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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제1장


쌀의 정신성   -칸자키 노리타케神崎宣武



시작하며


쌀은 아시아 각지에서 전통적인 주식 작물인 것은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특히 계절풍 아시아의 각지에서 그 전통이 뚜렷하다.


게다가 쌀에는 단지 식용 기능만이 아닌, 어떤 종의 정신성이 투입되어 있다. '신성성'이라 해도 좋겠지만, 여러 가지 의례에서 상위의 공물로서, 또 주술적인 제구로서 쓰이고 있다. '세계에서 더욱 광번위한 분포를 이루는 주식재인 밀과 비교해 보면, 쌀의 신성성은 두드러진 특징이다. 


거기에는 쌀이 지닌 '신비성'이 작용할 것이다. 예를 들면, 벼 알곡에서 쌀이 되는 재생능력이 높은 것을 들 수 있다. 또, 쌀알이 반투명한 흰색이며, 그것을 밥으로 지으면 순백이 되는 색조도 들 수 있다. 대체로 다른 작물에는 없는 신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아시아 전역에서 시대를 거쳐 보편적인지 어떤지라는 점에서는 의문이 있다. 예를 들어, <쌀과 아시아의 사람들>(2003년)은 중국,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의 기백이 날카로운 연구자의 현장조사를 정리한 좋은 책인데, 특히 각 편에서 벼농사 농민의 생활사를 중시하고 있어, 그 한 항이 이 경우에 참고가 된다. 


예를 들면, 중국 장쑤성의 춘절에는 쌀가루로 만든 위안샤요元宵가, 단오절에는 찰벼로 만든 쫑쯔粽子가 빠지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다. 각각 그것을 먹음으로써 생명의 재생을 꾀하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쌀의 영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에서 쌀은 양성을 구비하고 있다고 믿어져 왔다. 수확한 쌀은 먼저 점성이 있는 벼이삭과 건조된 벼이삭을 제각각 묶는다. 즉 남성과 여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전에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에 옮겨서 지역의 공유 헛간에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콴이라는 어머니 격의 혼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체내에 깃든다고 믿어, 쌀도 예외가 아니다. 그 혼이없어지지 않듯이, 때때로 쌀의 재생 의례를 행한다. 특히 벼 알곡의 보관은 엄중히 행한다. 그건 밭벼 재배의 전통을 지닌 산지의 샨족 등도 마찬가지이다. 또 태국의 왕실은 모내기부터 벼베기까지 현지에 나아가 의례를 행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벼와 쌀을 국가 번영의 근원으로 삼기 때문에 틀림없고, 그 부분에서는 일본의 황실 행사에도 상통할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현재의 동아시아 각지에서는 쌀의 신성성이 몹시 후퇴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특히 민간신앙에서 쌀의 중요도는 별로 높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는다.


쌀과 곡령에 대한 신화와 그 전승은 각지에서 확인된다. 또 수확 의례도 확인된다. 게다가 행사를 하는 날에 지에밥을 짓는다거나, 떡과 당고를 만드는 것도 확인된다. 그러나 특히 제물의 인상이 약하다. 예를 들어, 쌀알 그것을 신에게 바치는 관습까지는 충분히 살피지 않는다. 그것도 흰쌀과 현미를 대상으로 하여 바치는 관습이라면,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조사를 맡은 사람의 의식과 질문의 문제이기에, 이 보고 사례만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사실, 그 책의 일본에 해당하는 보고도 그 부분에서는 내용이 빈약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한 해 동안 제사에서는 쌀과 그 가공품이 빠질 수 없는 제물인 일이 또렷하게 전해진다. 성묘에도 쌀자루를 가지고 가서, 묘 앞에서 쌀알을 바친다. 현재에도 농산촌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특히 쌀밥, 청주, 떡은 제물 중에서도 최상위이며, 음복 잔치에서도 가장 중요하다. 도시의 주민과 젊은 세대에서는 의식의 차이를 볼 수 있지만, 일본에서 '쌀과 의례'의 관계는 아직 농후하다는 것을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쌀의 신성성은 아시아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전승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제사에서 신에게 바치는 음식


제사의 신찬에는 곡물과 채소, 산해진미 등 다양한 것을 바치는데, 언제나 빠지지 않는 것이 밥과 술, 떡이다. 그것은 신주가 봉상하는 축사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곧 "신에게 밥과 술, 떡을 시작으로, 산야의 것은 감채와 신채, 바다와 강의 것은 지느러미가 넓은 것과 지느러미가 좁은 것, 먼 곳의 채소와 가까운 곳의 채소에 이르기까지 좌우로 진열하오니, 갖가지 물품을 어울러 제물을 공손히 바치는 분을 평탄케 하고 안정케 하고 드시고…"(신사 본청 제정의 기념제 축사 예문을 훈독화)라고 일반적으로는 이어진다. 그 항이 전후하는 것은 거의 틀림없다.


즉, 늘 필두에 밥과 술, 떡이 있다.


황미荒米

화미和米

바다의 넓은 것(어류, 패류)

바다의 좁은 것(다시마, 미역 등의 해조류)

하천의 넓은 것(은어 등의 민물고기)

하천의 좁은 것(조류)

산의 넓은 것(꿩, 오리 등의 야생조류, 멧돼지 등의 짐승류)

산의 좁은 것(떡갈나무, 모밀잣밤나무, 비자나무, 칠엽수 등의 나무열매류, 표고버섯과 송이버섯 등의 버섯류, 칡과 고사리의 뿌리=전분 등)

들의 넓은 것(미즈나 등의 엽채류 )

들의 좁은 것(무 등의 근채류)


엄중한 제사의 제전에서는 이처럼 신찬이 나열된다. 다만 밥과 술이 반대로 되거나, 바다와 하천, 산, 들의 넓은 것과 좁은 것이 생략되거나, 하나의 굽 달린 쟁반에 합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과일이 별도로 준비되는 예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이 원칙은 메이지 8년(1975년)의 식부료式部寮 통지 '신사 제식 제정의 건', 일반적으로 말하는 '메이지 제식'으로 정해진 것이다. 신과 부처 분리령(폐불 훼석)에 따라서 신도神道가 국교화되기 때문이다. 노리토소우죠祝詞奏上라든지 타마구시호우텐玉串奉奠 등 신사에서도 볼 수 있는 제식법이 그러하고, 신찬의 기본적인 조정법이 그러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이세신궁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식을 중심으로 제정된 것이다. 즉, 거기에는 국가의 평안과 무사함 및 오곡의 풍양을 기념하는 데에 주목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근대의 일본은 벼농사 농업을 기반으로 성립된 국가이다. 거기에선 국가적인 신에게 제사를 지내, 봄의 기념제祈念祭와 가을의 신상제新嘗祭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자리매김했다. 덧붙여 말하여 기념제의 해는 곡물의 것으로, 새봄을 맞아 그 풍작을 기원하며 미리 축하하는 것이다. 또 신상제는 그 수확을 감사하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축하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종류의 제사는 그때까지 민간에서 중요한 행사로 전해졌다. 그것을 국가가 새롭게 하여 권위화하고, 제식의 통일을 꾀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메이지의 제식은 상위하달의 형식으로 고쿠헤이샤国幣社부터 칸페이샤官幣社, 켄샤県社, 고우샤郷社, 손샤村社까지 전해져, 전국 각지 신사의 예제의 신찬이 표준화되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을까? 메이지라는 국가 체제를 배경으로 생각해 보면, 그 시대까지 없었던 급속한 철저함을 보았으리란 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아무튼 태정관의 명령에 의하여 대부분 하룻밤에 일본인 모두가 성을 등록했을 정도의 시대였다. 


물론 신사의 격과 제례의 규모가 작아지면 신찬의 품목이 몇 가지 삭감된다. 그런데 이후에도 그 기준이 신사의 제례에는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신찬 일람의 상위 세 품목은 조리된 것이란 점에 새삼스럽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나 신찬의 중심은 밥, 술, 떡이다.


이들은 '숙찬熟饌'이다. 이들에 반해 채소, 과일, 물고기 등 조리되지 않은 것을 '생찬生饌'이라 한다. 원래는 다른의미를 가지고 바친 것이다.


생찬은 풍년, 풍어, 풍렵을 기원하고, 또 그것을 감사하며 품목을 골고루 갖춘다는 뜻이 강하다. 말하자면 표본전시의 뜻이 강한 것이다. 한편, 숙찬은 그때 입수할 수 있는 최상의 식재료를 가지고 조상을 포함한 신들의 시중을든다는 뜻이 강하다.


그렇다면 본래 그 품목들은 곳에 따라, 계절에 따라 다른 것이 당연할 것이다. 생찬이라 하면, 농촌에서는 농작물이, 산촌에서는 채집물이, 어촌에서는 해산물이 주체가 된다. 다행히도 메이지 제식의 신찬 규정에도 분야마다 한쌍의 신찬을 정해 놓았는데, 그 품목까지는 상세하게 지시하지 않았다. 축사에도 간단하게는 '바다와 산의 다양한 것을 포함해 올리니……'라고 한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신이 먹는 건, 또는 사람이 그것을 함께 대접받는 건 숙찬이다. 따라서 숙찬은 제삿날에 한하지 않고 언제나 신 앞에 갖추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세신궁에서 '일별 조석朝夕 오미케사이大御饌祭'의 밥상에는 도미와 풋나물은 날것으로 세 종이 밥을 중심으로 젓가락을 딸려서 바친다. 그 도미와 풋나물도 일인분을 검소한 양이 초벌 도기에 놓이는데, 그것은 조리의 노고를 생략하고 형식화한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별도의 전통을 지닌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의 '약궁어제(若宮御祭り)'의 신찬은 오소노고쿠우御染御供라고 부르는 십선의 채소로 만든 음식인데, 이것도 채소류를 불에 익히지 않고 한 입에 먹을 수 있도록 자른 것을 수북히모은다. 분명히 조리의 노고가 생략된 모습이다. 그것은 조리 그것이라고 오래가지 않는다고 신 앞에서 악취가 나는 걸 싫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오소노코쿠우가 숙찬이 형식화한 것이란 점은 그 십선만이 신위를 모신 가마가 잠시 머무는 장소의 신 앞에 바쳐지고, 생찬의 물고기와 새는 모습 그대로 다른 장소(신찬 시렁)에 바쳐지고 있다는 부분에서도 분명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찬과 숙찬은 철저히 구별해야 마땅하다. 현행 대부분의 제사에서 신찬은 그것이 혼동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다만 잘 보면 취급이 달랐을 것이다. 밥, 술, 떡 같은 숙찬이 상단이나 중앙부에 바쳐져 있고, 생찬은 그보다 하단이나 양옆에 위치되어 있을 것이다.


밥, 술, 떡이란 세 종류의 숙찬이 종래 신찬의 정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에서 소규모 제사에서는 지금도 밥과 술, 떡으로만 때우는 예가 결코 적지 않다. 


즉, 그것이 예전에는 최상의 성찬이었다. 이 경우 과거란 참으로 대략적인 시대 감상이 되지만, 일본에서 벼농사가 전래, 전파된 뒤 제2차대전 직후 무렵까지로 해두자. 그것은 쌀이 경제적인 가치관의 기준이 되었던 시대라고해도 좋다. 즉, 신찬의 밥고 술, 떡은 모두 쌀만을 원료로 만든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쌀의 영력을 더욱 응축한 것이다.




쌀밥과 잡곡밥


역사를 통틀어 보면, 쌀은 일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식재료이고, 그 확보는 가장 중요한 생계였다. 특히 논벼는 이어짓기를 할 수 있어서 정주생활이 가능했다. 맛도 뛰어나고, 물리도록 먹는 일도 없었다.


생각하면, 극동아시아에 위치하는 일본 열도 북부는 조선반도와 중국 동북부와 함께 벼농사의 북방한계지이다. 남방에서 벼농사를 도입할 때에는 상응하는 곤란함이 수반하는 게 틀림없다. 냉해와 가뭄을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는 노력을 더하여, 벼농사를 진전시켜 쌀밥을 얻었다. 일본인에게, 우리들의 선조에게 쌀은 아무리 생각해도 귀중한 식재료였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서는 어느 시대나 그 벼농사 쌀밥으로 전 국민의 모든 식사를 조달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그 정도의 수확량을 확보하는 일은 어려웠다. 


예를 들어, 에도 시대를 예로 들어 보면 '6公4民'이라든지 '7公3民'이라고 말했듯이, 벼농사에 힘쓰는 농민들은 수확량의 반 이상을 소작료(年貢米)로 징수되었다. 그 소작료는 주로 인구 비율에서 30%도 안 되는 사무라이와 쵸닌町人 등 비농민을 대상으로 유통되었다. 그에 의하여 분명히 비농민, 바꾸어 말하면 도시주민은 쌀밥을 주식으로 했다. 그런데 에도 중기 이후의 에도 시민도 쌀을 충분히 먹지는 못했다. 이나가키 이세이稻垣史生 편집 <타미무라엔교三田村鳶魚 에도 생활사전>과 시부사와 게이조渋沢敬三 편집 <메이지 문화사 생활> 등을 참고로 유추해 보면, 에도의 마치에서는 문화文化·문정文政(1804-1830년) 무렵까지 장인을 제하고는 하루 두 끼를 먹었다.


특히 에도의 인구가 급증했던 에도 중기가 되면, 에도시 안에서 식사를 두 끼로 엄수하라고 막부령(검약령倹約令)이 내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에도의 마치에 모였던 쌀은 한 사람당 하루 두 끼 분량의 평균밖에 유통되지 않았다. 따라서 메밀과 당고 등의 간식을 발달시킨 것이다. 에도의 마치에서 하루 세 끼가 일반화하는 건 막부 말부터 메이지 무렵. 그것은 동일본 각지에서 새로운 논 개간이 진행된 뒤의 일이었다.


한편, 쌀의 생산자인 농민도 쌀을 주식으로 삼지 못했다. 


'임종의 쌀알'이란 이야기가 각지의 농산촌에 전해진다. 죽음에 이른 병자의 귓전에 쌀알을 넣은 대나무통을 흔들어, 지금 바로 쌀을 먹여 줄테니 기운을 내라고 격려하는 이야기이다. 쌀밥을 먹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에 하다못해 쌀 소리만이라도 들려주는 것이라 생각하는 동시에, 쌀의 영력으로 생명력을 소생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는 걸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농산촌에 널리 분포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그건 단적으로 말해서, 농민은 벼농사는 지어도 쌀을 먹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걸 말하고 있다.


농가라고 한마디로 말해도, 시대의 차이(농경기술의 차이)와 지역의 차이(기후의 차이), 게다가 예전에는 여러 번마다 규제와 지주, 소작료의 차이 등으로 똑같지 않았다. 그걸 굳이 대략적으로 평균화하여 생각해 보면, 일본의 농가는 한 집당 평균 1500평 정도의 논과 1500평 정도의 밭을 경작하여 농업경영을 꾸려나갔다. 이른바 '1500평 백성'(논)을 기준으로 하면 좋을 것이다.


특히 서일본에서 자급하는 마을의 성립 기원을 지닌 곳에서는 그 경향이 강하다. 전국적으로 대규모 논 개간이 확산된 건 근세인데, 그래도 소작농까지 평등하게 논을 배분해 보면 1500평이 1800평으로 늘어날 정도의 면적은 기대할 수 없다.


그 1500평 가량의 논에서 수확된 쌀의 양이, 현재는 농업기술의 발달에 의해 300평당 수확량이 10가마니(1가마는4말, 현미로 60kg, 흰쌀로 56kg)나 오르는 예가 적지 않다. 그러나 에도 시대에서 전쟁 이전까지는 그만큼의 차이가 없고, 전국적으로 평균할 경우 300평의 평균 수확량은 5-6가마니라고 한다. 따라서 1500평에서는 최대 30가마니 정도가 된다.


한 농가의 쌀 생산량이 30가마니, 그 반을 도시로 공출하면 남는 건 15가마니, 즉 60말(600되, 840kg)이다. 그래서 6인가족의 농가를 예로 들어 생각할 경우, 한 사람이 세 끼나 쌀밥을 먹는다고 하면 하루 최저 5홉(약 700g) , 6인이 3되(약 4.2kg)이 필요하다. 그러하면 600되는 200일분, 대략 1년의 절반 분량밖에 안 되는 것이다.


6인가족이 이 정도이기에, 8인 또는 10인이란 대가족도 드물지 않았던 예전의 농가에서는 쌀만 먹는다면 아마 1년의 1/3 정도만 먹을 양만 확보할 수 있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 게다가 제삿날을 위한 쌀을 확보하려 한다면, 일상의 소비량은 더욱 제한되게 된다. 당연히 거기에서는 쌀 대신에 무언가를 보충하여 먹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의 국토에서 모든 인구가 매끼를 먹을 만큼의 쌀 생산량, 즉 논 면적을 가지지 못했다. 다만 다행스럽게 한쪽의 밭에서 쌀을 대신하여 주식으로 삼는 보리와 잡곡, 뿌리채소류를 그럭저럭 생산할 수 있었다. 더욱이 계절마다 나무의 열매와 산나물 등 산과 들에서 수확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쌀의 부족분을 그러한 밭작물과 채집물로 보충하여 먹는 법을 궁리해 왔다.


그 대표적인 식사가 보리밥, 피밥, 조밥, 무밥 등이다. 이들을 일반적으로 '잡곡밥'이라 한다. 그걸 즙으로 희석한 것이 채소와 된장 따위를 넣고 끓인 죽인 조우수이雜炊이다. 예전의 농산촌에서는 이러한 잡곡밥과 조우수이야말로 주식이었다. 시대극에서  "오늘밤 양식(糅) 어디에서 구할까?"라는 말이 나오거나, 텔레비전 방송의 인터뷰에서도 "이 체험을 양식(糅)으로"라는 말이 나오거나 하는 것도 잡곡밥이 주식의 자리를 점하고 있던 역사를 말하고 있다. 특히 2차대전 이전까지는 그 전통이 실로 강했다.


이것은 예를 들면, <향토식관행조사보고서>(중앙식량협회 편집)에 수록되어 있는 1943년부터 1944년에 걸쳐 행해진 전국 일대의 농산촌을 대상으로 한 식생활 조사의 결과에서도 분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 조사보고는 전쟁이 세계 규모로 확대되어 가면서 일본인은 외국 쌀과 밀 등의 수입 식량에 의지하지 않고, 얼마나 자급할 수 있는지를 강구하기 위한 기초자료가 되었다. 원초적인 식사의 예를 아는 데에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세 가지 예를 아래에 소개한다. 어느 것이나 각 마을에서 당시 평균적인 일상의 식사 형태이다.



<군마현群馬県 토네군利根郡 카타시나 마을片品村> (春彼岸-秋收穫)        


다과(아침 5-6시쯤)

  '구운 떡'을 2-3개 먹음


아침밥(10시쯤) 다음 중 하나

  '구운 떡' (바쁠 때, 또는 일손 없는 집이 많음)

  조밥(조 70%, 쌀 30%)


점심밥(오후 3시)

  조밥

    반찬으로 된장국 안에 채소를 넣어 반찬을 대신한다. 이것에 통상 절임을 첨가함


저녁밥(오후 8-9시)

  보리밥(보리쌀[할맥] 70%, 쌀 30%)

  때때로 '우동' 다만 이것은 접대용이다.



<사이타마현埼玉県 지치부군秩父郡 히노사와 마을日野澤村>


아침밥(오전 5-6시)

  보리밥(쌀 50-70%, 납작보리 50-30%)

    반찬은 된장국, 절임, 막장(おなめ

      조림이나 물고기 등의 요리를 할 때는 아침밥 먹을 때 이것을 쓰고, 아침밥은 세 끼 가운데 가장 좋은 식사를 하는 관습이 있다.)


새참(오전 10시, 봄 모내기-가을 보리 파종의 농번기)

  고구마 또는 감자(집에 가까운 밥 이외는, 아침에 지참한다. 1인 3-5개의 가벼운 간식)


점심밥(오후 12-1시)

  보리밥(아침에 함께 지은 것)

    반찬은 절임, 아침의 된장국 남은 것


새참(오후 3시, 오전 새참과 마찬가지로 농번기)

  구운 떡 또는 고구마, 1인 2-3개. 이것도 오전 새참처럼 가벼운 간식


저녁밥(오후 7-8시)

  다음 중 하나(반찬에는 절임을 곁들이는 일이 많음)

  우동

    튀김우동... 여름에 많음. 다만 이것은 오히려 좋은 식사

    우치코미うちこみ ... 겨울에 많음. 이것이 우동의 일반 사례(푹 끓인 우동)

  수제비(츠밋코つみっこ)... 밥이 남았을 때 잘 만듦

  구운 떡... 이것에는 절임 외에 된장국을 곁들일 때가 많음

  밥... 보리밥이 많다. 절임, 된장국을 곁들인다.




<나가노현長野県 카미미노치군上水內郡 키타오가와 마을北小川村>


아침밥(오전 6-7시)

  보리밥(통상 쌀 20%, 보리 80%)

  조밥(위에 준하는데 쌀의 비율이 조금 많음)

    반찬은 된장국, 절임


점심밥(오후 12-1시)

  아침밥과 같음(아침에 점심 분량까지 짓는다)

    반찬은 된장국(새로 만듦), 절임(아침에 남은 것)


새참(오후 5시쯤, 단 농번기)     

  구운 떡 또는 센베이


저녁밥(오후 7시 반쯤, 농번기는 오후 9-10시)

  분식류

    (1)구운 떡(밀, 메밀, 피, 옥수수)

        센베이

    (2)우동(밀)

        무기키리麦きり(밀)

        소바키리(메밀)

    (3)우치코미(밀)

        수제비=호우토우ほうとう(밀, 메밀)




또, 전쟁 이전의 식생활 실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미야모토 츠네이치宮本常一 <식생활잡고>(1977년)에서도 사례를 인용하고 싶다.


가고시마현의 아마미오섬奄美大島에서는 고구마와 맥류를 반 정도씩 하여 밥을 먹었다. 아마미오섬에서도 가카이섬喜界島에서도 야쿠시마屋久島에서도, 쌀밥을 먹는 일은 제사와 잔치 이외는 거의 없었다. 야쿠시마에서는 고구마를 잘라서 보리 위에 얹어 밥을 짓는다. 그리고 밥을 지으면 고구마와 보리를 섞어서 먹는다. 게다가 가다랑어를 끓인 국물(가다랑어와 야생의 풀을 끓인 국물)을 곁들여서 먹었다.


오스미大隅 반도부터 구마모토현의 구마球磨 지방, 미야자키현의 메라米良와 시바椎葉 지방에 걸쳐서는 겨울철에 고구마와 돼지고기가 주식이었던 곳도 있다. 고기가 없는 시기에는 피와 보리의 잡곡밥과 무잎을 말려서 잘게 썰어된장과 보리를 한 그릇에 담은 조우수이 등을 주식으로 했다.


시코쿠부터 중부 지방의 산지에 걸쳐서는 고구마가 중요한 주식거리의 하나였다. 삶거나 구워서 먹을 뿐만 아니라, 으깨어 떡 모양으로 먹는 일도 많았다. 이를 카이모치かい餅(카키모치掻き餅)라고 한다. 시코쿠의 산지 등에서는 정월에 쌀떡을 찧지 않고, 카이모치를 대접했다고 하는 사례도 있다. 


츄우고쿠(일본 · 지방) 지방의 이와미石見와 이즈모出雲 등의 산촌에서는 논 소유가 적은 곳이 많아,그러한 곳에서는 보리밥과 피밥을 일상적으로 먹었다. 또 히로시마현의 산촌에서는 보리오 무를 섞어서 지은 무밥을 가장 잘 먹었던 곳도 있다. 다만 이러한 잡곡밥은 차가워지면 흐슬부슬하여 먹기 어렵다. 그래서 이 지방에 국한된 일도 아니지만, 특히 츄우고쿠 지방에서는 더운물을 부어서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무밥이 중요한 주식이었던 곳은 꽤 광범위한 산촌에서 볼 수 있다. 토야마현富山県부터 북쪽 아키타현에 걸쳐서 일본해 쪽 일대도 그러했다.


좀 유별난 곳으로는 노토能登 반도의 대구밥(鱈飯)이 있다. 대구의 머리와 꼬리를 떼어 내, 큰 솥에 끓여 뼈를 뺀다.  그것을 쌀밥과 보리밥에 섞는다. 그 근처에서는 대구를 잡는 시기가 되면 그것을 주식으로 했다. 


또한 중부 지방 이북의 산촌에서는 칠엽수의 열매를 저장해 놓고서 이것을 쪼개 알맹이를 꺼내, 잿물에 끓여 떫은 맛을 빼고 그것을 찧어서 떡으로 만들어 겨울철 주식으로 삼은 곳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결코 특수한 예가 아니었다. 전쟁 이전, 전쟁을 거치며 일본인 전체로 보면 잡곡밥과 조우수이야말로 주식어었던 것이다. 아니, 그나마 충분하지 않아 때때로 나무 열매나 산의 덩이뿌리 종류까지 주식에 준하는 먹을거리로 이용했다.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전쟁 이후 10년 동안이나 국민 1인당 하루에 50-70g의 보리를 먹었다고 한다. 거의 30%가 보리밥인 셈이다.


쌀밥은 어디까지나 경사스런 자리의 주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진지()'라고 했다. 우리 일본인은오랫동안 쌀밥을 성찬으로 계속 요구해 왔다는 것이다. 


특히 농산촌에서 쌀밥이 일상화하여 퍼진 건 전시의 배급미 제도 덕이었다. 1939년 공포한 '미곡통제배급법', 이것이 속칭 배급미 제도이다. 그 제도에서 국민 1인당 배급량은 처음에는 1일 2홉3작이었다. 그것이 전황의 격화에 따라 군대에 배급하는 걸 최우선(증량)으로 하기 위하여 일반에 주는 배급량은 2홉1작, 1홉8작으로 감소한다. 그러나 쌀의 총생산량을 총인구로 평등하게 나누는 이 제도는 역사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에 의하여 국민이 총력을 기울여 임전체제를 만들었다. 이후 절대양은 여전히 부족했는데, 대부분의 국민이 거의 매일처럼 그정도의 쌀을 먹게 되었다. 


덧붙여서 말하면, 현재 국내의 쌀 생산량을 총인구로 제하고 보면, 국민 1인당 공급량은 하루 거의 200g(약1.4홉)에 지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부족한 곡류를 대개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괜찮지만, 이 수치로도 일본인에게 쌀은 절대적인 주식이 아니다.


오랫동안 쌀은 귀하고 요긴하며, 중요한 식량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정력(力)이라든지 벼가 익음()이라 하는 것처럼, 영력이 깃든 신성한 식량이라고 했다. 


그 쌀을 넉넉히 쓰고, 게다가 조리의 수고를 들여서 만들었던 밥과 술과 떡은 최상의 성찬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것을 신들에게 바친 것이다.


물론 신들 같은 경우, 우리 일본인의 의식 안에는 조상이 동체화되어 있을 터이다. '신령님 부처님 선조님' 같은 삼위일체의 관념이 일본인의 종교관이라 할 만하고, 그것을 가지고 타민족에게 이해를 구하려 한다면 일본교라고부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고 조상숭배가 옛날부터 우리 일본인 대부분의 절대적인 종교관이었다고 한다면, 근세에 기독교 탄압이란 종교 소동이 일어났던 일도 의미가 있다. 곧, 일본인은 조상숭배를 허용하는 신앙과 종교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나,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것이다.


그러한 정신 토양은 일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꽤 한정된다. 중국인과 한국인, 또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민족 일부에게서만 볼 수 있다. 그것은 대략 특정하여 말하면, 벼농사 농경의 정주생활을 기반으로 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옛날부터 벼농사가 퍼져서 그곳에서는 논과 수리권에거의 항구적인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상속권이 확립되어 있다. 거기에서 가문의 계보도 발달하고, 벼의 파종부터 수확에 이르는 추이에 인간의 탄생부터 죽음의 일생을 투영하여 그 씨앗의 재생관이 강하다. 그렇게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특히 일본의 조상신앙은 참으로 뿌리가 깊다. 조상은 언제나 천상계에 있으며 신과 부처를 연결하고, 자손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백중과 정월로 대표되듯이, 제사와 행사마다 신과 부처와 함께 마을에 내려와, 집을 찾아와 대접을 받는다. 즉, 그래서 조상과 자손이 교류한다. 그와 동시에 조상을 중개하여 신과 부처와 사람이 교류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제사와 행사의 원형이다. 나와 관계가 깊은 바로 말하면, 불사에 한정되지 않고 신의 제사 때에도 불단의 문을 열고 등불에 불을 켠다. 그러한 습관을 우리는 아직껏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더 말하자면, 거기에 신과 부처, 조상과 사람이 '서로 맛보는' 잔치가 발달한다. 그것이 제사 이후의 음복 잔치이다. 또, 가정 안의 행사여도 불단 등에 성찬을 바치기 때문에 가족이 먹는다. 이것도 서로 맛보는 것의 한 형태일것이다. 그러하면 거기에 바치는 건 당연히 선조가 가장 성찬으로 먹는 것이 된다. 그 토지를 개척하여 자리를 잡고 살았던 선조들의 노고를 기념하여 최상의 성찬을 성심껏 바치고, 그 뒤 신과 인간이 함께 먹는, 또는 함께 머시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이, 정월의 떡, 춘분과 추분의 목단떡, 백중의 소면 등. 그곳에서는 신과 인간이 함께 먹으면서, 조상과 자손들이 서로 맛보는, 특히 그 뜻이 강하게 잠재되어 있다.


따라서 제사에서는 희고 윤기나게 아름다운 쌀로 만든 밥과 술과 떡이 가장 기본적인 신찬으로 정형화되었다. 또한 덕분이라 말하고 그걸 나누어 먹는 음복 잔치가 습관화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술

 

그중에서도 술이 존중되었다. 그건 쌀만 원료로 만드는 성찬 가운데 가장 수고가 들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가장 귀중한 식재료를 가장 수고를 들여서 조리한다. 그것이 최상의 성찬이 된다. 그러므로 신들도 그것을 각별히 사랑하신다고 해 왔다.


'신주 바쳐지지 않는 신은 없다'고 하는 게 아닐까?


물론 실제는 사람들이 술을 존중하고, 마시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사는 신들을 우러러 받드는 축하연이다. 먼저, 성찬은 신들에게 바치고, 그 뒤 사람들이 대접을 받는다.


그 주례를 '음복 잔치'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예강禮講'이라 한다.


천지와 오래까지 만대에 섬기는 흑주黒酒 백주白酒


이는 <만엽집>(권19)에서 후무야 지누文室智努 진인이 불렀던 노래이다. <만엽집>에는 음주를 즐기는 노래도 있는데, 이처럼 제사를 기념하기 위해 바친 술에 대한 노래가 많다. 고대부터 술에 대해서는 신을 대접하는 성찬이란 의식이 강하게 잠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에 상당하는 주례를 끝마친 뒤 신들에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달라 하고, 사람들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것이 무예강無禮講이다. 이 경우 무예강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본래 무예강이 단독으로 있을 리 없다. 예강이 있어서 무예강이 있다. 


신들에게 바친 술을 내려서 사람들이 대접을 받는다. 그 주례가 음복 잔치의 가장 간략한 기본형이다. 


그 순서와 예의범절은 반드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그런데 그 기본적인 순서와 예의범절은 습관이 되어 거의 정해져 있다. 


일반적으로는 잔(평평한 잔)이 하나, 윗자리부터 아랫자리로 돌린다. 즉, 위(신)부터 장로, 그리고 아래로 순배하는 것이다. 


술을 따라주는 사람이 주둥이가 작고 목이 긴 술병을 손에 들고 술을 따른다. 술을 세 번에 나누어 붓는다. 이 세번에는 올림을 공손히 행한다는 의미가 있다. 5번이나 7번도 올리지만, 거기에는 수고가 들기 때문에 3번으로 국한할 것이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술병을 기울이기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술이 넘칠 수도 있다. 술을 실제로 붓는 건 세 번째이다.


술을 받은 사람은 이것을 세 번에 나누어 모두 마신다. 이것도 첫번째와 두번째는 입을 대기만. 세번째에 모두 마신다. 이것도 또한 실수하지 않도록 공손히 행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덕분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분배의 술. 물론 취하기 위한 술이 아니다.


덧붙여서 말하면, 그때 신찬의 밥도 내려서 한 젓가락씩 분배하는 사례도 각지에 많다. 이것을 술안주라 볼지 어떨지는 차치하고, 음복 잔치에서는 술과 밥이 짝을 이루어 발달한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예강. 이것을 끝마치고 무예강으로 넘어간다. 일본의 술자리는 본래 이러한 이중구조를 가진다. 


그리고, 하나의 잔이 도는 음복 잔치는 삼헌식三獻이 생략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삼헌식이란 '술 한 번 안주 한 번'을 3번 거듭하는 것이다. 술 하나를 세 번에 마신다. 그리고 안주를 한 젓가락 집어먹는다. 그것을 세 번 반복하면 '삼삼은 아홉 번(三三九度)'이 된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엄숙하고 신중하게 다 마시는주례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반드시 잔의 수를 3개로 맞출 필요도 없다. 한 잔으로도 안주와 마시는 것을 사이에 두고 세 번 나누어 마시는 술을 3번 반복하면 좋은 것이다. 어디까지나 삼삼은 아홉 번이란 의미가 있다.


이러한 삼삼구도의 형식은 언제쯤부터 행해졌던 것일까?


이것에 한하여, 고사의 기원을 밝히는 일은 어렵다. 물론 정권의 교대나 경제의 부침에 따라 명확한 기술로 보여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것이 비교적 상세한 문헌은 <군용기軍用記>이다. 에도 시기의 문헌인데, 그 기술에서 무로마치 시기로거슬러 올라가 '출진의 축하'로 주종 사이에 '삼헌의 의례'가 집행되고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물론 그것이 기원이라고는 말할 수 없고, 그 이전부터 특권계급의 일부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특히 궁중 의례에 그 옛 형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문헌에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군용기>에서도 "술을 따르는 순서, 술을 마시는 모습, 독특한 격식에 의해 서로 바꾸는 사이 한 번 기울이지 않고"라고 사리를 밝혀 두었고,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주례가 존재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삼헌식의 처음 사례로 <군용기>를 아래에 인용한다.


'술을 따르고 시중을 드는 사람(御酌陪膳)'(陪酌人)의 예의범절로는 다음과 같다.


술을 잔에 따르는 모양은 두 번 따르고 세번째에는 많이 따른다. 술을 마시게 되는 사람에게는 마시고 남기지 않게 조금 있게 하고, 언제나 한 번 따르면, 더하여 두 번 올리며, 이상 세 번 세 잔으로 삼삼구도가 된다.


안주로는 "하나에 전복, 둘에 황밤, 셋에 다시마"이다. 이것은 "완전히 승리함을 경하하는 마음이 된다"라고 하고, "잠시 동안에 출진할 때 안주를 짝으로 한다"라고 한다. 전승을 바라며 미리 축하하여 행운을 빈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안주를 먹고 먼저 출진할 때는 전복을 취하여 왼손에 쥐고, 가는 쪽보다 굵은 쪽으로 입을 대고, 굵은 곳을 조금 베어 먹고 위의 잔을 들어올리고, 술을 세 번 나누어 마시며, 그 잔은 전복의 앞쪽에 놓고, 그 다음에 황밤의 한가운데에 있는 걸 잡아서 깨물어 자르고, 가운데 잔에 술 세 번을 붓기만 하고, 그 잔을 앞의 잔 위에 놓으며, 다음으로 다시마가 있는 걸 잡고, 양끝을 잘라 가운데를 깨물어 자르고, 아래의 잔에 세 번 술을 부어서 마시며, 그 잔을 원래 자리에 놓는다.


말하자면 조금 야만적인 풍습의 예의범절이다. 진막 안의 '임시'로 있었던 방법일 것이다. 그 시점에 이미 이러한 편의적인 예의범절의 변화가 있었다. 옛날부터 그때그때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래도 기본적인 원칙이 전혀지는 게 문화라고 할 것이다. 


안주의 내용은 때때로 여러 가지였지만, 또 안주를 취하는 법도 여러 가지였지만, 한 잔에 안주 하나로 짝을 맞추는 것을 일헌이라 하는 건 여기에서도 분명해진다. 또한 술을 다 마시는 법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술을 따르는 방법은 세 번으로 나누어 따르는 것도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이 삼헌식, 삼삼구도의 주례(예강)은 에도 시대 사무라이 사회에 계속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에도 시기가 되면 그것으로 알려진 문헌도 많아지고, 그에 붙여진 해석도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 혼란을 정리하고, 전고의 고증으로 냉정한 소견을 기술한 것이 이세 사다타케伊勢貞丈이다. <사다타케 잡기>에 그것이 상세하다.


한 잔의 술 두 잔의 술이라 하는 것을, 한 잔 두 잔의 일이라 이해하는 사람, 잘못이다. 무엇에서도 술을 마시고 술안주 등을 내어 잔을 대접하는 것은 한 잔이다. 다음으로 또 술을 마시고 안주도 내어 잔을 대잡하는 이것이 두잔이다. 몇 잔이라도 이와 같다. 한 잔을 마치면 그때마다 술병을 붓고, 일헌마다 술병을 새로이 하여 대접한다. 몇 잔이라도 이렇게 한다.


"옛 축하 의례에서는 반드시 삼헌식"이라고 생각을 헤아리고 있다. 그리고 술 한 잔 안주 하나의 조합을 3번 새롭게 대접하는 것을 정식 '헌'이라 한다.


그때 안주는 특별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술만으로는 구실을 하지 못한다. 이것은 전대의 <군용기>에서도 그러했고, 후대의 신 앞의 결혼식에서도 전해져 왔던 일이다. 예를 들어, 결혼식에서는 다시마, 마른오징어, 우메보시 등의 세 가지가 3개 한 벌의 잔과 함께 바쳐져 왔다. 그런데 삼삼구도는 중시되었는데, 세 가지 안주는 그렇지는 않다. 이를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고, 그대로 바치는 걸 생략하고 식장까지 나오는 추세이다. 술과 안주의 안주가 유명무실해지고 있는 현황인데, 실은 에도 시기에도 그러했다. 따라서 사다타케는 당시의 풍조를 '잘못이다'라고 엄하게 추궁한다.


그러나 시류라는 건 염려스럽다. 삼헌식의 한 요소(술잔치)만이 중용된다. 그렇지만 그건 그것으로 문화 변용으로 인정해야 한다. 또한, 그 결과 간략화된 예의범절이 보급되어 이미 하나의 전통이 된 것도 인정해야 한다.


지금 세간의 관습에서 축하 의례를 할 때는 반드시 술잔치라는 이름을 붙이고, 잔을 취하지 않으면 끝내지 않는 일이라 한다. 옛날에는 이런 일이 없다.


여기에 이르러서, 즉 에도 중기 무렵부터 '술잔을 나누는 일'이 삼헌식에서 분리되는 모양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귀족사회부터 사무라이 가문 사회에 전해져 온 삼헌식이 근세의 서민 사회에서 단독 술잔치로 변용되어 퍼져 보급된 것이었다. 


술잔을 나누는 일에서는 부부 잔, 자식 잔, 형제(자매) 잔, 습명襲名 잔 등이 있다. 현재는 신 앞의 결혼식에서 그것이 일반적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외는 일부 특수한 사회에서만 전승을 본다. 그런데 예전에는 자식 잔과 형제 잔이 널리 존재했다. 이른바 맹세의 잔. 그에 의하여 의제 자식 관계, 형제(자매) 관계를 연결했다. 의제 자식 관계에서는 부양과 노동의 교환이란 의무가 생기지만, 의형제의 경우에는 정신적인 상호부조의 뜻이 강했다. 그건 가족과 형제가 적은 자가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였다. 


맹세의 잔은 술을 세 번으로 나누어 마시고, 안주를 씹는다. 그리고 상대에게 건낸다. 상대도 똑같은 예의범절로 술을 마시고, 안주를 씹는다. 그리고 잔을 상대에게 돌려준다. 이것을 3번 반복한다.


3번 마시는 걸 3번 하는 건, 아주 조심스럽게 행하여 맹세한다는 의미이다. 첫 잔은 자신을 확인하는 각오를가지고 다 마신다. 두 번째 잔은 상대의 마음가짐을 확인하는 의미를 보여주며 다 마신다. 셋째 잔은 신명에게 맹서하며 다 마신다. 그것으로 약속이 굳건해졌다. 매우 일본적인 계약의례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술잔을 나누는 일이 끝나면, 그 잔을 본인이 가지고 돌아갔다. 즉, 잔은 증명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청주는 말하자면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잇는 '맹서의 술'이라 할 만하다. 


그럼, 이러한 잔을 나누는 일을 진행하는 데에는 중매인의 역할이 크다. 중매인은 중매쟁이와도 혼동되는데, 역할이 다르다. 술을 따르는 사람으로 종사하는 중매인은 계약의례의 입회인이며,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사람이다. 따라서 가장 신용 있는 사람이 종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정도로 형식만을 중시한 주례를 발달시킨 건 세계에서도 일본 특유의 것. 그건 술이 쌀의 영력을 가장 응축시킨 신찬이라 보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케'는 사(재계한다는 뜻의 접두어)+케(식사의 뜻인 찬饌)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럼 사를 접두어로 하는 유사한 예로는 사나에(볏모, 早苗), 사오토메(모내기하는 처녀, 早乙女), 사야마(斎山) 등이 있다. 청정한 것, 무구한 것이란 뜻이 공통된다. 어쨌든 쌀에 대하여 침범하기 어려운 민족의 생각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마치며


일본에서 쌀의 신성성이 왜 이만큼 강하게 전승된 것일까? 물론 이류를 하나로 집약할 수는 없다. 그런데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벼농사는 그 발생한 땅이 어디든, 또 볍씨가 어떻든, 남쪽에서 전래된 농업인 점을 들 수 있다. 


대충 말하면, 아열대의 계절풍 기후에 적합한 작물이다. 그것이 일본 열도에도 전해졌다. 그 부분에서, 일본 열도 대부분의 장소는 여름철에 한해서는 벼농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 열도의 여름은 짧고, 여러 번 서늘한 여름을 만나기도 한다. 특히 동북일본에서는 벼농사의 적합하다 할 수 없는 곳이 있다. 벼농사의 도입에는 품종개량을 수반하는 상응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했다. 


그 결과 일본 열도의 거의 전역에서 벼농사가 정착된다. 그러나 서일본 각지에서는 가뭄으로, 동일본 각지에서는냉해로, 자주 어쩔 수 없이 수확량이 감소했다. 게다가 풍년이어도, 1년에 한 번만 수확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집착이 강해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의미에서 일본 열도는 벼농사의 북방한계지인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한반도(조선반도)도 거의 똑같은 지리에 있고, 그 부분에서는 쌀에 대한 가치관도 한국과 대비하여 고려해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흰색"에 대한 신성성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것도 단지 일본에 한하여 말할 수는 없는데, 특히 일본에서는 흰색을 청정한 색이라 보아 왔다. 


현재에 전해지는 신을 제사지내는 일에서 보아도, 흰종이가 많이 쓰인다. 예를 들어 기도 종이(御幣)는 흰종이로 거의 통일되어 있다. 카이(불교에서는 천개天蓋)도 흰종이를 사방에 둘러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백개라고도 한다. 신도학에서도 민속학에서도 이런 종이를 자르는 방식을 분류하여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조형의 일이며 본뜻은 흰색에 있다.


그렇지만 흰종이의 사용을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에는 한도가 있다. 예를 들어, <고사기>에서는 '백화폐白和幣'. 닥나무의 섬유라고 보든지, 그것을 꼬은 실이라 보든지, 어느쪽이든 종이를 뜨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그것이 흰색의 표징이었다. 이윽고 흰종이가 출현하면 그것으로 변했다. 종이를 잘게 썬 것, 원래의 종이 공물이 섬유라고 한다면 그에 따랐다고 보는 것이 좋다. 길조의 모양을 자르게 되었던 건 더 이후의 조형화이다.


그럼 현재도 신에게 제사지내는 종이 공물에는 삼의 섬유가 걸려 있다. 그것은 <고사기>에 나오는 '靑和幣'이다.  


어쨌든 <고사기>의 시대부터 순백은 없었겠지만, 흰색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 이미 색 가운데 상위관념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 흰색이 더욱 자신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인식된 게 쌀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오시라オシラ의 신앙을 설명한 건 미야다 노보루宮田登이다. 도호쿠 지방에 분포를 보이는 오시라 님, 호쿠리쿠北陸 지방에 분포를 보이는 백산 신앙 등 흰색의 신비성과 신성성으로 언급하고 있다. 한편, 흰색=시라는는 한국어의 시라가 어원이며, 한반도에서 전해진 관념일 것이는 설도 있다. 


결국은 흰색에 대한 관념도 단순히 해석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희고 무구함'이라든지 '흰옷'이라는 단어도 전해지듯이, 우리 일본인은 흰색이 청정한 색이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흰쌀, 그리고 흰 술과 떡. 게다가 흰종이. 그것은 신을 우러러 뵙고, 신을 대접하는 데에는 가장 적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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