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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례-한국 무교의 정체성과 종교성.pdf


1927년 이능화의 <조선무속고>가 나온 이후 한국의 巫에 대하여 다양한 논의들이 전개되어 왔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한국 무의 정체성과 종교성에 대한 쟁점을 중심으로 그 논의들을 정리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한국의 무 연구는 “현대 한국인의 일상적 삶의 맥락에서 ‘지금 여기서’ 실제로 작용하는 현대적 종교로서 무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살아 있는 현재의 학으로서 무교 연구가 정립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를 위하여 필자는 크게 세 가지 쟁점에 관련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 정의와 기원의 문제, 2. 유형론적 비교의 문제, 3. 종교적 본질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앞으로 필자의 논의를 하나하나 짚어보겠다.

 먼저 필자는 무의 정의와 관련하여 각 연구에서 사용한 그 명칭에 주목한다. 필자는 명칭의 문제에 “어느 명칭이 무교현상을 이해하고 기술하는 데 있어서 대표성”을 갖는지와 “무교와 샤머니즘의 상관관계”라는 두 가지 쟁점이 놓여 있다고 본다. 그동안 무를 연구하면서 쓰인 명칭으로는 무속과 무교, 무(이즘)가 있다고 한다. 무속은 무교를 민간신앙이라는 민속현상으로 간주하는 입장으로, 무속과 샤머니즘을 서로 구별되는 것이라 본다. 그리고 무교는 무속을 포괄한 문화현상의 배후에 있는 하나의 실체로 무교를 바라보는 입장으로, 여기서는 무교를 샤머니즘의 일부인 “한국적 샤머니즘에 대한 고유명사”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무(이즘)은 무교를 샤머니즘과 다른 신앙체계로 보는 입장이다.

 여기서 필자가 이 논문에서 ‘무교’란 명칭을 쓰고 있는 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무가 단순한 민속현상이 아닌 무속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곧 무교가 한국인의 의식 저변에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미쳐왔다고 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김태곤과 조흥윤의 지적처럼 무교란 용어는 “교조에 의한 교리가 문서화된 경전이나 체계화된 조직”이 없고 “서구 종교의 기준을 따르는 것”으로서 적합한 명칭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무의 어떤 점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그 명칭에 차이가 생기는데, 한국의 무가 과연 무교라고 지칭할 수 있는 특성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다음으로 무교의 기원과 관련한 쟁점이 있다. 크게 문화적 고유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문화혼합설의 입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필자는 한국 무교 연구사의 초기에는 서구 제국주의와 일제 식민주의의 영향으로 외부유입설이 우세했다고 본다. 이 설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한국을 미개사회로 보고 한국의 문화가 있다면 외래문명의 영향으로 간주한 데에서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실증적 분석이라기보다는 무속을 구성하는 몇몇 요소를 근거로 문헌자료에 의존해 문화전파의 시기와 경로를 추정하는 수준으로서, 한국 무의 기원을 밝히는 데에는 충분치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외부유입설은 이후 무에 대한 한국 연구자들의 성과가 축적되면서 무교의 ‘독립발생론’으로 정리가 된다. 필자는 독립발생론은 국수주의적인 오류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하여 한국 무교의 문화적 독자성을 정립하고자 하는 이론이라고 본다.

 이러한 기원론과 관련된 문제로서, 필자는 이제 한국의 무를 어떻게 유형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즉, 유형론 논쟁을 통하여 한국 무교의 특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엘리아데의 샤머니즘 연구에 따르면, 샤머니즘은 ‘진정한 샤머니즘(authentic shamanism)’인 엑스타시 유형과 ‘유사 샤머니즘(inauthentic shamanism)’인 포제션 유형으로 나뉜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한국 무교의 유형론에서도 처음에는 한국의 무를 북방 샤머니즘과 남방 샤머니즘으로 분류해 왔는데, 필자는 한국 무교의 특성-엑스타시와 포제션 유형이 혼재-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그 이론을 수정하려는 시도에 주목한다. 특히 김태곤은 입무 과정의 트랜스 현상에 주목하여 ‘트랜스-포제션trance-possession’이란 포괄적 개념으로 샤머니즘을 다시 정의하고, 최길성은 한국 무교가 남방 샤머니즘에서 기원했기에 한국의 무에서는 포제션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필자는 이와 같은 한국 연구자들의 새로운 유형론을 “문화적 주체성에 대한 자각과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물론 그러한 지적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그동안 축적된 연구의 성과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기원에 대한 문제는 필자가 논문에서도 지적했듯이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에 빠질 우려가 존재한다. 그래서 기원론은 조심스러운 연구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좀 더 다양한 지역의 샤머니즘의 형태에 대한 연구와 한국 무의 사회적·경제적 변화에 따른 시대적 변화 양상에 대한 연구가 밑받침이 되어야 좀 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의 무교가 무엇인지 밝히는 일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무교보다는 무속이란 용어가 더 친숙하고 문화현상도 무속의 입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무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일이 더욱 시급하게 요청되는 상황에서, 단순히 문화적 주체성에 대한 자각과 자신감으로 무에 대한 연구가 발전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감상적인 자세가 아닌가 한다.

 그러고 나서 필자는 이러한 유형론과 관련하여 한국 무교 연구사에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강신무와 세습무라는 개념을 살펴본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에 의해 처음 만들어져 무당의 유형을 설명하는 중심 개념으로 쓰인 강신무와 세습무는 입무 과정의 강신체험 유무로 구분을 한 개념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단순한 구분은 과거 무당의 지역적 분포를 기술하는 데에는 유용했지만,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분단이란 역사를 거치며 변화한 현대 사회의 무당을 연구하는 데에는 무용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의견에 동감하는 바이며, 더 나아가 그 부분이 바로 한국의 무 연구가 수행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무교의 종교적 본질의 문제’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그는 무교는 일종의 종교라는 전제를 깔고, 무교는 단지 기복신앙이며 미신이란 인식에 대하여 거기에는 일정한 구원관이 내재해 있으며 더 나아가 “무교뿐 아니라 한국 역사와 문화의 맥락에서 존재하는 모든 다른 종교의 기층에 자리 잡고 있는 포괄적인 종교성”을 뜻하는 무교적 종교성을 지닌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필자는 무교란 우리의 내면에 자리하면서 한국의 종교문화에 영향을 끼쳐온 하나의 실체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교란 단순한 기복신앙이 아니라 ‘調和’와 ‘財數’ 같은 구원관을 지닌 종교로서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며, 무교가 지닌 ‘신바람의 영성’과 같은 무교적 종교성이야말로 한국의 종교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란 주장이다. 이를 통하여 필자는 “한국 종교문화의 현세중심적이고 기복신앙적인 특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부정적인 특성의 출처를 오로지 무교에 혐의를 두었던 기존의 관점”을 수정하고, 무교를 ‘한국인의 고유한 종교전통으로 재정립’하자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가 아닌가 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과연 巫란 무엇인가?’ 필자의 논의처럼 단순히 무당과 그가 행하는 굿을 무교의 하위개념인 무속이라 한다면, 무교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몇몇 연구자의 지적처럼 무교의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그 종교성이 퇴색된 것이라면, 무교는 왜 그러한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한 자세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논문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근대화와 합리화 등에 따라 무교도 변화해 왔다. 무교를 하나의 정신문화라고 본다면, 정신문화 또한 물질문화의 변화에 따라 변형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무교의 정신적 원형은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시대의 변화 원리로 작용해 왔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러한 정신적 원형이 존재했는가 물어본다면 그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없다.

시대의 변화, 곧 물질문화의 변화에 따라 정신문화도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며 늘 새로운 모습으로 그 부름에 응해온 것이 인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정신문화는 소멸해 왔다. 한국 무교의 종교성이 소멸한 것도 그러한 결과의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도 이에 대하여 “현대 한국인이 길흉화복에 대해 가지는 문제의식은 예전과 다른 삶의 조건에 살고 있는 만큼, 전통적인 무속의 이해와는 다르게 접근해 가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필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한국의 무가 무엇이고, 어떠한 장점이 있으며, 특히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현대 한국인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무당에게 의뢰하고 굿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날이 올 것 같지 않다. 앞으로 한국의 무교 연구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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