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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을에 들어서면, 이 마을이 언제 어떤 연유에 따라 형성되었는지에 따라 집들의 배치부터 길이 난 모습까지 분위기가 달라진다. 오래전에 형성된 마을은 고풍스런 분위기가 풍기고, 새마을운동으로 형성된 곳은 반듯반듯하게 잘 정리된 느낌이 나고, 실향민이 이주한 곳은 쓸쓸함을 안겨준다. 


그래도 농촌에선 사람 사는 냄새를 찾아볼 수 있지 대도시의 건물들 사이에 서면 느끼는 그 당혹스러움이란... 어디를 가나 아무 개성없이 똑같은 모습이다. 네비게이션에 의존하지 않으면 어느 집 대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동네 구멍가게는 어디에 있는지, 담 옆에 핀 개망초꽃이 있었지 하는 요소로 기억할 수도 없다. 그런 곳에서 길을 찾을 때면 아주 곤혹스럽다. 


허나 농촌도 마찬가지다. 새로 집을 개보수하면서 천편일률적으로 집을 짓는다. 이제 농촌의 집들을 보면 이곳이 한국의 농촌이라 할 만한 요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집을 새로 지으면서 집만 새로 짓는 것이 아니다. 그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옛것을 함께 버린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씨앗도 함께 버려진다. 더 이상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쓸모없는 것으로 분류되어 버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토종씨앗 수집을 나가면 개보수가 된 집에는 잘 방문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건과 함께 생각까지도 싹 개보수가 되는 것 같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냥 신이 난다. 집을 개보수했어도 질기게 씨앗을 보존하고 심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분들 덕에 토종씨앗이 이어지고, 농사가 이루어진다. 아무 보상도 없는 일을 그렇게 하며 살아왔다. 이런 농부를 만나기가 참으로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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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 북부 Matagalpa 지역의 소농




식량주권은 여성의 권리를 진전시킬 기회를 제공하지만, 농촌 가족과 우리의 운동 안에서 성별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힘써야 한다. La Via Campesina 같은 소농운동은 식량주권과 페미니즘을 연결하기 위한 도전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Pamela Elisa Caro Molina, CLOC-La Via Campesina와 일하는 페미니스트 연구자

식량주권은 식량체계 안에서 여성의 권리를 진전시킬 기회를 제공하지만, 농촌 가족과 우리의 운동 안에서 성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도 일해야 한다. 식량주권은 무엇을 생산하지 결정하는 인간의 권리에 관한 것이다.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우린 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La Via Campesina 같은 소농운동은 식량주권과 페미니즘을 연결하기 위한 도전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식량주권은 신자유주의적 식량의 생산과 소비 모델에 대한 대안으로 제안되었다. 그 용어는 La Vía Campesina(이후 LVC)에서 참여한 많은 여성들과 함께 개념을 모아 만드는 과정을 거치며 1996년 세계 식량회의에 맞춰 개최된 토론회에서 만들어졌다 .

“식량은 시장에 맡길 것이 아니라 주권”이라는 기치에 따라, 그 운동은 문화적, 윤리적, 미학적 요소에 따라 충분한 양과 질로 스스로의 농업정책을 정하고 분배를 조직하며, 가족과 농촌공동체의 수요에 따라 식량을 교환하고 소비하는 인간의 권리를 옹호했다.



식량주권은 지속가능한 농촌 개발의 관점에서 지역의 생산을 보호하고 조절하는 것을 수반한다; 유기농법을 육성하고; 농촌-도시의 동맹과 공정무역을 촉진하고; 토지의 민영화, 생물연료, GM 작물, 단작 농법과 농화학제품을 거부한다.

식량주권은 식량체계 안에서 여성의 권리를 진전시킬 기회를 제공하는데, 채집과 파종이란 농업 혁신 이후 생물다양성과 유전자원의 보호자이자 수호자라는 여성의 역사적 역할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무에서 빵과 식량을 창조하는" 식량안보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감정적 지지를 제공한다.

"생명공학과 지적재산권은 식량체계 안에서 여성의 인정에 대한 성적 장벽을 만들고 있다."

씨앗은 농촌 여성에게 가장 큰 보물이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를 반영하는 생산주기의 시작과 끝이다. 씨앗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집단의 자산으로 자유롭게 순환한다면, 풍부한 먹을거리를 보장할 것이다. 생명공학과 지적재산권은 여성들이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걸 막음으로써 식량체계 안에서 여성의 인정에 대한 성적 장벽을 만들고 있다.

지역의 토종씨앗은행의 강화와 지속적인 씨앗 나눔뿐만 아니라, 하나의 대담한 제안은 씨앗을 재생산해 온 여성에게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보상이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여성의 역사적 역할을 인정하는 의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린 가족과 우리의 운동 안에서 성별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재생산과 생산이 자율적이지 않다는 사상에 기반한 경제적 체계의 조직적 구조에 의문을 제개하고 재생산과 식량의 경제적, 생산적 성질을 재평가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여성은 농업경제에 자기 스스로의 기여를 평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순응, 차별, 불가시성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을 위한 하나의 과제는 "개인이 정치적이고," "계층에서 성으로" 이동하며, 농촌 여성이 사회적 범주에서 집단적 권리를 지닌 것만이 아니라 개인의 권리를 지닌 경제적 행위자이자 정치적 주체로서 인식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식량주권은 대대적인 농업개혁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토지, 어로구역, 방목로에 대한 토착민의 토지권과 같이 여성의 평등과 보장을 포함하는 대담한 것이 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제안은 농민의 집단적, 공동체적 토지소유의 이해를 수정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공정히 땅을 나누는 걸 보장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식량주권은 무엇을 생산할지 결정할 인간의 권리에 호소한다.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우린 이 권리의 행사에서 권력이 어떻게 나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성 해방에서 구체적 진전은 의사결정이 평등하고, 가족과 공동체, 조직 안에서 내부의 민주주의를 보장한다면 일어날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공정한 의사결정기구를 창출하고 여성의 자부심을 높여 의사결정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돕고, 그에 따라 로비활동에서 그들을 더 나은 교육과 훈련에 접근하도록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우리는 현재 그 운동을 받아들여야 할 기회와 위험에 직면해 있다. 식량 생산자의 역할과 같은 역사적, 사회적 역할의 재평가는 심지어 전통적 가부장제의 성별 분할을 강화할 수 있는 단순한 상징적 인식에 제할될 위험을 무릅쓴다.

또 다른 위험은 여성의 과도한 책임과 돌봄을 포함한 엄청난 일의 부담(생산과 재생산)에 기반한 희생의 자기만족적 담론을 강화하는 것이다. 

"우린 여성 의식의 자각을 활용할 기회를 잃고 있다."

LVC와 같은 운동에서 농촌의 가족단위에서 시작하여 정치적으로 남성 우위의 조직적 경제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여성의 의식과 지도력의 자각을 활용할 기회를 잃고 있다.

조직 스스로 여성의 역사적 기여를 인정하는 것이 남성이 지배하는 관계를 계속해 온 농촌의 일상생활 안에서 널리 확립된 남성 우위의 관계체계에 대한 성평등을 위한 제안이라고 지적했을 때 인식하고 있다(사회 조직과 사회운동, NGO가 토지와 자연자원의 소유권에 대한 자발적 지침을 정한 브라질리아 선언. 3쪽).

식량주권과 페미니즘을 명확히 하는 것이 LVC와 같은 사회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이제 성평등과 여성의 권한강화에 대한 진전을 이루기 위한 관점에서 초점과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강화해야 할 전략은 계속하여 사회적 자산과 생산자원(토지, 물, 도구, 기계, 저장시설)을 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진정한 참여, 자율성, 주권을 촉진시켜야 한다: 경제, 정치, 성폭력에 '안돼'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몸의 토지 주권을 지키는 성문제까지.

구체적인 제안은 식량의 생산과 분배의 모든 단계에서 남성과 여성의 균형잡힌 참여를 촉진하는 것을 포함한다. 문화적인 이유로 여성이 주로 수행하는 활동(씨앗 갈무리)은 과소평가되고, 대조적으로 남서잉 더 많이 참여하는 공공 활동(판매와 같은)은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제안은 여성이 전체 경제와 생산망을 관리하도록 촉진하는 것이다. 시장에 자신의 생산물을 팔기 위한 모든 방법과 함께 개개의 여성이 자신의 자율성을 지지할 수 있도록 돕는 소득이 그것이다. 

식량과 관련된 가사는 모두의 책임이지 여성만 해야 할 일이 아니다. LVC는 사적 식량 준비공간을 정치화하고, 가족과 부부의 삶에 "닫힌 문 뒤의" 논쟁을 결합하며, 농촌 가족의 전통적 조직구조에서 오는 불공정함을 문제삼는 것을 포함시켜야 한다.

"그 운동은 공개적으로 사회와 가족, 사회조직에서 성차별 폐기시켜야 한다."

그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는 공개적으로 사회와 가족, 사회조직에서 성차별을 폐기시키는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농식품 생산에서 남성 또는 성별에 기반한 계급적 특권이 없는 수평적이고 협동적인 고용주-고용자 관계와 같은 평등한 작업과 휴식을 포함하는 실천적 모델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기반은 특정한 행동을 없애고 남성 우위의 관점을 제거하는 방안을 찾으면서 여성의 보이지 않는 운명이 사회적인 것이기에 제거할 수 있는 현상이며 성평등은 호환성과 호혜주의를 포함한다는 이해와 의식이 스르르 스며들며 자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해야만 한다. 

이러한 일상공간에서 농촌의 삶에 대한 반성은 사교모임, 난로 주변, 잔치나 축구경기에서조차 일어날 수 있다. 아이와 청소년 들과 함께 토론회를 여는 것만이 아니라, 평등의 메시지를 촉진하기 위해 지역방송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La Via Campesina의 라틴아메리카 여성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대중 지도자 역할을 수행한 남성 지도자들 사이에 긴장을 유발시키는 여러 식량주권 활동을 했다. 권력의 불균형에 도전하기 위하여 지도적 위치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변화로 인한 갈등을 다룰 훈련과 논의 및 전략을 제공할 수 있는 비농촌 페미니스트 운동과 동맹을 촉진하는 것은 필수적이고, 성평등을 지속가능한 과정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Download: Food Sovereignty and Gender Equality


출처 http://blogs.oxfam.org/en/blogs/feminism-and-food-sovereig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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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Phombeya 씨와 그녀의 씨앗(말라위Malawi).



정부와 개발기관은 시간이 부족한 빈곤한 여성들에게서 세계를 부양할 책임을 옮기고, 대신 그들의 조직을 지원하고 전통지식을 계발해야 한다. 또한 우린 식량안보의 근본적인 문제로서 여성의 돌봄노동과 시간부족을 재고해야 한다. 

Joanna Kerr, ActionAid International 대표

지난 20년 동안 여성의 권리와 지속가능한 개발에 힘써 온 사람으로서, 나는 진심으로 빈곤한 지역사회에 사는 여성농민들의 필요와 역할에 대한 높아진 국제적 관심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개발기관이 이러한 농촌 여성을 우선시하면서 다시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 기아아 기후변화, 불평등이 부딪친다면 NGO와 정부, 여성운동은 시간이 부족한 빈곤한 여성들에게서 세계를 부양할 책임을 옮기고, 그 대신 그들의 조직을 지원하고 전통지식을 계발하며 그들의 권리를 첫째로 놓아야 한다. 

"여성은 전체적으로 우리의 식량 생산과, 지식, 씨앗, 식량체계의 지속가능성에 걸쳐 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남반구의 여러 곳에서 본 바, 여성은 전체적으로 우리의 식량 생산과, 지식, 씨앗, 식량체계의 지속가능성에 걸쳐 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ActionAid와 함께 일하는 42세의 브라질 농민 Deo 씨는 어떻게 여성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려고 노력하는지 나에게 이야기했다:

남자들은 기다릴 줄 모른다. 그들은 심고 나서 수확하길 바란다. 농생태학으로 일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특히 과거의 우리 농법이 땅을 너무 망가뜨려놓았기 때문에 긍정적인 결과를 얻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남자들은 새로운 체계를 포기하고 관행농법으로 돌아간다. 여성들은 화전농법을 그만두고, 생산을 다각화하며, 생계 개선을 위해 약용식물을 재배하고 식물을 심어 덮음으로써 흙을 비옥하게 하는 법을 배우며 변화를 위해 남편과 싸우면서 힘을 합한다.”

분명 Deo 씨와 같은 여성은 식량체계를 지역화하는 데 큰 기여를 한다; 그녀와 같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주요 식량생산자이며 공급자이자 가공업자이다. 사실 지역의 소규모 식량생산자와 공급자들은 우리의 식량과 함께 토양과 씨앗, 문화유산에 주의를 기울이며 대를 이어 혁신을 이어왔다. 특히 농촌 여성들 –농부, 산림의 주민, 부족민 또는 토착민 여성인– 은 식량생산, 씨앗 보존, 가공과 음식 조리에 대한 지식의 보고였다.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이러한 지식과 전통적이고 탄력적이며 효율적인 체계는 산업화되고 기계화된 식량생산과 분배 체계에게 꾸준히 공격을 받았다. 농지에서 등질의 작물에 대한, 슈퍼마켓 매장에서 표준화된 식품에 대한 압박은 이러한 방법에 큰 타격을 입힌 요인이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ActionAid는 미리 설정된 기술적 패키지가 아니라 오히려 지역의 농민들이 구축한 지속가능한 농업인 농생태학의 방식을 지지해왔다. 우리의 농생태학적 계획은 유기농법과 다양성 촉진, 영양분이 풍부한 작물에 초점을 맞추는 한편, 여성농민의 기술과 경험을 인정하고 개발하며 지속가능한 농업에 대한 학문적 지식에 그를 연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이러한 지속가능하고 더욱 기후에 탄력적인 방법 –Deo 씨가 위에 말했듯– 을 개발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야말로 빈곤한 여성에게 가장 제한적인 자원이다. 여성들이 추가로 "돌봄노동" –육아, 요리, 청소, 물긷기, 땔감마련– 을 하길 바라는 사회의 기대는 개발과 여성의 권한강화에 모두 자리 잡고 있다. 

"여성의 무급 돌봄노동과 그들의 부족한 시간은 불만족스러울 만큼 식량안보의 근본적 문제로 취급되지 않는다."

여성의 무급 돌봄노동과 부족한 시간은 블만족스러울 만큼 식량안보의 근본적 문제로 취급되지 않는다. 정책입안자와 대개의 농업 프로그램은 여성을 생산과 생식의 역할을 모두 갖는 식량생산자로 보지 않는다. 개발 프로그램은 보통 이를 분리시켜 결합과 trade-off를 보는 데 실패하고, 여성을 농민으로만 보거나 돌봄/식량 공급자로만 본다.

일반적으로 농업부와 기증자는 화학적 투입재와 새로운 종자를 활용한 다수확을 우선시한다. 녹색혁명식 사고가 만연하다. 그리고 농민운동은 당연히 토지를 놓고 싸우는 한편, 여성의 권리는 추가사항으로 남겨둔다. 심지어 우리 조직의 어떤 동료는 그런 건 간단히 웃어 넘겨버린다. 성별 기준이 매우 깊다. 더 나아가 많은 여성들의 모임은 전면으로 돌봄의 부담을 가져오려 노력하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의 압도적인 요구 또는 생식 권리의 부족이 이 문제를 흐려버린다.

나는 성평등과 지속가능한 농업 모두를 다루기 위한 기술적이고 정치적인 것 이상을 포함하는 상대적으로 쉬운 몇몇 해결책을 주장해왔다.

확실한 수단의 하나는 농촌 여성이 수단을 가지고 조직을 만들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나는 가족농 집단 사이의 연대를 구축하고, 유용한 지식을 나누고, 그들의 자신감을 높이고, 개인과 집단의 권한강화를 이루고, 심지어 공공정책을 변환하여 농촌 여성으로서 그들의 주체성을 강화할 수 있음을 몇 번이고 보았다.

"여성은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고 그걸 어떻게 생산할지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는 효과적인 전략으로 농생태학을 사용하고 있다."

둘째, 기증자와 NGO는 여성이 무엇을 생산하고 그걸 어떻게 생산할지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는 효과적인 전략으로 농생태학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실제로 식량안보, 수입,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들은 다양하고 영양분이 풍부한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영향권에 놓인 지역 –뒤란의 텃밭과 같은– 을 확대하고 있는 한편, 그들이 생산물과 이익에 적은 통제권을 갖는 가족의 농지에 대한 노동력 지원을 줄이고 있다. 

셋째, 정책입안자와 프로그래머는 여성의 무급 시간을 지배하는 돌봄경제를 재고해야 한다. 낙관적으로 이것은 점점 정책 논쟁의 영역이 되고 있다 –가족, 공공기관, NGO 서비스 전달자, 사기업 가운데 누가 돌봄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지. 이러한 과제에 대한 정책의 반응은 복잡하고(곧 가사노동은 단지 임금이 없다) 맥락화가 필요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논쟁은 사회적 인식으로 초점을 맞추고 궁극적으로 이런 돌봄노동을 재분배해야 한다.

한편, 더 현실적인 수준에서 나는 crèches 또는 child centres, 여성들이 함께하는 맷돌질, 종자은행, 기타 여성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적절한 기술들에서 여성의 지도력과 권한이 따름을 보았다. 또한 이러한 여성의 식량생산의 시간 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한 실용적인 노력은 중요한 전략적 혜택을 가질 수 있다. 여성이 "도우미"이고 그들의 노동은 남성의 그것보다 가치가 덜하다는 일반적인 개념이 변환될 것이다. 

여러 사례에서 농생태학의 방법은 여성과 그 가족에서 여성의 경제적 자주성의 중요성을 도왔다 —여성에 의한 통제권과 상승된 수입 사용을 포함하여. 이러한 작업에서 ActionAid의 경험은 많은 여성들이 농촌의 노동조합에서 적극적으로 지도적 역할을 맡고, 시장접근과 새로운 농업정책에 맞서 싸우는 것과 같은 문제를 함께 논의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기증자와 NGO는 수단과 그 자체의 목적으로 여성의 조직화를 지원해야 한다."

농업에 대한 대개의 주류 접근법은 기아증가, 빈곤심화, 토양의 악화, 상당히 증가한 여성의 노동부담을 삐뚤어지게 보았다. 기증자와 NGO는 여성이 자신의 시간과 농법에 대해 통제력을 높이는 전체론적인 접근법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는 수단과 그 자체의 목적으로 여성의조직화를 확실히 지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농생태학으로 여성의 작목반을 지원하는 것은 일부에서 비판하는 것처럼 어떤 시대에 뒤떨어진 낭만적인 전통적 체계도, 페미니즘 유토피아도 아니다. 대신 더 많은 정부와 NGO, 사회운동은 식량과 지속가능성, 인권을 위한 전투의 최전선에 서 있는 많은 여성들과 이러한 상식적 접근법을 포용해야 한다.

식량정의와 여성의 권리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농생태학이다. 

Download: Seeds and Sisterhood



출처 http://blogs.oxfam.org/en/blogs/seeds-and-sister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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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식량농업기구의 발표에 따르면, 1900년 이후 농업에서 작물의 유전적 다양성이 약 75% 감소했다고 한다. 이는 곧 그만큼에 해당하는 토종종자 및 가축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수확 등을 목적으로 하는 신품종이 대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육종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대략 1만 년 전부터인데, 그때부터 자신의 목적에 맞는 식물을 선택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씨를 받아서 조금씩 바꾸어온 것이 농경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서 인간은 문명을 건설하고 지금과 같은 풍요로움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육종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지나치게 풍요로움만 추구하는 지금의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삶은 급속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은 그러한 산업혁명을 지원하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농업에서도 농학이 발달하면서 식물이 성장하는 원리는 무엇이고, 인간이 어떠한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밝혀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금은 유전자를 조절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유전자조작 또는 유전자변형 생물(Genetically Modified Organism)까지 만들었다. 유전자조작 작물이 인간에게 해로운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위해성보다 왜 그러한 작물을 재배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다.

 

과거 1950년대만 해도 한국의 인구 가운데 70%는 농민이었다. 한마디로 농업국가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1960~197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농민의 인구는 점점 감소하기 시작했고, 2011년 말 전체 인구의 약 6%인 296만 명의 농민이 농촌에 남아 계속하여 농사를 짓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농민 인구의 감소는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라 산업화된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농민 인구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2%선이고, 미국과 유럽연합은 1%선이다. 이렇게만 놓고 본다면 산업화는 곧 농민의 감소를 뜻하고, 농촌에서 떠난 농민이 공업과 서비스업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농업 생산방식도 크게 달라진다. 예전 노동력이 풍부하던 시절에는 인력과 축력에 의존하여 이루어지던 농사일이 농기계와 외부에서 가져오는(사실은 사오는) 농자재에 의존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또 작물의 가짓수는 자급을 목적으로 하던 예전에 비해 뚜렷하게 감소하고, 몇몇 소득작물 이외의 것들은 농민들도 대형마트나 시장에서 사다가 먹게 된다. 바로 여기서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 다시 말하여 토종종자의 소멸이라는 현상이 발생한다. 집에서 먹을 것이 아니라 소득을 목적으로 농사지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에 수확량이 적거나 농사짓기가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토종종자는 일차적으로 폐기될 수밖에 없다. 그 자리를 다수확을 목적으로 육종된 좋은(?) 신품종들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농민에 의해서 작물이 더 나은 특성을 갖도록 하는 육종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농민이 가장 훌륭한 육종가”라는 말까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육종과 현대의 육종은 그 방향이 달라졌다. 왜냐하면 농업의 목적이 자급에서 판매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더 잘 팔리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종자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벼라는 작물 하나만 예를 들자면, 예전의 벼는 키가 크고 까락이 달린 종자가 많았다. 그것은 과거에는 볏짚을 활용하는 데가 많았기 때문에 이삭이 조금 덜 달리더라도 키가 클수록 유리했고, 또한 새 피해 등을 방지하기 위하여 아무래도 새들이 먹기 까다롭도록 까락이 달린 것을 선호하여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벼는 최대한 키를 낮추고, 더 많은 이삭이 달리며, 까락이 없는 방향으로 육종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예전과 지금은 작물에 원하는 바가 달라졌고, 그로 인하여 육종의 방향 자체가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그러면 토종종자는 왜 중요한가? 우선순위를 매길 수는 없지만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유전적 다양성 때문이다. 1800년대 중반에 있었던 아일랜드의 대기근 사건을 다들 알 것이다. 이는 감자를 주식으로 하던 아일랜드에 감자마름병이 돌면서 800만의 인구 가운데 200만이 굶어죽고 200만 명은 외국으로 이주한 사건이다. 이 당시 감자마름병이 확산된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한 가지 품종의 감자만 심었다는 데에 있다. 곧 유전적 다양성이 획일화되어 있어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다양한 토종감자가 존재하여 감자마름병에도 강한 품종이 있었다면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날이 갈수록 기후변화가 심해지고 있다. 기후변화에 맞서 그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유전자를 찾는 일도 다양한 토종종자가 살아 있으면 훨씬 수월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농민의 농부권이란 측면을 생각할 수 있다. 현재 농민들은 종자회사에서 종자를 사다가 심는다. 그 종자에 대한 권리는 종자회사에 귀속되어 있는 것으로서 농민들이 함부로 침해했다가는 손해배상에 휘말릴 수 있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것은 몬산토 등의 다국적 종자회사의 사건을 들 수 있다. 캐나다의 한 농부가 유채를 재배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그는 해마다 자신의 종자를 받아서 다시 사용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인가 인근의 몬산토에서 개발한 유채 종자의 유전자가 벌과 나비에 의해 자신의 유채에 전달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몬산토에 의해 고소를 당했고, 법원은 몬산토의 손을 들어주었다. 종자는 농민이 수천 년 동안 농사지어오면서 대를 이어 물려오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를 지닌 종자에서 몇몇 특성을 이용해 새로운 종자를 만들고, 그 종자에 대한 판매권을 독점하는 일이 산업화된 농업에서 일어나고 있다. 종자를 육종하고 이어가는 일은 이제 개인의 차원을 넘어 기업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고, 국가는 이를 종자산업으로 보호하고 육성한다. 그러한 과정에서는 농민의 권리, 곧 농부권이란 개념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개인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종자를 받아서 사용하거나 남에게 전하는 행위는 용납이 되지만, 캐나다의 퍼시 슈마이저Percy Schmeiser 씨의 사례와 같이 기업에서 언제 어떻게 제재를 가할지 모를 일이다.

 

마지막으로 문화의 보존과 계승이란 측면을 생각할 수 있다. 여러 가지 토종종자를 가지고 농사짓는 집에서는 하다못해 요리만 해도 예전의 맛을 살린 조리법 등을 활용할 것이다. 농사짓는 방법도 새로운 품종을 가지고 농사짓는 것과 달리 예전의 방식을 잘 살리거나 응용하여 농사지을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농사를 짓기 위하여 필요한 농기구들이며 농사력 등도 고유한 방식을 유지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위가 바로 문화이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어 나오는 똑같은 가방을 들고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문화가 다양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자기만의 개성과 취향을 살려 손바느질로 옷과 가방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문화가 다양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토종종자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농촌의 농경문화와 관련하여 그 다양성과 전통을 지키는 방법 가운데 토종종자를 보존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토종종자는 케케묵은 낡은 것,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 폐기해야 하는 것으로 치부해 버려서는 안 된다. 과거가 없는 미래는 없으며, 뿌리가 없는 열매는 없다. 토종종자는 과거이자 미래이며, 뿌리이자 열매이다. 그래서 토종종자를 잘 보존하는 일은 우리의 과거를 보존하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잘 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 토종종자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5년의 일이었다. 농사짓겠다며 천둥벌거숭이처럼 덤벼들었다가 시간이 지나며 전통농업으로 자연스레 관심이 이동했고, 그때 마침 안철환 선생님이 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활동을 권유하여 함께 전국을 다니며 전통농업과 관련한 취재를 다녔다. 하지만 전통농업은 과거의 기억 속의 일로만 남았을 뿐 그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하나 남은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토종종자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 토종종자로는 1인자이신 안완식 박사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2008년부터는 함께 강화도를 시작으로 2012년 여주군까지 해마다 1개 군을 돌며 토종종자를 수집하는 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토종종자와 관련하여 안완식 박사님과 안철환 선생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두 분께 이곳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돈도 안 되는데 공부한다며 허구한 날 집을 비우고 돌아다니는 나를 이해해주고 존중해 마지않는 아내 최옥금과 군식구 연풍이에게 사랑한다고, 앞으로도 잘 봐달라고 전하며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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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이란 무엇인가?


현재 세계의 인구는 60억, 올해 안으로 70억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2050년에는 90억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인구를 먹여 살릴 것인가? 핸드폰, 자동차 팔아서? 중요한 것은 먹을거리와 그걸 생산하는 농업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지금처럼 발전·개발의 길로 계속 나아갈 것이냐, 아니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부르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룰 것이냐? 주류는 전자를 전제로 모든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솔직히 난 후자 -아웃사이더, 아나키즘, 마을 공동체 등- 에 더 끌린다.

아무튼 농업은 흙에 씨앗을 심어 작물을 길러 먹을거리를 거두는 구조이다. 그런데 현대 농업은 어떠한 모습인가?

독일에 하버라는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기체 상태의 질소와 수소를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만드는 연구에 착수하여, 1908년 낮은 온도에서도 높은 압력을 가해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한다. 그리고 보슈라는 사람과 함께 이를 실용화하여 1913년 ‘하버-보슈법’이라는 대량생산 공정을 개발한다. 이로써 인류는 질소 비료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방법은 폭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질산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길도 열어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배경이 된다. 사실 주목적은 폭탄을 만드는 데 있었다. 이후 하버는 화학무기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그를 반대한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독가스를 만들어 살포한다. 그의 별명은 ‘독가스의 아버지’다. 이런 사람에게 노벨재단은 1918년 노벨화학상을 수여한다. 노벨상이 어떠한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볼 문제다.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것인데 질소(N), 인(P), 칼륨(K)이란 식물의 3요소가 있다. 사실 이것 말고도 수많은 미량원소들을 먹고 사는 게 식물이지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를 실험으로 밝혀낸 것이다. 질소는 식물의 몸을 만드는 역할, 인은 탄소동화·호흡·당분과 관련된 활동, 칼륨은 증산과 광합성에 영향을 준다. 그중에 생산량과 직결되는 것이 바로 질소이다. 현재 농민들은 질소비료를 지나치게 많이 준다. 크기를 크게, 수량을 많게 만드는 것이 바로 ‘돈’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질소 비료를 많이 주면 작물은 잘 큰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잘 먹어 키도 덩치도 크지만 힘이 없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영양이다.

그런데 옛날 작물들은 키가 큰 편이었다. 질소 비료가 값싸게 나와도 조금만 줬다하면 너무 자라서 쓰러져 버리기에 손실이 컸다. 그래서 육종학자들은 비료를 많이 주어도 쓰러지지 않고 수확량이 많아지는 작물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 선구자가 바로 노먼 볼로그이다. 그가 1944~1960년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으며 육종한 밀 종자가 세계의 녹색혁명 바람을 일으키고, 그는 1970년 개발도상국의 식량문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또 노벨상이다.

아래 자료를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보라색 실선이 바로 하버-보슈법으로 만든 질소 비료의 양이다. 1960년대부터 비약적으로 비료 생산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바로 육종법과 만나면서 나온 시너지 효과이다. 그럼 맨 앞의 인구증가 그래프를 다시 돌아보자. 우연히도 인구증가와 질소비료, 녹색혁명이 함께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 덕에 이 세상에 태어난 잉여일지도 모른다.



현대 농업은 이렇듯 화학비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화학비료를 많이 주어 작물의 몸만 키울 경우, 그것을 먹고자 병해충이 많이 달라붙게 된다. 살찐 사람에게 이런저런 성인병이 잘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 그걸 방제하고자 농약을 만들어서 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화학비료에 기반하는 현대 농업은 어쩔 수 없이 농약에 의존하게 되는 구조를 갖는다.

또한 산업화로 인해 감소한 농촌 인구를 빼먹을 수 없다. 화학비료와 녹색혁명이란 위대한 과학기술은 더 적은 수의 사람이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럼 남아도는 일손은 어디로 가는가? 바로 도시로 몰려든다. 달동네, 도시빈민이 탄생한 배경에는 농촌 인구의 감소가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인구의 80%가 농민이었던 농경 국가에서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 개발로 산업화·도시화를 거쳐 현재는 300만 명 정도, 곧 6%의 농민이 농촌에서 아직도 우리의 먹을거리를 책임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급률이다. 우리나라의 자급률은 쌀이 남아돈다고 식량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착시현상을 벗어날 몇 가지 통계를 보자. 전체 식량 소비량 가운데 국내에서 생산된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가리키는 식량자급률은 1970년 81%에서, 90년에 43%, 현재는 2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수준이다. 참고로 일본은 40% 정도이다. 그나마 쌀이 100% 넘는 자급률이기에 이 정도 수준이지 밀 0.5%, 옥수수 4.9%, 콩류 29.5%로 그 현실은 참담할 정도다. 참고로 1970년까지 콩의 자급률은 86%였다. 이제 알겠는가? 산업화·도시화→농민 인구 감소→자급률 하락으로 이어진다. 이제 농민도 산업 인력의 하나로 돈이 되는 작물만 주로 재배하고, 자급을 위한 먹을거리에는 별 관심이 없다. 농사지어 내다팔고 그 돈으로 마트에서 다른 농산물을 사다 먹는 구조랄까.

아무튼 우리나라의 자급률이 떨어진 데에는 가축 사료의 수입도 한몫하고 있다. 모두 알다시피 가축은 사람보다 더 많은 곡물을 먹는다. 연간 곡물 소비량이 2000만t 정도인데, 그중에 47%가 가축의 사료이고 사람이 먹는 것은 29%일 뿐이다. 육식주의는 세계 식량의 불균형과 불평등을 불러온다는 사실. 우리는 육식도 채식도 아닌 곡식주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민이, 농사짓는 사람이 늘어나야 한다.

얘기 잠시 샛길로 샜다. 농촌 인구의 감소는 일손이 줄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 그 공백은 무엇이 메우는가? 바로 농기계다. 허나 우리나라의 지형으로 인해 거대한 농기계는 쓸모없는 돈덩어리일 뿐이다. 농기계는 미국처럼 드넓은 평원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가장 효율적이고 잘 어울리는 도구이다. 우리와 같은 소농의 나라에서 농기계는 돈 먹는 애물단지일 뿐이다.

또한 1980년대 백색혁명이 일어나면서 비닐을 엄청나게 사용하고 있다. 비닐은 김을 매야 하는 일손을 덜어주는 한편, 지온을 상승시켜 작물을 크게 빨리 자라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허나 앞서 말했듯이 그렇게 자란 작물은 고유한 힘이 없다. 그저 크기만 클 뿐이다.

이렇게 현대 농업은 화학비료, 농약, 육종 씨앗, 농기계, 비닐 등으로 대표된다. 이 모든 것(육종 씨앗은 별도로)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석유라는 자원에서 오는 것들이다. 그래서 현대 농업은 석유 농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석유와 관련하여 피크오일이란 소리가 나돌고 있다. 생산량이 최고점을 쳤다는 말인데, 이제 생산량이 서서히 감소하는 일만 남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맞다. 석유 값이 오른다. 석유 값이 오르면, 그에 기반하고 있는 우리의 현재 문명의 위기가 닥친다.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오를 것이다. 특히 석유에 엄청나게 의존하고 있는 현대 농업은 제대로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식량가격 상승에 따라 잇달아 일어난 혁명은 이제 세계 혁명으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물론 잘 사는 선진국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나라는 개발도상국이고, 그 개발도상국에서 빈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도 팍팍해지리라는 것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자, 이제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기존의 가치를 준수하며 그 뒤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미지의 영역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인가? 생태농업이 그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에는 쿠바라는 나라가 있다. 쿠바는 소련이 살아 있을 때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지해 대규모 단작 농업으로 생산한 사탕수수를 수출하고, 석유와 식량을 수입해서 먹는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자급율은 40%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소련이 붕괴된다. 이후 1990년대 초반 쿠바는 심각한 경제난과 에너지난 등에 시달리고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그런데 이런 쿠바가 선택한 길이 바로 ‘생태농업’이다. 가까운 이웃 북한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지만, 쿠바는 생태농업을 선택해 자급율 100%에 도전하여 아직 단 1명의 아사자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북한과는 그 자연조건이 다르기에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상징적이지 않은가?

생태농업이란 말 그대로 화학비료와 농약 같은 자재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 생태계와 그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효과(천적, 작물의 특성과 성질, 거름) 등을 활용하는 농업을 말한다. 물론 생산량은 현대농업에 비하여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생태농업이야말로 에너지를 적게 쓰고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방법이다. 조금 덜 먹고 조금 덜 쓰며, 물질로 채우는 행복이 아닌 진정한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삶의 자세로 사는 방법이라 한다면 너무 거창할까? 그리고 생태농업은 현대농업에서 쓰는 자재를 활용하지 않는 만큼 전통농업에서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전통의 재발견과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에서 행하고 있는 생태농업의 방법은 이렇다.


1) 케냐의 농법


2) 과테말라의 농법 - 벨벳콩이란 덩굴이 지는 콩이 있다. 농민들이 옛날부터 밭에 심어오던 것인데, 농학자들은 그 효용도 모르고 화학비료와 하이브리드 종자를 쓰는 농법을 보급했다. 그러면서 이 벨벳콩을 함께 심으면 수확량이 감소한다고 못 심게까지 했다. 하지만 콩은 훌륭한 질소고정 식물로서 거름의 효과와 함께 열대우림인 이곳 과테말라에서는 토양 침식을 막아주는 역할까지 한다.

3) 잠비아의 농법 - ‘무군가’라는 아프리카 특유의 아카시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특이하게도 건기에 잎이 나고 우기에는 잎을 떨군다. 그래서 이곳의 농민들은 이 나무를 심고 그 근처에서 농사를 짓는 방법을 써 왔다. 아카시나무가 지하수를 확보해주며, 콩과인 아카시나무가 질소를 고정하는 역할까지 한다. 거기에 떨어진 잎도 훌륭한 덮개이자 거름이자 사료가 된다. 이걸 발견한 세계 혼농임업센터의 학자가 현재 아프리카 곳곳에 이 농법을 보급하고 있다.

4) 온두라스의 농법 - 숲속에서 농사를 짓는 렌카족이 있다. 그들은 숲에 불을 내는 화전농업이 아니라 나무를 관리하며 그 사이에 농사를 지어 살고 있다. 가지치기로 얻은 부산물로 흙을 덮어 갈아엎지 않아도 좋은 흙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한다.

5) 우리나라의 농법 - 다르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가족이 중심이 된 소농의 농사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그마한 자투리도 허투루 방치하지 않는 소농의 농사, 다양한 작물의 사이짓기와 돌려짓기를 활용, 계절과 기후에 맞춘 농사, 거름을 만들기 위한 노력, 콩과 작물을 활용 등등을 살펴보면 좋다.

현대농업은 최소한의 투입으로 최대한의 생산을 이루려는 자연 수탈 농업이다. 그래서 현대 농업은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지력의 고갈과 토양 침식, 병해충 만연, 휘발성 시장가격에 따른 변동, 농가부채 등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하여 생태농업은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지속가능한 농업이다. 하지만 생산성이 떨어지기에 지금의 농민 숫자로는 감당할 수 없다. 우리 모두 농부가 되자! 자신의 먹을거리를 가능하면 내 손으로 지어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농부를 돕는 지름길일 수 있다. 우리는 농부와 경쟁하지 않는다. 농사를 짓는 순간 농부는 우리를 믿고, 우리는 농부를 믿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공존·공생하는 관계가 된다.

한때 유기농이 엄청나게 뜬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이게 돈이 된다는 소문에 이제는 몬산토나 카길과 같은 다국적 기업이 대규모 유기농 단지를 조성해 유기농 시장을 휘어잡고 있다. 유기농은 답이 아니다. 농약을 치더라도 지역의 먹을거리가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얼굴을 아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씨앗을 돈 주고 산다고?


현재 종자 시장은 다국적 기업이 판을 치고 있다. 그들은 막대한 자금력으로 씨앗을 만들어 사고팔고 있다. 하지만 가장 훌륭한 육종가는 ‘농부’다. 농부가 대대손손 거쳐서 선별하고 심어온 토종 종자가 미래의 희망을 안고 있다. 지구는 점점 기후변화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것이 직결되는 곳이 바로 농업이다. 이에 대응하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실험실에서 노력(?)하고 있다. 그들의 대안은 바로 유전자조작으로 대표되는 생명공학이다. 우리는 과학자Scientist와 기술자Engineer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과학자는 사회와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진리와 본질을 탐구하는 사람이고, 기술자는 자본과 결탁된 그 무엇이다.

노만 볼로그의 시대만 해도 육종이라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방법으로 새로운 씨앗을 만들어냈다. 허나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자연은 배제한 채 씨앗에 장난을 치고 있다. 이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현재 아무도 모른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일부 실험에서 그 위험성이 드러나 사람들이 경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90억으로 불어날 인류에게 은혜로운 일이 될지 끔찍한 일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사실.

세계 종자 시장의 규모는 79조 원이다. 이 어마어마한 사업을 몬산토, 카길, 신젠타와 같은 다국적 기업에서 주도하고 있다. 그들의 현재 주력 사업은 유전자조작 작물이다. 현재 일부 개발도상국에서는 그들의 씨앗+비료+농약+사용법 교육이란 패키지 상품이 팔리고 있다. 우리의 종자회사들도 모두 그러한 다국적 기업의 소유다. IMF 때 김대중 정권은 시장을 개방하며 우리의 종자산업을 모두 외국에 팔아넘겼다. 외제, 국산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호하고 육성해야 할 중요한 기간산업을 민영화한 것이 바로 문제. 이제 농민들은 그들에게 꼬박꼬박 해마다 돈을 갖다 바쳐야 한다. 상품성 좋은 고추씨는 1000개 한 봉지에 10만 원에 육박한다.

원래 씨앗은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것이었다. 집에서 자신들이 먹을거리를 해마다 손수 씨를 받아 심고, 그중에서 좋은 놈으로다가 다시 씨를 받고, 이듬해 다시 심는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이 땅의 자연조건에 최적화되면서 육종이 되었다. 그래서 ‘농부가 최고의 육종가’인 것이다. 그러던 것이 지금 농부는 ‘최고의 소비자’ 신세로 전락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바로 농사의 산업화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은가. 물론 돈은 가장 효과적인 교환수단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돈이란 가치로 환원이 되는 데 문제가 있다. 특히나 생명과 관련된 것을 돈으로 따진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 당신이 생명은 얼마인가? 당신은 한 달에 얼마나 자신의 생명력을 자본에 갖다 바치고 그 대가를 얻는가? 그 대가로 얼마를 받는가? 그걸 돈으로 바꿀 수 있는가? 이런 질문과 같은 맥락이다.

토종 종자가 가진 중요성은 다양성의 보존이란 측면에 있다. 다양성, 우리는 다양성이 없는 사회다. 다양하면 어지럽다며 하나로 통일하라고 강요하는 사회다. 하지만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개의 순종을 생각하면 쉽다. 훌륭한 혈통의 애견 한 마리를 만들고자 같은 혈통끼리 교배시켜 얼마나 많은 삐꾸들이 탄생하고 죽임을 당하는지 알면 놀라 자빠질 정도다. 순수한 혈통이란 것은 필연적으로 열등함을 탄생시킨다. 유전적으로 다양하게 섞인 것일수록 강하고 예쁘고 어떠한 조건에서도 살아남는다. 바로 토종 종자가 그렇다. 그것이 가진 다양성(잡박함)이 생명력 가득한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토종이 다양한 지역이야말로 생물종다양성이 풍부한 곳이라는 사실이 1900년대 초반 러시아의 학자 바빌로프에 의해 밝혀졌다. 그리고 또한 토종이 다양한 지역이 문화도 다양하다는 것도 밝혀졌다. 곧 작물다양성→생물종다양성→문화다양성→건강한 사회라는 도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다양한 것이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구조가 바로 생태계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밝힌 사실은 뉴튼의 말처럼 어린아이가 바닷가에서 발견한 몇 개의 조개껍데기일 뿐이다. 요즘 과학계의 이슈는 복잡계이다. 모든 것이 서로 복잡다단하게 얽힌 구조를 인정하자. 그 구조를 인정하고 그 구조에 기대어 농사를 짓는 것이 바로 생태농업이다. 인간이 만든 사회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 다 제자리, 제 역할이 있는 법. 그걸 찾아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생태농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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