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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진아 씨가 불러 유명해진 노래인 '사모곡'을 아시나요?

뜬금없이 왜 노래 타령이냐구요?

그 가사에 보면 '화전밭'이 나오지 않습니까? 


"화전~밭~~~ 일구시던 우~리~~ 어~머~니~~~"라고 많이 알려져 있죠.


그런데 화전밭은 이미 밭 전 자가 들어가 있어서 '역전앞'처럼 잘못된 말입니다.

또한 우리말로 화전은 '부대밭'이라고 하지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은 일본에서 아직도 일부 행해지는 화전, 즉 부대밭을 일구는 모습을 찾아서 이렇게 올리려고 합니다.

먼저 영상을 보시죠.



위 영상은 야마가타山形 현 츠루오카鶴岡 시 아츠미 지역에서 재배하는 토종 순무를 심으려고 불을 놓아 밭을 만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토종 순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해 주시구요. https://ja.wikipedia.org/wiki/%E6%B8%A9%E6%B5%B7%E3%81%8B%E3%81%B6


아무튼 설명에 의하면, 150평방미터에 불을 놓고 밭을 만들어 씨앗을 심기까지 약 2시간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지요.

그러니까 옛날에 땅은 많고 사람은 적어 농사를 조방하게 짓던 산간 지역의 사람들은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무와 풀을 태운 재는 또 얼마나 흙을 기름지게 했겠습니까. 불을 놓았으니 당연히 풀도 그리 많이 안 날 테구요.

그러니까 부대밭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리 어렵고 힘든 농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일본은 곳곳에서 아직 이런 농사가 남아 있던데 흥미롭네요. 아마 토종 순무라서 잡종이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이렇게 깊숙한 곳에 들어와 수고를 하는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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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이란

화전(火田)은 임야를 불태운 자리를 일군 밭이나 그 밭에 거름주기를 하지 않고 곡식을 재배하는 가장 원시적인 농법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불태운 초목의 재가 거름이 되므로, 조·피·메밀·기장·옥수수·콩·보리·육도 등을 파종하여 그대로 수확을 기다린다.

그 후로도 일체 거름을 주지 않으므로 몇 년 후에는 지력(地力)이 상실되어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렇게 화전을 일구어 농사짓는 사람을 화전민이라 한다. 후진성이 짙은 원시적인 농법이기 때문에 유럽을 비롯하여 선진 농업 지역에서는 거의 소멸되었으나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는 현재도 실시되고 있다.

한국에서 화전은 신라 진흥왕(眞興王) 시대의 문헌에도 기재되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며 크게 증가한 것은 조선시대이다. 또한 일제의 식민 정책 결과 농촌의 계급 분화로 이농자(離農者)가 많아져 화전도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해방 이후 남한의 경우 화전민의 이주 정착 사업을 통해 안전 농가로 많이 변모되었으나 1965년까지만 해도 47,000가구의 화전 농가가 잔존해 있었다.

그러나 1968년 「화전정리법」이 공포되면서 화전은 사라지기 시작하여 1970년대 화전 정리가 종결되었다. 산간 지대가 많은 울진 지역에서도 화전이 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63년 『경상북도 통계연보』에 따르면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는 모두 36가구의 화전 농가가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경작 순서]

경상북도 울진군의 화전은 주로 산의 경사가 완만한 15도 내지 20도의 경사지에 일구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 떼기의 면적은 통상 2,313㎡~2,644㎡가 일반적이었으며 큰 밭의 경우 6,610㎡에 달하기도 하였다. 화전의 경작은 토지를 선정하여 불을 질러 풀과 나무를 태운 후 2~3일 뒤에 괭이로 밭을 일구고 골을 만들어 파종을 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1. 토지의 선정

화전을 위한 토지 선정은 땅의 모양새, 바람, 햇볕, 강우량 등의 자연 조건을 고려하여 수목의 성장이 왕성한 토지이면서 개간한 적이 없는 곳, 낙엽 등의 부식토가 풍부한 곳, 완경사지 특히 산록의 충적토로 표토가 깊고 비옥한 곳, 남면이나 동면을 향하여 있는 곳, 자갈이 적고 표토가 깊으며 비옥한 곳 등을 기준으로 선정한다.


2. 불지르기

화전을 위한 토지가 선정되면 우선적으로 그 산지 내의 큰 소나무와 잡목을 벌채하여 건축 용재나 연장 감 또는 연료용으로 쓸 것만 반출한다. 연장으로는 주로 톱과 도끼가 많이 이용되며 보통 장정 4~5인이 동원된다. 4~5인이면 작은 잡목과 넝쿨 그리고 풀을 베는 작업을 포함해서 3일간 약 3,305㎡~4,957㎡ 규모의 산밭(山田)을 준비할 수 있다.

산촌의 농사에는 공동 작업이 평야 지대 농촌에 비해 드문 편이나 화전의 개간 작업 과정 만은 철저하게 협업한다. 이는 한두 사람의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화입은 보통 봄에 이루어지나 때로는 초여름이나 드물게는 가을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바람 없는 날을 택하여 불을 붙이면 보통 규모의 밭은 하루 종일, 규모가 큰 밭은 2~3일간 탄다.

임야 쪽 경계 지역에 6m 이상의 안전지대를 확보하여 산불 예방에 대한 조치를 취한 후 대부분 밭 경계 윗부분에서 아래쪽으로 서서히 태워 내려오다가 약 3분의 2가량 타면 아래쪽에서 맞불을 놓게 되는데 이때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진화되면 타다 남은 나무들을 모아두거나 다시 태운다.


3. 개간과 파종

화전농법에서 밭을 일구는 작업은 간단히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때로는 밭에서 하는 것과 같이 우마를 이용한 쟁기를 교묘하게 사용하여 경전(耕田)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첫 해에는 괭이나 호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조 파종의 경우 남자는 주로 괭이로 대충 골을 만들고 여자는 조의 씨앗을 뿌리고 묻는다고 전한다.

화전 첫 해는 표토를 약간 파고 그 다음 해는 약간 더 깊이 파고, 3년째는 더 깊이 파는 사이에 나무뿌리는 제거되고 농토로서 제 구실을 갖추게 된다. 화전농의 특징은 숙전과는 달리 퇴비를 마련하여 밑거름으로 투입하지 않고 나무나 풀이 남긴 재와 낙엽이 쌓여 생긴 부식토 등이 지력을 지탱해 주기 때문에 6~7년 동안 년 일모작으로 경작한다. 토질이 좋고 표토가 깊을 경우 부분적으로 숙전으로 개량되기도 한다.


4. 김매기 및 수확

화전 첫 해는 잡초가 거의 없어 베어낸 나무뿌리에서 움돋이 하는 나뭇가지 등을 낫으로 베는 정도로 간단하다. 그 이듬해부터는 잡초가 많이 돋아나서 호미로 김매기를 해야 하데 밭이랑이 없는 전파식 밭이라 앉아서 김매기 할 수 없고 허리를 구부린 자세로 일을 해야만 하는 불편이 있다.

김매기 작업은 대체로 여자들의 분담하며 주로 품앗이로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일을 하는데 이때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잡담과 노래도 부른다. 수확은 서리가 내리기 전에 모두 베어서 탈곡 때까지 얼러기를 만들어 말리기를 겸해 조, 팥, 콩 등을 보관한다.


5. 짐승으로부터 곡물 지키기

곡식의 결실기가 되면 짐승들의 습격을 방어하는데 전 가족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특히 멧돼지 떼가 한번 습격하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다. 멧돼지는 조, 콩, 팥, 옥수수, 감자 등 모든 곡류를 먹어 치우며, 토끼는 콩을, 오소리와 산까치는 옥수수를 주로 먹는다. 이에 대한 주요 방어 수단은 밭 주변에 움막을 짓고 밤새도록 지키는 것이다. 때로는 밭 주위를 순찰하거나 기물을 이용하여 요란한 소리를 내어 산돼지를 겁먹게 하여 쫓기도 한다.


협동이 필요한 화전

가구당 떨어져 거주하는 화전이 한 가족이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화전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화전의 마지막 단계인 불지르기에서는 협동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뿐만 아니라 밭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나온 큰 소나무와 잡목 등은 장정 4~5명의 힘을 쏟아 부어야만 행할 수 있는 작업이다. 1966년에 발행된 『강원도화전정리사(江原道 火田整理史)』에 의하면 강원도 평창과 홍천 지방의 화전경작 소요인원을 화입(불지르기)와 파종으로 구분하였다. 먼저 화입은 최소 16~18명의 장정이 파종은 12~14명의 장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특히 화입의 경우 장시간 동안 엄청난 화력을 불이 타오르고, 이를 제어해야 하는 측면에서 파종보다도 더 집중적으로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

파종예정일이 정해지면 사람들은 이웃 마을 또는 친척 또는 이웃과 함께 공동으로 불태우기 작업을 계획한다. 이 때 동원되는 인원은 화전의 규모와 하루 작업량 등을 감안하여 차이가 있는데 보통 10명을 넘지 않는다. 불태우기 작업은 주의를 요하는 것으로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기 위해서 주의를 해야 하는데, 먼저 밭 경계의 윗부분부터 아래쪽을 향해 서서히 태워 내려온다. 약 2/3 정도가 탔다고 생각되면 아래쪽에서 다시 맞불을 질러 놓는데 이 때 화력은 엄청나기 때문에 주의를 요해야 한다. 그리고 불이 번지거나 또는 불길이 생각하지 않은 곳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 협업을 잘 이루어 내야하며, 이로 인해 마음이 맞는 친척들과 이웃이 함께 협업으로 화전을 만들어 낸다. 화전에서 이 과정은 가장 어려운 점이며 중요함에 따라 화전을 능숙하게 만드는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불지르기를 통해서도 타지 않고 남은 것은 한쪽 가장 자리에 놓아 다시 태우는데 이것을 부대라고 일컫는다. 과거 화전이 성행했을 당시에는 밤이 되면 골짜기에 불이 훤하게 올라온다 싶으면 어느 집에서 화전을 하는구나 하고 판단하였다.



아무 땅에나 화전하는게 아니요


화전을 만들 때 토지의 선정이 가장 중요한데 땅의 모양새, 바람, 햇볕, 강우량 등의 자연조건을 고려하여 정한다. 화전하기에 좋은 땅은 수목의 성장이 왕성한 토지이면서 개간한 적이 없고 낙엽 등의 부식토가 풍부한 곳이 좋다. 완만한 경사지나 산록의 충적토로 표토가 깊고 비옥하고 남쪽이나 동쪽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또한 자갈이 적고 표토가 깊고 비옥한 곳이 좋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지만 화전으로 가장 적당한 농지를 1966년 산림청에서 발행한 『화전정리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수목의 성장이 왕성한 토지이면서 개간한 적이 없는 곳

낙엽 등 부식토가 풍부한 곳

완경사지 특히 산록의 충적토로 표토가 깊고 비옥한 곳

남면이나 동면을 향하여 있는 곳

자갈이 적고 표토가 깊으며 비옥한 곳

비단 전해지는 문헌에서 화전에 적당한 땅을 찾는 법과 마을 사람들이 전하는 법칙과는 구분되지 않는다. 불을 질러 그 경사가 급하지 않은 곳이어야 하며, 그 땅이 너무 단단하거나 무르지 말아야 하는 곳이 좋은 땅임을 오랫동안의 지혜로 그들은 터득하였다.

어떤 곳에 화전을 할 것인지 선정을 하면 먼저 그 곳의 큰 소나무와 잡목을 벌채한다. 그 중 건축용재나 연장감 또는 땔감으로 사용할 것만 반출한다. 그 외의 잡목과 넝쿨과 같은 것은 모두 베어 그 자리에 둔다. 화전에 불을 붙이는 시기는 보통 봄에 하며, 초여름이나 간혹 가을에 하기도 한다. 보통 바람이 없는 날을 정해 불을 붙이면 하루 정도면 다 타지만 규모가 큰 밭은 2~3일간 탄다. 불이 꺼지고 타다 남은 나무들은 모아두거나 다시 태운다. 그리고 임야와의 경계지역에 20자 이상의 안전지대를 확보하여 산불예방에 대한 조치를 한다. 이렇게 만든 화전은 나무풀이 남긴 재와 낙엽이 생긴 부식토 등의 지력으로 지탱되기 때문에 6~7년 동안은 일모작으로 경작한다. 이 과정에서 토질이 좋고 표토가 깊을 경우에는 계속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불지르기도 끝난 화전은 바로 파종을 하는데, 먼저 서숙을 전면에 뿌려가면서 경사 아래 부분에서는 괭이로 씨앗이 묻히도록 올라가는 작업으로 파종을 끝낸다. 이 과정을 새밭파리가 한다. 화전의 첫 해에는 꼭 서숙을 파종해야 하는데, 이는 화전민들이 주식이 조인 서숙이기 때문이다. 벼농사는 전무한 상태에서 조를 먼저 생산해야만 한해를 견딜 수 있는 식량이 확보된다는 점에서 꼭 먼저 서숙을 파종한다. 또한 나무를 태우고 난 자리 아직 지력이 있을 때 조를 심어야만 좀 더 많이 생산량을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다른 곡식들 콩과 팥을 파종하기도 한다.

파종이 끝난 밭은 비로소 밭이라 호칭하는데, 새로 일군 밭이라 하여 새밭이라 부른다. 이 호칭은 적어도 4~5년 동안 지속되는데 이유는 굵은 나무뿌리가 완전히 없어져서 우마로 경작할 수 있는 완전한 밭으로서 역할을 하기 전까지를 지칭하는 것이다. 소로 경작할 수 있는 밭으로서의 기능이 완료된다면 비로소 ‘00전’이라는 호칭이 붙게 되며 이는 자신의 재산목록에 기록된다.



화전민촌이 만들어지기까지

1968년 울진·삼척무장공비 침투사건은 소광리에 작은 변화를 만들었다. 화전의 특성상 소광리의 많은 가옥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신들의 집을 짓고 살아갔다. 넓은 소광리에 누가 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화전민들은 골골 화전을 할 수 있는 곳에 터를 닦았다. 골짜기 이름과 화전의 불빛만으로 저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를 짐작하고 연락을 했던 그들에게 함께 모여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시기 1968년 북한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의 124군 부대 소속의 무장공비가 경북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하였다.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하였는데, 지난 1·21 청와대기습 실패를 만회하고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활동이 가능한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침투한 북한군은 산골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주민들을 집합시킨 다음 북한책자를 나누어 주면서 북한 발전상을 선전하는 한편, 정치사상교육을 시키면서 '인민유격대'에 가입할 것을 강요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울진군 북면 고숫골의 경우, 3일 새벽 7명의 공비가 나타나 "경북경찰대에서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어주러 왔다."며 주민을 집합시켜 위조지폐를 나누어주고 유격대지원청원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때론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에겐 총검을 휘두르기도 하였다. 결정적으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침투한 무장공비가 북으로 쫓겨 가면서 삼척에 거주하던 ‘이승복 어린이’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정부는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대간첩 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예비군을 출동시켜 소탕작전을 벌인 결과 16일까지 3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였으며, 68년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간 작전에서 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함으로써 침투한 120명을 모두 소탕하였다. 이 동안 민간인 희생자는 23명, 작전 중 사망한 군경은 38명이었다.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정부에서는 산골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화전민을 한곳으로 모을 것을 계획하게 된다. 당시 무장공비를 소탕하는 작전에서 흩어져 있는 화전민의 민가에 들어가 산골에서도 생활이 가능하였다고 판단하였으며, 또한 흩어져 있는 상황에 의해 정확한 피해를 알 수 없는 등 소탕작전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에서는 일정한 부지내에 집을 지어주고 생계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약속하고 화전민들을 대거 이동시키는데 그곳이 바로 대광천에 위치한 화전민촌이다.

금강송 소나무 군락지를 들어가기 전 2,000여평이 되는 곳에 전액 국비로 지어진 이곳은 기와집 11동을 지어 1동당 2세대가 입주하여 살 수 있도록 하였다. 22세대 약 140명이 함께 거주하면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농가소득을 위해서는 잠업농가에게는 뽕나무를 축산농가에게는 소를 입식시켜 주고 농지조성과 농산물저장고, 공동퇴비장, 공동변소 등 생활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각 가옥은 동일하게 생겨 다른 가옥과 구분하기 위해서는 번호로 인식되었으며, 지금도 1번집이었던 곳에 그 흔적으로 푯말이 부착되어 있다. 학교가 없어 이곳 아이들은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개울 13개, 재를 2개 넘어 삼근초등학교 소광분교를 다녔다. 하지만 학교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1~3학년까지 잘 다니지 않았으며, 10명이 되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어울려서 집안일을 돕거나 또는 놀이를 즐기기도 하였다.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과 국민적 관심으로 화전민촌이 만들어졌지만 이후 그 관심은 멀어졌고, 마을은 외부와 서서히 단절이 이루어졌다. 첫째 금강송을 보호하는 목적 아래 도로가 생기지 않으면서 교통의 불편함을 겪어야 했고, 이와 함께 영농여건이 어려워지자 마을에 더 이상 거주할 수 없게 되어 이곳을 모두 떠나게 되었다. 지금은 화전민의 2세대들이 일찍이 외지로 나갔다고 다시 돌아와 이곳에서 고랭지채소 및 약초, 양봉 등을 목적으로 입주해서 거주하고 있으며, 화전민가들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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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의 방법 - 부대밭 농업       세계 각지에서는 땅심을 유지하고자 지금도 부대밭 농업(Shifting cultivation, swidden,slash and burn agriculture)이 행해지고 있다. 특히 열대 농업에서는 인구밀도가 낮고 척박한 토지에서 알맞은 농법이라고 할 수 있다. 숲을 베고 불을 지르면 숲의 생물체로 있던 양분이 무기질인 재의 모습으로 흙에 공급된다. 가장 처음 몇 해에는 수확량이 높지만, 농사를 계속하면 양분이 줄고 잡초와 해충도 침입하기 시작하여 작물을 재배할 수 없게 되어 간다. 최대 5번 정도 농사지은 뒤 밭은 버려지고, 다른 숲을 개간한다. 버려진 밭은 몇 년에서 몇 십 년이나 묵힌다. 충분히 묵혀 두면 땅심이 되살아나고, 이 주기는 거의 무한히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재배하던 지역은 완전히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바나나, 아보카도, 커피, 코코넛 등 유용한 여러해살이 식물이 그대로 남아서 그 뒤에도 수확할 수 있다. 잡초나 해충에 대한 작물의 반응과 필요로 하는 양분이 서로 다른 작물을 차례차례로 재배해 나아간다. 예를 들면 필리핀의 하누노족Hanuno族은 나무를 벤 뒤 첫해에는 벼와 옥수수, 다음에는 고구마·참마·카사바 등의 뿌리채소를 심고, 가장 마지막에 바나나·아바카(abaca= Musa textilis)·대나무·과실나무를 심는다(Conklin 1957).   대개의 부대밭 농업에서는 8~10년의 휴한기를 두어서 토양침식을 발생시키지 않는다(Kalpage 1976, Lai 1982, Sanchez 1976). 또 대부분의 전통적인 부대밭 농업은 갈아엎지 않고 작물을 재배하여 기계로 개간하는 곳보다 토양침식이 적다(Sanchez 1979, Seubert et al. 1977). 숲을 태운 뒤에는 흙의 투수성이 높아지기에 오히려 흘러가 버리는 물이 줄어들기도 한다(Suarez de Castro 1957). 더욱이 흙이 노출되는 기간도 몇 주일에 지나지 않고 나무의 잔해와 숯 조각, 재 등이 흙을 침식으로부터 막고(Sanchez 1976), 큰 나무는 밭에 남아서 살아 있는 뿌리가 겉흙을 붙들어 토양침식을 막는다(Nwoboshi 1981, Eckholm 1976).   전통적인 부대밭은 지역사회의 자급적인 생존 방식과 조화를 이루고, 인구압이 그 지역의 환경 용량을 넘지 않는 선에서 인간과 좋은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1957년에는 약 2억 명이 부대밭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1987년에는 3억 명으로 늘어났다(Russell 1988). 인구 증가와 이용할 수 있는 토지가 줄어들며 묵히는 기간이 짧아지고, 그것이 토양침식과 생물다양성의 감소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타이 북부에서는 숲을 베어낸 급경사에서 농사를 지어서 토양침식이 일어났다(Sheng 1982). 대만, 엘살바도르, 자메이카의 급경사 지역에서 행해지는 전통농업에서는 100~200t/㏊·年의 토양이 유실되고 있다(Sheng and Michaelson 1973, Hsu et al. 1977, Sheng 1982). 현재 짧은 기간에 행해지는 부대밭 농업은 지속가능한 농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용 문헌  (1) Gerald G. Marten, Traditional Agriculture in Southeast Asia: A Human Ecology Perspective, Gerald G. Marten and Patma Vityakon, Soil Management in Traditional Agriculture, Westview Press, 1986.   (2) Reijntjes, C., B. Haverkort, and A. Waters-Bayer. Farming for the future: An introduction to low-external input and sustainable agriculture, 3.2 Indigenous farming systems, practices and knowledge: some examples, London: Macmillan, 1992.   (3) Traditional Agriculture, Dalhousie University over the period 1998 to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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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두라스의 전통농법 - 퀘숭얼Quesungual




가뭄과 허리케인에도 왜인지 피해를 받지 않는 전통농법


1998년 허리케인 밋치Mitch는 중남미에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마을과 도로와 다리가 파괴되고, 몇 천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가장 피해가 컸던 온두라스에서는 폭우로 불어난 계곡물과 100만 곳 이상의 산사태로 농작물이 거의 괴멸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FAO의 이안 쉐리트Ian Sherrit 씨는 허리케인 밋치는 자연재해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간이 관여된 재해입니다. 온두라스에서는 많은 숲이 계속하여 파괴되어 왔습니다. 국토의 80%가 언덕땅이기에, 토양이 나빠져 호우에 취약해졌습니다.”

 

 

 

 

온두라스의 수도 교외의 언덕땅에는 나무가 없는 산사태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저쪽에서는 농민들이 옥수수를 심으려고 숲을 불태우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허리케인의 피해가 컸던 까닭이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허리케인의 직격을 받았으면서도 예외적으로 수확이 줄지 않은 지역이 있다는 점이다. 온두라스 서부의 오지 렘피라Lempira주州가 바로 그곳이다. 이 땅에 사는 선주민 렌카Lenca족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저항한 것으로 알려진 부족인데, 거기에서는 고대부터 전통농법이 계승되어 1990년대 전반에 FAO가 시작한 프로젝트로 이 농법이 촉진되어 있었다. 렘피라주의 풍부한 수확은 이미 자취를 감춘 고대 농법의 가호로 산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 농법이 위력을 발휘한 것은 허리케인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전통농법을 부활시킨 지역은 1997년 엘니뇨의 심각한 가뭄에도 손실이 훨씬 적었다.


“가뭄을 일으키는 엘니뇨나 밋치와 같은 이상 기후는, 오히려 우리에게는 최고의 동료입니다. 전통농법을 하지 않던 사람은 생산물을 잃었지만, 실천한 사람은 많은 농산물을 손에 넣은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농업 전문가인 카를로스 제라야Carlos Zelaya 씨는 말한다. 전통농법을 받아들이는 지역이 엘니뇨를 겪은 뒤에 급증하고, 허리케인 밋치에도 토양침식과 작물 피해가 적다는 사실이 농민들에게서 보고되었기에, 허리케인의 해결책으로도 전통농법은 계속 퍼지고 있다.



생명이 되살아난 온두라스의 언덕


그런데 20년 전에는 부대밭 방식의 농업(slash-and-burn)으로 토양이 약해져 농민들은 물 부족과 수확량 감소로 고민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비르힐리오 리스Virgilio Reyes 씨는 이렇게 떠올린다.


“이전에는 이 지역 전체가 희망을 잃고 있었습니다. 수확하기 전 몇 개월은 식량이 모자란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다녔습니다. 언덕의 숲을 불태우면 처음 몇 년은 농사가 잘 됩니다만, 결국 모든 흙이 개울로 쓸려 내려가 버립니다. 그렇지만 이제 신기술로 땅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비르힐리오 씨는 FAO가 프로젝트를 시작하자마다 0.8ha 정도의 농지에 1993년 전통농법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은 가족용 식량과 땔감, 가축의 먹이를 자급하는 것뿐만 아니라 농사땅으로 수익도 올리고 있다.


그럼 생태농업의 측면에서 전통농법에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첫째는 생산이 지속된다는 점이다. 부대밭 농업에서는 생산력이 겨우 몇 년밖에 지속되지 않고 그 뒤 밭은 방치된다. 하지만 전통농법에서는 10~12년이나 생산이 지속된다. 흙의 질도 지속되는 바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좋아진다.

 

둘째는 전통적인 부대밭 농업과 비교하여 수확량이 많다는 점이다. 전통농법을 받아들인 농민들은 과거 10년 옥수수는 1200~2500㎏/㏊, 콩은 325~800㎏/㏊으로 수확이 배 이상 늘었다. 그 결과 자가 소비의 수요가 채워지고, 잉여 농산물을 판매할 여유도 생겼다. 농민들은 채소와 과실과 같은 부가가치가 높은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하고, 닭과 돼지도 샀다. 그리고 비료와 그밖에 투입 자재를 구입하는 조직도 결성하고, 지방 시장과 좋은 관계를 확립하며, 채소 텃밭을 시작하여 식생활도 개선되고 있다.


셋째는 토양과 수자원이 보전되는 것뿐만 아니라, 농촌의 삶도 개선되었다는 점이다. 심각하게 물이 부족한 계절을 고민하던 일도 줄고, 음용수의 수질도 좋아졌다. 전통농법의 면적은 7000㏊ 이상 되는데, 6000명의 농민이 전통농법을 받아들여 약 6만㏊의 2차림이 자연히 갱신되어 새, 곤충, 야생화도 나무와 함께 돌아왔다.


콜롬비아에 있는 국제 열대농업 센터(CIAT=Centro Internacional de Agricultura Tropical)에서 전통농법을 연구하는 아라셀리 카스트로Aracely Castro 씨는 폭넓은 이점이 있다고 강조한다.


“만약 농민들에게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으면, 여러 가지를 언급하겠지요. 더욱 많은 물, 개선된 식량 안전 보장, 그들은 더 건강해지고, 아이들은 교육을 받게 되었으며, 또 그들은 그 천연자원을 특별히 관리하는 일조차 유의하고 있습니다.”

 

 

 

 

숲속에서 작물을 기르는 렌카족


이 전통농법은 퀘숭얼의 식물을 베어 덮는 혼농임업 체계(Quesungual Slash and Mulch Agroforestry System)로 유명하다. 퀘숭얼은 선주민의 말로서, 토양·식물·흐름을 뜻하며, 온두라스 남서부에 있는 선주민의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이 농법이 가장 처음에 특정된 마을의 이름을 존중하여 농법에 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생태적으로도 효율적인 농법에는 주요한 네 가지 원칙이 있다. 부대밭을 하지 않는다. 겉흙을 쭉 덮는다. 갈아엎지 않고 농사짓는다. 효율적인 거름을 쓴다.


예를 들면 “생산성이 높기 때문에 생활도 좋아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비르힐리오 리스 씨는 해마다 햇빛이 비치도록 나뭇가지를 친다. 그리고 잎과 가지와 오래된 옥수수의 부산물은 흙을 덮는 데 쓴다. 그리고 쟁기질도 하지 않으며 불도 지르지 않는다. 곧, 중앙아메리카의 고지대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부대밭 방식의 이동 농업과는 대조적으로 농사땅을 준비하려고 언덕의 나무를 태우지 않고, 식용작물과 사료작물의 양분 경쟁을 막으며, 흙을 덮는 데 쓰려고 신중히 나뭇가지를 친다. 목재로 쓰면서 나온 부산물은 흙을 덮는 데 쓰인다. 그리고 첫해에는 개척하는 작물로 수수와 콩이 그 멀칭 안에서 자라도록 심어지고, 그 뒤에는 주작물로 옥수수 등을 기른다. 그 뒤에는 그늘이 지지 않도록 1년에 2~3번 나무나 떨기나무를 솎아베어 웃거름이 되는데, 거기에도 리타와 작물 부산물이 멀칭의 비료로 더해진다. 이는 곡식류를 숲속에서 재배해 온 렌카족의 노하우를 활용한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섞어짓기이다. 천연의 나무를 남기면서 콩, 옥수수, 수수, 조, 꼴, 부가가치가 있는 과실과 채소도 함께 심는다.

 

 

 

 

세 번째 특징은 갈아엎지 않고 재배하는 점이다. 변함없이 토양을 덮으면서 갈아엎지 않고, 거기에 작물을 곧뿌림(직파)하여 부대밭을 하지 않기에 2차림도 재생시켜 나간다. 마을을 둘러싼 밭은 급경사에 위치하여 있으며, 심각한 토양침식과 산사태를 가져오는 호우와 이따금 가뭄도 찾아오는데, 이 농법에서는 흙을 보호하여 보수력도 높고 토양도 개선시켜 나간다. 게다가 농민들이 농법을 확립·유지하는 데에 부대밭보다도 적은 노동력만 든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국제 열대농업 센터를 포함한 아홉 개 단체의 협회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이후, 지금 세계은행과 온두라스 정부는 유럽에서 건너온 침략자들이 가져온 몇 세기에 걸친 부주의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이 농법을 프로젝트 지역 이외에도 널리 퍼뜨리고 싶어 한다.



온두라스부터 니카라과, 아시아·아프리카로


국제 열대농업 센터는 퀘숭얼 농법이 온두라스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부터 비슷한 영역에서도 이 농법이 가능할지 그 가능성을 알아보고자, ‘물과 식량 도전 프로그램(Challenge Program on Water and Food)’을 통하여 니카라과 북서부에도 2005년 이 체계를 시험적으로 도입해 보았다. 결과는 최고였다. 전통농법은 농민들에게 환영받아 실증 지역을 뛰어넘어 퍼져 부대밭 농법은 꽤 사라졌다. 그리고 콜롬비아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국제 열대농업 센터, 열대 토양의 생태와 지력(TSBF= Tropical Soil Biology and Fertility), 중미의 토양을 통합 경영하기 위한 협회(MIS= Consortium for the Integrated Management of Soils for Central America) 등의 연구자들은 ‘물·식량 도전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이 신비한 전통농법의 비밀을 풀고자 연구를 시작했는데, 최소한으로만 토양을 교란하는 점, 작물을 심은 부분만 웃거름을 주는 방식의 효율이 좋은 점 등 성공의 열쇠를 특정·정량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평가를 바탕으로 국제 열대농업 센터와 FAO의 과학자들은 가뭄이 잘 드는 이외의 지역인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고지대에서도 이 농법을 쓸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CPWF 프로젝트는 이 심플하지만 유효한 체계를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고지대에 퍼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예를 들면, 아라셀리 카스트로 씨도 라오스와 베트남 등의 동남아시아 고지대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본다. 그리고 에티오피아와 안데스의 열대 지역에서도 시험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농민들이 기후변동에 대응하는 동시에 더 생태 효율적인 체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만약 현재 농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기후변동과 물 부족의 고통을 아는데 그것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한단 말입니까.”

 

 

 

 

개혁은 지역 사회에서부터


물론 도입할 때 배려해야 할 요소가 많다. 옳은 나무를 고르고, 옳은 방식으로 그것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극복해야 할 문화적인 장벽도 있다. 예를 들면 밭을 덮어 놓는 것은 농사땅을 깔끔하지 않게 보이도록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문화적으로 어려운 농민도 있을 것이다. 또 연구자들은 프로젝트를 보급하는 데에는 융자 등 지속가능한 개발을 향한 정부의 지원 정책에 더해, 사회 조직도 중요하다고도 강조한다.


온두라스에서 전통농법은 외부에서 지도를 받아서가 아니라, 농민들이 주변의 방식을 모방하면서 급속히 퍼졌다. 예를 들면 니콜라스 메히자Nicolas Mejilla 씨는 기술적인 조언은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웃에게서 영감을 얻고, 나머지는 자기 스스로 해결했다.


렘피라 프로젝트의 기술 조언자로 있는 이안 쉐리트 씨는 개혁은 외부의 기술자가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 내부에서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0년 전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떠올린다.


“당시 이러한 사고방식을 이야기하면, 공산주의자가 광신적인 생태주의자가 되었다는 딱지가 붙여졌습니다. 그렇지만 냉전 이후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은행도 이런 생각을 제도화하는 캠페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참 흥미롭습니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Tom Gibb, Saving Honduras after Mitch, BBC News, 09Mar, 1999

 (2) Luis Alvarez Welchez,et.al,Unravelling the Mysteries of the Quesungual Slash and Mulch Agroforestry, 18th World Congress of Soil Science July 9-15, 2006.

 (3) Indigenous agroforestry: A bright spot in land management,Aug12, 2006. 

 (4) Ancient lesson in agroforestry - slash but don't burn,Nov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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