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농담/농-생태계

내 똥은 어디 가지?

by 石基 2008. 8. 19.
반응형

내 똥은 어디 가지?


오늘도 화장실에 가서 끄응~ 행사를 치른다. 변비 환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하루에 한 번씩 똥 싸러 간다. 은밀하고 보이기 싫은 역사가 이 화장실에서 이루어진다. 잠시 힘을 빼고 앉아서 변기에 떠 있는 이 똥의 운명은 어떨지 생각한다.

화장실이 서양식으로 바뀌면서 덩달아 우리 문화도 참 많이 바뀌었다. 하루에 한 번 이상 깨끗하게 몸을 씻는 습관이 생기지 않나, 남의 집에 가더라도 똥오줌만은 자기 집에 가서 싼다는 정신은 깔끔한 화장실이면 된다는 생각으로 바뀌지 않나, 뒷간은 멀어야 좋다는 이야기는 어디가고 집안에 화장실이 떡하니 버티고 들어섰지 않나.

어디 문화만 바뀐 것이 아니다. 똥도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똥은 더러운 것,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것이 되었다. 텔레비전에서도 똥은 “○”이라고 나오고, 출연자들도 “똥”이라는 단어는 직접적으로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도 똥 이야기를 꺼내면 슬슬 자리를 피하거나 얼굴을 돌리며 더럽다고들 한다. 그러나 누구나 똥을 싼다. 먹으면 싸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이치라 기막히게 잘생긴 남녀 연예인도, 재벌회장도, 심지어 개새끼도 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변화는 더 이상 농사짓지 않는 우리의 현실에서 왔다. 그러면서 오로지 석유 에너지에 의지하는 우리들. 농사도 이제 석유 에너지가 없으면 지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화학비료가 그렇고, 농약이 그렇고, 트렉터니 이앙기니 하는 기계가 그렇다. 그 결과 똥은 더욱더 우리의 삶과 유리된, 저 지하의 음습한 곳에 자리 잡은 정화조에나 자신의 둥지를 틀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오늘도 변기에 물을 내리면서 죄스런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늘 그렇다면 우리는 살 수 없을 것이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잊어버리고, 적당히 합리화하면서 산다. 하지만 이 똥은 분명 이 길을 따라 정화조로 갈 테고, 그곳에 가득차면 똥차가 와서 퍼가겠지. 그러고는, 그러고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깊은 바다에 버리겠지. 내가 어떻게 마음먹고 생각하든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신문에서 봤는데 동해에 똥을 버리는 곳이 세 군데 있다고 한다. 그럼 그 똥이 거기서 그대로 가라앉을까? 물고기가 먹거나 해류를 따라 여기저기 흩어지지 않을까? 아무튼 똥이나 하수는 슬러지 처리를 거쳐 해양투기라는 운명을 맞는다.

더럽고 쓸모없는 똥이 제값을 받는 곳은 농사밖에 없다. 일제강점기에 금비金肥라고 부르는 화학비료가 나오기 전까지 똥은 엄청난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 앞서 얘기했듯이 똥은 아무데서나 함부로 싸면 안 되는 소중한 존재였다. 사실 똥을 더럽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긴 것은 서양 사람들이다. 파라솔과 하이힐을 왜 만들었는지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실 것이다. 옛날 서양 도시의 집에는 화장실이 없어 요강에 똥을 싸서 밖에다 휙 던지니 똥벼락 맞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거리에 널린 똥을 밟지 않기 위해서 하이힐 같은 신을 신어야 했다고 한다. 똥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버리니 강이 더러워지고 전염병이 창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아름답다는 베르사이유의 궁전에 지금은 모르지만 예전에는 화장실 하나가 없었다는 사실을 아실랑가 모르겠네.


우리 집에서도 똥은 여전히 천덕꾸러기 신세지만, 앞으로 귀하신 몸이 될 날만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마누라 등살에 아직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확 밀어붙이면 될 테지만 그런 수단을 쓰면 쓰겠나. 때가 되면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기다림, 이건 내가 농사를 지으며 배운 미덕이다. 내가 농사짓는 밭에는 집에서 똥을 받아다 거름을 만드는 분이 있다. 그 분은 차도 없는데, 그래서 똥을 통에 담아 손에 들고서 버젓이 버스에 탄다고 하신다. 냄새가 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똥을 들고 버스에 오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나지 않는가.

우리 집에서 똥은 아직 천덕꾸러기지만 오줌만은 제대로 대접을 받는다. 이런 저런 실험을 거친 결과 1.8리터짜리 우유병이 오줌을 받기 가장 알맞다는 결과를 얻었다. 1.5리터짜리는 입구가 너무 좁아 거시기를 맞추기 힘들고, 1.8리터가 딱 알맞다. 궁금하신 분은 지금 당장 넣어보시라. 특이한 분이 아니시라면 다 알맞을 것이다. 여자의 경우에는 번거롭기 짝이 없다. 일단 바가지에 오줌을 받은 뒤 다시 통에 부어야 한다. 이렇게 오줌만 받아도 수도세가 확 줄어든다는 사실! 돈도 벌고, 거름도 받고, 물도 아끼고, 그러면서 절로 환경도 살리고 이거 일석몇조인지 세기도 힘들다.

이렇게 통에다 사나흘 오줌을 싸면 둘에서 세 통을 받을 수 있다. 이걸 자전거 바구니에 실고 밭에다 한 번씩 날라서 두엄자리에 뿌려 거름을 만들거나, 아니면 조리개에 물과 5:1 비율로 섞어서 웃거름으로 준다. 오줌을 주고 며칠 뒤에 보면 이게 장난 아니다. 어찌나 무럭무럭 자라는지 말로만 듣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모든 것은 변하고, 그래서 흐른다. 이 흐름이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지금 우리의 삶은 너무 많이 끊어져 있다. 단적으로 똥이 그렇고, 에너지가 그렇고, 돈과 잡히지도 않는 환영에 끄달리며 사는 모습이 그렇다. 자기의 삶을 어떻게 이어지도록 살 것인지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사는 게 다 그렇다는 말이나 살다보면 그렇게 된다는 말은 핑계나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나는 농사를 통해 바로바로 순환하고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좋다”라는 생각을 한다. 풀을 매고 씨를 심으며 순간순간 나 자신을 돌아보고, 그러면서 마음까지 돌볼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입으로만 신나게 구호를 외치고 마땅한 말을 쏟아 붓기만 하며 자신의 삶은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런 분들에게 농사를 권하고 싶다. 농사야말로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환경을 살리는 참으로 좋은 길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