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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雜다한 글

찔레꽃 예찬

by 石基 2008.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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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밭에 나갔다가 사방에 피어있는 찔레꽃을 보았다. 그 꽃을 보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찔레 … 어렸을 때 참 많이도 먹었지.'


지금이야 먹을 것이 넘쳐서 문제가 되는 시절이지만,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군것질거리가 별로 없었다. 아니 서울이었으면 군것질거리가 좀 많았을까? 하지만 시골 촌구석에서 살아서 그런지 군것질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햄버거라는 음식도 서울에 온 후,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처음 먹어보았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때는 그저 철따라 열리는 나무열매나 풀들이 유일한 군것질거리였다.


찔레꽃이 필 때쯤이면 모내랴 농사일 하랴 한창 바쁜 때여서 점심은 언제나 물김치에 쌈채류와 장이 전부였다. 그것도 어른들은 들일로 바빠서 혼자 먹기 일쑤였다. 그렇게 홀로 점심을 해결하고 산으로 들로 놀이터를 찾아다니며 놀았던 그 때도 찔레는 참 많았다.


지금 이 맘 때는 찔레를 먹기에 좋지 않다. 지금은 찔레 새순이 딱딱해져서 껍질을 벗겨내고 먹어봤자 질긴 섬유질만 씹히고, 또 진딧물이 찔레를 장악할 때이다. 찔레순을 따먹기 좋은 때는 한 2주 전쯤이다. 지금이야 모든 음식이 워낙 달아서 그 맛에 혀가 익숙해지다 보니까 찔레를 먹어도 단지 모르는데, 어렸을 때만 해도 찔레가 엄청 달았다. 물오른 부드러운 찔레의 새순을 꺾어서, 껍질을 벗기는 그 순간부터 입안에는 벌써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먹고 싶은 맘을 꾹꾹 눌려 참으며 껍질을 싹 벗겨낸 후 한 입에 쏙 넣으면 달큰한 물이 베어 나오면서 부드럽게 씹히던 그 맛! 절대 잊지 못할 맛이다.


서울로 이사를 오고 바쁘게 학교를 다니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찔레를 먹는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 낸 것은 대학교 농활을 가서이다. 봄농활을 갔는데 마침 찔레 새순이 돋아나던 때였고, 나는 습관처럼 그것을 꺾어서 맛있게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선배들이 맛있냐고 묻는 순간, 옛 기억이 떠올랐다.


'아 맞다! 예전에는 이렇게 먹었지.'


도시에서의 삶이 나의 기억을 묻어버렸는데, 그곳에 돌아가니 나도 모르게 그곳에서의 삶이 되살아나면서 다시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정말 재미있어서 매년 농활을 참가했다.


찔레의 매력은 이것만이 아니다. 새순을 따먹는 것만 이야기 한다면 예찬을 하지도 않았다. 찔레는 새순의 맛도 맛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 꽃이 또한 일품이다. 찔레꽃을 자세히 바라본 분들은 아실테지만, 찔레꽃은 절대 혼자 피지 않는다. 하얀 꽃들이 눈송이처럼 몽글몽글 뭉쳐서 핀다. 멀리서 찔레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꼭 함박눈이 내리는 도중 누군가 '멈춰!~'라고 명령한 것처럼 꼭 그 모습 같다. 녹음이 짙어져갈 무렵에 보는 흰 눈송이,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답다.


찔레꽃의 매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전부였다면 찔레 예찬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가까이 다가가서 찔레꽃을 보면, 찔레꽃이 수줍어하는 새악시처럼 분홍빛이 꽃잎 끝에 살짝 감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찌나 예쁜지 꽉 보듬고 깨물어주고 싶은 맘이 불쑥 튀어나와 내가 미친 것이 아닌지 잠시 놀랄 정도이다. 꽃을 보고 흥분하다니!


같은 장미과지만 찔레와 장미는 참 다르다. 장미꽃은 새빨갛고 크고 탐스러워 누구의 눈길이라도 잡아끄는데, 찔레는 그렇지 않다. 조그맣고 하얀, 겨우 꽃잎 가에나 엷은 분홍색을 띠고 있을 뿐이다. 장미가 확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사실이지만 은근한 맛은 없다. 너무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면 괜히 거부감이 생기는 것이 우리네 정서라인데, 그런 면에서 장미는 우리네 정서와는 좀 거리가 있지 않은가 싶다. 이 산 저 산에 있는 듯 없는 듯, 다른 나무들 틈새에서 말없이 피어있는 찔레꽃. 그리고 그 꽃을 피우기 위해 꿋꿋하고 끈질기게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찔레나무. 그 찔레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찔레에 관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전설을 덧붙인다.


고려 때, 어느 산골 마을에는 ‘찔레’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굴이 예쁘기도 했지만 예의도 바르고 착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예뻤던지, 사람들은 궁녀로 끌려갈 것이라고 소근 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궁궐로 간 것은 아니지만, 몽골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북방 몽골족에게 매년 처녀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찔레’를 받아들인 몽골족 주인은 마음씨가 워낙 좋아서 ‘찔레’에게 호된 일을 시키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편안히 잘 지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살펴 주었습니다. 그래서 ‘찔레’의 몽골 생활은 공주처럼 호화롭고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찔레’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그리운 고향, 그리운 부모, 그리고 그리운 동생들 생각으로 가득 했습니다. 가난해도 고향이 좋고 지위가 낮아도 내 부모가 좋고 남루한 옷을 입어도 내 형제가 좋았어요.


“고향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무수히 피어났겠지. 부모님과 동생들은 잘 지내고 있겠지.”


지극히 ‘찔레’를 사랑해 준 부모님, 말썽을 부리고 심술을 피웠건만 그립고 그리운 동생들, 그리고 그리운 고향 향수는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10년째 되던 어느 날 ‘찔레’를 가엾게 여긴 몽골 주인은 사람을 고려로 보내서 ‘찔레’의 가족을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찔레’의 고향집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서 고려로 갔던 사람은 ‘찔레’의 가족을 찾지 못하고 그냥 몽골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찔레’의 고향에 대한 향수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주인님. 저를 한 번 고향에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그래, 그렇게 하려무나.”


몽골 주인은 ‘찔레’의 간절한 소망을 쉽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찔레’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혼자 고향의 가족을 찾아 고려로 떠났습니다. 고려로 돌아온 그녀는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여기저기 산속을 헤맸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리운 동생을 찾지 못했습니다.

슬픔에 잠긴 ‘찔레’는 다시 돌아가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어도 고향에서 죽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찔레’는 몇 날 며칠을 찾아 헤매다가, 끝내 고향 근처에서 지쳐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녀가 동생을 찾아 헤매던 골짜기, 산, 개울마다 그녀의 마음은 흰 꽃이 되고, 그녀가 흘린 눈물은 붉은 꽃이 되고, 동생을 부르던 그 아름다운 소리는 향기가 되어서 온 산천에 아름답게 피어났습니다.


그 꽃이 ‘찔레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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