가 부담하고, 앞의 벌금은 돌려준다. 또한 도망 백성이 스스로로 돌아온다면 수감 비용 없이 백성이 되게 하고, 5인조의 자에게서 거둔 벌금은 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나아가 텐나天和 2년(1682) 10월의 「각지 경계의 도망자 처분(所々御境目々落者之御仕置)」에서, 도망인을 잡았을 때의 보상금이나 수고료 등을 상세히 규정한다. 역시 5인조 제도를 농민의 도망 방지에 이용한 것은 전국적이었다.
칸에이 9년(1632) 후쿠이번 이마이즈미우라今泉浦의 5인조 장부에도 5인조 가운데 도망하는 자가 있으면 남은 자가 즉시 찾아내 다시 데려올 것, 만약 돌려놓을 수 없으면 처벌을 분부한다고 했다.
칸에이 19년(1642) 9월의 오카야마번의 법식에서도, 백성이 도망쳐 숨지 않도록 5인조의 연판을 매년 고치고, 그럼에도 도망쳐 숨는다면 친척과 연판한 자가 찾아내며, 도주한 백성이나 죄인의 숙박을 제공하거나 짐을 맡아 주거나 보내거나 한 자가 있으면 전례에 따라 과태미 1섬을 징수하고, 그 마을 백성의 집 1채당 1말씩 징수한다. 도주인·죄인이 남긴 논밭은 황폐하지 않도록 그 출신 마을 5인조의 자가 경작해 연공을 납부하고, 2년 뒤에 앞으로 변하지 않을 백성을 세운다. 그 새 백성을 세우는 비용은 출신 마을 및 분리된 마을에서 낸다. 출신 마을과 분리 마을의 비율은 코오리부교우가 정한다. 도주 백성의 출신 마을에 있는 일가 친척과 5인조의 자는 위의 비용 외에 과태미로 1채당 쌀 1말씩, 그외의 모든 백성은 그 반분씩 낸다.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이처럼 살림이 곤궁해 다른 향으로 도망간 백성, 곧 도주 백성(走り百姓)・도망 백성(逃百姓)・몰락 백성(久落百姓)・도망가 숨은 백성(逐電百姓) 등이라 부르는 자가 5인조나 친척 일가나 마을 사람의 연대 책임에 의해 꼼짝할 수 없도록 예방되어 있는 것이다.
후쿠오카번에서는 몰락인이 되돌아왔을 때는 조속히 군 감옥 또는 구치소에 가두어 두고 한 차례 징계한 뒤에 출옥시키게 되어 있었는데, 몰락은 몰락은 자주 있어서 감옥으로는 통제하기 어렵다고 해서, 쿄우호우享保 16년(1731)에 코오리부교우의 의견을 구한 다음, 몰락인이 되돌아온다면 살림에 상응하는 과태은을 거두고, 잡역 더부살이가 되돌아왔을 때는 1개년 동안 과태 더부살이를 시킨다고 했다. 겐분 원년(1736)에 몰락 백성이 되돌아왔을 때는 살림 형편에 맞춘 과태은을 징수한 다음에 미납에 대한 서약을 하게 했다. 미납 서약은 앞의 미납분을 떠맡도록 한다는 것인 듯하다. 또한 잡역일 경우는 이듬해 1년 동안 반감된 급미를 주며 주인에게 더부살이시킨다. 저당 잡역은 원 계약 외에 1년 동안 반감된 급미로 주인에게 더부살이시키도록 했다.
더부살이 출가 벌이·타지 나가기 금지
농민을 토지에 결부시키기 위해서는 몰락 백성을 방지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더부살이 출가 벌이에 나가는 일도 금지했다. 나고야번에서는 칸에이 2년(1625)에 타국으로 소년이 신발 하인으로 나가는 일을 금지하고, 동시에 10년 전인 겐나 2년(1616) 이후 타국으로 나간 소년·백성을 불러오며, 숨겨 둔 자가 있으면 고발인에게는 황금 2장을 주고 큐우닌給人・다이칸代官에게서는 과태료 은 3장을 내게 하며, 현지의 쇼우야는 죄의 경중에 따라서 또는 사형 또는 수감에 처하고, 마을의 모든 백성에게서는 1인당 100문씩을 거두기로 했다. 칸에이 14년에는 백성이 날품팔이 출가 벌이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17년에는 나아가 타국 더부살이 출가 벌이에 대한 엄중한 조목을 제정한다. 그에 의하면, 몰래 더부살이를 타국으로 내보낸 자가 있으면 고발인에게는 포상으로 은 30장을 주었다. 보증인은 사형, 본인은 50일의 수감, 쇼우야는 사형 또는 수감, 쿠미가시라는 과태료 동전 500문, 모든 백성은 가구별 300문을 부과했다. 타국으로 오래 날품팔이로 나가는 것도 금지하고, 위범자가 있으면 고발인에게는 은 20장을 주고, 본인은 사형·수감·과태 동전 등에 처하며, 쇼우야에게서는 1관문, 쿠미가시라에게서는 500문, 모든 백성에게서는 가구별 300문을 징수했다. 영지 및 에도의 번 저택으로부터 타국으로 오래 출가 벌이를 나가는 일도 금지하고, 타국에서 이미 처자를 데리고 토착해 있는 자는 별도로 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친척에게 불러들여 장사 모습 등을 심사해 문제가 없으면 다시 일하러 가게 했다. 몰래 출가 벌이로 가서 고발인이 있었을 때는 고발인에게는 은 20장을 주고, 본인은 사형·수감 또는 과태 동전, 자식과 형제는 1인당 500문씩, 쇼우야는 1관문, 쿠미가시라는 500문, 백성은 1가구에 300문씩을 과태로 징수한다고 했다.
이처럼 출가 벌이를 엄금하고 있지만, 칸에이 19년(1642) 정월이 되어서는 타국 출가 벌이를 허가하게 되었다. 이 급격한 변화는 전년이 흉작으로 이 봄부터 여름에 걸쳐 심한 기근이 들어 에도에서도 아사자가 도로에 가득했기에 가능하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할 정도이니, 적어도 영내의 식량을 유지하기 위해 출가 벌이를 허가한 듯하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 농촌 인구의 증가가 정체되고, 곳에 따라서는 감소를 보이게 되자 농민의 타출을 엄격하게 통제하게 되었다. 안에이安永 6년(1777) 막부는 「더불살이 출가 벌이에 대해 내리는 포고령(奉公稼之態に付御触)」을 발표하고, 최근 농촌 마을들의 자가 경작을 소홀히 하고 곤궁하단 근거를 제기하고서 더불살이 출가 벌이에 나서는 자가 많으며 소유한 논밭을 황폐하게 두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매우 괘씸하다. 이제부터 마을 책정 수확량과 인별 비율을 고려해, 몇 명까지는 더부살이로 나가더라도 나머지 인수로 경작은 물론 마을에 장애가 없는지 아닌지를 마을 역인이 조사하고, 사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더부살이에 나가고 싶다고 청원하는 자가 있었다면 위 비율의 인수까지는 허가하고, 기한을 제한해 더부살이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만약 마을에 장애도 돌아보지 않고 더부살이에 나서 소유한 논밭을 황폐해지게 하는 일이 있다면, 당사자는 물론 마을 역인까지 과실로 삼는다. 이와 같이 막부령과 사령에 명하고 있다.
텐메이天明의 오우우奥羽 대기근 이후, 같은 연호 8년(1788) 막부는 무츠陸奥・히타치常陸・시모츠케下野 3개국에 대하여, 인수 부족의 마을에서 더불살이 출가 벌이에 나가는 일을 금하고, 밖으로 나가더라도 경작에 지장이 없는 곳은 막부령은 다이칸, 사령은 영주와 지토우地頭에게 청원을 올려 그 첨장添状을 받고, 에도로 나가고 나서 마치부교우町奉行에게 제출하게 했다. 또한 막부령 안에서는 타국 출가 벌이인 자는 기한 만료일 때는 마을로 돌려보내도록 하고, 경죄로 마을을 추방된 자도 마을에서 청원이 있으면 허가하도록 했다. 칸세이寛政 2년(1790)에는 에도 거주자가 귀촌하고 싶을 때에는 노자금·부식·농기구 대금 등을 지급하여 이것을 장려했다. 텐메이·칸세이의 명령은 마츠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가 집정할 때의 것인데, 텐포우天保의 개혁을 행한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의 시기, 텐포우 14년(1843)에 사람 반환(人返し)이라 부르는 귀농책이 집행되었다. 이것은 농촌으로부터 에도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고, 또한 에도 거주자라도 영주자가 아닌 일시 거주자는 귀향시키며, 에도에서 출가 벌이하는 자는 반드시 기한을 정하여 그 기한이 끝나면 귀향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막부의 방침은 대부분의 번에서 모방되어, 농민의 타령 더부살이와 성 주변으로의 이주를 금지하게 되었다.
시바타번新発田藩에서는 칸세이 4년(1792)에 14만4천여 명이었지만 출가 벌이 등 때문에 같은 연호 12년에는 12만7천여 명으로 10% 이상 감소를 보이는데, 그 경향을 막기 위해 같은 연호 9년 7월에는 마을들의 일손이 줄고 남녀 더부살이도 바닥나서 모내기에도 지장이 생겼다고 하지만, 한 가족을 상담하여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출가 벌이를 할 때에는 마을 역인에게 신고하고 허가를 받고 떠나도록 할 것, 만약 신고 없이 나간 자가 있으면 본래 고향으로 데려와 30일 동안 부역에 부린다고 하는 포고를 내린다. 분카文化 5년(1808) 8월에는 장인에 대해서도 같은 벌칙을 발표한다.
단순히 농민의 타지 출가를 금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사에게까지 미쳤던 곳도 있다. 사가번佐賀藩에서는 나라의 사람이 타국으로 나가는 걸 뚜렷하게 제한하여 승려・의사 등이 학문 때문에 상경하든지, 그외의 용무로 타국에 나가더라도 반드시 기한까지는 귀국하게 규정하고, 연한이 넘으면 처벌되었다. 아무개라는 유학자가 한동안 상경해 어느 공가의 집에 머무르며 연햔을 넘겨도 귀국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사가번 번주로부터 공가 쪽에 교섭해 부득이하게 귀국했지만 사형에 처해졌다. 텐메이 3년보다 조금 앞의 일이라고 한다. 이 정도이기에 이세伊勢나 타이샤大社에 참배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이세 신궁을 비롯해 국내의 이름난 신사를 권청해 나라 안의 사람은 이 신사에 참배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나라의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감소시키지 않겠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후루카와 코쇼우켄古河古松軒의 『서유잡기西遊雑記』에 기록된 바이다.
경지와 노동력의 균형
농민이 밖으로 나가는 일을 금지하고 또 도시에서 귀농하는 걸 권장한 것은 경지와 노동력의 균형을 도모하기 위해서인데, 이러한 일은 센다이번의 죠우오우承応 원년(1652)의 법령에 잘 나와 있다. 곧, 백성 중 예속 농민(名子)과 토지 없는 품팔이 농민(水呑)이 많은 곳, 아울러 검지장에 기록된 백성이라도 자녀와 형제가 많은 자는 심사한 뒤 주인 없는 곳으로 이주시켰다. 여러 백성이 혼인할 때에는 쌍방의 마을 역인이 상담한 뒤, 결연을 하도록 한다. 그 뒤 남편이든 아내든 죽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자가 있으면 이의 없이 돌려보냈다. 그러나 데릴사위나 양녀는 상대가 죽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또한 타처에서 아내가 데려온 자식을 성인이 된 뒤 고향으로부터 돌려보내라고 요구한다면, 기한을 다하고 그때까지의 식비나 의류의 값을 갚고 나서 돌려보내도록 했다. 경지와 노동력의 균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혼인 관계까지 규정한 것이다. 히코네번彦根藩의 칸에이 7년(1630)의 규정에, 다른 영지로 남자를 데릴사위로 보내고, 여자를 며느리로 보내는 걸 금지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겐분 원년(1736)에 후쿠오카번 영지인 치쿠젠筑前 무나카타군宗像郡의 오오죠우야들이 아이를 버리지 않도록 군 안에서 사람별로 돈을 내게 하고, 빈궁자에서 출생이 있을 때에는 쌀 2가마니씩을 주는 방법을 정해 번의 허가를 받았지만, 그건 "경작인이 부족하면 소홀해지기 때문"이라는 논밭을 경작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동기에 의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농민의 적정 배치를 대규모로 계획했던 곳도 있다.
코쿠라번小倉藩 영지인 분고豊後 미야코군京都郡에서 행했던 것도 그 하나였다. 여기에서는 쿄우와享和 원년(1801) 정원에 조목을 정했는데, 그에 의하면 미야코군은 경지에 비해 사람이 부족한 곳인데 최근 유난히 사람이 부족해져 막대하게 남는 땅이 생겼다. 예전부터 융통미融通米를 해 왔지만 그만큼의 효과도 없고, 융통미 조작 때문에 무난한 마을까지 자빠뜨려져 피폐해졌다. 이에 각종 방안을 심의한 끝에 새 방식을 정해, 번으로부터 3개년 동안 쌀과 은을 융통해 사람이 부족한 마을이 논과 경작인의 균형을 이루어 남는 땅이 없도록 새 백성을 편입하도록 했다.
먼저 소작인 중에 더욱 경작을 늘릴 수 있는 자에게는 여분을 경작하게 한다. 경작하지 않는 자도 반드시 경작하게 하도록 해서 과부·독신자·여러 장인·상인 등 군 안에 거주하는 자는 수에 상관없이 상응하는 경작을 하게 하고, 장인·상인으로 경작을 그만둔 자가 있으면 면허패를 빼앗아 백성으로 되돌린다. 사찰과 신사·의사 등의 소유지에 대해서는 3개년 동안 소작을 중지하고 자작하게 한다. 새 방법을 행하는 마을에 다른 마을 지주의 경지가 있으면, 그 지주에게 3개년 동안 자작하게 하고, 새 방법 실시 마을의 소작인은 돌아오게 한다. 타국과 타군에 더부살이로 나가는 것을 가로막고, 나가 있는 자는 되돌아오게 한다. 이후 청원 없이 나간 자는 곧바로 군 추방에 처하고, 부랑자로 보아 호적을 뺀다. 예전부터 몰락자로 이번에 귀촌하지 않는 자는 똑같이 처분을 한다. 그런 다음 경지의 할당을 행하고, 나아가 경작인이 부족한 농지를 조사해 그것에 타국과 타군으로부터 새 백성을 불러들여 상응하는 책정 수확량을 맡도록 했다. 타령에서 들어온 새 백성은 낯익은 사람도 없고, 특히 처자식은 마음이 불안할 것이기에 마을에서 친절히 대해 안착하게 하라고 명한다.
농업에 열심스러움
이 새 방법이 얼만큼 효과를 올렸는지는 명료하지 않지만, 이것과 동시에 농업에 열심이며 기타에 대해 한층 노력할 걸 요구해, "가장 유념할 것은 평소 늦잠을 자지 말며 늘 처자식 모두에게도 기풍을 들이고, 가장인 자는 각별히 아침 일찍 일어나 그날 채비에 필요한 일거리를 나누어 마음속에 정리해 두며, 또는 땔감하기, 소와 말 꼴 등의 준비를 해 놓고, 밥 먹은 뒤에는 곧바로 들일에 나서며" "비 오는 날 또는 밤에 남녀노소 그에 맞는 일거리를 하고, 지역과 시기에 맞추도록 마음쓰라"고 명하고, 또는 아이가 없는 자에게는 양자와 며느리를 들여 경작인으로 세울 것을 명하며, 또는 사치를 금하고 들을 황폐화하는 걸 금한다.
또한 영내에서 몸가짐이 나쁜 자가 친척을 의지해 도망해 오더라도 거주를 받아들이지 않고, 품행이 나빠 마을에서 쫓겨난 자나 연공 미납으로 도망간 자가 근처 군에 숨어 있다가 시일이 지나 되돌아오거나 영내에 숨어 있다 그대로 생활할 수 있는 건 종래의 처분이 지나치게 관대했기 때문이므로, 올해는 연공 부족으로 도망간 자는 몇개월 뒤까지는 마을에서 수소문하게 하고, 머리를 깎고 천민들에게 넘겨 추방하기로 했다. 또한 백성들의 풍속으로, 당시는 몰락한 백성이 되어 있는 자가 선조의 혈통이라고 주장해 제례의 좌석 등에서는 마을의 상석에 앉는 선례가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가업에 신경쓰지 않아 집과 논밭까지 잃은 이상은 주장할 명분이 없다. 백성은 당시의 책정 수확량으로 입신하여 위로부터도 등용되는 것이니, 이후는 책정 수확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좌석을 정한다. 자기 명의 경지가 없는 백성이라도 소작을 하고 있는 자는 그 책정 수확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좌석을 정하고, 자기 명의 경지가 없는 자는 노약에 따라 정하라고도 명하고 있다.
이처럼 이촌을 방지하거나, 다른 데로부터 경작인을 불러들이는 것을 하더라도, 단순히 마을 안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하고, 그건 열심히 일하는 자라는 걸 조건으로 한다. 칸에이 19년(1642) 막부의 명령에서는, 경작을 열심히 하지 않고 연공을 체납하는 태만한 백성은 논을 몰수하고 그곳에서 추방하라 했다. 오카야마번에서는 칸분寛文 6년(1666)에 농촌에 백성이 적고 논밭이 너무 넘치는 곳은 오카야마로 나가 있는 행상인을 다시 불러들여 넣고, 다만 넣어도 마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는 무익하므로, 마치부교우와 상담한 뒤 처리하며, 앞으로 더부살이의 귀향은 거듭 유념하여 마치부교우·코오리부교우가 입회해서 백성도 되지 못하고 더부살이도 되기 어려운 자는 읍으로 끌어들이도록 분부하도록 명하고 있다. 카나자와번의 메이레키 3년(1657)의 명령에, 쓸모없는 백성은 서둘러 교체하라고 했던 건 똑같은 의도를 더욱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쿠마모터번의 칸엔寛延 3년(1750)이라 생각되는 각서에는 농촌의 자가 더부살이로 나가 있어 그걸 그만두고 귀촌하는 경우에 백성을 하면 별개이지만, 농업도 하지 않으면서 끌어오는 건 허락되지 않는 일임에도 종종 귀촌하면서 농업은 힘쓰지 않고 무면허의 소상인을 하여 금지된 도쿠리술·안주류 또는 잡화 등을 몰래 장사하는 자가 많다는 건 매우 꽤심한 일이다. 이건 이미 여러 차례 금지된 바이나, 또한 행해지고 있는 건 마을 역인의 단속 소홀에도 그 원인이 있는 것이기에, 앞으로 이러한 위반자가 있다면 본인을 처벌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쇼우야·카시라뱌쿠쇼우까지 잘못으로 삼는다. 이에 대해서는 아라타메요코메야쿠改横目役를 파견해 조사시키겠다고 한다.
상공업자에게서 양자를 맞이하거나 며느리를 맞이하는 걸 금지하는 예도 적지 않은데, 이 역시 대체로 같은 취지 때문이다. 또한 일반 농민이 다른 마을에 갈 때는 5인조나 나누시·쇼우야에게 신고해야 하고, 여행을 나설 때는 일수를 제한받거나 때로는 금지되기도 했다. 카고시마번의 케이쵸우 16년(1611)의 법령처럼 참배나 제례로 타지에 나가서 경작을 게을리하는 걸 금한 예도 있다. 이렇게 하여 농민을 토지에 속박하고, 나아가 열심히 일하는 걸 강제하는 일이 농민 통제의 첫걸음이었다.
(2) 논밭에 대한 제한
막부의 논밭 매매 금지책
농민을 경지에 결부시킨다는 정책은 단순히 농민이 경작하면 괜찮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경영이 적당하단 것을 필요로 한다. 영세농이 많아지면 농가의 수지에 파탄을 일으키고, 나아가서는 연공의 납입이 불안정해진다. 그래서 일정 한도 이하의 분할을 금지하게 되었다. 막부에서는 칸에이 20년(1643)에 논밭의 매매를 금지하고, 이걸 어긴 자는 매도인은 수감에 이어 추방, 매수인은 과태 수감한 뒤에 매수한 논밭은 판매자의 다이칸 또는 지토우地頭로 몰수하고, 증인으로 나선 자도 과태 수감에 처했다. 또한 타노미오사메시치頼納質라고 하여, 토지를 저당 잡히는 자가 연공과 모든 역을 부담하고, 저당 잡는 자는 경작하여 전부를 자신의 이득으로 하는 저당 방법도 똑같은 죄로 삼았다. 타노미오사메시치를 하면, 토지 소유 관계가 은폐되어 나중에는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의해 토지의 겸병과 빈농의 몰락에 따른 경지의 황폐를 방지하고, 농민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책정 수확량이 매겨진 논밭에 한정된 것으로, 연공 부과가 없는 새논이나 낭인 무사 소유의 논밭을 제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연공의 수납을 확보하려고 했던 목적이 명확하다.
이 벌칙은 겐분 3년(1738)에 매수인이나 증인의 과태 수감을 과태료로 바꾸었다. 그래서 칸포우寛保 2년(1742)의 규칙에서는 매도인은 거주지 추방, 가재는 몰수가 되지 않는다. 죽었을 때는 자식이 같은 죄. 매수인은 과태료, 단 그 논밭은 빼앗고, 죽었을 땐 자식이 같은 죄. 증인은 과태료가 된다고 한다. 나아가 엔쿄우延享 원년(1744)가 되자, 매도인은 과태료, 연판한 나누시는 역직 박탈, 증인은 질책하고, 매수인은 그 논밭 몰수라고 고쳐 상당히 가벼워졌다. 그 이유로는 영구 논밭 매매의 금지는 경솔하게 팔아넘기지 않도록 하려는 취지인데, 백성은 궁지에 몰리면, 논밭을 저당 토지로 잡히고 흘러가는 토지로 만든다. 원래 소유한 논밭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자는 없지만 연공 등을 납부하지 못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금지도 망각하고 행하는 것이기에, 거주지 추방에는 이르지 않고 과태료로 괜찮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때 세 부교우 사이에는 영구 토지 매매도 저당에 넣어 흘러가게 하는 것도 명목이 바뀔 뿐이기에, 처벌을 폐지하더라도 좋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살림이 어려운 백성이 당장의 이득에 눈이 팔려 함부로 팔아 넘기게 될지도 모르고, 이번에 형벌도 가벼워진 바이며, 곤궁하면 저당으로 잡히는 일도 가능하기에 우선은 지금까지대로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났다.
이리하여 매매의 금령은 실질적으로는 거의 효과를 잃었다고도 한다. 다만 저당 잡히는 형식을 취할 것이 요구되었다. 저당 잡힐 경우에도, 기한을 정하지 않은 증서나, 되찾기에 대한 글귀가 없는 것은 영구 토지 매매라고 인정되어 처벌이 이루어졌다.
이때 저당 잡기도 저당 잡히는 사람은 과태료, 저당 잡는 사람은 그 토지 몰수와 과태료, 연판한 나누시는 역직 박탈, 증인은 질책으로 했다. 그 이유는 영구 토지 매매가 과태료로 끝나는데 이 저당 잡히는 사람이 거주지 추방이면 너무 처벌이 무겁다. 대체로, 저당 잡히는 사람도 논밭을 경작과 수확을 상대에게 넘기고 연공과 여러 부역만 자기가 부담하고자 할리는 결코 없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은을 빌려주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저당을 잡는 자가 하자는 대로 따르게 된다. 그렇다면 저당 잡히는 사람 쪽이 금지를 어기게 될 뿐만 아니라 어질지 못한 점도 있다. 게다가 영구 토지 매매와 달리 토지 이전이 숨겨지는 것은 죄가 무겁다. 그것도 저당 잡히는 사람이 져야 할 책임이라는 것이어서, 저당 잡히는 사람이 영구 토지 매매를 한 자보다 무겁게 처벌받게 되는 것이다. 처음의 엄벌주의에 비하면, 이미 매매가 부득이한 것임을 인정하였기에 훨씬 가벼워진 것이다. 그러나 금령 자체는 그대로 존속해, 메이지 5년(1872) 2월 태정관太政官 포고 제50호로 폐지되었다.
여러 번의 실상
논밭의 매매 금지는 여러 번에서도 모방한 바가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각지에 대부분의 매매 증서가 남아 있다. 츠번津藩에서 죠우쿄우貞享 원년(1684)에 고우다이칸郷代官에게 주었던 문서에서도, 불가피한 경우에는 매매를 허락하고 있다. 다만 엔쿄우 4년(1747)에는 타노미오사메시치頼納質에 유사한 매각지의 책정 수확량을 줄여서 팔거나, 책정 수확량을 제외한 논을 덧붙여 팔거나 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宗国史」).
오카야마번에서도 처음에는 저당 잡기도 매매도 인정했다. 칸에이 19년(1642)의 "분부하신 법식(被仰出御法式)"에는 저당 잡기나 매매는 급인給人이나 다이칸에게 승낙을 받으면 괜찮다고 하며, 쇼우오우承応 2년(1653)의 '각서'에서는 논을 다시 사들이도록 하는 방책을 강구하는 일이나, 매매된 논의 연공 세율을 올림으로써 가능하면 매매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도모해야 한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다이칸에게 승낙을 받으면 심사한 뒤 매매를 허가한다고 했다. 그런데 메이레키 원년(1655) 정월의 「군 법령(郡中法令)」에 의하면, 이케다池田 씨의 입국(칸에이 9년) 이후 저당으로 취한 논밭을 오랫동안 농사지어 왔기에, 원금과 이자 몫으로도 충분히 이익을 얻었을 터이기에 매도인에게 무상으로 돌려주도록 하고, 다만 코오리부교우가 심사하여 양측이 곤란을 겪지 않도록 할 것. 앞으로는 논의 매매는 3년을 기한으로 할 것, 3년이 지나도 다시 사들이지 못한다면 또 3년 동안 매수인이 경작할 것, 그것으로 원금과 이자는 충분히 회수한 셈이기에 무상으로 돌려줄 것이라고 명하고 있다(「備藩典刑」). 이것은 일종의 덕정徳政이다. 근세 문서에 덕정 글귀가 있는 것을 가지고 무로마치 시대의 덕정의 영향이라 하는 것이 통설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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