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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문화

근세 농민 생활사 -1. 서론

by 雜s 2026. 4. 10.

1. 서론

 

소와 말처럼

에도 시대는 말할 필요도 없이 봉건 제도의 시대이다. 쇼우군将軍 다이묘우大名 등의 대토지 소유자가 있고, 농민은 토지에 잡아매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공年貢을 생산하기 위해 일했다. 따라서 그 생활은 그들이 스스로 즐긴다는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의식주의 온갖 방면에 대한 통제가 가해졌다. 연대 책임 제도・감찰 제도・ 밀고 제도, 그러한 것이 꼼짝할 수 없도록 그들을 속박했다. 필요한 것은 그들이 소와 말처럼, 또는 소와 말과 함께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쿠마모토번熊本藩에서 내놓은 법령 중에 백성은 크기에 상관없이 소와 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논밭의 경작에도 비료를 취하기 위해서도, 연공의 수송에도 필요한 소와 말을 가질 수 없는 자에 대해서는 급인給人(역주; 녹봉을 받는 사람)에서 신경을 써주고, 또한 여자 등을 가지고 있는 백성으로 집안일에 일손이 넉넉한 사람은 그 여자를 인신 담보(質奉公)로라도 내놓아 소와 말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함이 중요하다고 한다. 인신 담보는 말할 필요도 없이 몸을 파는 것이다. 경작에 필요하다면 소와 말을 대신해 가장 사랑하는 딸을 팔도록까지 강요하는 것이다. 봉건 영주의 사상을 이만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다. 농민을 구속하는 수많은 법령을 보며, 그 비참한 생활을 그린 다수의 자료를 관찰한 저자도, 처음으로 이 법령을 접했을 때 만큼 경탄을 느낀 적은 없었다. 

에도 시대에 농민의 지위는 바로 이 안에, 이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명확히 보여준다. 요구되는 것은 그 노동력이었다. 이 법령은 분카文化 연대(1804~1818)의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농민은 얼마나 순종적이었을까. 텐나天和 2년(1682) 쿠마모토번의 인구 39만4985명, 칸세이寬政 4년(1792)에 53만2174명, 칸세이 10년(1798) 53만5543명으로 증가했는데, 분카 5년(1808)에는 51만2575명으로 감소한 것에 반해 소와 말은 덴나 2년에 3만5159마리, 칸세이 4년에는 6만527마리, 분카 5년에는 9만1209마리로 급증해 거의 1호에 1마리 평균을 소유하는 데 이른다. 또한 아키즈키번秋月藩에서, 칸세이 2년에 발표한 각서覚書 안에는 토지 소유 백성이 가산을 튼실히 유지하고, 농업에 정진해 연공을 체납 없이 납부하는 것이 '국체의 근본'이라고 한다 .

이러한 생각 위에 갖가지 통제가 더해져, 엄중한 조세 제도가 마련되고, 또 이걸 단속하는 행정 제도가 구축되었다. 그래서 농민은 경작만 하면 좋으니 학문과 유희 등은 필요없다는 주장도 일어난다. 센다이번의 유학자 사쿠라다 코몬桜田虎門의 「경세담経世談』에는 "현세의 이른바 학문이라 하는 것을 농민과 상공인 등에게는 엄히 금해야 한다는 걸 논한다"라는 글이 있어, 그중에서도 농민이 지금의 이른바 학문에 관여하는 일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매우 유해한 일이 많기에, 일절 금단해도 상관 없다. 그 이유는 지금의 학문이란 것은 책상 위에 기대어 책을 읽는 일만 주로 하기에 성誠의 의리는 보이지만, 무언가 고상한 것처럼 여겨져 의리를 알지 못하는 자는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어, 그 때문에 그 본업으로 하는 진흙에 발을 디디고 삼복 더위의 햇빛을 받으며 등을 드러내고 논의 풀을 뽑으며, 추운 바람을 견디며 장작을 등에 지고 눈을 밝으며 헤쳐 나아가는 일 같은 고된 일을 피하려는 마음이 되어 본업을 방해하게 된다. 또한 자부심으로 동료를 얕보고 윗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줄어들어 국정 또는 역인役人의 처리에도 시비를 논하고, 특히 역인이 문맹이라면 쉽게 지시할 수도 없고, 지시를 해도 불복하는 일이 매우 많아져 다루기 어려워진다고 했다. 게다가 이것은 단순히 논의로 끝나지 않고, 고보다 앞선 호우레키宝暦 5년(1755)에 쓴 같은 번의 아시 토우잔蘆東山의 상언上言에 의하면, 민간이 사치하고 태만해져 농업과 잠업을 소홀히 하기에 문무文武 모두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번에서는 금지되었다.

 

 

주거·의류·식사  

 이러한 제도 사상에 놓인 농민 생활에 대해서는 이후의 장에서 상세히 기술하겠지만, 예를 들면 주거를 보면 다다미는 물론이고 마루를 깐 집도 적고, 봉당에 벼의 왕겨를 두텁게 깔고서 그 위에 멍석을 펴고 기거하는 것이 많았다. 저자의 고향은 시나노信濃의 치쿠마천千曲川 연안의 역참 읍내의 일부를 이루고 있던 작은 마을인데, 50호 정도 안에서 다다미를 깔고 있는 집은 3채 뿐이었다. 그 이외는 봉당에 '네코ねこ'를 깔고 있었다. 메이지 30년(1897) 무렵이 되어 드디어 봉당보다는 마루판이 있는 집이 많아지고 손님방에는 다다미를 깔게 되었는데,부엌은 모두 '네코'가 깔려 있었다고 들었다. 시나노에서는 가장 개발된 지방이기에, 시나노 전체도 그러한 상태였을 듯하다. 아니, 일본의 대부분이 그에 가까운 상태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의류에서도 옛날부터 재배되었던 삼베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목면도 이 시대에 자급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이 두 가지가 농민에게 허용된 옷감이었다. 그것조차도 히로사키번弘前藩과 같은 한지에서는 목면은 귀중품이라 겐로쿠元禄 16년(1703)의 법령에서는 일할 때는 목면의 착용을 금하고 베로 한정하며, 다섯 명절(역주; 음력 정월 7일, 음력 삼월 삼짇날, 단오, 칠석, 중양)이라든지 밖으로 나갈 때만 목면을 허용하고, 그것도 고가인 것은 착용해선 안 된다고 명한다. 양잠은 옛날부터 행해지고 있었지만 전국적으로는 보급되지 않아서, 나가사키에서 행해지던 무역에서도 수입품은 생사류를 주로 하고 있을 정도였기에, 비단류의 착용은 일반 농민에게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밖에 염색에서도 제한이 있어 날염도 금지되었던 것은 나중에 기술하겠다. 

식사에 대해서 말하면, 쌀을 농사지으면서 농민 자신의 음식은 잡곡을 주로 하고, 나무 열매나 들풀과 산채까지 먹었다. 쌀밥을 짓는 건 1년에 정월과 백중에 한하고, 또는 선조의 제삿날을 위해 쌀을 구해 부처에게 공양하고 그 나머지 밥을 제일의 성찬으로 친척 일족을 맞이해 재를 올린다는 히다飛騨 사람의 이야기, 피안화의 뿌리를 소금간 해서 익히거나, 구약나물 덩이줄기를 익힌 걸 아침밥으로 하고, 산마를 이로리에서 찐 것을 저녁밥으로 했던 아와키야다이라阿波木屋平의 이야기, 그들은 결코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의 생활은 아니었다.

농민의 생활은 대토지 소유자인 봉건 영주 및 그 가신들의, 전 국민의 10% 정도에 상당하는 사람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위되었다. 기근인 해에는 나무와 풀의 뿌리를 캐내고, 개와 고양이 소와 말을 먹고, 사람의 사체를 먹고,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여서 먹고, 몇 만 몇 십만 명이란 아사자를 발생시켰던 때조차조, 무사에서는 아사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텐보우天保의 기근에 신죠우번新庄藩에서도 많은 굶주린 사람이 발생해 죠우카마치城下町로 가서 걸식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시중 상가에서는 줄 것도 없어지고 그저 쫓아내기만 하고, 남은 찬밥이나 식은 국을 주었던 것은 가신의 무사 뿐이었기에, 나중에는 다른 곳의 거지도 영내자의 흉내를 내고 가신으로 숨어 들어갔다고 한다. 쿄우호우享保 17년(1732년) 충해에 의한 시코쿠四国・츄우고쿠中国・사이고쿠西国 대기근 때에, 후쿠오카번에서 오사카에서 구입하거나 막부에게서 융통해서 구조를 위해 지출한 쌀은 합계 13만 6000섬 남짓이었는데, 그 내역은 가신의 여러 무사에게 이듬해 가을까지 부조미扶助米로 6만 섬, 에도 저택 가신의 여러 무사에게 2만 3000섬, 영지 곳곳의 극빈층의 굶주린 사람에게 보리 수확할 수 있기까지 구제로 5만 3000섬으로, 60% 이상은 번 무사의 구제에 충당했단 것은 앞에 기술한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장사의 금지

또한 봉건 사회는 자연 경제 위에 성립한 것이기에, 그걸 유지하고자 한다면 교환 경제의 발달을 억제하고 자급자족의 생활을 강제해야 한다. 에도 시대에는 이미 도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해서 자연 경제를 점차 붕괴시켜 갔다. 바꾸어 말하면 봉건 사회의 발밑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갖가지 제한이 더해져, 농민이 상품을 구하는 걸 제한하고 농촌에서 상업이 행해지는 걸 방지하며, 또한 농민이 상품을 생산하는 걸 금지하는 정책이 집행되었다. 

쿠마모토번의 죠우쿄우貞享 원년(1684) 농민 법도에서는 농촌 지역에 거주하며 논밭을 경작하지 않고 장사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금하고, 그러한 자는 쿠마모토 그외의 상공업 마을(宿町)로 이주할 것을 명하고, 또한 농촌에서는 종래부터 허가된 품목 외에 장사품을 들여오는 것을 금하며, 교우호우享保 13년(1728)의 명에서는, 농촌의 소규모 장사를 한층 엄격히 조사를 하고 마을마다 다시 점검해, 그러한 자가 있으면 상공인 마을로 이주시키고, 역인을 파견하여 조사할 것이니, 숨겨 두었다면 본인은 물론 오인조·쇼우야庄屋까지 처벌한다고 하여, 상인을 농촌에서 방축한다 명하고 있다. 또한 타지에서 농촌으로 들어오는 상인은 소금·농기구·잡어 외에는 장사를 금하고, 그밖의 상품을 가지고 왔다면 본인과 짐을 압수하고, 감시인을 붙여 두고서 소우죠우야惣庄屋(大庄屋)에 보고해 그 지시에 따라 무라쇼우야村庄屋로부터 상대편 쇼우야 또는 마치가시라町頭에 통보하고, 인수인이 와야 넘겨준다. 또한 이러한 류의 상인에게는 숙박도 허가하지 않는다. 규정 외의 상품을 구매하는 자가 있으면 본인·오인조·쇼우야까지 처벌한다. 무면허 상인이 왔다면 본인과 짐을 압수하여 소우죠우야에 보고한다. 소우죠우야로부터 상급 역인에게 보고하고, 그에 따라 농촌의 감옥(在牢, 군 또는 향에 있는 감옥)에 가둔다. 타국에서 들어온 상품은 일절 구매해서는 안 된다. 백성의 의류 그밖의 우산·비옷·삿갓·등롱 등의 금제품禁制品은 일절 사용해서는 안 된다. 남성의 머리 손질(髪月代)을 미용사에게 의뢰해서는 안 된다. 국내 상인은 면허증을 휴대하고 소매 행상을 해야 한다고 이처럼 통달하고 있다. 겐분元文 2년(1737)에도 타국 상인이 도매상에게 직판하는 것은 별개로 하되 행상 소매는 금지하고, 칸엔寛延 2년(1749)에는 나아가 나그네의 성 아래에 있는 숙소를 조사해 농촌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한다.

쿠마모토번 농촌의 장사품은 소금·농기구·잡어·정어리·목면·기름·붓 종이 먹에 한정되었는데, 호우레키宝暦 3년(1735)에 모시풀과 누룩을 추가하고 약은 특별히 인정하며, 메이와明和 7년(1770)에는 차·담배·불쏘시개·등심지・모기향・양초・명주솜・지역산 천을 추가한다. 이건 차츰 상품의 유입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단 걸 보여주는데, 또 단속을 위해서는 야쿠카타役方 요코메横目·테나가즈키手永付 요코메横目를 마을에 순회시키거나, 백성이 몰래 장사하는 걸 금하기 위해 밀고자에게는 그 상품을 준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농촌에서 가양주를 파는 자가 많았던 듯하여, 토쿠리徳利 술의 금령은 종종 내린다. 또한 수확할 때 마을을 돌며 상품과 곡물을 교환하는 자도 있었다. 

후쿠오카번에서도 농촌에서 은밀한 장사를 금하는데, 겐분 3년(1738)에 행상 제도를 정해 농촌에서 행상을 허용하는 품목은 소금・자반 생선류・기름(등유・머릿기름)・등심지・불쏘시개로 한정하고, 행상인은 후쿠오카 하카다의 상인 가운데 행상을 하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는 자에 한해 면허증을 주어 장사하게 했다. 겐분 5년에 무면허 상인이 2명, 농촌으로 들어왔기에 처벌을 받고, 법에 따라서 백성이 되었으나 두 사람 모두 경작을 알지 못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에 돌려보내고, 두 사람은 벌금 은 2문씩, 마치도시요리町年寄(역주; 에도 시대, 주요 도시에서 시중의 공무公務를 처리하던 벼슬아치)는 8문 6푼씩을 징수 당하고 끝난 일이 있다. 나아가 칸보우寛保 원년(1741)에는 후쿠오카 하카다의 상인이 행상에 나서는 건 자유로이 하게 하고, 엔쿄우延亨 2년(1745)에는 아키즈키번秋月藩 영의 상인에게도 면허품에 한정해 장사하는 것을 허용했다. 호우레키 13년(1763)에는 행상의 면허품을 증가시켜 차・담배・기름・상투용 끈・머릿기름・종이류・헌 솜・모시풀 바늘・등심지・불쏘시개・붓과 먹・생선류・해조류・식초・간장・소금으로서 면허증 1장에 대해 은 3문씩의 운상運上(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행상인이 마을에 들어가는 걸 금하는 것은 이 번도 마찬가지이다. 

야나가와번柳河藩에서도 쿄우호우 20년(1735)에 향에 주거하는 농민은 오로지 논농사의 업을 부주의하지 않게 힘써야 하고, 백성으로서 장사를 겸하는 건 농사 태만의 근원이기에 앞으로는 엄히 금지한다고 명하고, 만약 생활할 수 없이 어려운 사람은 읍내로 거주지를 옮겨 한결같이 상인이 되라고 한다. 번이 마을에서 행상을 허용했던 것은 소금・정어리・누룩・기름・면・개맛조개・함박조개・전갱이・바지락의 8종류인데, 이외에도 매우 지장이 있는 건 충분히 검토한 뒤 허용하기도 한다. 또한 밀주를 금하는 건 마찬가지로 사는 쪽도 파는 쪽도 모두 처벌하고, 쇼우야도 못 보고 듣지 못한다면 같은 죄로 처벌한다고 한다. 오카야마번岡山藩에서 메이레키明暦 3년(1657)에 내린 법령은 오카야마 및 주변 지역의 술집에서 법을 어기고 백성에게 술을 파는 자가 있다면 술 도구를 몰수하고 다시는 술집을 열지 못하게 한다. 또한 법을 어기고 술을 산 백성은 논밭을 빼앗고 다른 백성을 대대로 섬기는 하인으로 만든다는 엄한 것이었다. 농민은 스스로 술을 담글 수밖에 없는데, '쉽사리 쌀을 먹을 수 없는' 시대이기에 그것도 자유롭지는 않았다.    

센다이번仙台藩에서는 죠우쿄우 원년(1684)에 농촌에서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품목을 규정하는데, 그중에는 비단・명주는 물론 흰홑옷(晒帷子)・흰수건・줄무늬천(糸縞)・고관 줄무늬천(高官縞)・인도 무명・중국 무명・중국 염색의 문양 넣은 정장 상하 띠 옷감류・삼베 상하 기타 일체의 상하 옷감, 고리버들・거울・손톱깎이・재단 도구・공작용 칼・작은 칼・비옷・함・신발 칠기상자・서적류・옷롱・모기향・도시락・찬합(은도금을 제하고)・버선 끝(목면 끈을 제하고)・북・큰북・활과 화살・창・큰칼・죽도 도구・눈신(雪駄)・오동나무 나막신・나막신・양탄자・동銅・놋쇠・철물류・다리미・포장용 염색끈・흰목재 젓가락・옷칠 젓가락 등이 있다. 서적을 금하고 있는 건 앞에 기술한 학문 금지와 아울러 이 번의 일관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농민에게 자급자족 생활을 시켜서 봉건 제도의 붕괴를 막으려고 하는 정책도, 무사 자신이 도시 생활을 보내며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촉진한다는 모순이나, 쌀 이외의 물산을 장려해 재정난을 극복하려고 하는 태도나, 기타에 의해 번 스스로 변경해 가야 했다. 농민에게 조세 일부의 금납金納을 인정했던 건, 당연히 농민에게 돈을 벌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짚신・조우리(草履)・수공예품을 화폐로 바꾸고, 도시 근처라면 채소를 팔게 되며, 그걸 가지고 미납米納을 대신하고 부역을 대신하며, 또한 생활비로 충당했다. 농촌에서 금지되었던 상업도, 농한기 돈벌이로 인정되고 병약해 경작할 수 없기에 허용되어, 염색집이 생기고, 지붕 이는 장인・석공이 전문적이 되어 갔다. 물건을 사는 사람을 고용하는 돈은 농민이 직접 물건을 팔아서 얻은 것이다. 이리하여 교환 경제는 자연 경제를 침식해 가며, 도시나 교통의 발달, 화폐 제도의 확립은 그 경향을 한층 가속화했다.  

 

 

농민의 고통

막부나 여러 번의 재정난은 당연히 농민에 대한 중세가 되어 나타났다. 단순히 조세가 무거워질 뿐만 아니라 그동안에 역인의 부정이 더해져 농민의 고통은 한층 강해졌다. 막부에서도 중기 이후는 로우츄우老中 이하의 여러 역인에 취임하는 데에 모두 뇌물을 필요로 할 만큼 기강이 문란해졌기에, 직접 농민에게 접촉하는 하급 역인의 부정이나 횡포는 말로 할 수 없었다. 만약 농민의 부담이 정규 조세 뿐이었다면, 그 정도까지는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부정이나 횡포만이 아니었다. 하천 개수 공사에 1000명의 사람으로 충분한 바를 2000명 징집하는, 농한기에 하면 좋을 걸 농번기에 한다는 종류도 적지 않았다. 2일이나 3일로 끝날 소송 문제가 반 년이나 1년도 걸리는, 호출될 때마다 죠우카마치城下町에 가고 에도에 가며, 소송을 제기하면 대부분의 집은 파산했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5대 쇼우군 츠나요시綱吉는 죠우쿄우 4년(1687)에 살생금지령을 내렸지만, 이 때문에 죄를 뒤집어쓴 자가 속출하고, 병든 말을 버린 10명의 사람이 유배에 처해지고, 비둘기를 돌로 맞춘 요리키与力 도우신同心은 외출 금지를 명받았고, 5세 아이의 병을 치료하려고 바람총으로 제비를 쏘아 죽인 부모 2인은 참수형에 처해지고, 물어 달라붙은 개를 칼로 베어 죽인 사무라이는 할복을 명받았으며, 개를 때린 무가의 하인은 그 직업을 잃는 상황이었다. 에도의 요츠야四谷・오오쿠보大久保・나카노中野의 개집에는 몇 만 마리라는 들개를 수용하고, 또는 마을 근처의 농촌에 키우게 시키며, 날마다 개 1마리에 백미 3홉, 된장 50문, 정어리박 1홉씩을 주었다. 이 때문에 칸토우 여덟 주州(역주; 사가미相模, 무사시武蔵, 아와安房, 카즈사上総, 시모우사下総, 히타치常陸, 코우즈케上野, 시모츠케下野)의 백성은 수확량 100섬에 대해 1섬씩 개 급여를 내고, 에도 시네에서는 한 읍내에서 현미 5말 5되씩을 냈다. 에도 시내에는 개 감찰관이 돌아다니며 개를 때린다든지 학대한다든지 하는 걸 발견하면 처벌했다. 시민은 장구벌레를 사람이 밟아 죽인다고 해서 하수를 길에 뿌리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가 츠나요시가 죽기까지 23년이나 계속되었는데, 260~270의 다이묘도 2만 여 직속 무사도 누구 한 사람 간하는 자가 없었다. 이러한 전제 정치의 시대에, 농민은 어디에 호소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최후에는 도망치거나 봉기를 일으켰다. 몇 천, 몇 만 명이 다른 영으로 도망하거나, 몇 만, 몇 십만의 농민이 거적 깃발을 들고 낫과 괭이를 쥐고서 조세의 감면이나 지방관(代官)의 경질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종종 희생자만 내고 끝났 일도 있지만, 또한 그 목적을 달성한 일도 적지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는 조직도 통제도 없고, 또한 봉건 제도 그 자체를 이해하고 그걸 무너뜨릴 지식도 사상도 의욕도 부족했기에, 메이지 유신은 그들 자신의 손으로는 이루지 못했다. 그것이 유신 이후의 농민 생활과도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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