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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에서 기후 위기에 대비해 베트남의 농업기술을 받아들인다는 소식. 


전남은 이 사업을 이주 여성들 중심으로 지원해서 자립하도록 도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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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국수는 베트남 문화의 기본이라 사람들은 낭만적인 관계의 측면에서 그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쌀은 당신이 의존할 수 있는 충실한 아내라고 말한다. 쌀국수는 당신이 방문하기 위해 지나치는 관능적인 안주인이다.


나는 부모님에게 이 비유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아빠는 안주인을 설명하고자 자신의 엉덩이를 흔들었다. 엄마는 웃으면서 말하길, "쌀국수는 재미있지만 매일 먹을 수는 없어. 너는 지루해질 거야. 모든 건 적당해야지."


나는 쌀국수에 1974년 처음으로 매혹되었다. 부모님이 좋아하는 쌀국수 식당의 나무 의자에 앉아 수저로 멋지게먹는 모습을 보고 식당 주인이 경탄했다. 그때 나는 5살이었다.


그릇을 비우는 동안 향기로운 국물, 맛있는 소고기, 탄력적인 쌀국수가 나를 사로잡았다. 베트남의 대표 요리를 맛본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위안을 받고 배가 불렀다. 그러나 1975년 미국으로 이민을 왔을 때 우리 가족이 정착한 캘리포니아 산클레멘테에는 자주 갈 수 있는 쌀국수 식당이 없었다. 나의 쌀국수 사랑은 일요일 아점으로직접 만들어 채울 수밖에 없었다.


쌀국수는 우리가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 되었다. 어머니는 토요일에 소고기나 닭고기 국물을 우려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엄마는 쌀국수 요리실로 아이들을 데려갔다. 우리의 수제 국물은 신선한 썬 고추와 몇 가지 박하 잔가지 고명이 얹혀졌다. 그 단순함은 청정하고 평범함이 특징인 베트남 북부에서 자란 부모님의 영향이었다. 그들은 수십년 동안 자유로운 사이공에 살았지만, 숙주와 고수, 또는 라임 같은 고명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가 베트남 식이 아니라고 생각한 스리라차 소스는 전혀 없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개개인의 선호를 위해 고명을 가득 올린 거대한 그릇을 제공하는 쌀국수 식당에 갔다. 처음엔 난처함을 느꼈고, 자신의 그릇에 해선장과 스리라차 소스를 붓는 광경에 풀어짐을 배웠다. 나는 나의 첫 요리책 Into the Vietnamese Kitchen(2006)을 위해 직접 요리법을 개발하고, 베트남의 쌀국수에 대한 기사를 썼으며, 기자와 블로거의 질문에 답하고, 수많은 요리사에게 쌀국수 수업을 했다.


친구와 페이스북의 팬들, 그리고 출판업자가 나에게 쌀국수 요리책을 쓰자고 제안하면서 나는 쌀국수가 무엇인지알게 되었다. 정말로? 친숙한 그릇 너머에 무엇이 있었을까? 많은 것이 드러났다. 쌀국수의 세계가 음식과 문화의 보석으로 가득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쌀국수의 기원


베트남은 35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나라이지만, 쌀국수는 비교적 최근의 음식이다. 그건 20세기 초반 베트남 북부에 있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그 주변 지역에서 태어났다. 마법의 순간은 Henri J. Oger가 출간한 Technique du Peuple Annamite(Mechanics and Crafts of the Vietnamese People)(1908–1910)에 나오는 쌀국수 노점상의 이미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1910년 이전에 일어났다. 식민지 관료로 하노이에 임명된 그는 장인과 목공예가들에게 도시와 근교의 생활을 기록하도록 의뢰했다. 4천 장 이상의 장면이 포함되어 있는 그들의 여러 권의 작업 가운데 둘은 쌀국수 노점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쌀국수의 기원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쌀국수가 하노이의 거리에서 대중화되기 훨씬 이전에 하노이의 남동쪽에 있는 농업 지역인 남딘Nam Dinh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는 여러 세대를 거쳐 쌀국수의 대가들을 배출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쌀국수 식당을 열기 위해 수도로 이주했다. 다른 이론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쌀국수가 상황의 충돌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쌀국수의 기원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Trinh Quang Dung의 역사 에세이인 “100 Nam Pho Viet(쌀국수의 100년)”에 나타난다. 1900년대 초반 하노이 지역에서는 베트남인과 프랑스인, 그리고 인접한 광둥성과 윈난성의 중국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많이 일어났다. 1880년대부터 1954년까지 공식적으로 베트남을 점령한 프랑스인은 베트남인들이 전통적으로 일꾼으로 부리던 소를 도살함으로써 스테이크에 대한 욕구를 충족했다. 남은 뼈와 부산물은 하노이의 정육점 주인들이 회수해서 판매했다. 지방의 사람들은 아직 소고기 요리를 개발하지 못했고, 정육점 주인들은 특별한 거래와 판매를 통해 그걸 촉진시켜야 했다. 이미 국수를 팔고 있던 거리의 노점상들은 새로운 것을 제공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xao trau라 불리는 국수가 매우 인기였다. 그건 고기국물과 칼국수 면 같은 것에 조리한 물소고기 고명으로 간단히 만들었다. 노점상들은 물소고기를 소고기로 대체하고, 둥근 면발 대신 납작한 쌀국수 면발로 바꾸기 시작했다.


새로운 국수는 손님을 찾아 거리를 배회하던 중국인 음식 노점상에 의해 준비되어 판매되곤 했다. 초기의 쌀국수손님 대부분은 홍강을 오르내리던 프랑스와 중국의 상선과 관련해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였다. 


프랑스와 중국의 상선은 윈난의 "다리를 건너는" 국수(쌀면과 아주 매운 고기국물, 고기, 채소)와 nguu nhuc phan를 비슷한 것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높은 윈난성 사람들을 많이 고용했다. 소고기 국수는 중국인 노동자들에 이어 곧바로 중국과 프랑스의 경쟁자에 대한 이점으로 베트남의 소수민족을 주로 고용하던 전설적인 베트남의 기업가 Bach Thai Buoi에 의해 고용된 노동자들을 사로잡았다. 역사가 Erica Peters에 의하면, 이 요리의 인기는 하노이가 식민지 도시화가 이루어지며 길거리음식 노점상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확산되었다. 번화한 Old Quarter(초기의 상업중심지)에 최초의 쌀국수 식당이 문을 열었다. Van Cu의 숙련된 요리사가 하노이에 상점가를 열었던 1925년 무렵 남딘 식 쌀국수 상점이 나타났다. 그 뒤 곧 도시 전역에서 쌀국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nguu nhuc phan이 쌀국수(Pho)가 되었을까? 그건 길거리의 노점상들이 경쟁력 있게 손님을 끌어모으는 수단으로 간략하고 특색있게 외치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Nguu nhuc phan day” (소고기와 쌀국수 여기)는  “nguu phan a”으로 짧아지고, “phan a” 또는“phon o”가 되었다가 마침내 한 단어인 pho로 굳어졌을 것이다. 1930년 무렵 출간된 베트남어 사전에서 pho에 대한 항목은 얇게 썬 국수와 소고기 요리로 정의되어 있는데, 그 이름은 광둥어로 편편한 쌀국수를 뜻하는 phan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phan은 "배설물"을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발음하거나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pho가 생성되었다고 한다. pho란 단어는 발음이 프랑스어의 feu를 닮았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기원이 아니다. 좀 더 그럴듯한 프랑스와의 연관은 포의 고기국물을 위해 생강이나 양파를 볶는 기술이다. 


단어에 관한 마지막 참고사항: 쌀국수는 국물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요리의 편편한 쌀국수인 banh pho에 대한 약칭이기도 하다. 그 단어의 이중적인 의미는 포가 국물만이 아니라 쌀국수에 관한 영광스러운 표징임을 말하고 있다. 



저항과 정치의 쌀국수


외국의 점령, 프랑스-인도차이나 전쟁, 내전(베트남 전쟁), 통일과 재건으로 베트남의 20세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1930년대 하노이의 많은 작가와 시인은 프랑스의 점령에 저항하는 작품을 남겼다. 1934년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명인 Tu Mo 씨가“Pho Duc Tung” (쌀국수 예찬)을 발표했다. 민족주의적 풍자시인 Tu Mo 씨는 베트남의 자부심과 정의와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베트남인의 열망을 전하고자 했다. 쌀국수의 독창적인 맛이 어떻게 감각을 불러일으키는지 옹호한 뒤, 그 뼈국물의 영양이 부자와 빈자만이 아니라 예술가, 가수, 창녀들에게 영양을 공급하는지 적어 내려갔다. 그걸 대강 번역하면 이렇다.  


상표로 쌀국수를 훼손하지 말라 
그건 변변찮은 음식,

파리라는 도시조차도
쌀국수를 환영한다.

저명한 여타의 국제적 음식에 비하여,

맛있지만 저렴하고,
최고의 왕관을 씌운다.

쌀국수를 먹지 않고 이 세상에 사는 건 어리석고,

죽어서는, 제삿상에 올려야 한다.

이제 쌀국수를 맛보라, 너는 그걸 갈구할 것이다. 


1954년 프랑스의 식민지 시기가 끝나고 제네바 협약으로 국가가 남북으로 분단이 되었을 때, 약 100만 명의 북부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주하며 하노이 식 쌀국수가 사이공(현재의 호치민시)에 도달한다. 사이공사람들은 1950년까지 포에 익숙했지만, 나의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하듯이 북부인들이 오기 전까지는 쌀국수가 대중화되지 않았다고 한다.“Pho 54”란 이름의 식당이 베트남의 역사와 요리에서 중요한 표지임을인정한다. 


농산물이 풍부하고 자유분방한 남부에서는 요리사가 쌀국수 고기국물에 중국산 각설탕을 넣으며 단맛이 나게 개발되었다. 남부인들은 고명도 많이 올렸다. 숙주, 고수, 고추 소스, 된장 같은 해산장 들이다. 북부인들은 매우 기뻤다. 새로운 첨가물은 균형잡힌 섬세한 국물을 모독했다. 오늘날까지 하노이와 사이공(북부 대 남부) 식 쌀국수의 지역적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그와 함께 1950년대 말은 하노이의 쌀국수에겐 시련의 시기였다. 공산당은 사회개혁을 위해 여러 기업을 국유화했다. 소련은 많은 양의 감자와 밀가루를 포함한 경제원조를 보냈다. 옛 공산당원이었던 Xuan Phuong 씨는 2004년 그녀의 회고록 Ao Dai: My War, My Country, My Vietnam에서 그 시기의 쌀국수에 관하여 식당에서 쌀을 낭비한다는 명목으로 쌀국수를 만들지 못하게 금지했다고 회상했다. 그걸 대체하기 위해 썩은 쌀국수면, 적은 뻑뻑한 고기와 맛없는 고기국물로 요리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먹기 위해 줄을 늘어서야 했다. 


To avoid people stealing spoons, someone even came up with the idea of piercing a hole in the middle of them: the soup had to be gulped down very quickly, for if not, it all dribbled out before it got into your mouth. The chopsticks were never washed and tables were never cleaned. From there on, to designate something that was dirty, one would say, “It’s disgusting, like the state pho,” although, to tell the truth, we considered ourselves already fortunate enough to have the means to buy any. As for the small street peddlers, they no longer had the right to sell pho, but instead, a vile soup in which there were noodles made of potato flour. Fortunately, the people of Hanoi were too bent on trade to endure this for long.

Little by little, the rules were overlooked. To deceive controllers, the street merchants placed a small basket of those shriveled-up noodles on display. But the pho, the real stuff, was underneath. It was almost as good as it had used to be and hardly more expensive than the substitute. We all passed on our list of secret addresses. “I would like a bowl of soup with potato flour noodles,” we would say out loud, just in case any state
officials were hanging around. The merchant would understand immediately. But then the pho had to be downed very quickly to keep the unfortunate man or woman from having his or her equipment seized, as well as a fine to pay.


During the Vietnam War, a different kind of pho underground operated in Saigon. Starting around 1965, a Viet Cong spy cell operated out of Pho Binh (“peace noodles”). The seven-table joint was the Communist nerve center for carrying out the city’s part in the 1968 Tet Offensive. According to a 2010 Los Angeles Times article, Pho Binh was a hub for organizing and transporting weapons from secure northern sources to bunkers in Saigon. 

In Hanoi, wartime scarcity forced state-run pho shops to make the soup without meat. In 1962, after the U.S. began sending unmanned reconnaissance planes to photograph North Vietnam, locals mockingly called their meager soup pho khong nguoi lai, literally “pho without a pilot.” A bowl of pho noodle soup is defined by its protein (you order pho by the cuts of beef or with chicken), and meatless pho seemed as surreal, if not as absurd, as a drone aircraft.

Wartime pho in Hanoi was served with leftover cold rice, baguette, and fried breadsticks (banh quay) in place of rice noodles. My cousin Huy Le Do, a Hanoi native in his late fifties, recalls the state-run pho shops as producing deplorable soup, whereas street pho operators were much better, though at a steep price. The breadsticks, he noted, were procured by Chinese vendors who spotted an opportunity to inject some richness into an otherwise sad pho experience.

Huy and his friend, a poet named Giang Van, lived through those hard times, as well as the lean years after the Vietnam War ended in 1975. The nation was reunified as one, but its economy was in shambles. Food was rationed and people stood in line for nearly everything, including pho. Over tea at Giang Van’s literary café, they wistfully discussed their longing for the elegant simplicity of Hanoi foodways: smallish portions of flat rice noodles, savory yet slightly sweet broth, and sliced cooked beef. “No fried breadsticks, condiments, or other extra things. Traditional Hanoi style is pure and delicate,” Giang Van said.




요리와 문화의 쌀국수


Pho is about tradition as much as it is about change. It comforts as well as provokes.

The original pho was a simple bowl of broth, noodles, and boiled beef. Then cooks began offering slices of rare beef as an optional add-on. In the late 1920s, people debated the merits of pho featuring Chinese five-spice, sesame oil, tofu, and ca cuong (a pear-scented water-beetle pheromone). Around 1930, pho xao don—pan-fried pho rice noodles topped with a saucy beef and vegetable stir-fry—was introduced and received well.

Things got heated in 1939, when pho restaurants began selling chicken pho (pho ga). It usually happened on Mondays and Fridays, and was likely due to the government forbidding the sale of beef in order to control the slaughtering of draft animals for food. Purists initially decried chicken pho as being un-pho-like, but in the end, it prevailed as a worthy and tasty preparation in its own right. In fact, some pho shops eventually decided to specialize in pho ga.

Other versions of pho, such as pho with beef stewed in red wine (pho sot vang) and sour pho (phochua), never totally caught on. Indeed, beef pho remains the favorite, and chicken pho ranks second, but Vietnamese cooks are always innovating. In Hanoi, family-owned, multigenerational pho shops do a brisk business, but young people are keen on nontraditional preparations, such as fresh pho noodle rolls, chicken pho noodle salad, and deep-fried pho noodles.


In Saigon, where there are pho concerns large and small, happy customers slurp away morning, noon, and night. Tourists flock to Pho 2000, where former president Bill Clinton ate, while locals patronize favorites like Pho Le and Pho Hoa Pasteur. Arty and modern Ru Pho Bar presents pho made with brown rice noodles. Customers at Pho Hai Thien may order pho with a rainbow of noodles tinted by vegetable juices.

Reunification of North and South Vietnam via the 1975 Communist takeover led to a mass exodus of refugees, many of whom settled in North America, France, and Australia. Like my family, they reinforced their cultural roots through pho, opening and patronizing small joints in Little Saigon enclaves, cooking up their own at home, and introducing the noodle soup to new friends. Viet-owned pho restaurants present traditional broths and freshly made banh pho noodles, but also try out new ideas, such as crawfish pho, sous vide beef pho, and pho fried rice.

Mainstream supermarkets in the U.S. carry pho kits and instant pho bowls. Non-Vietnamese chefs are serving pho in restaurants while home cooks try their hands at making it themselves. The widespread availability of fish sauce and rice noodles at markets, ethnic grocers, and on the Internet makes DIY pho doable.

Meanwhile, novelists and artists around the world produce pho-focused and pho-infused projects. In The Beauty of Humanity Movement, Camilla Gibb’s story about art, love, and politics in Hanoirevolves around the life of a pho vendor. In Australia, community arts organizer Cuong Le curated the multimedia I Love Pho exhibit. on Kickstarter, experimental artist Sabzi rapped “Wassup Pham” for a campaign to create a pho-inspired pop-art series called “Pho 99.” Omid Sadri crowdfunded a clever stackable pho bowl called “Lantern.” In 2014, Richie Le released “The Pho Song,” featuring a YouTube video of young Asian-Americans telling the story of pho and the Vietnamese diaspora.

As the saying goes, my relationship with pho began as a dalliance—a sometimes indulgence. When I first started writing about pho, I didn’t know how much I would have to say. Now I can’t stop talking about it.



원문 http://luckypeach.com/the-history-of-pho-andrea-nguy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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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베트남 농부가 카사바 농사를 기가 막히게 잘 지어서 왜 그런가 살펴보았더니, 카사바 농사에 풀과 콩과식물의 작은 나무를 활용하는 것이 비결이었다는 이야기. 


그도 그럴 것이 카사바를 주로 산비탈에 심는데 엄청난 급경사도 있고 그렇단다. 그래서 토양침식도 빈번하고 그런 상황.

그러니까 풀로 토양침식이 일어나지 않도록 흙을 꽉 붙들어주고, 콩과식물인 작은 나무는 양분을 공급하는 데 도움을 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지금 그 농법이 농민들 사이에 소문이 돌면서 여기저기 퍼지고 있나 보다.




아래와 같은 곳에 심는다니, 꼭 풀이나 관목 등으로 방어선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큰일나겠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동영상을 보시면 된다.




이와 비슷한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한국의 고랭지 농사가 떠올랐다.

그래서 사진만이라도 찾아볼까 해서 검색하니, 다음과 같은 암담한 모습이 나온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장관을 연출하는 풍경이지만, 아는 사람이 보면 엄청난 착취의 현장이라고나 할까?

자연을 수탈하는 모습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출처는 http://blog.daum.net/j68021/13745875 이니 들어가서 더 많은 사진을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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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ynh Anh Dung(34) 씨가 베트남 속짱Soc Trang 성에 있는 가족 농장을 둘러보고 있다. 그의 벼농사는 소금기 있는 물 때문에 2월에 망했다.


 베트남의 푸릇함으로 가득한 메콩강 삼각주 한가운데 있는 When the rice shoots began to wither on Lam Thi Loi의 농장에서 벼 싹이 시들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 메마른 땅에서 죽도록 놔둘 것이냐, 아니면 강에서 소금기 있는 물을 퍼올려 기회를 줄 것이냐. 


이곳의 많은 숙련된 농민들처럼 그녀는 소금기 있는 물을 주었다. 벼는 며칠 안으로 죽어버렸다.


베트남의 최고 곡창지대인 메콩강 삼각주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인 1926년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후 최악의 가뭄을 겪고 있다. 거대한 균열이 어디에서는 발 깊이까지 단단한 땅위에 새겨졌다. 누렇게 말라 죽은 벼들이 들판에 가득하다. 가뭄은 해충이 땅위에 쪼끌쪼글 말라 죽어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내가 13살부터 벼농사를 지었지만, 이런 가뭄은 처음 봅니다”라고 깔끔히 정돈된 거실에 앉아 Loi(38) 씨는 말한다. “2월에 벼 1가마를 수확했어요. 지난해에는 1.4톤이었죠.”


동남아시아에서 엘니뇨의 효과가 점점 더 심해지면서 폭염이 증가하고 강수량이 줄어드는 기상 현상의 원인이 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곳 삼각주의 흉작도 그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농민들은 공산주의 정부가 전통적으로 1~2모작을 해오던 자신들에게 3모작을 강요한 결과, 토양의 양분이 고갈되고 가뭄에 더욱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닷물이 평소보다 얕아진 메콩강 하류에 침범하고, 전보다 더 먼 삼각주까지 소금기 있는 물이 쓸려와 논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베트남 인구의 1/5인 1700만 명이 거주하는 삼각주의 13개 성 모두는 농경지의 소금물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정부에서는 이야기했다. 농업농촌개발부는 3월에 20만 가구가 심각한 물 부족을 겪고 있으며 그 숫자는 증가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소금기 있는 물은 오래전부터 삼각주에 침범해 왔지만, 가뭄 때문에 강에 충분한 민물이 부족하고 그 지류에는 바닷물이 뒤섞였다. 염분이 더욱 해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벼 작물의 위기는 벼 재배에 중점을 두는 정부의 정책을 더 수익성 있고 실용적인 대안인 새우 양식업을 권장하는 등으로 조정할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자연보존을 위한 국제연합(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의 고문인 Nguyen Huu Thien 씨는 말한다.



속쩡 성에 사는 Lam Thi Loi(38) 씨. “내가 13살부터 벼농사를 지었지만, 이런 가뭄은 처음 봅니다”라고 한다.



“베트남은 태국 다음가는 세계 2위의 쌀 수출국입니다”라고 동남아시아 지역을 언급하며 Thien 씨는 말한다. “그러나 농민들은 빛을 보지 못했기에 영광도 없고, 삼각주에서는 많은 이주자들이 생겼죠.”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한 뒤 1970년대를 뒤따라 “쌀 우선” 정책에 푹 빠져 있다. 당시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국가는 고립되어 무역 상대도 잃고 제조업 부문도 없던 때였다.


그때 당시, 정부는 소금물을 빼고 벼 재배에 더 나은 상태를 만들고자 삼각주에서 주요 운하를 따라 흙 제방을 건설하기 위하여 사업팀을 동원했다고 코넬 대학에서 삼각주에 대해 연구하는 Timothy Gorman 씨는 말한다.


그는 정부에서 재정을 지원받은 수문이 1990년대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2001년까지 소금물을 저지하는 데 진저리가 난 일부 농민들은 수문을 공격하고 파괴했으며, 삼각주의 서부 지역에서 타이거새우를 양식하려고 했단다. 


많은 농민들이 소금기 있는 물이 새우 양식에 좋다고 알고 있다고 Gorman 씨는 말한다. 그러나 벼에 대한 보조금 때문에 새우 양식업으로 전환하기 꺼려한다고.



메콩강 삼각주의 속쩡 성에서 벼농사를 짓는 Huynh Anh Dung 씨는 가뭄으로 농사가 망했다.



삼각주 상류의 수력발전 댐의 건설과 중국 남부 윈난성의 댐은 악재를 더하고 있다. 


메콩강 위원회(Mekong River Commission )에서 발표한 2010년의 연구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11개의 댐 건설이 귀중한 퇴적물을 가두어 삼각주에 도달하는 것을 가로막을 것이기에 우려를 표했다. 보고서는 무시되었고, 2개는 건설중이고 나머지는 앞으로 건설할 예정이다.


베트남의 보기 드문 양보로 중국은 지난 3월 윈난성의 댐에서 물을 방류했지만, 수량이 너무 적어서 벼농사의 흉작을 막지 못했다고 베트남의 정부기관은 이야기했다. 


주민들 사이에서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지방정부는 그것을 숨기고 있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지난 10월 메콩강으로 유입되는 캄보디아 똔레샵의 수위가 위험할 정도로 낮았다고 한다.


논을 젖시는 데 도움이 되는 베트남 안장An Giang과 동탚Dong Thap 성에 있는 다른 두 중요한 취수원 역시 수위가 매우 낮았다.



속쩡 성의 가뭄으로 말라붙은 운하. 1년 전에는 배가 지나다닐 수 있었다.



Loi 씨는 아무런 경고가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앞당겨서 쟁기질하고 파종했다. 그녀는 1천 달러 이상의 종자, 비료, 노동력 비용을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가 이 문제를 논의하고자 최근 지역관리가 소집한 모임에 참석했을 때 마을사람들은 경멸을 받았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들은 120달러만 나에게 제안했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예요. 우린 그들과 협상할 권리조차 없어요. 그들은 농민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얘기해요. 그러나 우리는 농사일에 전문가예요.”


두 시간 거리에 있는 강의 유역에서, 더욱 번창한 벼농사 농민인 Huynh Anh Dung(34) 씨는 약 100년 전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받은 7200평의 농사를 짓는다.


그가 2월에 소금기 있는 물 때문에 벼농사를 망쳤을 때, 그는 3모작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또 한다는 게 어리석은 일임을 알았다.


“친구가 염분을 측정하는 기계가 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1000에 4.8이었어요. 1000에 2 이상만 되면 어떤 식물이든 죽어요.”



속쩡 성의 Nga Nam 수상시장에서 많은 농민들이 농산물을 내다 팔며 생활한다.



일부 농민들은 마을 인구의 절반이 마을을 떠나 호치민 시로 일자리를 찾아갔다.


마을에는 일부 Dung 씨 같이 세련된 목재 가구와 텔레비전, 길가의 오토바이와 강가의 모터보트를 지닌 편안한 가정의 농민들이 있다.  그 집에서는 얼음을 갈아넣은 부드럽고 달콤한 아이스티가 손님에게 제공되었다. 


Dung 씨는 조상의 땅을 물려받아 머물러 있다. 그는 농사로 충분한 돈을 저축하여 시간제 일자리가 필요없다. 그의 삼촌은 가족농장의 일부에 유기농 여주를 재배하기 시작하여 잘 되고 있다.


최근 아침에, 그는 농지에 얕은 도랑을 파려고 일꾼을 고용했다. 비가 내리면 현재 땅에 박혀 있는 소금기가 더 빨리 사라지게 하려고 말이다. 


평안한 삶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2010년 댐에 대한 보고서의 저자 가운데 하나인 Thien 씨는 말했다. 너무 많은 댐들이 상류에 자리잡아 퇴적물의 부족이 100년 안에 결국 삼각주를 죽여 황무지로 만들 것이다.


“댐의 충격은 되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Dung 씨는 미래를 멀리 내다볼 수 없었다. 그가 염해와 그을린 땅을 생각할 때,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먹빛 구름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비가 오면 좋겠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http://mobile.nytimes.com/2016/05/29/world/asia/drought-and-rice-first-policy-imperil-vietnamese-farmers.html?smid=tw-nytimesphoto&smtyp=cur&ref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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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화가 Ho,Quang Ho이 그린 부엌의 모습.

제주의 부엌과 많이 닮았다.

서로 비슷한 환경이던가?

베트남도 남북으로 워낙 길쭉해서 이 그림의 소재를 얻은 곳이 어느 지역인지 알아야 비교가 정확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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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호박잎을 먹듯이, 베트남에서도 박과의 하나인 카요테의 새순을 먹는다.

우리가 나물을 무쳐 먹듯이, 그것과 똑같이 살짝 데쳐서 먹는다.



개발도상국 사람들,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거칠다?

이건 편견임이 틀림없다.

그네들의 사진을 보면, 그런 곳에서만 찍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순박하고 아름다운 웃음을 보여준다.

아래에 카요테 새순을 잘라 나르는 아가씨의 얼굴도 참 맑다.





나른 카요테 새순은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잘 추려서 단으로 묶는다.





1단에 무려 1kg! 엄청 많네.





카요테는 이렇게 생겼다. 호박과 친척.




언제 베트남에 가면 저 카요테 나물을 먹어 봐야지.

베트남 음식은 한국 사람 입맛에도 잘 맞더라. 이것도 맛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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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소들이 고깃덩어리로 바뀌기 전, 중요한 일꾼 대접을 받으며 살던 시절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나에게는, 그 시절 어른들이 냇가 등지에 자라던 풀들을 지게 가득히 베어다가 소를 먹이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베트남 중부 고원 지대에서 그 당시의 기억을 되찾을 줄이야.









낫의 모양이 참 특이하게 생겼다.

지역마다 낫도 천차만별.








꼴을 베어 집으로 가져온 뒤 잘 분류하여 소에게 먹인다. 

풀마다 소가 좋아하고 아니고가 다를 테고, 원하는 목적에 따라 분류해서 먹이는 것일까?





낫은 기둥에 탁 꽂아 놓는다. 

지금도 한국 농촌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 베트남에서도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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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까마우 성의 망그로브 숲(녹색)이 새우 양식장(청색)으로 변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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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4학년 여학생이 향사에 갔다가 오는 길이라면서 향사에서 사가지고 왔다는 간식거리를 주고 갔다.

향사(香寺)는 경치가 아주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또 베트남 사람들이 새해에 무척 많이 찾는 절이다.

(향사에 대해서 궁금하시면 http://blog.daum.net/mshis/31 )

 

학생에게 향사까지 무얼 타고 갔냐고 물으니,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고 대답을 하며 2시간 가량 걸렸다고 했다.  

향사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기에는 거리가 무척 먼 절인데...

베트남 여학생이 참 대단하다.

 

내게 먹어보라며 향사에서 사 가지고 온 꾸 마이(Cu Mai, 성조 생략)와 꾸 뜨(Cu Tu, 성조 생략) 

 

 

위의 하얀색 껍질 깐 것이 꾸 마이 이고, 껍질이 있는 것이 꾸 뜨 이다.

꾸 뜨는 전에 시장에서 사서 쪄 먹어봐서 알고 있었지만,  꾸 마이라는 것은 오늘 처음 보는 것이다.

(꾸 뜨에 대해서 궁금하시면 http://blog.daum.net/mshis/20 )

 

어떻게 생긴 구근류인지 궁금해서 꾸 마이에 대해 찾아보니 고구마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다.

 

베트남 구글에서 검색한 꾸 마이 사진 

 

 

맛을 보니 고구마 보다는 팍팍하고, 단 맛이 거의 나지 않는다.

고구마와 비슷한 꾸 산(Cu San) 도 전에 사서 먹어 본 적이 있는데 꾸 산과도 맛이 달랐다.

(꾸 산에 대해 궁금하시면 http://blog.daum.net/mshis/83 )

 

베트남어에서 구근류의 이름에는 거의 다 꾸(Cu) 라는 말이 붙는다. 

꾸(Cu) 로 시작되는 단어가 몇 개될까 궁금해서 사전을 찾아보니 무척 많다.

꾸 마이는 꾸 산 처럼 고구마의 먼 조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도대체 베트남 구근류의 끝은 어디일까?

 

구근류의 족보를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ㅎㅎ

출처 : 사.노.라.면...
글쓴이 : 꼬 쏘아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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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armer tends his cows on a rice paddy field in Thach Bich village, outside Hanoi. Waste from cattle and other farm animals is producing biogas for cooking for more than 400,000 Vietnamese, as well as reducing carbon-dioxide emissions.

Nguyen Huy Kham/Reuters/File



Nguyen Thi Huong, a paddy rice farmer in central Vietnam’s Phong Binh commune, enjoys cooking in her smoke-free and pollution-free kitchen.

“Before the advent of clean biogas, cooking was an uneasy and hazardous job for me. My kitchen would become smoky with black particles coming out from the muddy stove from fuel wood burning. The black ash would make me cough the whole day and cause soreness in my eyes,” recounted the 35-year-old.

For Huong, a mother of two children, collecting fuel wood daily from the nearby mangroves forest was a no less tedious task, particularly when she was already busy rearing pigs, looking after children, and doing house chores.

But a biogas system provided by Norwegian Church Aid(NCA) International has made her life much easier, Huong s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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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lean biogas fire “has got rid of my cough and eye infections, and given me a sense of cleanliness,” she said – not least because her village now also has a solution to its former animal manure problem.

The Phong Binh commune is a low-lying coastal area in the Phong Dien district, some 45 kilometers (28 miles) northwest of the city of Hue.

Stretched over nearly 690 hectares (1,700 acres), around 91 percent of the area is in rice production and livestock, and fishing is a secondary source of work during the non-rice-sowing season. The commune has 1,717 households, with over 8,000 people living across 10 villages.

Nguyen The Dong, one livestock farmer, remembers how managing animal manure used to be a serious problem for the community.

But Dong now has a biogas plant that is turning the stinky manure from his 100 buffalos, as many pigs, and over 200 ducks into a useful resource.

“I feed the bio-digester with manure everyday, which after an anaerobic process churns out clean gas for our kitchen. I also use this gas for lighting during the night and boiling water for bathing during winter,” he said.

More than 70 percent of Vietnam’s people live in rural areas, earning a livelihood from agriculture, animal husbandry, and fishing. Most rely on wood, charcoal, agricultural residue, and dried animal dung for their energy needs.

Gathering the traditional fuels also devours precious daylight hours that children and women in particular might otherwise spend at school, or in income-generating or social activities.

But development organizations like Norwegian Church Aid (NCA) and SNV, a Dutch development organization are now promoting the use of biogas from manure in the region. NCA has provided 82 biogas plants along with energy-efficient stoves in Phong Binh commune.

The change is reducing pressure on mangroves and other forests in the area and allowing farmers to use the nutrient-rich slurry left over from the biogas digesters as a crop fertilizer, said Hoang Thi Thanh Mai, an NCA clean energy expert.

“Bio-slurry is really good, as it has improved soil fertility. Its application has reduced bills for chemical fertilizer, whose cost has risen a lot over the years, making cultivating of crops financially difficult for many small farmers like me,” Dong said.

SNV officials say that since 2006 the organization has, in conjunction with Vietnam’s government, installed 78,000 biogas plants in more than 30 provinces of the country. The plants have benefited more than 400,000 people and are reducing the country’s carbon emissions by 167,000 tons a year, the officials said.

The Ministry of Agriculture and Rural Development of Vietnam has now launched an ambitious program with the SNV to install an additional 168,000 biogas systems by the end of 2012.

With a lifespan of 15 years, one biogas plant costs an estimated $500, which is a sizable investment for a farming family with moderate income. But clean energy experts say the advantages make it worth the investment for many families.

On average, farmers with at least two head of cattle or six pigs can generate sufficient biogas to meet their daily basic cooking and lighting needs.

The investment in a biogas plant is recovered in about three years, said Bastiaan Tenue, SNV’s biogas adviser in Vietnam.

Apart from the household benefits, use of biogas can protect forests, fuel new businesses, and improve air quality, he said. Reports by international and national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in Vietnam suggest more than 300,000 jobs have been created in biogas energy since 2003, including many for village people trained in biogas plant construction.

Dao Ngoc Bay in Phong Binh commune is one of them.

“I have built a number of biogas plants for SNV, which imparted me training on biogas plant construction. Now, I am happy that people are calling on my cellphone and asking me build biogas plants for them. I will continue to build biogas plants for private customers as long as there is demand, said the 35-year-old mason.

Tenue, the biogas adviser, foresees massive expansion in the use of biogas in rural Vietnam,CambodiaLaosPakistanIndiaNepalSri Lanka, and many Asia-Pacific countries.

“Biogas is here to stay as long as there are farmers raising their cattle in Vietnam and other Asia-Pacific countries, most of which are extremely vulnerable to effects of climate change and shrinking natural capital,” he said.

“Alone in Vietnam there are over 1 million households that qualify for a biogas plant,” he said.

• Saleem Shaikh and Sughra Tunio are climate change and development reporters based inKarachi, Pakistan.

• This article originally appeared at Alertneta humanitarian news site operated by the Thomson Reuters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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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smonitor.com/World/Making-a-difference/Change-Agent/2012/0717/Clean-biogas-improves-life-in-rural-Viet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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