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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기고1


중세에 묘사된 쌀 문화        -키무라 에미木村榮美





시작하며


일본인에게 쌀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신앙의 대상으로, 정치적 수단으로, 또한 일상다반日常茶飯이라 하듯이 식생활 속에서 빠질수 없는 중요한 먹을거리로서 오늘날까지 활용되어 왔다. 일상다반이란 말이 언제부터 이야기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9세기 중엽 천태종의 승려 엔닌円仁(794-864년)이 지었던 <입당 구법 순례행기>에는 당나라 만기 당시의 사회 풍습, 불교의 모습 등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사원 등에서 반차飯茶나 다반이 나왔던 것을 적어 남기어, 차와 밥을 식사의 형태로 넣었던 걸 엿볼 수 있다. 또한 중세 선승의 일기 등에는 '다반'이 빈번하게 쓰여, 17세기 초에 성립한 <일포日葡 사전>에 '다반'은 없어서는 안 된다는 뜻의 단어로 올라가 있다. 이것으로부터 사원을 중심으로 일상의 식생활 속에서 차와 함께 밥은 빠질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이 기고에서는 중세의 식사 풍경을 묘사한 대표적인 회화자료를 소개하면서 공가公家, 무가武家, 사원, 서민의 밥이 식사 가운데 어떠한 자리매김에 있었는지, 먹는 쪽의 시점에서 일본인의 쌀에 대한 의식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다만 회하에 묘사되었던 밥이 반드시 쌀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미리 알리는 바이다.



공식의 밥 요리


밥이라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비련의 귀공자로 알려진 아리마有間 황자(640-658)가 읊었던 시가이다. 


집에 있다면 밥그릇에 담은 밥을

여행에 나섰다면 모밀잣나무 잎에 담는다


이 노래는 아리마 황자가 모반의 이유로 사이메이斉明 천황이 목욕 치료차 가는 기온천紀溫泉(현재 와카야마현 시라하마초白浜町 유자키湯崎)으로 호송되면서 읊었다고 한다. 이윽고 그는 교살되어 그 목숨은 이슬로 사라진다. 이 노래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었는데, 가장 유력한 건 행선지의 부자유를 읊었다는 설, 죽음의 여로에 대한 각오와 아직 버리지 못한 야망 때문에 한 가닥의 희망을 신에게 기탁하며 밥을 바치는 신찬설이다. 이 노래가 중요한 점은 밥을 집에서는 밥그릇이란 식기에 담는 데 반하여, 여로에서는 모밀잣나무의 잎에 담는다는 부분이다. 죽음을눈앞에 두고도 우선 밥을 집어 든다. 이 노래에서는 밥이 일상의 식생활 속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먹을거리인 한편, 여행이란 비일상적인 생활에서도 빠질 수 없는 먹을거리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더구나 이때 아리마 황자의 경우에서 추측하면 살아 있는 양식이란 현실과 공물이란 비현실의 대비가 밥에 들어가 있었던 게 아닐까?


아리마 황자의 일종의 신성한 노래에 반하여, 야마노우에 노쿠라山上憶良(660-733)는 "아궁이에는 불을 불어 올리지 않고, 시루에는 거미줄이 쳐져 밥을 짓는 일도 잊어서"라고 읊는 것으로부터 하급 관료의 빈곤이란 현실적인 실정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시루를 사용하여 아궁이에서 밥을 짓는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그것이 메벼인지 찰벼인지, 또는 보리인지 조인지 피인지, 어떤 밥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공가는 어떤 밥을 먹었을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시루로 찐 찰밥을 정식 주식으로 삼았다. 찰밥은 오늘날 지에밥의 원형이 된다. 12세기 후반에 성립된 "연중행사 두루마리 그림" <류취잡요초類聚雜要抄>에서 대향大饗이라 불렸던 궁중 향연의 식사 자리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향연의 밥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여러 연구가 있어 특별히 기술하지 않는다. 이 글의 주제인 밥에만 초점을 맞추면, 예를 들어 "연중행사 두루마리 그림" 권6의 정월 2일 중궁의 향례를 받는 장면에서 대반台盤이라 불리는 주홍색을 칠한 식탁 같은 상 위에 밥을 중심으로한 요리가 묘사되어 있다. 밥은 고봉이라 부르며, 상당히 높고 아래쪽이 퍼져가는 가늘고 길며 아름다운 원뿔꼴로 담겨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것은 전부 먹는 건 아니다. 이 밥의 주변에는 다섯 종류 정도의 작은 접시가 묘사되어 있는데, "류취잡요초"에는 향연의 밥상 배치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묘사되어 밥 주위에 술, 식초, 소금, 장 같은 조미료, 또는 해파리, 멍게 등 해초류와 패류 같은 먹을거리가 첨가되어 있다. 요리에는 식재료 자체의 맛 이외에는 거의 없어서, 요리의 맛에 변화를 첨가하려는 조미료와 채소나 해초 반찬이 덧붙여졌을 것이다. 조미료가 더해지지 않는다는 건 요리와 밥 그것의 본래 맛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봉밥은 그다지 젓가락을 대도록 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월 18일에 행해지는 활쏘기 장면에서는 흰나무에 받침을 댄 형중衝重이라 부르는 밥상 위에 고봉밥 두 공기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 단숨에 눈을 끈다. 


경사스런 자리의 식사에 반하여 공가의 일상적인 식사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한 예로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의 "3條 중납언中納言, 물에 만 밥을 먹은 이야기"의 내용을 보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식이 조절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공가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3조 중납언이란 후지와라노 아사히라藤原朝成(?-974)라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후지와라 사다카타藤原定方(873-932)는 가인으로서, 백인일수百人一首에 뽑혀 있는 "명실상부하다면 봉판산坂山의 남오미자 사람에게 알려져 오지 마라"를 읊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사히라는 학식, 예술에 뛰어난 인물로도 널리 알려졌는데, 비만으로 몸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의사인 와케씨和氣氏에게 식이 조절의 방법을 물으니 겨울은 더운물에 만 밥, 여름은 물에 만 밥을 먹으라는 충고에 따라 식이 조절을 시작했는데,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재차 와케씨에게 조언을 구한 바, 와케씨는 아사히라의 식사를 관찰했다. 시기는 6월, 아사히라는 의사의 충고에 따라 여름에는 물에 만 밥을 먹고는 있었다. 그러나 평소 호사스런 식사를 먹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에 만 밥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해 부식으로 하얗게 말린 9cm의 오이를 10조각, 은어 초밥 30개 정도를 시중을 드는 사무라이에게 가지고 오게 한다. 또한 아사히라는 빨리 먹고 많이 먹어서, 그 복스럽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와케씨는 기가 막혀 물러가고, 그 상태를 사람들에게 이야기로 전하여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아사히라는 더욱더 뚱뚱해져 씨름꾼처럼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일화에서는 공가의 식사에서 급사를 하는 것이 사무라이라는 점과 금은의 식기를 사용하는 점도 주목되고, 공가의 일상적인 식사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다. 물에 만 밥은 밥에 물을 부은 차즈케茶漬け이다. 공가는 늘 수분이 많고 부드러운 밥이 아니라, 단단한 밥을 먹었을 것이다. 차즈케는 배도 부르고소화도 잘 된다. 밥에 물을 부어 먹는 건 <원씨물어源氏物語>의 "상하常夏"에도 기록되어 있어, 식이 조절용만이 아니라 더운 여름에 식욕을 돋우는 궁리가 당시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아사히라는 은어 초밥을 밥과 함께 먹고 있다. <원씨물어>에도 초밥이 아니지만 밥에 은어를 제공하며, 여름에 은어라는 계절감도 엿보는 것과 동시에 밥과물고기라는 조합은 일상적인 먹을거리 양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양에 덜 차게 먹는다는 걸 옛날부터 지금까지 참을 수 없는 사람은 역시 비만을 해소할 수 없다. 사치스런 식사 때문에 비만으로 괴로워하고, 식이 조절을시도하는 귀족의 모습은 현대도 변하지 않는다.


한편 무가에서 밥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치조 카네요시一条兼良(1403-1481)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주반론酒飯論>은 술의 덕을 칭송하는 조주정造酒正 조옥조신糟屋朝臣 나가모치長持 밥의 덕을 칭송하는 반실율사飯室律師 코우한好飯이란 인물의 술과 밥의 의론에 중호中戸의 중좌위문대부中左衛門大夫 나카하라 나카나리中原仲成가 중재하여수양하는 이야기 구성으로, 이와 같은 작품은 이외에 란슈쿠 겐쥬蘭叔玄秀(?-1580)가 지었던 <주차론酒茶論>이 있다. 또한 근세에 들어가면 <주병론酒餠論> 같은 작품도 성립한다.


그런데 이들 작품은 술 같은 기호품에 대하여 밥과 차, 떡으로 의론하고 있는 점이 재미있다. 옛날부터 현재까지 술은 경사스런 자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음료인데, 중세에는 차도 향연의 장에서 중요한 음료가 되어 술과동격으로 취급된다. 게다가 대항하는 술은 그 원료를 쌀로 하고, 대조되는 밥과 떡은 여러 식사 속에서 주식이 되는 먹을거리이다. 이에 반하여 차는 주식이 아니라 술과 같이 기호품이 되는 데도 불구하고 밥, 떡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요한 자리매김을 한다. 


<주반론 두루마리 그림>에서는 술의 중호中戸는 무가, 하호下戸는 승려, 그리고 상호上戸는 승려와 속인 사이의 각각의 향연 풍경을 묘사하여, 밥은 중호와 하호에 묘사되며 상호의 주연 장면에서는 단지 술만 나와 승려도 무가도 술을 마시고 가무하는 광경 속에 밥은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본문 안에는 술을 너무 마셔 의식을 잃었을때, 그 취함을 깨우기 위한 것의 하나로 밤죽을 들고 있다. 


중세의, 특히 요리에 관한 회화자료의 특징은 향연 풍경만이 아니라 어느 것이나 급사인들이 바지런히 요리를 준비하고 있는 주방 장면이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가의 향연 풍경을 묘사한 중호는 주인의 향연 자리, 그 옆의방에서 술 또는 과일 등을 준비하는 장소, 그리고 요리를 준비하는 주방이라는 세 가지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향연의 자리에서는 주인, 손님과 함께 오시키라 부르는 네모난 쟁반이 일지선一之膳, 이지선二之膳이라고 두 상이 나오고, 주인의 아내인 것 같은 부인이 술을 손으로 잡아끌고 있다. 일지선에는 주홍색 공기에 밥, 국, 작은 주발, 회, 게다가 청자인 듯한 그릇이 나란히 늘어서, 향연 요리의 기본이 되는 국 하나 채소 셋인 것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장면에 묘사되어 있는 밥은 고봉밥이 아니라, 후술한 하호의 고봉밥과는 다르다. 또한 한 사람의 무사가 밥에 국 같은 걸 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밥에 국을 부어 먹는 건 고양이밥이라고 혐오하는 사람도 있는데, 옛날부터 현재까지 이러한 식사 방법은 공가들에서 행해지고 있다. 효겐保元의 난에서 세력 다툼에 패하여 도망간 후지와라 요리나가藤原頼長(1120-1156)가 지었던 <태기台記>에서는 보연保延 2년(1136) 10월 16일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將에 부임한 첫날의 향응에서 "다음 사람들 밥을 국에 말아서 먹고, 다음 탕을 마신다"고 적어 기록한 것으로부터, 아마 밥은 딱딱하게 짓고 거기에 국을 부어서 먹은 것은 물론이고 정식 식사법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한편 주방에서는 새와 물고기를 가르는 모습도 묘사되어, 이것으로부터 조리되어 상에 내갔을 것이다. 


무가는 싸우러 가는데, 전장에서 식사는 어떤 것이었을까? 14세기 중엽에 성립된 <후3년 합전 두루마리 그림>은오슈 키요하라奥州淸原 씨의 내분에 미나모토 요시이에源義家(1039-1106)가 개입하여 진정시킨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배가 고파서는 싸움을 할 수 없다"라는 속담대로 전장에서도 당연히 식사가 준비되어, 두루마리 그림의 상권에는 요시이에의 진영에서 고전하는 요시이에를 위하여 급히 달려간 동생 미나모토 요시미츠(1045-1127)가 요시이에와 대면하고 있는 장면(그림1)에서 굽다리 접시를 사용하고, 그 한가운데에 고봉밥, 그 주변에는 반찬류로 은어를 소금에 절여 누름돌로 누른 오시아유押鮎로 생각되는 먹을거리를 올린 쟁반 등 여섯 종류 이상이 늘어서 있다. 이 그림에는 전장임에도 불구하고 대장의 동생을 환영하기 위한 요리인지, 진영의 밖에서는 물고기와 새를 가르는 풍경도 묘사되어 있다. 또한 전투가 한창임에도 불구하고 충중衝重 같은 쟁반 한가운데에 고봉밥, 그 주변에는 역시 오시아유 등의 가공된 요리를 늘어놓고 식사를 하고 있는 풍경도 묘사되어 있다. 전투의 짬도 미신에 사로잡힌 건지, 또는 정력을 돋우기 위해서인지 밥을 중심으로 한 식사를 하고 있는 걸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식사 형태는 조금 더 상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는데, "연중행사 두루마리 그림"이나 <류취잡요초>에서 공가의 향연에 나오는 밥상과 거의 변하지 않았으며, 무가라고 하더라도 아직 공가풍을 이상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밥을 담는 방법은 공가가 아름답고 아래쪽이 퍼지는 원뿔형의 고봉이었던 데 반하여, 이 두루마리 그림에서는 크고 둥근 산 모양으로 담아 젓가락을 대고 있는지 아닌지 분간할 수는 없지만 밥의 일부는 떠낸 모양이 되어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림1 <후3년 합전 두루마리 그림>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사원의 밥 요리


일본인에게 쌀은 신과 부처에게 드리는 공물이란 의식이 강하다. 15세기 무렵에 성립한 '모귀慕歸 두루마리 글'에는 아미타불에게 드리는 공물이 묘사되어 있어, 그중에서도 유달리 큰 원뿔형의 하얀 것이 있다. 단언할 수 없지만 그 형태로부터 아마 이건 밥이 아닐까 추측한다. 똑같이 중세에 성립한 '읍부동연기泣不動縁起 두루마리 그림'에는 저 유명한 음양사 아베 세이메이安部淸明(921-1005)가 묘사되어 있다. '읍부동연기 두루마리 그림'은 삼정사三井寺에 얽힌 부동명왕의 대역 영험기로, 세이메이는 중병에 걸린 삼정사의 승려 치코우智興의 병이 낫도록 하기 위하여 태산부군에게 기도한다. 그 세이메이가 기도를 하고 있는 장면에는 제단 위에 알 모양을 한 고봉의 공물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도 아마 밥일 것이다.


한편 중세의 사원은 요리의 보고이다. 특히 선원의 영향은 두드러진다. 후세 선원이 정진 요리, 차 마시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 그 요인은, 정식 국교가 없었던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와 외교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 선승이며, 중국의 풍습을 가장 빨리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원에서 하는 식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개조 도겐道元(1200-1253)의 '부죽반법赴粥飯法'을 빼놓을 수 없지만, 그건 다른 기회에 하고자 한다.


'모귀 두루마리 글'은 신란의 손자, 본원사本願寺 3세 각여覚如(1270-1351)의 일생을 묘사한 작품으로, 사원의 일상생활, 향연, 유연遊宴의 식사와 게다가 중세에 보급된 차 마시기 문화의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회화 자료로도 유명하다. 제2권에는 각여가 스승인 정진浄珍의 시동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향응의 밥상을 대접하고 있다. 주인공의 앞에는 두 개의 형중이 놓여 있다. 하나의 형중에는 밥이라 생각되는 그릇을 중심으로 국 하나와 채소 세 개 같은 요리가 늘어서 있고, 다른 하나의 형중에는 두 개의 그릇이 늘어서 있다. 여기에서 묘사되어 있는 밥은 고봉밥이 아니고 적당량을 담아 먹기 위한 밥일 것이다. 급사인 승려가 거듭 형중을 나르고 있다.주방에서는 식사를 준비하는 불목하니가 밥을 그러모으는 모습도 있고, 향응으로 주방의 정신없는 모습을 생생히묘사하고 있다. 이 주방에서는 고봉밥 같은 것 이외에 면류로 생각되는 먹을거리도 묘사되어, 밥에도 면에도 젓가락을 찌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그림2).



그림2 모귀 두루마리 글




'모귀 두루마리 글'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제5권의 렌가連歌 모임 부분으로, 여기는 아직 요리를 내오기 이전이라 추측되고 주방에서는 요리의 준비에 여념이 없다. 유연의 장면과 주방의 사이에는 큰 풍로에 가마솥이 걸려 있고, 급사인 승려는 점심이라 생각되는 먹을거리를 수북하게 쌓은 쟁반을 나른다. 점심이란 본래 정식 식사의 틈에 먹는 가벼운 식사란 뜻이었는데, 차차 향응의 식사 형태로 편입되어 다양한 종류가 만들어진다. 편지의 왕래 형식을 취한 교훈서 <정훈왕래庭訓往來>는 앞의 <주반론>과 거의 동시기쯤에 성립되는데, 점심이라 부르는 것으로 고깃국 종류, 우동, 만두, 소면, 기시면, 권병卷餠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심류에 포함되는 면과 떡은밀을 원료로 하고, 그 형상도 현재와는 아마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기시면은 지금 나고야 명산인 기시면이 아니라, 밀가루를 반죽하여 당고 모양으로 만든 것, 권병도 떡이라 부르면서 찹쌀을 원료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밀가루를 써서 만든다. 


주방에서는 국을 준비하는 불목하니, 또는 물고기를 처리하는 일반 요리인 같은 인물도 있고, 옆쪽의 이로리囲炉裏에는 무언가 지피고 있다. 이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건 밥은 묘사되어 있지 않고 면류가 준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권6에도 북야사北野社의 시가회 이후에 열린 향연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시동을 상대하고 있는 공가의 앞에 형중이 놓여 있고, 밥을 중심으로 국 하나 채소 셋이라 생각되는 요리의 접시가 늘어서 있다. 기둥을 사이에 두고 요리를 준비하는 곳에서는 면류와 만두, 또는 떡 같은 것이 늘어서 있다. 또한 젊은 불목하니는 볏짚으로 감싼 먹을거리를 넣은 그릇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띠나 대나무 잎으로 말아서 찐 떡(치마키)이라 생각된다. 


앞의 '주반론 두루마리 그림'에서 하호의 장면은 승려가 향연하는 풍경으로, 세 가지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하나는 주인인 주지가 식사를 하는 풍경, 인접한 방에서는 차를 끓이는 풍경, 그리고 주방에서는 식사를 준비하는 급사인 승려들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이것 이외에 '주반론 두루마리 그림'에는 하호의 요리를 사전준비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장면이 있는데, 절구로 차를 빻는 승려와 세 명의 승려가 쌀을 선별하고 체질하며 정제하고 있는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그림3). 정식 무대가 되는 주지들의 식사에 대해서는 그 요리의 내용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국 하나 채소 셋과 같이 늘어서 있던 일지선, 이지선 같은 형중을 배치하고 있는 점은 밥상이 다른 것 말고는 앞의 중호와 공통된다. 그러나 술은 전혀 없으며, 모두 밥 종류와 콩 종류처럼 보이고, 모두가 그릇에서 비어져 나오게 산처럼 담겨 있다. 특히 일지선의 밥은 쌀알이 묘사되어 생생하다. 다른 한쪽의 밥상도 역시 밥 종류, 또는 콩 종류 같이 보인다. 게다가 급사인 승려가 고봉밥, 시동이 국 같은 것을 나르고 있다. 하호의 본문에는 


특별한 축하의 자리에서도, 우선은 당신을, 드시게 한다, 관례(元服), 이사, 데릴사위 맞이의 축하에 어느 것은 재료, 대신의 대향, 행함은, かいこうにたに, 有かたし

두 개 세 개, 다섯 개 나오고, すへ御れう, 본반복반本飯復飯, 알 주먹밥, わか御料, 구슬을 얼핏 본다, き御料, 조밥의 색은, 미타리와, 닮았다 

복숭아꽃의 잔치에 빨간 밥, 꽃의 색이, 비친다, 여름은 시원하고, おほえける, 보리의 밥도, 진귀하다, 지장 머리의, 고봉밥은, 육도六道로 쌓여, 믿음직하다 


라고 그 대부분이 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서詞書에는 성구의 음에 맞추어 뜻이 같지 않은 말을 만드는 언어유희도 있는데, 이 대문에서 밥에는 조와 보리도 포함되었다고 추측되어 쌀 이외의 다양한 밥 요리가 제공되었을 것이다. 조는 마타리의 색에 비유해 그 색채는 누런색이지만, 또는 미타리의 별칭 '아와바나'의 아와에 조, '오미나메시おみなめし'의 메시에 밥을 상정하고 있다고도 추측된다. 또한 알 주먹밥은 새의 알 같은 모양을 한 주먹밥, 복숭아꽃의 잔치에 있는 빨간 밥은 '꽃의 색도 비친다'고 하는 것으로부터 아마 벚꽃과 닮은 연분홍이고, 그것은 지금의 붉은밥에 해당하는 것이라 추측되며, 주먹밥과 빨간 밥도 향은에 나왔을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건 밥을 담는 방식에 대해서이다. 이 밥을 높이 담는다는 의식은 앞에 기술했던 궁중의 향연과 공통되는데, 궁중의 향연에서 밥은 말끔한 원뿔형으로 담았던 데 반하여, 여기에서는 둥근 산 모양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주반론>의 본문에는 고봉밥을 '지장의 머리'에 비유하고 있는 것에서, 지장보살의 머리를 영상화하여 밥을 담았던 걸 엿볼 수 있다. 밥을 먹는 것이 곧 신과 부처에게 받은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그림3 '주반론酒飯論 두루마리 그림'




이 하호의 요리에는 밥 이후에 떡도 준비되고 있었는데, 쑥떡과 절편, 송편, 좁쌀떡, 치마키, 음력 10월 첫번째 돼지의 날 먹는 떡, 거울떡(가가미모치) 등 종류가 다양하다. 주방에 묘사되어 있는 먹을거리 가운데 떡을 판별하는 건 어렵지만, 한 명의 승려가 쥐고 있는 건 속에 팥을 넣은 떡일까? 그 승려 뒤쪽의 선반에도 여러 가지 먹을거리가 늘어서 있어, 아래 단에는 치마키도 묘사되어 있다(그림4). <주반론>의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묘사되어 있는 먹을거리에서 점심으로 만두류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건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기타 가지, 오이 등과 같은 채소도 묘사되어 있는데, 이 하호에는 중호의 장면과 달리 새와 육류를 조리하고 있는 모습은 엿볼 수 없다. 




그림4 '주반론 두루마리 그림'(부분)




이러한 중세 사원의 식사는 밥만이 아니라 다양한 식재료가 채용되어 가공해서 떡, 가루를 재료로 만든 먹을거리도 많이 먹게 되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주식은 어디까지나 밥 종류이고, 떡과 가루로 만든 먹을거리는 디저트 같은 부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서민의 밥 요리


지금까지 본 '모귀 두루마리 글'이나 '주반론 두루마리 그림'에 묘사되어 있는 식사는 상층계급의 모습인데, 일반서민은 어떤 식사이며, 그중에서 어떻게 밥을 먹었을지 살펴보겠다.


13세기 말 성립한 '잇펜 대사 그림 이야기(一遍上人絵伝)'은 가락을 붙인 염불을 하여 민중에게 가르침을 퍼뜨렸던 시종時宗의 개조 잇펜一遍(1239-1289)의 생애를 묘사한 작품이다. 이 제5권에는 가마쿠라의 산속을 도보로 여행하는 잇펜 일행을 위하여 승려와 속인이 먹을거리를 나르고 있고, 이중에서 흰밥이 묘사되어 있다. 또 나라의 당마사当麻寺 만다라당의 장면에서도 잇펜 일행을 위하여 승려와 속인이 먹을거리를 반입하고, 그중에서 대량의 밥을 차례차례 담고 있다. 잇펜 대사에 대해서는 이외에 13세기 말쯤에 제작된 '유행상인연기회遊行上人縁起繪'가 있어, 그 안에서도 역시 사원의 대량의 밥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무가, 남녀노소, 끝내는 걸식하는 듯한 인물에게도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이러한 절의 식사는 신자를 중심으로 모두 평등하게 밥을 먹는 걸 중시했다고 추측된다.


'잇펜 대사 그림 이야기'나 '잇펜 대사 연기회'는 밥의 흰빛이 눈에 띄는데, 이 밥은 죽일 것이다. 죽은 묽은죽과 된죽이 있고, 된죽이 지금의 밥에 가깝다. '잇펜 대사 연기회'에는 밥주걱으로 밥을 푸는 바가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된죽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죽이라 하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茶川龍之介가 지은 <우죽芋粥>이 떠오르는데, 그 원점이 되었던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에 나오는 우죽은 죽이라 불리지만 쌀이 바탕이 아니라 토란을 가루내어 국과 섞어 단맛을 더한 서여죽薯蕷粥이라 부르는 먹을거리로서, 향연의 식사 이후에 나왔다. '잇펜 대사 그림 이야기'에서는 밥 이외의 식재료도 준비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무가와 공가처럼 공이 드는 요리는 늘어서 있지 않다. <금석물어집>에 에이지츠睿實라는 천태종 승려가 길가에 방치되어 있던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무언가 먹이려고 먹고 싶은 것을 물은 바, 병자는 밥을 물고기와 함께 먹고 싶다고 말한다. 이러한 일화는 당시의 포교자와 일반 민중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밥을 주식으로 부식으로 물고기 같은 조합이 서민에게도 이상적인 음식 유형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12세기 후반 무렵 성립한 '병초지病草紙'는 교토, 야마토의 기이한 병을 두루마리 그림에 정리한 것이다. 이중에 치근에 고름이 차서 괴로워하는 남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의 앞에는 네모난 쟁반이 놓여 있고, 칠기에 고봉밥, 국에 물고기 등을 담은 국 하나 채소 셋 같은 상차림이 되어 있다. 묘사된 남성이 어떤 신분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급 관료 아니면 그만큼 빈곤하지 않은 서민으로 추정되며, 이 날은 무언가 특별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밥에는 젓가락을 서서히 찌르고 있다. 공가의 의례에서 젓가락을 찌르는 일은 절대로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원에서는 주방에서 자주 볼 수 있던 풍경인데, 공가와 무가의 향연 풍경에서는 그다지 묘사되지 않는다. 이처럼 하급층에서 상징적으로묘사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춘일권현영험기春日權現靈驗記 그림'에는 장인들의 식사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그림5), 그 <침초자枕草子>에는 그 밥을 먹는 모양을 '장인들의 먹는 모습이 지극히 어슬프다'라고 평하며 '가지고 오는 게 늦으면, 국을 들고모두들 마시고, 토기는 바로 놓는다. 다음으로 반찬을 모두들 먹어치우면, 식사는 불필요한 일처럼 보일 정도로, 즉시 사라진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장인은 '식사' 곧 밥도 기다리지 않고 국과 반찬을 먹어치우고, 그 뒤에 밥은 필요없는 것인가 생각했더니 밥도 금세 먹어 버린다. 밥을 중심으로 한 식사를 순서로 세워 먹는 공가들이 보면 조급하고, 매우 예의가 없었던 것을 엿볼 수 있으며, '빈곤하여 먹고 살기 바빠' 먹을거리에 집착하지 않는 서민과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주가 되는 밥을 빠뜨리지 않는 점도 서민의 식사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5 춘일권현영험기春日權現靈驗記 그림




중세 후반에 성립한 <칠십일번직인가합七十一番職人歌合>에는 쌀 판매를 시작으로 떡 판매, 만두 판매, 삭면索麺 판매가 묘사되어, 도성 안의 시장에 전문적인 직업이 있었다는 걸 엿볼 수 있다. '복부초지福富草紙' '직간신문直幹申文 그림 이야기'에는 그러한 도성 안의 시장 모습이 묘사되어 짚신, 물고기 등을 파는 가게는 떡과 당고까지도 팔고 있다. <칠십일번직인가합>의 쌀 판매도 여성인데, '복부초지' 안에서 가마니에서 쌀을 꺼내 선별하거나, 공이와 절구로 찧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도 여성들인 점으로부터, 이러한 업무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떡 판매는 문 앞에서 잘 볼 수 있는 구운떡이 아니라, 나무상자 또는 둥근통에 담겨 있다. 그림 속의 글에 '따뜻한 떡'이라 하는 점도 주목된다.



마치며


중세의 회화 자료에 묘사된 요리의 장면은 단지 요리를 먹는 것만이 아니라, 그때까지는 전혀 각광을 받지 못했던 주방도 중시하고 있다. 그건 중세의 사람들이 요리를 먹는 것만이 아니라 만드는 것에도 강한 관심을 보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림은 그림 거짓말이라 하듯이 반드시 사실인 건 아니지만, 그러나 그곳에 묘사된 풍경은 화자의 시점이란 점은 틀림이 없다. 


그와 같이 안에 묘사된 밥은 흰색이 강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서민의 입에 흰쌀이 들어간 일은 거의 없다.이에 반하여 상류계급에서는 쌀 그것의 맛보다도, 사실 쌀은 희다는 겉모습을 중시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13세기 무렵에 성립한 <속고사담續古事談>에는 후지와라 요리미치藤原賴通(992-1074)가 뵤도인平等院의 영역 가운데 와카치노국河內國 와카에군若江郡(오사카부 야오시八尾市) 타마쿠시아츠玉櫛圧의 쌀이 최고라고 평하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보시다'라고 기옥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그건 미각이 아니라 시각에 의한 평가이다. 먹을거리의 색과 모양에 구애된다는 점은 현대에도 통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쌀은 다양한 상표가 출하되어, 일본인은 상표화된 쌀에 유혹되어 그것을 구하고 있다. 한편에서 건강 열풍의 영향으로 흰쌀이 아닌 잡곡쌀도 주목되고 있다. 쌀이 가진 원래의 맛있음이란 어떠한 것일까, 진짜로 아는 사람은 적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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