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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 밥을 많이 먹는다는 면에 놀라며 그 기원으로 꼽는 것이 바로 위의 사진이다.

 

그런데 조선 말고도 과거 아일랜드 사람들 역시 엄청난 대식가였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845년 아일랜드 성인은 하루 평균 감자 50~80개를 먹었다.


상상이 되는가? 하루에 감자 80개라니... 그냥 평균적으로 하루에 감자 60개를 먹는다고 치면, 한 끼에 20개 정도이다. 이 정도 양이면, 모르긴 몰라도 고봉밥과 맞먹거나 그보다 많을 걸? ‬


작은 알의 감자 20개는 이 정도의 양이다. 이걸 한끼에 다 먹는다고 상상해 보라.



참고로, 지금은 소식으로 유명한 나라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도 과거엔 대식가였던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이 분다"라는 만화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보자. 딱 봐도 엄청난 밥그릇 크기이다.


다음 대정 7년, 그러니까 다이쇼大正 7년이니 1918년 무렵 쌀 소동 이후 개설된 공설 식당에서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던 식사의 내용을 기록한 자료를 보자. 얼마나 많은 양의 밥을 원했는지 엿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을 보면, 한끼에 무려 1홉5작의 쌀로 밥을 지어 제공했단다. 1홉이면 180ml이고, 쌀로 환산하면 무게가 160g 정도이다. 요즘 흔히 쓰는 전기밥솥의 1컵 분량이다. 거기에 5작이 추가되니까, 한끼에 240g의 쌀을 먹은 셈이다. 요즘 전기밥솥 계량컵으로 지은 1인분 반의 밥을 한 사람이 한끼에 먹었다!




아래 일본의 식생활 변화 도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곡식의 소비량이 대폭 감소하게 된다. 대신 다른 종류의 먹을거리들을 많이 섭취하면서 영양의 균형도 이루고 대식의 문화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건강과 긴 수명도 부가적으로 얻게 되었겠지.

 





마지막으로, SBS에서 조선인의 대식과 관련한 이야기를 잘 정리해 놓아 소개한다(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419515).


탄수화물에만 치중한 식단이라 아무리 많이 먹어도 먹어도 금방 배가 꺼져 허기가 지고, 또 먹을거리 사정이 좋지 않아 먹을 수 있을 때 폭식을 하는 식문화에 대식을 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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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무렵 미국인 외교관인 조지 포크George C. Foulk라는 사람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을 여행하며 당시 지방 관아의 수령들에게 음식을 대접받았다고 한다. 이 꼼꼼한 사람은 자신의 여행기에 그때 대접받은 상차림과 음식의 종류를 기록해 놓았고, 이 기록이 최근 발견되어 해석되었다. 타카하시 노보루의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에도 여기저기 다니며 먹은 상차림을 기록한 내용이 있는데, 과거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이렇게 수기로 기록을 남기는 것이 유행이었는가 보다.

아무튼 조지 포크는 주한 미국 임시 대리공사를 지냈던 당시 고종의 신임을 두둑히 얻은 인물이라고 한다. 난 보지 않았지만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유진 초이의 실존 모델이라고 하네.

그가 남긴 기록 가운데 전라 감사가 제공했다는 본 상차림을 보면 역시 접대에는 고기, 단백질이 최고였던 것인가 싶을 정도로 육류가 많이 보인다. 자주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손님에게 제공되었던 것이겠지?







참고로 익산 군수가 제공했다는 예비 상차림은 아래와 같다. 입맛을 돋우기 위한 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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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영훈 씨의 "반일 종족주의"로 시끄러운데, 그분 원래 그런 분이긴 했다. 조선의 농업 생산성이 17-18세기를 거치며 급락하다가 20세기에 들어와 다시 상승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외국에 의한 개항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그에 대한 여러 반론이 제기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아무튼 조선 말기의 생산성 급락의 주원인은 조선 왕조의 실정에 의해 산림이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난 그게 왜 개항과 함께 회복되어 농업생산성도 높이게 되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숫자에 빠진 것인지, 내 능력의 한계인지 모르겠다. 


이영훈 씨가 그래도 경제사학 쪽에서는 거장이라 할 수 있는데 어쩌다가 이상한 논리에 빠지게 된 것인지, 그것도 나는 잘 모르겠다.


여러분, 이 논문 재밌습니다. 시간을 내서 한번 읽어 볼만합니다. 연구자들이 이렇게 재미난 걸 많이 생산하고 있다구요. 


우대형, <조선후기 미곡생산성의 장기 추이에 관한 재검토, 1660-1910>

조선후기_미곡_생산성의_장기_추이에_관한_재검토.pdf



조선후기_미곡_생산성의_장기_추이에_관한_재검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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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을 지은 일본인 농학자 다카하시 노보루는 '조선의 2년 3작식 농법'을 조선의 기후와 풍토에 맞게 개발한 놀라운 농법이라며 칭찬한 바 있다. 2년 3작이란 말 그대로 2년 동안 3번의 농사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 포함되는 것이 바로 밀, 보리 같은 맥류에 이어 콩과작물을 뒷그루나 사이갈이로 재배하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어제는 미국의 농민이 콩밭에 옥수수를 섞어짓기하는 모습에 이어, 프랑스의 농민이 밀밭에 대두를 사이짓기하는 모습까지 보았다. 이제 한국에서는 거의 사라진 농법이 아니던가? 아무튼 이에 이를 기록하려 여기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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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노보루 박사가 쓴 조선의 품종명에 관한 보고서이다. 이걸 발견한 건 농촌진흥청이 수원에 있던 시절, 농업과학관 한켠에 마련된 다카하시 노보루 특별관에서였다. 이 자료를 어찌나 보고 싶던지, 혹 전시장이 열리나 열어보니 열리는 게 아닌가!

.

그리고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산업스파이나 간첩마냥 첫쪽부터 끝까지 미친듯이 사진을 찍었다. 일을 마친 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무 일 안했다는 듯이 인사를 하고 나온 기억이 난다.


누군가가 이 자료를 찾아 헤매다 우연히 내가 올려놓은 글을 발견하여 연락이 닿았다. 그 사람 덕에 나도 옛날 기억이 나서 자료를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지금은 이 자료의 행방이 묘연하다. 전주로 이전하며 수원에 남기고 왔다는데 어디 박혀 있을까?


귀한 자료를 기증하면 무얼하는가. 이렇게 관리도 안 되고, 무엇보다 필요한 사람이 접근하기도 어려우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당시 찍어 놓은 사진을 보며 정신없이 한국어로 옮겨 놓아 다행이다.

http://blog.daum.net/stonehinge/872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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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골 농법. 즉, 가짜 골에 씨앗을 심는 농사법이란 뜻이다.
왜 '가짜 골(헛골)'인가? 처음에는 골을 타서 거기에 씨앗을 심기에 골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사이갈이 김매기 등의 작업 과정을 거치면서 북주기를 통해 새로운 두둑으로 변모하기에 가짜 골이라 한다.

과거 조선 후기의 서유구 선생이 더 널리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견종법畎種法이 이와 같은 방식의 농법이다.




이 농법은 이후 일제강점기의 조사 자료에서도 등장할 정도로 널리 퍼졌던 농법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지금은 거의 사라져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농법이 변한 것이다.

먼저 이 헛골 농법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1. 봄 가뭄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2. 여름의 강풍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된다.
3. 작물의 수확량을 증가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4. 노동력 절감에 도움이 된다.

크게 이렇게 네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골을 타서 씨앗을 심기에 주변부보다 옴푹한 곳에서 특히 한국의 봄철에 두드러진 바람에 의한 수분 상실에서 보호되고, 또 아침 저녁의 이슬 등으로 수분을 보충할 수 있어 부족한 강우량에도 종자의 발아가 잘 되는 잇점이 있다.

그러고 나서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점점 바람이 거세어지고 태풍 같은 것이 찾아오곤 하는데, 그럴 때 작물이 북을 준 흙무더기에 덮여 있기에 그런 조건에서도 잘 버티며 성장하게 된다.

작물에 북을 주면 새로 흙에 묻힌 곳에서 막뿌리가 나오게 된다. 이 막뿌리가 흙에 있는 양분과 수분을 흡수함으로써 작물이 더 잘 성장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북을 주면서 잡초의 방제까지 해결되는 것은 덤이다.

마지막으로, 고랑과 두둑의 풀을 잡기 위하여 북을 주면서 흙의 모세관을 끊어져 뜨거워지는 여름 날씨에도 지표면에서 수분의 증발이 덜 되도록 도와 작물이 충분히 수분을 흡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잡초와의 경쟁도 줄어들기에 작물의 성장에 더 이로운 환경이 조성되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효과를 가져오는 작업을 북주기라는 단 하나의 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업을 통해 김매기+수분 확보+막뿌리의 발달+작물의 성장+수확량 증가 등의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농법이 왜 사라지게 되었는가? 무엇보다 새로운 농자재의 도입이 가장 크겠다. 바로 한국의 농업에 백색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되는 농업용 비닐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꼽을 수 있다. 비닐을 덮으면, 작물이 자라고 있는 곳의 흙은 더 이상 손댈 수가 없다. 그래서 비닐을 쓰는 곳에선 처음부터 높은 두둑을 지어서 비닐을 덮고 아예 수확할 때까지 그대로 쭉 가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중간에 비닐을 벗겨내는 일은 거의 없다. 농지가 비닐로 덮이게 되면서 이와 같은 방식의 농법도 사라졌다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농생태학 책을 보다가 멕시코에서 전통적으로 조선과 같은 헛골 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다는 설명에 아래와 같은 그림이 첨부되어 나오길래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어 보았다. 세계 각지의 전통 농법을 들여다보면, 어떤 농법이란 것은 어느 한 곳의 특출난 기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자신들이 처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실패를 거듭하며 최선을 다하여 농사짓는 과정에서 확립된 것. 그것이 전통 농법이다. 우열을 가릴 일도 아니고, 선후를 가릴 일도 아니다. 참고하고 그 원리를 궁리하여 지금 상황에 맞게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지 모색하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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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노오亀の尾라는 일본의 토종 벼.

이 벼는 일본의 개인 육종가인 아베 카메지阿部亀治가 육종한 품종이다.



당시 일본만이 아니라 조선과 타이완에서도 널리 재배되었다. 

나는 이름만 보고는 거북이 꼬리를 닮아서 그런 이름인가 했더니, 개인 이름에서 따온 품종명이었나 보다.


검색하니 이 쌀을 이용해 주조한 일본 전통주가 많이 보인다. 

토종 벼를 살려서 전통주를 담근다. 역시 일본답다.

한국도 토종 벼를 살려 이런 시도를 많이 하면 좋겠다.


아예 양조회사에서 술을 담그기 위해 토종 벼를 재배하는 논도 꽤 많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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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5_세종시대 농업과 농법.pdf

현대 한국 사회의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하여”라고 하는 것과 조선시대를 이야기하며 “애민愛民”이라 하는 건 어떻게 보면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조선을 개국하고 25년 뒤인 1418년 즉위한 세종. 

다방면에서 왕조의 기반을 닦아 대왕으로까지 칭송되고 있다. 

<농사직설>은 그런 그가 즉위하고 11년 뒤인 1429년 편찬된 농업 서적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조선 현지에 알맞은 농법을 정리했다는 평가가 주인데, 다른 측면에선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고려 말, 권문세족의 대토지에서 농노 생활을 하던 사람들과 자경농이지만 지배층에게 수탈을 당하며 제대로 농업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서둘러 생산의 주체로 육성해야 했던 시대적 사명이 있었고, 이를 위하여 이들을 제대로 지도 편달하기 위한 지침서가 간절했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과 요구로 인하여 탄생한 저작이라고.


뭐 그게 바로 "애민" 사상의 발로라고 한다면 내가 더 할말이 없다.

0605_세종시대 농업과 농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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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잠; 조선시대에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며 사람들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알리던 의식 

일본에서는 천황이 아직 있어 그 황후가 지금도 친잠 의식을 행하고 있답니다. 올해가 임기의 마지막이라 내년부터는 누가 누에를 치나 걱정이라네요.

http://news.tbs.co.jp/newseye/tbs_newseye335723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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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기고 1. 벼 재배와 논벼 농경사회 

             -일본 열도의 경우 若林邦彦



벼의 재배가 그대로 논벼 농경사회의 성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농경을 주체로 하는 사회의 성립이나 확산에는 다양한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같은 문제는 벼농사 사회가 많이 형성된 아시아 각지에서 횡단적으로 고찰해야 하지만, 실제로 상세한 인간 집단의 동태를 고고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역과 시대는 한정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고고 유적을 농밀하게 조사하여 상세한 사례연구를 제시할 수 있는 일본의 야요이 시대 사회의 성립을 둘러싼 의론부터 논벼 농경사회 확산의 조건을 살피고, 아울러 그 이전의 벼 재배에 대해서 고찰해 보겠다.



야요이 문화 확립에 대한 기존 시나리오


최근 중국 대륙 등에서 벼농사의 발생에 대한 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양쯔강 유역에서 1만 년 전의 벼가 발견된 것이 이야기되고 있다. 한편 전라산田螺山 유적(Zheng, Sun, Nakamura 2000)의 상세한 발굴조사에서 검출된 벼 재배는 다양한 수렵채집 활동과 함께 있었던 일로 판명되어 반드시 생업의 중심은 아니었다고 한다. 즉, 벼재배 개시기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여 중국 대륙에서 단순히 농경 문명의 개시기가 소급된다는 의론에는 직접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벼농사 농경사회 그것이 벼 재배 이후에 나와, 동아시아에서 단계적으로 형성되어 왔냐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 대륙에서 농경사회가 확립된 뒤에 그것이 어떻게 동아시아 각지에서 확산되었느냐는 문제를 재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면 생각해야 할 문제는, 본격적인 벼농사 중심 사회가 어떻게 하여 확산되었냐는 것이다. 생업의 한 수단으로서 벼 재배의 기원과는 별개로, 고대에 중국 왕조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농경사회란 구도의 밑바탕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것도 이미 벼농사 농경을 둘러싼 큰 문제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확립된 농경 중심 사회가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대륙에서 선행하여 성립되었단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건 어떻게 하여 확대되어 갔는가? 그에 대해서는 농경 기술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집단이 이주, 이동하여 확산되었다는 모델이 있다. 특히, 일본 열도에서 초기 농경사회, 즉 야요이 문화의 확산과 확립에 대해서는 조선 반도서기원을 하는 농경집단의 이주와 이동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 배경으로 인골 분석의 문제가 있다. 조몬 시대의 인골에 비하여 야요이 시대 이후의 인골에서는 큰 키와 고안화高顔化라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그러한 변화는 조선 반도의 인간 집단이 갖는 형질이 유입되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여 상이한 신체 특징을 가진 인간 집단이 일본 열도에 건너와, 그 계보가 되는 집단이 열도 각지로 벼농사 농경사회를 확산시켰다는 느낌이 유포되었다. 결과적으로 '조몬인 Vs 야요이인'이란 상황이 존재하여,그 결과 후자가 전자를 석권했을 것 같다는 핵심어가 사회에 뿌려졌다(국립과학박물관 2005).


그러나 상황은 변화하고 있다. 그 의론의 발단이 된 큰 키와 고안 형질을 가졌던 야마구치현 토이가하마土井井浜 유적의 인골군은 발굴 당초 야요이 시대 전기의 것으로 여겨졌는데, 현재는 야요이 중기의 인골 매장을 다수 볼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山田 1999). 즉, 야요이 문화 확산의 초기부터 앞에 언급한 형질의 인간집단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을리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킨키近畿 지방 야요이 전기의 고베시 니가타新方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군은 형질로는 조몬 인골의 특징과 아무런 변화가 없고(片山 1998), 야요이 문화 정착과 형질 변화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는 예도 적지 않다. 


정말로 이주, 이동으로 벼농사 사회가 확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 문제를 일본 열도에서 가장 이 시기의 야요이 시대 유적의 조사가 진행되어 상세한 자료가 존재하는 오사카 평야를 중심으로 검증하고 싶다.



오사카 평야에서 야요이 문화가 전파된 모델


오사카 평야에서 최후의 조몬 토기라고 하는 돌대문 토기와 최초의 야요이 토기라고 하는 온가가와遠賀川식 토기는 제작방식이 크게 다르다. 특히 토기의 형태를 만들 때 기본이 되는 점토띠를 쌓아올리는 방식이 약 1만 년 동안 이어진 조몬 토기의 수법과 달리 조선 반도의 전통적인 수법에 의해 제작되었다. 전자는 토기의 안쪽부터 점토띠를 접착시키는 데 반해, 후자는 바깥쪽부터 접착시킨다(家根 1984). 이것은 토기 제작의 기본에 외래의 요소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수법이 도입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돌대문 토기와 온가가와식 토기에서는 주체가 되는 크기도 달라 용도, 즉 토기를 사용하는 생활양식도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佐藤 1999, 濱田 2003). 이러한 점에서 두 가지 토기 양식을 제작해 사용했다는 건 서로 다른 인간 집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동시에 오사카 평야에서는 각각을 주체로 하는 집단이 평야와 산지 주변에 동시에 존재했다는 설도 제시되었다. 이른바 벼농사 중심 생활의 새로 온 이주자가 저지대에, 기존의 수렵채집 생활자가 산지 주변에 공존했다는 설이다. 이 배경이 되는 건 돌대문 토기와 온가가와식 토기가 모두 출토된 유적이 많이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즉, 두 가지 토기 양식의 공존 기간을 인정함에 따라 '공존론'이 성립하고, 이주집단에 의한 벼농사 사회 전파론이 긍정된다는 순환이 성립했다. 이것은 정말일까? 필자는 이 상황을 상세하게 재검토해 보았다(若林 2002).


그 결과, 오사카 평야 중부의 조몬, 야요이 이행기의 26개 유적 가운데 같은 유구(쓰레기 구멍이나 구조 등)에서두 가지 토기 형식이 함께 발견된 건 온가가와식 토기의 최초 단계뿐이라는 걸 밝혔다. 게다가 그 안에서 돌대문 토기가 주체가 되는 예는 하나밖에 없고, 나머지 10개의 사례 이상은 온가가와식 토기 중에서 한두 조각의 돌대문 토기가 섞인 예뿐이었다. 고고 유적에서는 직전 시기의 토기가 작은 조각으로 그보다 새로운 유구가 매장된 흙에 섞여 있는 예가 부지기수이다. '함께 발견된다'는 것만으로는 두 가지 토기 형식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두 종류의 토기가 안정적인 비율로 복수의 유적에서 공존하는 것이 동시존재의 근거이다. 이런 점에서 두 가지 토기 형식이 공존했던 기간은 눈에 띄게 짧아지든지 거의 존재하지 않고, 돌대문 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온가가와식 토기로 변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공존'은 아니다. 결국은 새로 온 이주집단이 농경사회를 가져왔다는 모델은 고고학적으로 근거를 잃는 것이다.


하나 더, 이주집단에 의한 사회변화 모델에 대해서 부정적인 예가 있다. 야요이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대륙계 간석기라는 도구류가 있다. 벼 수확을 위한 돌칼, 목기 가공용 외날 돌도끼, 벌채용 양날 돌도끼이다. 이 가운데 킨키 지방에서 돌칼은 초기 야요이 유적에서도 안정적으로 출토되는 것이고, 그 이외에는 야요이 전기의 말미가 되기까지 출토수가 뚜렷하게 적어진다. 이것은 벼농사와 목기 가공 등의 기술체계를 지녔던 집단이 그대로 찾아와 사회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다양한 요소가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변화하여 야요이 사회, 즉 일본의 본격적인 농경사회가 확립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토기의 변화는 크지만, 그러한 다양한 문화 요소 변화의 하나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주집단에 의한 문화의 교대가 아니라, 조몬시대 이후의 인간집단이 중국 대륙과 조선 반도에 있었던 벼농사를 시작으로 하는 다양한 문화 요소를 서서히 들여와서 형성된 것이 야요이 문화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동아시아 농경사회가 광역화된 건 단순히 집단 이동을 계기로 일어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각각의 지역에서 농경사회로 변화하는 요소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나,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새로운 필요성에쫓겼을 때 재래집단이 사회, 문화 변화를 일으켜 여러 변화가 성립된 것은 아닐까?



논벼 농경사회 이전의 벼 재배


그럼 본격적인 농경사회 출현 이전의 벼 재배는 일본 열도에서 어떻게 확인되는 것인가? 2007년 가을에 일본 고고학협회에서 "열도 초기 농경사의 새로운 시점"이란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열도 안의 선사시대 식물 유체 출토 사례를 집성하여 검토한 연구회였다. 그 안에서 식물 유체의 출토 사례를 통해 보는 한 벼와 보리, 기장에 대해서는 조몬시대 후기부터 재배되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고 여러 연구자들이 보고했다. 즉, 농경사회 이전에 잡곡복합의 식물 재배가 야요이 시대보다 이전으로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큐슈 지방의 잡곡류 종자의 출토 세트는 최근 조선 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 서부로 농경이 전파된 경로의 유력 후보지라는 산둥 반도의 벼, 맥류, 잡곡 복합농경에 유사하다는 것도 지적되었다(小畑 2007).


다만, 조몬 후기의 벼 출토 사례에 대해서는 큐슈 지방이 주체라는 점에서 일본 열도 안에서 안정적으로 재배가 이루어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수많은 조몬시대의 생업 가운데 일부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 기술한 대로, 중국 대륙의 초기 벼 재배 사례에서도 농경 주체 사회 이전의 식물 재배 사회가 존재했다. 열도안에서도 그와 같은 시기가 존재했다는 생각은 근년의 고고학에서도 일반적으로 되고 있다. 앞으로는 그러한 생업 체계의 상세한 모습과 야요이 시대 이후와의 사회, 문화 구조의 차이를 정의해 가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업 전략이란 다양하여, 광역 교류망을 통하여 여러 가지 수법이 있을 수 있다. 그와는 별개로 광역에서 사회변화와 생업 체계 변화가 연동하여 일어난 경우가 있다. 전자가 단순한 벼 재배, 후자가 농경사회 확립(일본의 경우, 야요이 사회의 확립)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변화도 대규모 식민이 없어도 실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보다 그러한 변화를 일으킨 전후의 문화, 사회, 환경의 여러 요소를 분석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고고학, 인류학, 식물학 등의 여러 분야는 그를 위하여 연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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