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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읽을거리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 개요

by 石基 2008.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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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부터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라는 일본 사람이 일제시대에 농사시험장에서 일하면서 조선 팔도를 발로 뛰며 취재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이 책은 현재 「사진으로 보는 1940년대의 농촌풍경」이라는 사진집만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자체적으로 제주도 편만 번역해 놓은 자료집이 있지만 완역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 당시 농민들이 농사짓던 방식부터, 무엇을 어떻게 먹고사는지, 땅값은 얼마이며 농산물이나 생활 용품은 얼마인지 하는 것까지 모조리 조사했습니다. 보면 볼수록 이 사람의 어마어마한 열정에 질려 정신병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너무 기가 차서 웃음이 터질 때도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책의 제목을 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조선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 가장 알맞게 농사짓는 방법에 대한 것이기에 ‘조선 반도의 농법’입니다. 그와 함께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기에 ‘조선 반도의 농민’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소개하는 글을 통해 저절로 알수 있을 겁니다.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는 누구인가?

다카하시 노보루는 1892년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태어나 1918년 동경대학 농학부 농학과를 졸업합니다. 후쿠오카는 특히 농법이 뛰어난 곳이라 하여 19세기 후반 일본 전체에 그것을 정리해 보급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농학부를 택한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그 이듬해인 1919년부터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수원지장에서 일하면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거기서 9년을 일하다가 1928년에는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서선(西鮮)지장의 장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서선은 서쪽 조선이라는 말로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가리킵니다. 당시 일본은 크게 북선(함경도, 강원도), 남선(경상도, 전라도) 등으로 우리 나라를 구분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에는 농사시험연구기관을 정비 통합하여 다시 수원지장으로 돌아와 총무부장이 됩니다. 그 뒤 해방이 되고 나서인 1946년 5월까지 그곳에서 나머지 일을 처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 심근경색으로 55살에 숨을 거둡니다.
그래서 이 책은 그가 직접 쓰지는 못했고, 아들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를 정리하여 1998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군데군데 엉성한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 농업 실태 조사

그가 조선에 온 첫 해부터 이러한 조사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한 것은 1937년 7월 6일에서 8일까지 경상도에 출장을 가면서입니다. 그나마도 이때는 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면서 본 것을 적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에 대하여 자세하게 조사하기 위해 나섭니다. 그 장소와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937년 : 7월 29일 경기도 / 9월 1일 이후 황해도 / 9월 6~7일 경상도 /
          9월 27일~10월 5일 강원도 / 10월 24일~11월 1일 평안도
1938년 : 3월 16일 황해도 / 6월 30일~7월 16일 함경도 /
          11월 6~10일 충청도
1939년 : 2월 26~28일 전라도 / 4월 30일~5월 6일 황해도  
          5월 20일~6월 3일 제주도 / 7월 2~8일 강원도  
          10월 12~13일 충청도 / 10월 13~21일 전라도
1940년 : 2월 25일 충청도 / 3월 4~9일 황해도  
          10월 26일~11월 3일 함경도 / 11월 13~25일 경상도
1942년 : 6월 1~5일 강원도
1943년 : 7월 3~9일 경기도

이와 같이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정말 쉴 틈 없이 엄청나게 돌아다니며 조사했습니다. 일제에게 봉사한 일본인이지만 그의 노력 덕분에 우리가 이런 엄청난 자료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를 위해서 그 사람보다 꼼꼼하게 우리의 옛 농사 방식을 조사하고 연구 정리해서 직접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조사했는가

조사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동차와 기차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지나가며 본 논밭의 모습을 기록한 것입니다.
둘째는 조사하기에 앞서 미리 책이나 관련된 사람을 만나 조사한 내용입니다.
셋째는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을 만나 이것저것 묻고 눈으로 본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첫 번째 방식을 통해서는 주로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어 놓았는지 꼼꼼하게 조사했습니다. 두 번째 방식을 통해서는 어느 지역이나 농기구와 그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세 번째 방식을 통해서는 구체적으로 농사짓는 방법과 그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조사했습니다.
그 내용으로는 논밭의 이름, 집에서 떨어진 거리, 논밭의 넓이, 심은 품종, 수확량, 그루갈이, 돌려짓기, 이어짓기, 저장하는 방법, 그루 사이의 간격, 심는 포기 수, 거름, 집터, 집 구조, 가족, 품앗이와 놉 같은 노동력, 품삯, 명절, 민속, 농기구, 역사 유적, 밥상 차림, 방아 찧는 방법, 마을에 대한 이야기 등 백과사전 같은 자료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가

다카하시 노보루의 조사에는 농사만이 아니라 민속, 사회, 경제, 역사, 지역, 생활 모습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때 사람들의 농사짓는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와 지금은 생활 방식은 물론 농사짓는 방식도 엄청나게 바뀌었습니다. 쟁기질 같은 경우만 봐도 그때는 소나 말을 쓰거나 사람들이 함께 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경운기나 트랙터로 혼자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름도 그때는 화학비료를 금비(金肥)라고 부르면서 영양제 식으로 주던 것이었지만 지금은 안 쓰면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렇다 보니 지금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전혀 생각조차 못하던 것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세로 그때 사람들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책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점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① 쟁기질 방법
먼저 쟁기질 방법입니다. 그때 쟁기질은 아시다시피 소나 말로 했습니다. 어떤 작물을 심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두둑을 지어 땅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이 두둑짓기를 쟁기로 한거웃갈이하느냐 두거웃갈이하느냐에 따라 두둑의 크기도 달라지고, 그에 알맞은 작물도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어떤 작물을 심을지 먼저 결정하겠지만 그것을 결정하고 나면 가장 중요한 것이 쟁기질입니다.
요즘은 로터리라고 하는 방식이 아주 일반적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그거 참 "거시기"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 반대되는 무경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거시기"입니다. 제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이 책을 보면서 적당한 쟁기질이야말로 농사를 시작하는 첫 단추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네 아저씨께 어쩌다가 소 쟁기질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방법을 어떻게 되살릴 수 없을까 생각합니다. 옛 방식을 발전한 기술력으로 적절히 잘 활용한다면 전통을 현대에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② 돌려짓기, 사이짓기 - 한정된 땅을 최대한 활용하기
이것도 엄밀하게 따지면 앞에서 말한 어떤 작물을 심을 것인가 하는 내용에 들어갑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한 해가 시작할 때 올해는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럼 그해 재배할 작물 목록이 나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한정된 밭에다 아기자기하게 심어서 가꿀지는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요즘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일반적으로 홑짓기 방식을 쓰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돌려짓기나 사이짓기 같은 방식은 경제적인 이유로 뒤로 밀리고, 수익을 낼 수 있는 작물을 대량으로 한곳에다 계속 짓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러저러한 이유로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쓸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가 생겼습니다.
물론 그때 사람들도 지금 같은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농사를 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과 같은 과학기술은 없었지만 그때 사람들도 지혜롭게 잘 농사지으며 먹고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을 요즘에도 지혜롭게 이용하면 힘은 들지언정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가운데 돌려짓기와 사이짓기는 시간과 공간 활용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려짓기는 한 작물을 거둔 뒤 바로 쟁기질하고 새로운 작물을 심는 방법입니다. 사이짓기는 한 작물을 심고 그 작물을 거두기 전에 새로운 작물을 심어서 끊이지 않게 밭을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이짓기의 "사이"는 시간 공간적인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돌려짓기와 사이짓기를 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앞그루와 뒷그루가 겹치지 않도록 때를 잡는 것과 공간을 배치하는 것, 두둑을 만들거나 사이갈이를 하는 쟁기질입니다.

③ 갈무리, 그밖에
이 자료에는 저장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고구마나 감자 같은 경우는 움을 어떻게 얼마 정도로 파서 저장하는지, 씨앗은 어떻게 관리하고 보관하는지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밖에 농사와 관련된 볼 만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벼농사의 경우 볍씨는 어떻게 준비하는지, 못자리는 어떻게 관리하는지, 논의 물대기는 언제 어떻게 하는지, 또 여러 작물들을 어떻게 수확해서 낱알을 떠는지, 그때 노동력은 얼마나 드는지, 벼, 보리, 밀은 어떻게 방아를 찧어 먹는지, 볼 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식량기지였던 조선반도

조선 반도의 농법이라고 하여 모든 농사를 다 조사한 것은 아닙니다. 그때 농사의 중심은 곡식류였고, 채소류 같은 것들은 집에서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텃밭에서 조금씩 하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래서 요즘 근교 농업에서, 우리의 식생활이 바뀌면서 사랑받고 있는 여러 야채니 채소니 하는 것들을 농사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이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때 상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조사 내용에서 그러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대규모 일본인 농장의 소작인이었다는 점, 조선시대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소작료, 집집마다 젊은 남자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식량 생산 기지로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추진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자료에서도 염전을 메우고 바다를 간척하여 논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 자료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비록 식량 생산 기지가 되고 사람들은 힘겹게 살았지만, 흔히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 농사꾼이라고 합니다. 그 말처럼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 해도 농사꾼들은 자신이 농사짓는 방법을 쉽게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료를 보면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농사지었는지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때도 화학비료를 쓰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완전히 그에 의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본은 두엄이고 똥이고 재였습니다. 기계도 많지 않아서 탈곡기나 방앗간 정도만 있었습니다. 나머지 모든 농사일을 소나 농기구로 직접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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