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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雜다한 글

한국의 도축장에선 누가 일하는가?

by 石基 2017.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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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나는 독산동 말미고개에 살았다. 말미고개에서도 가파른 고갯길을 걸어올라가 꼭대기에 있는 거창슈퍼 근처에 살았다. 얼마전 갑자기 어린 시절 생각이 나서 로드뷰로 찾아보니 거창슈퍼가 아직도 있어 깜짝 놀랐다. 

독산동엔 도살장이 있었다. 지금은 도살장은 사라지고 고기를 파는 곳만 남은 것 같더라. 도살장에선 밤늦은 새벽시간 소와 돼지의 도살이 이루어졌다. 독서실에 간다고 집을 나서 친구들과 재미나가 놀다 공부하려 자리에 앉으면 잠이 쏟아져 한숨 자다 보면 12시가 넘곤 했다. 독서실 아저씨가 집에 안 가냐고 깨우면 침을 닦고 일어나 가방을 주섬주섬 싸서 집으로 향했다. 그 시간, 도살장에선 소와 돼지들이 도살되고 있었다.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집에 돌아가던 기억이 난다.

도살장은 이른바 막장 같은 곳이었다. 그 동네에는 구로공단도 자리하고 있어 크고 작은 공장들이 많았다. 그 동네에 살면서 공장 냄새란 냄새는 종류별로 다 맡아 본 것 같다. 심지어 빵 공장도 있어서 그 일대에선 배고픈 냄새가 진동을 했고, 샤프 공장도 있어서 도둑질을 즐기는 아이들은 담을 넘어가 샤프를 훔쳐다 아이들에게 팔거나 나누어주곤 했다. 집이 가난한 아이들이 많아 그런가 도둑질은 누구나 한번쯤 다 하는 일이었다. 거창슈퍼에서도 도둑질하다 걸린 아이들이 주인에게 혼나며 끌려나오는 일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으니 말이다.

도살장은 일이 매우 고되었다. 대신 보수가 다른 공장보다 셌다. 어머니는 나중에 도살장까지 일하러 가셨다.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며 파스를 붙이고 나에게 주물러 달라고 하던 일이 기억난다. 난 철없는 아들이었다. 파스를 붙이고 주물러 주다가 몇 분 지나지 않아 팔 아프다며 안 하겠다고 관두곤 했으니 말이다.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엄마가 돌아와 밥을 차려주기만 기다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본인 아들이 복잡한 집안환경에도 엇나가지 않고 성적까지 좋았으니, 어머니에게는 그런 나를 키우는 게 유일한 낙이자 짐이셨을 것이다.

오늘은 미국의 도살장 이야기를 보았다. 특히 여기서 다루고 있는 닭 정육장은 소나 돼지를 잡는 도살장과 달리 정신없이 돌아가는 공장보다 더 고된 곳일 것이다. 한국인이 1년에 잡아먹는 닭이 8억 마리라고 하더라. 그렇게 따지면 하루에 약 220만 마리가 도축되고 정육이 되는 꼴이다. 전국에 닭을 잡는 곳이 얼마나 될까? 100곳이라고 하면 한곳에서 하루에 2만2천마리를 잡아야 한다. 그곳에서 노동자들이 하루 10시간을 일한다고 하면 1시간에 닭 2200마리를 잡아야 한다. 1분에 닭 35마리는 잡아야 그 숫자를 충당할 수 있다. 착착착착 하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날 것 같다. 아무도 닭 정육장을 취재한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던데 그곳의 하루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말 궁금하다. '다큐 3일'에서는 그런 곳에 취재를 나가보면 어떨까?

아직 한국 사회에서 닭 정육장이나 도살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환경이나 인권을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나 보고서는 없는 것 같다. 우리가 1년에 먹는 닭의 숫자와 양계산업의 규모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나의 지식이 짧아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기만을 바란다. 내가 본 유일한 르포는 한승태 씨의 <인간의 조건>이란 책이 전부이다. 거기에서도 돼지농장 이야기만 나오지 도살장과 도축장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도살장, 도축장은 내가 어릴 때 경험한 동네의 일이 전부이다. 그곳에선 네모난 쇼트닝 통에 돼지와 소의 피가 가득 담겨 젤리처럼 된 상태로 거래가 되고, 톱에 잘린 소와 돼지의 머리가 진열대에 흔하게 전시가 되어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 거리를 지나는 일은 어떤 귀신의 집을 가는 것보다 더 무섭고 떨렸다.

지금은 도살장과 도축장에서 누가 어떻게 일하고 있을까? 여전히 막장 같은 일터일까? 궁금하다. 누가 좀 알려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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