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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갔다. 다행히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덕분에 난 맑게 갠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림 1 아무 기술이 없어도 좋은 사진이 나오는 하늘 아래 벌교역. 새삼 10년 전 기차를 타고 이 역을 지나간 기억이 떠올랐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만큼 주먹깨나 쓴다는 건달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주먹들이 모이는 곳이야 뻔하지 않은가? 벌교는 지금과는 달리 예전에는 돈냄새가 폴폴 풍기는 곳이었다는 증거다. 이런 곳에 기차역까지 있다면 말 다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신작로인 목포에서 서울까지 가는 1번 국도도 그렇고 경인선도 그렇고, 일제는 돈이 되는 곳이라면 길을 뚫고, 기차를 놓았다. 지금도 사정은 비슷하다. 옛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경제가 잘 굴러가도록 잘 쓰는 길을 놔두고 쓸데없이 산을 깎고 길을 뚫는다는 것. 자본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굴러가야 한다. 농사와는 어울리기 힘든 흐름을 가진다.

간밤 후배와 술 한 잔 나누어 눈이 퉁퉁 부었다. 속을 풀 만한 먹을거리를 찾아 장을 헤맸다. 마침 장날이라 장터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국밥집을 찾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거기에는 입 짧은 후배도 한몫했다. 찾다 찾다 찾은 곳이 허름한 밥집이었다. 시킬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백반이었다. 아마 장날에만 여는 집 같았다. 시원한 콩나물국에 가짓수도 엄청 많은 반찬들, 밥은 또 얼마나 꾹꾹 눌러서 주시는지. 일단 콩나물국부터 시원하게 마시고 속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본 아주머니께서 친절하게도 알아서 한 대접 또 주신다. 정신없이 참 맛있게 먹었다. 이 맛을 어떤 말로 표현할지 도대체 떠오르지 않는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밥값을 계산하려고 1,0000원을 건넸다. 그런데 돌아오는 돈이 6000원! 이 어찌된 일인가? 1인분에 2000원. 이렇게 싼 값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다니. 이거 기분 째진다.


 

 그림 2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 겉에 양철을 덧댔다. 양철이 살짝 벗겨진 곳을 자세히 보면 나무가 보인다. 개발이 안 된 덕에 근대문화유산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벌교.

그림 3 옛 영화는 사라지고, 그때의 기억을 간직한 낡고 초라한 건물만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버스마저 왜 이리 추레한 것인지.


다카하시 노보루가 벌교에 온 것은 1939년 10월 18일. 난 2007년 7월 13일에 왔으니 한 70년쯤 차이가 난다. 그는 벌교에 도착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오후 4시 6분 보성을 출발하여, 시마자키島崎 기수와 최崔 기수(보성군 농회 기수)의 안내를 받으며 벌교로 향했다. 오후 5시 도착했다.
벌교읍에서 으뜸인 조선 여관, ‘보성관寶城館’에 들어갔다. 일본인도 묵는 사람이 많았고, 시설이 괜찮은 편이었다.


보성관이란 여관 이름이 눈에 띈다. 여기 오기 전 조사를 통해 아직 이 여관이 남아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번 벌교 여행은 이 여관을 확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장사하는 아주머니에게 이 건물이 어디 있는지 물어 더듬더듬 찾아갔다. 조금 지나자 일제강점기 냄새가 물큰하게 풍기는 거리에 들어섰다. 순간 이곳 어딘가에 ‘보성관’이 있으리라 직감했다.

그림 4 보성관이 자리한 거리는 옛날에 벌교의 중심지, 곧 본정통이었다. 지금은 이 거리가 본정통이지만...


그림 5 보성관 입구. 가게들이 늘어서 있어 작은 입구를 찾아보기 힘들다. ‘크린에이드’라는 간판의 오른쪽이 입구. 2층은 여관 건물.


드디어 여관을 찾아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이때 시간은 거꾸로 흘러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왔던 그때로 돌아갔다. 새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여관. 댓돌에는 손님들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저 방에 다카하시 노보루가 앉아 있을까?

그림 6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정원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이 여관은 현재 보성관이라는 이름보다 ‘남도여관’으로 더 유명하다. 소설가 조정래 씨가 쓴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빨치산 토벌대가 이 여관에 머물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훈련을 했다고 한다.


지금 1층은 가게와 살림집으로 쓰고, 2층은 비어 있다고 한다. 1층에는 방이 열 개, 2층은 좀 더 큰 다다미방이 네 개다. 이 정도 규모면 엄청 좋은 호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림 7 지금은 텅 빈 2층 다다미방. 사진은 퍼옴.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ㄷ’자 구조인데,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화단이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 왼쪽과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있고, 안채로 쓰는 건물 위에 2층을 올렸다.

그림 8 보성관의 모습. 70년 전에도 이 자리에 우뚝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이 건물을 지키고 있는 건 나종필(73), 유보임(72)이라는 노부부이다. 벌교에서만 8대째 사는 토박이이시다. 그분은 남도초등학교에서 20년 동안 교사를 하다가 퇴직하고 금은방을 냈는데, 이 건물이 매물로 나와 5만원에 샀다고 한다. 그게 1979년의 일이다. 그러다 학교 정화 구역이 되면서 1988년에 여관 간판을 내렸다.

이 분 덕분에 보성관은 지금도 훼손되지 않고 역사를 증언하며 이렇게 살아남았다. 언제 개발이란 광풍이 불어 닥칠지 모르는 곳에 사는 건물들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것에 비하면, 참 행복한 집이다. 어디 건물뿐이랴 소, 닭, 돼지들 모두 제 명에 죽지 못하고 내 뱃속으로 들어온다.

다카하시 노보루는 보성관에서 하룻밤 묵으며 이런 밥상을 받아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상차림을 보자.



반찬은 바닷가답게 비린 것들이 많다. 국도 멸치인지 생선인지를 넣고 끓였고, 전어 내장으로 만든 돔배젓에 굴젓까지 나왔다. 여기에 벌교의 자랑 꼬막이 어찌 빠질 수 있으랴! 여자만에서 캔 꼬막은 그 맛이 기가 막히다. 쫀닥쫀닥하고 쫄깃쫄깃한 것이, 짭짤하니 따로 장을 찍을 필요도 없다. 여기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속이 얼콰하니 든든하다. 꼬막 생각에 입에 침이 고인다. 저런 밥상이면 속이 부대끼지도 않게 밥 한 공기 뚝딱 맛있게 먹겠다.

여관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본정통답게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금융조합으로 썼다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봐도 잘 지은 건물이란 느낌이다. 1919년에 건립했다고 하니 다카하시 노보루도 이 건물을 보았을 것이다.
금융조합은 1907년 생겨 1956년 7월까지 있던 서민들의 신용 금융기관이었다. 지금의 신용협동조합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것이 해체되면서 생긴 것이 바로 농업협동조합이다. 그러니 농협의 전신이 바로 이 금융조합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 기관이 농민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그저 합법적으로 돈놀이를 한 것은 아닐까? 지금 농협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림 10 르네상스식을 바탕으로 여러 양식을 절충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금융조합으로, 지금은 농민상담소로 쓴다.


그림 11 보성관 주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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