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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문화

근세 농민 생활사 -3. 행정제도

by 雜s 2026. 6. 4.

3. 행정제도

 

 

(1) 다이칸代官

 

막부령의 군다이郡代・다이칸

막부에서는 직할령을 지배하기 위해 회계(勘定) 부교우奉行의 관할 아래에 군다이 또는 다이칸을 두었다. 군다이에는 칸토우 군다이・미노美濃 군다이・사이고쿠西国 군다이・히다飛驒 군다이 등이 있는데, 칸토우 군다이만은 로우쥬우老中에 직속해 에도 초기부터 이나伊奈 씨가 세습한 바로, 칸세이寛政 4년(1792)에 죄를 받기까지 이어졌다. 칸토우의 막부령은 대부분 그 지배 아래에 있으며 관사는 에도에 있었다. 미노 군다이는 카사마츠笠松에 관청이 있고, 미노・이세伊勢 두 지방의 막부령을 지배했다. 사이고쿠 군다이는 처음엔 훈고豊後 다이칸이라 부르고 훈고 한 지방을 지배했는데, 이후에 큐슈 전체의 막부령을 지배하게 되어 호우레키宝曆 9년(1759)에 사이고쿠 군다이로 바뀐 것이다. 관청은 훈고의 히다日田에 있었다. 히다 군다이는 안에이安永 6년(1777)에 새로 설치된 것으로 타카야마高山에 관청이 있으며, 히다・카카加賀・에치젠越前・미노의 막부령을 지배했다. 그밖에 초기에는 셋츠摂津 카와치河内 군다이・아마카사키尼崎 군다이・미카와三河 군다이・탄바丹波 군다이 등이 있었다. 

다이칸은 40명에서 50명 있으며, 쿄우토京都의 코보리小堀 씨・스미노쿠라角倉 씨・키무라木村 씨, 오오츠大津의 이시하라石原 씨, 오우미近江 시가라키信楽의 타라오多羅尾 씨, 나가사키의 타카기高木 씨, 이즈伊豆 니라야마韮山의 에가와江川 씨처럼 세습인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1대에 한해 본봉 외에 수당을 지급받기도 하고, 이밖에 다이칸소代官所 비용으로 공조의 부가세인 구미口米를 지급받았다. 다이칸도 관청을 갖추고, 그 지배지는 다이칸의 씨명을 붙여서 아무개 지배소라고 했다. 그 부하에 테츠키手附・테다이手代가 있다. 처음에는 테다이만으로, 다이칸이 자유롭게 채용과 파면을 했는데, 쿄우호우享保 이후 쇼우군의 직속 무사 가운데 후다이譜代・카카에세키抱席 등에서 선발되었기에 그걸 테츠키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직무의 성질에 따라 오오모토지메大元締・모토지메元緒・테다이가시라手代頭・와키테다이脇手代・쿠라카타야쿠蔵方役・카키야쿠書役・에도 가로우家老・에도 와키테다이脇手代・츄우고쇼우中小姓 등이라 불리고, 그 수는 임지 및 에도 관청을 아울러 총 수 7~8명에서 18~19명을 보통으로 하며, 특별 임무가 있는 곳은 30~40명에나 이르렀다. 테츠키는 녹봉 30가마니에 하루 쌀 10홉을 평균으로 하고, 그밖에 수당인 쌀과 금이 있으며, 테다이에는 정해진 녹봉은 없고 다이칸소 경비 중에서 급여로 금을 지출했는데, 쿄우호우 10년(1725)에는 모토시메 테다이는 30량에 하루 쌀 25홉, 기타 테다이는 20량에 하루 쌀 25홉을 표준으로 했다. 세습인 자는 별도로 하여, 다이칸 자신은 에도의 저택에 있는 것이 보통이고, 임지의 관청에는 테다이들이 있었다.

 

군다이나 다이칸의 임무는 여러 번의 통지에 의해 알려졌는데, 칸에이寛永 20년(1643) 3월의 각서에 의하면(「御当家令条」),

1. 매년 봄여름에 다이칸소로 가서, 제방 수축 등의 공사를 꼼꼼히 시찰할 것, 아울러 보리 농사의 풍흉을 확인할 것.

1. 가을철 여러 마을을 순시하고, 논밭의 모습을 상세히 시찰하고, 그 상황에 따라서 연공을 징수할 것.

1. 신상이 여의치 않은 백성에게는 계속 독촉하도록 유념할 것.

1. 나누시·백성에게 법도의 취지를 숙지시켜 둘 것.

1. 경미한 위배자는 날수를 정해 제방과 하천 보수 또는 대나무와 나무 심기, 그밖의 곳을 위한 공사를 명하고, 죄가 무거운 자는 부교우소奉行所에 고발해 그 지시에 따를 것. 

 

 

위와 같이 경범죄자를 처벌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듬해 쇼우호우正保 원년(1644) 정월의 각서에는 더 상세한 지시가 있다. 

1. 매년 묘목의 씨앗을 심게 하고, 산림과 대나무와 나무를 심게 할 것.

1. 제방·우물·수로·하천 보수는 매년 정월 11일부터 공사를 명하고, 가뭄 손상인 곳은 물이 닿도록 하며, 범람하여 논밭이 손망한 곳은 배수로 파기 등을 하게 할 것.

1. 5인조 점검을 할 것.

1. 크리스찬(吉利支丹) 종문 조사를 철저히 할 것.

1. 연공미의 수납과 운송에 유념해 부정이 없도록 할 것.

1. 다이칸소 관내에 소송이 있을 때는 심문을 행하고, 해결이 어려울 때는 증문과 증거를 수집해 쌍방을 부교우소로 이송할 것.

 

이상을 크게 나누면 일반 행정에 관한 것과 소송에 관한 것인데, 소송에 대해서는 경범죄인을 처분하는 권한을 지니는 데 그쳤고 주요한 임무는 일반 행정에 있었다. 그 또한 중심은 연공 수납을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죠우오우承応 원년(1652) 정월의 각서에(「御当家令条」)),

1. 다이칸들의 훌륭한 통치란 가뭄 피해를 입은 곳에는 용수를 끌어들이게 하고, 수해를 입은 곳에는 배수로를 파게 하여, 차츰차츰 마을 형편도 나아지게 하고 백성의 살림살이도 좋아지게 하며, 점차 조세 수납도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또한 통치 내용을 백성이 진심으로 고맙게 여겨, 시기를 어기지 않고 경작에도 힘쓰고,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세심히 가르쳐야 할 것이다. 아울러 별다른 지장이 없는 황무지와 산야 등이 있으면 묘목을 심고 산림을 조성해야 한다는 취지를 지시할 것.

이라고 서술하고 있는 건 그 사정을 잘 설명해 준다. 엔포우延宝 8년(1680) 윤 8월의 조목에는(「御当家令条」),

1.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다이칸 각자는 항상 백성의 고초를 헤아려 굶주림과 추위 등의 근심이 없도록 조치할 것.

1. 나라가 평온할 때는 백성도 안정되어 있으나, 사치스러워지면 자기 본업에서 이탈하기 쉽다. 모든 백성의 의식주 제반사에 부족함이 없도록 조처할 것.

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들에 의해 다이칸 직무의 대요는 명확하다. 그들은 이처럼 직접적으로 민중에 접촉했기에, 그 좋고 나쁨은 영향을 주는 바가 심각했다. 그들 중에서 초대 칸토우 군다이였던 이나伊奈 비젠노카미備前守 타다츠구忠次, 쿄우호우 연중 이와미국石見国에 고구마를 도입해 고구마 다이칸이란 칭호를 얻은 오오모리大森 다이칸 이도井戸 헤이자에몬平左衛門 마사아키라正明, 『민간성요民間省要』란 저술에 의해 막부에 불려와 사카와강酒勾川 치수 등에 공적을 남긴 타나카 큐우구田中丘隅, 토목 사업 외에 음덕창陰徳倉과 맹인전盲人田을 설치해 빈민과 맹인을 구제하고 히로세 단소広瀬淡窓를 실무 대신 대우로 발탁한 사이고쿠 군다이 시오노야塩谷 다이시로大四郎 마사요시正義, 무츠陸奥의 하나와塙 및 코오리桑折의 다이칸으로서 36년 동안 민정에 헌신한 테라니시寺西 쥬우지로우重次郎 타카모토封元, 히타치常陸의 다이칸을 역임한 칸세이寛政의 3박사博士 가운데 하나인 오카다 칸岡田寒泉 같은 이들은 좋은 관리로 칭송받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학정을 해서 민중을 괴롭게 한 악질 다이칸도 적지 않았다. 시바노 리츠잔柴野栗山은 막부에 올린 상서에서, 연공을 한 알이라도 더 거두어들여 그걸 근무의 공으로 삼아 하루라도 빨리 입신하는 것만을 생각하니, 전대의 다이칸이 10만 섬을 창고에 넣는 곳에서 3~4천 섬이나 여분으로 거두어들인 이후의 다이칸은, 또 거기에 1~2천 섬이나 거두어들이고, 그 다음은 500~1천 섬이나 거두어들이는 동안에는 다이칸이 10명쯤 교체되면 10만 섬의 땅에서 14~15만 섬이나 납입하게 된다. 그러나 그건 다이칸만의 죄는 아니고, 위에서 연공을 한 알이라도 더 거두어들이는 것을 공로로 삼아 승진시키고, 그밖의 관습이나 도적 등의 일은 전혀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러 번의 다이칸

여러 번에서도 코오리부교우郡奉行, 다이칸 등의 명칭에 따라 대체로 똑같은 업무를 하고 있었다. 나고야번에서는 처음에 코오리부교우는 번 무사의 급지給地를 관리하고 다이칸은 번주의 창고 납입 토지를 관할하는 구별이 있으며 나고야의 나라 부교우소 안에서 정무를 집행했는데, 텐메이天明 연중부터 코오리부교우를 중지하고 모두 다이칸으로 하고, 그 관할지에 거주시켰다. 그 수는 쿄우와享和 2년(1802) 이후 9명이고, 그 위에 오오다이칸大代官이 있어서 나고야에 있었다. 이건 영내를 아홉 행정구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야쿠다카役高(역주; 직역에 따른 녹봉)는 오오다이칸과 나루미다이칸鳴海代官은 550섬, 기타는 70가마니였다. 후쿠이번에서는 코오리부교우 아래에 다이칸이 있고, 부교우소의 관할 구역은 영내를 시대에 따라서 3 또는 4로 나눈 것으로, 각각에 부교우 1명이었다. 다이칸은 막부 말기에는 영내를 14로 나누어 각 1명을 두고, 관할하는 마을 수는 대략 30~50, 책정 수확량으로 2만 섬 전후였다. 그 아래의 역인에는 우케코미受込・게다이下代・카키야쿠書役(역주; 서기) 등이 있었다.

카나자와번에서는 케이안慶安 4년(1651)부터 개작법改作法(開作法이라고도 씀)에 착수해 경지 정리·새논 개발·농사 장려를 적극적으로 행하고, 또한 세제의 개혁도 행하여 메이레키明暦 2년(1656)에 거의 성공했는데, 그것으로 개작 부교우를 두고서 농정을 관장시켰다. 그 정원은 칸분寛文 원년(1661)에는 4명이었는데, 차츰 증가해 겐로쿠元祿 시기에 10명이 되었다. 코오리부교우가 소송 재무를 관장하는 데 대해 개작 부교우는 주로 농사의 권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매년 정월 17일 여러 군의 토무라十村(오오죠우야大庄屋에 해당)을 카나자와에 불러 모아서 개작법의 요령을 입으로 전하는 외에, 일구기·모내기·제초라는 3번의 정기 순시를 한다. 일구기 검사는 입하 전 18일 동안, 모내기 검사는 파종이 거의 종료되는 5월 하순부터 6월 하순, 제초 검사는 하지 이후 18일 동안에 행하고, 모내기 검사와 제초 검사할 때는 곳곳에 마을 역인을 모아서 권농의 취지를 고시했는데, 이것을 2번의 분부라고 했다. 이외에 소송의 논지나 토지가 변동된 곳의 시찰, 흉년의 자람새 검사 등 임시로 군 안에 출장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림5 벼농사의 준비, 땅 일구기    

 

 

 

카고시마번에서는 캇테카타가로우勝手方家老의 아래에 코오리부교우가 있고, 그 역소를 코오리자郡座 또는 코오리카타郡方라고 하며 농정 전반을 담당했다. 코오리부교우의 아래에 지방검자地方検者가 있어서 군 안을 순회하며 농사의 감독, 공조의 독촉을 담당했다. 그에 협력하는 것은 각 향의 토코로야쿠所役였다. 원래 카고시마번 영지에는 외성外城(토죠우)이라는 행정 구획이 있어, 텐메이 4년(1784)에 향이라 고쳤는데, 이것은 중세 이래의 성채를 중심으로 했던 것으로 대부분은 성이 있는 산에 붙어 이어져 산기슭(후모토麓)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으며, 그곳에 번의 직할지가 있으면 지토우카이야地頭仮屋(地頭館), 사령이 있으면 료우슈카이야領主仮屋(領主館)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토착 무사 또는 사령주私領主의 가신이 거주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 바깥 둘레에는 마을 및 읍내(町)・갯가 등이 있어서 그것을 포함한 것을 외성 또는 향이라 불렀다. 그 수는 칸에이 16년(1639)에는 사령을 제하고 87개소, 엔쿄우延享 이후는 직할지 92개소, 사령 21개소, 합계 113개소로 이루어져, 속칭 102외성 또는 120외성이라 불렀다. 한 외성은 몇 개 마을 또는 몇 십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를 지배하는 것이 지토우인데, 처음은 그 땅에 있는 이지토우居地頭였는데 칸에이 무렵부터 대부분은 성 아래 거주하게 되고 가로우 이하 중역 등을 겸무하는 카케모치掛持 지토우地頭가 되며, 전임 이지토우를 두었던 곳은 코시키지마甑島와 나가시마長島의 인근 바다 방비의 지점뿐이었다. 지토우는 거의 관내에서 부임하지 않고, 토착 무사 중에서 임명하는 토코로야쿠가 행정을 담당한 것으로, 그 가운데 토착 무사 토시요리年寄・요코메横目・쿠미가시라組頭를 3역이라 하고, 기타에도 많은 토코로야쿠가 있으며, 코오리郡 미마와리見廻・하시코우조櫨楮 미마와리・미조溝 미마와리 등이 있어서 경작(作職)・공조貢租・부역(夫仕) 기타를 분장했다. 각 마을의 쇼우야도 이 번에서는 토착 무사의 직으로, 다른 번에 비교하면 영주의 세력이 그만큼 강하게 농민에게 미쳤다. 경작의 지도 간섭도 다른 번에서 볼 수 없을 만큼 철저했다. 또한 메이지가 되어 정촌제町村制가 시행되었을 때, 대부분은 이 향을 단위로 신정촌新町村을 만들었기에, 카고시마현의 정촌은 다른 부현에 배가 되는 면적과 인구를 가진 것이 되었다.

하기번萩藩에서는 영내를 재판宰判(사이반)이라 부르는 행정구획으로 나누었다. 이건 케이안 4년(1651)의 창시(번 초기 케이쵸우慶長 연간에도 이 제도를 볼 수 있음)라고 이야기되며, 미타지리三田尻・오오시마大島・쿠카玖珂・야마시로山代・카미노세키上関・쿠마게熊毛・하나오카花岡・토쿠지徳地・야마구치山口・오고오리小郡・후나키船木・요시다吉田・미네美禰・마에오오츠前大津・사키오오츠先大津・토우시마当島・하마사키浜崎・오쿠아부奥阿武의 10인 재판으로 나누고, 칸분 연간에는 21인 재판, 막부 말에는 16인 재판이 정상적 상태가 되었다. 행정구획인 재판의 역소를 칸바勘場라 하고, 그 수장을 초기에는 소무대역所務代役, 이후에는 다이칸역代官役이라 하고, 재판에 따라서는 도합인역都合人役이라고 했다. 

다이칸의 휘하 관료에는 감정勘定役(칸죠우야쿠, 번의 재정과 회계 전반 담당)・산용방역算用方役(산요우가타야쿠, 수지 계산과 장부 검산)・사사방寺社方(지샤카타, 번 안의 사찰과 신사 관련 담당)・보청방普請方(후신카타, 번 안의 토목과 건축 공사 관장)・산방山方(야마카타, 번 안의 산림 담당)・기록방記録方(키로쿠카타, 번의 공문서 작성과 보관 등을 담당)・심소역番所役(반쇼야쿠, 번의 경비와 검문, 통행 담당)이 있으며, 감정역은 번주가 친임하는 역으로 번주의 뜻을 직접 받는 지위이고, 기타는 상급자를 통해 명을 받는 지위이다. 만지万治 3년(1660)의 군중제법郡中制法에 나타난 코오리부교우나 다이칸의 직무 규정에 의하면, "여러 군에 몇 명의 다이칸을 둘 것, 첫째는 국민 무육撫育을 위하여, 둘째로는 전답 수리를 게을리 하지 않고 그곳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할 것, 이는 국세国勢의 근본이니 오로지 서로 삼가야 할 것, 셋째로는 백성 농업을 힘쓰지 않고 헛되이 지내는 자에게는 그 농사일을 가르치고, 그 도리를 분별해 알도록 이끌 방도를 갖추어 그 제철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하며, 넷째로는 백성의 교만함을 억누르고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도록 명해야 하며" 등 9가지 조항에 이르는 조문이 기록되어 있다.

아키타번에서는 코오리부교우 6명이 1군씩을 총괄하고, 군 안의 요소에 둘 내지 다섯 곳의 역옥役屋을 두고 봄과 가을 두 차례 순회하여 형사를 제외한 군 내의 일체 사무를 재허裁許했다. 역옥마다 음미역吟味役(심문 담당) 1명과 견회역見回役(순찰 담당) 2명을 파견해 작은 일은 그곳에서 재결시키고, 중요한 일은 스스로 재결했다. 부교우는 평일은 성 안 대기소 또는 어회소御会所 안의 대기소에 출두해 각 코오리부교우와 군의 행정에 관한 이해득실을 담합했다. 또한 검지역検地役의 지휘를 하고, 논밭 개정을 할 때에는 직접 출장해 실지 면적을 검정하고, 또한 역마 등을 관장했다. 군방郡方 음미역은 아랫사람으로부터는 오다이칸御代官 또는 오탄御担이라 불리던 역으로, 각 역옥에 1명씩 파견되어 코오리부교우의 명을 받아서 그 담당 마을을 감리하고, 마을 주민의 납세 및 민사에 관한 소송의 조정을 담당했다. 군방 견회역은 담당 마을들을 순시하며 상황을 감찰하고, 변사·화재 등의 검사나 사소한 공사 소송은 음미역과 함께 조정을 담당했다. 코오리부교우 지배에는 이외에 군방 아시가루足軽가 있었는데, 여섯 군 총계 200명 남짓으로 군의 크기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1조 20여 명으로 각 군에 거주하며, 연공 태납자 등이 있으면 독촉을 하고, 또한 마을들을 순회하며 단속을 담당했다.   

 

 

 

 

 

(2) 오오죠우야大庄屋

 

카나자와번의 토무라十村

다이칸이나 코오리부교우와 마을 역인의 중간에는 일반적으로 오오죠우야 또는 소우죠우야惣庄屋・요우모토用元・오오키모이리大肝煎 등이라 부르는 것이 있었다. 카나자와번에서는 마에다前田 씨가 입국했을 때, 각지의 키모이리를 오야마尾山(카나자와)로 모아서 서약서를 쓰게 했는데, 그때에는 '오토나백성をとな百姓'이라 하고 있었다. 그 뒤, 10개 마을 정도를 한 조로 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를 고우키모이리鄕肝煎・키모이리가시라肝煎頭・쿠미가시라組頭 등이라 불렀는데, 케이쵸우 9년(1604)에 토무라라고 바꾸었다. 토무라가 지배하는 조를 토무라구미十村組라고 했는데, 이 조가 차츰 합병 등으로 큰 조합이 되어 수십개 마을까지 되었다. 쇼우오우承応 2년(1653)부터 만지 원년(1658)에 걸쳐서, 그들 토무라 가운데에서 20명 정도를 녹미를 지급받는 사람으로 삼았기에, 그것을 오후치닌토무라御扶持人十村라고 한다. 나아가 칸분 원년(1661)에 한 군에 한 명씩 정도, 군 안의 총 토무라의 감독이란 의미로 지배하는 조를 갖지 않은 무쿠미오후치닌토무라無組御扶持人十村를 두었다. 또한 토무라가 되어야 할 자가 견습 중에는 토무라나미十村並라 하고, 토무라를 오랜 세월 맡았던 자나 특별 공적이 있던 자에게 토무라레츠十村列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무쿠미오후치닌토무라・무쿠미오후치닌토무라나미・무쿠미오후치닌토무라레츠・오후치닌토무라・오후치닌토무라나미・오후치닌토무라레츠・히라토무라平十村・히라토무라나미・히라토무라레츠의 9종이 있었다. 분세이文政 4년(1821)에 잠시 토무라 제도를 폐지하고, 소우토시요리惣年寄・소우토시요리나미並・토시요리나미年寄並・무야쿠토시요리레츠無役年寄列 등이라고 개칭했지만, 텐포우天保 10년(1839)에 예전으로 돌아갔다. 그때 오후치닌토무라레츠까지는 성씨 쓰는 걸 허용했다. 이들 토무라는 각 군의 대백성 가운데 가문이 있는 자 중에서 같은 역의 사람들이 인선을 해서 산용장算用場 부교우에게 청원해 임명되었다. 그들의 저택에는 해자를 두르는 등 중세의 작은 토호의 흔적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있었다. 토무라는 그 군 안의 자를 선임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군 안에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다른 군의 자에게 맡기는 때에는 힛코시引越 토무라十村라고 했다. 그러나 용무에서 다른 군의 일을 하는 것은 별개이다. 

토무라의 급료로는 그 조 안의 15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 1인당 2되씩 부과하는 초역미鍬役米(쿠와야쿠마이)가 있었다. 초역미는 괭이 1자루에 7일씩의 공사 부역(普請役)을 명했던 것을 겐나元和 2년(1616)부터 2되씩의 쌀로 토무라의 급료 쌀로 했던 것이다. 조 안의 자가 타령 타국으로 나가지 않도록 토무라가 단속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무쿠미오후치닌토무라에게는 초역미가 없기에, 코우카弘化 원년(1844) 이후는 20섬(노토能登・엣츄우越中에서는 30섬)씩 급여했다. 또한 토무라에 준하는 것으로 신덴사이쿄新田裁許가 있어, 이것은 새논 개발의 결과 한 마을이 생겼을 때 그곳의 지배를 위해 둔 것으로 신카이新開 토무라라고도 불렀다. 이것에도 오후치닌신덴사이쿄·오후치닌신덴사이쿄레츠가 있었다. 신덴사이쿄는 카케키키야쿠蔭聞役라는 군 안의 감사직(横目)을 겸임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산림 감리의 역에는 야마와리山廻가 있고, 이것에도 야마와리레츠가 있었다. 또한 야마와리에도 오후치닌이 있었다.

토무라 가운데 한 군에서 1명씩 교대로 카나자와에 상주하며, 토무라 대기소에 출두해 여러 일의 중개를 담당했다. 또한 각 군에 1개소씩 토무라 상담소가 있어, 한 달에 하루의 정례일에 회합해 여러 일의 상담을 했다. 토무라 대기소에는 한 군에 1명씩 반다이番代라는 것이 있고, 그 군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다. 이것은 카나자와에 거주하는 것으로, 신분은 처음엔 상공인이었는데 이후에 코오리부교우 지배가 되었다. 반다이의 보조를 하는 자는 바츠키테다이場付手代라고 하여 한 군에 2~3명씩 있고, 역시 카나자와에 거주했다. 또한 다이칸(토무라나 신덴사이쿄가 겸임하는 것)에 속하는 오사메테다이納手代, 토무라의 집에서 용건을 이야기하는 우치테다이内手代 등이 있었다.

카나자와번에서는 토무라 제도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민정 기관의 중심이었다. 어느 경우에는 토무라를 표면에 내세워 번 당국은 가능하면 농민을 직면하지 않는 방책을 집행했던 듯하다. 그만큼 토무라의 권력이 강하고, 그것에 수반해 농민의 반항을 받는 일도 많았다. 또한 무라키모이리村肝煎의 힘이 다른 번의 나누시나 쇼우야보다 약했던 듯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여러 번의 오오죠우야大庄屋

시바타번新発田藩에서는 영내를 몇 개의 조로 나누었는데, 그 수는 처음엔 5~6개, 이후 개발과 함께 늘어나 막부 말기에는 15개가 되었다. 한 조의 마을 수는 적은 것은 8개, 많은 것은 86개, 부속 향(枝郷)을 더하면 100개 이상이나 되었다. 평균 해서, 본 마을만으로 42개, 부속 향을 더하면 61개였다. 이 조를 관리하기 위해 1명 또는 2명의 쇼우야를 두었는데, 일반적으로는 오오죠우야라고 불렀다. 쇼우야는 임명될 때 기청문起請文을 제출하고, 조 안의 여러 공조의 수납과 지출에는 나누시가 입회해 부정이 없도록 할 것, 납입 기한에 늦은 마을이 있으면 조사해 괘씸함이 없도록 할 것, 만약 해결되지 않으면 코오리부교우에게 신고할 것, 조 안의 여러 청원서는 지체없이 인장을 찍어 부교우소에 제출할 것 등을 서약했다. 안세이安政 6년(1859)의 쇼우야 수는 22명으로, 그 가운데 4명은 성씨를 허용하고, 11명은 성씨를 쓰고 칼을 차는 걸 허용하며, 1명은 성씨를 쓰고 칼을 차며 얇은 나막신(薄下駄)을 허용했다. 

하기번萩藩에서는 하기 자체의 행정 조직 아래에 민간에서 선임되었던 칸바勘場 3역이 있다. 오오죠우야·혜미방恵米方(케이마이가타)・산용사算用師(산요우시)가 그것이다. 오오죠우야는 처음엔 오오도시요리大年寄라고 했던 것으로, 히토사이반一宰判에 1명, 농민에서 뽑았는데, 히토사이반 안에서도 몇 가구라는 식으로 가문이 정해져 세습적이 되고, 성씨를 받고 칼을 차는 것도 허용되었던 듯하다. 늘 칸바에 출근해서 집무하고, 관내의 쇼우야 위에 서서 여러 귀찮은 일을 담당하고, 츠고우닌야쿠都合人役(다이칸)이 군에 출장가면 늘 이를 따라다니며 시중 들고 정무에 참여했다. 오오죠우야가 관할하는 구역은 히토사이반 20여개 마을이다. 혜미방은 오오죠우야의 상담역으로서 일을 담당하고, 또 비축 곡물의 관리 운영이나 궁민 구제의 일을 관장하며, 산용사는 사이반의 재무를 관장해 쌀과 은의 계산이나 출납을 담당했다. 모두 백성 신분이다. 

코쿠라번에서는 오오죠우야가 관할하는 구역은 테나가手永라고 하며, 한 테나가는 십여개 마을에서 20개 마을 안팎으로, 수확량 1만 섬, 호수 2000호 안팎이었다. 테나가에는 오오죠우야・코도모야쿠子供役・스지부교우筋奉行 테다이手代가 있어, 이걸 테나가 3역이라 했다. 그 배하의 각 마을에는 쇼우야・호우즈方頭・쿠미가시라組頭가 있으며, 쿠미가시라는 5호에 1인, 호우즈는 25호에 1인을 원칙으로 했다. 아이즈번에서는 오오죠우야에 해당하는 것은 가모우蒲生 씨 시대는 오오만도코로大政所라 하고, 우에스기上杉 씨 때에 오오와리모토大割元라 고치고 텐포우 2년(1645) 다시 고우가시라郷頭라고 개칭했다. 마츠에번에서는 다이칸의 아래에 시타고오리下郡 1인, 쿠미가시라与頭 2인을 두었는데, 쿠미가시라는 오오죠우야에 상당했다.

아키타번에서는 마을들을 조합해 그 조합 마을들을 요리고우寄郷라 하고, 오야고우키모이리親郷肝煎가 조합 마을의 키모이리를 통괄했다. 요리고우 마을들의 작은 일은 오야고우키모이리가 취급한 바로, 여러 종류의 화해 조정을 담당했다. 요리고우키모이리의 진퇴는 오야고우키모이리의 보고에 따랐던 듯하여, 위량과 인망이 있는 자를 임명했다. 

 

 

오오죠우야의 출신・직분

오오죠우야는 무사나 토착 무사에서 선발되는 일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농민으로, 성씨를 주고 칼을 차는 걸 허용한 곳이 많다. 쿠루메번久留米藩에서는 쿄우호우 원년(1716)에 칼 차는 걸 허용하고, 이듬해에는 종래는 가문의 격식으로 오오죠우야를 임명했지만 앞으로는 인품에 따라서 임명하겠다고 했다. 쿠마모토번에서는 백성에서 하는 걸 원칙으로 하고, 갑옷 한 벌과 말 한 필 갖출 무사·농촌의 무사 등 토착 무사에서 임명하는 일도 있었지만 이들 토착 무사 중에는 백성이 번에 헌금함에 따라 된 자도 있었다. 오오죠우야는 보통 급료를 받았는데, 쿠루메번의 케이안 4년(1651)의 규정에는 군 전체 안에서 책정 수확량 100섬당 1말 9되의 쌀을 징수하고 25인의 오오죠우야에게 배분했기에, 1인당 22섬 전후였다. 오오죠우야가 지배하는 구역은 쿠미組・고우郷・후레触 등이라 불렀는데, 모리오카번盛岡藩이나 쇼우나이庄内 지방에서는 츠우通라 하고, 오카자키번岡崎藩・쿠마모토번・코쿠라번 등에서는 테나가라고 했다. 테나가의 어원은 전장田長을 타나가라고 읽어서, 이것이 전화된 것이라고도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오오죠우야의 직분은 다이칸으로부터 전해진 법령 등을 나누시・쇼우야에게 전달하는 것, 관내 백성의 소송을 조사 해결하고 자신의 손에 미치지 않는 것은 다이칸에게 전하는 것 등이었다. 빗츄우의 니이미번新見藩에서 쿄우호우 15년(1730)에 내렸던 정서定書에 의하면, 오오죠우야의 역료는 15가마니씩이고, 그 직무는 마을들의 수입 회계를 확인하는 일, 마을들의 공적인 일의 출입·지샤카타寺社方로부터 향郷에 대한 공적인 일의 출입을 받아들여 군회소郡会所에서 재허하는 일, 타국 타령에서 온 새 백성 또는 양자와 혼인의 청원서를 마을 쇼우야에게서 받아 심사한 뒤 인장을 찍어 군회소로 제출하는 일, 타국 타령으로 가는 경우도 마찬가지의 일을 하는 등이었다. 

 

 

오오죠우야 폐지령

막부령에서는 쇼우토쿠正德 3년(1713)에 명령해 오오죠우야・와리모토소우다이割元惣代 류를 폐지했는데, 이것은 그 직전에 에치고 무라카미령村上領의 농민 4000여 명이 오오죠우야·코쇼우야小庄屋의 부정 때문에 부모가 얼어 죽고 굶어 죽으며, 형제 처자가 뿔뿔이 흩어지는 상태여서 그 지배를 벗어나 막부령으로 편입되고자 한 취지를 감정소勘定所에 소원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만약 주모자 58인이 처벌받는다면 100여 명이 소송을 제기하고, 100여 명이 죄를 받으면 4000여 명이 들고일어나겠다고 의정하여 한때는 심상치 않은 소동이었는데, 그것을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재허해 오오죠우야 등의 불법을 금지한 일이 「오리타쿠시바의 기록(折たく柴の記)」에 나와 있다. 쇼우토쿠 3년 막부의 명령 중에는 오오죠우야 등의 급료 쌀도 대부분 마을 부담으로 부과되고, 여러 사람 중에는 마땅치 않은 자가 있어 지위를 뽐내며 사익을 꾀하고, 다이칸의 테다이 역인과 결탁해 말단의 백성이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을 이유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오오죠우야의 류가 없어서 안 되는 곳은 사정을 다이칸에게 호소하도록 하고 있기에, 아마쿠사天草 같은 곳은 쇼우토쿠 5년에 다시 설치하고, 메이와明和 7년(1770) 성씨를 받고 칼을 차는 걸 허용한다. 그외에 대해서도 쿄우호우 19년(1734)에는 부활의 명령을 내렸다. 오오죠우야 등이 부정을 도모한 일은 위의 일 외에도 예가 있어, 쿄우호우 6년의 아이즈 막부령의 창고 납입 소동이나 호우레키 4년(1754) 쿠루메의 백성 봉기는 그것이 한 원인이 되었다. 쿠마모토번에서도 소우죠우야惣庄屋가 점차 권위를 내세워 마을 쇼우야와 역인, 소백성과 매우 소원해져, 소백성과 대면할 때도 봉당으로 불러 앉히고 대담하는 자도 있었다고 하여 이를 금지하는 일이 있었다.

 

 

 

 

(3) 나누시·쇼우야

 

마을 역인(村役人)

다이칸이나 코오리부교우의 지휘를 받아서 한 마을의 관리를 담당하는 자를 마을 역인이라 한다. 막부령에서는 대개 무라카타村方 3역 또는 지카타地方 3역이라 부르고, 나누시(쇼우야)·쿠미가시라·햐쿠쇼우다이百姓代를 두고 있었다. 나누시는 주로 동쪽 지역에서, 쇼우야는 서쪽 지역에서 많이 쓰였는데, 반드시 그렇게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번에 따라서는 다양한 명칭이 있어, 호쿠리쿠北陸부터 토우호쿠東北의 여러 번에서는 키모이리肝煎(肝入)라고 하던 곳이 많다. 또한 연대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아이즈번에서는 옛날엔 코만도코로小政所라 하고 오오죠우야를 오오만도코로大政所라고 했는데, 나중에 코와리모토小割元가 되고 다시 키모이리가 되었다. 시바타번新発田藩에서는 케이쵸우 3년(1598)에 미조쿠치溝口 씨가 영지를 옮긴 당초에는 우에스기 씨 시대의 츄우시中使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키모이라라고 고치고 다시 나누시라고 했다.

에도 후기에 여러 번의 마을 역인의 명칭을 조금 들어 보자면, 히로사키번弘前藩 -쇼우야·5인조, 아키타번 -키모이리·오토나백성長百姓, 시라카와번白河藩 -쇼우야·쿠미가시라·햐쿠쇼우다이, 미토번水戸藩 -쇼우야·쿠미가시라, 마에바시번前橋藩 -나누시·쿠미가시라·오토나백성 또는 토시요리年寄, 타카다번高田藩 -토시요리·오토나백성·카시라백성頭百姓, 후쿠이번 -쇼우야·오토나백성, 마츠시로번松代藩 -키모이리·쿠미가시라·오토나백성, 나누시・쿠미가시라・오토나백성, 나누시・토시요리・쿠미가시라・오토나백성, 우에다번上田藩 -쇼우야・쿠미가시라・토시요리・햐쿠쇼우다이, 와카야마번和歌山藩 -쇼우야・키모이리・5인조 소우다이, 톳토리번鳥取藩 -쇼우야・토시요리, 마츠에번松江藩 -쇼우야・토시요리・5인조, 하기번萩藩 -쇼우야・쿠로가시라畔頭・쇼우닌証人 백성, 급지給地에서는 코츠고우쇼우야小都合庄屋・도우쿠로가시라同畔頭, 토쿠시마번徳島藩 -쇼우야・토시요리・5인조, 키모이리肝煎・5인조 등이 있으며, 똑같은 번에서도 몇 가지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카고시마번에서는 쇼우야는 직할지에서는 토착 무사, 사령에서는 그 급주의 가신에서 임명되어 그 마을에 재근하는 자로, 예전 나누시・사타닌沙汰人・모요오시비토催し人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아래에 있는 코우사이功才가 백성의 역으로, 텐메이 3년(1783)에 나누시라고 개칭되고, 또한 자이야쿠在役라고도 불렀다. 

 

 

나누시·쇼우야의 선출과 자격

나누시·쇼우야는 세습하는 곳도 있고, 대백성大百姓 사이에서 1대 근무 또는 1년 교대의 연번年番 나누시도 있으며, 마을 사람의 선거에 의한 곳, 번에서 선정한 곳 등 각기 달랐다. 『지방범례록地方凡例録」에 의하면, 쿄토 인근·에도에서 먼 지방의 쇼우야는 가문이 정해져 있어 몇 대에 이어 계속 근무하고, 만약 어리고 미숙한 자가 있으면 쿠미가시라 가운데, 또는 친척 중에서 후견을 세워 쇼우야의 명목은 어리더라도 그 가문의 사람이 잇고, 설령 대토지의 풍요로운 백성이라도 그 가문이 아니면 나누시 역을 맡을 수 없다. 그래서 쇼우야의 위광이 강하고, 그 지시를 어기는 일이 적다. 그 반면에 위세를 믿고 제멋대로 하는 일도 많아, 농민을 위하지 않는 일도 있다. 칸토우도 옛날엔 나누시의 집안이 일정했다고 하는데, 백성을 위해 좋지 않은 일이 많아서 쿄우호우 무렵부터 1대 근무, 또 연번 나누시로 하여 한 마을 안에서 나누시 역을 맡을 가문을 골라 1년씩 순번으로 맡도록 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세우다 보니, 역의 위신이 약하고 교시가 두루 미치지 않으며, 마을이 단속되지 않는 일이 많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쪽이 좋은지 모르겠다. 칸토우에서는 나누시가 병사 또는 퇴역하여 후계자를 정할 때, 그 마을들의 향례郷例에 맡겨서 모든 백성이 선거한 최고점의 사람을 임명하는 일도 있으며, 또는 모든 백성이 연서해서 청원하는 일도 있다. 연번의 나누시는 순번으로 근무하지만, 1대 근무의 나누시가 퇴역했을 때는 그 아들의 인품과 연령에 따라서는 모든 백성이 상담해 후계자를 청원하는 일도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타카사키번高崎藩의 군리郡吏였던 「지방범례록』의 저자는 다시 이어서, 선거에 의한 것이라도 마을 주민의 청원에 의한 것이라도, 그 자의 경작지 수확량·평소 행실·행정 역량 등을 역소에서 충분 조사해, 확실히 일할 만한 자라면 임명하고, 그렇지 않으면 설령 고점이더라도 선거한 자들에게 이해를 설명해 납득시키고, 2번인 자를 임명하거나, 선거를 다시 하도록 해야 한다. 모든 나누시는 백성의 뜻대로 세워 두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을 하고 있는 백성도 있기 때문에, 역의 위신도 약하고 나누시의 지시도 따르지 않아 한 마을이 다스려지지 않는 일이 많아서, 위의 역인은 세세하게 규명하여 그 임무에 걸맞는 자를 임명해야 한다고 했다. 이건 당시의 마을이 자치체였던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실제는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나누시·쇼우야는 한 마을 한 명을 통례로 했지만, 때로는 2명 이상인 곳도 있었다. 한 마을이 몇 사람의 영주에게 분할 영유되는 분향分郷이라는 경우에는 영주마다 나누시가 있고, 때로는 겸임 나누시·위탁 나누시로서 한 사람이 겸임하는 일도 있었다. 그 마을에 적당한 사람이 없어, 다른 마을의 사람이 나누사가 될 때는 영입 나누시 또는 고용 쇼우야라고 했다. 고우치번高知藩에서는 곳곳으로 전임하는 일도 행해지고 있었다. 나누시·쇼우야가 없을 때 그 대리인을 두는 일도 있고, 장래에 나누시 역이 될 만한 자가 일정 기간 나누시 견습을 맡는 일도 있었다.      

카나자와번에서는 무라키모이리村肝煎라고 했는데, 한 마을의 수납은 물론 한 마을의 모든 사람의 우두머리로서 만사 통솔하였기에, 인품도 좋고 경작 규모도 상응해야 해서, 2섬 이하인 자에게는 임명하지 않는 규정이었다. 그 한 마을의 백성 전체(논밭이 없는 농민은 제외)가 납득해 누구에게 키모이리를 맡겨 주시길 바란다고 청원해 개작소改作所에서 임명한다. 이 동류가 납득한 자를 임명하는 것은 칸분 8년(1668)부터 시작되었다. 한 마을 동류의 납득이 어떻게든 정리되지 않을 때, 무쿠미오후치닌토무라無組御扶持人十村와 그 조의 토무라가 인선해 임명하는 것을 발견(見付) 키모이라라고 한다. 작은 마을에서 그 마을에 키모이리를 맡을 만한 인물이 없어, 예전부터 이웃 마을 등의 키모이리를 겸하게 하는 것을 의탁(寄) 키모이리라고 한다. 이때는 그 마을에서 경위 증서를 낸다. 또한 이웃 마을의 키모이리가 당분간 겸임하는 것을 겸임(兼帯) 키모이리라 한다. 이것은 그 마을의 납득과는 상관없다. 버릇이 나쁜 마을 등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해 다른 마을에서 인선해 그 마을의 키모이리를 임명하고, 그 마을로 이주해 일하게 하는 것을 이주(引越) 키모이리라고 한다. 이건 납득과 상관없고, 오후치닌이 다른 마을의 키모이리나 조합 카시라 중에서 인선해 임명한다. 이밖에 키모이리 당분간 가입(当分加人)·당분간 키모이리 대리(代り) 등이 있다. 또한 키모이리로 재능도 있고 연공도 있는 자를 그 조의 토무라가 다른 마을의 장부 조사 등의 용무에 부리는 일이 있으면, 이를 가역加役 키모이리라고 했다. 키모이리는 한 마을 1명을 통례로 하지만, 특별히 수확량 많은 마을이나 산 쪽으로 울타리가 여럿으로 나뉘어 있는 마을에서는 한 사람으로는 손이 미치지 않기에 두세 명 두는 곳도 있었다. 개작 부교우가 키모이리를 임명하려면 한 마을의 백성 안에서 납득 증서를 제출시킨 다음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키모이리를 수십 년 맡았던 공로자의 아들이 키모이리가 될 때에는 보상으로 납득 증서를 내지 말라 명하는 일도 있다. 보통의 경우에, 키모이리의 아들이 키모이리가 될 때에는 부모로부터 경작지를 물려받고 이름도 부모의 이름으로 고쳐, 동류의 납득 증서를 낸다. 또한 조합 카시라나 오토나 백성의 아들이 키모이리에 추거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나누시·쇼우야는 처음엔 세습이 많았지만, 차츰 선거제 등이 이루어지게 되자 그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아키타번에서는 키모이리가 교대할 때, 소백성까지가 상담하기에 몇 개월이나 걸려 농사의 방해가 된다고 하여서, 쿄우호우 16년(1731)에 소백성의 심사를 금하고, 오토나 백성에게 추거시켰다. 오토나 백성은 키모이리의 부하로 쿠미가시라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그 문서에는 "키모이리 대리를 정하매 한 향의 소백성까지 상담을 해 키모이리 역을 맡을 만한 자를 청원하기에 상담이 정리되지 않아 모든 백성들이 몇개월에 걸쳐 회합하는 일이 있다고 하기에, 심히 농사의 방해도 되는 일이다. 원래 키모이리 역은 관청에서 세워 두는 것이기에, 소백성의 심사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다이칸이 수많은 향인의 모습을 상세히 파악할 수는 없기에, 앞으로는 오토나 백성들이 잘 상담해 사의를 끼워 넣지 말고 인품을 선택해 키모이리 역을 맡길 만한 자를 다이칸에게 적어 제출하도록, 또한 오토나 백성의 상담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몇 사람을 적어 제출하고, 다이칸이 심사하여 위로 알리라"라고 했다. 이건 쿄우호우 20년에도 거듭해서 알리고 있다. 

이에 대해 카나자와번에서는 오모다치重立 백성의 횡포를 금하고 있다. 텐포우 8년(1837)에 코오리부교우가 토시요리(토무라) 측에 제출한 통달에는 "마을들의 키모이리와 조합 카시라란 한 마을 한 마을을 지배하고, 온갖 일의 기반을 평의해 결정하는 역인으로, 참으로 중요한 공무이다. 키모이리는 대부분은 마을 모두가 납득하여 청원하면 받아들여지는 예였지만, 그 납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오토나 백성(마을 역인이 아니라, 중심이 되는 백성의 뜻)이 권위를 써서 도장을 모두 갖추는 자도 있고, 또는 여러 간계로 모두 갖추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있으면 엄중히 처벌할 터이니, 마을에서 납득 도장을 받아 토시요리에게 청원하면, 그 인품이나 지금까지의 모습을 내밀히 조사해 성실하고 쓸모있는 자를 청원하도록 하라"라고 한다. 

이들은 상반되는 현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누시·쇼우야는 마을 안에서 유력한 백성이 선발되는 일이 많았다. 카나자와번에서도 그 추거에 토지 없는 백성이 더해지는 일을 금지하고, 수확량 2섬 이상이라는 한정을 둔다. 미카와三河의 니시오번西尾藩에서는 10섬 이상의 수확량으로 한정한다. 이러한 제도가 있으면, 선거에 의한다고 해도 저절로 한계가 있어 나누시·쇼우야의 가문이라는 것이 고정되어 버리게 되었다. 아이즈의 막부령 등은 막부 말까지 그 구분이 엄중해, 고우가시라郷頭(오오죠우야)는 물론, 나누시와 쿠미가시라까지 그곳에서 오래 전해진 가문의 자가 아니면 맡을 수 없고, 그 역에 결원이 있더라도 그 마을에 맡길 만한 사람이 없으면 이웃 마을의 뼈대 있는 사람에게 부탁했기에, 결코 가문이 아닌 자는 맡을 수 없다. 뼈대가 있으면 빈자라도 맡고, 그렇지 않으면 부호라도 맡기지 않는다는 풍속이었다. 

 

 

마을 주민의 사역

나누시·쇼우야는 몇 섬의 급료 쌀(給米) 또는 급여 쌀(扶持米)을 받든지, 책정 수확량 가운데 몇 섬 분량의 연공 면제를 받았는데, 그 마을의 책정 수확량에 따라서 많고 적음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키타번에서는 키모이리는 그 타인 명의 토지 20섬까지는 여러 역을 면제받는 외에, 1년에 마을 주민 1명에 대해 4일씩 자기 용무에 사역할 수 있었다. 

토쿠시마번에서는 한 마을의 쇼우야를 히라쇼우야平庄屋라고도 했다. 쇼우야는 그 일가는 물론이고, 그 분가·하인에 이르기까지 부역을 면제받았다(분가는 일가의 혈연 또는 하인이 승격한 것). 다만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먼 친척의 분가나 모계의 상복을 입어야 하는 친척은 부역을 부과받았지만, 먼 친척이라도 같은 집에 있으면 면제되고, 가까운 친척이라도 시중이나 타향에 있으면 부과되었다. 쇼우야는 훈공이 있으면 1대의 칼을 차는 것이 허용되었다. 분가인 자가 쇼우에가 되면 일가一家로 격상되었다. 쇼우야의 아래에 5인조·토리타테역取立役(세금 징수) 등이 있고, 그외에 잡용을 담당하는 후레츠카이触使·아루키行き 등이 있었다. 쇼우야가 공용으로 출장할 때에는 백성을 한 사람씩 순으로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번에서 정하지 않은 경우라도 마을들에서 나누시들이 마을 주민을 부리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특히 새논 등에서는 개발자가 나누시로서 힘을 휘두르는 예가 많다. 무사시武蔵 타마군多摩郡의 오가와小川 새논에서는 개발자인 오가와 씨가 나누시를 세습하고 있었는데, 마을 주민의 소유 밭 1반에 대해 영락전 3문씩 징수한 외에, 하루에 백성을 4명씩 부려 한 사람에게는 말몰이를 시키고 3명에게는 풀베기나 밭갈이 등을 시키며, 에도로 왕복하는 데에도 몇 명을 사역했다고 하여서, 칸분·엔포우 무렵에 소송 사건이 된 일이 있다. 그밖의 곳에서도 장지 바르기 등까지 시켰다는 예도 있다. 

시바타번에서는 안에이률安永律에서 멋대로 조 안 또는 마을 안의 백성을 사용으로 부린 쇼우야(오오죠우야)나 마을 역인은 가택 연금 10일에 처하고, 하루 한 사람 2되5홉의 비율로 쌀을 내도록 해 무료로 부린 백성에게 주라고 정해져 있는 건 그러한 일이 행해졌단 증좌일 것이다. 막부나 여러 번에서도 가옥이나 의류의 제한 등에서는 일반 농민과 구별해 취급하거나, 성씨를 주고 칼 차는 걸 허용하거나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누시·쇼우야는 마을 주민이 세운 바이긴 하나, 일면으로는 막부나 번의 의지를 대행하는 입장에도 있었다.

나누시·쇼우야가 마을 주민에 대해 가지고 있던 힘은 오늘날의 자치체의 장고하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중세 이래의 토호와 토착 무사의 뒤를 잇는 사람이나 개척 농민이었거나 하여, 봉건적 신분이 일반 농민보다 높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마을 안에서 부농이 많았다. 게다가 쓰고 셈하는 데 능하고, 막부와 번 영주의 최하급 대리인이기도 했다. 최하급 대리인이란 것은 그들 자신의 의지를 부가할 여지가 많았기에, 신분이나 지식이나 부를 배경으로 해서 일반 농민에 대해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마을 주민을 자신의 노예처럼 취급한 사람도 있었다. 쿄우호우 12년(1727)에 히고肥後 고카쇼우五ケ庄의 쇼우야 조우자 슈젠蔵座主膳이란 자가 자기 집의 공사를 작은 성처럼 웅장히 지으며 다수의 마을 주민을 사역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 그 명을 어긴 5인이 참살되어, 마을 주민 43명이 처자를 데리고 아사쿠사로 도망갔다는 사건이 있었다. 이와 같은 산속에서는 거의 작은 영주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나누시·쇼우야가 자기의 빚이나 경비를 마을 주민에게 전가시키는 일도 있고, 또는 자금을 연공과 함께 징수하는 일도 있어, 그와 관련된 금령이 종종 내려졌다. 그 반면, 나누시·쇼우야의 인물 식견에 따라서는 마을 주민의 이익을 대표하고, 또는 저수지를 설치하고, 또는 구황미를 축적하며, 또는 서당을 열고, 또는 마을 주민의 이해를 위해 영주의 압박에 대항하는 일도 있었다. 에도 시대의 수많은 백성 봉기에서 마을 역인이 백성과 동일 행동을 위했던 사례와 마을 역인이 오히려 백성의 반항의 대상이 되거나, 또는 마을 역인을 제외하고 기도한 백성 봉기의 사례는 그 수가 거의 반반이라는 점은 위에 기술한 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임무

나누시·쇼우야의 임무는 마을에 관한 일체의 사무로서, 연공의 납입·도로와 다리, 제방의 공사·호적·신앙 조사 등에 관한 일 외에, 마을 주민의 생활 도움에까지 이른다. 마을 주민의 토지 매매와 전당 잡힘에도 그 증명 도장이 없으면 무효이고, 영주에 대한 소원에도 그 날인이 필요했다.      

하기번萩藩의 메이와 8년(1771)의 각서 중에 「마을 쇼우야의 근무 마음가짐에 대한 일(村庄屋勤方心得之事)」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기에 그 요지를 보면, "마을 쇼우야는 그 마을 백성의 우두머리이기에, 마을 전체가 경작에 힘쓰도록 하고, 사치를 억누르고, 먹을거리의 비축이 핵심이라는 것에 유의하며, 또한 풍요로운 자의 사치나 물가의 고가를 제어하고, 빈궁한 백성이 막다른 곳에 이르지 않도록 생계를 이어갈 방도를 마련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이칸소에도 보고한 뒤, 풍요로운 자나 백성 안에서 부조미 등을 빌려주는 구조를 세우고, 어떻게 해도 존속하기 어려워 보이는 자는 큰 걸 작게 만들더라도 백성의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음으로 백성이 도망친 자리나 죽은 자리 등에는 마을 안의 둘째, 셋째 아들이나 다른 마을의 사람이라도 확실한 자로 망한 자리를 다시 세워 살아가게 해야 한다. 대체로 거촌하는 자를 다른 곳으로 내보내지 않고, 백성의 집이 적은 마을에서는 점차 새 백성을 양성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또한 봄철에 보나 범람 방지 등의 여러 공사를 하고, 가을에는 작황에 신경써서 검견을 받을 필요가 있는지 어떤지를 고려하고, 제대로 못한 자에게는 주의를 주며, 수납할 때에는 재촉을 하고 미곡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면 일이 잘 풀리기에, 자연히 마을의 풍속도 좋아지고, 마을 안의 빌린 쌀과 은도 적어지게 되는 것이다. 마음가짐이 철저하지 않은 쇼우야는 일이 되는대로 내버려 두다가 부족할 때에는 빌린 쌀과 은 등을 쓰게 하기에, 결국에는 망한 백성도 떠나가 버려 망소亡所와 다름없이 된다. 마음가짐이 부족한 쇼우야에게는 충분히 타일러 말하지만, 그것으로도 근무 방식이 나쁘다면 설령 대대로 쇼우야였어도 갈아 치우고 엄밀히 처분을 내린다"라고 이렇게 말한다.

나누시·쇼우야의 임무 중에서도 연공의 납입은 최대의 일이었다. 연공은 영주로부터 한 마을 단위로 납입을 명 받은 것이기에, 영주에 대한 직접적 책임자는 나누시·쇼우야여서 연공 완납을 할 수 없어서 쇠고랑을 차거나, 옥에 갇히거나, 완납 불능으로 쇼우야가 도주하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 그밖에도 임무를 태만히 하면 처벌되었다. 시바타번의 안에이 9년(1780)의 신률新律에 의하면, 검견할 때 다른 마을의 토지를 빌려서 안내한 경우와 다른 마을에서 빌려준 경우, 도주자의 것으로 몰수해야 할 가옥 부지와 논밭을 숨겨 둔 경우, 마을 안에서 나쁜 일을 저지른 자의 죄가 추방에 해당하지 않는 데 추방한 경우, 마을 주민이 무리지어 도망가려는 걸 알면서 억제하지 않고 급히 보고도 하지 않은 경우, 살인의 하수인을 놓쳤을 경우, 비공식적인 매춘녀를 생업으로 삼게 한 경우, 이웃 마을에 아이를 버리게 한 경우 등에는 나누시의 역을 박탈하고, 그 역의 가옥 부지와 논밭을 몰수했다. 연공 완납을 할 수 없던 백성은 3조가 지불하고, 그 마을의 나누시는 가택 연금 15일, 그 조의 쇼우야(오오죠우야)는 가택 연금 10일, 마을에 변사자가 있을 때에 신고를 태만히 한 나누시·쿠미가시라는 가택 연금 15일이라는 식으로 상당히 엄했다. 따라서 나누시·쇼우야의 임무는 경작 전반 또는 마을 주민의 생활 전체에 걸쳐서 주의 감독을 게을리 하지 않고, 연공의 수납을 확실히 해야 했다. 그를 위해 나누시·쇼우야는 어떻게 유념하며, 어떻게 일해야 했는지를 히고肥後의 어느 쇼우야가 그 자손을 위해 적어 남긴 마심득서心得書에 따라 기술해 보겠다.    

 

 

쇼우야의 심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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