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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문화

근세 농민 생활사 -2. 조세 제도

by 雜s 2026. 5. 12.

2. 조세 제도

 

 

(1) 검지検地

 

지배자에 의한 토지 조사

봉건 사회에서는 농업 생산이 그 경제적인 지반이 되는 것이기에, 대토지 소유자인 다이묘 영주는 무엇보다도 토지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그 첫 걸음은 검지検地였다.

토지를 조사해 그 생산력을 파악하고 그것에 대해 경작자를 할당한다는 것은 농업 생산력이 지배자 권력의 기준이 되는 일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이미 반전班田 수수법収授法의 실시에서도 경지의 측량 구분이 필요하고, 조리제条里制의 실시 등으로부터 보더라도 측량 기술 등도 꽤 발전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뒤, 장원荘園의 발달에 따라 장원의 검전장検田帳 -단순히 주문하는 것도 있지만- 이 만들어진 듯하다. 카마쿠라鎌倉 막부가 되자 전문田文을 징수한다. 국아령国衙領 및 장원의 논밭 종류, 면적 등을 기록한 것으로, 그것을 한 나라마다 정리한 것은 대전문大田文이라 한다. 이것들도 경지의 상황을 파악하고, 공조 등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는데, 근세의 검지는 더욱 적극적인 강한 의도를 바탕으로 행해진 것이며, 또는 반전법의 실시나 메이지 지조地租 개정에도 비교되는 것이었다.     

이미 장원제의 복잡한 영유 관계를 벗어나, 토지 인민에 대한 완전 지배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전국 제후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표준에 의해 검지를 실시하고, 또한 그 검지에 따라서 완전 지배를 추진해 갔다. 이마가와今川・호우죠우北条・아사쿠라朝倉・타케다武田・우에스기上杉・오다織田 등 여러 사람에게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다. 검지에 의해 자신의 영역을 확실히 영유한다. 그건 토지를 정확히 측량하는 것만이 아니라, 종래의 권리 의무 관계를 청산하고,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서 비로소 부하에게 은상으로 주거나, 사찰과 신사에 기부하거나 할 수 있었다. 

히데요시가 되면 텐쇼우天正 10년(1582) 혼노우지本能寺의 변 다음달에는 야마시로山城의 신고 및 제출, 곧 토지대장의 기초를 제출시킨다. 그것으로부터 영토를 확대하는 데 수반해 검지를 실시했다. 큐슈가 복종하면 큐슈에, 오우우奥羽가 복종하면 오우우에, 그리고 조선에까지 그걸 실시했다. 오우우를 검지할 때, 히데요시는 검지 봉행의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에 대해 "검지에 대해 불성실한 곳이 있으면, 한 마을이든 두 마을이든 씨를 말려라. 60여 주州를 엄밀히 시행했으니, 데와出羽·무츠陸奥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설령 사람이 사라져도 상관없으니 산속의 오지, 바다는 노와 삿대가 닿는 곳까지 빠짐없이 철저히 시행하라"는 유명한 법령을 내린다. 히데요시에 한하지 않고 검지에 대해서는 강경한 방침이 지켜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강경한 방침이 지켜진다는 건 그만큼 반항이 있고 마찰이 생겼다는 것이다. 

 

 

면적의 산정

먼저 검지에서는 논밭・주거 부지의 한 필지마다 측량이 행해져 면적이 산정된다. 곧 히데요시 때에는 6척 3촌 사방을 1보歩로 하고, 300보를 1단段으로 했는데, 10단을 1정町, 1단의 1/10을 1묘畝로 해 정단묘보라는 전적田積을 사용하게 되었다. 전적은 일본 고대의 것으로는 대代(시로)가 있다. 이것은 령제令制 이전에 사용된 것인데, 그 면적은 50대代가 령제의 1단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타이카大化 2년(646)의 개신 조서 안에 360보를 단으로 하고, 10단을 정으로 한다는 것이 있다. 이 개신의 조서가 그때 내려졌던 그대로인지 이후에 보수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바도 있고, 이 전적에 관한 것도 그걸 푸는 열쇠의 하나라고 생각되지만 여기에서는 종래의 설을 따르기로 하고, 이 360보가 1단이 이후에 250보가 1단이 되었다. 그 시기는 하쿠치白雉 3년(652)이라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처음의 360보 1단이라 했을 때에는 수와 당나라의 제도에 따라서 5척을 1보로 하고, 그 뒤에 250보를 1단으로 했을 때에는 주나라 제도에 따라 6척을 1보로 했기에, 1단의 실질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타이호우犬宝의 제도에서는 다시 5척을 1보로 하고, 그 360보를 1단으로 했는데, 와도우和銅 6년(713)에 척법을 고쳐서 종래의 5척을 6척으로 고쳤다. 그래서 360보가 250보가 되고, 또 360보가 되었던 것은 실질적으로는 변화가 없으며, 그 이전의 50대에 상당했던 것이다. 

그 뒤, 령제가 붕괴되어 갖가지 전적법이 사용되었는데, 정단보 외의 것을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반反・대大・반半・소小. 이것은 비교적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1반의 2/3인 240보를 대, 반절인 180보를 반, 1/3인 120보를 소라 하고, 그 끝수(端数)는 보를 이용한다. 이 대・반・소와 정町・단段・보歩를 병용하는 경우도 있다. 

2. 반反・대代・보歩. 보를 병용하지 않고 반・대만인 경우도 있다. 1반은 50대이기에, 1대는 7.2보에 해당한다. 대의 수를 생략하고, 1정 5반 삽卅(역주; 30)과 같이 쓰는 방법을 하는 일도 있고, 1반 반半과 같이 쓰는 방법을 하는 일도 있다. 

3. 반反・중中・대代・분分. 중은 1반의 1/10, 대는 1/50, 분은 1/300.

4. 반反・장杖(丈). 장은 1반의 1/5, 장의 아래에 중(장의 반절, 1반의 1/10)을 이용하는 일도 있다. 

5. 반反・예苅(束苅)・파把・보歩. 예는 1반의 1/100, 곧 100예가 1반. 그러나 카마쿠라 시대에는 600예를 1반으로 했던 예도 있다. 파는 예의 1/10. 또한 반을 이용하지 않고 예만인 일도 있다. 예와 속예는 대부분 똑같이 사용한다.

이상의 이외에, 1반의 1/10을 표시하는 것으로 묘畝・합合・반절反切 등이 이용되었다. 반과의 관계가 불명확한 것에는 속고束尻라든가 시蒔가 있었다. 그것들을 히데요시는 사방 6척 3촌으로 1보, 30보를 묘, 10묘를 단, 10단을 정으로 통일했던 것이다. 이것이 에도 막부의 케이안慶安 2년(1649)의 검지 조령에서는 사방 6척 1분分을 1보로 규정했다. 이 1분은 스나즈리砂摺라고 한다. 에도 막부의 규정은 메이지에 지조 개정을 할 때에도 그대로 이용되었다(메이지 8년 6월, 지조 개정 사무국 별보 제3호달達).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히데요시가 종래의 360보 1단을 300보 1단으로 했던 것은 조세를 증수할 의도로 내놓은 것이라고 비난하는데, 만약 그러하다면 에도 막부가 6척 3촌 한 변 1보를 6척 1분 한 변 1보로 했던 것도 똑같은 일일 듯하다.

그러나 전적田籍이 히데요시 이래 전국적으로 통일되었다고 하기에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고, 민간에서는 예苅・시蒔・총塚・표지俵地・표고俵尻・표나시俵なし・정서挺鋤・정고挺尻・인답人踏・인타人打・인역人役・인고人尻 등이 사용되었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면적 그 자체를 표시하기보다는 수확량・파종량・소작료 나락양・노동량 등에서 유래한 단어였기에, 단과의 관계는 일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100예는 1단으로는 한정되지 않고, 미노美濃에서는 60예를 1단이라 하는 부류이다. 총은 원래 외양간두엄을 퇴적한 것을 가리키고, 그것이 변해 그 한 무더기가 시용되는 지역을 1총이라 하게 되었던 듯한데, 휴우가日向에서는 50보가 1총인데, 시나노信濃 사쿠군佐久郡에서는 토지가 좋은 곳은 70보, 산지에서는 100보 정도로 대체로는 80보 정도에 해당한다. 총은 밭에서 사용되는데, 시는 논에 사용되어 2되지기・1마지기 등이라 한다. 1표지, 2표나시라고 하는 것은 소작료 나락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쿠 지방에서 1표나시(나락)이라 하면 1마지기에 거의 맞았다. 스루가駿河 지방의 1표지는 100보에서 80보 사이였다. 토사土佐 등에서는 대가 오래 사용되고, 센다이번에서는 관문제貫文制가 줄곧 행해졌다. 이 1관문은 수확량 10섬에 상당한다는 것은 따로 기술하는 것이 있는데(「近世農村社会の研究」), 센다이번의 세법 등을 기록한 「타방3단위부他邦三段位付」라는 사본에는 " 가령 10섬(즉 1관문임) 운운"이라 하고, 타케다 호와키武田保脇의 「센다이번 조세 발휘仙台藩祖税発揮」에 "그러하면 1보 1문에 해당하고, 이 까닭에 대개 1보의 벼에서 쌀 1되를 얻는 것을 써서 10문을 1말, 100문을 1섬, 1관을 10섬, 10관을 100섬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라 하며, 「이세 세신 가보伊達世臣家譜』의 하세쿠라支倉 씨의 조에, 키이노카미 도키마사紀伊守時正가 친아들 키이紀伊에게 600섬, 양자 요이치与市(츠네나가常長)에게 600섬을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하세쿠라 가보에 똑같은 일을 60관문씩 나누었다고 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명확하다. 이 10섬은 생산량인 동시에 연공량이라는 설도 있지만, 역시 보통의 수확량으로 생각하는 쪽이 좋을 듯하다(나중에 나올 아시 토우잔蘆東山 「上書」 참조). 히데요시의 전적 통일은 공공 장부만의 일이라 해도 좋겠지만, 공조 기타 관계는 공공 장부에 의한 것이기에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예나 시 등의 단어는 지금도 사용되는 지방이 있다. 

히데요시가 6척 3촌 사방을 1보로 했던 것도, 또한 에도 막부가 6척 1분 사방을 1보로 했던 일도, 그것 모두 일정한 건 아니고 에도 시대가 되고 나서도 나고야번 안의 키소다니木曾谷에서는 쿄우호우享保 검지 이후 6척 2촌 5분 사방을 1보로 하고, 센다이번・코우치번高知藩・쿠마모토번 등은 6척 3촌 사방을 1보로 하며, 마츠시로번松代藩・마츠모토번松本藩・이이다번飯田藩・마츠야마번松山藩은 사방 6척 5촌을 1보로 하고, 아키타번에서는 6척 5촌을 1간間으로 하는 2간짜리 장대를 사용해서 장대를 땅에 꽂을 때 걸음떼기(越足)라 하여 한 걸음(두 걸음) 걸어서 꽂았는데, 장대를 허리에 대고 끝을 비스듬히 땅에 댔기 때문에 그 기울기를 고려하여 한 변 7척이 1보가 되었다고 한다.

 

 

수확량 산정

검지에는 먼저 지적을 측량하고, 이어서 토지 생산력과 기타를 고려해 수확량 산정을 한다. 이건 말대斗代(역주; 중세 시대에 1단당 부과하던 연공의 양)와 같은 것에 상당하며, 논밭 1단당 수확량을 결정한다. 에도 시대의 농정서 등에는 예를 들면, 어느 논의 평예坪苅(역주; 에도 시대에 1평의 벼를 베어 수확량을 검사한 뒤 전체 논의 수확량을 산정해 연공을 정하던 방식)를 해서 1되의 나락을 얻는다고 하면, 1단에서는 그 300배로 3섬의 나락을 얻는 셈이 된다. 그것을 쌀로 하여 1섬 5말, 곧 그 논의 수확량 산정은 1섬 5말이 되고, 그것을 상등 논으로 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히데요시가 분로쿠文禄 3년(1594)에 시마즈島津 씨의 영지를 검지했을 때에는, 상급 마을・중급 마을・하급 마을・하하급 마을로 나누고, 상급 마을에서는 상등 논이 1섬 6말대, 중등 논 1섬 4말대, 하등 논 1섬 2말대, 상등 밭 1섬 1말대, 중등 밭 1섬대, 하등 밭 8말대로 하여, 이하 마을의 등급에 따라서 차등을 두고, 주거 부지는 읍내 부지에 1섬 3말대, 소우코쿠惣国 부지 쪽이 1섬대가 되었는데, 이 규정은 일정했던 것은 아니고 때와 장소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개개의 검지장検地帳에 따라서, 수확량 산정을 계산해 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에도 시대에는 상등 논이 1섬 5말(수확량 산정 15라고 함), 중등 논은 13, 하등 논은 11, 상등 밭은 1섬 3말 곧 13, 중등 밭은 11, 하등 밭은 9, 주거 부지는 13이란 것을 일종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지만 똑같은 막부령이라도 데와出羽 무라야마군村山郡 오바나자와무라尾花沢村에서는 상등 논은 2섬 4말, 중등 논 2섬 1말, 하등 논 2섬, 하하등 논 1섬 5말이었고, 돗토리번鳥取藩에서는 논밭 모두 상上・중中・하下・하하下々・인하하印下々의 5등으로 나누고, 죠우죠우무라上々村의 상등 논은 2섬, 카미손上村의 상등 논은 1섬 9말이라고 구별을 하고, 상등 논・중등 논 등의 차는 2말 이하로 했다. 따라서 수확량 산정이 몇 가지라는 것은 개개의 마을에 대해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수확량 산정이 앞에 기술했듯이 모두 평예를 해서 산정했다고 한다면 대체로 단당 쌀 수확량이라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일일이 평예를 했을 리는 없다. 검지는 베어 거두는 시기로는 한정하지 않고, 센다이번의 칸분寛文 8년(1668)의 각서에 의하면 검지는 12일・14일・다섯 명절・피안彼岸(역주; 춘분과 추분의 7일간) 외에는 태만하지 않게 행하도록 명하여 연중 내내 행해졌을 터이고, 또한 1배미 1배미의 논을 평예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아가 밭의 경우가 되면, 보리·콩·뽕나무 기타의 것을 쌀로 환산해 정해진다. 따라서 토지 생산력·관개·일조·이모작의 유무 등이란 조건을 고려하거나, 연공 운반의 거리 등을 고려해 품등을 매긴다. 이 수확량 산정이 예를 들면, 상등 논에서 1섬 5말로 정해지면, 1필지가 3묘인 상등 논은 5말 5되가 된다. 그처럼 해서 1필지마다 정해진 수확량을 통상 분미分米(역주; 연공으로 바친 쌀)라 한다. 그걸 마을별로 합치면 마을 수확량이 되고, 나아가 한 군 한 지방(国)의 수확량이 나와, 그걸 히데요시가, 토쿠가와 쇼우군이 몇 만 섬, 몇 천 섬을 가신에게 주었던 것이다. 1만 섬의 영지라고 하면, 500섬의 마을이 20곳이란 것이다. 1군이라 하면, 작으면 2~3만 섬, 크다면 십 몇만 섬이기에, 중소 다이묘 영지의 범위는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수확량은 아주 조잡하게 말하면, 그곳의 농업 생산력을 쌀로 환산해 표시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수확량 산정을 결정할 때에는 연공 운반의 거리를 고려하거나, 집터에 수확량 산정을 매기거나 하는 것에서도 명확해지듯이, 생산력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두 동일 기준에 따라서 실시된다고 한다면 검지 직후에는 공조의 율이 동일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마을별로 달랐다. 그것에 의해 기준에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농업 생산력과 같이 자연의 조건에 의하여 좌우되는 정도가 강한 것에 대해 공평하고 평등한 기준을 요구하는 건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수확량 산정이나 수확량은 공조 기타 농민 부담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대충 말하면 농업 생산력을 표시한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장부 등록 백성

검지에 의해 공조 기타 기준이 정해지는데, 그것과 동시에 그 공조 등을 부담해야 하는 농민이 정해진다. 곧 검지에 즈음하여 작성되는 검지장検地帳에는 논과 밭, 집터 1필지마다 백성의 이름이 기재되어, 이 백성을 장부 등록 백성이라 한다. 장부 등록 백성은 그 토지를 보유 또는 이용하는 대신에, 그 토지에 부과되는 공조 기타를 부담할 의무가 있다. 검지를 하는 측, 곧 지배자로부터 한다면, 논밭이나 집터의 측량이 아무리 엄밀하더라도 그걸 경작하는 농민이 없어서는 의미가 없기에, 1필지마다 농민을 정했던 터이다. 곧 토지와 농민이라는 두 가지 생산요건을 결부시켰다. 

이 장부 등록 백성, 요즘 말로 하면 검지장 등록인은 대체 어떠한 백성이었는지가 학계에서 논의의 중심이었다. 원래, 장원제에서 농민의 성격이란 것이 매우 복잡하다. 농민이라 부르는 안에는 농지의 소유자도 있다면, 농업의 경영자도 있다. 또한 현실에서 경작하고 있는 자도 있고, 그중에도 남에게 사역시키는 하인도 있다면, 아무튼 독립되어 있는 자도 있다. 토호라 불리는 사람도 있다면, 그날그날 사는 사람도 있다. 그 무렵의 말로 하면, 묘우슈名主나 오야카니御館도 있다면, 나고名子나 히칸被官도 있을 터였다. 그 누구를 포착해서 장부 등록 백성이라 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1930년대부터 논의가 있었는데, 1940년대가 되어 대부분의 연구・견해가 발표되었다. 

 

 

태합太閤(타이코우) 검지

그 의견 중에는, 히데요시의 검지는 현실의 경작자를 장부 등록 백성으로 삼고, 지금까지 묘우슈 등에 소속되어 있는 나고나 히칸 등을 등록했고, 게다가 그건 그와 같은 예속적인 소농민을 자립시킨다는 적극적인 의도의 바탕에서 행해졌다는 설이 있다. 곧, 태합 검지는 소농민 자립 정책에 따른 것이어서, 이건 혁신적 또는 혁명적인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에 의해 알려졌느냐 하면, 검지장부에 적혀 있는 백성 중에는 논밭만 있고 집터는 없는 자가 있다. 그들은 주거 부지를 가지고 있는 유력한 농민의 둘째, 셋째 아들이든지 나고와 하칸이어서 가장이나 주인집의 별채라든지 오두막집에 살고 있었던 듯하다 한다. 바꾸어 말하면, 집터가 없는 자가 검지장에 기재되어 있는 것은, 그들 소농민을 독립자로서 인정하려 한 의도가 나온 것이라 한다. 검지장에 기재된 백성의 호칭에, 누구누구 분分이라는 호칭이 있는 분의 부속 백성은 그 누구에게 예속적인 관계가 있는 자라 생각되는데, 거걸 검지장에 기재해 연공의 부담자로 공적 지위를 인정한 것은 가부장적 대가족을 강행적으로 해체시켜, 소농민을 자립시키려고 하는 정책에 기반한 것이라 한다. 또한 집터 없는 자가 많이 기재되어 있는 만큼이라기보다는 집터를 가진 것에 대한 집터 없는 자의 비율이 많은 만큼 소농민의 자립이 활발히 이루어졌단 것을 보여주고, 그 비율에 의하여 선진 지대와 후진 지대를 고려할 수 있다고 여겨지거나, 분의 부속 백성이 많은 것은 부역 노동에 의한 대규모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단 것을 보여주며, 그 비율이 많은 곳은 후진지이라는 설도 제시되고 있다.

소농민 자립 정책을 주장하는 사람은 단순히 검지장부의 기재 사실만으로 추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텐쇼우 10년(1587)에 히데요시의 검지 봉행 아사노 나가마사가 에치젠越前에 내렸던 법령 중에, "어른 백성이 소작(下作) 백성에게 경작시키고 소작료(作合)를 취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경작하고 있는 백성이 연공을 직접 납부하도록 하라"고 한 점으로부터, 어른 백성으로부터 자립하는 걸 촉진하는 정책을 집행했던 것이 명백하다고 한다. 또한 또는 히데요시가 분로쿠 2년(1593)에 오와리尾張에 내렸던 법령 중에 "백성의 부모자식 또는 친척이 한 집에 두 세대나 살아서는 안 된다. 따로 집을 지어 살도록" 하라고 명한 것도 가부장적 대가족을 해체시키는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태합 검지를 소농민 자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반대의 설도 있다. 집터가 없는 자가 항상 예속 농민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그중에는 호주권을 물려주고 은거했던 자도 있다면 둘째, 셋째 아들도 있는 듯하고, 다른 마을에서 들어온 사람도 있을 듯하며, 또한 분의 부속 백성이 바로 부역 노동의 제공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성급한 듯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태합 검지에서 소농민 자립 정책이 집행되었더라도, 그건 부분적이며 그것을 가지고 전반을 추론하는 건 속단에 지나지 않다는 논의도 나온다.

게다가 집을 따로 지어 살도록 하라는 오와리의 법령은 제방의 축조 공사에 즈음하여 가능하면 많은 집에 가구별 부역을 시키려는 것이 명백하여, 자립 정책이라 보는 건 견강부회에 지나지 않다는 설도 있다. 이에 관련해 떠오르는 것은 「평야장향기平野荘郷記」에 "전쟁으로 세상이 혼란했을 때에는, 어느 마을도 사람 수가 많고 집의 수가 적다. 그 이유는 군역이라 하여 돈이나 미곡 등의 현물 납부가 많아서 한 채의 안을 구분해 몇 사람이나 주거했던 것이다. 검지장에 소유자(名請) 수가 많고 집터의 소유자가 적은 것은 그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는, 자립 정책론자도 반대론자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이건 앞으로 문제점이 될 사안이다. 또한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부장이었던 시대인 텐쇼우 2년(1574)에, 자신의 영지였던 오우미近江의 아자이군浅井郡에 내렸던 법령에는 "농촌 곳곳의 경작권 등은 지난해 작물의 연공을 납부한 자의 것으로 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연공을 납부하는 자에게 경작권을 인정하기에, 이후 경작하는 사람이 직접 납부하게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언제 나타났을까? 거기에도 문제가 있을 듯하다. 그건, 이른바 자립 정책이란 것이 히데요시에 의해 창시되었는지 아닌지 하는 점과도 관계한다.

그럼, 소농민 자립 정책설을 둘러싸고 갖가지 논의가 이루어지더라도, 구체적으로 이걸 실증하려면 아직 좀 더 연구의 여지가 있을 듯하다. 실제 오늘날까지는 중세의 마을과 근세의 마을 사이의 내부적인 연결을 명확히 하는 것이 곤란하기에, 검지장 등에 의해 그걸 찾는 일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로 위와 같은 여러 설도 생겼던 것이다. 따라서 집터 소유자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그들의 토지에 대한 관계, 계층 관계, 혈연 관계 등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의 영역을 내놓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소농민이 자립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단 것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것도 키나이畿内나 그 주변의, 이른바 선진 지대에서 그 경향이 강하고, 묘우슈권名主権이 작게 분열되어 묘우슈라 하더라도 소규모 독립 농민이 많아졌다. 그리고 경영 형태로는 가족 노동력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가 점점 일반적이 되었다. 히데요시의 검지에 즈음해서는 그러한 실정에 응해, 또는 경향에 부합하는 듯한 정책이 집행된 것이다. 이건 오다 노부나가가 관문(関所)을 폐지하거나 시장세 면제와 장사 독점권 폐지(楽市楽座)를 인정해 특정 상공업자가 가졌던 권리를 빼앗고, 그 배후에 있는 중세적인 영주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동시에 신흥 상공업자의 지지를 얻었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아무리 소농민을 자립시켰더라도, 독립성을 거의 갖지 못한 노예 같은 농민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묘우슈와 나고, 오야카타御館와 히칸被官 등의 사이 같이 강한 긴박 관계가 있는 경우에는 그들 노예 같은 농민은 검지장에 기재되지 않든지, 또는 분의 부속 백성으로 등록되든지 했을 듯하다. 그 경우에는 분의 부속 백성은 중간적인 것이기에, 분의 부속 백성이 차지하는 비율만으로 선진 지대인지 후진 지대인지를 결정하려고 하는 건 위험할 듯하다 생각한다. 저자도 일찍이, 검지장에 기재된 농민이 어떤 층에 속하는지를 고려해 각지의 검지장에 따라 1인당 수확량을 조사했던 일이 있다. 그에 의하면, 오우미 등의 이른바 선진 지대에서는 1인당 수확량이 적고 논밭 면적으로는 몇 반보反歩를 넘지 않는 데 대해, 호쿠리쿠北陸 등의 후진 지대에서는 수확량으로도 면적으로도 훨씬 크고 혼자서 몇 정보町歩의 경작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드물지 않았다. 그것들로부터, 그러한 장부 등록 백성의 아래에는 하인이나 소작인이 존재한다는 걸 상정했는데, 이것은 소농민 자립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한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곧, 자립 정책이라는 것도 현실의 사태를 완전히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단 점을 보여준다.

 

 

경지와 농민의 결부

그럼, 검지에 수반해 논밭과 집터가 어느 백성에게 결부되어 그곳에 권리 의무의 관계가 생겼을 때, 그곳에서 종래 무언가의 권리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그 권리를 빼앗기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하칸이 장부 등록 백성이 되면, 그 오야카타는 종래의 수탈권을 잃게 된다. 그것이 1군 1향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지방 토호 등의 경우에는, 지금까지는 그 세력 범위의 농민으로부터 노동력을 징수하거나 생산물의 일부를 거두어들이거나 했는데, 그들 농민이 장부 등록 백성이 되어 독립을 했을 때에는 그들 토호의 지배권을 잃어 버렸다. 곧 토호는 검지의 시행자, 예를 들면 히데요시에 대해 복종을 하고 그 가신으로 다시 봉록지를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일반 농민으로 장부 등록 백성의 지위에 안주해야 했다. 곧 검지는 영주와 농민의 중간에 있던 권리 수탈 관계를 배제하고 직접적인 결부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 때문에 중간에 있던, 앞에 기술한 토호 같은 자가 검지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키는 일도 적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검지에 반항했던 키슈우紀州의 봉기 같은,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의 검지에 반항했던 히고肥後의 봉기 같은, 모두 토호·토착 무사(郷士)의 층이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옛 묘우슈층의 동향을 반혁명적인 투쟁으로 본 사람도 있다. 

검지가 끝나고 검지장에 경작자로 기재되면, 이젠 장부 등록 백성으로 지배자에 대해서는 같은 반열에 서게 되어 경작자의 지위가 보장되는 것이다. 케이쵸우慶長 원년(1596)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가 오우미 영내에 내렸던 13개조의 법령 중에 "논밭의 경작권은 검지할 때 검지장에 오른 자의 것으로 결정하고, 그걸 남에게 빼앗기는 것도, 또한 예전에 자신의 경작권이었다고 해서 남의 것을 빼앗는 것도 금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 좋은 예이다. 또한 케이쵸우 3년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가 에치고越後에서 아이즈会津로 영지를 옮겼을 때, 히데요시가 카게카츠에게 주었던 주인장朱印状에는 "이번 아이즈로 영지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그쪽 가신의 사무라이는 말할 것도 없고, 무가 하인(中間)·잡일꾼(小者)에 이르기까지 봉공인이 된 자는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데려 가도록, 만약 잔류를 꾀하는 자가 있다면 즉시 처형을 가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논밭을 가져서 연공을 납부하고 검지장부에 있는 백성을 일절 데리고 가서는 안 된다"고 한다(『上杉家文書」). 우에스기 씨의 이후 에치고의 시바타新発田로 이주했던 미조구치 히데카츠에 대해서도 완전히 똑같은 걸 명한다(「溝口文書」). 케이쵸우 19년에 모우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내렸던 조목 중에도 "경작권은 검지 인정을 받은 자로 정한다. 검지에 등재한 자가 다른 자에게 경작시켰더라도, 검지에 등재를 했다면 그 자가 본래 경작자이다. 등재를 하더라도 급주給主가 일단 경작권을 박탈하고 나중에 다시 인증자에게 경작시키고 싶더라도, 그건 급주의 부당한 처사이기에 등재를 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등재라는 것이 백성에게 불리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만, 검지의 등재인이 경작권을 가진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리하여 검지장부에 오른 백성, 곧 장부 등록 백성은 그 논밭과 집터에 부과되는 책임자가 된다(검지장에 기재되지 않은 백성을 장부 누락 백성이라 한다). 곧 검지는 논밭이나 집터의 측량과 수확량 산정을 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경지와 농민을 결합시킬 목적을 가진 것이라서 농민 측으로부터 보면 경작하는 권리를 인정받음과 함께 공조와 기타 일체의 부담을 의무화하는 것이다. 

 

 

농민에 대한 영향

이 검지가 어떠한 영향을 농민에게 미쳤을까? 농민의 계층별에 따른 차이나,  등재인이 되는지 안 되는지 하는 이해 문제는 일단 제외하고 생각하면, 지금까지 없던 정밀함을 가지고 논밭이나 집터의 측량이 행해지고 또 수확량 산정이 뒤따라, 따라서 연공의 부과는 미세한 토지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예전부터 내려온 비밀 논밭(隠田隠畑)도 남김없이 공조 부과의 대상이 된 것이다. 검지에 의한 증가분이 어느 정도인지 하는 건 그 장소마다 상황이 다를 테지만, 그 한 예를 들자면 텐쇼우 16년(1588)에 히데요시는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에 대해 교토 체류 경비(在京賄料)로 셋츠携津・하리마播磨에 1만 섬을 주었는데, 분로쿠 3년(1594)에 셋츠를, 분로쿠 4년에 하리마의 검지를 행했던 바, 셋츠의 4855섬 남짓의 땅이 6908섬 남짓이 되어 42%의 증가를 나타낸다(하리마의 분량은 불명).

분로쿠 4년(1595)에 가모우 우지사토蒲生氏郷의 죽음 뒤에, 그 노신이 히데요시에 대해 아이즈会津의 봉토(知行) 목록을 제출했다. 그에 의하면 우지사토가 히데요시로부터 받았던 수확량은 73만 4000여 섬이었는데, 분로쿠 3년의 가모우 씨의 검지에 의한 출목분은 18만 5000여 섬으로 25%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히데요시는 "칸사이의 검지에서는 50~30%나 나온다. 아이즈는 먼 지역이기에 이전의 검지는 느슨히 명했기에, 그 분량만큼 나오겠다고 생각했던 바 생각 외로 출미出米가 적었다"라고 한다(「毛利家文書」). 재검지에 의해 이처럼 30%에서 50%에나 이르는 출목이 있다는 건 비밀 논밭이 발견된 것만이 아니라, 수확량 산정이 높아졌다는 점이나, 검지의 방법이 엄밀해졌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요컨대 검지는 단순히 토지를 측량해 조세 부과의 규준으로 삼는 것만이 아니라, 그 토지를 경작하는 노동력을 확보한다. 곧 토지와 노동력이라는 생산 요건을 확실히 자신의 것으로 하는 방법이다. 영주는 이것을 지반으로 정치도 하고 전쟁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검지는 '백성 진퇴가 결정되는 바'라고 하여 "검지는 천하의 대법 지방 통치의 근원으로서 일단 새끼줄로 실측이 들어가면 왕왕 그 새끼줄을 써서 연공과 여러 부역을 수행하게 되니, 참으로 백성의 풍요와 궁핍이 모두 검지에 의한 일로 지국히 중요한 일"이라 일컬어지던 것도 당연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검지의 통지가 있으면 농민들이 두려움에 떤다고 전해진다. 케이쵸慶長 검지를 담당한 이들 중에 하카마다 젠베에袴田善兵衛라는 관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잔인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지며 그 구전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또한 칸에이寛永에 카와무라 카쿠스케 마사나오川村角介正直라는 검지 봉행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 직임에 적합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田法大意」).

 

 

경작의 의무

원래 봉건 시대에 농민의 경지에 대한 관계는 오늘날의 소유권과 같은 것이 아니라, 경작하는 권리 또는 의무를 가지고 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백성 권리(百姓株)라 하고, 백성 부역(百姓役)이란 것은 그 의미를 잘 표현한다. 예를 들면 마츠에번松江藩에서 칸엔寛延 3년(1750)에 마을 안의 개인 소유 숲(腰林), 곧 농민의 집터 주분의 대나무와 나무에 명가은冥加銀을 부과하려고 해서 공표한 법령 중에 "모든 국가 안의 토지는 아무리 작은 분량이어도 모두 공공물임은 물론이고, 아랫 사람으로 사유해야 할 건 아니다. 따라서 야산을 스스로 개간하고 정비했더라도 그것이 그 자의 소유가 되는 건 아니니 이를 몰수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이번은 명가로서 역은을 납부하게 하기로 한다"고 하는 것이나, 같은 번의 칸엔 원년의 법령 중에 "많은 토지를 소유한 백성 중에서 마음가짐이 나쁜 자는 일체를 대리인(테다이手代)이나 소작인(下作人)에 맡겨서 자기 논의 경계조차 알지 못할 정도이고, 늘 논밭의 관리도 하지 않기에 보통보다도 성과가 나쁘다고 듣고 있다. 소중한 논을 맡고 있으면서 천리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바이다. 마을마다 작황을 시찰하여 만약 그러한 자가 있다면 논밭을 몰수하고 다른 자에게 배당을 명한다"라고 한 것은 그 의미를 잘 나타낸 것이었다. 우와지마번宇和島藩의 칸보우寛保 3년(1743)의 규정에서도 논밭을 황폐히 두면 남에게서 희망자가 있다면 그 자에게 하사한다고 한다. 이처럼 에도 시대의 농민은 경작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경지의 할당을 결정하는 것이 검지의 한 목적이었다. 

 

 

막부의 검지

에도 막부도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쟁 이후, 케이쵸우 6~7년(1601~1602)부터 오오쿠보 이와미노카미 나가야스大久保石見守長安・이나 비젠노카미 타다츠구伊奈備前守忠次・히코사카 쇼우교우부 모토나리彦坂小刑部元成・나카노 시치조우 시게요시中野七蔵重吉 들에게 전국의 검지를 실시하게 했다. 이것을 이와미겐石見検・비젠겐備前検 등이라 부른다. 검지나 조세의 부과 방법은 매우 복잡한 계산과 기술에 따라 행해졌던 것으로, 그것에는 특수한 숙련자가 필요해서 구전이나 실전에 의해 습득된 것으로, 그 방법에 따라서 이나류伊奈流・히코사카류彦坂流 등의 유파가 있으며, 그중에서도 이나 씨는 칸토우 군다이郡代로서 오래 세력을 가졌던 바이기에 나중에는 지방은 이나류로 통일되었다.

검지를 받지 않고, 따라서 연공을 납부하지 않는 비밀 논밭은 엄히 금지되었다. 막부에서는 처음 효수, 가재와 논밭 몰수, 거주지 추방의 엄중한 처벌에 처했는데, 칸보우 2년(1742)부터는 중추방中追放이 되었다. 히로사키번弘前藩에서는 쿄우호우 8년(1723)에 비밀 논을 했던 쇼우야庄屋를 끌고 다니며 나무기둥에 묶고 찔러 죽이는 최극형에 처했다. 마츠에번松江藩의 겐로쿠元禄 8년(1695)의 명령에는 "비밀 논밭은 약간의 땅이라도 천하의 대법으로 예나 지금이나 중벌의 법으로 그 죄는 피할 수 없는데, 다만 지금 있는 그대로 사정을 상세히 신고하면 그 벌을 용서하겠으나, 이 이상 숨겨 두고서 나중에 드러났을 때에는 그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일족과 그 마을의 쇼우야와 토시요리年寄에 이르기까지 처벌을 면치 못한다"라고 했다. 또한 빗츄우備中의 니이미번新見藩에서는 "비밀 논은 마을마다 서로 감시하여, 만약 당국을 속인 것이 있어서 비밀 논이 틀림없을 때는 누구든 내밀히 신고하면 반드시 포상을 주겠다"고 명했다. 검지를 받지 않은 경지는 영주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도 시대의 검지 방법은 대략 히데요시의 시대에 정해졌던 것이 더욱 정비되었는데, 허나 전국적으로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히데요시 때는 검지척検地尺의 사방 6척 3촌을 1보, 300보를 1단으로 해 종래의 360보 1단의 제도를 폐지했는데, 에도 막부에서는 케이안 2년(1649)의 검지 조례에서 사방 6척 1푼을 1보로 규정했다. 검지 장대는 2간 장대로, 그 끝을 동으로 붙이고 못으로 고정해, 1척마다 5촌마다 따로 눈금을 매겼다. 또한 10간의 관 장대(管竿)라든지 100간의 새끼줄을 쓰기도 했는데, 그것들에 쓰는 새끼줄은 모시줄로 감물을 발라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게 했다.    

 

그림 1 막부 검지 역인의 행렬

「検地仕法」(天保5年<1834>, 후지사와시藤沢市 문서관 소장)

 

그림 2 막부 검지의 실시

「検地仕法」(天保5年<1834>, 후지사와시藤沢市 문서관 소장)

 

 

검지에 의해 정해진 수확량은 다이묘우 세력의 규준이 되는 것으로, 쇼우군이 봉지를 줄 때에도, 다이묘우가 군역을 부담할 때에도 이것을 토대로 한다. 검지 사업은 매우 경비와 시간을 요한다는 것도 원인이지만, 또한 다이묘우가 무단으로 행해 수확량을 변경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기에, 한 번 전체의 검지와 같은 일은 쉽게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경지의 결손도 생긴다면 새로운 개간지도 생기기에, 부분적으로는 자주 행해서 수정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경우에는 본래의 수확량은 표면상으로는 그대로 두고, 수확량 산정이나 공조의 비율 쪽에서 조정을 하거나 했다. 예를 들면 결손지가 있더라도 전체 수확량을 움직이지 않도록 수확량 산정을 높여서 상등 논 1섬 8말 1되 7홉 1작과 같은 결정법으로 숫자를 맞추기도 했다. 또는 번에서 내부용 검지로서 내검고內検高를 만들어 공조의 징수는 그것에 의하는 곳도 있었다. 또한 원래 논과 새 논 사이에 공조나 부역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도, 이러한 원래 논을 규준으로 하는 사고방식에 기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래 논의 수확량, 곧 막부에서 주어졌던 수확량(오모토다카表高)를 표면상의 규준으로 했기 때문에, 공조의 부과 등에는 매우 복잡한 계산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번에 따라서는 평미레 수확량(槪高, 平等高)를 정해 조세율을 일정히 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가혹한 검지

검지를 할 때 측량 방법은 오늘날과 같이 정확한 것은 아니었기에, 검지 봉행 이하의 손길이 더해질 여지가 있었다. 검지 새끼줄을 느슨하게 펴면 실제 면적보다는 장부 면적이 커지고, 논밭의 가장자리를 어디로 할지에서도 어긋남이 있었다. 조세를 무겁게 하려면 검지 장대를 좁혀서 놓고 가며, 관대하게 하려면 여유를 가지고 놓기도 했다. 그건 곧 10%나 20% 차이를 발생시켰기에, 농민에게는 공조 비율보다는 검지 방법 쪽이 중대 문제였다. 그래서 가혹한 검지에 반항해 봉기를 일으키거나 하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는 히고肥後에 입국했을 때 행했던 검지에 반항을 받아 결국 몰락하는 원인이 되고, 아마쿠사天草 봉기의 간접적 원인도 테라자와寺沢 씨의 가혹한 검지에 있으며, 안에이安永 연간의 히다飛騨 백성 봉기도 막부의 검지에 대한 반항이었다. 

예를 들면 히젠肥前 마츠우라군松浦郡 카라츠唐津의 성주 하타 노부토키波多信時가 임진왜란에서 겁약한 행동거지가 있었다고 하기에 히데요시 때문에 영지를 박탈 당하고 나서, 옛 하타波多 영지 가운데 6만 6000섬 남짓이 테라자와 씨의 영지가 되었다. 겐나元和 2년(1616)에 테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가 제검했던 결과 1만 5000섬 남짓을 내세우고, 그 증가분은 옛 수확량의 24%에 이르렀다. 이건 수입의 증가를 목적으로 했던 것이었기에 수확량 산정을 높이고, 논밭의 막대를 좁히며, 험준한 곳의 산밭이라 영속할 수 없는 장소도 수확량에 더하고, 또는 차나무·뽕나무·닥나무까지도 밭 연공 이외에 수확량이 넣으며, 게다가 조세율이 높고, 마을에 따라서는 일본 전국에 유례가 없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평년작이어도 생계를 꾸리지 못할 정도로, 하타 씨의 영지 박탈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가신의 봉록도 내검 수확량으로 지급하게 되었기에, 수입이 줄어 다른 가문에 봉공을 바라는 자조차 생겼던 것이다. 테라자와 씨는 아마쿠사군도 영지로 했는데, 여기의 검지도 마찬가지여서 이것이 이후 아마쿠사의 난이 일어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죠우슈우上州 누마타沼田의 사나다 노부토시真田信直는 텐나 원년(1681)에 하인과 영민을 혹사했단 등의 이유로 영지 몰수에 처해졌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노부토시는 3만 섬의 영주였는데 본가인 신슈우信州 마츠시로번松代藩의 10만 섬에 대항하기 위해 칸분 2년(1662)과 칸분 12년(1672)에 2번의 검지를 행해, 그 결과 14만 섬으로 했다고 한다. 3만 섬을 14만 섬으로 만든 건 꽤나 심하다고 생각되는데, 이후에 막부가 죠우쿄우貞享 3년(1686)에 마에바시번前橋藩에 명하여 검지를 시켰을 때에는 6만 섬 정도였다고 하기에, 실제보다는 2배 이상의 수확량을 내세웠던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누마타沼田 영지의 토네군利根郡 츠키요노무라月夜野村의 검지장에 의하면, 칸분 2년의 검지 결과 1363섬 남짓의 마을 수확량이며 칸분 12년에는 더욱 45섬 남짓을 늘려 1409섬 남짓이 되는데, 죠우쿄우 3년 막부의 검지에서는 740여 섬이 줄었다. 곧 칸분 12년의 53% 이하로 줄었다. 그래서 사나다真田 씨의 검지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도 수확량을 늘릴 수 있었는가 하면, 우선 면적을 늘렸다. 칸분 12년의 검지장에서는 1보 2보라는 영세한 곳까지 검출된다. 다음으로는 논밭의 등급을 올려서 하등 논을 중등 논으로 하고, 중등 논을 상등 논으로 했던 부류가 꽤 있었다. 나아가 수확량 산정을 높였다. 이 면적·등급·수확량 산정의 3가지 요소에 의해 2배의 마을 수확량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마을 수확량이 증가한 것만이 아니라 공조도 인상했기에, 사나다 씨 시대인 엔보우延宝 6년(1678)에는 막부 영지가 되고나서인 겐로쿠 원년(1688)에 비해 2배의 조세를 징수했다. 이 츠키요노무라로부터 하리츠케모자에몬磔茂左衛門(역주; 가혹한 수탈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는 농민)이 나왔다고 이야기되는 것도 근거가 없을 리는 없다.

검지는 이와 같이 영주에게도 백성에게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데, 또한 그중에 해학을 더하는 듯한 일도 행해졌다. 『아키타秋田 연혁사대성沿革史大成』에 막부 말기 케이오우慶応 무렵에 같은 번의 센보쿠군仙北郡 사카이다무라境田村에서 행해진 검지의 목격담이 실려 있다. 검지할 때는 군 봉행奉行이 부하인 검지역 3~4명과 최하급 무사 아시가루足軽 3~4명, 사이미모치際見持 8명(이건 검지척을 박는 사람인듯함), 카야사시萱刺 1~2명(검지 장대를 박는 곳에 새를 표시로 놓고 가는 사람임), 향인鄕人 키모이리肝煎(나누시名主에 해당), 논 등록인(경작자) 등이 출장하고, 군 봉행도 때때로 출장했다. 그리고 장대 박기가 끝날 때, 논 한가운데 서쪽으로 상을 놓고 신주와 신등(양초)를 바치고, 논의 사방에 사이미모치가 선다. 봉행은 여기로 출장해 입회한 뒤, 동쪽에 있는 걸상에 서쪽을 향해 착석한다. 검지역検地役・음미역吟味役(역주; 금전과 물품 등을 관리하던 직)・견회역見回役(역주; 시설이나 구역을 경비하던 직) 및 친향親鄕 키모이리肝煎가 그 좌우에 줄선다. 그때 논의 신이라 하는 원숭이 모습을 흉내 낸 얼굴을 그린 두건을 쓰고 빨간 깃털을 붙인 자가 가장 앞으로 나아가, 논 한가운데의 상 앞에서 절하고 신주를 받아 돌아온다. 이때 그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논의 진흙을 내던져 몸 전체를 진흙으로 한다. 이에 이어서 친향 키모이리・해당 마을의 키모이리 기타 중심이 되는 향인이 순차로 신에게 절하고 돌아온다. 그때 마찬가지로 좌우에서 진흙을 던져 지금까지의 훌륭한 복장을 모두 진흙으로 만들고 새로 남의 축하를 했다. 또한 이에 이어서 '장대 씻기(御竿洗)'라 외치고 봉행의 숙소에서 집행하는 것이 있다. 이건 너른 마당에 커다란 반절 통을 준비해, 이것에 물을 충분히 담고 그 위에 가로로 사이미 장대(검지 장대)를 놓는다. 봉행과 음미역, 견회역, 검지역은 그 앞에 나가 식을 본다. 친향 키모이리부터 순차로 그 막대를 반절 통의 물을 가지고 씻고 1번 절하고 돌아오는데, 그때 좌우에 큰 거름통에 물을 담아 놓고서 장년인 사람 10명 정도가 늘어서서 머리 위에서 물을 끼얹는다. 방금 막 갈아입은 옷도 다시 흠뻑 젖기에, 그 모습이 참으로 재미난 것이다. 이것으로 새로 남의 축하 의식이 끝나는데, 이 필자는 더 부기해서 "또 이때 꽤 우스운 일이 있었다. 어느 마을의 부농이라는 사람 하나가 논 안에 설치된 검지용 상 앞으로 나아가 3번 절하고 이미 돌아가려 하던 참에, 건장한 자가 그에게 진흙덩이를 내던졌다. 도망쳐 논두렁에 올라가려 했으나 갑자기 맞붙어 격투가 벌어졌고, 그는 논 안에 벌렁 자빠져 흙탕물을 마시게 되니, 그 꼴이 참으로 웃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에 봉행은 음미역 이나가와稲川에게 명하여, 이것도 너무 지나치다 하여 이를 제지시켰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 이 부농은 평소 작은집 사는(영세민) 사람을 괴롭게 부리고 또 소작인을 괴롭혀 고리를 써서 쌀과 돈을 빌려줄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에게 베풀어 돌볼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이 기회를 다행으로 여겨 이처럼 봉행 면전에서 그로 하여금 물거품을 뿜는 추태를 드러내게 했다고 한다. 사람이라면 충분히 명심해 두어야 할 일이다. 이때 무네히코宗彦(이 글의 필자)는 그 꼴을 보고 참으로 개연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훌륭한 의복을 걸치고 봉행 앞에서 능란한 말로 크게 위세를 부리던 자가, 이제는 실로 물에 빠진 쥐 꼴이 되어 안색이 창백해지고 진흙을 뒤집어쓴 모습을 보노라니, 오로지 재리 축적만 일삼는 무리의 행태가 실로 볼썽 사납다"고 한다. 제례를 할 때 평소 마을사람의 증오를 받고 있는 집에 신을 모신 가마를 모시고 가서 신의 뜻에 맡겨 억울함을 풀어내는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이건 백성의 생사를 좌우하는 검지를 할 때이다. 농민은 뛰어난 익살꾼이라 해야 한다.

 

 

 

 

 

(2) 공조貢租    

 

 

면免

검지에 의해 공조의 규준이 결정되고, 그것에 조세율을 곱하면 조미租米가 결정된다. 조세율을 당시 일반적으로 면이라고 했다. 면 다섯이라고 하면 조세율 50%라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시대에는 텐쇼우 14년(1586)에 원칙으로는 급인給人과 백성이 상대적으로 결정하고, 감소분이 있어서 결정이 곤란할 때는 수확분에서 2/3를 급인이 취하고 1/3을 백성에게 취하도록 하는 방침을 제시했는데, 분로쿠 4년(1595)에는 2/3를 징수하는 걸 원칙으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고, 에도 시대에 들어서도 조세율은 마을별로 차이가 있었다. 그걸 평균하여 보면, 에도 막부령에서는 최초는 6공公 4민民, 곧 100섬의 마을에서 60섬 연공, 또는 5공 5민이었는데, 나중에 4공 6민이 되고, 나아가 쿄우호우 13년(1728)부터는 5공 5민으로 인상한다. 다이묘우령은 일반적으로 그것보다 고율이었다. 코우치번高知藩에서는 쵸우소가베長宗我部 씨 시대의 검지에 의해 본논은 6공 4민, 야마우치山内 씨 입국 이후의 새 논은 4공 6민이었다. 아키타번도 평균 6공 4민이었는데, 사타케佐竹 씨의 입국 전은 일곱 여덟 면이 많았기에, 여섯 나리成가 되었던 것을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세율의 높고 낮음 만으로는 조세율의 관대함과 엄함은 알 수 없어서, 똑같은 영지 안의 서로 이웃한 마을에서도 70%인 곳도 있고 40%인 곳도 있어, 그 마을들의 사정에 따라 달라졌고, 앞에 기술했듯이 검지의 방식이 큰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자세한 건 일일이 사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조세율은 매년 작황에 맞추어 결정되었다. 검지 이후에 강의 범람과 침식이 일어나 영구적으로 황폐해지는 등으로 경작할 수 없게 된 분량은 공제하고 새 논밭의 증가한 분량은 더하여, 해마다 풍흉에 따라서 가감했다. 이리하여 해마다 실제의 수확에 따라서 조세율을 정하는 것을 검견법検見法 또는 견취법見取法이라 했다. 그러나 상당한 세월이 경과한 뒤에는, 해마다 검견을 해서 조세율을 정하는 수단을 생략하고, 과거 몇 년 동안의 수확을 평균으로 그것에 따라서 5년이나 10년의 조세율을 일정하게 두는 방법도 집행되었다. 이것을 정면법定免法이라 한다. 정면법의 경우에도 특별히 수확 감소가 심한 해에는 농민의 쪽으로부터 청원하여 검견을 받고서 경감해 줄 수 있었는데, 이것을 파면검견破免検見이라 한다. 영주의 쪽에서는 가능하면 그걸 막기 위해, 역원의 보내고 맞이함과 숙박 등을 정중히 하게 하여 그 비용은 모두 농민에게 부담시켜 약간 정도의 감소인 때에는 청원을 하지 못하게 유도했다.        

칸에이寛永 12년(1635)의 대흉년일 때, 후쿠오카번의 사람이 검견을 위해 야스군夜須郡 아사히무라朝日村에 숙박했던 일이 있었다. 그 이웃 마을인 나카무타무라中牟田村는 아키즈키령秋月領이었는데, 그 논 안에 큰 나무집이 있어서 이것을 물어보자 검견의 흔적이라는 답을 들었다. 아키즈키령의 검견은 출장 역인의 수도 많고 또 그 가족 친척까지 데리고 와서, 스모와 춤 등을 시키고 구경했다. 이처럼 파면검견을 청원하면 그 비용이 막대하여, 감면된다고 해도 그만큼 부담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검견이 종료하기까지는 벼베기를 할 수 없어 그동안에 나락의 양은 점점 감소하며 보리 등의 파종 시기를 놓치게도 되었기에,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검견을 청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예전 면을 회복하기까지는 신궁 참배·교토 상경 또는 가옥의 증축 등 모든 낭비라고 생각되는 것은 일절 금지되었다. 

 

 

검견법과 정면법

검견법과 정면법 가운데 어느 것이 적절한지는 쉽게 판정할 수 없었다. 쿄우호우 무렵 막부의 다이칸代官(역주; 에도 시대에 막부의 직할 토지를 관할하며 그곳의 민정을 돌보던 지방관) 츠지로쿠로우자에몬辻六郎左衛門의 상서 등에 의하면, 정면은 공조액이 결정되어 있기에 수확이 늘면 그만큼 농민의 수확이 늘어나는 것이고, 따라서 경작에 대한 격려도 되며 영주 쪽도 검견의 필요가 사라져 그것에 드는 경비, 특히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는 이익이 있으며, 또한 해마다 수입이 일정하기에 예산을 계산하는 데에도 편리하다. 그러나 해에 따라 풍흉이 있기에, 흉작으로 수확량 감소가 심할 경우에는 대백성 같이 논밭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는 논이나 밭 중 어느 것으로 보충을 할 수도 있고, 논만 해도 좋고 나쁨이 있기 때문에, 총괄적으로는 큰 손실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대백성에서는 정면을 좋아하는 자가 많다. 이에 반해 소백성은 좋은 논은 갖지 못하고 나쁜 논만을 가진 자가 많기에, 흉년일 때에는 타격이 클 뿐만 아니라, 이걸 보충할 방법이 없다. 연공이 부족할 때는 대백성도 연대 책임이 있기 때문에 원조도 하지만, 생활비의 부족을 도와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소백성은 점점 궁핍해져 가는 것이다. 따라서 소백성은 정면법은 불편하게 생각하지만, 마을 안의 대백성들이 정면으로 도급을 맡으면 따지지 못하고 소백성도 정면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검견법은 다이칸・테다이手代・나누시名主 등 모두 정직하다면 해의 풍흉에 따라서 수납을 정하는 것이기에 매우 합리적이다. 또한 특히 소백성 등에 대해서는 그 실정에 맞추어 참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이 모두 정직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비록 다이칸 한 사람이 올바르더라도 다이칸이 그 직무에 소홀하다면, 어떠한 나쁜 일도 생길 수 있다. 또한 매년 하는 검견에는 여러 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역인이 올바르지 않을 때는 뇌물 등으로 풍년에도 수납이 늘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저것 고려하면 어느 것이 좋다고 말할 수 없지만, 정면을 행하는 건 거느린 백성이 납득하고 정면을 바라는 경우에 한한다. 또한 가뭄과 수해의 영향이 적은 마을 쪽은 좋지만, 그 영향이 큰 곳은 어렵다. 또한 소백성에 반대가 있을 때, 강제로 정면법을 한다면 결국 소백성이 망한다. 이것이 다이칸 들의 의견이었다. 다자이 슌다이大宰春台는 그의 책 「경제록経済録」에서 검견법의 폐해를 논하여 "다이칸이 모견毛見(검견)을 가면, 그곳의 백성은 며칠 동안 분주해 도로의 수리나 숙소의 청소를 하며, 전날부터 갖가지 진수성찬을 조달해 도래를 기다린다. 당일에는 쇼우야庄屋, 나누시 등이 말이나 어깨 가마를 끌고 마을 경계까지 마중한다. 관사에 이르면 갖가지 향응을 하고, 또 진상물을 바치고 환락을 끝까지 즐긴다. 테다이 등은 물론이고 하인에 이르기까지 그 신분에 맞추어 금은을 바친다. 이 떄문에 드는 비용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난제를 내서 백성을 괴롭히고, 더구나 모견을 할 때가 되어 하등 논을 상등 논이라 하며 면을 높인다. 만약 향응을 성대히 하고, 진상물을 많이 바치며, 종자까지 뇌물을 많이 받아 만족하면, 상등 논도 하등 논이라 하며 면을 낮게 한다. 이에 의하여 마을 사람은 만사를 제쳐두고 다이칸이 기뻐할 일만 궁리한다. 다이칸은 모견을 가면 많은 이익을 얻고, 종자까지도 무수한 금액을 취한다. 이것은 상류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다. 모견할 때만이 아니다. 평일이라도 백성 쪽에서 다이칸 및 낮은 벼슬아치에게까지 뇌물을 바치는 일은 매우 흔하다. 그래서 다이칸 등은 모두 적은 봉록이지만 그 부는 다이묘우와도 동등하고, 테다이 등까지 겨우 2~3명을 부양할 정도의 봉록으로 10여 명을 부양할 뿐만 아니라 거액의 금을 모으며, 결국에는 요리키与力나 하타모토旗本 집단의 집을 사들여 화려함의 끝을 다하게 된다. 이처럼 다이칸이 부정을 하여 백성이 다이칸에게 뇌물을 바치는 상황은 내가 오랫동안 시골에 살며 직접 보고 들었던 일이다. 이건 오로지 모견 방식에서 일어나는 일로, 백성의 고통 나라의 해로움이라는 것은 이것이다. 정면이라면 매년 모견도 필요없고, 백성은 결정된 대로 납부하기에 다이칸에게 뇌물을 바칠 일도 없고 사역될 일도 없으며 괴로움이 없다. 그렇기에 약간은 높은 면이라도 정면은 백성에게 이익이다. 모견이 없으면 다이칸을 둘 필요도 없다. 다이칸은 수고비로 받은 쌀이 있어 많은 쌀을 상류로부터 하사받는다. 다이칸을 두지 않으면 수고비를 줄 필요도 없어 국가의 이익이다. 지금 세상의 전조田租 법으로서 정면을 이기는 것은 없다"고 기술한다.   

사실, 막부에서도 쇼우토쿠正徳 3년(1713)에, 검견을 할 때 다이칸이나 테다이에게 부정이 있는 걸 나무라고 엄격히 바로잡도록 명함과 함께 다이칸의 검견 전에 행하는 테다이의 소검견(밑조사)를 금했는데, 쿄우호우 원년(1716)부터 다시 부활하게 되고, 더구나 검견에 수반한 폐해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텐보우天保 9년(1838)의 막부 명령에 의하면 검견 이전에 논을 가지고 있는 소작인부터 검견 비용이라 이름 붙여서 고율로 돈을 거두어 검견 담당자인 테츠키手附나 테다이手代의 집 등으로 마을 역인이 술과 안주 대금을 지참하게 하거나, 심할 경우에는 공조의 감면율에 맞추어 제공하는 금액의 약속을 하거나, 검견으로 마을을 순회할 때에는 요리인 등을 고용해 술과 안주를 내고, 마을 역인 등까지 모여서 먹고 마시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목민금감牧民金鑑」). 이러한 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아 보이고, 곤란한 건 '우매한 소작인'이었다. 정면제로 하더라도, 손실이 심할 때에는 검견이 행해졌고, 그 외의 행정이 있기에 정면법을 채용되었다고 해서 슌다이가 말하듯이 다이칸이 필요없던 것은 아니고, 막부 영지에서도 쿄우호우 무렵부터 정면제가 일반적이 되었지만 다이칸의 폐지는 물론이고 감원도 행해지지 않았다.

마츠에번松江藩의 예에서 보면, 죠우쿄우 4년(1687)부터 정면제를 했는데, 3년 뒤인 겐로쿠 3년(1690)에는 검견법으로 고치고, 그때 쇼우야 등으로부터 정면은 연공 납부 이외의 이익이 생기나 검견취는 증수분도 모두 빼앗기기에 농사 방식이 게을러진다는 이유로 정면의 계속을 청원했는데, "이건 소백성들이 할 말이 아니다"라고 하여 허락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26년 뒤인 쿄우호우 원년(1716)이 되어 호우에이宝永 3년(1706)부터 쇼우토쿠 5년(1715)까지의 10개년 평균에 의한 정면법으로 고치고 32년을 지나 칸엔 원년(1748)에 검견법으로 고쳐 12년 뒤인 호우레키宝暦 10년(1760)에는 다시 정면법으로 했다. 이처럼 번으로서도 그 방책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하고, 농민 측에서도 이해관계의 불일치가 있었다.

 

 

연공 할당장(年貢割付状)    

아무튼, 한 마을의 수확을 규준으로 한 마을 단위에 조세가 정해지면 이걸 마을별로 통보한다. 이것을 연공 할당장 또는 면장免状이라 한다. 이 할당장의 말미에는 마을 역인 이하 모든 백성이 모여서 불공평이 없도록 각자의 부담액을 정하도록 기록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실제로는 마을 역인 혼자서 처리해 버려 일반 농민은 마을 전체의 부담이 얼만큼인지도 알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할당만 알게 되는 일도 많았던 듯하다. 

여기에서 할당장의 실례를 들겠다. 최초의 것은 무사시武蔵 카츠시카군葛飾郡 오무라이무라小村井村에 대해 막부 다이칸 이나 타다츠구伊奈忠次가 발행한 것이다. 

 

진년(辰歲) 납부할 연공 할당의 사안

1. 상등 논 1정6반6무보     견취見取, 다만 당년의 상중하임.    40%
     이 수확량 6섬6말4되
1. 중등 논 1정7반6무보                                                         30% 
     이 수확량 6섬2말8되
1. 하등 논 3정4반5무보                                                         20%
     이 수확량 6섬9말
1. 새 논 3정1반보                                                                   20%
     이 수확량 6섬2말
쌀 합계 25섬2되, 이를 가마니로 71가마니1말7되이며, 단 3말5되들이
1. 상등 밭 7정6반2무보                                                          70문 대금
     이 대금 5관334문
1. 중등 밭 3정7반5무보                                                          60문 대금
     이 대금 2관220문
1. 하등 밭 2정8반8무16보                                                      40문 대금
     이 대금 1관 154문
1. 집터 9반1무24보                                                                100문 
     이 대금 918문
영락통보 합계 9관656문
위와 같이 상정한 이상, 11월 25일을 기한으로 완납하도록 하고, 만약 기한을 넘겨 태만히 하는 자는 견책으로 처분할 것임, 이에 건과 같이 규정함.

(케이쵸우慶長 9년) 진辰 8월 20일                                             이伊  비젠備前(도장 및 수결)
                                                                                           오무이라이小村井
                                                                                                     나누시名主
                                                                                                           백성중百姓中(『부슈우武州 文書」)

 

 

이 할당장에 보이는 연공의 결정 방식은 조세율을 정하지 않고, 1반당 얼마라는 결정 방식으로, 논의 '40%'라든지 '30%'라는 건 1반당 4말 또는 3말이란 의미이다. 이러한 결정 방식을 반취反取라고 한다. 이에 대해 조세율을 정한 것을 리부취厘付取 또는 리취厘取라고 한다. 반취의 경우에는 수확량은 필요없고, 리취일 때는 면적이 필요없다. 리취의 예로서 시나노信農 사쿠군佐久郡 오이와케무라追分村의 것을 들어보겠다.

 

사년(巳歲) 납부할 연공 할당의 사안

1. 수확량 282섬7말4되5홉          사쿠군佐久郡 오이와케무라追分村
     내역
     207섬2말2되2홉          본밭
          취미取米 12섬1말2홉     5푼8리4모
     75섬5말2되3홉          새 밭
          취미 3섬5말4되9홉     4푼7리
납부 합계 15섬6말5되1홉
          외外
1. 밭 7정7반2무25보          견취
     취미 1섬1말5되9홉     반反 1말5홉 취取
1. 영락통보 1관247문          山手役
1. 쌀 1말7되 전마숙(御伝馬宿)     비용 쌀
 위는 이번 사년부터 다가오는 미년未年까지 3개년으로, 청원한 대로 정면으로 명하였기에 마을 안 대소 백성과 소작인까지 빠짐없이 모여, 이 면정을 따라서 손실이 없도록 할당하여 납기월 10일 이전에 반드시 납부를 완료할 것. 
쿄우보우 10년 사巳 11월                                                                                              오오쿠사 타로우자에몬大草太郎左衛門 印
                                                                                                                                                             오이와케무라追分村
                                                                                                                                                                  나누시名主
                                                                                                                                                                     백성百姓

 

오오쿠사는 막부의 다이칸이다. 오이와케는 아사마浅間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 나카센도中山道의 역참으로 성립된 곳이며, 논은 없고 밭도 용암류 위에 만들어 조건이 나쁜 곳이기에, 본밭의 조세율은 겨우 5푼8리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쿄우보우 13년(1728)부터 시작된 막부의 증세책으로, 겨우 8푼1리가 되었을 정도이다. 여기에서 떠오르는 것은 앞에서 기술했던 수확량이다. 수확량이 어디나 동일한 기준으로 정해져 있다면, 이처럼 낮은 조세율로 부과되는 일은 없을 터인데, 역참이라는 농업 외의 조건을 고려해 수확량이 정해지기에, 조세율을 매우 낮추지 않으면 실제의 농업 생산에 균형을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상 제시한 두 가지 할당장은 간단한 것을 선택한 것으로, 대부분의 할당장은 훨씬 복잡하다.

 

 

본 연공과 구미(쿠치마이口米) 

조세는 논밭에 매기는 본 연공 또는 본도물성本途物成(혼토모노나리)이라 부르는 것이 그 근간을 이루는데, 논과 밭에서는 조세율이 달라 밭 쪽이 낮은 것이 통례였다. 납부할 것은 논 조세는 쌀, 밭 조세는 대두라는 곳도 있고, 밭 조세만은 화폐납, 또는 논밭 합친 것의 1/3, 또는 1/2을 화폐납으로 하는 곳도 있었다. 조미租米에는 구미와 기타 부가세가 있었다. 구미라는 것은 이미 카마쿠라鎌倉 시대부터 있는 구인口籾(쿠치모미)라는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히데요시의 때에 조미 1섬당 구미 2되로 하고 다른 역미役米를 금했다. 이건 종래 장원제에서는 본소本所・령가領家 및 기타 잡다한 명목을 붙여서 징수했던 부가세적인 것을 하나로 정리하고 나머지를 금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조세 제도에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에도 막부에서는 겐나 2년(1616) 7월에, 연공미는 1가마니당 3말7되로 돈을 지불해(수북히 하지 않도록 평미레를 씀) 납부하는 것, 연공미 1가마니에 대해 구미・메코보시目飜 모두 1되씩 납부하는 것, 화폐납일 때에는 100문에 대해 3문씩의 구전口銭을납부하는 것을 정해, 막부령 및 사령私領의 백성까지 고지하도록 명했다. 나아가 쇼우호우正保 원년(1644)에는 칸토우 쪽은 3말7되들이 1가마니에 대해 구미 1되, 구전은 영락통보 100문에 3문씩, 교토 쪽은 1섬에 대해 3되씩의 정법定法을 앞으로도 지키도록 통보한다. 위의 1가마니에 3말 7되 넣는다는 것은, 그걸 3말 7되로 해서 계산하는 것은 아니고 3말 5되로 해서 계산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3말 7되들이로 결정했던 것이 종래보다 가외로 납부하도록 했던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고, 오히려 감소한 것이다.

『지방낙수집地方落穂集』에는 "옛날에는 연미延米라 부르고 수량이 결정되지 않았다. 말박(斗枡)에 수북히 담아 납부했기에, 3말 5되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5말 정도나 되었다. 그 뒤, 수북한 걸 평미레로 가운데부터 쓸어내는 등으로 납부했다. 그걸 겐나 2년에 백성 구제를 위해 1가마니를 3말 5되로 결정하고, 2되의 연미를 더해 3말 7되들이로 창고 납부하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곧 여분의 쌀을 2되라 제한했던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 3말 5되를 본섬本石이라 하고, 3말 7되를 계립計立이라 한다. 원래 본섬은 3말5되로 일정했던 것은 아니고, 4말이라든지 3말 6되도 있었다. 여분의 2되를 연미 또는 출목미出目米라고 하는데, 출목미는 연미와는 따로 징수되는 일도 있다. 죠우슈上州 군마군群馬郡에서는 46출목이라 하여 4말의 본섬에 2되의 연미를 더하고 이외에 6되씩의 출목이 있었다고 한다. 이건 사령 시대에 금납에서 미납米納이 되었던 때에 특별 내력이 있었던 것을 막부령이 되고나서 그대로 인계한 결과라고 한다. 아무튼, 계립이라 하여 여분으로 담았는데, 계립 3말 7되에 또 구미를 1되씩 더한 것이다. 겐나 2년의 명령으로 구미口米・목번目飜 모두 1되씩이란 것은 양자를 합쳐서 1되란 뜻이다. 원래 큐슈 지방에서는 연미가 없었다.

겐나의 명령에 의하면, 1가마니 3말 7되당 구미 1되라는 것은 사령에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츠번津藩 번주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蔵虎 같은 경우에는 겐나 2년(1616) 12월에, 구미는 1섬에 3되로 정하는데, 여러 번에서 똑같이 실시된 것은 아니다. 센다이번에서도 쇼우호우 원년(1644)의 연공을 정하며 쌀과 대두 모두 1섬에 대해 구미 3되로 했는데, 거기에다 결미欠米 4되를 더한다. 카나자와번金沢藩에서는 케이쵸우 10년(1605)에 조미租米 1섬에 구미 5되로 정하고, 같은 연호 15년 무렵부터 8되가 되고, 칸분 8년(1668)에 되의 양을 고쳤을 때 그 차액을 구미에 더해 조미 1섬당 구미 1말 1되 2홉으로 했다. 쿠마모토번에서는 첫째의 구미는 100섬당 1섬을 표준으로 하고, 수확량에 따라서 조금씩 차를 두어서 기근 대비용 쌀인 둘째의 구미는 100섬에 2섬, 새 땅에 매기는 셋째의 구미는 3섬씩을 징수했다. 

구미는 막부에서는 다이칸소代官所의 비용으로 했는데, 그건 연공미에 따라서 구미가 많아지기에 자연히 연공미를 증징하도록 부지런히 힘쓰는 궁리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농민을 주구하는 바탕이 된 것은 당연하여 그 폐해 때문인지 막부에서는 쿄우호우 10년(1725)에 구미는 공압으로 하고 다이칸소의 경비는 따로 내려주는 것으로 고쳤다.    

구미는 원래 잡다한 부가세를 정리한 것이었는데, 이윽고 기타에도 결미·입미込米 등이라는 갖가지 부가세를 부과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원래는 3말 7되들이의 가마니가 4말 가마니가 되고, 조세율이 40%라든지 50%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훨씬 고율이 되었다. 시험삼아 메이레키明暦 원년(1655)의 시모츠케국下野国 츠가군都賀郡 나가하타무라永幡村의 연공 할당장에 의하면, 이 해 논밭에 부과되었던 조미는 416섬 9말 9홉이다. 조세율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50% 안팎이라 추정된다. 그런데 실제로 이것을 납부할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3말 5되들이의 1가마니에 대해 결미 2되, 구미 1되, 연미 3되를 더하여 72섬 남짓을 여분으로 납부해야 했기에, 그 비율은 본래 조租의 17% 정도가 된다. 본래 연공의 조세율을 50%라 하더라도, 이걸 더하면 58% 가까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명백히 계산상으로 나타난 숫자여서, 이외에 운반 중 흘린 것, 검사할 때의 표본 쌀 등을 더한다면 실제는 훨씬 고율이 되었다.

1가마니당 어느 정도인지의 여분을 담는 것은 메이지가 되어서도 지조 개정이 완료되기까지는 행해졌던 것으로, 메이지 5년(1872) 8월의 공납 규칙에서는 1가마니를 4말들이로 하고, 그것에 합미合米로 2되를 더하게 했다.  

 

 

쌀 대납(石代納)

논밭의 공조는 금은전으로 대납하는 일도 행해져, 이걸 쌀 대납 또는 석대石代라고 했다. 막부령은 칸토우에서는 밭 쪽의 분량을 화폐납, 교토 쪽에서는 총량의 1/3을 화폐납으로 하며, 오우우奥羽에서는 반은 쌀 반은 영락통보라 해서 반분을 금납으로 했다. 또한 십분일 대두은납이라 하여, 총량의 1/10을 대두로 납부할 것을 화폐납으로 했던 곳도 있다. 카이甲斐의 코마巨摩・야마나시山梨・야츠시로八代의 세 군에서는 대절大切・소절小切이라는 타케다武田 씨의 유법이란 것이 행해졌다. 공조 총량의 1/3을 소절이라 이름짓고, 1량에 쌀 4섬 1말 4되로 바꾸어 금납시켰다. 나머지 2/3 가운데 1/3을 대절이라 부르며 공고문(御張紙) 가격으로 금납시키고, 그 나머지를 미납시키는 것이다. 

쌀 대납을 하려면 그 기준이 되는 시세가 필요한데, 「지방범례록地方凡例録」에 의하면 지방마다 5개소 3개소라고 정해진 장소(대부분은 주요 도시)의 곡물상으로부터 매년 10월 15일부터 그믐날까지, 매일 상・중・하 쌀의 시세서를 받아 그걸 다이칸소에서 16일분의 상등 쌀 가격을 평균해서 감정소의 회미廻米 쪽으로 발송하고, 그 음미吟味를 받아서 쌀 대납 가격이 정해졌다. 원래 시세서의 평균 그대로는 아니고, 그것에 몇 말 수확량이라든지 몇 량 증가・몇 문 증가 같은 규정이 있어서 그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이 막부에서는 하타모토와 하급 무사의 급여미의 봄, 여름, 겨울 세 계절의 환산 기준이 되기도 했기에, 에도성의 출입구에 붙였기에 공고문 가격이라고 했다. 

위의 쌀 대납은 일정 규칙에 따랐던 것인데, 그외에 인민 쪽의 사정에 따라서 쌀 대납을 청원하는 경우가 있었다. 곧 상납에 적합한 양미를 얻을 수 없는 경우라든지, 쌀의 산출이 적은 지방이라든지이다. 그것을 청원 쌀 대납(願石代)이라 하고, 정定 쌀 대납보다 고율로 화폐로 환산했다. 그건 35섬에 대하여 금 3량, 또는 쌀 1섬에 대해 은 5문 증가라는 것이 규정이었다. 거꾸로 토질이 나쁜 곳에서 저율로 결정된 것을 싼(야스安) 쌀 대납이라 한다. 이들의 것은 막부령의 연공 할당장에는 늘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잡세

논밭 조세를 본 연공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소물성(코모노나리小物成)・운상運上・명가冥加 등의 잡세가 있었다. 소물성은 많은 산림, 들판, 강과 바다 등에 부과되는 것이다. 헤이안 시대까지는 산천수택의 이익은 공사가 이를 함께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여러 저택과 신사나 왕과 신하의 주택, 권세가가 점유하는 것이 차츰 증가해 종종 금령이 내려졌는데, 카마쿠라 시대에 들어서며 령가領家와 마름(地頭), 또는 령가와 국사国司 들이 산하의 이익을 나누어 갖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이것에 수반해 야마테山手・쿠사테草手 등을 징수하고, 종래 농민이 가졌던 광범위한 입회지入会地는 차츰 축소되었다. 카마쿠라 시대부터 입회라는 말이 나타났던 것은 원래 입회지 곧 공동 수익지가 대토지 사유·장원제의 발달에 수반해 사유지가 되고, 입회가 한정된 권리로 다루어지는 데에 이르렀던 것을 보여준다. 입회란 말이 먼저 사령이나 사찰과 신사의 령내에 나타나고, 다음으로 다른 마을 지역의 입회, 나아가 무로마치 시대부터 몇몇 마을의 입회, 자기 마을 안의 입회라는 순서를 거쳐 나타났던 것은 그 성립의 경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전국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서 다이묘우 제도의 확립에 수반해 산천수택은 점점 영주의 소유지가 되어, 공과 사 그 이익을 함께 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산림에 대하여 보면, 막부나 번의 숲과 산(오하야시御林・오타테야마御立山・오지키야마御直山) 등의 명칭을 써서 숲이 무성한 부분을 막부나 번의 직할 산림으로 하여, 지난날의 입회 산야 대부분은 일반 백성이 들어가는 걸 금지시켰다. 직할 숲의 경영이 매우 이익을 주고, 또한 막부나 번의 재정이 궁핍해짐에 이르러, 점차 입회지를 압박해 직할 숲 지역을 확대했던 것이다. 그외에 치수 관개・토사 막이・바닷바람 방지・어장 보호 등의 목적에 의해 산림 벌채를 금하는 오토메야마御留山의 설치, 영주의 사냥터인 오스타카야마御巣鷹山・오카쿠라야마御鹿倉山 등의 설치, 개인 소유의 산림 등의 증가는 모두 입회지 감소의 원인이었다. 입회지의 감소는 꼴・신탄薪炭・비료의 부족으로 이어져서, 농민은 산수(야마테山手)・야수(노테野手)・겸역鎌役・탄역炭役 등의 명목을 써서 세를 납부하고 잡초나 신탄의 원료를 얻었다. 이외의 잡세에는 상공업자・어업가 등에게 부과하는 운상・명가・분일分ー 등이 있어, 그 명칭은 여러 가지 잡다하여 메이지 8년(1875) 2월 태정관太政官 포고를 써서 잡세로 폐지된 것은 1553항목에 이른다. 

이들 중에는 원래 현물을 가지고 납입했던 것이 화폐납으로 대신한 것도 적지 않다. 아이즈의 막부령 5만5000섬의 땅에서 소물성 또는 부역浮役로서 부과되었던 것은 포역布役・천역川役・산역山役・농역滝役・염역塩役・지역紙役・로역芦役・면역綿役・강호역糠藳役 등이 있으며, 면역은 수확량 100섬에 은 13문, 당호역은 수확량 100섬에 은 16문이었다. 이들 중에는 현물로 납부했던 것이 적지 않았던 듯한데, 막부령처럼 원거리인 곳이 많은 경우에는 일찍부터 화폐납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다이묘우 영지 등에서는 상당히 나중에 이르기까지 현물납을 시켰던 곳이 많다. 가고시마번에서는 상목고(우와키다카上木高)로서 뽕나무 1그루당 풀솜 1문 5푼, 닥나무 1단당 닥나무껍질 500문, 차 100문에 대해 그 1/3 등이라고 현물납이 있고, 각 계절마다 연중 납물에는 정월에는 띠자리・숯・장작・토란・굴거리나무(譲葉)・장식용 소나무, 3월에는 쑥, 5월에는 창포 등이라는 것이 있고, 나중에는 먼곳의 백성에게는 쌀의 대납을 인정해 점차 대납 쌀이 보통이 되었는데, 농민의 청원에 의해서는 현물납도 인정되었다. 토우도우藤堂 씨는 케이쵸우 6년(1601)에는 수확량 100섬에 대하여 쌀겨 5섬·볏짚 10단씩을 급인給人이 취하는 것을 허용하는데, 츠津로 이동한 뒤에 볏짚 1단의 대납 쌀 9홉, 쌀겨 1가마니의 대납 쌀 9홉으로 정한다. 아키타번의 케이쵸우 10년의 「야사와기무라 여러 역을 서로 정한 안(八沢木村諸役相定条)」에 의하면, 본 연공은 수확량의 60%, 그외에 연공 100섬에 대하여 1년 동안에 100명의 인부를 내놓고, 이것에는 부지扶持 쌀 5홉씩 급여된다. 100명을 넘을 때는 1인 하루에 대해 1되 5홉씩 급여하고, 이것은 연공의 쪽에서 공제를 한다. 전마伝馬가 수확량 100섬에 대하여 1년에 30마리로, 그 부지는 마부와 함께 쌀 2되로, 이것도 연공에서 공제를 한다. 짚과 풀은 수확량 100섬에 대하여, 10월부터 3월까지 6개월 동안에 24바리를 백성이 내놓는다. 쌀겨는 수확량 100섬에 대하여 5말들이 30가마니를 1년 동안에 낸다. 여러 부역으로서 수확량 1000섬에 대하여 1명씩, 그 급여는 하루 1되로 연공에서 공제한다. 구미口米는 연공 1섬당 2되씩이다. 이들은 현물 또는 노동력을 써서 납부하는 것으로, 이외에 소물성小物成·천산야역川山野役 등이 있었다. 

쿠루메번久留米藩의 죠우오우承応 3년(1654)의 각서에 의하면 군중장입郡中蔵入方에서 납입한 것에는 부젠豊前의 궁전(지금의 다이리大里)까지 송영, 그밖의 영지 안의 사역 인부 2만 2000명, 마찬가지로 화물용 말 1100마리, 새끼줄 3000단, 짚 1700바리, 손질한 짚 1만 두頭, 흙벽용 짚 50바리, 띠와 새 3000다발, 이엉용 새 1200바리, 밀짚 500바리, 멍석 1900장, 다다미 1700장, 대나무못 3섬, 젓가락 7000쌍, 풀빗자루 170개, 흰겨자 1섬 3말, 검은 참깨 8말, 겨자 8말, 파꽃(葱冬花) 2말 5되, 찔레꽃 2말 5되, 토란 줄기 1000개, 줄(식물) 단오용 15다발, 어린 쑥(はえもぐさ) 8말, 뜸쑥 1말, 쑥 3다발, 창포 3다발, 볏짚 줄기 5다발, 염색용 검댕 5섬, 연잎 30장, 향나무 뿌리 가루 2말, 쇠뜨기 5말, 미나리 50다발, 밤토란 5말, 쌀겨 70가마니, 빈 가마니 2000개, 칡덩굴 16다발, 야자나무 껍질 1500장, 논우렁이 2말, 무 1500개, 우엉 50개, 새 깃털 2만 5000개, 생토란 20관, 잿물용 삼대 150개, 삼씨 5홉, 작두콩 500, 후박나무 열매 2섬, 율무 2말이 열거되어 있으며, 해에 따라 증감이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조금 바뀐 것으로는 번주가 매사냥에 나갈 때 데리고 가는 개의 사료를 대금으로 징수한 견은犬銀(마츠시로번松代藩), 번주가 장군에게 헌상하는 꿩을 잡을 때 상처를 내지 않도록 총을 쓰지 않고 손으로 잡기 위해 산속의 마을들에 명하여 수백 명에게 산야를 두루 다니도록 시키는데, 그 비용이 적지 않기에 마을들에게 그 부역 대납 금을 내게 하는 꿩역 같은 것도 있었다(마츠시로번).

 

 

과역課役

일반 조세 외에 과역이 있다. 이건 노동 급부로, 중세까지는 노역이 꽤 많았는데, 에도 시대에는 실제로 노역을 징발하는 일은 감소하고 쌀과 돈 등을 써서 대납시키는 것이 보통이 되어, 조세적인 성질을 띠게 되었다. 대납 돈 대납 쌀이라는 것은 그것이어서, 1000섬 대납이라 하면 수확량 1000섬에서 1명의 노역을 낸다는 의미였던 것이 이제는 돈과 쌀로 대납하게 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없어졌던 건 아니고, 앞의 아키타번의 예도 있으며, 센다이번의 칸에이 15년(1638)의 규정에서는 급인은 수확량 20관문貫文당 정번定番 1명을 사역할 수 있고, 집짓기 등에 농민을 부릴 경우에는 수확량 1관문에 대하여 1년에 15일씩 사역할 수 있었다. 가고시마번에서는 전역殿役으로 1개월에 5일의 노역을 부과했다. 그러나 모두 결국 쌀과 돈을 써서 대납할 수 있게 된다. 시나노의 젠코우지善光寺 영지에서 문번역門番役・남녀역男女役・소피관역小被官役과 같은 것은 첫 문지기・청소 인부・도검 잡부 등을 징발하던 것을 나중에는 그들의 급료를 충당하기 위한 과세의 이름으로 바뀐 것도 그 한 예이다. 또한 여러 번에서 군역郡役이라 부르며 인부를 징발했던 것도, 나중에는 화폐로 납부하도록 하여, 예를 들면 마츠시로번에서는 제방과 길, 다리 및 번주 주거 수리 기타에 충당하기 위하여 수확량 100섬에 대하여 인부 600명을 내보냈던 것을 마을에서는 1명을 나락 1되 2홉 5작의 대금으로 납부하고, 산촌에서는 1명을 영락통보 5문으로 납부하게 되었다. 이건 실제로 노역을 징발하는 것은 농민에게도 원근에 따라서 부담의 불공평이 생겨, 쌍방의 편의로부터 대납이 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오죠우야大庄屋・코쇼우야小庄屋 등에게 일정 일수 사역되는 일도 있어, 반드시 전체가 폐지되었던 건 아니다. 특히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조향제助鄕制였다.

 에도 막부는 교통역체交通駅逓의 제도로 5가도에 숙역제宿駅制를 설치했는데, 그들 숙역에는 일정 인마를 둘 의무가 있었다. 곧 동해도東海道의 각 숙에는 100명 100마리, 중산도中山道의 숙에는 50인 50마리, 이외의 가도에는 25인 25마리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인마를 숙역만으로 상비하는 일은 곤란하고, 때로는 그 이상의 인마를 필요로 했기에, 숙역 부근의 농촌에서 공사 영지의 구별 없이 부족한 인마를 징발하기로 했다. 그 지정을 받은 마을이 조향助鄕으로, 그 과역도 또한 조향이라 불렀기에, 이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조향촌助鄕村·조향역助鄕役이라고도 했다. 조향이 제도로 정해진 것은 겐로쿠 7년(1694)으로, 그 뒤 정조향定鄕助・대조향大助鄕의 구별을 만들거나 했는데, 나중에 그 구별은 사라지고 다시 고쳐서 대조향代助郷・가조향加助郷・숙부조향宿付助郷・증조향増助郷・당분조향当分助郷 등의 정해진 고용살이 또는 일시적인 조향이 정해져, 먼 것은 숙에서 십몇 리의 원거리에 있었다. 숙역보다 멀리 떨어진 조향촌에서는 하루의 노역을 위해 왕복 이틀 이상을 허비하고, 그것에 향하는 사람은 대부분 청장년이며, 시기는 대부분 농번기였기에, 이것을 위해 농업 생산에 주었던 영향은 심대했다. 또 숙역 측에서는 가능하면 부담을 조향으로 전가시키려고 해서 상비 인마를 줄였고, 이 때문에 숙역과 조향촌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조향촌은 막부에 대하여 부담 경감을 탄원하거나, 또는 근역勤役을 거부하거나 했던 일도 있고, 또한 도망을 가고, 농민 봉기를 일으킨 일도 있다. 메이와明和 원년(1764)에 우에즈케上野 시모츠케下野 지방에서 일어난 봉기는 참가자 20만 명이라 이야기되었다. 후세 "천하 농민 중 삶을 정조향定助郷 각 마을에서 받는 사람 만큼 불행한 인민은 달리 없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하천의 제방 수축・강변 수리 공사 등에는 노역을 징발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큰 하천의 수리・닛코日光 법회・조선 통신사에 요구되는 부역은 국역国役이라 부르며 수확량에 맞추어 금전을 징수했다.

위의 것 이외에 부역 또는 잡세의 성질을 띠는 것으로 고괘물(타카가카리모노高掛物)라고 하여, 수확량에 따라 부과되는 것이 있었다. 막부령에서는 고괘 3단이라 하여, 전마숙伝馬宿 비용 쌀·쿠라마에蔵前 비용 쌀·에도성 잡역부 로쿠샤쿠六尺 급여 쌀이 있었다. 전마숙 비용 쌀은 다섯 가도의 도매상・공인 여관인 본진本陣의 급여 쌀 그밖의 숙역의 비용에 해당하는 것, 쿠라마에 비용 쌀은 에도 아사쿠사의 쌀창고에 드는 여러 비용에 해당하는 것, 로쿠샤쿠 급여 쌀은 에도성 안 주방에서 사역되는 로쿠샤쿠라는 장정을 징발하는 대신에 납부시킨 것으로, 처음은 일정한 것이 아니었지만 겐로쿠 7년(1649)의 <재정청 운영 법령서(御勘定所掟書)>에 의하면, 전마숙 비용 쌀은 수확량 100섬에 대하여 쌀 6되, 쿠라마에 비용 쌀은 수확량 100섬에 대해 금 1푼(영락통보 250문), 로쿠샤쿠 급여 쌀은 수확량 100섬에 대해 쌀 2말이라 되어 있으며, 이후에는 그 비율로 부과되었던 듯하다. 마을에 따라 3단이 처음으로 부과된 연대는 다르지만, 이 3단이 부과된 마을은 막부령에 있었다고 판단해도 무방하다.

나고야번에서는 제방 수리 공사 등에 농민을 봄 3일, 가을 3일 사역하는 3일역이라는 것이 있고, 또 나고야범과 오카자키범에서는 노역에서 전환된 것인지, 혹은 그것에 유사한 부은夫銀・제은堤銀・전마은伝馬銀의 3단 은이 있었다. 오오가키번大垣藩에서는 영지 안 농촌의 제방 수리 공사의 인부・1개월에 2일씩의 인부・마을별 연계 전송 인마・수확량 100섬당 2섬씩의 여름 작물 연공미・매사냥용 개・번의 마굿간 및 가신 말의 꼴과 쌀겨, 볏짚・공사용 새끼줄 그밖의 잡세가 있어, 그중에서도 제방과 강의 수리 공사에는 매년 정월 상순부터 인부를 내보내 5리, 7리의 먼곳으로도 가서 4월 중순까지 이르러 경작 기타에 막대한 지장이 있어서, 쇼우호우 2년(1645)에 백성이 소송하여 수확량 100섬에 대해 7섬 5말, 10만 섬의 영지이기에 총액 7500섬의 부역미를 내고 이상의 소역이 면제되었는데, 이것을 7푼5리 쌀이라 했다. 이밖에도 아직 약간의 백성역百姓役이 남아 있었다. 7푼5리 쌀은 수확량에 4%, 사람별로 3푼5리를 매기던 것으로, 사람별은 15세 이상의 남자로 오랜 병자・봉공인奉公人・거지・사형장 잡부(非人)를 제한 것이어서 봄에 7리5모, 여름에 7리5모, 가을에 6푼으로 3번 납입했다.

 

 

기타 공조

공조는 앞서 언급했듯이 쌀이나 금전을 주체로 하는 것인데, 작은 지역에 대해 보면 또한 다른 물건을 납부하고, 다른 방법으로 납부하는 일도 있었다. 가고시마번의 오오시마大島・키카이가시마喜界島・토쿠노시마徳之島와 같이 흑당을 가지고 조세로 했던 곳도 그 예이다. 오오가키번령 미노의 모토스군本巣郡 네오根尾 일대의 마을들은 산악이 여러 겹으로 쌓여 경지도 적고, 거두어들이는 곡류는 마을 안 식량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대부분은 피나 칠엽수의 열매 등을 식용으로 하며, 여름에도 모기장 없이, 중등 이하의 자는 연중 침구를 쓰는 일 없이 이로리 끝에서 칼잠을 자는 곳에서는 조세율도 해마다 나누시 총대가 직접 견적을 가지고 청원하기에, 10%에 달하는 일은 드물고 대부분은 몇 푼 몇 리라는 저율이었다. 그리고 소물성으로 풀솜・두꺼운 종이・재목을 납부하고, 그에 대하여 일정 비율로 대미 대은을 받아서 그 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부젠豊前의 나카츠번中津藩에서는 오가사와라小笠原 씨가 영지를 지배했던 겐로쿠 11년(1698)에 영지 안의 오오죠우야로부터 군 봉행・다이칸에게 제출했던 구상서口上書에는 "이전의 영주 호소카와細川 님(본성은 코쿠라小倉)께서는 가혹한 형정을 펴셨습니다. 검지 때에는 황야에까지 측량 장대를 꽂으셨을 정도이니, 나카츠 영지가 되어 땅 고르기를 명받아, 기청문起請文을 쓴 뒤 장대 넣기를 했더니, 1단段 300보歩 중 270~280보가 되는 마을은 하나도 없고, 어느 마을이나 부족 무畝를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나라 안에서 대나무 베는 일은 엄격한 금령이어서, 집안 세간은 물론이거니와 말을 모는 채찍, 벼를 훑는 훌태, 여자가 실을 잣는 대젓가락 한 개라도 베면 밀정을 들여보내어 탐문하고 적발해 일족 모두 책형(磔)에 처하셨을 정도였으므로, 각자 대나무밭을 청원 밭(請藪)으로 삼았는데, 그 연공은 수확량 1섬에 쌀 1섬을 납부했습니다. 그 밭에 수목이 생겨나면 영주 측에서 이를 파셨습니다. 그밖에도 밭 두렁의 수목과 차밭을 조성하는 수목 대가 및 차밭 연공을 밭 수납분 외에 따로 거두어 가셨습니다. 무엇보다 곤란한 것은 비가 오나 무더위에나 삿갓을 쓰는 것이 법도로 금지되어, 어기는 자는 책형에 처하셨으므로, 별도로 삿갓 대가(笠代) 죽피운상竹皮運上이라 이름 붙여 운상을 올리고 허락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오가사와라 님께도 인계되어, 호소카와 가문과 똑같이 징수하셨습니다"라고 하는데, 오가사와라 씨에서 오쿠다이라奥平 씨에 이르러서도 가혹한 법은 더해지기만 ㅎ여, 마침내 인두세人頭税·마두세馬頭税까지 부과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매월 소와 말을 끌어내 음미역吟味役이 그 수를 조사해 징수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말 검사 관리는 백성에게 가장 원망을 샀으며, 분카 9년(1812)의 봉기 때에는 제일 먼저 그 집이 파괴되었다고 한다(『下毛郡誌)』). 어쨌든 세금이란 어떤 것이든 그 과세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다.

 

 

마을 비용

일반적인 공조와는 다르지만, 농민의 부담에서 말하자면 마을 비용 등도 고려해야 한다. 원래부터 에도 시대에 마을은 오늘날의 읍면보다는 훨씬 작은 것이고, 게다가 자치체라는 자격도 갖추지는 않았기에, 그 비용 같은 것도 처음에는 거의 잡비 정도를 넘지 않았지만 농민에게는 결코 가벼운 부담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마을 비용도 수확량에 맞추어 내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또 집집마다 내는 것도 있었다. 수확량 비율과 달리 집집마다 내는 것은 소백성의 아픔이기에, 츠번津藩에서는 겐로쿠 5년(1692)에 마을의 중소 비용은 모두 수확량 비례로 하라고 명했다. 

마을 비용으로서 징수된 것을 쿠마모토번의 예에서 보면, 칸에이·쇼우호우 무렵은 파발꾼(継飛脚) 급여・총장惣帳 작성 급여・쇼우야庄屋 붓과 종이, 먹, 기름 대금으로 50섬에 2되 남짓이었는데, 점차 증가해 나중에는 군다이郡代 근무지 사용료・군다이 서기의 급여 쌀・파발꾼 급여・소우쇼우야惣庄屋 문방구 대금용 쌀·테다이手代 게다이下代 집회소 상주 코가시라小頭 급여・집회소 사용료 상납・내검内検할 때 현장 부지 사용료 상납·마을 쇼우야 문방구 대금용 쌀·마을 역인 관사 사용료 상납・장부 작성 급여 쌀・수호신 신사 사용료 상납・관용 예비 못자리 사용료 상납・수로와 수문 감시인 급여・우두머리 백성 식사용 쌀・하라이가시라払頭 급여 쌀・나루터의 판매 허가로 관련 인원이 숙박할 때 지불하는 사례 쌀의 수확량 비례 쌀은 수확량 10섬에 대하여 3말 남짓으로 올랐다고 한다. 야나가와번柳河藩에서는 할당 쌀이라 하는 것을 반별 2되씩 징수해, 이걸 마을 안 및 조방組方의 비용으로 했다. 그 가운데 6홉5작을 쿠미와리組割라 하여, 조 안의 비용으로 했다. 조는 마을들의 조합으로 쿠마모토번의 소우쇼우야의 비용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2홉5작은 쇼우야의 문방구 대금으로서, 1되1홉을 마을 안 비용으로 하고, 매우 각별한 일이 없는 한 이 안에서 해결했다. 또한 1반에 7작9재를 부과해 첫이삭 쌀로 신사 수행 등의 기도료로 했다. 또한 숙미宿米・산사散使 급료라고 하는 것을 작은 마을은 1반에 7홉 이상, 큰 마을은 5홉 4작 안팎을 부과하고, 마을들 미납장米納場의 하숙이나 숙역宿駅 역장役場의 하숙소 임대료로 하거나, 마을들의 소사小使 급료로 했다. 이들 3가지를 합치면 반별 3되에 가깝고, 만약 1반의 수확량 평균을 1섬으로 본다면, 쿠마모토번의 10섬당 3말 남짓이라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향촌助郷村 등에서, 출동한 인마에 대한 품삯이 적어서, 그 부족분을 마을에서 보급한 경우 등은 마을 비용이 불어나, 거의 본 연공에 필적하게 되는 일도 있었다. 카나자와번 영지의 노토국館登国 카시마군鹿島郡 하자카무라羽坂村의 텐메이天明 4년(1784)의 촌방村方 비용을 보면, 조만잡組万雑이라 하여 토무라十村(오오쇼우야에 해당함) 지배 구역에 해당하는 것은 어군御郡 타은打銀(132문36)・용수用水 타은(41문3)・조방組方 제어용諸御用 카나자와 파발 임금(金沢飛脚賃)(53문89)・식량 창고 비용(作食御蔵入用)(4문54)를 포함해 231문8푼9리, 촌만잡村万雑이 키모이리肝煎 급여 쌀(4섬5말, 은으로 202문5)・마을 번두番頭 급여 쌀(150문)・용수 자체 공사 비용(100문)・도로와 다리 비용(70문)・강 제방 공사 비용(350문)・사냥꾼 고용 품삯(30문)・석동산石動山 보시 쌀(知識米)(13문5, 이건 석동산 천평사天平寺의 승려가 금리어禁裏御用의 특권으로 집집마다 쌀을 모으러 다니는 대신에 마을에서 모아서 은으로 납부했던 것, 지식은 귀의를 위해 금전 미곡 노동력 등을 기부하는 것)・연공미 수납 창고의 자재 비용(80문)・산지기 품삯(50문)・수호신 신사 수리 비용(100문)을 합쳐서 1관146문, 촌여하村余荷가 사냥용 매의 먹이잡이 비용(10문)・맹인 예능인과 거지 비용(70문)・마을 역인 원거리 용무 비용(40문)을 합하여 120문, 3가지 합쳐서 1관497문7리가 되었다. 60문을 1량이라 한다면 금 25량이다. 마을 수확량은 420섬 정도로, 텐포우 10년 이후의 기록에는 정면定免 37%라고 하기에 조미租米는 155섬이다. 이에 비하면 꽤 무거운 부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보유 토지의 수확량에 비례한 조세

최후로 당시의 조세 제도에 대하여 말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건 지금까지 기술했던 대로, 조세는 주로 보유 토지 수확량에 비례해 부과되었단 것이다. 본 연공을 비롯한 소물성小物成과 여러 역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은 수확량에 매겨지고, 겨우 일부가 한 가구에 매겨졌다. 한 가구, 곧 머릿수에 매겨지는 것은 수확량에 매겨지는 것보다도 한층 조건을 악화시켰지만, 당시는 오늘날과 달리 누진세는 없었다. 100수확량을 지닌 자가 50섬의 조세를 낼 때에는, 10섬의 자는 5섬을 내야 했다.. 따라서 소백성이 되면 될수록 부담이 무거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 사실은 에도 시대의 농촌을 고려하는 데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당시의 공조가 농민이 생활할 수 있는 저저의 것을 남겨 두는 데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가중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대백성과 소백성에서 받는 압력이 달랐다. 소백성이 연공 납입에 괴로울 때 대백성은 약간의 여유가 있다. 대백성이 쌀밥을 먹을 때, 중백성은 보리를 먹고, 하백성은 피를 먹게 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빈부의 순서는 변하지 않고, 오히려 간격이 점점 벌어져 간다. 이것이 토지 겸병을 촉진한 원인이 된다. 마을 안의 가문이 유지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3) 연공미의 납입

 

연공미의 정선·확보

공조를 납입할 때 화폐를 가지고 하는 경우는 비교적 문제는 없지만,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은 쌀 연공의 납입이라, 이에 대해서는 영주로부터도 엄중한 규정이 제시되었으며 농민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정면법定免法이든 검견법検見法이든, 한 마을이 납입해야 하는 액수가 지시되면 반드시 기한 안에 납입해야 하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한 마을의 납입액은 반드시 마을 사람 전체가 알고서 그걸 공평히 분단해야 하기에, 마을 역인役人이 마음대로 처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막부에서도 여러 번에서도 이에 대해서 자주 명을 내렸다. 막부에서는 엔쿄우延享 무렵에는 공납액을 표찰로 만들어 이듬해까지 나누시・쇼우야의 문 앞에 걸어 주지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은 나누시・쇼우야 등이 종종 마음대로 할당을 행했단 반증이다. 사실 또한 나누시・쇼우야가 자기의 대여 쌀을 연공미와 섞어서 회수하거나, 사비 잡무를 마을 사람에게 할당한 일도 있었다.

연공은 쌀이든 콩이든 가장 정선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직접 농사지은 정미와 대두를 상납해야 하고, 급여 쌀이나 소작 쌀 또는 대부 정산용 쌀 등을 가지고 연공미로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후쿠오카번에서는 호우레키 13년(1763)에 오오죠우야大庄屋・마을 쇼우야 그밖의 풍족한 백성들이 이러한 쌀을 가지고 연공미로 충당하는 걸 엄금하고, 쇼우야 등은 마을 안의 으뜸으로 직접 농사지은 정미를 가지고 모두 납입해야 하며, 이걸 표찰로 기록해 연공 창고 앞에 걸어둠과 함께, 위배했을 때는 그 충당한 쌀 수확량의 1/3을 과태료 쌀로 내도록 하고, 그 사실을 역소에 밀고한 자에게 그걸 포상으로 준다고 했다. 연공미를 이와 같이 정선시킨 것은 첫 번째로는 당시 대부분의 연주가 이걸 오사카와 기타에서 매각해 번의 비용으로 충당했기에, 품질이 조악한 것은 즉시 판매가에 영향을 주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연공미에서도 더욱 정선을 요구한 것은 번주의 식량에 해당하는 진지용 쌀이어서, 센다이번 아시 토우잔蘆東山의 상서에 의하면, 한 알 한 알 엄격히 가려내기에 낮이 짧고 추운 계절에 1되의 쌀은 새벽부터 해질녁까지 5~6인이 달라붙어 겨우 선별한다. 따라서 4~5되나 선별하는 데에는 20~30명의 수고가 들고, 한 마을에서 3~4가마니를 낸다고 한다면 그 수고는 막대한 것이 된다. 그것도 일반 연공미 상납의 시기이기에, 밤중은 멍석·맷돌 등, 낮에는 쌀 마무리와 기타에 쫓기어, 참으로 농민의 고통이 된다고 했다. 마츠시로번의 유학자 칸바라 토우잔鎌原桐山이 쓴 것에 의하면, 진지용 백미는 1되당 7홉 줄고, 상상급 백미가 5홉 줄고, 상급 백미가 3홉 줄고, 하급 백미가 1홉 줄었다고 하기에, 진지용 쌀이 얼마나 정백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가을의 수확 때부터 연공이 모두 마칠 때까지는 농민의 행동에 제한을 더해 모두 마침을 확보하려고 했다. 쌀의 이동은 엄금되어, 다른 마을로 나가는 일은 물론 개인 사이의 대차 변제도 허락되지 않았다. 시주승·상인 등이 마을에 들어오는 일도 금지되었다. 가고시마번의 경우에는 농민이 친척이나 동료와 연락하는 것을 금하고, 참배・제사・집회・시집 장가 가는 혼례・가옥 건축・의상 새로 짓기도 금지되고, 특히 상인에 대해서는 소금과 기름 상인 외에 일절 마을에 들어가는 걸 금지하고 위범자를 발견했을 때는 누구라도 상품을 몰수하도록 하며, 다른 영지의 상인에 대해서는 상품을 지참하지 않도록 통고하고, 또 지참할 때는 쇼우야소庄屋所에 억류하며, 토지 소유주가 모두 마치기 전에 농민을 며칠 동안이나 사역시키는 일을 금지했다. 센다이번에서는 백성의 소송은 급함을 요하는 것 외에는 모내기를 마친 뒤와 연공을 모두 마친 뒤에 처리하도록 하고, 이것도 연공을 모두 마치기 전은 일단 정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쿠오카번에서는 메이와明和 3년(1766)에 모두 마치기 전에 쌀을 판 자가 있다면, 과태료로 사고 판 자로부터 그 쌀의 양 가운데 2/3를 징수하고, 양자의 마을 쇼우야에게 은 20문, 쿠미가시라組頭에게서 은 2문을 징수하도록 하고, 군들의 출구에는 표찰을 세우며, 밀매 쌀의 발견자에게는 포상을 준다고 했다.

 

 

쌀 마무리・가마니 마무리

한편 농민은 쌀 마무리·가마니 마무리에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쌀은 거의 한 알씩 골라야 했다. 빗츄備中 니이미번新見藩의 호우레키宝暦 2년(1752) 「창고 담당 수납의 규정(御蔵方収納之定)」에 의하면, 수납할 때 미곡 검사를 하지 않는 대신에 봄이 되어 가마니가 무너지게 되는 일이 있다면 과태료를 징수하고, 부족한 쌀이 1홉이라면 과태료 쌀 1되, 나락이 1홉 중에 3알이라면 마찬가지로 1되, 4알이라면 1되5홉, 청치・앵미・깨진 쌀 등이 있더라도 똑같이 징수했다. 게다가 그 가마니에 대해 징수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을로부터 같은 날에 납부된 가마니 수 전체에 대해 징수한다고 했다. 얼마나 정선을 요구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가마니라 하더라도 정성을 들여 만들고, 게다가 이중 가마니로 해서 습기가 없도록 주의하며, 쌀을 담아서는 그 묶는 법까지 정해져 있었다. 모리오카번盛岡藩에서는 1가마니 4말5되에 구미口米와 결미欠米 3되5홉씩을 담고, 굵은 새끼줄을 가로로 7겹 두르고, 양끝의 둥근 짚받침은 5곳 묶고, 세로 새끼줄은 4겹 두르도록 했다. 가마니마다 나무 표찰을 넣어, 마을 이름과 사람 이름, 납입일을 기록해 책임자를 명확히 하도록 했다.

그림3 나락을 쌀로 만들어 가마니에 담다.

이하 그림 17까지 『耕稼春秋』에 의한다.

 

 

1가마니에 담는 양은 지방에 따라서 차이가 있어, 막부령에서도 칸토우는 3말5되, 데와出羽 무라야마군村山郡은 3말7되, 같은 지역 타가와田川・유리由利・아쿠미飽海 3군은 4말8되, 코우슈우甲州는 3말6되, 무츠陸奥 이와키岩城 영지 및 미마사카국美作国은 3말3되, 무츠 시라카와군白川郡 후쿠시마령・에치젠越前・에치고越後・미카와三河・토오토우미遠江・스루가駿河・미노美濃・단바丹波・타지마但馬・빗츄우備中・빈고備後는 4말, 오와리尾張・셋츠摂津・하리마播磨・부젠豊前・분고豊後는 5말이라고 하듯이 일정하지 않았다. 이것에 구미口米・연미延米・결미欠米・입미込米 등이라는 부가세가 붙었다. 결미나 입미는 운반 도중 등에서 결감하여 보충하는 것이었는데, 나중에는 그것조차도 당연히 담아야 하는 것처럼 취급되었다. 앞에 들었던 아시 토우잔의 상서에는, 4말5되 1가마니에 구미 1되5홉의 규정이고 무게는 18관800문의 규정인데, 실제로는 쌀은 4말8되5홉부터 9되, 콩은 5말을 담고 무게는 20관 전후인 것을 납입해도 여전히 부족하다 여겼다고 기술한다. 오다와라번小田原藩 영지의 즈슈우豆州 카모군賀茂郡 우사미무라宇佐美村의 엔쿄우延享 2년(1745)의 보고서에 의하면, 전에는 연공미는 1가마니가 3배盃들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건 3말7되를 3번으로 나누어 되질한 것으로 3배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작은 되로 계산하면 3말9되 3~4홉부터 5~6홉은 있었다. 즉 되가 크거나 계산법에 여분을 넣거나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건 이전의 것으로, 당시는 1말2홉5작들이의 통되(桶枡)로 4배 담고, 마지막 되는 고봉으로 담았다고 한다. 즉 4말1되 이상은 담았을 터로, 그걸 3말 7되로 해서 계산했던 것이다. 또한 그 계량의 때에 빠뜨린 쌀이 나오면, 그걸 모아 두고 연공미 가격보다는 10량에 1가마니 싼 가격으로 팔아서 그 대전代錢을 납입시켰다.

 

 

납입과 검사

납입 장소는 번이라면 성 주변 또는 령내에 여러 곳 있는 쌀 창고에 수납하고, 막부령에서는 일단 마을 안의 향郷 창고 또는 쇼우야·나누시의 창고에 수납한 뒤에 에도·교토 기타로 회송되었다. 코쿠라번小倉藩에서는 코쿠라성 안 하네교刎橋의 쌀 창고에 키쿠군企救郡 안의 공미貢米를 수납한 외에, 타가와田川・교토・나카츠仲津・츠이키築城・코우게上毛 다섯 군郡은 군 안 인근의 해운 또는 나룻배 등의 편의의 장소에, 한 군 안에 2개소 아니면 4~5개소의 쌀 창고가 있어 이것에 납입하고, 시기를 보아 코쿠라 하네교의 원래 창고로 회송하며, 또한 오사카 무기 창고로 회송했다. 공조를 상납하는 시기에는 다섯 군의 창고에 창고 역인이 출장하고, 또 각 마을에서 촉탁한 고메바라이米払라는 역원도 매일 출장했다. 각 마을에서는 소와 말 또는 선적으로 운반하고, 쌀 주인(米主) 또는 사공이 고메바라이의 지시에 따라서 창고 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 위에 한 줄 또는 몇 줄로 쌀 가마니를 늘어놓는다. 고메바라이는 수납 장부(馬帳)에 섬 수와 쌀 주인의 이름을 기입하고, 이 이후 납입법의 수속이 모두 고메바라이의 손으로 넘어간다. 

창고 역인의 조사 순서는 우선 새끼줄로 묶은 가마니를 조사하고 조잡하게 만들었다고 인정될 때는 새끼줄 불량·가마니 불량으로 고메하라이의 손으로 돌려보낸다. 다음으로 오사시御差し 또는 사시코差子라는 역원이 가마니 줄의 앞뒤로 둘이 마주보고서 두 가마니 주둥이에 양쪽에서 비스듬히 꼬챙이를 넣어 6~7작의 쌀을 꺼내 왼쪽 손바닥에 올려 살펴본다. 조사 사항은 건조·쌀 상태·각종 혼동미 3항으로, 한 항이라도 불량 불합격이 있을 때는 불량 쌀로 고메하라이에게 돌려보낸다. 다음으로 무게 담당 역원의 조사로, 1가마니마다 무게를 재고 규정 중량에 부족한 것은 불량 쌀로 돌려보낸다. 그때, 고메하라이가 중량은 부족하더라도 근수에 부족이 없다고 믿을 경우에는 역인 입회로 다시 계량한다. 이렇게 하여 모두 합격한 것은 장중리蔵仲使에게 명하여 창고에 넣어 납입을 완료한다. 고메하라이의 손에 불량 쌀로 돌려보내진 것은 미리 불량 쌀을 손질을 하는 상근 인부 같은 것이 창고에 있어서 곧바로 손질을 마친 뒤 그날 상납하도록 되어 있다. 이 비용은 쌀 주인이 부담하는 바이다. 고메하라이는 매일 납부 완료된 장부의 사본을 담당 쇼우야 역인에게 회부해 납입의 증명을 한다. 

그림4 연공미를 쌀 창고에 납입

 

 

코쿠라번의 창고 납입 기한은 12월 10일까지로 규정되어 있기에, 영지 안 각 군 각 테나가手永(테나가는 오오죠우야가 지배하는 구역)의 오오죠우야는 늦어도 12월 3일 무렵까지 지방의 역장役場을 폐쇄해 서역書役 이하의 역원을 데리고 코쿠라성 아래에 있는 각 군의 군옥郡屋에 출장하고, 그곳에서 사무를 집행한다. 이 동안은 세무 때문에 밤마다 취침은 야츠도키八つ時 전후, 곧 오전 2시 무렵이다. 12월 25일은 군 창고 총결산으로 정해진 날이기에, 오오죠우야는 이츠츠도五つ時부터 출근해 그 밤은 철야하고 퇴근은 26일 새벽이 되는 일이 많다. 27일 아침 요츠도키四つ時, 각 군 오오죠우야 일동은 군다이의 사무소로 출두해 군다이郡代・소우모토지메惣元締 역인이 선도해 각 군의 스지봉행筋奉行・다이칸代官을 데리고 오오죠우야 일동을 거느리고 모든 상납 완료된 사례로 성에 오른다. 번주가 나라에 있는 해에는 알현을 허하고, 에도에 있는 해에는 상석 가로家老가 대신하며, 포상 목록과 절인 방어 1마리씩 하사되었다. 

공미貢米 검사 방법은 납입 쌀 전부에 대해 행하기도 하고, 니이미번新見藩처럼 그때는 검사를 하지 않는 곳이 있지만, 대부분은 납입 쌀의 일부에 대해 행했다. 예를 들면 한 마을에서 100가마니를 납입하면, 그 가운데 1가마니 또는 2가마니를 빼내어 검사하는 것으로, 이를 마와시다와라廻し俵라고 한다. 만약 무게에 부족이 있으면 전부 수를 곱해 보충시킨다. 야나가와번柳河藩에서는 마와시다가와 2가마니 가운데 1가마니는 1홉 부족, 1가마니는 2홉 부족일 경우에는, 총 가마니에 2홉을 보충시키고 과잉이 6홉에서 7홉이면 3홉씩 돌려보내며, 4홉이나 5홉일 때는 2홉씩 돌려보냈다. 치쿠젠筑前 미이케군三池郡의 막부령에서는 2가마니의 마와시다와라 가운데 1가마니에 4홉의 과잉이 있고, 1가마니에 5홉의 부족이 있다면 총 가마니에 1홉씩 보충시키고, 과잉이 있다면 이것을 돌려보냈다. 

이건 번의 창고로 직접 납입하는 경우인데, 마을 역인이 받아들여 향 창고에 넣어 두고서 나중에 다이칸이 마을을 순회해 검사를 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죠우번新庄藩에서는 쿄우호우 5년(1720) 이후 그 가마니 포장은 3말5되의 규정이었는데, 마을들의 향 창고에 쇼우야·쿠미가시라가 입회하여 되질쟁이(枡取)가 저울질해 담을 때는 말박으로 4번 담았다. 되질쟁이는 쿠미가시라 겸임의 마을도 있었지만, 그 안에서 5홉 또는 1되를 빼서 수입으로 했다. 연공미가 거의 납입되었을 때 다이칸의 납입 완료 순회가 있었기에, 미납자가 있으면 밤중에라도 쇼우야로부터 독촉했다. 전체 중에서 2~3가마니를 다이칸이 지정해 되질쟁이에게 재도록 하여, 1되나 5홉이나 부족함이 있으면 전체 가마니에 곱하는 건 앞의 기록한 경우와 똑같았다. 따라서 되질쟁이는 매우 세심하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고, 사전에 기원일을 잡아 무난을 기도했다. 또한 작은 땅울림이어도 됫박의 양에 영향을 주는 걸 우려해서 함부로 그 장소에 다가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됫박마다 평미레를 써서 5알의 쌀이 흘러내리면 된다고 되어 있었다. 이때, 다이칸은 쇼우야의 집에서 하루 잔다. 쇼우야는 부 안의 백성에게 명하여 가능한 한 접대를 하고 예물을 올린다. 이외에도 쇼우야는 우란분재 등에는 다이칸代官・산봉행山奉行・군봉행郡奉行 등에게 진상물을 올리기에, 그것들의 비용은 막대하여 때로는 창고에 쌓인 쌀을 사적으로 소비하고 빈 가마니를 쌓아서 잠시동안 호도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납입 완료가 되면 향 창고에 봉인을 하고, 그 이후는 번의 쌀이라고 하게 되었다. 

후쿠오카번에서는 일단 마을의 창고에 납입하고나서 번의 창고로 회송했는데, 그 마을 창고에 납입할 때의 검사도 매우 엄중해 쇼우야와 쿠미가시라 입회로 가마니 포장과 무게 측량을 조사했다. 창고의 앞에 '포박 기둥'이 세워져, 미납자는 이 기둥에 묶어두고 친족이나 5인조, 마을에서 대납이 되면 석방했다. 또한 부정 행위가 있는 자는 5개 마을 쇼우야 집회에서 마을 창고에 가두기도 했다. 연공 상납 기간 안에, 창고지기(蔵番)는 매일 밤 초소에서 불침번을 섰다. 하룻밤 당번을 3가구 1조로 하여 2~3번 창고 주변을 순시하고, 마을 안도 3인조로 순번에 따라 화재 방지, 도난 예방을 위해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을의 연공미가 납부되면 번의 창고에 회송하고, 그곳에서 하는 검사는 다른 곳과 비슷했다. 마와시다와라廻し俵 제도는 메이지 유신 이후, 지조 개정에 의해 금납이 되기까지 행해져서 메이지 5년(1872) 8월의 다죠우칸太政官 포고 제232호의 부현 공납貢納 미납米納 방법에서는 회미廻米나 계량에 관한 상세한 규정이 있어, 마와시다와라의 방법도 나와 있다. 

 

공미 검사를 할 때 꽂이로 빼낸 쌀은 검사 역인의 부수입이 되었던 것으로 모두 거대한 꽂이를 사용해, 야나가와번 같은 곳은 수천 섬에 달했다고 한다. 우에다번上田藩 영지의 노인의 말에 의하면 3척이나 되는 꽂이로 그걸 빼낼 때에는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가고시마번에서도 수납할 때 떨어지는 쌀은 게다이下代·창고 역인의 부수입이었기에, 게다이와 창고 역인이 되는 것이 무사가 생계를 꾸리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겨져 가로家老 지위 이하 여러 좌서역座書役의 연공자에게는 수고비 은 대신에 창고 사무역에 임명하기로 하고, 7년마다 1사람씩 그 혜택을 입었다. 이것을 다른 희망자에게 양도하는 것을 부속付属이라 하고, 양도 은을 부속료라고 불렀다. 따라서 떨어진 쌀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분카 10년(1813)에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는 가로家老・와카도시요리若年寄・오오메츠케大目付에 대하여 최근 창고 사무역의 부속료가 과분하단 사실이 알려졌는데, 필경 백성의 괴로움이 되고 이득에 눈이 멀어 부정한 처리를 일삼는 근원이 되며, 다른 나라에서의 소문도 나쁘고 무엇보다 지역의 기풍에도 좋지 않기에, 이후 행태를 엄밀히 감찰하도록 지시해 텐포우 13년(1842)에도 떨어진 쌀의 취득을 정지하도록 규정했는데, 사실은 그 뒤에도 변함없이 부속료는 해마다 높아지고 그에 따라 됫박질도 무거워졌다.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도 안세이安政 3년(1856)의 상서에서 이것을 지적해, 그 폐해는 끝내 근절되지 않았던 듯하다.

 

 

됫박의 크기·계량법

이처럼 농민에게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담이 적지 않았고, 이밖에도 가마니나 멍석에 부착되는 쌀 분량까지 여분으로 담는 걸 규정하는 예도 있으며, 또한 무게 잴 때 평미레질하는 방법에 의해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가고시마번의 예로 말하면 평미레질에 오코시마스起枡와 사키마스先枡가 있고, 오코시마스는 앞긁기(前搔)라고도 하여 평미레질을 됫박의 앞쪽에서부터 몸쪽으로 끌어당기는 방법으로 되로 잰 양이 커진다. 사키마스는 끝긁기(先搔)라고도 하여 평미레를 앞쪽으로 미는 것으로 됫박의 용량 그대로 된다. 수납할 때는 오코시마스로 한다는 규정으로, 그것도 하나하나 됫박으로 재는 것이 아니라 평미레질로 계량을 해서 그것에 일정한 증량을 했다. 5% 증량하면 5기五起 또는 5선이라 하고, 10% 늘리면 1기 또는 1선이라 불렀다. 창고에 납입할 때에는 처음 7기였는데, 죠우쿄우 4년(1687)부터 2기 줄어서 5기로 했다. 가고시마번에서 오코시마스에 의한 가징분을 거두었던 것은 다른 영지의 결미欠米・출목미出日米・연미延米 등에 상당하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재는 계량 기술에 의해서도 납입액에 차이를 생기게 했기에, 평미레질 방법을 지정했던 경우도 적지 않다. 또한 됫박쟁이를 농민 측에서 나오게 할지, 영주 측의 아시가루足軽나 무가의 하인(中間) 등이 할지에 따라 큰 영향이 있었다. 농민에게서 계량하는 역을 냈을 경우에는 특히 숙련자를 선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는 터이다. 코모로번小諸藩의 어느 나누시의 집에는 길이 3척, 지름 3촌 남짓인 평미레가 있는데, 됫박에 담을 때 이 무거운 평미레로 가장자리를 두드려 가능하면 많이 담게 했다고 전해진다.    

되질의 계량법만이 아니라 됫박 그 자체에 크고 작음이 있어, 영주에게 납입할 때에는 큰 납입 됫박을 쓰고 영주로부터 불하할 때에는 작은 지불 됫박을 쓰는 일도 있었다. 이것은 중세의 장원 영주에서는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일로, 됫박에 크기 차이가 있든지, 평미레가 특별 제작법으로 만들어져(『東福寺文書」) 납입할 때와 지불할 때로 구분해 사용되었다. 히데요시부터는 쿄우마스京枡가 일반적이 되었지만, 센다이번・돗토리번・마츠에번松江藩・와카야마번和歌山藩 등은 납입 됫박과 지불 됫박이 사용되었다. 와카야마의 납입 됫박은 키슈우紀州 됫박 3홉 늘림이라고 불렸다. 코우야산高野山 영지에서도 사용되고, 농민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쿄우호우享保 5년(1720)에는 에도로 기소했을 정도이다.

공미에 부족이 있으면 보충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즈번会津藩에서는 농민이 나쁜 쌀을 지참했다면 미견자(米見の者)・게다이下代가 이를 골라내서 그 쌀에 표식을 찍고 창고지기에게 맡겨 두고서 다음날 다이칸代官이 출장해 보행중歩行衆(역주; 번의 하급 무사단 중 도보 임무를 담당하는 집단으로, 순찰·집행·경호 등의 실무를 맡은 관리층)과 코우가 닌자(甲賀者)를 더해 게다이・미견자와 자세한 조사를 진행해, 나쁜 쌀이라 판명되면 쌀 주인을 불러 체포하고 창고 앞에 하루 종일 효수하고, 쌀은 그곳에 다시 납부하게 한다. 다만 극소의 나쁜 쌀은 규명에 이르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 또한 미견자가 부주의로 나쁜 쌀을 납입하면 그 자를 위법에 처한다는 것이 있었다. 오오가키번大垣藩에서는 겐로쿠 4년(1691)에 오오이타大分의 결미를 일으킨 백성 2명에게 쇠고랑을 채우고, 마굿간 동쪽 도랑가에 사시부터 미시까지 얼굴을 드러내게 했다. 아이즈번에서 백성이 창고에 쌀 납입으로 왔을 때, 미견자나 게다이가 난제를 제시하거나 후려치거나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금령을 내린 바를 보면, 그러한 사실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또한 백성이 음식류를 지참해 게다이나 미견자에게 먹이는 일을 금지한 것도 농민이 그들의 무리한 처치를 두려워해 그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추측된다. 

칸엔 3년(1750)의 이요오오즈伊予大洲의 백성 봉기에서는 연공 납입할 때 창고 역인이 견본 쌀을 내버리는 일을 정지해 달라 요구하는데, 이것은 꽂이에 의한 떨어진 쌀을 부수입으로 하는 일을 가리킨 듯하다. 또한 그때 "평미레 봉으로 폐를 끼칩니다"라고 한 것은 평미레의 봉으로 부정이 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텐포우 8년(1837)의 사도佐渡 일대의 봉기는 납입 미의 계량을 백성에게 일임하도록 요구한다. 농민 쪽에서도 연공미에 물을 끼얹어 분량이나 무게를 늘리는 부정을 행했던 자도 있었기에 그걸 금지하는 번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을 무릅쓴 행위이기에, 그다지 일반화된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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