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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に残る農学者

「朝鮮半島の農法と農民」
「朝鮮半島の農法と農民」
は八女市立図書館にあります
지난해 끝무렵에 야메시八女市 출신의 농학자(고인)을 주인공으로한 기록문학이 출판되었다. 카와다 히로시河田宏가 지은 "조선의 온 땅을 걸었던 일본인朝鮮全土を歩いた日本人・농학자 다카하시 노보루의 생애農学者 高橋昇の生涯"(이하 "다사하시 노보루의 생애")로서, 기록문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西日本新聞1월 20일자). 이 책의 내용은 식민지 시대에 조선에서 농업 개발에 생애를 바쳐 역사적인 대저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朝鮮半島の農法と農民"을 지은 농학자 다카하시 노보루 선생님의 평전입니다.

먼저 선생님의 약력을 간단히 적음.
1892년(明治 25) 12월, 야메군八女郡 上妻村 津江(현 야메시八女市)에서 아버지父 가케하시 이와지로梯岩次郎의 둘째아들로 태어남. 上妻 소학교, 明善 중학교, 第七 고등학교(가고시마鹿児島), 東京帝大 농학부農学部 졸업(이 사이에 구로키마치黒木町의 다카하시高橋 집안의 양가가 됨). 1919년(大正 8)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경기도 수원)에 기수技手로서 부임, 1926년부터 1928년에 걸쳐 미국, 독일에 유학, 귀국한 뒤 총독부 농사시험장 서선지장장(황해도 사리원) 1934년(昭和 9) 농학박사에, 1944년(昭和 19) 수원 본장 총무부장, 1945년(昭和 20) 패전, 한국 쪽의 간청을 받아 후진 지도를 위해 머물다 이듬해 5월에 귀국, 같은 해 7월 20일 후쿠시마마치福島町 혼마치本町의 친척 집에서 급사, 55세.
선생님이 조선에 머물 때 사진이 여러 장 남아 있습니다. 땅딸막한 체격에 ギョロ 눈、턱수염을 기른 위엄 안에도 어딘지 온정이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천성은 조선시대의 부하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선생님은 스스로가 계획한 것은 철저히 이루려는 굴하지 않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대저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하 "농법과 농민")은 야메시립도서관에 있었습니다. B5쇄, 크기는 가로 27.5cm, 너비 20.5cm, 두께 7cm, 1292쪽으로 무게는 3kg, 출판사 미래사未来社, 가격 10만 엔의 두꺼운 책입니다. 저는 농학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 책의 학술 가치를 도쿄대 명예교수 이이누마 지로飯沼二郎 씨의 같은 책 '서문序文' 과 신문기사에서 찾아 발췌합니다.
"식민지란 상황의 조선에서는 일본의 뛰어난 농업기술을 위에서 농민에게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 시험장의 기사技師 다카하시 노보루는 총독부의 지시와 다르게, 조선 농민이 예부터 해왔던 농법에 기반하여, 농업 지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시험장에서 일하던 26년 동안 짬을 내 조선인 농가를 한 집 한 집 찾아가서 농업 조사를 했다. 그 발자국은 조선의 온 땅에 나고, 그 조사 자료는 방대한 양이 되었다. 

(원고지로 약 1,3000장, 사진 1500장, 지도류 260장 등) 패전하고 그 자료는 다카하시와 그 부하들이 고향인 야메시八女市에 가지고 돌아왔지만, 다카하시는 갑자기 죽는다. 그로부터 50년,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高橋甲四郎(야메시 津江)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출판된 것이 ?�농법과 농민?�이다. 그 논고는 지금에서는 매우 얻기 힘든 자료이고, 지금부터 이후의 한국 및 조선 농업의 진정한 근대화의 기초를 뚜렷하게 할 것이다”라고 영구적인 이 책의 가치를 적고 있다. 이 책은 당시 한국의 대통령 김대중 씨와 북조선 국방위원장 김정일 씨에게 기증했고, 뒷날 두 나라에서 정중한 사례 편지가 도착했다.



‘삶의 방식’에 감명 「生き方」に感銘

 

다카하시 노보루 선생님의 서선지장장西鮮支場長 시대의 ‘삶의 방식’에 저는 감동했습니다.

?�다카하시 노보루의 생애?�에 따르면, 선생님이 서선지장장이 되었던 소화昭和 전기 무렵의 농사시험장 안에 젊은 기수들은 날마다 실험실 안의 일과 장의 시험試験에만 매달리고, 조선인 농가의 실태 조사 등은 “진흙 냄새가 나는 과학적이지 않은 일”이라고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카하시 선생님은 “조선의 농민들은 몇 백 년에 걸쳐서 고유한 환경 안에서 공부에 공부를 거듭하여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농법을 이룩해 왔습니다. 먼저 조선인 농가에 뛰어들어 그들에게서 농법을 겸허하게 배우는 것이 일의 첫 걸음입니다”라고 농학자로서 처음으로 현장 활동을 중시한 지도를 하도록 하고, 선생님 스스로도 실천했다. 선생님의 행동의 바탕에는,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조선인을 멸시하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이 “일본인과 조선인은 대등하다”라는 강한 인도주의가 깔려 있었다. ?�다카하시 노보루의 생애?�에는 여러 군데에 서선지장西鮮支場 시대 부하들의 추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췌합니다.

“다카하시 지장장은 실험이든지 기획이든지가 생각나면, 낮이든 밤이든 갑자기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밤새 논의한다. 배가 고프면 감자에 버터를 발라 먹으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다카하시 선생님은 생활 속에서 부하들에게 ‘업무’란 어떠한 일인가, ‘먹고 자는 걸 잊을 정도로 몰입하는 업무가 멋있다’ 등을 가르쳤습니다.

같은 지장 출신의 부하들은 일본의 패전 후에 농림성으로 돌아와 중견간부로, 또 같은 지장에 있던 조선인 기사들은技師 독립한 한국에서 농정 관료의 중추를 점하는 인재가 되었습니다.


추기 “농법과 농민”이 간행되기까지 50년을 지나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 씨의 효심과 노력에 머리를 숙입니다. 자세히는 이 분의 저서 ?�아버지의 유고父の遺稿?�(海鳥社)에 나옵니다.

일본日本 민예협단民芸協団 야메시지부八女支部  고문顧問/ 마츠다 쿠니히코松田久彦



2008年 9月 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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