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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우 조선시대까지는 채소 종자의 생산, 유통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약간의 기록이 나타나지만, 역시나 곡물 생산에 중심을 두고 있었기에 채소 종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채소보다는 곡물이 위주였고, 또 채소의 생산주체가 대농이 아닌 소농이 중심이었으며, 저장시설이나 운송수단의 부족으로 도시에 가까운 근교에서만 주로 생산되어 유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산의 열무라든지, 뚝섬의 배추 등이 유명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종자회사로는 1916년 일본인이 세운 부국원을 시작으로, 이에 자극을 받은 조선인들이 1920년대 세운 조선농원, 경성채포원, 우리상회 등이 있다. 부국원에서 일하던 요시자와는 1928년 현재의 명동에 경성종묘원을 세우고, 1937년 일본의 다키이 종묘가 조선 다키이 종묘를 설립해 영업을 시작한다. 일본인 종자회사의 경우 전남과 경남, 제주도 일원에서 채종한 무(주로 궁중 무) 종자를 전국 각지의 소매상에게 판매했고, 이것이 지방의 오일장 난전에서도 거래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인 종자회사는 주로 농가에서 직접 채종한 종자를 수집하여 판매하는 형태를 취하였다고 한다. 

당시 주로 판매되는 채소 종자는 김장거리인 무와 배추였다. 개성배추, 서울배추, 일본에서 수입한 궁중 무는 물론, 중국에서 수입한 포두련, 지부 같은 결구배추와 직예와 화심, 산동 같은 반결구배추가 주로 판매되었다. 인기는 단연 결구배추였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연합군의 폭격으로 일본에서 종자를 수송하기 어려워지자 국내에서 채종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 소유의 종자회사는 한국인에게 불하가 되는데, 다키이 종묘의 경우 多起李 종묘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북쪽에서 종묘업을 하던 정순보와 이춘섭, 최덕환이 남으로 넘어와, 각각 서천과 부산(흥농종묘사), 서울에서 종묘업을 이어간다. 1954년 진주 농업시험장에서 근무하던 김원덕은 한국 최초의 1대잡종(F1)인 진주교배1호 오이 품종을 발표하고, 이후 1961년 제일종묘를 설립한다. 한편 이 시기에 활동한 우장춘 박사는 한국 채소 종자산업에 한 획을 긋는다. 한국의 채소 종자산업은 우장춘 박사 이전과 이후로 나뉠 만큼 그의 업적은 대단했다. 우장춘 박사로 인하여 채소의 육종과 종자 생산의 기틀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1961년 채소 종자 관계법령인 '농산종묘법'이 발효됨에 따라 종묘업자들이 본격적으로 종자 사업에 임하게 된다. 각 종자회사의 육종 연구농장에서 1대잡종 품종을 지속적으로 육성하여 보급함에 따라 농민들도 점차 그 우수성을 인정하면서 신품종을 선택하게 된다. 이에 종자회사들은 우수한 품종의 고품질 종자를 생산하는 데 더욱 노력하게 되었다.

1965년에는 한국 종묘생산협회가 발족되면서 국가에서 관리하던 채소 종자의 수급과 수입종의 수급을 협회가 관할하게 된다. 당시 한국에서 개발된 1대잡종 품종은 아직 많지 않아 주로 일본에서 수입한 품종을 재배하는 농가는 높은 소득을 올렸다. 이에 일본에서 종자가 밀수입되기까지 하여 경남 일대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수입을 통제하고 협회의 회원에게만 종자 수입권을 부여하여 여러 종자회사들이 협회에 가입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농림부에서는 채소종자 수급계획에 따라 수입물량을 확정하고, 이를 놓고 협회가 회원들의 등급에 따라 수입량을 할당해주었다. 각 종자회사는 서로 더 많은 물량을 할당받기 위해 사활을 걸고 경쟁을 하며 심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이러한 갈등은 1991년 종자의 수입이 자유화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70년대는 종자업계에 지각변동이 심하게 일어난 시기이다. 1973년 '종묘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종자의 관리규정이 강화되어 이를 따르지 못하는 종자회사는 자연도태되며 종묘상으로 전락했다. 한편 규정된 시설을 구비하고 규정된 수의 기술자를 확보한 새로운 종자회사들이 탄생하는데, 이때 업계에서 활동하던 기술자 출신과 뜻을 지닌 젊은이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다. 대표적으로는 1976년 신동식이 동아종묘를 인수하며 설립한 서울종묘가 있다. 1981년에는 국내 농약회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한농이 종자업계 3위인 제일종묘를 인수하면서 종묘업을 시작하고, 수원에서 흥농종묘의 총판을 하던 고희선은 채소종자의 생산과 육종 사업에 뜻을 두고 농우종묘를 창업한다. 한농은 이후 1995년 동부그룹에 인수된다. 

1985년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종묘업계는 다시 변화를 겪고, 2000년대에는 기존 종자회사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새롭게 창업을 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90년대 말 다국적 농기업이 국내 종자회사들을 앞다투어 인수합병하게 된다. 1996년 스위스의 노바티스는 농진종묘를 인수하고, 이듬해 서울종묘를 인수하게 된다. 이후 1998년 한국 신젠타 종묘로 이르을 바꾸어 지금이 이르고 있다. 또 멕시코의 세미니스는 1997년 중앙종묘와 흥농종묘를 동시에 인수하며 한국 채소종자 시장의 50% 가까이를 점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세미니스도 2008년 몬산토코리아에 인수되게 된다. 일본의 사카타 종묘는 예전부터 한국의 청원농상종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1999년 이를 인수하며 사카타 코리아로 새롭게 출범한다. 또한 일제강점기부터 조선과 관련이 있던 다키이 종묘는 농민들에게 종자에 대한 평이 좋았는데, 1991년 종자 수입이 개방되자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여 활동하다가 2002년 여주에 연구농장을 설치하며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상 [한국채소종자산업발달사] 2장 채소종자 산업의 발달 과정에서 요약 발췌.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채소 종자도 60년대 이전에는 주로 집에서 채종을 하는 관행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종자회사들은 새로운 품종을 육종하여 개발하는 일보다 농가에서 그렇게 자가채종한 종자를 수집하여 판매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하네요. 이후 60년대는 한국전쟁의 여파 등으로 아직 종자의 생산기반이 빈약하여 주로 예전부터 재배하던 일본의 수입 품종을 들여와 판매하는 일에 치중하다가, 70년대를 거치며 점차 생산기반을 마련하며 80년대에 들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7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의 집집마다 여러 토종 채소들을 재배하여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이후 80년대 산업화가 완성되는 시기와 맞물려 더욱 심해진 이농현상과 도시와 노동자 계층의 성장 및 소득 증가에 따른 채소 수요의 증가, 고속도로의 개통 등 운송 및 저장시설의 발달 등이 농촌에서 토종 채소들을 밀어내고 신품종들이 자리를 잡게 하는 데 한몫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또 모르죠. 시장에 내다 팔 것들은 신품종으로 심되, 집에서 먹을거리로 이용할 채소들은 예전부터 심어오던 것이 계속 남아 있었는지도 말이죠. 실제로 토종 씨앗을 수집하러 나가보면 노농들의 경우 아직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곤 하니까 말입니다. 


아무튼 채소종자산업발달사를 들여다보니 한국에서 신품종 채소들이 널리 퍼진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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