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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슨 말씀이 하고 싶은지 명확히 알겠네요.

그러니까 '견종법'이 잘못 해석되었다, 이걸 말씀하고 싶으신 거지요?

'간종법'과 '견종법'을 착각했다. '견종법'은 시행된 적이 없다!

 

먼저 제가 사료는 분석한 적이 없기에 사료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수 없겠습니다.

대신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농법과 제 경험에 의거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유구 선생이 살던 때와 100여 년의 차이니까,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농법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 특히나 안승택 선생님의 지적처럼 기후와 지형과 땅에 적응해가며 완성된 농법이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는 점만 전제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물론 생산도구의 확보와 경제성만 담보가 된다면 사정은 달라지기는 하지요. 요즘처럼요...^^

 

먼저 김용섭 선생님의 견종법에 대해서 결론부터 말하면,

김용섭 선생님이 고랑에 심는 모든 방법을 견종법이라 정의하고 설명했다면, 그건 선생님의 주장처럼 서유구 선생이 말씀한 견종법을 너무 광범위하게 적용시킨 것이라 볼 수 있겠네요. 오히려 선생님의 지적처럼 간종법이 발달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후 민성기, 히로시, 이호철 선생님의 의견으로 갈수록 뭔가 발전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네요. 역시 학문은 이전 연구자를 발판 삼아 진일보하나 봅니다. 덕분에 좋은 흐름을 배웠습니다. 사료 해석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견종과 간종이 그렇게 중요한 구분인지요? 살짝 좀 궁금하네요. ^^

단어 하나에 따라 정의되는 내용이 달라지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밭에 따라서 사이짓기를 전제로 하고 고랑을 만들어 보리를 심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그렇지 않고 그루갈이를 전제로 고랑에 보리를 심는 방법이 있습니다.

둘의 차이는 어느 방법을 전제로 하느냐에 따라 고랑과 고랑의 간격, 곧 두둑의 너비에 차이가 생깁니다. 물론 사이짓기를 하게 될 때 두둑의 너비가 더 넓어지지요.

하지만 둘 모두의 공통점은 고랑에 보리를 심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루갈이를 전제로 할 때는 사이갈이가 병행이 됩니다. 또한 사이짓기에서도 형편에 따라 사이갈이가 동반되지요.

 

그런데 조선 전기의 간종법 그림에 나오는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당시 그렇게 조방하게 농사를 지었나요? 어디서 구하신 자료인지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후기로 갈수록 농법이 발달한 것이 맞겠네요.

 

여기서 잠깐, 이러한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왜 보리를 고랑에 심었는가? 왜 사이짓기라는 방법이 발달해 나아갔는가?

그런 점에서 16~17세기에 찾아온 대기근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당시 소빙하기라 불리는 추운 겨울을 이기고자 그런 방식을 도입하지는 않았을까?

식량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시기, 최대한의 생산보다 최악의 상황을 막는 농법이 발달한 것은 아닐까?

작물 사이의 상호관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닐까?

아무튼 더 나아가면 골치만 아프니 이 정도에서 그치고 넘어가겠습니다.

 

밭은 그러한데, 논에다 보리를 심을 경우는 사정이 좀 달라집니다.

당시 논은 대부분 수리시설이 미비하여 천둥지기였습니다. 

그래도 흙은 보통의 밭과는 달랐지요. 그곳에서는 보수성보다는 배수성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견종법의 설명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물빠짐고랑을 밭 가장자리와 가운데 등에 파고서 두둑에 골을 타고 보리를 심기도 했습니다. 

요즘도 논에 보리를 심을 때는 두둑에 심는데 그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기본 개념은 비슷했을 겁니다.

그 모습은 흡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견종법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곳은 날씨가 따뜻한 남부 지방이 주요 지역이었습니다. 날씨가 추운 북부에서는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논에 보리를 기르기 힘들어지지요. 벼의 생육기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곳에서, 벼를 포기하고 보리를 심는 건 농민 입장에서 바보같은 짓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논의 뒷갈이로 보리를 기르는 건 지금도 그렇듯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일부 중부 지방까지였습니다.

그리고 밭에 보리를 심는 건 그 이북 지방이었구요.

논이냐 밭이냐에 따라 보리를 심고 기르는 방법, 그루갈이와 사이짓기를 하는 방법이 다양하게 변화합니다.

음... 저는 진짜 무엇이 맞고 틀린지 어렵네요. ㅋ 혼란만 더해 드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서유구 선생님이 남부 지방의 논에서 뒷갈이로 보리를 기르는 모습을 보신 것인지? 풍문이라도 들으셨는지... 타임머신이 있으면 당장 날아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안승택 선생님의 지적처럼 수도권에 사셨다는 것이 한계였을지도 모르겠구요...

 

조선시대 농서를 보면서 참 답답한 점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건 선생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러다 다카하시의 자료를 만났고... 그러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 이후 제 공부의 방향이 잡혔다고 할까요.

 

이론과 현실, 보편과 특수를 통합하기란 늘 어려운 문제입니다.

선생님 지적처럼 안승택 선생님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 일을 훌륭히 해내셨더군요.

아무튼 조선시대의 농서에서는 이론과 보편, 당위는 보이는데, 현실과 특수, 사실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서 실망한 점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제가 나아갈 방향은 물론 둘의 통합인데, 후자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나아가려고 합니다. ^^

 

제대로 된 답변이 아닐지 몰라 죄송하네요. 제 수준이 여기까지라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덕분에 정말 좋은 논문 잘 보았습니다.

김용섭 선생님께 비수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냐는 주변의 반응은 조금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만,

학문에 그 정도의 자유와 용기, 소통이 없다면 공부를 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신... 너무 처음부터 큰 거 한방을 노리시는 듯하기는 하더군요. 쨉으로 계속 툭툭툭 날리다 원투를 날리시는 방향으로 게임 운영 방법을 바꾸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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