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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바람들이 농장에서 농사짓던 시절, 안철환 선생님께 ‘헛골’ 농사법이란 말을 처음 배웠습니다. 헛골, 다시 말해 ‘가짜 골’에다 씨앗을 심는 농사법이란 뜻입니다.

왜 '가짜 골(헛골)'일까요? 처음에는 두둑 위에다 골을 탄 다음 거기에 씨앗을 심기에 골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사이갈이 김매기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북주기를 통해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두둑으로 변모하기에 가짜 골이라 합니다. <임원경제지>로 유명한 조선 후기의 서유구 선생이 조선에 더 널리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견종법畎種法이 이와 같은 방식입니다.


 

<그림 서유구 선생이 제시한 두둑 만드는 방법. 정명현, 2012, <조선시대 견종법 보급론의 확대>, 한국농업사학회, 11권2호에서.>

 

이 농법은 이후 일제강점기 다카하시 노보루란 농학자의 조사 자료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널리 퍼졌던 농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지금은 거의 사라져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농법도 변한 겁니다.

각설하고, 먼저 이 헛골 농법의 장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봄 가뭄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1. 여름의 강한 비바람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된다.

 

    1. 작물의 수확량을 증가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1. 노동력 절감에 도움이 된다.크게 이렇게 네 가지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골을 타서 씨앗을 심기에 파종한 곳이 주변부보다 움푹하게 밑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의 봄철은 바람이 강하게 부는 시기이죠. 바람이 토양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요? 바로 수분을 날려 버리게 됩니다. 그러니 씨앗은 바람의 영향을 덜 받아서 수분 상실에서 보호되고, 또 아침저녁으로 맺히는 이슬 등으로 수분을 보충할 수 있기도 하여 찔레꽃 필 무렵이면 찾아오는 봄 가뭄의 부족한 강우량에도 싹이 잘 터서 자라는 이점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렇게 하여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점점 비바람이 거세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 사이갈이 김매기 작업을 하며 작물에 북을 준 흙무더기로 보호를 받아, 그러한 조건에서도 작물이 잘 버티며 성장하게 되지요. 여기서 한 가지 더 재미난 사실은, 작물에 북을 주면 새로 흙에 묻힌 곳에서 막뿌리가 나오는 작물들이 있습니다. 모든 작물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헛골 농법으로 재배하는 작물 가운데 그런 게 많지요. 이 막뿌리가 흙에 있는 양분과 수분을 흡수하는 역할을 수행해, 작물이 더 잘 성장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북을 주면서 잡초까지 잡는 건 이 농법의 덤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랑과 두둑의 풀을 잡기 위하여 북을 주면서 흙의 모세관을 끊어져 뜨거워지는 여름 날씨에도 지표면에서 수분의 증발이 덜 되도록 도와 작물이 충분히 수분을 흡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합니다. 잡초와의 경쟁도 줄어들기에 작물의 성장에 더 이로운 환경이 조성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효과를 가져오는 작업을 북주기라는 단 하나의 작업으로 해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작업을 통해 김매기+수분 확보+막뿌리의 발달+작물의 성장+수확량 증가 등의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림 멕시코의 전통 농법에서 옥수수를 재배할 때 활용하는 헛골 농법. 바람이 강한 지역이라 옥수수가 쓰러지는 걸 줄이기 위해 이와 같은 농법이 발달했다고 한다. 스티븐 글리스만, <농생태학>, 2015, 86쪽에서>

 

그런데 이렇게 유용한 농법이 왜 사라지게 되었을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시대가 변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무엇보다 새로운 농자재가 도입된 영향이 가장 클 것 같습니다. 바로 한국의 농업에 백색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되는 농업용 비닐 말이지요. 비닐을 덮으면, 작물이 자라고 있는 곳의 흙은 더 이상 손을 댈 필요도 없고 손을 대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비닐을 쓰는 곳에선 처음부터 높은 두둑을 지어서 비닐을 덮고 아예 수확할 때까지 그대로 농사가 끝날 때까지 가는 걸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작물이 자라고 있는 중간에 비닐을 벗겨내는 일은 거의 없지요. 물론 비닐이 가져온 효과는 엄청납니다. 괜히 백색혁명이라 부르는 게 아니지요. 하지만 자연의 현상을 이용해 농사에 여러 이로운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점을 따져본다면 헛골 농법이 여전히 장점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작은 규모로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인 농법이 아닐까 합니다. 주말농장이 우후죽순 생기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 작은 텃밭을 분양받아 다들 검은 비닐을 두둑에 덮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5평, 10평 정도면 한 30분 쪼물락거리면 금방 풀을 잡을 수 있는 규모인데 말이죠. 비닐 없이도 재미나게 잘 농사지을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어떤 방식을 택하느냐, 그 선택은 우리의 몫일 겁니다.

 

[농사잡록]은 김석기 선생님의 연재코너입니다. 강희맹 선생의 [금양잡록]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농사와 관련된 잡다한 기록'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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