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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의 말, 아내가 얼마 전 태백산맥을 다시 읽고서 그 주무대인 벌교를 가고 싶다고 하여 한 달 전부터 약속한 날이다. 나도 2년 전 여름, 후배와 함께 찾았던 곳인데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차에 함께 길을 나섰다. 더구나 사흘의 연휴가 끼어 있으니 더욱 좋다. 원래는 하루 자고 오려고 했으나, 집에서 기다리는 개새끼 때문에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열차표까지 샀다가 다시 취소하고 끊었을 정도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어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잠시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지나자 아내가 꿈틀대기 시작했고, 연풍이도 이른 아침 산책을 해야 하기에 씻고 집 앞 공원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나오는 건 무서운가? 원래 겁이 많은 놈이기도 한데, 무엇이 스르륵 거릴 때마다 겁이 나서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꼬리를 내리고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한다. 이렇게 겁이 많은 자식도 한 가지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진돗개! 진돗개만 보면 용맹하게 덤빈다. 내가 다 민망하고 걱정이 될 정도로 말이다. 며칠 전에도 그렇게 동네 골목길에서 만난 진돗개한테 덤벼 물려 죽는 줄 알았다. 그 진돗개가 내 눈치를 보고 연풍이만 제압한 다음 도망가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물려 죽었을 게다. 제압당했을 때도 그때뿐, 진돗개가 도망가자 그걸 또 쫓아내며 의기양양이다. 진돗개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자 그제야 낑낑거리며 자기 아프다고 엄살이다. 웃긴 자식.

 

아무튼 그렇게 아침 산책을 가볍게 마치고 6시 30분 집을 나섰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 나가 버스를 타고 출발! 앗, 그런데 이게 웬일? 카메라를 집에 놓고 왔다. 한 정거장도 가기 전에 알아차려 다행이지, 큰일날 뻔했다. 얼른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뛰어서 다녀오니 6시 40분이 조금 넘었다. 상록수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 수원행 버스로 갈아타고 수원역에 도착하니 7시 5분쯤되었다.

아침에 서두르느라 해결하지 못한 생리현상을 수원역에서 처리하고, 간단한 요기거리를 사들고 여수행 기차에 7시 25분 올랐다.

 

기차 안에서는 일단 배부터 채우고 미처 풀지 못한 피로를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멀기도 멀어라, 4시간 반을 달려 순천역에 도착했다. 지난 여름에는 이곳에서 88번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그때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고 버스도 자주 없다는 걸 알았던지라 이번에는 아예 터미널로 향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만 가면 바로 터미널이다. 한 사람에 2300원을 내고 12시 35분 벌교행 버스가 출발했다.

 

1시 00분, 벌교터미널에 도착했다. 아침도 못 먹고 왔는지라, 배에서는 허기가 져 아우성이다. 그래도 미리 생각한 동선대로 움직여야겠기에 먼저 회정리 교회로 향했다. 회정리 교회를 향해 가는데 '조정래길'이란 주소판이 눈에 띈다. 2년 전에는 못 본 것인데, 이제 조정래와 태백산맥으로 문화관광상품을 만들었나 보다.

 

조정래길. 한 소설가의 이름이 이렇게 주소로 사용되는 곳이 얼마나 될까? 그의 태백산맥 집필 과정이 힘들었던 만큼 이제야 제 빛을 보는 듯하여 흐뭇하다.

 

 

회정리 교회는 지난 여름에도 둘러본 곳이다. 1935년에 지은 건물이라는데 당시의 건물치고 규모도 크고 독특한 건물이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이 교회는 김형모 목사와 신도들이 힘을 모아 지은 60평의 예배당이다. 태백산맥에서는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곳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70년 전 일본인 농학자 다카하시 노보루가 이곳 벌교에 왔을 때도 이 언덕 위에서 벌교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회정리 교회는 지금은 예배당이 아닌 '대광어린이집'으로 쓰이고 있다. 휴일이라 문이 잠겨 있어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의 마룻바닥이 그대로 깔려 있다. 그리고 당시 유교 관념에 걸맞게 남녀의 출입구가 사진과 같이 따로 나 있다. 왼쪽이 남자, 오른쪽이 여자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지금은 왼쪽 문만 사용하고 오른쪽 문은 아예 걸어 놓았다.

 

첨탐 부분도 원래 벽면과 같은 방식으로 쌓아 올렸으나, 지금은 합판 같은 걸로 둘레를 쳐 놓았다. 관계자가 있으면 설명을 듣고 싶었으나, 시간도 없고 그냥 지나쳤다. 건물 뒷편(사진의 오른쪽)으로 가건물을 덧대어 주방으로 쓰고, 건물 저 건너편으로는 어린이집 건물과 놀이터가 있다.

 

 

회정리 교회를 한 바퀴 훑어 본 다음에는 배를 채우러 갔다. 지난 여름에 왔을 때는 벌교의 참맛인 꼬막을 맛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오늘은 제대로 먹을 수 있어 내심 기대했다. 미리 알아보니 '홍도회관'이란 곳이 유명하다고 하여 '외서댁 꼬막나라'를 지나 빙둘러 그리로 향했다. 태백산맥을 보신 분은 알겠지만 외서댁이란 이름과 꼬막을 연결해 놓은 그 집,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아내는 두 이름을 연관시켜 놓은 게 참 거시기하다며 입에 올리지 말란다.

 

홍도회관에 도착하니 점심 때가 조금 지나서인지 그리 붐비지 않는다. 오면서 지난 다른 식당들은 관광버스들이 잔뜩이라 시끌벅적해 보였다. 그래서 들어오면서 좀 걱정했다. 소문만 무성하고 맛은 별로가 아닐까? 자리에 앉으니 자동으로 정식 2개가 착착 나온다. 먼저 살짝 데친 꼬막이 나왔는데, 이것들이 머금은 국물이 오묘하다. 벌교의 뻘흙을 머금은 꼬막의 내장에서 나는 그 향과 맛은 머릿속에 푹 들어와 박혔다. 꼬막에서 처음 느끼는 향과 맛이다. 다음으로는 꼬막에 어울린다고 하여 13도의 녹차주를 시켰는데, 이건 생각보다 별로다. 여성을 겨냥해 만든 것인지 너무 달다. 꼬막의 좀 짭쪼름한 맛을 살리려면 이렇게 달짝지근한 술보다 시큼새콤한 맛이 더 나을 것이다. 아니면 개운한 맛이라든지. 아무튼 술은 영 별로다. 그냥 안동소주나 시켜 먹을 걸 그랬다.

 

맛있게 꼬막의 다양한 요리를 조금씩 맛보았다. 전체 평은 10점 만점에 7점. 지난 여름 벌교 장날 먹었던 2000원짜리 밥이 너무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집도 맛은 있으나 비싼 값에 비해 양이 좀 적다는 단점이 있다. 밑반찬도 그날 한 것이 아닌 듯하고... 벌교가 꼬막으로 너무 떠서 그런가 보다. 어딘가 벌교 장터 밥집 같은 곳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벌교 사람한테 물어야 알겄지.

 

 

 

아내는 교정기를 위아래에 설치한 뒤라 음식만 먹으면 곧바로 화장실로 향하여 이를 닦는다. 꼬막을 먹으면서도 맛있는데 질기다며 이러면 이에 많이 낄 것이라 걱정하더니, 우려대로 먹고 난 뒤 이에 잔뜩이다. 시장터에 자리한 공용화장실에 가서 이를 닦고 나오는 틈에 난 고기를 손질해 말려 놓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아내의 표현에 따르면 개코원숭이 대가리 같다는 가오리? 홍어?

 

이건 갯가 사람들 아니면 먹지 못할 듯하다. 바로 옆에 서 있어도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배도 채웠겠다, 술도 한 잔 마셨겠다, 이제는 동네 산책을 할 차례이다. 벌교읍이라는 행정명이 있지만, 솔직히 이곳 벌교는 우리 동네보다도 좁다. 옛날의 영화만 가득 안고 있는 옛 건물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지난 번에 왔을 때 깜짝 놀랐던 본정통 거리는 지금도 일제강점기 때의 거리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이걸 놓칠 수 없기에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찾은 곳은 다카하시 노보루가 묵었던 보성여관(남도여관)이란 곳이다. 일본식 정원이 아직도 남아 있는 흔치 않은 곳이라 자연스레 이곳을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거리에 들어선 순간 무언가 느낌이 달라졌다. 여기저기 어수선한 흔적들, 파헤치고 무너뜨린 모습들, 먼지가 이는 거리, 어수선하다.  

 

분명 이 자리에 있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은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사라지고 잔해와 먼지만 수북하게 쌓여 있을 뿐이다. 그 뒤 공터에서 여자아이들이 비누방울을 불면서 놀고 있다. 비누방울과 철거, 묘하게 어울린다. 지금 내 기분과도.  

 

2년 전에 서 있던 건물. 이렇게 사진은 역사가 되는 것인가 보다.

 

 

여관 건물도 창이 깨지고 을씨년스럽다. 입구를 통해 지난 번처럼 안을 보려고 가니 공사안내판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올해 말까지 보수공사를 하느라 이렇다는 설명이다. 그럼 내년에 올 걸 그랬나? 아니다, 2년 전에 와서 역사를 간직한 채 현대의 사람들이 쓰던 모습을 보았으니, 이번에는 새로 단장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간 다음, 내년에 또 와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해야 쓰겄다.

 

문화재보수를 위해 보성군청에서 발벗고 나선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전에 낡은 건물을 보면서 이런 가치 있는 건물이 방치되는 것 같아 가슴 아팠는데 말이다. 참, 이곳 여관을 다시 오니 작년 가을 일본 후쿠오카에서 묵었던 80년 넘은 여관이 생각난다. 그 건물과 비교하여 규모가 절반 정도는 된다. 이곳도 잘 살려서 계속 여관 건물로 활용하는 건 어떨까?

 

요즘 한옥을 여관으로 쓰는 일도 많으니, 역사문화의 거리로 조성하려면 아예 이곳을 그런 식으로 운영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고 보성군에 말하고 싶다.

 

2년 전 태풍이 지나간 어느 늦여름에...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건물을 찍은 사진. 

 

 

다음으로 걸음을 금융조합 건물로 옮겼다. 지금으로 치면 농협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얼마나 멋있게 지어 놓았느지 지금 보아도 훌륭하다. 이곳에 들어가는 조선 농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일단 돈을 빌려야 하니 굽신거리며 들어가, 머리를 연신 조아리고, 서류에 도장을 찍고는 소중하게 품에 넣고서 나오며 인사를 꾸벅 드렸겠지. 무엇 하나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돈 없는 놈이 서러운 것이라는 말이 왜 계속 귓가에 맴도는지 모르겠다. 역시 요즘 같은 시대에는 돈이 최고인가? 언제 화폐의 역사도 한 번 찬찬히 살펴보아야겠다. 분명 인간의 필요로 만든 돈이, 오히려 인간 위에 군림하며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하니, 이건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지금은 농민상담소르 쓰는 옛 일제강점기 금융조합 건물. 이런 촌구석에 이렇게 훌륭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벌교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곳에서 인근을 쌀을 모두 그러모아 목포로 보냈겠지. 옛날에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그러한 사정으로 인해 이권에 개입된 세력들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먹들이 모이며 서로 이권 다툼을 벌였기에 생긴 말이다. 

 

똑바로 솟은 교회 첨탑 앞으로 금융조합의 삐딱한 피뢰침, 또 거리엔 시험포장을 한다는 공사 안내 현수막까지, 정비되지 않고 옛 영화만 간직한 벌교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정비 사업이 끝나고 나면 과연? 그때 가서 다시 확인할 일이다.

 

벌교 본정통은 지금 공사중. 기차를 타고 순천을 거쳐 버스를 타고 벌교로 향하면서도 대한민국은 현재 '공사중'이란 사실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섬진강은 무슨 일 때문인지 몰라도 벌겋게 흙탕물이 흐르고 있고, 여기저기서 새로 뚫는 고속도로에, 이곳까지 속살을 다 드러내 놓고 먼지가 풀풀 나며 공사중.

 

이곳은 이제 '태백산맥길'이다.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가 되는 건물들이 즐비한 곳이라 이렇게 이름을 붙였을 게다.

 

 

이제 소화다리를 건너 태백산맥 문학관에 갈 차례이다. 소화다리는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소화가 건너다닌 다리라서 소화다리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소화 몇 년에 놓은 다리라서 그렇게 부른다. 원래는 부용교라는 멋들어진 이름이 있으나 벌교 사람들에게 이 다리는 일본놈들이 놓은 소화다리일 뿐이었다. 소설 태백산맥에는 이 다리에 얽힌 아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바로 빨치산을 처형하는 장소로 이 다리가 사용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다리에는 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리 위에 개울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리고 앉힌 다음, 뒷통수에 대고 총을 "탕" 쏘면 시체를 수습할 필요도 없이 바닥에 쳐박히는 편리함(?) 덕분에 이곳을 이용했다는 이야기이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지만 지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주변 풍광이 아름답기만 하다.

 

소화다리 위에서. 아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진다. 상처가 아물어 흉터만 남기고 모든 게 사라지듯이.

 

 

태백산맥 문학관은 터미널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벌교읍은 걸어서 2~3시간이면 모든 곳을 다 돌아볼 수 있다. 산책 삼아 문학관까지 슬슬 걸어 올라가 입구에 들어서니, 보성군민을 제외하고는 입장료가 2000원이라 한다. 장애인 무료란 말은 없는지 눈 씻고 보았지만 그런 문구는 없어 그냥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갔다. 화요일은 휴관이고, 5세 미만 65세 이상은 무료라고 한다.

1층은 태백산맥과 관련한 여러 자료를 전시하고, 2층에는 조정래 씨의 다른 소설들을 전시하며, 4층은 전망대로 벌교를 한눈에 내려다보게 만들어 놓았다. 개인적으로는 전망대에 창이 없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태백산맥을 뻥튀기해 놓은 책 10권이 서 있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아 우리도 한 장 찍었다. 연휴라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고 있어 솔직히 좀 놀랐다.

 

 

1층의 여러 자료 가운데 나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무엇보다 취재노트이다. 옛날 일수 찍는 수첩에 취재 기록을 적었는데, 전체의 양이 그걸로 200여 권이나 된다고 한다. 아, 취재는 이렇게 하는구나. 그걸 바탕으로 이런 작품이 나오는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도 여기저기 취재를 많이 다니기는 했는데, 자료를 어떻게 모으는지 어떻게 정리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아 모두 흩어져 버렸다. 유일한 것은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정리되어 있는 원고뿐. 그것만큼 원천자료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앞으로는 잘 정리해서 보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벌교읍의 모습을 기억하여 정리한 지도. 이런 철저한 취재 끝에 대작 태백산맥이 탄생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일각의 목소리도 있지만,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소설은 없는 법이란 것도 사실이다. 소설은 당시 현실을 기반으로 작가라는 인간을 통해 새롭게 구성된 기록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위에 보이는 약도 말고도 빨치산의 활동을 적어 놓은 기록도 흥미로웠다. 빨치산의 은신처를 어떻게 만드는지 그려 놓은 그림이 있었는데, 꼭 감자움 같아서 여기에도 농사의 기술이 쓰였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또 빨치산을 취재한 내용도 흥미로웠다. 인간의 환경적응력은 대단해서, 산길을 그렇게 뛰어다녀도 숨이 차지 않았다는 둥, 무거운 짐을 지고 밤을 꼬박 새며 산을 넘어 다녀도 힘들지 않았다는 둥, 겨울을 나려고 준비하는 것을 우스개 소리로 똥을 피한다는 월똥준비라고 했다는 둥, 신발이나 생필품을 많이 사가는 사람이 있으면 빨치산으로 의심을 받았다는 당시의 생생한 증언들이 가득했다. 그냥 전시물을 쓱 훑고 지나가면 보이지 않으니, 언제 가시면 전시물에 적힌 글씨를 꼼꼼히 보시라.

 

문학관을 나오며 기념품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 머그컵(5000원)과 연필(10자루, 5000원)을 구입했다. 문학관 사업에 긴요하게 쓰이면 좋겠다. 이 모든 게, 입장권까지 현금영수증 처리가 되어 더 기분이 좋았다. 이번에 연말정산 환금을 받아보니 좋더라.

 

문학관을 나와서는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는 현부자집을 들어갔다. 이곳에 처음 왔던 건 2년 전 그때. 당시에는 아직 건물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점심 때가 조금 지난 시간이라 대청마루에는 인부로 보이는 분들 몇몇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도 날도 덥고 하여 들어가 한켠에 조용히 앉았다가 땀을 식히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재밌는 기억으로는 이런 부잣집은 화장실이 어떻게 생겼나 하고 찾아 돌아다닌 일이다. 특이하게도 근현대에 지은 집이라 그런지 화장실이 살림집 밖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아래 사진에 보이는 왼쪽 편 제일 뒤에 마련되어 있다. 문을 열면 이른바 푸세식이라 부르는 변기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아래로 똥이 뚝 떨어지면 그걸 긁어서 치우게 되어 있는 구조이다. 그래 '아, 화장실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며 호기심에 마루 밑으로 몸을 굽혀 바라보니, 아저씨들 똥이 쌓여 있는 게 아닌가. 에이, 그래서 괜히 기분 잡쳤다. 똥이 거름이 된다는 생각이 있어도, 그래도 남의 똥을 보는 건 기분이 더럽다.

 

현부자집에서 한 장. 일제강점기에 지은 한옥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집이다. 대문 위에 솟아 있는 감시탑. 물론 감시탑이 아닐지 모르지만, 어쨌든 자신이 소유한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조이니, 소작인들이 이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지는 뻔하지 않을까?  전에 토종수집을 위해 교동도에 들어갔을 때도 이런 구조의 집이 보여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일정 때문에 그냥 지나쳤던 기억이 난다. 또 마루 앞에 불쑥 튀어나와 있는 현관 구조. 그리고 앞서 말한 건물에 속해 있는 화장실도 그러하리라. 조선에서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대로 들어오면서 한옥의 형태와 구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렇게 벌교 태백산맥 기행을 마치고 다시 벌교터미널로 향했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3시 50분. 4시에 떠나는 순천행 버스에 몸을 싣고 순천에 가서 마침 장이 열린지라 아랫장(2, 7일장)에 들러 기차 안에서 저녁 대신 먹을거리와 집에 와서 먹을 한 할머니가 직접 캔 봄기운 가득 담긴 냉이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시 규모와 어울리지 않게 벌교터미널은 엄청나게 크다. 언젠가 이 터미널에 각지로 가는 버스로 붐비게 될지, 아니면 조그맣게 줄어들지, 그것도 아니면 아예 헐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이 한 장의 사진도 또한 역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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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본정통이었다. 

이 길을 따라 일본식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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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관寶城館에 가다


1939년 10월 18일. 하늘은 가을답게 높고 푸르다. 다카하시 노보루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7시에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8시 반쯤 보성관을 나서 농가 조사에 나섰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지난 42호 맨 끝머리에 보성관이란 조선인 여관의 상차림을 소개한 적이 있다. 지난해 7월 중순 수소문 끝에 직접 보성관에 다녀올 기회를 얻어 실제로 눈앞에 보성관을 맞닥뜨리고 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사로잡혔다. 눈은 물론 땀구멍 하나하나에 건물의 숨결이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림 1) 아직도 벌교읍에 가면 볼 수 있는 보성관. ?��태백산맥?��의 유명세에 덩달아 남도여관이 되었다. 이 건물이 있는 거리, 옛 본정통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다양한 건물들을 볼 수 있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이 거리를 중심으로 나왔다.

현재 보성관은 소설 ?��태백산맥?��의 후광을 입어,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소설을 읽으신 분들 가운데, 빨치산 토벌대가 머물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학교 운동장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장면이 기억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바로 그 주요 무대가 보성관이다. 우리네와 함께 숨을 쉬며 사람들의 피땀이 고스란히 밴 그 건물은, 문화재청에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놓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런 제도를 만들어 참 다행이다. 그동안 개발이란 이름으로 쓰러져 간 유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제 보성관은 여관으로는 쓰지 않는다. 학교 정화 구역이 되면서 1988년에 간판을 내렸기 때문이다. 1988년은 서울 올림픽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참 많은 변화가 있던 때였다. 학교 정화 구역이란 법도 그런 영향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때 험한 파도를 헤치며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 온 모든 분들께 고마울 뿐이다. 올해도 큰 파도가 밀려오지 않을까 싶다. 지난 1월 중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는 농촌진흥청을 폐지하고 민간으로 위탁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물론 민영화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민간에 넘길 것은 넘기고, 정부에서는 그 관리와 감독 등에 더 힘쓰는 것이 좋은 분야도 있다. 하지만 나라의 뿌리가 되는 것들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했으면 좋겠다. 요즘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한다고 하지만, 어쨌든 농업을 포기하겠다는 상징이어서 몹시 씁쓸하다. 농업과 관련된 단체나 개인 말고 농촌진흥청 폐지안에 반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제 우리 시대는 농업에 별 관심이 없다. 그것이 더 가슴을 아리게 한다.


아무튼 현재 건물의 1층은 가게들과 살림집으로 쓰고, 사진에서 보이는 2층은 텅 비어 있다. 1층에는 방이 모두 10개이고, 지금은 비어 있는 2층에는 큰 다다미방이 4개가 있다. 이 정도 규모였으니, 다카하시 노보루 씨가 이 여관에서 묵으며 벌교에서 가장 좋은 여관이라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건물은 ‘ㄷ’자 구조인데,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정원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 왼쪽과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있고, 안채로 쓰는 건물 위에다 2층을 올렸다. 이 건물을 지키고 있는 건 나종필(73), 유보임(72)이라는 노부부이다. 벌교에서만 8대째 사는 토박이이시다. 이 분께서 1979년에 이 건물을 5만원에 샀다고 한다. 그 덕분에 보성관은 지금도 훼손되지 않고 역사를 증언하며 살아남았다.


그림 2) 건물 마당은 일본식 정원이다. 저 방 어디에선가 다카하시 노보루 씨가 묵었을 것이다.


벌교읍 회정리廻亭里의 박응렬朴應烈 씨


그는 회정리에 사는 박응렬이란 분을 찾아간다. 그곳에 가려면 지금은 부용교라고 부르는 ‘소화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소화 6년)에 놓았다고 그렇게 불렀다. 원래 다리에는 난간이 없어서, 한창 빨치산을 토벌할 때 다리에 무릎 꿇린 다음 그대로 처형하면 바로 강바닥에 떨어져 강물이 시뻘겋게 되었다. 태백산맥에서는 이를 이렇게 묘사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겠구만이라….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허겄구만요.” 물론 이 일은 다카하시 노보루 씨와는 크게 상관없는 훨씬 이후의 일이다.


박응렬 씨의 식구는 모두 8명이었다. 본인(40), 아내(35), 어머니(60), 학교 다니는 맏아들(15), 둘째아들(10), 셋째아들(7)과 4살·3살짜리. 소도 1마리 있고 닭은 10마리라고 하니, 웬만큼 살았을 것이다. 논은 1마지기에 250평인데 모두 15마지기를 짓고, 밭은 800평 있다. 거기에 대숲 900평을 관리한다.

이렇게 조사하던 1939년에는 우리나라에 엄청난 가뭄이 있었다. 그 까닭은 지나치게 발달한 북태평양고기압 때문이라고 한다. 여름 내내 뙤약볕만 내리쬘 뿐 비 한 톨 내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1년 평균 강수량이 보통 1250㎜ 정도 되는데, 그때는 20세기 100년 동안 가장 적은 양인 754㎜의 비만 왔다. 이 때문에 박응렬 씨도 올해는 모내기를 아예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조사 내용은 자연히 지난해의 것으로 채웠다. 그 내용 가운데 뒷갈이로 보리를 기르는 방법을 살펴보자. 이곳은 남도답게 한 논에서 두그루부치기를 할 수 있다. 보리를 심는 곳은 정확히 나오지 않는데, 기록의 행간으로 유추하면 아마도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8배미 200평짜리 땅의 일부에 심는 것 같다.



뒷갈이 보리 기르기


먼저 벼를 거둔 다음 20일 뒤에 자신이 쟁기질을 한다. 싹갈이를 하는데, 저녁까지 끝낸다. 싹갈이는 두둑을 짓거나 하지 않고 밭 전체를 그냥 다 갈아엎는 방법이다. 지난해에는 벼를 9월 말에 거뒀으니, 아마 10월 중순쯤 싹갈이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5일 뒤에 써레질을 한다. 논 써레와는 달리 그림처럼 소나무로 짠 것이다. 이걸 소에 달고 다니며 땅을 고르게 만든다. 써레질은 오전 한나절에 끝내고, 오후에는 땅을 말려 그 다음날(11월 10일쯤) 두둑을 짓고 보리씨를 뿌린다.

그림 3) 소나무로 짠 써레

보리를 심는 날에는 자신이 소를 부려 두둑을 짓고, 그밖에 아내와 머슴, 남자 일꾼 4명과 여자 일꾼 3명이 함께 일한다. 이 마을에서는 머슴에게 1년에 나락 3섬과 두세 벌의 옷을 주는데, 50원 정도 된다. 그리고 놉의 품삯은 남자 80전(밥 없이), 여자 50전이다.

가장 먼저 물 빠짐 고랑을 낸다. 논의 둘레와 한가운데를 소로 2번 갈아서 24㎝(8寸) 너비의 고랑을 낸 뒤, 삽으로 고랑을 다듬는다. 이 일에 자기와 소, 놉 1명이 한나절 걸린다. 다음으로 씨를 뿌릴 골을 탄다. 먼저 쟁기로 2번 갈아서 대충 골을 타고, 그 다음 쇠스랑이나 괭이로 골을 깔끔하게 친다. 이 일은 자기 혼자 한나절 걸린다. 골을 탄 뒤에는 따로 써레질을 하지 않는다. 쟁기질 할 수 없는 논의 양쪽 끝부분은 괭이로 골을 탄다. 그런 다음 그 다음날 보리씨를 뿌린다. 씨를 뿌리는 날에는 소를 부리지 않는다. 그리고 씨를 다 뿌리고 난 뒤에는 둘레의 물 빠짐 고랑을 가장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다듬는다.

그림 4 점선이 물 빠짐 고랑

두둑 너비는 45㎝(1尺5寸)이고, 쌀보리인 죽하종竹下種이란 이름의 보리를 1말 5되 심는다.

씨뿌리기는 자기 혼자 바가지에 담아 두둑 위로 걸어가면서 고랑에 손으로 뿌린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보리씨 한 움큼으로 1.8m(1間)를 심는다. 보리는 18㎝(6寸) 너비에, 간격은 3㎝(1寸) 정도 되게 뿌린다. 이를 보아 점뿌림이나 줄뿌림이 아니라 흩뿌림에 가깝다. 그 뒤를 따라 1명이 소쿠리에 유조硫曹 8호라는 화학비료(1가마니 3원, 37.5㎏<10貫>)를 담아 보리씨 위에 뿌린다. 다시 그 뒤에 남자 3명이 소쿠리에 똥재를 담아 한 번에 12m(5尋)씩 15지게 분량을 준다. 거름을 다 준 다음에는 남녀가 함께 쇠스랑이나 괭이로 흙을 덮고, 따로 밟아 주지는 않는다. 특히 이듬해 여기에 목화를 사이짓기하려고 한다면, 보리 두둑의 너비를 81~84㎝(2尺7~8寸)로 넓게 만든다. 이렇듯 작부 체계에 따라서 쟁기질이나 두둑을 짓는 방법부터 씨를 심는 방법까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농사는 봄에 어떻게 계획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씨뿌리기를 마치고 10일 뒤에는 처음으로 웃거름을 준다. 이때 사람 오줌을 15장군 주는데. 장군 하나 분량으로 90m(50間)를 줄 수 있다. 원래 오줌만 4장군인데, 여기에 개숫물을 섞어 15장군을 만들었다. 오줌을 줄 때는 그림과 같은 ‘구뎅이’라는 것을 쓴다. 대부분 나무로 만드는데, 오지그릇으로 만든 것도 있다. 이건 당시 1개에 80전이고, 1년에 수선비로 20전을 들여 3~4년을 썼다. 구뎅이 5개가 장군 1개의 양과 맞먹는다. 박응렬 씨의 식구 8명이 오줌을 누면 4일에 1장군을 채운다. 그래서 오줌 4장군이 되는 보름마다, 15장군으로 만들어 웃거름을 준다. 이렇게 음력 정월 전에 다섯 번쯤 웃거름을 준다.

다음으로 웃거름을 줄 때는 음력 3월 초쯤인데, 이때는 배합비료를 장군 1개에 5홉 정도 넣고 물에 섞어서 준다. 이 무렵 보리는 9~12㎝(3~4寸) 정도 자라, 3포기쯤 새끼를 쳤다. 배합비료 1가마니로는 50장군 정도 웃거름을 만들 수 있다.


그림 4) 다른 말로 구댕이, 구대동이, 귀때동이라고도 한다. 주로 논밭에 져다 놓은 오줌이나 똥, 재 같은 거름을 거름통에서 덜어 여기저기 뿌리는 데 쓴다. 한쪽에 귀때를 붙여 액체를 따르는 데 편리하다.

김매기는 음력 정월까지는 따로 하지 않고, 두 번째 웃거름을 주기 20일 전에 애벌매기를 한다. 여자 6~7명과 자신이 하루에 끝낸다. 그때 나오는 풀의 양은 10지게인데, 이 풀들은 모두 두엄을 만들려고 집으로 나른다. 품삯은 여자 1명에 하루 20전과 두 끼를 준다. 호미는 일하러 오는 사람들이 알아서 가지고 온다. 다음으로 보리가 15㎝(5寸) 정도로 자라면 두벌매기를 한다.

그뒤 음력 3월 말(양력 5월 상순)이면 이삭이 팬다. 그러고 음력 5월에 보리를 거둔다. 자신과 머슴 1명, 놉 남자 1명이 하루 걸려 다 베고, 그 뒤 3일 동안 말린 다음 자신과 머슴이 지게로 20지게를 져서 집으로 나른다. 집으로 나른 그날 탈곡기(打麥機)로 마당질을 끝낸다. 탈곡기를 빌리는 값은 보리 1가마니(5말들이)를 떠는 데 보리 2되이다. 이걸로 하루 30가마니 정도는 떨 수 있다. 이렇게 마당질하여 보리는 1섬 5말, 보릿짚은 5지게가 얻었다. 보리는 1섬에 30원, 보릿짚은 1지게에 10전 정도 한다.



벌교를 떠나며


지금까지 벌교의 보성관과 그곳에 살던 박응렬 씨의 농사를 들여다보았다. 다들 아시다시피, 1930년대 말은 참 살기 힘든 때였다. 밖으로는 중일전쟁이 일어나 사회는 전시체제로 들어섰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극심한 가뭄 같은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도무지 살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머나먼 간도로 떠나 힘겹게 새로 땅을 일구었다. 그렇다고 남은 사람들도 편하게 살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카하시 노보루는 조선 반도를 다니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정된 식량 생산으로 제국에 충성하고자 했을지, 아니면 조선인들이 불쌍하다고 여겼을지, 솔직히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도 없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그보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2008년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를 짚어 볼 뿐이다. 끝으로 유승규 씨가 1957년에 쓴 ?��빈농?��에 나오는 보리 탈곡기와 관련한 이야기로 마치고자 한다.


“아버지 저희 생각 같아서는 타맥기 사 놓으신다는 거 구만두시넌 게 좋을 것 같어유.”

삼형제 중에서 중학교라도 다닌 가운데 정현이가 형제간의 의사를 대표해서 말하자, “이놈들아 네놈들이 뭘 안다구 얘기여. 애비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바 …… 너희들은 농촌 기계화돼 가는 것을 통 모르는 얘기구나. 벌써 딴 동네서는 몇 년 전부터 보리타작하는데 도리깨나 자리개질을 안 한단 말여.…. 다 너희들 편하게 살라고 사 놓자넌 게다. 그라구 건넌말 송서방, 양지말 박서방들은 벌써 작년 저작년부터 타맥기를 사놔서 상당히 수지를 맞춰 사는데, 그래 우리 한가들이 그자들한테 뒤져서야 되겠냔 말이다. 사람이란 무슨 일이구 선각을 해서, 과감하게 박력있게 밀고 나가야지. 농공병진 시대여던 에헴.”

“허지만 우리 형편으론 불가능하단 말에요. 그네들은 그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기계화를 하지만 남의 빚을 얻어 한다는 것은 거 아무래도.”

… 중략 …. 그렇게 큰소리 삥삥 쳐가며 고집부려 사들인 타맥기 운영이 어찌 되었느냔 말이다. 결국 2년간 건넌말 송씨네와 양지말 박씨네 세 집이 치열한 경쟁을 벌여 보았지만, 결과는 뻔한 일이 아니냐. 보리 한 가마 타맥해 주는 데 한 말씩 받던 삯을 아홉 되, 여덟 되, 일곱 되 이렇게 서로 싸우다가 결국 송씨 박씨네는 닷 되씩을 받고, 타작을 해 주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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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갔다. 다행히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덕분에 난 맑게 갠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림 1 아무 기술이 없어도 좋은 사진이 나오는 하늘 아래 벌교역. 새삼 10년 전 기차를 타고 이 역을 지나간 기억이 떠올랐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만큼 주먹깨나 쓴다는 건달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주먹들이 모이는 곳이야 뻔하지 않은가? 벌교는 지금과는 달리 예전에는 돈냄새가 폴폴 풍기는 곳이었다는 증거다. 이런 곳에 기차역까지 있다면 말 다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신작로인 목포에서 서울까지 가는 1번 국도도 그렇고 경인선도 그렇고, 일제는 돈이 되는 곳이라면 길을 뚫고, 기차를 놓았다. 지금도 사정은 비슷하다. 옛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경제가 잘 굴러가도록 잘 쓰는 길을 놔두고 쓸데없이 산을 깎고 길을 뚫는다는 것. 자본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굴러가야 한다. 농사와는 어울리기 힘든 흐름을 가진다.

간밤 후배와 술 한 잔 나누어 눈이 퉁퉁 부었다. 속을 풀 만한 먹을거리를 찾아 장을 헤맸다. 마침 장날이라 장터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국밥집을 찾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거기에는 입 짧은 후배도 한몫했다. 찾다 찾다 찾은 곳이 허름한 밥집이었다. 시킬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백반이었다. 아마 장날에만 여는 집 같았다. 시원한 콩나물국에 가짓수도 엄청 많은 반찬들, 밥은 또 얼마나 꾹꾹 눌러서 주시는지. 일단 콩나물국부터 시원하게 마시고 속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본 아주머니께서 친절하게도 알아서 한 대접 또 주신다. 정신없이 참 맛있게 먹었다. 이 맛을 어떤 말로 표현할지 도대체 떠오르지 않는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밥값을 계산하려고 1,0000원을 건넸다. 그런데 돌아오는 돈이 6000원! 이 어찌된 일인가? 1인분에 2000원. 이렇게 싼 값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다니. 이거 기분 째진다.


 

 그림 2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 겉에 양철을 덧댔다. 양철이 살짝 벗겨진 곳을 자세히 보면 나무가 보인다. 개발이 안 된 덕에 근대문화유산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벌교.

그림 3 옛 영화는 사라지고, 그때의 기억을 간직한 낡고 초라한 건물만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버스마저 왜 이리 추레한 것인지.


다카하시 노보루가 벌교에 온 것은 1939년 10월 18일. 난 2007년 7월 13일에 왔으니 한 70년쯤 차이가 난다. 그는 벌교에 도착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오후 4시 6분 보성을 출발하여, 시마자키島崎 기수와 최崔 기수(보성군 농회 기수)의 안내를 받으며 벌교로 향했다. 오후 5시 도착했다.
벌교읍에서 으뜸인 조선 여관, ‘보성관寶城館’에 들어갔다. 일본인도 묵는 사람이 많았고, 시설이 괜찮은 편이었다.


보성관이란 여관 이름이 눈에 띈다. 여기 오기 전 조사를 통해 아직 이 여관이 남아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번 벌교 여행은 이 여관을 확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장사하는 아주머니에게 이 건물이 어디 있는지 물어 더듬더듬 찾아갔다. 조금 지나자 일제강점기 냄새가 물큰하게 풍기는 거리에 들어섰다. 순간 이곳 어딘가에 ‘보성관’이 있으리라 직감했다.

그림 4 보성관이 자리한 거리는 옛날에 벌교의 중심지, 곧 본정통이었다. 지금은 이 거리가 본정통이지만...


그림 5 보성관 입구. 가게들이 늘어서 있어 작은 입구를 찾아보기 힘들다. ‘크린에이드’라는 간판의 오른쪽이 입구. 2층은 여관 건물.


드디어 여관을 찾아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이때 시간은 거꾸로 흘러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왔던 그때로 돌아갔다. 새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여관. 댓돌에는 손님들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저 방에 다카하시 노보루가 앉아 있을까?

그림 6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정원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이 여관은 현재 보성관이라는 이름보다 ‘남도여관’으로 더 유명하다. 소설가 조정래 씨가 쓴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빨치산 토벌대가 이 여관에 머물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훈련을 했다고 한다.


지금 1층은 가게와 살림집으로 쓰고, 2층은 비어 있다고 한다. 1층에는 방이 열 개, 2층은 좀 더 큰 다다미방이 네 개다. 이 정도 규모면 엄청 좋은 호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림 7 지금은 텅 빈 2층 다다미방. 사진은 퍼옴.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ㄷ’자 구조인데,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화단이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 왼쪽과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있고, 안채로 쓰는 건물 위에 2층을 올렸다.

그림 8 보성관의 모습. 70년 전에도 이 자리에 우뚝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이 건물을 지키고 있는 건 나종필(73), 유보임(72)이라는 노부부이다. 벌교에서만 8대째 사는 토박이이시다. 그분은 남도초등학교에서 20년 동안 교사를 하다가 퇴직하고 금은방을 냈는데, 이 건물이 매물로 나와 5만원에 샀다고 한다. 그게 1979년의 일이다. 그러다 학교 정화 구역이 되면서 1988년에 여관 간판을 내렸다.

이 분 덕분에 보성관은 지금도 훼손되지 않고 역사를 증언하며 이렇게 살아남았다. 언제 개발이란 광풍이 불어 닥칠지 모르는 곳에 사는 건물들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것에 비하면, 참 행복한 집이다. 어디 건물뿐이랴 소, 닭, 돼지들 모두 제 명에 죽지 못하고 내 뱃속으로 들어온다.

다카하시 노보루는 보성관에서 하룻밤 묵으며 이런 밥상을 받아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상차림을 보자.



반찬은 바닷가답게 비린 것들이 많다. 국도 멸치인지 생선인지를 넣고 끓였고, 전어 내장으로 만든 돔배젓에 굴젓까지 나왔다. 여기에 벌교의 자랑 꼬막이 어찌 빠질 수 있으랴! 여자만에서 캔 꼬막은 그 맛이 기가 막히다. 쫀닥쫀닥하고 쫄깃쫄깃한 것이, 짭짤하니 따로 장을 찍을 필요도 없다. 여기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속이 얼콰하니 든든하다. 꼬막 생각에 입에 침이 고인다. 저런 밥상이면 속이 부대끼지도 않게 밥 한 공기 뚝딱 맛있게 먹겠다.

여관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본정통답게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금융조합으로 썼다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봐도 잘 지은 건물이란 느낌이다. 1919년에 건립했다고 하니 다카하시 노보루도 이 건물을 보았을 것이다.
금융조합은 1907년 생겨 1956년 7월까지 있던 서민들의 신용 금융기관이었다. 지금의 신용협동조합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것이 해체되면서 생긴 것이 바로 농업협동조합이다. 그러니 농협의 전신이 바로 이 금융조합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 기관이 농민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그저 합법적으로 돈놀이를 한 것은 아닐까? 지금 농협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림 10 르네상스식을 바탕으로 여러 양식을 절충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금융조합으로, 지금은 농민상담소로 쓴다.


그림 11 보성관 주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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