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에는 조선 후기에 만 권의 서책을 지닌 집이 2곳이나 있었다. 하나는 청문당이라 불리고, 다른 하나는 경성당이라 불렸다. 두 집 사이의 거리는 500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만 권의 서책을 지닌 곳이 전국에 4곳뿐이었다는데, 그 가운데 2곳이나, 그것도 서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조건은 안산에서 실학이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책은 양식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실제로 이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조선 실학의 큰 별인 성호 이익 선생이 살았다. 아마 성호 이익 선생은 청문당과 경성당에서 서책을 빌려다 보며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실제로 순암 안정복은 이곳에서 서책을 빌릴 수 없겠냐는 내용의 정중한 서찰을 보내기도 하였다.
청문당은 텃밭을 오가며 늘상 지나다니는 곳이기도 하고, 안산시에서 새로 단장을 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죽은 집으로 만들어 놓아 영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경성당이나 한번 갈까 하는 맘으로 텃밭에 갔다가 발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이곳을 지나다닌 지 5년도 넘었건만 가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아무래도 그곳으로 갈 일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그냥 지나치게 되었다. 오늘 이렇게 막상 찾아가려고 하니 웬지 설렌다.
굴다리를 지나니 오른쪽으로 축사가 자리하고 있다. 순간 갑자기 뭐가 있기나 한 것인가 의심이 일어났지만 그냥 묵묵히 발걸음을 옮겨 오르막길을 올랐다. 그러자, 눈 앞으로 오래된 집 한 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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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가니 반듯하게 잘 지어진 한옥이 우렁차게 서 있다. 비록 집 앞쪽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때문에 옛 풍광은 잃었지만, 그 풍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더 반가운 것은 청문당과 달리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어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집을 구경하고 싶으면 주인에게 청하면 가능하다고 하니 이런 호사가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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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루에 걸린 주련柱聯을 보니 내용이 재밌다. 3개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山高華帽峰下居簪纓之族村深覆釜谷中有鐘鼎之家(높은 산 화모봉 아래 빗살처럼 모여 사는 한 가문, 이들이 사는 깊은 골 부곡에는 집들이 솥발처럼 들어섰구나)
宣廟賜牌之局寸土勿輿於他人(선조께서 내려주신 땅, 한 줌이라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
星祖定礎之基十世相傳于後裔(성조께서 터를 잡으신 곳이니 후세까지 보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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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 위쪽을 보니 현판이 걸려 있다. 하나는 이 집을 지으면서 기록한 경성당기竟成堂記, 하나는 경성당이란 이름을 쓴 것이다. 경성당이란 현판에는 동농이란 호가 적혀 있다. 찾아보니 그 호는 김가진金嘉鎭이란 사람의 호라고 한다. 그는 1846년에 태어나 1922년 상해에서 죽었는데, 안동 김씨 집안의 사람으로 일제강점기인 1910년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다가 반납하고, 이후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분이 쓴 글씨니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게다. 그래도 그 필체가 정말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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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이 집의 유래를 알아보니 柳重序(1779~1846)라는 사람이 둘째아들인 방(1823~1887)의 살림을 내주면서 지어준 집이라고 한다. 김가진과는 그 둘째아들과 친분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역사 공부하는 분들이 어렵겠지만 둘의 관계를 캐서 알려주면 좋겠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따지면 200년 가까이 된 집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시멘트 건물은 몇 십 년이라도 서 있으면 대단한 거지만, 나무로 지은 한옥은 어떻게 그리 오랜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김가진이란 인물과 연결이 될 정도면 조선 말기까지도 이 집안의 세력이 대단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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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당을 보면서 계속 드는 생각은 역시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거다. 사람이 살면서 자꾸 쓸고 닦고 손길을 줘야 제대로 집다운 집으로 서 있을 수 있다. 지척에 있는 청문당과 경성당을 계속 비교하게 된다.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어도 예전에 청문당에 사람이 살았을 때가 더 좋았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집은 사람이 살아야 한다. 박물관이나 문화재를 가면 늘 드는 생각이, 그런 곳들은 아무 생명력 없이 죽어 있다는 점이다. 보존을 위한 보존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과 함께 살아 숨쉬며 공존하는 방안을 마련할 수는 없는 것인가? 개발 논리에 밀려 사라지거나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문화재를 볼 때마다 안타까움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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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 집을 찾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채 누마루 바로 옆에 있는 그 좋다는 옻나무 우물이다. 정말 소문대로 여러 효능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만수동의 울창한 숲이 내뱉는 맑은 물이 예전부터 끊임없이 퐁퐁 샘솟고 있다. 물맛은 사 마시는 생수는 여기에 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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