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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골 농법. 즉, 가짜 골에 씨앗을 심는 농사법이란 뜻이다.
왜 '가짜 골(헛골)'인가? 처음에는 골을 타서 거기에 씨앗을 심기에 골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사이갈이 김매기 등의 작업 과정을 거치면서 북주기를 통해 새로운 두둑으로 변모하기에 가짜 골이라 한다.

과거 조선 후기의 서유구 선생이 더 널리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견종법畎種法이 이와 같은 방식의 농법이다.




이 농법은 이후 일제강점기의 조사 자료에서도 등장할 정도로 널리 퍼졌던 농법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지금은 거의 사라져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농법이 변한 것이다.

먼저 이 헛골 농법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1. 봄 가뭄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2. 여름의 강풍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된다.
3. 작물의 수확량을 증가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4. 노동력 절감에 도움이 된다.

크게 이렇게 네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골을 타서 씨앗을 심기에 주변부보다 옴푹한 곳에서 특히 한국의 봄철에 두드러진 바람에 의한 수분 상실에서 보호되고, 또 아침 저녁의 이슬 등으로 수분을 보충할 수 있어 부족한 강우량에도 종자의 발아가 잘 되는 잇점이 있다.

그러고 나서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점점 바람이 거세어지고 태풍 같은 것이 찾아오곤 하는데, 그럴 때 작물이 북을 준 흙무더기에 덮여 있기에 그런 조건에서도 잘 버티며 성장하게 된다.

작물에 북을 주면 새로 흙에 묻힌 곳에서 막뿌리가 나오게 된다. 이 막뿌리가 흙에 있는 양분과 수분을 흡수함으로써 작물이 더 잘 성장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북을 주면서 잡초의 방제까지 해결되는 것은 덤이다.

마지막으로, 고랑과 두둑의 풀을 잡기 위하여 북을 주면서 흙의 모세관을 끊어져 뜨거워지는 여름 날씨에도 지표면에서 수분의 증발이 덜 되도록 도와 작물이 충분히 수분을 흡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잡초와의 경쟁도 줄어들기에 작물의 성장에 더 이로운 환경이 조성되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효과를 가져오는 작업을 북주기라는 단 하나의 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업을 통해 김매기+수분 확보+막뿌리의 발달+작물의 성장+수확량 증가 등의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농법이 왜 사라지게 되었는가? 무엇보다 새로운 농자재의 도입이 가장 크겠다. 바로 한국의 농업에 백색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되는 농업용 비닐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꼽을 수 있다. 비닐을 덮으면, 작물이 자라고 있는 곳의 흙은 더 이상 손댈 수가 없다. 그래서 비닐을 쓰는 곳에선 처음부터 높은 두둑을 지어서 비닐을 덮고 아예 수확할 때까지 그대로 쭉 가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중간에 비닐을 벗겨내는 일은 거의 없다. 농지가 비닐로 덮이게 되면서 이와 같은 방식의 농법도 사라졌다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농생태학 책을 보다가 멕시코에서 전통적으로 조선과 같은 헛골 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다는 설명에 아래와 같은 그림이 첨부되어 나오길래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어 보았다. 세계 각지의 전통 농법을 들여다보면, 어떤 농법이란 것은 어느 한 곳의 특출난 기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자신들이 처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실패를 거듭하며 최선을 다하여 농사짓는 과정에서 확립된 것. 그것이 전통 농법이다. 우열을 가릴 일도 아니고, 선후를 가릴 일도 아니다. 참고하고 그 원리를 궁리하여 지금 상황에 맞게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지 모색하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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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기후변화로 인하여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봄꽃들은 순서를 잃고 한꺼번에 폭발하듯 피어나고, 달력을 보면 아직 봄인데 여름이 성큼 찾아오지를 않나, 겨울에 봄이 된 것 같은 날씨가 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가장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자연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농사이리라. 아무리 첨단과학의 시대가 되어 시설하우스 안에서 자연과 격리되어 완벽하게 인공적으로 통제되는 농사가 시작되었다 해도 농사는, 흙에서 자라는 작물들은 자연의 영향을 가장 크게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마당에 언제까지 달력만 쳐다보면서 농사일의 시종과 선후를 정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옛사람들도 그러한 고민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처럼 달력과 일기예보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탓인지 우리와는 사뭇 다른 방법으로 농사일의 시기를 조절했다. 그것이 바로 풀 달력이다.

자연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들이야말로 자연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존재들이다. 그들에겐 자연의 변화란 곧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 풀과 나무들의 변화를 감지하며 그에 맞추어 농사철을 정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달력의 날짜로 시기를 가늠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일 수 있겠다.


옛사람들이 풀 달력에 대해 기술해 놓은 여러 자료가 있지만, 대충 훑어보면 그중에서 서유구 선생의 행포지杏蒲志가 가장 나은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마음에 쏙 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는 행포지에 나오는 내용 중 도움이 될 만한 기록들을 나열해 보도록 하련다. 1825년에 저술되었다는 서유구 선생의 농서 행포지의 내용이 200년 가까이 지난 2017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 재밌다. 



1) 씀바귀의 뿌리가 살찌고 큰냉이가 싹트면, 봄보리를 뿌리고 대마를 심는다. 씀바귀와 큰냉이는 이나 들에서 자라는데, 한겨울에도 죽지 않다가 초봄에 땅이 풀리면 제일 먼저 싹이 나온다대개 씀바귀의 뿌리가 살찌기 시작하고 냉이가 싹트기 시작하면 농가는 이때에 비로서 봄보리와 대마를 뿌리는데, 춘분(양력 3월20일 전후) 앞뒤 며칠을 넘겨서는 안 된다.


2) 창포잎이 나오면 서둘러 가래를 맨다. 여씨춘추에동지 57일(2월 말-3월 초)에 창포가 나오기 시작한다. 창포는 온갖 풀 중에서 먼저 나오는 식물이다 했다. 논은 겨울을 지나면서 두렁이 무너진다. 그러므로 창포의 잎이 나오기 시작할 때 두렁을 수리해 물을 저장해야 하기에, 가래로 파는 일이 크게 일어나는 것이다.


3) 조팝나무 꽃향기가 나면 조와 수수를 파종하며(지금 기준으로 보면 조금 이르지 않은가 싶은데...), 개나리가 노랗게 피면 못자리에 볍씨를 뿌린다. 조팝나무는 2월에 흰꽃이 피며, 꽃이 마치 조의 낟알처럼 달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팝꽃이라 부른다. ... 개나리꽃이 무성하면 모판에 볍씨를 뿌릴 때임을 예상할 수 있다. 


4) 장미꽃이 필 때 목화를 파종할 수 있다. 장미꽃이 질 때쯤 목화의 싹이 난다. 목화는 비만 두려워하고 건조한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목화 파종할 때 비가 오면 높이 매단다(두둑을 높인다는 뜻 같음)고 말한다.


5) 복숭아꽃이 떨어져 시들면 콩과 팥을 모두 파종할 수 있다. 산 남쪽에 콩 종류를 파종할 때, 복숭아꽃은 벌써 가지에서 떨어진다. 복숭아꽃은 4월에 피며 꽃잎은 여러 겹이며 분홍색이다. 꽃이 피는 시기는 진달래에 비하여 약간 늦고, 철쭉에 비하여 조금 이르다. 복숭아꽃이 떨어져 시들면 콩과 팥을 모두 파종할 수 있다. 대개 콩 파종은 늦게 심는 것을 꺼리지 않으니, 늦게 심으면 좀이 먹지 않아 알이 굵다(요즘은 대개 늦게 심는 편이다).


6)  매우가 사철나무류를 때리면 앙마(秧馬; 송나라 때 발명된 농기구라고 함. 모를 심을 때 씀.)를 부려야지 이웃에 빌려 줄 수 없다(이 기록은 다분히 중국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 같다. 그래서 한국과는 잘 안 맞는 듯함). 4월에 내리는 비를 황매우(黃梅雨)라고 한다. 사철나무는 산중에서 자라며, ... 잎은 가죽나무와 비슷하다. 4-5월에는 가늘고 흰 꽃이 핀다. 황매우가 지나가고 사철나무가 꽃 필 때면 모내기가 바빠서 앙마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 줄 수 없다.


송대의 자료에 남아 있는 앙마의 모습


이것이 현대판 앙마인가?


7)  밤송이가 단단해지고 멍석딸기의 열매가 잘 익었을 때 모내기해도 절반 정도는 수확할 수 있다


8)  토란은 보리타작하는 소리에 싹튼다. 토란은 일찍 파종하지만 늦게 난다(약 한 달). 토란이 싹트기 시작하면 벌써 보리 벨 때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토란은 보리타작 소리를 들어야 나온다고 한다.


9)  밤나무의 잎이 비둘기를 가리면 목화를 뿌려 흙으로 덮을 수 있다. 곡우(4월19일 전후)와 입하(5월6일 전후) 사이에 목면을 파종할 수 있다. 이때 밤나무의 새잎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 여린 잎이 비둘기를 가릴 수 있을 만큼 자란 때가 바로 그 시기이다.


10)  찔레에 꽃이 피면 용두레와 수차를 준비한다. 이때에는 꼭 가뭄이 조금 있다(실제로 장마가 찾아오기 전 늘 가뭄이들곤 하더라). 그러므로 그때를 넘기려면 물을 대는 기구를 미리 준비해 야 한다.


11)  배추의 잎이 완전히 익으면 도리깨 소리가 시끄럽다. 봄에 파종한 배추가 6월이 되어 잎이 흐물흐물해지면, 보리 벨 때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도리깨질 소리가 나면 봄배추의 잎이 다 사라진다.


12)  검정깨 꽃이 날리면 호미를 씻고 돌아온다. 검정깨는 6월에 꽃이 핀다. 검정깨의 꽃이 날리면 김매기가 끝난다.


13)  보리나 밀이 누렇게 되면 볍씨를 파종하고(앞에선 개나리 필 때를 이야기했는데, 이건 늦게 심는 벼를 가리키는 건지 어떤지 모르겠다), 벼가 누렇게 되면 보리나 밀을 파종한다. 가을이 또한 봄이니, 어느 때인들 쉬랴. 


14)  들국화가 시들고 울타리의 박을 갈랐다면, 벼를 수확하여 작은 언덕에 가득 채운다. 울타리의 박을 이미 갈랐다면 바로 벼를 수확할 때이다(수확 시기야 품종마다 조건마다 다를 테니 이건 그냥 참고하고 넘어가도 될 듯).



아무래도 당시의 농서들이 중국의 기록들을 베끼고 또 거기에 조선의 사정을 덧붙이고 하다보니 검증되지 않은, 이건 맞지 않는 것 같은, 알쏭달쏭한 내용도 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위의 내용들은 참고할 만하니 그렇게하고, 정말 중요한 건 실제로 지역별로, 농가별로 어떠한지 해마다 잘 관찰하여 상세히 기록하는 것이 최고이겠다. 그래서 농사일지를 잘 쓰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기록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잘 기록하지 않는다. 게으름이 병이다.


농사일지 잘 쓰는 법에 대한 책도 나오면 좋겠다. 일본은 우스개로 리모컨 사용법까지 책으로 낸다고 하지 않는가. 농담이 아닌 것이 이런 책도 얼마전에 나온 적 있다(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0442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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