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력農事曆은 어느 한 지역의 실질적인 농사현실을 파악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팝나무 꽃이 필 때 벼를 심는다.' 라는 식으로 계절의 흐름에 따라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각종 농자재가 발달하여 계절의 변화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논과 밭에서 벼농사와 잡곡농사를 진행하는 것은 계절의 제약을 받습니다. 계절의 변화라는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면서 그에 맞는 각각의 농작업을 수행해야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이때 그 기준으로 채택되는 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 안철환 선생님에게 배운 24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4절기는 태양이 1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주기에 기초하여 그것을 24개의 구간으로 나눈 것인데, 보통 한 달에 2개씩의 절기가 지정되어 있습니다. 24절기는 계절의 변화를 보다 일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절기의 변화와 순서에 따라 농사일을 진행하는 것은 농작업을 제때에 실행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즉 농작업의 적기를 염두에 둘 경우 24절기를 파악하여 이를 토대로 매년 어느 절기에 어떠한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옛 사람들도 이미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았을 경우 1년의 계절변화를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결국 태양의 움직임에 기초한 24절기이기에 농업기술의 정리 작업 산물인 농사력에서도 24절기가 중요한 기준으로 채용됩니다.
17세기 초반 고상안은 '농가월령'에서 24절기에 따라 각 절기에 수행해야 할 주요한 농작업을 정리하면서 각 절기에 맞는 농작업을 시기를 어기지 말고 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상안은 이러한 입장을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벼슬을 그만두어 한산한 지 여러 해가 지나 자못 민사(民事)에 늦출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어 겨를을 내어 손으로 농가월령을 지었는데, 십이삭(十二朔)으로 이십사기(二十四氣)를 참고하였다. 무릇 농가의 마땅히 힘쓸 바를 달마다 절기마다 때를 놓치지 않게 하고, 오곡의 파종에서 조습(燥混)의 마땅함을 잃지 않게 하였다." 농가월령의 서문을 살피면 그때 당시에는 달의 움직임을 통해서 1년의 주기를 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달이 찼다가 이울어지는 것을 한 달(29.53059일)로 하여, 그것이 열두 번(十二朔)이 되는 때가 바로 1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태음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음력만을 사용하게 되면 어느 때는 설이 봄이었다가 어느 때는 설이 겨울이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달의 1년 주기가 약 354일 반면 태양의 1년 주기는 365.2422일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수렵채집이나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문제가 없겠지만, 한 곳에 정착하여 제 때에 농사를 지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큰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슬람교는 지금도 순수 태음력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슬람 최대 행사인 라마단 같은 경우 계절이 일정하지 않다고 하지요.
이러한 태음력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윤달을 사용하게 됩니다. 윤달을 두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19태양년에 7개월의 윤달을 두는 방법을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19태양년은 235태음월과 같은 일수가 되는 원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즉 19태양년은 365.2422일(태양 1년 주기)×19 = 6939.6018일이고, 235삭망월은 29.53059일(달 1년 주기)×235 = 6939.6887일이 되어 차이가 2.09시간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6939일을 동양에서는 장(章)이라고 하는데 이는 BC 600년경인 중국의 춘추시대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순수 태음력을 썼을 때 생기는 계절과 월이 맞지 않는 단점이 해결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태음력의 단점을 보완한 달력을 바로 태음태양력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흔히 음력이라고 하는 것은 이 태음태양력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달력을 계산하여 정하고 반포하는 일은 국가의 중대사였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달력을 사거나 선물을 받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지요. 날짜를 더하는 규정만 알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태음태양력에서 절기를 정하는 일 같은 경우에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평기법과 정기법이라는 것인데, 예로부터 우리가 사용한 방법은 평기법이라 합니다. 이 방법은 동지를 기점으로 24절기를 균등하게 나눈 15.218일 간격으로 각각의 절기를 배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지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일이 무척 중요합니다. 동지를 잘못 계산하기라도 하면 한 해 농사를 망칠 수도 있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절기의 기준점이 되는 동지는 국가에서 지정한 관상감에서 엄밀한 계산과 관측에 의해서 정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니 그 시절에 민간에서 달력을 만드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농사에서 24절기가 강조된 것은 어떠한 농작업을 어느 시기에 수행해야 적절한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실제의 계절의 변화여야 했지요. 24절기야말로 태양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계절의 변화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는 시간 구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절기만을 철썩 같이 믿어서는 농사를 잘 지을 수 없습니다. 24절기가 계절의 흐름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날씨에는 변수가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올 해처럼 다른 해보다 봄이 추울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24절기만을 염두에 두고 농사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는 일이 또한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서 18세기 말 정조에게 응지농서를 올린 응지인 가운데 높은 평가를 받았던 최세택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민사는 늦출 수 없다. … 중략 … 신이 생각하기에 춘분 전에 소로 갈고, 입하 전에 종선(種線)하며, 한로 전 60일에 木麥(보리, 밀)을 심는 것이 비록 농후(農候)에 따른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나 앞서 기해(己亥)년에 겨울이 따뜻하기가 봄과 같아서 얼었다가 풀리는 것이 없었다. 경칩이 아직 되지 않았는데 소로 갈기를 이미 마쳤다. 그리고 보리가 과연 잘 되었다. 그런즉 봄에 가는 것을 마땅히 얼음이 풀리는 시기로 삼아야지 춘분에 구애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최세택은 24절기가 미처 예상하지 못하는 계절 변화의 불규칙성까지 감안하는 세밀한 농작업의 실행을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불규칙성을 예지하는 일은 어찌 보면 달력을 따져 만드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에 대해서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天文의 변화나 지금은 사주팔자로만 쓰이는 갑자력에서 그 해답을 엿볼 수는 있지 않을까 추측만 하는 정도입니다.
백 개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데 한 개의 문이 있다면 그에 맞는 열쇠를 찾을 때까지 하나부터 백까지 넣어보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예전 농사력을 살피며 현재의 농사력을 새로 작성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전라도 옥과, 경상도 상주, 예안 지역의 조선시대에 작성된 농사력을 살펴보겠습니다.
'농담 > 농-생태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지로 보는 기축년 (0) | 2009.01.06 |
---|---|
간지력과 농사 기획안 (0) | 2008.09.13 |
농사(農事)와 간지(干支) (0) | 2008.09.13 |
고농서에 나오는 기상과 간지 관련 기사 (0) | 2008.09.13 |
농사력과 간지력 (0) | 2008.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