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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大寒), 마지막 추위로 보내는 섣달 그믐날

 

 

 

 

 

 

마지막이라 그런가 대한이 4일이나 지났는데 요번만큼 늦게 글을 쓰기는 처음인 것 같다. 농사도 파하고 뭘 쓸지 딱히 떠오르지 않으니 이 자료 저 자료 뒤지기만 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일단 모니터 앞에 앉아 본다.

육필로 쓸 때도 일단 원고지 놓고 연필을 들면 생각이 절로 떠오르곤 했던 것처럼 키보드를 두드리기만 하면 뭔가가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 아이큐가 세 자리 겨우 턱걸이한 나는 머리가 뇌에 있지 않고 손가락에 있나보다 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은 젓가락질을 잘 해서 머리가 좋다고 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또 손가락을 잘 쓰면 머리가 자극이 잘 된다고도 하고, 더 나아가 오른 손을 잘 쓰면 좌뇌에 좋고 왼 손을 잘 쓰면 우뇌에 좋다고 했으니 어찌 보면 머리가 손가락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진리일지도 모를 일이다. 참, 대한과는 전혀 무관한 얘기를 이렇게도 길게 쓰는 걸 보면 ‘안구라’라는 별칭이 썩 부끄럽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 구라도 입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손가락에서도 나오는가 보다.

대한은 몸을 쓰기보다는 사랑방 아랫목 이불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바구나 늘어놓기 좋은 마지막 농한기다.

대한 추위가 글자와는 달리 소한 추위보다는 그 기세가 약하다고 앞의 소한 글에서 얘기했다. 그래서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했는데 이 글 쓰는 오늘 기온이 영하 9도로 떨어졌으니 대한 날씨가 포근한 것만은 아니다. 저번 주 소한 추위가 물러간 후 바로 봄 같은 날씨가 찾아와 어제까지 겨울 같지 않아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대한 동장군이 찾아왔다. 하지만 대한 추위는 소한 추위에 비해 약하기도 하고 길지도 않다. 곧 입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대한 끝에 양춘(陽春) 있다 했다.

대한과 입춘 사이의 날씨 변화를 잘 표현한 말이지만 더 깊게는 큰 고비를 잘 넘기면 평지가 온다는 교훈도 담겨있다. 대한이 지나면 곧 찾아오는 음력 섣달그믐을 두고 우리 조상들은 많은 금기와 교훈을 남기고 있는데 대개 한해의 마지막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예부터 섣달그믐이 다가오면 한해의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고 했다. 밀린 빚이나 빌린 물건도 섣달그믐 전에 갚아야 하고, 되도록 돈도 꾸지 말며 혼인도 하지 않고 연장도 빌려주지 않는 것이라 했다. 꼭 이 말을 알고 있어서는 아니었는데, 어제 밭에 나가 그동안 팽개쳐 둔 일들을 정리정돈했던 것은 설 전에 미뤄둔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 때문이었다. 아마도 예부터 내려오는 풍습이 무의식화된 콤플렉스였을 게다.

아무튼 우리는 대한 지나 섣달그믐이 되면 설날 첫 닭이 울 때까지 밤을 새는 풍습이 있었다. 이를 일러 수세(守歲)라 했는데 한해를 잘 마무리 하고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이게 지금은 양력 그믐날 밤 12시를 꼽아 기다리며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 풍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요즘은 새해에 처음 뜨는 해를 보겠다며 동해 바닷가로 높은 산으로 극성스럽게 몰려드느라 아닌 새벽부터 교통체증이 벌어지는 꼴을 보면 볼썽사납기도 하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고픈 수세풍속의 한 변형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원래 섣달은 ‘남의달’이라 하여 한해를 조용히 보냈다. 지금처럼 망년회다 송년회다 해서 흥청망청 술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먼 데 나갔다가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섣달그믐이면 집 나갔던 빗자루도 집 찾아온다”, “숟가락 하나라도 남의 집에서 설을 보내면 서러워 운다”고 했다.

섣달을 내 것이 아니라 ‘남의 달’이라 하면서까지 조용히 보낼 것을 옛조상들이 가르쳤던 것은 왜일까? 내 생각에는 앞의 동지 글에서도 얘기했듯이 겨울은 여름처럼 생기있고 활기차게 보내는 철이 아니라 겨울잠 자듯이 기를 아끼고 저축하며 보내는 철이기 때문이리라. 뜨거운 여름은 모든 생명이 약동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철이다. 반면 겨울은 맹추위에다 먹을 것도 부족하여 활동하기 힘든 철이니 조용히 동안거 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철이다. 이를 거꾸로 하면서 살면 과연 생명이 제대로 건강할 수 있겠는가?

겨울을 겨울답게 보내야 내 몸에 좋지 않은 병균이나 기운들이 달아나고 내 몸은 더욱 단련되는 법이다. 그런데 겨울을 여름처럼 따뜻하게 보내면 잠시 편할지는 모르지만 내 몸에 또한 좋지 않는 병균이나 기운도 함께 편하게 남아있어 봄이나 여름이 되면 그 삿된 기운이 내 몸을 망가뜨릴 수 있다. 요즘은 다들 추운 겨울에 따뜻한 아파트에서 살다보니 한동안 춥다가 날씨가 풀리면 꼭 주변 지인들로부터 부모님 부고장이 날아들곤 한다. 바깥 기운과 소통하지 않고 살다보면 날씨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 생기는 일이지 않을까 심히 우려가 된다. 그래서 날씨가 추울 때면 연로하신 부모님께 전화해서 추울 때보다는 이러다 갑자기 날 풀리면 더 좋지 않으니 춥다고 창문 꼭꼭 잠그고 계시지 말고 아침마다 환풍을 시키라고 당부하곤 한다.

 

겨울에는 농사를 놓고 지내지만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종자 관리다. 바빠서 곡간 구석에 처박아 놓은 곡식 종자들을 한가한 틈을 타 다시 잘 정돈을 해야 한다. 탈곡한 곡식들은 뒤웅박이나 씨주머니에 담아두었는데 요즘은 양파망이나 마대자루도 좋다. 상추나 아욱 시금치 오이 호박 같은 적은 양의 채소 종자들은 옛날엔 닥종이에 싸서 보관했지만 요즘엔 편지 봉투에 해도 훌륭하다. 조, 수수, 기장, 옥수수, 고추 등은 이삭이나 열매 채 실로 적당히 꿰어 서늘하고 통풍이 잘되는 처마 밑에 매달아 두었다.

고구마는 한 겨울을 사람과 함께 났다. 고구마는 추위에 약해 사람이 자는 방 윗목에다 여물로 덮거나 왕겨에 ane어 망태나 항아리에 담아 두었다. 이렇게 해서 고구마는 영상 10도 이상에서 보관하도록 하는 반면 감자는 영상 5도 정도면 적당한데 땅 속에 움 파서 묻거나 곡간 한 구석에 얼지 않게만 잘 놔두면 된다. 따뜻하면 싹이 나서 종자로 쓰기에 못마땅해진다.

지난 12월 토종을 찾아 섬 구석구석에 할머니 할아버지 농가를 찾아다녔다. 희한한 것은 종자들을 꼭 한 곳에 보관해두지 않고 여기저기서 꺼내 나오시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종자의 특성에 맞게 적당한 장소에 보관하던 습성이 남아 한 곳에 두질 않고 적당히 이곳저곳에 두었던 것이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지금은 냉장고 없는 집이 없어 잘 갈무리해서 한꺼번에 모아 냉장고에 집어 넣어두면 제일 안전하다. 이 때 제일 관건은 종자를 최대한 잘 말려야 한다는 점이다. 습기가 남아있으면 냉장고에서도 상할 수가 있다. 특히 장기보관하기 위해 냉동고에 보관할 때는 습기가 있으면 얼어 죽을 우려가 있다. 냉장고에 보관할 때 또 주의할 점은 종자를 냉장고에서 꺼낼 때이다. 차가운 냉장고에서 별안간 꺼내 상온에 노출시켜놓으면 결로(結露)가 되어 습기가 찰 수가 있다. 밀폐용기에 담아 넣어두었다가 꺼내서는 밀폐용기 내 온도가 바깥 온도와 같아질 때까지 용기 뚜껑을 열어서는 안된다. 결로를 막기 위해서다. 꺼내서 바로 밭에 가져다 파종한다면 상관은 없다.

겨울은 농부도 움츠리고 종자도 잘 움츠려야 약동하는 봄에 제대로 spring처럼 튀어오를 수있을 것이다. 입춘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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