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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씨앗-작물

토종 조사 후기 15일째 - 낯선 이국의 땅, 제주도

by 石基 2009.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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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국의 땅, 제주도 

 

 

2008년 12월 19일, 이틀의 휴식 뒤에 다시 제주도를 향하다. 8시 30분 공항으로 출발하여 9시 5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는 11시 30분이 이륙할 예정이다. 김포공항은 태어나서 세 번째 와 보았다. 비행기는 가까이에서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 어떻게 저런 쇳덩어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지 경이롭다.

 

간단하게 제주에 도착해 렌트카를 알아보았다. 비용은 어디나 정가제라 더 깎거나 할 수 없다. 유명한 관광지답다. 에누리가 없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가제가 더 편할 수도 있다. 최소한 바가지 썼다는 후회는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렌트카를 타고 먼저 대정읍으로 이동해 대정 여성농민회 분들을 만나기로 했다. 조사에 앞서 제주도의 사정을 미리 파악하고자 해서이다. 도로를 타고 달리는 데 기분이 이상하다. 늘 보던 풍경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곳에 왔다는 느낌 때문이다. 제주도는 참으로 다르다. 이 묘한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여성농민회에서 두 분이 나오셨다. 김정임, 원정순 선생님이 그분들이다. 늦은 점심을 먹으며 제주도의 농업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듣고, 어떻게 다니는 것이 좋을지 상의했다. 그분들의 말에 따르면, 제주도는 해안으로는 대부분 돈벌이를 위해 홑짓기를 한다고 한다. 토종은 아마 중산간에 아직 살고 계신 할머니들에게 있을 것이란다.

대정읍은 주로 감자와 마늘, 조생 양파가 많고, 안덕면은 감자, 서귀포시 중문에서는 지난 여름에 독새기콩을 찾았다고 한다. 남원읍과 효선면, 성산읍은 밀감 과수원이 많고, 구좌읍은 당근과 만생 양파, 조천읍은 감자와 마늘이 많다. 제주시와 애월읍, 한림읍은 양파와 양배추, 마지막으로 한경면. 이러한 식으로 다니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계획은 이렇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다음으로 그럼 어느 지역의 어느 곳을 볼지 대충 정했다.

한경면 - 청수, 저지, 낙천, 산양, 조수

한림읍 - 상명, 명월, 상대, 동명

애월읍 - 낙읍, 상가, 어음, 장전, 고성

조천읍 - 와음, 선흘

성산읍 - 수산, 난산

효선면 - 가시, 성읍

남원읍 - 수망, 의귀, 한남

구좌읍 - 덕천 송당

 

이렇게 전체적인 계획을 짜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서귀포시 대정읍 무릉리로 향했다.

 

김정임 선생님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무릉2리 좌기동이라는 곳이다. 햇살이 따땃하니 참 좋다. 겨울에도 이렇게 춥지 않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래도 바닷가니 추울 거라 생각하며 내복까지 껴 입었는데 오늘 일정이 끝나면 당장 벗어야겠다.

 

 

좌기동에서 본 제주도의 전통 대문. 빗장을 다 열어 놓으면 집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말로만 듣던 대문을 보고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이런 대문도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의 말도 점차 사라지고 있듯이 문화도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이곳에 사시는 박성은(70) 할머니를 가장 먼저 만났다. 이제 몸이 불편해서 농사고 물질이고 암것도 못하고 집에 드러누워 있으시단다. 그래도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만난 분이라 따로 적어 놓았다. 부추를 '세우리', 앵두를 '은냉', 메밀을 '모물', 서로는 '삼촌'이라고 부른다.

 

 

박성은 할머니. 지금은 지팡이에 의존하며 다니시지만, 젊은 시절에는 누구 못지않는 한 집의 기둥이셨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 동네에 있는 정미소를 찾았다. 이 정미소는 서귀포 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를 자부하며 벽에는 현판까지 내걸어 놓았다. 산남이라고 하는 말이 서귀포 지역을 뜻하고, 제남은 제주도 남쪽을 가리킨다고 한다. 정미소를 운영한 지는 50년 이상 되었는데, 이 근방의 다른 정미소는 대부분 그 맥이 끊어졌다고 한다.

 

인근에서 온갖 종류의 곡식류가 모이는 곳. 덕분에 헤매지 않고 다양한 곡식을 보고 수집할 수 있었다.

 

 

정미소는 좌기동 1156-3번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인 할아버지는 마침 외출중이셔서 김기선(75) 할머니를 만났다. 

 

정미소 안의 김기선 할머니. 아직도 건강하시다. 정미소 곳곳에 쌓여 있는 곡식 먼지와 그 특유의 눅은내가 이곳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이곳에서는 모두 여섯 가지를 수집했다. 덕수에서 사왔다는 메밀, 영락리에서 온 차지고 맛있다는 검은흐린조(검은 개발시리), 이것을 옛날에는 육지조라고 불렀다고 한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는데, 낭댕이(줄기)가 벌겋고 끝에 가닥이 세 개란다. 이 의문은 이후의 조사 과정에서 확실하게 풀린다.

다음은 주냉이(지네) 보리(두줄보리, 호주맥), 이건 낭댕이가 빨갛고 이삭이 길딱한데, 수확이 적다. 키가 커서 박한 데 심는다고 한다. 보성, 서광, 신평에서 사온다고 한다. 또 신도에서 사온 굵은 메주콩, 조수에서 사온 된장 담그는 푸린독새기콩과 원래 제주도 것인 노란 개발시리조를 구했다. 이 노란 개발시리조는 키가 크고 가닥이 세 개가 아니라고 한다. 낭댕이도 노랗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 마구 튀어나온다. 들리는 대로 받아서 적기는 적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다. 김정임 선생님이 옆에서 열심히 통역(?)을 해주신 덕분에 그래도 어느 정도 알아들었지, 내일부터는 우리만 다녀야 하는데 걱정이다. 제주말은 외국어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정미소 안에 걸린 칠판. 거래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연락처가 빼곡히 적혀 있다. 주인만이 알아볼 수 있는 개성 있는 칠판.

 

푸린독새기콩. 달걀처럼 생긴 푸른 콩이란 뜻이다. 제주도에서는 이걸로 메주를 쑤어 된장을 담가 먹는다고 한다. 그렇게 맛있나? 아니면 다른 콩이 없어서?

 

이건 굵은 메주콩이다. 하지만 육지의 그것에 비하면 그리 굵은 편은 아니다.

 

 

이제 수고하신 김정임 선생님과 헤어져 우리끼리만 제주도를 돌아다닐 시간이 되었다. 바쁜 농사일로 함께하지 못하는 걸 미안해 하시는 걸 보내드리고 차에 올랐다. 멀리 가지는 않고 일단 좌기동 일대를 다 돌아볼 참이다.

한참을 다녀도 사람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도 사람 만나기가 귀한 일이로구나. 그도 그럴 것이 제주도는 아직 날이 따뜻해서 날만 좋으면 지금도 밭으로 일을 나가거나 남의 밭에 놉으로 나간다니 더 그렇다. 따뜻한 것도 이럴 때는 좋지 않구나.

 

한참을 다니다가 어느 집의 마당에서 만난 고구마 절간. 다카하시 노보루의 기록에도 제주도와 관련하여 이 고구마 절간이 많이 나온다.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나중에 꼭 확인해 봐야지. 처음 기록에서 이걸 보고 고구마 잘라 말린 것이라 번역을 했는데, 더 적당한 말이 있을 것이다. 

 

 

겨우 한 집에 들어가 할머니를 만났다. 좌기동 변정자(67) 할머니 댁에 들어가 토종을 찾는다고 설명을 드리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이제 그런 건 없다고 하신다. 마당 한쪽에 놓여 있던 호박만 하나 얻어서 나왔다. 할머니 얘기를 들으니 예전에는 밀감 한 그루면 자식을 대학까지 보냈다고 한다. 참 귀한 과일이었는데 이제는 겨울이면 지천에 널린 것이 밀감이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변정자 할머니 댁에서 얻은 호박. 제주도의 호박은 대체로 납짝하고 골이 깊은 것이 특징이었다.

 

 

어느덧 시간은 5시를 훌쩍 넘었다. 5시를 넘으면서부터는 날이 많이 쌀쌀해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남쪽이라고 해도 해가 넘어가면 추워지는 건 어쩔 수 없구나. 오늘은 제주도의 이색적인 풍광에 얼떨떨하다. 현대를 사는 내가 이 정도인데, 교통이 불편한 시절에 살던 사람들은 오죽했으랴. 제주도가 인기 있는 신혼여행지였던 까닭을 알겠다. 요즘은 다들 외국으로 나가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참 신기했을 거다.

 

이렇게 하루를 끝마치나 했는데 좌기동 임춘후(69) 할머니 댁에서 많은 걸 얻었다. 검은 덩굴콩, 검은 돔비(동부), 준저리콩, 제비콩, 까만콩, 기침에 좋고 씨를 갈아 막걸리에 타 먹으면 관절에도 좋다는 하늘타리, 결명자, 유채를 얻었다. 날도 춥고 낯선 풍광과 말씨와 사람에 얼이 빠져 있어 제대로 기록을 하지 못했다. 물론 날이 어두워져 사진도 제대로 된 것이 하나 없다. 아쉬울 뿐이다. 내일은 좀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제주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5시 40분 조사를 마치고 숙소를 잡고 저녁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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