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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농법과농민.z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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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농법과농민.z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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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농법과농민.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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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다음 블로그에는 10MB를 넘는 파일은 올리지 못하여 놔두고 있다가, 분할압축이란 방식을 이용해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 번역본 전체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3개의 파일 전체를 모두 내려받은 후 압축을 풀면 될 겁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읽어보시고 참고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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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을 지은 일본인 농학자 다카하시 노보루는 '조선의 2년 3작식 농법'을 조선의 기후와 풍토에 맞게 개발한 놀라운 농법이라며 칭찬한 바 있다. 2년 3작이란 말 그대로 2년 동안 3번의 농사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 포함되는 것이 바로 밀, 보리 같은 맥류에 이어 콩과작물을 뒷그루나 사이갈이로 재배하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어제는 미국의 농민이 콩밭에 옥수수를 섞어짓기하는 모습에 이어, 프랑스의 농민이 밀밭에 대두를 사이짓기하는 모습까지 보았다. 이제 한국에서는 거의 사라진 농법이 아니던가? 아무튼 이에 이를 기록하려 여기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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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실태조사/ 순천 황귀연 씨/ 중오정 논 440평의 논벼 재배법



앞그루 쌀보리는 음력 5월 5일에 베어 거두고, 이튿날 쟁기질한다. 

쟁기질은 자기가 한나절 걸려 하는데, 쟁기 말고도 삽 1개와 쇠스랑 1개를 쓴다. 쟁기질한 뒤 써린다.

쟁기질 방법 : 두그루짓기를 하는 땅일 경우에는 ‘바타갈이batagari’를 한다. 바타갈이는 다른 말로 ‘타리갈이tarigari’ ‘익갈이ikkari’라고도 한다. 아래 그림처럼 보리의 두둑을 부순다. 






한그루짓기 하는 땅을 쟁기질할 때는 아래와 같은 4가지 방법이 있다.

(1) 두둑갈이 ― 두둑 지으며 갈기.



(2) 게갈이kekari ― 째고 엎기. 



(3) 게갈이 ― 세거웃짓기  

(4) 네거웃짓기(평갈이)



거름내기 : 음력 4월 15일. 자기 혼자서 20지게를 나른다. 하루에 12번 나른다. 곧 나르는 데 약 이틀 걸린다.

땅고르기 : 쟁기질하고 이삼 일 뒤, 물을 담고서 써레를 끌어 삶는다. 자신과 소가 3시간. 

두엄 뿌리기 : 땅고르기 전에 자기와 놉이 1시간 반에 뿌린다.

모내기철 : 음력 5월 13일쯤(자신은 음력 5월 8일부터 5월 20일쯤까지 끝냄).

모찌기 : 산배미논의 못자리에서 8지게를 나른다. 모를 찌는 데 여자 2명(아내와 제수)이 아침 먹기 전에 4시간 걸리고, 남자 2명(자신과 동생)이 나르는 데 2시간 반 걸린다. 맏아들과 둘째(16세, 12세)가 못줄을 띄고, 모내기 일꾼 1명이 붙어서 오후 5시에 모내기를 끝낸다(점심 때 50분 쉼). 

그루 수 : 18×24㎝(6×8寸)=64그루, 모는 6~7포기.

화학비료(밑거름) : 개자리 직후에 황산암모늄(硫安) 1/3가마니를 자기가 20분 정도에 다 뿌린다.

논두렁치기는 하지 않으나, 낫으로 풀을 베어서 정리한다. 모내는 날 아침에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애벌매기 : 모내고 15일째 손으로, 자기 혼자서 한나절에 끝낸다.

두벌매기 : 5일 뒤, 자신과 놉 남자 1명이 오전에 3시간, 오후에 3시간 한다.

세벌매기 : 1주일 뒤, 자기 혼자서 손으로, 하루 반 걸린다(14시간).

네벌매기 : 1주일 뒤, 자신이 손으로(13시간).

다섯벌매기 : 10일 뒤, 자신이 손으로(13시간).

음력 8월 5일 피사리(이삭이 누렇게 익기 시작), 자기 혼자서 2번 한다. 3시간(피는 2단, 지름 15~18㎝<5~6寸>)

수확기 : 음력 8월 23일(음력 8월 25일~음력 9월 10일) 자신과 놉이 아침을 먹고 오후 4시까지 베기를 끝낸다. 땅에다 말리고 3일 뒤 작은 단으로 묶는다. 단 묶기는 아내와 제수가 이틀에, 한나절 걸려 단을 묶어 쌓는다.


쌓는 방법 : 이 마을 ― 




자신과 맏아들 둘이서 지게로 날라다 쌓기를 마친다. 

1지게는 15단(1단 3.75㎏<1貫>쯤). 지난해는 1단에서 1되 5홉의 벼를 얻었다. 마당에 가지고 와서 쌓는다. 이것을 ‘비늘가리’라고 한다. 그 뜻은 비늘처럼 쌓는다는 뜻인데, 위의 오른쪽 그림과 같다. 보통은 ‘비늘가리’를 줄여서 ‘비늘’이라고 한다. 

마당질 : 3일 뒤 벼를 떨고 고른다. 

노동력 ― 아내·어머니·동생·제수·둘째 동생·둘째 제수 6명이 저녁 조금 이르게 떨기를 마치고, 키 1개로 날려고르기를 하여 자신과 남자 놉 둘이서 3시간 정도에 끝낸다. 

벼 3섬 7말 5되, 쭉정이 3말. 

방아찧기 : 삯을 내고 발동기로 한다. 값은 벼 1섬을 찧는 데 흰쌀 1되 2홉 5작이다. 

곧 흰쌀 4말 5되가 나오는 양에서 1되 2홉 5작을 상대에게 낸다. 

왕겨 3말, 쌀겨 1말 정도

벼 1섬 ― 16원, 왕겨 1가마니(5말들이) ― 4~6전(거름을 만듦), 쌀겨 1말 ― 10전(소먹이), 흰쌀 1말 ― 3원 20전.

주식 : 하루에 흰쌀 5되다. 섞어 먹는 경우 흰쌀 2되 5홉, 보리쌀 2되 5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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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찌기: 모를 내기 위해 못자리의 모판에서 모를 뽑는 일.

줄모: 일제강점기에만 해도 줄모는 일본식이라고 하여 잘 쓰지 않고, 원래는 못줄을 쓰지 않고 막모를 냈다. 그러다 총독부에서 강제로 줄모를 보급하고 제초기를 쓸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점차 바뀌었다. <식민지 조선의 근대농법과 재래농법>을 참조하라.

유안(황산암모늄): 질소 비료의 하나다. 질소 함유량이 21.2%인 생리적 산성 비료다. 공장에서 나오는 버리는 황산과 암모니아 따위를 처리하여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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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풍덕리豊德里 


이 마을은 61호. 농업 47호(자작 10호, 자소작 10호, 소작 27호), 날품 13호. 따로 담배 가게 1호가 있다.

우물 네 군데. 


순천읍에서 약 1090m(10), 순천역까지 1090m(10)


이동 노동력 : 모내기철 이 마을에 오는 다른 마을 사람은 5명, 20일 정도. 곧 총인원 100명 정도 된다. 

소는 11마리 정도.


농사짓는 규모 : 대농은 논 37~40마지기(2.7) 밭 5마지기(17). 소농은 논 2~3마지기 밭은 없음. 아예 농사짓지 않는 집도 10~15호 있다.




조사 농가 ― 황귀연黃貴連


식구 12명 : 아버지(61), 어머니(56), 본인(32), 아내(32), 맏아들(9), 둘째아들(4), 맏딸(1), 동생(25, 일본에 있음), 제수(22), 둘째 동생(19, 역무원), 둘째 제수(19), 셋째 동생(16). 농사짓는 사람 6명.


농사땅



1. 집앞논, 집터 옆, 800평, 2배미, 소작료 6/10 볏짚은 소작인 것.

수확량 : 1937년 벼 10섬, 볏짚, 품종 은방주銀坊主. 1938년 벼 6섬.

모내기 그루 수 : 18×21㎝(6×7寸)=86그루

뒷갈이 : 쌀보리 2섬(심는 양 1말 7되 5홉)

왕골 1평(소의 고삐 21.6m<12尋>를 만듦), 자운영 5평(심는 양 5홉, 종자값은 1섬에 85원)

보리 밑거름 : 과인산석회 1가마니, 두엄 40지게

웃거름 : 사람 똥오줌 60장군


2. 간신량カンシンリャン, 654m(6町), 6마지기(1마지기 200평), 소작, 1배미.

한머리닥ハンモリタク―지게 다리 : 지게에 한가득 싣고 쉬지 않고서 갈 수 있는 거리.

축축한 땅이라 뒷갈이하지 않는다. 그루 사이 21×24㎝(7×8寸)=64그루

못자리 150평, 심는 양 3.5말(그 가운데 변경弁慶 2말, 은방주 1말 5되)


3. 오정평オ―チョンピョン, 654m(6町), 500평, 자작, 1배미, 4년 전 430원에 구입.

벼 뒷갈이 보리 400평·자운영 100평.


4. 중오정チュンオ―チョン, 1308m(12町), 440평, 자작, 1배미 

논벼 은방주, 21×24㎝(7×8寸)=64그루

보리는 쌀보리.


5. 하오정ハオチョン, 1962m(18町), 400평, 자작, 1배미, 품종 은방주, 21×24㎝(7×8寸). 

쌀보리 뒷갈이.


6. 산배미サンペニイ, 1962m(18町), 1200평, 소작, 1배미

앞갈이 벼, 뒷갈이 보리 500평, 못자리 300평(볍씨 5되).


7. 샛들セッツル, 1962m(18町), 600평, 소작

벼 한그루짓기, 축축한 땅, 물잡이논.



8. 남지정ナムヂヂョン 앞밭, 1308m(12町), 소작, 3마지기, 280평, 정조定租 벼 1섬.

쌀보리 ― 콩(그루갈이) 140평 

쌀보리 ― 목화(사이짓기) 140평. 280평에 배추·무를 조금 짓는다.

쌀보리 ― 조, 들깨, 팥, 고추, 마늘, 녹두

작부방식 

쌀보리·콩 ― 쌀보리·목화, 쌀보리·목화 ― 쌀보리·콩을 번갈아 가며 한다.


남새밭 : 집터 앞 약 40평, 소작료 벼 2말 5되

20일 무 10평, 가을배추 3평

봄배추 28평, 씨받이 무 2평 ― 가을무 30평

상추, 시금치 7평

산림 : 3210평(1町7畝), 4㎞(1里) 남짓

작은 소나무 1.5m(5尺), 대나무 숲 없음.

소 1마리, 다른 집짐승 없음.

부업으로 무명, 집에서 쓰려고 한 해 5필을 짠다. 1필은 6m(20尺)다.

노동력 : 머슴, 철머슴 없음.

한 해 놉 150명을 고용(모내기철 50~60일, 김매기철 50일, 벼베기철 3일).

모내기 품삯 : 남자 20명×세 끼+막걸리 20전+담배 5전

세 끼 ― 5주발로 1되 5홉, 흰쌀 1되 32전(2주발은 놉이 집에 가지고 감). 

그러므로 남자의 품삯은 하루 93전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여자 30명×세 끼(5주발)…78전 정도 된다.

김매기철 품삯 : 남자 20명×한 끼(2주발)+10전+담배 5전+술 정하지 않음

여자는 김매기하지 않는다.

벼베기 품삯 : 남녀 모두 모내기철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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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방주: 1922년 익산군 오산면의 농가가 토야마현富山縣에서 원종을 가져와 기르기 시작했다. 까락이 없고 중간 크기여서 쓰러짐이 적다. 병에 강하고 척박한 곳에서 잘 자란다. 전북 산간 지역은 올씨를 심어서 3주 빨리 익고, 수확량은 85~90%였다고 한다.

모내기 그루 수: 1평에 18×21㎝ 사이로 86그루를 심는다는 말이다.

지게: 장한 남자는 한 지게에 50~70㎏을 싣는다.

정조: 소작 계약 때 미리 일정한 수량을 정하고 수확한 뒤 분배하는 소작관행. 일제시대 소작료는 보통 40~60%였는데, 세금만은 지주와 소작인 혼자서 또는 둘이 함께 부담했다. 소작인은 생산물을 자유롭게 거두어들이고 가공할 수 있었지만 소작료는 지주가 지정한 장소까지 기일 안에 날라다 놔야 했다.

머슴: 고용주의 집에서 살며 새경(私耕)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농업 임금 노동자. 고공雇工·고용雇傭·용인傭人 들로도 불렸다. 머슴은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 많아졌다. 그를 통해 노비들도 머슴으로 많이 바뀌고, 호칭도 머슴으로 굳어졌다. 머슴은 고용 기간에 따라 일 년 단위로 고용되던 머슴, 달 또는 계절 단위로 고용되던 달머슴(月傭)과 반머슴(季節傭)이 있었다. 고지雇只 머슴이라는 특수한 형태도 있었는데, 일정한 토지나 집, 또는 식량을 빌리고 고용주를 위하여 일정 기일 노동을 하거나 일정 작업량을 해주었다. 또 노동력과 농사 경험에 따라 상머슴과 중머슴, 그리고 꼴담살이, 애기머슴 따위가 있었다.

머슴은 농사일 말고도 가사 노동에도 부려졌다. 하루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잡으면 머슴은 한 해 평균 225일, 고용주와 그 식구는 139일을 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농번기에는 아침부터 잠자기 전까지 일했기에 ‘머슴밥’이라는 엄청난 양의 밥을 하루에 대여섯 번 먹었다. 농한기에는 한가한 편이지만 거름과 땔나무를 하고 가마니를 치고 새끼를 꼬아야 했다. 

머슴의 새경은 보통 현물로 줬는데 대개 벼 1섬에서 1섬 반이었고, 1930년대 초반에는 돈으로 160원 안팎부터 30~40원까지 받았다. 농번기에만 고용되는 경우는 약 3개월에 60~70원을 받고 옷과 밥은 자기가 해결하기도 했다. 

이러한 머슴은 일제시대에 들어와 토지 약탈과 인구 증가로 더욱 늘어났다. 1930년 통계로 보면 고용주 44,2908명에게 머슴 53,7432명이 고용되었다. 머슴은 1940년쯤까지 계속 늘어나다가 그 이후 징병·지원병으로 노동력이 차출되고, 공장이 세워지고 만주로 이주함에 따라 특히 서북 지방의 경우 머슴을 고용하기 어려워졌다. 

놉: 밥과 술을 먹이고 날삯을 주어 일을 시키는 일꾼. 식구의 노동력이나 품앗이로도 일을 다 할 수 없을 때 품을 사게 된다. 품을 파는 사람들은 주로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며, 그 가운데서도 자기 농사땅이 적은 영세농이나 소농들이다. ‘날품팔이’는 계약에 의한 완전한 임금노동자를 말하는 데 반하여, 놉은 보수를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얼굴 보고 사는 가까운 집단 안의 사람들이 서로 협동한다는 생각으로 주고받는 노동력이다. 그래서 놉을 산 집에서는 보수 말고도 술·담배·참 따위를 공짜로 주고, 보수도 꼭 돈 말고 필요한 현물로 주기도 하며 지급 시기도 일정하지 않다. 특히 보수를 마음대로 정한 뒤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정한 범위 안에서 고용자가 주는 대로 받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놉은 품앗이 같은 협동 노동 형태에서 머슴 같은 임금노동의 형태로 바뀌는 중간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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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조는 척박한 제주의 농사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라서 제주민의 중요한 곡식으로 재배가 되었다.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는 오메기떡이니 오메기술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조를 원료로 만드는 것으로서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조와 관련된 용어만 해도 엄청나게 발달해 있다는 것이 왕한석의 연구를 통해서도 밝혀진 바 있다(왕한석, 제주 사회에서의 조 및 관련 명칭에 대한 일 연구, 1996).그러던 것이 사회의 변화와 함께 제주에서 조 농사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아래의 기사에서는 그걸 일제강점기라고 지목하면서 마치 그때 조 농사가 뚝 끊긴 것처럼 몰아붙이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1930년대의 현지조사 자료인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에서 보아도 그때 여전히 조 농사는 제주에서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다른 여타의 일들과 마찬가지로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그냥 일제를 몰아붙이는 것뿐이다. 

그보다는 조 농사가 끊긴 건 제주에서 육지를 대상으로 귤 농사, 양배추 농사, 브로콜리 농사 등등의 소득작물 들이 퍼지면서부터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돈도 안 되는 조를 굳이 힘들게 뭐하러 심겠는가? 2008년 제주 전역을 조사할 때 아직 일부 나이 든 농부님네가 토종 조로 농사짓는 집을 몇 군데 발견하긴 했다. 그런데 그것도 집에서 조금 먹을 정도이지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제주에서 토종 조가 부활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으면서 내용에 일부 잘못된 부분이 있어서 몇 글자 끄적여본다. 





일제강점기 자취를 감췄던 제주토종 조가 100년 만에 복원돼 5일 처음으로 수확이 이뤄졌다.


제주 토종 조가 '삼다찰'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귀환했다. 제주도 동부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삼다찰은 올봄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의 밭 3,300㎡에 심어 졌다.

제주 토종 조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수탈로 제주에선 자취를 감췄다.

지난 2008년 일본으로부터 반환받아 농촌진흥청이 분리육종법에 따라 연구를 진행했고 제주 토종 조는 지난해 신품종 '삼다찰'로 복원됐다. 1세기 만의 부활이다. 김녕리 농가에서 이뤄진 실증재배는 5일 첫 결실을 봤다.

삼다찰은 줄기가 강하고 잘 쓰러지지 않아 기계화 재배에 유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올해 볼라벤 등 연이은 태풍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또 기존 재배종에 비해 20% 이상의 수확량을 더 얻을 수 있는 다수성 품종이다. 물론 제주지역 환경에도 가장 알맞은 품종으로 평가된다.

제주 토종 조는 옛부터 전통음식인 오메기떡과 오메기술의 원료곡식으로 사용됐다.

제주도 농업기술원은 올해 삼다찰에 대한 실증재배가 성공을 거둠에 따라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농가에 보급할 예정이다. 농촌진흥청도 앞으로 제주지역을 조나 기장 등의 신품종 종자생산 거점단지로 육성할 계획을 갖고 있다.

twoman@cbs.co.kr


왕한석-제주사회에서 조 및 관련 명칭에 대한 연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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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 농업과학도서관에 가서 귀중한 자료를 직접 보고 돌아왔다.

고문서 자료실에 따로 보관되어 있는 다카하시 노보루의 육필 자료가 그것이다.

한번 펼쳐 보았는데, 음... 빠르게 휘갈겨 쓴 글씨라 해독하는 데에만 시간이 꽤 걸리겠더라.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 이란 책이 정말 어렵게 나왔겠다는 걸 실감하고 돌아왔다.

오늘 이런 귀중한 자료를 볼 수 있게 도와준 유정상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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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에서 본 우리의 전통농업


 

들어가며


본론에 앞서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이하 조선반도)은 어떤 책이고, 저자인 다카하시 노보루는 누구인지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먼저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농사시험장에서 일하던 다카하시 노보루가 조선 팔도를 다니며 농민을 대상으로 직접 조사한 농사와 관련된 기록을 모아 놓은 자료이다. 그는 주로 당시 농민들이 농사짓던 방식부터, 무엇을 어떻게 먹고 땅값이나 농산물·농기구의 값은 얼마인지 등을 조사했다. 직접 조사한 내용인 만큼 당시 실정을 느낄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아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초고를 정리하여 1991년 일본에서 출판한 것으로서, 저자가 직접 정리하지 못한 만큼 체계나 완결성은 좀 떨어진다. 또한 주로 식량 작물에 초점을 맞추어, 푸성귀 등은 다루지 않았다는 한계도 있다. 몇 가지 한계는 있지만 당시 농업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임은 틀림없다. 조선총독부의 주관으로 조사된 다양한 내용들이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의 저자인 다카하시 노보루는 1892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1918년 동경대학 농학부 농학과를 졸업했다. 후쿠오카는 일본에서도 농법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19세기 후반에는 정부 차원에서 그곳의 농법을 정리해 전국에 보급할 정도였다. 그는 그 이듬해인 1919년부터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수원지장에서 일하면서 조선에 첫 발을 내딛어, 그곳에서 9년을 일하다가 1928년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서선西鮮지장의 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1944년에는 농사시험연구기관을 정비·통합하면서 다시 수원지장으로 돌아와 총무부장이 되어, 1946년 5월까지 그곳에서 나머지 업무를 처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 심근경색으로 55살에 숨을 거둔다.



조선 농업 실태 조사


그가 조선반도의 농법을 조사한 가장 큰 목적은 식량 증산에 있었다. 아마도 세계적인 경제 공황과 함께 찾아온 식량 위기가 그 동기였을 것이다. 그는 1937년 7월 6일 경상도로 출장을 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조사에 나선다. 하지만 이때는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것을 적어 놓았을 뿐이고 이후 더 자세하게 조사하려고 길을 나서는데, 그 장소와 일정은 다음과 같다.


1937년 : 7월 29일 경기도→9월 1일 이후 황해도→9월 6~7일 경상도→9월 27일~10월 5일 강원도→10월 24일~11월 1일 평안도

1938년 : 3월 16일 황해도→6월 30일~7월 16일 함경도→11월 6~10일 충청도

1939년 : 2월 26~28일 전라도→4월 30일~5월 6일 황해도→5월 20일~6월 3일 제주도→7월 2~8일 강원도→10월 12~13일 충청도→10월 13~21일 전라도

1940년 : 2월 25일 충청도→3월 4~9일 황해도→10월 26일~11월 3일 함경도→11월 13~25일 경상도

1942년 : 6월 1~5일 강원도

1943년 : 7월 3~9일 경기도


이처럼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쉴 틈 없이 다니느라, 아들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를 볼 새도 없었다고 한다.



전통농업과 현대농업


이야기에 앞서 먼저 전통농업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자. 결론부터 말하면, 전통농업이란 산업화 이전 자급을 위주로 하는 가족이나 마을 단위의 중소농 중심 농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종종 전통의 범위를 좁혀서 우리의 옛 농사만 전통농업으로 한정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유럽도 산업화 이전의 농업, 곧 전통농업에서는 삼포제와 콩을 이용한 농법 등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농민은 노동자로, 자급 중심의 농사는 상품 생산을 위한 농업으로 바뀌었다. 우리도 일제강점기부터 그러한 경향을 보이다, 1970년대 산업화 이후 뚜렷하게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조선반도란 책의 내용을 보면, 조금씩 금비金肥를 쓰는 모습에서 그 분기점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농업의 특성은 현대농업의 특성을 살펴보면 저절로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에서 전통농업을 산업화 이전 자급을 위주로 하는 가족이나 마을 단위의 중소농 중심 농업이라고 정의했는데, 현대농업은 그와 달리 산업화 이후 상품 판매를 위주로 하는 개인 단위의 대농 중심 농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농업 정책이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현대농업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낸다는 경제학의 논리에 맞춰, 넓은 땅에서 많은 에너지를 쓰면서 가장 많은 수확량을 올리는 것이 목표이다. 이러한 목표는 일부 상업적 유기농업에서도 추구하는 바로서, 어떨 때는 관행농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쓰기도 한다.

이러한 현대농업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바로 ‘석유’이다. 산업화와 과학기술이 진행되고 발전함에 따라 이제 석유는 일상생활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농업도 예외는 아니어서, 산업화에 따라 도시로 떠난 일손을 석유가 대신하고 있다. 각종 농기계부터 비닐, 농약, 화학비료 같은 석유화학제품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이들 없이는 농사짓고 살 수 없을 정도다.

또 ‘시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생활에서 시장 거래를 통해 얻는 돈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돈에 의존하고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현대농업에서는 한정된 땅에서 많은 수확을 얻고자 홑짓기, 석유화학제품과 지하수의 남용 등으로 땅은 물론 사람과 자연까지 병들고 있다. 물론 이는 농촌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소비자들이 몇 배는 더 지나치다. 심지어 요즘 도시 사람들은 이게 콩인지 보리인지도 모르는 숙맥들뿐이다.

지금까지 현대농업을 매우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불거지면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로 전통농업에 주목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조선반도란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작부 체계 ― 사이짓기, 섞어짓기, 그루갈이, 돌려짓기


현대농업과 전통농업의 가장 큰 차이는 작부 체계일 것이다. 작부 체계란 한정된 땅에 몇 가지 작물을 조합하여 순서대로 재배하는 방식을 말한다. 넓게는 작물을 생산할 때 필요한 자원 관리, 자재 투입, 재배 기술 등도 이에 포함된다. 그런 맥락에서 현대농업의 작부 체계가 갖는 특징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수확량만 늘리고자 홑짓기와 석유화학제품을 쓴다는 데 있다. 이러한 방법이 처음에는 비약적으로 생산량을 늘려 녹색혁명이라고까지 찬양을 받았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땅을 혹사시켜 메말리고, 익충까지 죽여 오히려 더 많은 병해충을 불러오고, 더 나아가서는 사람을 죽이고 자연을 파괴하는 결과까지 불러왔다. 이제는 과학기술이 발전해 적정량만 쓰면 안전하다고 하지만, 그 폐단은 고스란히 우리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자급 위주의 중소농이 중심이었던 전통농업에서는 상품성보다는 먹는 데 초점을 맞춰, 작물들의 다양한 특성을 파악해 한정된 땅에서 서로 어울리게 길렀다. 또한 석유화학제품에 의존하기보다는 사람과 살아 있는 것들 ―소, 미생물 등― 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실제로 어떤 작부 체계를 운영하였는지 조선반도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자.

먼저 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논벼 그루갈이 보리 ― 순천, 광주, 남원, 보성, 벌교, 통영, 익산, 옥구, 나주, 남지, 영덕, 봉화-밀, 아산.

2) 삼(3월 중·하순 심어 7월 중순 수확) 그루갈이 논벼 ― 경북, 특히 안동.

3) 마늘 또는 감자 그루갈이 논벼 ― 경북.

4) 논에는 거의 논두렁콩을 심는다 ―남조선 전반.


위에서 보듯이 그루갈이를 할 수 있는 남부 지방에서는 대부분 뒷그루로 보리를 심었다. 밀은 보리보다 수확이 늦어 모내기에 영향을 주고 지금처럼 많이 먹지도 않았기에, 논에는 별로 심지 않았다. 삼베는 지금도 안동의 유명한 특산물로서, 당시에도 상품성 때문에 논벼의 앞그루로 심었을 것이다. 삼베 말고도 왕골이나 골풀 같은 작물을 논의 일부에 심어 자리나 농기구 등을 만드는 데 썼다. 마지막으로 논두렁콩을 많이 심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이처럼 논에 그루갈이를 함에 따라 지금과 못자리와 모내기철이 어떻게 달랐는지 살펴보겠다.


못자리에 볍씨뿌리기 : 음력 3월 초(교동도), 4월 17일(수원), 4월 20일(개성), 음력 3월 중순(영흥도), 음력 3월 중순(보성), 5월 초(원주), 5월 10일(제주), 음력 3월 말~4월 말(통영), 음력 2월 초(익산-불이흥업농장)

모내기 : 6월 말~7월 말(제주), 음력 5월 8~20일까지(순천), 음력 5월 10~20일(익산), 6월 15일(옥구), 하지 중심(남원), 음력 5월 22일(보성), 음력 5월 말~6월 10일(통영), 6월 20~30일(나주), 음력 4월 29일~5월 10일(수원), 음력 5월 초~말(교동도), 음력 4월 말~6월 초(영흥도-물이 부족해서), 6월 중·하순(원주), 5월 말~6월 20일(개성), 음력 4월 중순(홍천)


이를 통해 대부분 이팝나무에 꽃이 필 때쯤 못자리를 만드는데, 북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늦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모내기는 지금보다 늦은 하지 무렵이었다. 지금처럼 모내기가 빨라진 데에는 안정적으로 수확량을 늘리는 데 목적이 있다. 벼뿐만 아니라 참외와 딸기 같은 작물을 보면 요즘은 한겨울이 제철인 양 시장에 쏟아진다. 이처럼 현대농업에서는 상품성을 목표로 작물들을 제철이 아닌 때 심고 거둔다. 덕분에 제철에 맞는 농산물을 보기 힘들어졌다. 제철에 맞는 농산물을 내면 오히려 그것이 더 상품성이 높을 정도이다. 작물이 제철을 잃어버린 것과 함께 사람도 철을 모르고 산다. 한겨울에는 반팔, 한여름에는 긴팔을 입는 사람들까지 있다. 농업을 통해 이런 철부지들이 철 좀 들게 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으로는 밭의 작부 체계를 살펴보자. 예상하듯 논보다 훨씬 다양하게 이용했다.


1) 보리 그루갈이 조에 섞어짓기 콩 또는 팥 : 제주, 순천, 안동, 괴산, 수원, 양주, 금곡, 강릉.

2) 보리 그루갈이 콩→보리 사이짓기 목화→보리 그루갈이 콩 : 순천, 광주, 남원, 남지, 나주, 안동, 청주, 대전, 아산, 수원, 원주.

3) 보리 그루갈이 콩에 섞어짓기 수수 : 수원, 양주, 덕적도-메밀, 금촌, 가평, 강릉.

4) 보리 사이짓기 콩 : 의성, 안동, 대전, 개성-수수·녹두, 평창, 강릉.

5) 조 섞어짓기 팥 또는 수수 : 경북, 영덕, 개성, 철원, 신막.

6) 밀 사이짓기 콩에 수수 섞어짓기 : 연천, 원주, 평창, 김화.

7) 보리 사이짓기 조 : 안동, 가평, 강릉, 김화.

8) 콩 섞어짓기 수수 : 나주, 충북, 수원, 금곡.

9) 조나 콩 둘레에 섞어짓기 들깨, 참깨, 아주까리 : 경북, 수원, 양주.

10) 보리 그루갈이 밭벼 : 경북, 청주, 대전.

11) 감자 그루갈이 무·배추 : 남원, 대전, 나주.

12) 콩 또는 팥 섞어짓기 옥수수 : 철원, 세포, 평창.

13) 콩에 들깨 섞어짓기 : 충북, 금촌-수수.

14) 가을보리 줄뿌림에 사이짓기 콩 점뿌림 : 경북, 충북.

15) 보리 그루갈이 무·배추 : 수원, 양주.

16) 보리→조→보리→콩 : 영덕, 괴산.

17) 귀리 사이짓기 콩 : 연천, 세표.

18) 보리 그루갈이 고구마 : 제주, 대전.

19) 감자(겨울) 그루갈이 메밀(여름)→피(여름)→감자 그루갈이 메밀 : 제주.

20) 감자 그루갈이 무→조 섞어짓기 콩 : 제주.

21) 보리 그루갈이 조→풋베기콩→보리 그루갈이 조→풋베기콩 : 제주.

22) 고구마→밭벼→보리 그루갈이 고구마→밭벼 : 제주.

23) 감자 사이짓기 콩·옥수수·팥 : 평창.

24) 감자 사이짓기 콩→가을보리 그루갈이 조 : 강릉.

25) 밭벼 섞어짓기 수수 : 남원.

26) 보리→조→밀→콩 : 괴산.

27) 조 섞어짓기 콩, 수수, 녹두 : 금곡.

28) 봄보리 그루갈이 무·배추 : 홍천.

29) 보리→콩→보리→조·수수 : 울진.

30) 밀 사이짓기 조 : 홍천.

31) 콩 섞어짓기 옥수수 : 평창.

32) 감자 그루갈이 조 : 강원.

33) 가을보리(겉보리) 또는 봄보리(쌀보리)→콩→가을보리→조 : 봉화.

34) 오이 그루갈이 무·배추에 섞어짓기 파 : 수원.

35) 마늘 섞어짓기 상추 : 개성.


밭 작부 체계의 가장 큰 특징은 사이짓기와 섞어짓기이다. 한마디로 사이짓기는 수확기가 다른 작물을 한 곳에서 키우는 방법이고, 섞어짓기는 특성이 다른 작물을 한 곳에서 키우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은 기계에 의존하여 대규모로 농사짓는 현대농업에서는 실행하기 어렵다. 콩이면 콩 하나만 심어서 비행기로 관리하면 되는데, 여러 작물이 섞여 있으면 하나하나 손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방식은 중소농이 중심이었던 전통농업의 핵심이다.

또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는 지금과 달리 식량 생산이 주된 목적이어서 보리나 조 같은 작물이 중심이었다. 당시는 대부분이 농민이며 아직 농업이 중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조선반도를 보면 푸성귀 종류는 대부분 집 근처 채마밭에서 해결했다. 물론 경성 같은 큰 도시 근처에서는 많이 지었지만, 지금처럼 인구밀도가 높지 않아서 도시에서도 채마밭 정도는 일구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도시농업의 활성화가 농촌 인구의 증가로 이어지는 효과도 있지 않을까 예상한다. 물론 수도권 과밀화와 같은 더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들이 있지만.

이러한 전통농업의 작부 체계에서 핵심 작물은 바로 콩이다. 우리의 식생활과 밀접하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알려진 대로 콩과 작물은 땅힘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유럽의 전통농업에서도 이를 이용하고자 작부 체계에 꼭 콩을 넣었다고 한다. 다음 자료는 콩을 심었을 때의 효과를 기록한 책의 내용이다. 이는 수원 지방에서 수수와 콩·조·들깨를 심었을 때의 수확량을 비교한 결과이다.


1) 수수와 콩일 경우 : 수수 4~5말, 콩 6말 정도.

2) 수수와 조일 경우 : 수수 2~3말, 조 1말~1말 5되.

3) 수수와 들깨일 경우 : 수수 2~3말, 들깨 5~6말 정도.


이를 통해서도 콩의 효과를 알 수 있다. 지금처럼 화학비료에 의존하는 대신, 작부 체계를 짤 때 사이짓기·섞어짓기·그루갈이에 콩을 이용하는 방법을 도입하면 좋겠다. 아래의 기록은 이와 관련해 참고할 만한 사항으로서, 당시 세포농사시험장의 시험 재배 결과이다. 여기서도 작부 체계에 콩과 작물을 넣으면 홑짓기할 때보다는 콩과 작물의 수확량이 떨어지지만, 대신 다른 작물들의 수확량은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험 넓이

150평 1구역

시험 작물

첫 번째 방식 : 감자, 콩, 옥수수

두 번째 방식 : 팥, 옥수수, 팥

거름 준 양

(300평에)

관습처럼 준 양 : 두엄 100貫, 황산암모늄 1.5貫, 과인산석회 1.5貫, 나뭇재 5貫

표시하고 준 양 : 두엄 200貫, 황산암모늄 3貫, 과인산석회 3貫, 나뭇재 10貫

비고

첫 번째 방식 : 감자 4, 콩 5, 옥수수 1의 비율로 심음

두 번째 방식 : 팥 5, 옥수수 1의 비율로 심음

수확량(300평에) 

섞어짓기(그루 수)

홑짓기(넓이)

첫 번째 방식

표시 : 감자 212.4貫, 콩 0.227섬, 옥수수 0.749섬. 조수입 계 33원 31전

관습 : 감자 160.5貫, 콩 0.284섬, 옥수수 0.663섬. 조수입 계 30원 64전

표시 : 감자 154.8貫, 콩 0.449섬, 옥수수 0.210원. 조수입 계 26원 54전

관습 : 감자 128貫, 콩 0.416섬, 옥수수 0.242섬. 조수입 계 24원 48전

두 번째 방식

표시 : 옥수수 1.113섬, 팥 0.448섬. 조수입 계 27원 41전

관습 : 옥수수 1.191섬, 팥 0.414섬. 조수입 계 29원 49전

표시 : 옥수수 0.386섬, 팥 0.564섬. 조수입 계 18원 96전

관습 : 옥수수 0.364섬, 팥 0.567섬. 조수입 계 18원 85전

 

마지막으로 감자와 옥수수를 보면, 대부분 강원도와 같은 산간 지역에서 심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땅에는 그런 작물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품성을 따라서 작물을 선택하여 인위적인 환경을 만들어 재배하기보다는, 그 땅에 어울리는 작물을 선택해 농사를 지었다. 앞에서 “제철”을 말했는데, 그것만큼 중요한 전통농업의 핵심이 바로 “제땅”이다.



그밖에 ― 씨앗, 거름, 쟁기질


당시 볍씨의 경우 농사시험장에서 보급한 다마금, 은방주, 영광, 애국, 적신력 같은 보급종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밭 작물은 대부분 토종을 이용했다. 이 책의 기록을 보면, 농민들에게 품종을 묻는 경우가 자주 나온다. 그럴 때면 농민들은 ‘흰콩’이니 ‘왕콩’, ‘붉은팥’, ‘울산녹두’ 등이라고 대답했다. 그저 수확도 괜찮고 다른 것보다 맛이 좋다거나 하는 이유로 씨를 받아 썼다. 별다른 이름이 없는 그 품종들이 바로 토종이다.

안완식 박사님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의 토종은 산업화 이후 급격하게 감소했다고 한다. 이는 산업화 이후 다수확의 방향으로 방향을 설정한 결과이다. 현대농업이 추구하는 바대로 나아간 결과, 이름 없던 토종은 거의 멸종 상태이다. 이제는 다국적 종자회사가 씨앗을 독점하여 지적재산권을 행사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 문제가 이후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예측만 할 뿐 아무도 알 수 없다. 배고픔은 해결했으니 토종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종의 다양성을 살리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 전통농업의 핵심인 제철에 제땅에서 작물을 키우기에는 토종이 더 알맞다. 유전자를 조작한 작물에는 그 회사의 농약만 쓸 수 있는 것처럼.

현대농업에서 편리하게 쓰는 화학비료는 그 편리함만큼 부작용도 크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 화학제품을 쓰지는 않지만 요즘의 상업적인 유기농업도 문제가 많다. 이런 상태로 나아가면 지속가능한 농업은 없을 것이다. 거름 이야기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조선반도의 기록을 보면, 전통농업에서 활용한 다양한 거름 재료들을 볼 수 있다. 못자리나 논에는 개자리(순천), 자운영(광주, 익산, 보성), 말린풀·토끼풀(제주), 털갈퀴덩굴(남지, 청주), 풋베기콩(제주) 같은 풋거름작물부터 풀(나주), 깻묵(옥구), 나뭇재·똥재(괴산), 해초(영흥도), 콩 삶은 것이나 갈잎(황해도) 등을 넣었다. 또 주요한 밑거름인 두엄의 재료로는 왕겨, 볏짚, 풀, 보릿짚, 소·돼지의 똥, 생선거름(덕적도), 태풍에 밀려온 해초(제주) 등 다양한 유기물을 이용해 직접 만들어 썼다. 웃거름으로는 주로 똥오줌, 돼지 오줌, 설거지물 등을 이용했다.

마지막으로 쟁기질이 있다. 한쪽에서는 쟁기질이 흙의 떼알 구조와 보이지 않는 흙속의 다양한 생태계를 망친다고 무경운을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 입장에서 말하는 쟁기질은 현대의 트렉터 같은 기계를 이용한 로터리 같은 방식의 쟁기질이라고 본다. 물론 그런 방식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소를 이용한 쟁기질 정도는 괜찮다고 본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소를 이용해 쟁기질을 했지만, 소쟁기질은 지금처럼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산업화 이후 석유에 기반한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일어났다. 기계화가 이루어지면서부터 인간은 물론 자연도 소외되었다.

조선반도의 기록을 보면 소쟁기질한 뒤 곰방매를 이용해 덩어리를 깨거나 써레질하고, 아니면 그냥 발로 쓱 문질러 구멍을 내고 콩을 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떼알 구조가 이루어진 흙이 아니면 힘들 것이다. 오랫동안 유기농사를 지어 흙이 살아 있기에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를 근거로 쟁기질의 목적이 단지 양분을 섞고 흙속에 공기와 물이 통하도록 하는 것만이 아닌, 다른 것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쟁기질은 사이짓기나 섞어짓기 같은 작부 체계에 맞춰 밭을 꾸미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고 본다. 실제로 책의 기록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오고, 동네 어르신께도 들었다. 두 거웃 갈이의 경우 목화, 고구마, 보리 줄뿌림, 제충국, 보리·밀(수원)을 심기 위한 쟁기질이고, 세 거웃 갈이는 보리 흩뿌림, 조, 밀, 콩, 팥을 심으려고, 네 거웃 갈이는 팥, 메밀, 보리 등을 심으려는 쟁기질이란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얼마 전 단양에 취재를 가니, 그곳에서는 이런 기능 말고도 비탈이 심한 밭의 흙이 유실되지 않도록 하는 기능도 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이짓기를 쉽게 하도록 하는 역할도 있다. 작물이 자라고 있는 골 사이에 새로 작물을 심을 골을 내는 건 사람이나 소입니다. 요즘 폭이 좁은 관리기도 나왔다고 하지만 아직 보지 못해 잘 모르겠다. 또한 사이갈이를 통해 김매기는 물론 북주기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적당한 쟁기질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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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9시 농촌진흥청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얼마 전 번역을 마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란 책의 저자인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의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 씨가 단체로 관람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요. 그래서 함께 갈 분들을 모아 찾아갔습니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도 함께 가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 혼자 갔으면 할 말도 다 못하고 그냥 쭈볏거리다 돌아왔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분이 미리 선물을 준비해서 저에게 주셔서 들고 왔는데, 그 안에는 자신이 어떻게 농촌진흥청에 자기 아버지의 자료를 모두 기증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정리된 짤막한 글을 넣어 놓았더군요. 그래서 함께 읽어 보면 어떨까 하여 집에 와서 차분히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못된 짓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나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귀한 자료를 기증받기까지의 일을 기증자의 입장에서 정리한 글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던 인간의 '죽음'이란 것에 대하여 올해 4월에 저 세상으로 떠나간 아내의 일을 생각하면 결코 남의 일은 아니지만, 나의 몸에 바싹 다가왔다. 살아 있는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이 찾아온다. 이 평범한 사실에 깜짝 놀란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 세상에 가서 이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을 때, 가장 마음에 짐이 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현재 나의 옆에 보관되어 있는, 아버지가 반평생을 걸려 조선 반도에서 조사·연구한 1,3000매나 되는 원고의 행방이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아버지가 조선에서 귀국했을 때 온갖 수단을 써서 일본에 가지고 온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나의 곁에 차 상자 2개 안에 가득 차 있다. 만약 내가 사라지면 이 자료는 어떻게 될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것이다.

이런 일을 물은 적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함께 조선 반도에서 옛 만주에 가까운 곳의 농사시험장에서 근무하셨던 친구 분이 있었다. 그분은 북조선에 있는 백두산의 진귀한 풍물이나 그 지방의 귀중한 모습을 찍은 몇 백 장의 사진이 있었다. 일본이 패전한 뒤, 조선에서 귀국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일본에 가지고 왔다고 들었다. 그분이 돌아가신 뒤, 나는 필요가 생겨 그분의 딸께 전화를 했다. 그때 들은 이야기로는, 그러한 귀중한 사진들이 거치적거려서 자신이 모두 태워 버렸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조선에서 귀국하여 2개월 뒤에 나의 눈앞에서 저 세상으로 가셨는데, 그때 죽음의 순간에 보였던 원통한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는 다시 나의 가슴에 캐물었다. '내가 사라진 뒤, 아버지가 심혈을 기울여 조사·기록한 이 방대한 유고는 어떻게 될까?' 그러나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원고와 함께 들어 있던 200~300매 정도의 사진이 있었다. 아버지가 조선의 농민, 농기구, 농작물을 찍은 것이다. 6년 전 한국의 농촌진흥청에서 꼭 기증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기에, "사진은 아버지가 찍은 것이다"라는 것을 설명하는 조건으로 기증했다.

한국 최대의 대도시 서울에서 남동으로 자가용으로 약 1시간쯤 타고 가면, 수원시라고 하는 도시에 도착한다. 민속촌 등이 있어 관광 명소이기도 하고, 인구 120만의 도시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의 본장이 있어서, 조선 반도 전역의 농업을 총괄하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한국 농촌진흥청"이라고 명칭을 바꾸고, 한국 전역의 농업을 총괄하고 있다.

4년 전인 2002년 11월에 이 한국 농촌진흥청의 부지 안에 2층 건물의 거대한 "농업과학관"이 건설되었다. 이 농업과학관의 내부는 최적의 습도와 온도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근대적인 건축물이다. 내부는 "과거," "현재," "미래,"의 한국 농업의 발전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정연하게 전시되어 있고, 한국 전역에서 견학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그 농업과학관의 "과거"의 농업 전시물들 한 구석에 6년 전에 기증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을 인편으로 들은 것은, 건설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이다. 그것을 듣고 나서는 그 사진이 어떤 모습으로 전시되고 있을지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2~3년 동안은 집안 사정으로 집을 비울 수 없었다. 올해(2006년) 6월이 되어서, 외박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서 방한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6년 전 그 사진에 눈을 두었던 것은, 당시 한국 농촌진흥청의 공보관이었던 성종환이라는 사람이다. 그 성종환 씨는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여, 6년 전 그 사진의 일로 우리집에 왔을 때도 일본어를 하는 이철희 씨를 통역으로 데리고 왔다. 이철희 씨는 농학박사의 신분으로 학회 때문에 때때로 일본에 와서 연구 발표를 해서 유창하게 일본어를 할 수 있는 한국 농촌진흥청에서도 드문 한국인 학자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철희 씨와 성종환 씨는 한국 농촌 진흥청의 내부에서는 부서가 달라서, 성종환 씨가 언제나 이철희 씨에게 통역을 부탁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이유로, 내가 이번 한국의 농촌진흥청을 방문하여 성종환 씨를 만나서 이야기할 때도 한국어를 자유로이 말할 수 없는 나는 어떻게라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내가 쿠루메久留米 시내에서 한국어를 반 년 동안 배운 M여사에게 상담한 바, 기분 좋게 맡아 주었다. M여사는 재일교포인데, 일본인을 남편으로 맞아 쿠루메 시내의 여기저기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본어와 한국어 모두 유창하게 하는 베테랑 강사이다.

 

2006년 6월 29일 아시아나항공 790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한 나와 M여사는, 거기에서 고속버스로 서울로 향하여 프레지던트호텔에 숙박했다. 다음날 아침,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남녀 2명의 직원이 마중을 왔다. 남성이 운전하는 차로 약 1시간 뒤 수원시의 농촌진흥청에 도착하여, 성종환 씨의 직무실에서 그와 만났다. M여사의 통역으로 잠깐 성종환 씨와 회담한 뒤, 성종환 씨의 안내로 농업과학관으로 갔다.

농업과학관은 그리 멀지 않아 성종환 씨의 집무실에서 걸어서 2~3분이었다. 농업과학관의 입구는 지붕은 둥그스름한 원통형의 아래쪽에 있고, 그 위쪽에는 벼의 무늬가 크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정확히 초여름의 햇살이 그 벼의 무늬에 반사되어 벼의 이삭이 살아 있는 듯이 빛났다. 과학관 안에 들어가서 농기구나 농작물, 농촌 생활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는 긴 복도를 걸어갔다.

"여기에서 당신의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조용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이 전시장의 가장 구석에 이 방을 마련했습니다."

성종환 씨가 한국어로 나에게 말한 것을 옆의 M여사가 나에게 일본어로 곧바로 통역해 주었다.

 

그 방으로 한 걸음 들어갔는데, 바로 정면의 조금 높은 곳에 그리운 아버지의 사진이 '4절 와이드'로 커다랗게 확대되어 액자에 장식되어 있는 것이 눈에 날아 들어왔다. 그것은 놀라움과 함께 감동이었다. 아마 아버지가 찍은 사진 안에 작은 자신의 사진이 들어 있었나 보다. 그것을 크게 확대하여 전시한 것이다.

"당신 아버지의 이 사진은 빛과 열에 변색되지 않도록 특수 처리를 해서 반영구적으로 그대로 보존됩니다."

이것도 성종환 씨의 설명이었다. 그때, 또 한 사람의 내가 아버지의 사진을 응시하고 있는 나에게 속삭였다.

'여기는 일본국이 아니야. 괜찮을까? 이전에는 반일·항일을 부르짖으며 일본의 국기를 불태운 무리가 있는 한국이다. 그 한국의 목구멍 안에 일본인의 사진이 장식되었어. 그것을 너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방 안을 돌아보면 아버지가 이전에 조선 반도에서 재직했을 당시에 찍은 농민과 농기구, 농작물 등의 사진이 한 장 한 장 4절지 크기로 확대되어 저마다 액자에 담겨 간격을 맞춰 전시되어 있었다. 물론 그 사진의 아래에는 아버지가 찍은 사진이란 것이 한국어로 각각에 명기되어 있다는 것을 M여사의 설명으로 알았다. 더욱이 그 방의 한가운데에는 텔레비전이 놓여 있어, 개관 시간에는 그 텔레비전을 통하여 비디오에서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방영하고, 한국어로 사진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긴 의자가 있어 누구나 다리도 쉬며 거기에 앉아 방영 사진을 보면서 설명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6년 전 한국 농촌진흥청의 요망에 따라서 '도움이 된다면'이란 가벼운 기분으로 아버지의 사진을 한국 농촌진흥청에 성종환 씨를 통하여 기증한 것인데, 이렇게 정중히 보존, 전시, 방영되고 있는 것에 감동한 것과 함께, 그것을 찍은 아버지의 사진까지도 화려하게 장식한 것에는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방의 둘레에는 전시용의 유리 진열장이 놓여 있어, 한국 농촌진흥청이 아버지의 사진으로 작성한 '사진첩'이 한 권 툭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을 내가 보고 있으니, 성종환 씨가 옆에 와서 통역의 M여사를 통하여 다음처럼 말했다.

"만약 당신이 자택에 보관하고 있는 아버지의 연구자료를 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해 주신다면, 그러한 자료는 모두 복사하여 원고는 이 진열장에 넣어 반영구적으로 보존 전시하고 한국 농업 관계자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복사한 것은 한국의 농학자가 연구하게 되어, 당신 아버지의 연구 자세나 한국 농업에 대한 방법을 많은 한국 농민에게 전할 수 있을 겁니다."

 

견학이 끝난 뒤, 별관에 있는 한국 농촌진흥청의 청장을 성종환 씨의 안내로 방문했다. 이 청장은 김인식이라고 하는데, 일본어를 할 수 없어서 M여사도 동행했다.

"당신 아버지 시대의 학술 관계 자료가 한국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한국에서 받은 것은 참으로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기증하신다면 아버지의 공적으로서 농촌진흥청이 책임지고 영구히 보존 활용하겠습니다."

이렇게 간청하는 청장에게 나는 답했다.

"그러나 13000매의 아버지의 유고 1/3은 모조리 일본어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나 <조선 반도의 쟁기>란 표제로 발간이 끝났습니다만……"

"모조리 발간이 끝난 원고도 혹시 기증하신다면, 귀중한 원고로서 영구히 보존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끙끙댈 것이 있을까? 그만큼 한국에서 희구하는 아버지의 유고 전부를 한국에 기증하면, 한국에서는 정중히 취급하여 건네받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의 농업에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 아닌가. 내가 아버지의 원고를 2개의 차 상자 안에다 후세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으며, 그것보다도 이와 같이 열망하고 있는 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하여 최대한 활용하게 하는 쪽이 얼마나 아버지의 희망에 따르는 것이 될까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다시 성종환 씨의 직무실에 들어왔을 때, 나는 성종환 씨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의 유고 모두를 농촌진흥청에 기증하겠소."

하니 성종환 씨는 큰 손을 내밀어서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다음과 같은 계획을 말했다.

"잘하면 8월 2일에 우리들이 댁에 방문하여 아버지의 유고를 받겠습니다. 왜 그렇게 급하냐고 말씀하시면, 실은 8월 30일부터 9월 3일까지 5일 동안 한국의 '농업 100주년 기념제 행사'가 농촌진흥청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개최됩니다. 그때는 농업에 관계있는 사람은 물론, 온갖 계층의 사람이 한국 전역에서 이 농촌진흥청에 모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당신 아버지의 자료를 널리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불과 5일 동안의 전시로는 소개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시면 그전 2주일 동안, 곧 8월 16일부터 29일까지 이 '농업과학관' 안에 전시하여 가능하면 많은 견학자에게 보이겠습니다. 그래서 당신마저 좋다면, 그렇게 부탁하려고 합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면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 그것이 실현되면 내가 이 세상에서 떠나서 사라져도 아버지의 유고는 안전한 장소에서 보관·활용될 것이다. 그리된다면 아버지도 풀잎의 그늘에서 안심하실 것이 틀림없다.

다음날 6월 30일, 나는 유고의 행방에 밝은 앞길을 발견하고, 아시아나항공기로 인천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했다.

 

 

2006년 8월 2일(수), 이날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고를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받으러 오기로 한 날이다. 그를 위하여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오기로 한 아래 적은 4명의 직원은 어젯밤부터 쿠루메시의 하이네스호텔에 숙박하고 있다.

단장 성종환, 통역 홍은희(농학박사), 전시 담당(박성일(전기주사), 사진 담당 박형근(시청각 기사)

이 가운데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홍은희 씨뿐이다.


이 사람들과 오전 8시 반에 만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나는 오전 7시쯤 집을 나왔다. 아침 일찍이기 때문일까, 정체가 되어 오전 7시 반쯤 쿠루메의 니시테츠西鐵 전차역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이와타야岩田屋의 입체 주차장에 차를 넣고서, 이와타야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는 하이네스호텔에 걸어갔다.하이네스호텔은 2, 3, 4층이 없고, 5층에 접수 겸 로비가 있다. 그 로비에서 전화하여 홍은희 씨를 불렀다. 홍은희 씨는 곧 찾아왔다.

"어젯밤은 힘들었습니다."

홍은희 씨는 나를 보고 갑자기 이랬다.

"왜요?"

"통역하는 M여사가 '요미우리 신문사'의 쿠루메 지국장을 우리들의 방으로 불렀습니다. (쿠루메 지국장의 아내는 M여사의 한글 수강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래서 지국장이 성종환 씨에게 당신과의 지금까지의 경위를 밤 늦게까지 취재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M여사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하이네스호텔의 아래에 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M여사는 대형 검은 자가용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입체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꺼내고, 하이네스호텔의 앞에 주차했다. 이윽고 전원 6명이 두 차에 나눠 타고 야메시八女市로 향했다. 야메의 집에 도착한 것은 9시 반쯤이었다. 집 앞에는 '요미우리 신문사'의 젊은 여성 기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취재하려 왔을 것이다.

나의 집 응접실은 아침부터 에어콘을 틀어 놓아서 쾌적한 실온이 되어 있었다. 모두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런데 성종환 단장이 현관 앞에 서서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럴까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는데 M여사가,

"돌아가신 부인께 예배하고 싶다고 합니다"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불단이 있는 다다미방의 맹장지를 열어서 모두를 불러들였다. 아내의 영정이 있는 불단 앞에 성종환 단장이 앉고, 양초와 향에 불을 붙이고 종을 두드려 예불하고, 뒤에 모두도 똑같이 예배했다.

응접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조사연구자료 약 13000매를 미리 테이블 위에, 번호 순으로 쌓아 두었다. 번호는 모두 하여 1부터 7까지이다. 그것을 박성일 씨와 박형근 씨 둘이 솜씨 좋게 묶어서 정리했다. 약 1시간 정도로 가지고 온 8개의 큰 통 안에 모두 넣었다. 그러고 나서 11시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조사자료의 수집 작업은 끝났다.

이 뒤 M여사의 통역으로 성종환 단장이 다음과 같은 것을 나에게 전했다.

① 이 자료는 8월 16일부터 28일까지 한국 농촌진흥청의 농업과학관의 입구에서 특별전시를 한다.

② 그 뒤에는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한국 농업 창립 100주년 기념제'에 전시하고, 다카하시 노보루의 이름과 그 연구 자료를 한국 전역의 농민과 농업 연구자 등 전원에게 소개한다.

③ 그것이 끝나면 이 자료를 복사하고, 전문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원문은 '다카하시 코너'의 방에 있는 진열장에 넣어 영구히 전시한다.

④ 이미 일본어로 출판되어 있는 다카하시 노보루의 저서는 도서관에 전시하고, 열람을 제공한다.

이상인데, 이것만 정중히 처우된다면 돌아가신 아버지도 흡족하실 것이다.

우선 성종환 단장의 희망에 따라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 2책 및 그 해적판 1책은 기증하기로 했다. 해적판은 내가 어떤 루트로 손에 넣은 것으로서 주고 싶지 않았지만 성종환 단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해적판은 한국의 서점에서는 손에 넣을 수 없다. 이와 같은 것이 한국에서 출판된 것은 한국의 수치이고, 두 번 다시 이러한 해적판이 출판되지 않도록 보여주기 위하여 원본과 함께 나란히 전시해 놓고 싶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이것도 기증하기로 했다.

"다카하시 씨는 뭔가 할 말은 없습니까?"

성종환 단장이 M여사의 통역을 통하여 나에게 물었다. 나는 가장 마음에 걸리는 점을 요망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조사한 연구자료를 한국어로 번역해서도 '이것은 다카하시 노보루가 연구한 것이다'라는 것을 꼭 명기해 주십시오."

하니, 성종환 단장도 홍은기 씨도 소리를 모아 동시에 나를 부르듯이 답했ㄷ가.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거듭 나는 요망했다.

"전시가 끝나면 '다카하시 노보루의 조사연구자료'에 관한 프로젝트팀을 조직하여 연구해 주십시오."

하니 성종환 단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한국 농촌진흥청은 한 개의 조직체로 각각이 각자의 부서를 지키고 활동하고 있기에, 그 안에 새로운 '프로젝트 팀'을 조직하는 것은 꽤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노력할 것입니다. 만일 '프로젝트 팀'을 공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다카하시 노보루는 제가 존경하는 학자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사적으로라도 그와 같은 프로젝트 팀을 조직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종환 단장과 나의 이야기는 끝났다. 그랬더니 옆에 자리하고 있던 '요미우리 신문사'의 젊은 여성 기자가 나를 보고 말했다.

"이번은 제가 다카하시 씨에게 묻고 싶습니다. 다카하시 씨가 이렇게 방대한 아버지의 자료를 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자료 모두는 옛 조선 반도의 농업에 관한 자료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는 당연히 한국 농업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자료는 몇 년 동안 일본에서 보관한 것입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1946년이니까, 그때부터 역산하면 정확히 60년 동안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20년 동안은 친척의 집에 맡겨 놓았는데, 그 뒤 저의 곁에서 떠나 곧바로 도쿄의 오치아이 히데오落合秀男 씨에게 보내 유고의 정리를 부탁했습니다. 그 뒤 1989년에 오치아이 씨가 돌아가셨기에 다시 저의 곁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곁에 보관한 것은 그 뒤 17년 동안인데, 일본국 안에 보관한 것은 앞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60년입니다."

"그렇게 귀하게 보관하고 있던 유고를 이번에 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하기로 결심한 '동기'를 가르쳐주십시오."

"가장 강한 동기는 올해 6월 하순에 방한한 것입니다. 한국 농촌진흥청의 부지 안에 있는 '농업과학관'의 한 귀퉁이에 돌아가신 아버지 다카하시 노보루의 방이 마련되었는데, 여기를 견학한 것이죠. 몇 년 전에 한국 농촌진흥청의 요망에 따라, 저의 곁에 있던 수백 장의 사진을 기증했는데, 이것이 그 방에 돌아가신 아버지 다카하시 노보루의 이름으로 정중히 보존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유효하게 활용되고 있는 상황을 보고서 감동한 것이 이번에 기증을 경심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 뒤에도 자잘한 질문을 받고, 정확히 12시가 되어서 모두 식사하러 갔다. '요미우리 신문사'의 여성 기자도 식사에 가자고 했으나 거절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고를 넣은 8개의 짐은 집에 두고서 모두 빈손으로 나와 M여사의 차에 나누어 타고 가까운 '릿카立花 초밥집'으로 향했다. 6명이 들어갈 수 있기 좋은 넓은 방이 비어 있었다. '니기리즈시握りずし'가 나오기 전에 박성일 씨와 M여사는 각각 꽃을 가까운 꽃집에서 사 왔다.

식사한 뒤는 모두 구로키마치黑木町에 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에 참배하고 싶다고 했지만, M여사는 한글 교실에 가르치러 가야해서 그녀가 사 온 참배용 꽃을 내가 맡았다. 박성일 씨는 멋진 호접란胡蝶蘭 꽃을 사 왔다. 이것은 뒤에 '한국 농촌진흥청 직원 일동'이라고 추도의 긴 띠를 묶어서, 우리집의 현관에 장식해 놓았다.

식사는 약 1시간 정도로 끝나고, 릿카스시 앞에서 M여사와 작별하고, 뒤의 4명은 나의 자동차로 구로키마치로 향했다. 구로키마치에 도착한 때는 오후 3시쯤으로 햇살이 강하고, 가장 더운 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려 나를 포함한 5인은 가파르고 좁은 산길을 올라 '다카하시가 누대累代의 묘'라고 석탑에 조각된 묘의 앞에 도착했다. 나는 M여사가 부탁한 묘소용 꽃을 묘석의 양쪽에 꽂아 넣고, 양초와 향에 불을 붙이고 묘 앞에 바치고 예배를 했다. 다른 4명도 나를 따라서 예배했다.

일행 5명은 다시 좁은 길을 땀을 흘리며 내려와서 자가용에 탔다. 차 안은 숨이 턱 막힐 듯한 열기가 가득했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 차 안의 에어컨 스위치를 최대한으로 켰다. 그러자마자 차 안에는 무수한 냉기가 가는 실처럼 퍼졌다.

차는 약 20분 뒤에 나의 집에 도착했다. 응접실에 들어온 일행 4명에게 나는 각각 시원한 주스와 수건을 건네고, 모두는 땀을 닦고 주스를 단숨에 들이켰다. 쉬던 곳에서 집에 놓았던 유고가 들어 있는 짐을 하나하나 나의 자동차의 트렁크로 정리해 넣어, 8개의 짐은 어떻게든 트렁크에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나의 운전으로 쿠루메의 니시테츠까지 배웅하고, 4명은 고속버스로 갈아탔다. 고속버스의 격납고에 8개의 짐을 수납하고, 4명은 후쿠오카공항으로 출발했다.

이것으로 내가 저승에 들어가도 아버지의 유고는 한국 농촌진흥청에 의해 정중히 보관되고 활용될 것이다. 나도 겨우 안심이 된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1월 하순,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나의 집에 A4판 크기의 책 하나가 왔다. 열어 보니 280쪽으로, 8월에 기증한 아버지의 육필 원고의 일부가 편집된 것이었다. 표지는 푸른색으로, 책으로 단단히 매어져 있었다. 그 표지에는 일본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표제 : 조선 반도의 작부방식과 토지이용

저자 : 다카하시 노보루

저작년 : 1942년


내용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휘갈겨 쓴 육필 원고 그대로를 담고 있었다. 또 표지를 열어 보면 마주보는 두 면의 한 쪽에는 인쇄가 찍혀서, 그 판 안에는 한글이 쓰여 있었다. 한일사전으로 찾은 바 다음과 같이 읽는다.


기증 도서

기증자 : 다카하시 고시로

소속 : 일본국

기증일 : 2006년 9월 4일


그리고 일본어로 다음과 같이 쓴 성종환 국장의 메모가 동봉되었다.

"기증해 주신 13000매의 유고의 육필 원고를 내년 1년 동안에 걸쳐 동봉한 책자처럼 항목별로 편집하여 완성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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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 이 책 덕분에 공부도 많이 했고, 고생도 참 많이 했다.

일단 오늘로서 초벌 번역을 마쳤는데, 기분이 찜찜한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이걸 이대로 묵히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이걸 보려고 지나온 시간을 따지니, 어느 덧 5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난 솔직히 4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한 것까지 따지니 훨씬 오래되었더라. 10년은 가까이된 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처음 아무 생각 없이 한글 파일을 만들어 놓은 시점까지 따지면 말이다.

그걸 오늘에서야 일부라도 마쳤다.

너무 기분이 좋고, 너무 기쁘다.

아... 시간은 이렇게 지나는구나.

이렇게 한 점을 찍기까지 함께 있어준 아내에게 너무 고맙다.

한때는 여기에 미쳐서 독수공방하게까지 만들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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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년 되었나,

내가 읽으며 번역하고 있는 책이다.

아무도 번역하지 않았기에 내가 해서 남들과 나눠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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