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김서방 광주에 가다


1939년 2월 26일, 증기를 내뿜는 기차에서 한 일본인 사내가 내린다. 그의 이름은 다카하시 노보루. 그는 전라도 실태 조사를 위하여 막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에 왔다. 그가 도착할 때의 날씨는 저마다 상상에 맡기겠다.

2007년 6월 5일, 그의 뒤를 따라 한 사내가 광주역에 내린다. 머리가 벗겨질 정도로 따가운 햇살이 비추는 날씨. 눈이 부셔 하늘을 쳐다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드디어 그를 따라 첫 걸음을 내딛었다. 본디 광주에 앞서 순천에 들러야 하지만, 굳이 똑같이 다닐 필요는 무엇이던가. 첫 단추부터 다른 구멍에 끼우지만 그것도 색다른 맛. 순천과 벌교는 다음으로 기약하고 오늘은 광주에 왔다.

광주로 도착하니 10년 전 처음 광주에 왔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는 버스 타고 단체로 다녔지만 오늘은 고속열차로 왔다. 이제 광주는 서울에서 고속열차만 타면 3시간이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이 되었다. 우리는 과학기술이 인간을 편리하게 만든다고 떠들지만, 사실 그것만큼 피곤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교통만 놓고 보아도 몇 시간 안에 국토의 끝에서 끝까지 다닐 지경이 되니 괜히 가지 않아도 되는 곳까지 쫓아다니느라 예전보다 더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것이 뭐 이거 하나이랴! 전깃불 때문에 싫어도 밤늦도록 일하고,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이러고 있으니. 그래도 나쁜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도 있으니 또 까먹고 그냥 사는 것이지. 10년의 세월은 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풍경만이 아니라 나 자신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세월이 바꾸어 놓은 것인지 내가 바꾼 것인지 모르지만.

아침 9시 지나 열차를 타니 12시 무렵 광주역에 도착한다. 광주역에 오기 바로 전에 아주 뜻 깊은 간이역을 지났다. 바로 ‘극락강역’이다.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이 역을 아마 그도 지났을지 모른다. 아니나 다를 것이 기차를 타고 광주에 들어오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곳이니, 틀림없이 그도 그때 이곳을 지났을 것이다. 이런 것에서 나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돌멩이 하나, 흙 한 알갱이에 서려 있는 옛사람들과 앞으로 올 사람들의 숨결을 상상한다.



사진 1. 기차 안에서 찍은 극락강역. 그날도 이 자리에서 그의 눈동자에 들어갔겠지.

사전 조사에 따르면 광주는 일제시대에 들어오면서 성장한 도시라고 한다. 그전에는 나주가 광주보다 훨씬 커서 관청들도 다 나주에 있었고, 광주도 나주에 속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본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살면서 점점 광주가 더 큰 도시가 되고, 나중에는 행정구역도 광주를 중심으로 개편하고 관청도 싹 옮겨왔다. 그 결과 지금 광주는 광역시이고 나주는 그냥 시이니, 시대에 따라 도시도 흥망성쇠를 달리 한다. 그게 어디 한둘이야, 사람도 그렇고, 작물도 그렇고, 뭐든 때에 따라 변하지. 나 잘났다고 떠들어야 그때뿐이다.


그건 그렇고 그는 광주군에 내려서 거기에서 좀 떨어진 극락면極樂面 화정리花亭里에 사는 정길채鄭吉采 씨를 방문한다. 집에서 화정리가 어디인지 알아보려고 인터넷에서 찾으니 전국에 있는 화정리가 수도 없이 뜬다. 광주, 극락, 화정이란 세 단어로 범위를 좁혀 다시 검색,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나 광주시 서구 화정동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화자! ‘여기구나’라는 느낌이 팍 온다. 그럼 거기까지는 어떻게 갈 수 있는지 또 열심히 인터넷을 뒤진다. ‘어라, 광주에도 지하철이 있잖아.’ 새로운 사실에 깜짝 놀란다. 더군다나 지하철을 타면 내가 가려는 화정동의 화정역에서 내리면 됐다.



사진 2. 광주의 지하철. 통로가 좁고, 전체적으로 작으며 4량밖에 안 된다.

광주역에서 물어물어 양동시장을 향해 걸었다. 지방 도시는 이런 것이 참 좋다. 어느 정도 걸으면 끝에서 끝까지 다 갈 수 있다. 양동시장역에서 지하철에 몸을 싣고 화정역으로 향한다. 싱겁게 세 정거장 만에 다 왔다. 이건 또 무슨 행운인지! 역에서는 무료로 자전거를 빌려주고 있었다. 신분증과 전화번호만 확인하고 바로 자전거를 빌렸다. 자전거를 엘리베이터에 싣고 오르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관심을 보이신다. 그 짧은 순간 이러저러한 일로 왔다고 하니 나를 붙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신다.



사진 3. 자전거 무료 대여. 덕분에 화정동을 샅샅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광주도 여느 도시처럼 주변의 논밭을 흡수하며 도시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한 25~30년 전만 해도 이곳이 다 논밭이었다고 하신다. 인구가 급증하면서 도시는 엄청나게 덩치가 커졌다. 수도권은 이제 기형일 정도로 너무 커서 온갖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줄여도 모자랄 판에 천안이며 양평에다 전철까지 놓았으니 당분간 수도권의 군살이 빠지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아무튼 나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여기가 옛날에 극락면 화정리가 맞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렇지, 여기가 광산군 극락면 화정리였지”라고 하신다. 제대로 찾아왔다.



사진 4. 2007년 화정동 사거리. 여기서 할아버지께 옛이야기를 들었다. 왼쪽 할인매장 간판 위로 화정1동사무소 표지판이 보인다.



사진 5. 1966년에 찍은 화정동 일대의 모습. 지금과는 딴판으로 지천이 죄다 논밭이다.



사진 6. 논밭을 밀어내고 자리 잡은 아파트 모델하우스. 도시가 커 갈수록 논밭은 밀려난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가 있는 시흥동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곳은 옛날에 시흥군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서울이 커지면서 편입되어 지금은 금천구 시흥동이 되었다. “걸어 다니는 영상실록”이신 정용수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옛날에는 시흥군청이 영등포에 있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영등포도 시흥군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아마 여기 광주의 화정동도 그런 과정을 겪으며 광주시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다시 그가 지난 길을 더듬어 가자. 그는 이곳 화정리에서 정길채(34살)라는 분을 만났다. 그 분의 식구는 아내(35)와 맏아들(11), 둘째아들(8), 셋째아들(2), 이렇게 다섯이다. 거기에 머슴(25)까지 있었다. 1939년에서 이미 6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정길채라는 분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 아들들은 여기 어디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남의 뒷조사를 할 수는 없고, 경찰에 줄을 놔서 알아보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식구들 가운데 농사짓는 사람은 몇이냐 되냐는 물음에 자기와 아내, 머슴이라고 답했다. 머슴을 둘 정도였으니, 꽤 사는 집이 아니었을까? 다음에도 나오겠지만 그가 조사한 사람은 이렇듯 대부분 어느 정도 사는 사람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공무원이 조사하러 나온다고 하면 나라도 웬만큼 사는 사람을 소개하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복지사가 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진 7. 극락면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흐르고 있는 극락강에서 따왔다. 극락강역도 마찬가지이다.

정길채 씨가 가진 농사땅은 논밭을 합쳐 모두 3530평이라고 한다. 요즘 평이라는 단위를 공식적으로 쓰면 불법이라고 하는데, 이 글에서 쓴다고 벌금을 내라고 하지는 않겠지. 그 농사땅 3530평에는 논이 한 군데, 밭이 세 군데 들어 있다.

그는 먼저 논농사에 대해서 조사했다. 논의 이름은 정장평チョンヂャンピョン이라고 하는 집 앞의 이른바 문전옥답이다. 여기서도 드러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이 점이 어려웠다. 그때 사람들이 부르던 땅이름이나 농기구 이름 등을 지금 우리가 쓰는 말로 푸는 일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쓰던 말 ―사투리를 포함― 을 그대로 얘기했는데, 일본사람이 받아 적은 것인 만큼 아무래도 정확하지 않다. 다행히 한글로 표기한 것도 있어 그걸로 이리저리 비교하며 짜 맞추기는 했지만, 그러한 시대와 언어의 간극에서 오는 차이가 너무 크다. 앞으로도 이런 것이 자주 나오는데, 이보다 더 알맞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받아들이려 한다.

정장평은 1580평의 넓이로 모두 3배미이다. 배미는 한자로 표기하면 야미夜味인데, 국어사전을 찾으면 “그 뜻과는 상관없이 새김과 음을 따서 적은 것”이라고 나온다. 한 마디로 그냥 우리말로 야미라 부르던 것을 한자식으로 행정구역을 정하면서 만든 말이다. 가까운 예로 우리 동네에서 고개 하나 넘어가면 있는 대야미大夜味가 있다. 그곳은 수리산 밑자락에 넓은 들이 있는 곳인데, 그래서 널배미라고 부르던 걸 한자식으로 표기하면서 대야미라고 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요즘 외왕義旺이라는 지명도 일본이 고쳤다고 하며 다시 의왕義王으로 바로잡았는데, 대야미도 널배미라고 고치면 안 될까? 그럼 그 지역 사람들이 반대할지도 모르겠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지나는 평촌平村은 본디 벌말이었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촌스러운 이름에 집값이 떨어진다며 평촌으로 바꿨다고 한다. 나는 벌말이 더 좋은데 참 이상하다. 뭐 그렇게 따지면 고칠 곳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국민학교가 금세 초등학교로 바뀐 것을 보면서 희망을 갖는다.



사진 8. 대야미역. 한자를 보시라.

정장평은 20년 전부터 자작自作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자작은 자기가 땅주인이라는 말로서, 소작小作에 반대말이다. 보통 200평을 한 마지기로 보는데, 이 사람은 자기 땅 1580평이 7마지기라고 한다. 이를 보아 이 동네는 225평 정도가 한 마지기였나 보다. 이만한 논을 가졌으니 자기 먹을거리도 해결하고 머슴도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논에서 얻는 수확량은 최저 17섬, 최고 22섬이었다고 한다. 그럼 계산하면 한 마지기에 대략 3섬 정도 수확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금은 한 마지기에 보통 나락으로 7~8가마니를 거둔다고 하니, 이와 비교하면 수확량이 적다고 할 수 있다. 산업화 이후의 엄청난 생산력 폭발은 농민들이 모여 살던 농촌 마을을 해체하고, 농민을 도시로 밀어 올려 공장에 다니게 만들었다. 반대로 생산력이 떨어지면 거꾸로 된 상황이 발생할까?

그의 조사를 보면, 예전에 이 논에서 농사를 지을 때는 두엄만 썼다고 한다. 그러다가 7~8년 전인 그러니까 1931년 무렵부터 화학비료를 쓰기 시작하여, 지난해에는 암모니아를 5가마니 쓰고, 그걸로 모자라 따로 두엄도 70지게를 져다 줬다. 하지만 두엄만 쓰던 때에도 19섬을 거두었고 지금도 보통 나락 20섬을 수확한다고 하니, 천재지변만 없으면 화학비료나 두엄이나 좀 더 힘들 뿐 수확량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 아마 화학비료를 대량으로 쓰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화학비료를 주기에 두엄 만드는 수고는 덜었을 것이다. 그래도 자꾸 그렇게 화학비료에 의존하다 보면 경제적으로도 예속되어, 나중에는 땅마저 잃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농사를 지어 수확하고 나면 볏짚은 80지게가 나온다. 한 지게에는 10단을 질 수 있다고 하니 모두 800단의 볏짚이다.

이 논에는 5년 전부터 은방주를 심었다고 한다. 은방주는 익산군 오산면에 있던 불이흥업농장에서 1922년 토야마현富山縣에서 원종을 가져와 기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이 품종은 까락이 없고 중간 크기여서 쓰러짐이 적고, 병에 강하며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고 한다. 그전에는 왜종倭種을 심었다고 하는데, 이 품종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지난해 화순에 취재를 갔을 때였다. 동광원에 계신 한 장로님께서 옛날에는 은방조를 라는 벼를 많이 심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디에서 왔건 우리네 역사와 함께 살았으니 이 벼도 이제는 토종이지 않을까? 순수, 단일, 혈통 이런 걸 따지는 게 좀 우습지 않은가.



사진 9. 은방주. 까락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논에서 자라고 있는 사진은 찾지 못했다.

화학비료와 벼 품종이 바뀐 것 말고도 또 다른 변화가 있다. 5~6년 전부터 이 논에서 쌀보리를 그루갈이한다는 말이다. 계속 짓는 건 아니라 한 해씩 거른다고 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루갈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똑같은 땅에서 한 해에 두 번 농사짓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그루뜨기, 근경根耕, 근종根種이라고도 한다.
그루갈이로 짓는 쌀보리의 수확량은 한 마지기에 한 섬 정도라고 한다. 이 논은 7마지기이니, 모두 7섬을 수확한다. 보릿짚은 쌀보리 한 섬에서 4지게가 나온다고 하니, 모두 28지게. 볏단과 비슷한 크기라고 하면 모두 280단이다.

잠깐 쌀보리에 대해서 알아보자. 보리는 껍질을 쉽게 벗길 수 있냐 아니냐에 따라 겉보리와 쌀보리로 구분한다. 보리의 꽃은 속껍질과 겉껍질에 싸여 있으며, 꽃이 수정되면 씨방이 자라 씨알이 된다. 이 씨방이 자랄 때 씨방벽에서 점착 물질을 분비해 속껍질과 겉껍질을 씨알에 딱 달라붙게 하는 특성을 가진 보리가 겉보리이고, 점착 물질을 분비하지 않아서 씨알이 익어도 속껍질과 겉껍질이 잘 떨어지는 특성을 가진 보리가 쌀보리이다. 1ℓ의 무게를 비교하면 겉보리 600~700g, 쌀보리 800g쯤 된다.
쌀보리는 일반적으로 겉보리보다 추위에 약해서 대전 이남의 남부 지방에서 기른다. 호남 지역에서는 논에 그루갈이로 기르면 빨리 익기에 쌀보리만 기르는데, 영남 지방에서는 쌀보리보다 겉보리를 많이 기른다. 여기는 광주이니 이러한 까닭으로 쌀보리를 심기 시작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때는 세계대공황과 만주사변 이후이니 일제는 식량을 많이 생산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때이다. 이 사람이 두엄만 쓰다가 화학비료를 쓰기 시작한 것도, 품종을 바꾼 것도, 쌀보리를 심기 시작한 것도 다 그러한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사진 10. 겉보리사진(좌)  사진11. 쌀보리(우)

쌀보리에 밑거름은 배합비료 8호를 한 마지기에 한 가마니씩 모두 7가마니를 주고, 또 두엄 10지게를 준다. 웃거름으로는 오줌 대신 암모니아 한 가마니를 한말닷되지기(250평)에 20장군의 물에 녹여서 7~8년 전부터 준다고 한다.



사진 12. 나무로 만든 장군. 물이나 오줌 등을 밭에 낼 때 쓴다.

또 4년 전까지는 2~3년 동안 논에 자운영을 길렀다고 한다. 한 마지기에 40지게 정도 수확해서, 거름으로 논에 흩뿌렸다고 한다. 경지 정리가 된 논이면 그대로 갈아엎었을 텐데, 3배미로 나뉘어 있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씨를 뿌리는 양을 비교하면 쌀보리는 한 마지기에 6되를, 자운영은 한 마지기에 3되를 뿌린다고 한다.



사진 13. 자운영. 일제시대에 식량 증산을 위해 이를 풋거름작물로 보급하려고 애썼다.


광주 야그 안 끝났응께 쪼개 지둘리시요잉. 소피가 급해서 치깐 댕겨 올랑께.

* 여기 올린 사진은 광주시청, 국립농업유전자원센터, 농업박물관, 기타 여러 개인 블로그와 제가 찍은 사진들입니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