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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씨앗-작물

토종 수집조사 후기 18일째 - 단지무를 찾아서

by 石基 2009.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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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간밤에 비와 함께 눈이 내렸다. 제주에서 눈을 볼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이건 상서로운 조짐일 게다. 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강풍에 주의하라고, 더구나 산간으로 가는 사람들은 체인 없이는 미끄러져 책임질 수 없다고 엄포를 놓으니 시작부터 떨린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든든히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오늘은 조천읍을 돌아, 저 성산 쪽까지 달릴 예정이다.

 

바람이 많이 불고 간간이 바닷가에도 눈보라가 휘날려서 그런지 사람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거 어디로 가는지, 뭐 하러 가는지 의미도 찾지 못하고 눈보라에 휩쓸려 길 잃은 나그네 꼴이다. 신촌리라는 곳에 도착하여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다고 생각한 순간, 한 집에서 사람이 나오는 걸 보았다. 얼른 가서 사정을 말하는데, 아침 출근길이라 아줌마가 바쁘시다. 아이까지 데려다줘야 한다고 하며 난 모르겠으니 우리집 어머니와 이야기하라며 찬바람 부는 날 찬바람처럼 쌩 가버린다. 야속한 아줌마. 젊으면 저런 걸까? 난 저러지 말아야지. 아무튼 할머니께서도 잠시 마당에 뭘 하러 나오셨는데, 귀가 너무 많이 어두우시다. 아무리 크게 외쳐도 잘 못 알아들으신다. 더구나 예전에 귀가 어두워지셔서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본토박이 제주말이다. 허! 허! 웃음만 나온다. 한 나라에 살아도 이렇게 다르구나!

그래도 어찌어찌 손짓발짓 섞어가며 간신히 뜻은 통해 보리콩을 조금 얻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별 시원찮다. 벌레가 다 쪼사 놓은 것이 할머니가 문물에 밀려 찬밥 신세가 된 듯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씁쓸하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봉투에 잘 챙겼다.

 

다시 차에 올라 열심히 달렸다. 어째 여기는 감귤밭만 보이고 사람 사는 집은 보이질 않는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사전 조사가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물론 이렇게 뒤지다 남들이 찾지 못한 귀한 걸 발견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얼마 없는 상황에서는 사전 조사가 무엇보다 중요하겠다.

아무리 달려도 비바람만 거세고 사람은 없고, 선흘리 돗바령이란 곳에 잠시 차를 세웠다. 드넓은 밭에 누가 심었는지 모를 적팥과 수수가, 그나마 저절로 떨어져 자란 것이라 초라하게 몇 그루 남아 있다. 오전 내내 달려도 제대로 된 집을 찾지 못했으니 이거라도 소중하다. 일단 수집. 

다음으로 선흘리 1012번지 사시는 부옥례 할머니를 간신히 만나 육십일깨를 얻었는데,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물론 기록도 별로 없고, 사진도... 날씨도 궂고 그만큼 힘도 빠져서 그렇다.

 

여기저기 샅샅이 뒤지는 길에 잠시 동백이 우리의 눈길을 잡아끈다. 요즘 한창 동백을 수집하시고 자료를 모아 글을 쓰고 계신 안완식 박사님께서 오줌도 쌀 겸 몸도 풀고 내리자고 하신다. 그러고는 바로 동백 앞으로 달려가셔서 사진을 찍으시고 품평을 하시느라 바쁘시다. 박사님 눈에는 하나만이 아니라 몇 개가 동시에 보이나 보다. 길을 지나며 지나치는 식물 하나도 놓치지 않으신다. 이번 수집을 따라나서며 안완식 박사님의 모습에서 정말 많은 걸 배우고 느낀다.   

 

이런 동백만이 아니라 참 신기한 색의 동백이 많았다. 안완식 박사님 덕에 동백 구경은 눈알이 충혈되도록 잘했다. 

 

 

이럴 때는 잠깐 쉬는 것도 좋다. 때 늦은 점심을 해결하며 잠시 숨을 돌리고, 어제 일을 생각하며 중산간으로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물론 일기예보에서는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혹시 모른다. 괜찮을 수도 있으니 부딪쳐 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게 뭐람! 조천읍은 웬만하면 감귤밭이 전부이고, 중산간쯤 가면 목장뿐이다. 마을이라고 표시된 곳을 찾아도 이제 사람은 거의 살지 않는다. 제주시에 가까워서 그럴까? 다들 시에 모여 살면서 여기는 일만 하러 오나 보다. 보람은 없고 고생만 직싸라게 했다.

 

해발 400m쯤 오르자 바닷가에서는 비바람이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위로 오르고 오르면서 이거 이대로 올라도 될까? 내가 괜히 천국행으로 이끄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강화도에서 황청까지 다녀온 몸, 안완식 박사님을 믿으며 갈 수 있는 데까지 올랐다.

 

하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눈만 쌓여 있고 사람은 살지 않는다. 대신 목장이 드넓게 자리하고 있다. 결국 한 목장까지 올라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걸 끝까지 확인한 뒤 차를 돌렸다. 만약 확인하지 못했다면 언젠가 다시 가야 할 곳만 남기는 큰 숙제가 되어 머릿속에 맴돌았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는 끝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오길 잘했다. 암~ 목숨을 걸고 다녀오긴 했어도.

 

이대로 돌아봤다 아무 성과가 없겠다고 판단하신 안완식 박사님의 지령으로 단지무를 찾아나섰다. 단지무는 영평이란 곳에 있다고 하여 동부산업도로를 타고 영평동으로 향했다. 한창 도로 확장 공사에 여념이 없었는데, 눈이 내려 그런지 제주 사람들은 이 길로 잘 다니지 않았다. 멋모르는 외지인만 이런 곳으로 다니지 않을까? 

 

 

자 단지무다. 단지무를 찾으러 가는 게다. 영평 하동이란 곳에 안완식 박사님이 이전에 조사해서 찾은 분이 단지무를 심고 있다 한다. 전화통화를 몇 번 시도한 끝에 어떻게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데, 그분이 오늘 장날이라 자신은 집에 늦게 들어온다고 하신다. 이런... 하지만 오늘을 이렇게 끝낼 수 없어 대충 위치만 알려주면 물어물어 찾아보겠다고 했다. 돌아온 대답은 "어려울 텐데..." 하시며 알려주셨다. 대략 그 정보만 가지고 영평동에 뛰어들었다.

 

제주는 밭과 무덤이 함께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참, 그러고 보니 강화에서도 자주 보았다. 섬이라는 특징인가? 농토가 부족한데 무덤을 쓰려면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영평동에 도착하여 이곳저곳 뒤지다가...

 

 

한참을 뒤지고 뒤지다가 어떤 무밭을 발견했다. 혹시 이곳이? 인간 네비게이션이 되어 지도를 들고 길을 안내하지만 참 난감하다. 표지판도 없고, 그 길이 그 길 같고, 머릿속에 그린 것처럼 나타나지는 않고... 답답하지만 어찌어찌 이 무밭까지 왔으니 일단은 임무를 완수한 셈이다.

허나 이곳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이 산이 아니라신다.

 

꼼꼼히 단지무를 찾아 돌아보시는 안완식 박사님. 추운 날씨도 그 열정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단지무를 찾는 일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겠다. 날씨도 궂으니 오늘은 작전상 후퇴를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 내일을 위해 구좌읍 평미리 사무소로 가 제주도 동부의 농업 현황에 대해 사전 지식을 쌓기로 했다. 해안도로로 내려오니 바람만 심하지 길은 괜찮다. 바람을 가르며 씽씽 달려 구좌읍 평미리 사무소에 도착해, 제주 여성농민회 사무처장 문경숙 선생님을 만났다. 아래는 문경숙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

 

제주 동부에서는 밀감을 하다가 폐원하면서 이제는 거의 없다. 일조량이 부족한 환경 때문에 당도도 안 나오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신 당근이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하며 감자도 많이 한다. 당근은 한그루짓기로 끝인데, 동부 쪽으로 오면 대농이 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토종 종자가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주의 동쪽이 바람이 더 세다고 한다. 그래서 모래땅이 많다. 조천읍을 돌면서 느낀 것이지만 서부와 달리 사람도 별로 없고 땅도 척박하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바로 바람 때문이었나 보다. 문경숙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래서 서쪽에서는 동쪽으로 딸들 시집도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살기가 팍팍하다는 뜻. 그래서 산간에 가도 마을이나 사람이 없다. 어음리가 있던 서부의 중산간과 달리 동부의 산간은 황무지에 가깝다. 그렇다고 수심이 깊은 것도 아니여서 어항도 어판도 별로 형성되지 않았고, 성산이나 가야 겨우 있을 정도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산남과 산북은 일조량에 차이가 너무 크다. 일조량은 물론 바람과 토질, 고기잡이 등 동쪽은 확실히 살기 팍팍하다.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듣고 성산으로 가서 숙소를 잡고 저녁을 먹었다. 하루 종일 찬바람을 맞았더니 저녁을 먹으며 확 풀어진다. 오늘 묵은 숙소는 아주머니가 아직도 물질을 한단다. 흥미롭긴 하지만 그냥 오늘은 이불 덮고 푹 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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