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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게맹게 외배미들의 아리랑

김제 들녘


▲ 김제들녘은 어디에서나 보나 그 끝이 아슴프레 가물거린다. '아리랑 문학관' 앞에서 본
  
넓은 들녘

징게맹게(김제·만경) ‘외배미들’이란 말이 있다.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김제와 만경을 채운 논들은 모두 한 배미로 연결돼 있다는 뜻이다.
과연 김제 들녘은 그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증명한다. 지평선은 광활면 간척지 땅에 이르러서야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넓은 들녘 어디에서나 그 끝이 아슴프레 가물거릴 뿐이다. 그 들에 서면 눈에 담기는 것이라고는 노랗게 익어 가는 곡식과 야트막한 야산들, 그리고 그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의 집들뿐이다.

김제의 옛 지명들은 광활한 들녘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김제는 마한 때는 ‘볏비리’로 백제 때는 ‘볏골’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모두 ‘벼의 고을’이란 뜻으로 그 들녘이 둘도 없는 곡창이었음을 말해 준다. 김제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로 황금 들녘에서 그 이름이 발원한다.

넓은 들을 가졌고, 그 많은 곡식을 일구어냈지만 김제 들녘은 풍요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넓은 들의 푸진 곡식이 궁핍을 만들어냈다. 김제 들녘에 서면 누구나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그 땅이 간직한 아픔을 체득하게 된다. 양반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일본이 우리 땅을 점령한 후에는 입에 넣을 양식까지 수탈 당했던 사람들. 김제 들녘에서 거친 삶을 살아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빼앗기는 데 익숙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소작인들이었다. 김제 들녘은 수탈의 역사를 거대한 몸을 뒤척이며 증명한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한 것도 지금은 벚나무길로 명성을 떨치는 전주군산간 전군가도가 개발된 것도 모두 김제 들녘 때문이었다.
김제 위로는 만경강이 그 아래로는 동진강이 넓은 들녘을 감싸안고 흐른다. 김제 만경 들녘에서 군산을 잇는 도로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포장된 것은 그 들녘에서 나는 곡식을 수탈해가기 위한 일제의 속셈이었다. 역으로 생각하면 김제 들녘의 몰락 위에 군산항의 부흥이 있었던 셈이다.

넓은 들을 키우려니 당연히 김제에는 예부터 수리시설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들녘 사이를 가로지르는 29번 국도를 10여 분 달려 부량면에 닿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다는 저수지 벽골제가 나온다. 벽골제는 벼와 고을, 제방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의 3대 수리시설이었으며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서기 330년)에 축조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인 마한시대로 축조시기가 추정되기도 한다.

김제 들녘으로 흘러 들어갔던 물을 가두는 제방만 3.3km. 전체 둘레는 44km를 넘었다는 벽골제는 현재 연못의 규모로만 남아있다. 1925년 간선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되면서 제방이 양분되고, 일제가 섬진강댐인 옥정호를 만들어 물길을 여는 대신 벽골제를 논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근의 지명을 통해 벽골제가 얼마나 거대한 저수지였는지 축조당시의 공사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신털미산’은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낸 것이 모아져 산이 되었고, ‘되배미산’은 인부들을 일일이 셀 수 없어 500평 되는 논에 지게를 짊어진 사람들이 모두 채워지면 500명으로 간주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벽골제에는 5개의 수문이 있었다. 첫 번째 수문인 수여거를 통해 나온 물은 만경현 남쪽에 이르고 장생거는 만경현의 서쪽, 중심거는 고부군의 북쪽과 부령현의 동쪽, 경장거와 유통거는 인의현의 서쪽까지 그 물줄기가 뻗었다. 현재는 장생거만이 그 모습을 보존한 채 당시의 역사를 짐작케 하고 있다.


▲ 벽골제에 있던 5개의 수문 중 유일하게 모습을 보존한 장생거


벽골제 안에는 ‘수리민속유물전시관’이 있어 수리시설의 역사와 변천과정을 담은 유물들을 한눈에 모두 살펴볼 수 있다. 전시관에 들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거대한 쌀뒤주로 김제 들녘에서 얼마나 많은 쌀이 생각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원형의 뒤주는 높이 210cm로 쌀 70가마를 한 번에 저장할 수 있다. 전시관에는 벽골제의 축조과정을 담은 모형을 포함해 총 250점의 유물이 소장돼 있다.

벽골제 맞은 편에는 김제 들녘을 배경으로 시작해 민족 수난과 투쟁의 현장들을 두루 담은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기념하는 ‘아리랑문학관’이 있다. 1층에는 사람 키보다 높은 소설 아리랑의 원고들이 쌓여 있으며 『아리랑』의 시작과 끝을 담은 육필원고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2층에는 조정래가 『아리랑』을 써내려 가는 과정에서 사용했던 취재수첩과 필기구, 취재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취재수첩에 그려진 취재지의 세밀한 그림들은 조정래의 작가적 치밀함을 보여준다.

김제 들녘을 거쳐 아리랑문학관에 들면 소설 아리랑이 왜 징게맹게 외배미들을 배경으로 전개됐는지 알 수 있다. 김제 넓은 들녘은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땀과 눈물로 가득 찬 공간이다. 김제 들녘의 지평선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하늘과 땅 사람을 연결짓는 고리의 선이다.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김제→29번 국도를 타고 부량면 방향→10분 정도 직진하면 도로 바로 옆에 벽골제, 수리박물관, 아리랑 문학관이 몰려 있다.
먹을거리: 김제시장 입구에 ‘곰돌이네집’(063-546-1238), 금구면에 ‘예촌’(546-5586)이 있다.
여행쪽지: 김제 벽골제 인근에서는 매년 지평선축제가 열리며 올해는 10월2∼5일 열린다.
정상철 기자  dreams@jeonlado.com

출처 : 돌터
글쓴이 : 金石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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