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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에 살면서 5년 만에 오늘 처음으로 청룡사에 갔습니다.

성태산 밑자락에 자리한 이곳은 현재 안산1대학의 뒷편입니다. 이곳까지는 자가용으로 갈 수도, 걸어갈 수도, 301번을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헌데 301번을 타려면 요금이 1500원(카드로)이나 하니 조금 아깝군요. 멀리서 오신다면 상록수역에서 슬슬 걸어가셔도 됩니다. 15분이면 충분합니다.

 

안산1대학 옆쪽의 안골길이란 곳으로 쭉 들어가면 청룡사 표지판이 나옵니다. 

 

이 절이 생긴 지는 50년 정도일 거라 추정합니다. 그걸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절 주변에 서 있는 송덕비에 있습니다. 그 송덕비에 따르면, 의림이공진환선생송덕비義林李公鎭煥先生頌德碑라고 적혀 있습니다. 당연히 이진환이란 분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지요. 그 뒷면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원래 이곳 일동一洞 안산1대학을 둘러싼 일대는 인근의 수리산에서 산세가 시작하여 명당 자리로 알려져 왔겄다. 그래서 예전에는 구룡九龍골이라 불리었으니, 아홉 용이 여의주 하나를 둘러싸고 꿈툴거리는 형상의 지세地勢인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조선 말기쯔음 이곳에 타성붙이들이 슬그머니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디! 아마 철종 때부터 안동 김씨들이 여그를 장악하면서 오랫동안 여그의 대성大姓인 이씨 집안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 송덕비의 주인공 의림 이진환 선상이 외지에 나가 사업에 크게 성공해부렸지. 아마 건축가로 60년대 이후 군사정권의 국가발전계획과 대규모 건설사업에서 엄청난 실적을 쌓았지. 그래서 이 선생이 자기가 번 큰돈으로 안동 김씨에게 빼앗겼던 땅을 다시 사들이고, 청룡사라는 절까지 지어서 부처님께 바쳤다고 하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요.

 

헌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로는 안동 김씨의 묘지를 이장해 가라고 공고를 냈는데도 옮기지 않은 무덤은 그냥 파서 골짜기 어느 한곳에 모다서 화장했다고 하네요. 또한 안동 김씨 세력을 약하게 하려고 마약을 풀기도 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돕니다. 그런 걸로 봐서 뭔가 평탄하게 일이 추진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아무튼 안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절이니 한 번 찾아볼 만합니다.

 

청룡사에 오르면 안산이 한눈에 내려다 보입니다. 바로 앞의 큰 건물이 안산1대학, 앞산이 구룡공원이 자리하고 있는 구룡산입니다. 그러니 거기부터 여기까지 구룡골이라 불린 것이지요. 왼쪽으로 보이는 아파트의 물결은 원래 바다였을 것입니다. 맑은 날 오르면 산세까지 훤히 볼 수 있을 테니 더 좋겠네요.

 

 

이곳에는 200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도 서 있습니다. 일동에 있는 보호수가 어디에 있나 했더니 여기에도 한 그루 자리잡고 있었네요. 그 옆으로는 잘 어울리게도 산신각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성태산의 산신께서 굽어살피시고 계십니다.

성태산은 한자로는 城台山이라고 합니다. 성이란 뜻과 별이란 뜻이지요. 왜 그런지 몰라도 일동 쪽에는 별과 관련된 한자 지명이 많습니다. 제가 사는 점성占星골도 그렇고 이곳의 태台도 그렇습니다. 점성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여러 의견이 많습니다. 이곳이 바닷가였던 만큼 큰 무당이 많았고, 그래서 점을 치는 사람이 많다는 뜻에서 점섬(占島)이라고도 하고, 별을 보고 점을 치던 곳이라고 점성占星이라 하기도 하고, 저는 한때 점심을 먹는 곳이라 점섬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이상 제대로 기록된 문헌자료도 없어 알기 힘듭니다. 원래 부르던 지명도 한자로 옮겨적으면서 본뜻이 흐려진 경우도 많구요. 지명을 제대로 추적하려면 고어도 많이 알아야 하기에 어렵기만 합니다. 어쨌든 일동에는 별과 관련된 지명이 참 많습니다. 제가 이 동네 사는 것도 다 그런 뜻이 맞물린 것은 아닐지...

 

150년된 느티나무. 안산의 보호수는 대부분 이 정도 나이입니다. 수암 쪽은 역사가 깊은 만큼 더 오래된 나무가 몇 그루 있지요. 하지만 철저한 개발 도시 안산의 다른 곳에서는 100~200년 정도 된 나무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그런 나무가 서 있는 곳은 개발에서 소외된 곳, 옛 마을이 있던 자리들뿐이지요. 그래서 더더욱 노거수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된 노거수는 20그루 정도인데 더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저 혼자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나무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 어울려 그늘도 주고 푸르름과 단풍도 안겨 주는 나무로요.

 

나무 뒤편으로는 산신각 바로 옆에 조그만 제각이 또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서 무슨 제사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시간에 쫓겨 무엇 때문에 준비하고 있는지 물을 새도 없이 후다닥 산으로 올랐습니다. 

 

 

처음 오르막길이 가팔라서 그렇지 그 길만 올라서면 오르기 쉬운 길이 이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태산은 150m 정도의 작은 산이기 때문이지요. 보통으로 걸을 수 있기만 하다면 산책길이라고 봐도 됩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옛 산성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전에 안산문화원장을 했던 분께서 성태란 이름에서 성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이곳을 뒤져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돌이 많구나'라고 생각하고 지나갔을 곳인데, 아는 사람에게는 그런 게 보이나 봅니다. 

 

성태산 정산 부근에 굴러다니는 성벽의 돌들. 그냥 돌이 많은 곳 아니야? 라고 생각하신다면 오산. 이 돌들로 성벽을 쌓았다고 한다.

 

이 산성은 그 축성 양식으로 보아 신라의 축성 기술이라고 합니다. 신라가 중국과 교역하는 통로를 확보했을 무렵 쌓은 것인가 봅니다. 허나 그 규모로 보아 전투를 위한 성이라기보다는 감시초소 정도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이 서해를 감시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저기 현재 열병합발전소가 서 있는 곳의 별망성이 그렇고, 잿머리 성황당이 그렇고, 모두 서해를 감시하고 방어하기 위한 목적의 장소였습니다. 이곳도 그 연장선이 아닐까 합니다. 혹시 군포의 봉수골과 이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안산이 중요한 해안 방어 기지이자 수산물 생산 기지였을 당시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게 몇 장의 사진을 볼까요.

 

아래는 노적봉에서 본 고잔동 쪽의 모습입니다. 아파트가 가득 들어선 곳 모두 물이 들고나는 바다였습니다.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롯데마트를 중심으로 시선을 조금 더 왼쪽으로 옮겼습니다. 군데군데 불쑥불쑥 솟은 산 말고 바닥은 모두 바닷물이 들고나는 곳이었을 겁니다. 이것이 그대로 일동까지도 이어졌겠지요.

 

 

아래는 잿머리성황당에서 바라본 시화공단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곳도 모두 바다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일동, 성포동 쪽보다는 더 드넓은 바다였지요. 이곳에서 지나다니는 배를 감시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제일골프장 뒷산에 올라 찍은 것입니다. 높은 건물이 들어선 곳은 원래 다 바다였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럼 대략 지형이, 그리고 바다가 머릿속에 그려지시지 않나요?

 

아마도 아래와 같은 모습이었을 겁니다. 물론 산세가 더 이어져 있었을 테고, 그래서 바다가 이만큼 넓지는 않았겠지요. 이 사진은 탄도에서 바라본 누에섬입니다. 지금은 풍력발전기가 세워져 있다고 하네요.

 

 

성벽이었던 돌무더기를 보고 살살 걸어가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여기서 오른쪽은 반월저수지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난 길을 택해 조금만 걸어내려가면 점성고개가 나옵니다. 그곳에는 아래와 같은 표지판이 서 있지요.

 

 

네, 이곳에서 수암봉까지 걸어갈 수도 있고, 바람들이 농장까지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냥 중앙병원 쪽으로 내려가도 되고, 반월저수지로 가도 괜찮지요. 선택은 자유, 마음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십시오.

 

 

 위 사진을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보이시나요. 한 1km 정도 15분 거리라고 나옵니다. 길게 잡아도 20분이면 청룡사에서 점성고개까지 갈 수 있습니다. 가까운 쉬는 날, 날이 좋으면 한 번 걸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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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 회화나무, ‘큰 인물이 나온다’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⑦ 양반집서 심었다는 회화나무

 

 

수암에는 전에 몇 번 온 적이 있지만, 이 길로는 처음이라 조금 헤맸다. 마침 놀이터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놀러 나와 계셔서 뭐 주워들은 것 좀 없을까 다가가 인사를 여쭈었다.

“할머니, 여기 큰 나무가 어디에 있어요?”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하시는데 벌집을 건드린 것 같다. 지난 겨울 토종을 수집하러 다녔을 때도 그랬다. 할머니 한 분을 붙들고 말을 붙이다 보면 이런 씨앗도 나오고 저런 씨앗도 나오는데, 경로당 같은 곳에 가서 여러 할머니들께 여쭈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대강 나무의 위치만 파악하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럼 다들 여기서 오래 사신 건가요?”

이 물음에는 어째 대답이 영 시원치 않다. 다들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단다. 안산을 다니다 보면 토박이를 만나기가 참 힘들다. 참빗으로 훑듯이 다녀야 만날 수 있을까 이렇게 수박 겉핥기식으로는 더더욱 그렇다.

어쨌든 할머니들이 알려주신 대로 따라가니 마침내 큰 나무 한 그루를 찾았다. 그건 바로 회화나무다. 회화나무는 옛날부터 양반집에서 심기로 유명한 나무다. 잎사귀를 본 분은 잘 알겠지만 아카시처럼 전형적인 콩과인데, 원산지인 중국 북부에서 들어왔다고 추정한다.


 

중국에서는 집에 회화나무를 심어야 큰 학자나 인물이 나온다고 여기고, 출세한 사람이 나오면 그 상징으로 뜰에 심기도 했다. 그래서 영어로는 Chinese Scolar Tree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그 영향을 받아 양반집에서 주로 이 나무를 심은 것이다.

처음 이 나무를 만난 것은 서울에서였다. 정독도서관 입구에 보면 큰 나무가 하나 서 있는데, 그 나무가 회화나무였다. 그에 얽힌 추억은 없어 더 이상 떠오르는 건 없지만, 아무튼 그 나무 덕에 회화나무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다. 여기 수암에 서 있는 회화나무는 다른 어느 곳의 나무 못지않게 멋들어진 모습을 뽐내고 있다.

 

 

밑동은 어른 너댓이 둘러 안아야 품에 담을 정도로 굵다. 다행히 주변에 집이 없어 마음껏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을 수 있어 이렇게 잘 크고 있다. 장상동에서 보았던 은행나무의 초라한 모습에 비하면 정말 떳떳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원줄기에서 자라고 있는 새끼 나무다. 등산객들이 오가며 재밌다고 다들 쳐다보고 한마디씩 나누는 걸 보았는데, 확실히 여느 나무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나무의 생리를 잘 모르니 그것이 왜 그런지는 전문가에게 물어봐야겠다.

 

마침 나무 밑에는 갓을 뜯고 계신 두 아주머니가 계셨다. 차림으로 보아 등산객은 아니신 듯하고, 혹시 이 나무와 관련하여 뭔가 재미난 이야기가 없을까 말을 건넸다.

나무를 찍는 내 모습이 특이하다고 여기셨는지 이건 사진을 찍어 뭐하냐고 그러신다.

그냥 멋있어서 남기려고 한다며 받아넘기고 이야기를 시작하니, 원래 살기는 저 아랫동네 그러니까 장하동 쪽에 산다며 오늘은 나물이나 캐러 나왔다고 하신다.

그래서 이 동네는 잘 모르신다고. 그러면서 저기에도 큰 나무들이 많으니 거기도 가서 사진을 찍으라고 일러주신다.

말씀하신 곳은 관아터라는 직감이 왔다. 모르고 지나다닐 때는 ‘큰 나무가 있구나’ 하며 다니던 길인데, 이렇게 의식을 하며 다니니 또 새롭다. 정말 누구의 말마따나 아는 만큼 보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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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봉 본래 이름 ‘매봉재’, 아시나요?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⑥ 꼭대기 바위 ‘매’ 닮은 모습

 

매화농장을 나와 마을 입구로 나아갔다. 들어오면서 본 멋들어진 소나무 앞에서 잠시 멈췄다. 아직 보호수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홀히 할 나무가 아니다.

존재 그 자체가 아닌 그럴싸한 직함이나 외양을 보고 무엇을 판단하는 건 우리 사람만의 일일 것이다. 이 나무의 내력이 궁금해 하던 찰라, 밑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올라오시고 계셨다.

 

인사부터 드리고, 먼저 나무의 내력을 여쭈었다. 100년도 더 된 나무라고 하시는데, 정확하게는 마을 어른들도 모른단다. 아무튼 그 모양도 예쁘고 참 좋은 나무다. 나무는 어찌 그렇게 오래 사는지 모르겠다.

헌데 이 일대는 이 나무만이 아니라 원래 소나무가 참 좋았다고 한다. 지금은 작은 공장들이 들어선 안산고등학교 건너편이 다 솔밭이었단다. 아마 바닷가에 가면 방풍림이 있듯이 그런 숲이 아니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안산고등학교 앞에 있는 육교 있는 데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육교가 딱 갯다리 자리라고 한다. 그때는 밭에서 일하다가도 저 멀리 바다를 한 번 내다보면 속이 시원허니 좋았단다.

지금은 물론 아파트의 물결만 넘실거리고 있지만 말이다. 가만히 보니 안산에선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 원래 바다이거나 뻘이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이 어르신의 성함은 어윤석(丙子生)이라고 하는데, 6.25 지나 충청도 병천에서 안산으로 온 지 30년이 되었다고 하신다.

원래 태어나 자란 곳은 안성인데 왜정 때 병천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안산으로 온 것이란다. 지금은 논 2마지기에 밭 3000평 농사를 지으신다. 하지만 모두 소작이지 본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신다.

땅도 모았을 법하신데 왜 아무것도 없냐고 여쭈니, 그렇게 부지런히 일해 다 자식들 가르치고 시집장가 보냈다고 하신다. 부모님의 마음이 다 그런가 보다. 평생 남의 땅만 부쳤어도 후회는 없으시단다.

이 어르신께 재미난 이야기 하나를 들었다. 지금은 수암봉이라 부르는 곳이 원래 매봉재라고 했다고 한다. 꼭대기에 있는 암석이 꼭 매를 닮아서 그렇게 불렀는데, 6.25 때 폭격을 맞아 부리 부분이 사라졌다고 한다.

수인산업도로를 따라 지나다니면서 멀리서도 한눈에 띄기에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게 어떻게 매를 닮았는지는 몰랐다.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들어 있었구나. 하늘을 향해 도도하게 앉은 형상의 바위가 이제는 아픈 역사의 흉터를 안은 부리를 잘린 매가 되었다.

평생 배운 것이 농사라서 아직도 일을 손에서 못 떼고 있지만, 요즘은 농사지어 먹고 살기가 더 팍팍해졌다며 걱정이시다.

비료 값은 예전보다 5배 가까이 마구 오르고, 마땅한 판로가 있어 안심하고 생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산에 무슨 시장이 있어 내다팔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며 말이다. 이곳의 땅도 이제는 지역 사람들의 것이 아니란다.

개발이 되면서부터 값싸게 팔고 다들 외지로 나가, 땅은 다 외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단다. 원주민은 싸게 팔았지만 그네들이 사서는 엄청 비싸게 거래가 된다며 이곳의 농사도 자기 대에서 끝일 거라고 씁쓸하게 말씀하신다.

  

한창 어르신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차에서 어떤 사람이 누구를 모르냐며 묻는다. 이유인즉 아무개가 식당에서 밥만 먹고 도망가서 찾으러 다닌단다. 참 살기 어려운 시절이기는 한가 보다. 나도 어서 발걸음을 옮기며 인사를 드리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암으로 들어가 노거수를 살필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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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인의 살 내음이 매화 향에 비견하리’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⑤ 노리울 매화농원과 농막

 

동막골에서 나와 다시 수암 쪽으로 나아간다. 수인산업도로, 곧 42번 도로는 정말 위협적이다. 어찌나 차들이 쌩쌩 달리는지 갓길로 가지만 늘 두렵다. 졸음운전이라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대로 이 세상과 안녕을 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따른다. 길은 사람과 문물을 가져온다.

그래서 길은 사람 몸의 혈관에 곧잘 비유되곤 한다. 얼마나 길이 잘 뚫려 있느냐에 따라 문명의 발전이 좌우될 정도다. 경제개발을 시작하던 무렵, 가장 처음 한 일이 고속도로를 뚫은 일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오죽하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으랴!

하지만 길이 너무 지나치게 뚫리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점점 사라진다. 인심이나 가치, 문화 등이 대표적이다. 한마디로 다양성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저마다 개성을 지니며 어울리는 통일이 아니라 획일이 판을 치고, 그에 따르지 않으면 틀렸다고 뭇매를 맞고 쫓겨난다.

요즘 사람들이 잘 구분해서 쓰지 않는 말이 있다. 그건 바로 “다르다”와 “틀리다”이다. 우린 이제 다른 것을 틀리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왜 누군가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고도 하지 않았는가?

 

수암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언덕 옆에 노리울이란 마을이 있다. 전부터 한 번 들러서 보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잘되었다. 저 깊숙한 곳부터 무엇이 있는지,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둘러보자.

따사로운 봄 햇살을 즐기며 안쪽으로 다시 안쪽으로 찾아가니 멀리서도 대번에 매화임을 알 수 있는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 온다. 엄청난 매화 군락지가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매실이 유행하면서 매화를 참 많이도 심었다.

가장 유명한 곳은 아무래도 섬진강 주변일 것이다. 그러나 섬진강 매화도 좋지만 거기까지 가느라 들이는 시간과 노력, 무엇보다 에너지와 돈 대신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즐기는 건 어떨까? 매화를 즐기곤 바로 뒷산으로 올라 수리산까지 한 번에 품을 수 있다.

마이 카(My Car) 시대가 오면서 쉬는 날이면 다들 머리 싸매고 어디를 갈까 고심한다. 왜 내가 사는 동네 골목을 느긋하게 거닐며 사람을 만나고 묘미를 즐기려고는 하지 않을까? 너무 당연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찾았던 4월 초, 이 농원에는 매화가 한창이었다. 멀리서도 매화 향기에 취해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 달콤함이란 어느 여인의 살 냄새에서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짜릿하다. 꽃냄새에 취해 저절로 발길이 매화를 향해 나아간다. 벌들도 꿀을 모으느라 분주하기만 하다. 주인아저씨를 찾으려고 한참을 돌아다니니 한쪽 구석에는 맑은 샘도 있다. 물맛이 좋구나. 이곳도 아직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의 샘이구나.

마침 물을 뜨고 있는 아저씨가 있어 이 농원의 주인인지 물었다. 자신은 주인이 아니라 이 아랫밭에 가끔 오면서 농사를 짓는단다. 농사로는 수입이 안 되고 땅은 놀리기가 뭐해서 조금 있는 땅에 먹을거리나 조금 심고 돈은 다른 일로 벌고 있다며, 물맛이 좋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럼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행방을 묻고 다시 찾아 나섰다.

혹시 들어오는 입구에서 본 할아버지가 아닐까? 닭장을 고치고 있던 할아버지가 생각나 찾아가 조심스레 이 농원의 주인이냐고 여쭈니, 맞다고 하신다. 매화가 참 좋다고 언제부터 여기서 이렇게 예쁘게 꾸미고 사시는지 은근히 기대하며 여쭈었다.

하지만 자신은 7년 전 여기에 들어오면서 매화를 심은 것이란 조금은 실망스런 답을 하신다. 오래 사신 토박이이시길 기대했는데 아쉽다. 정말 토박이를 만나기 어려운 곳이 여기 안산이다. 다들 어디로 어떻게 흩어지셨는지 모르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조금 더 농원을 둘러보았다. 모두 2000평의 넓이인데, 말했듯이 한쪽에는 매화나무가 자리하고 그 바로 옆에는 샘이 하나 있다. 반대쪽에는 멋있는 연못과 이 모든 경치를 즐길 수 있는 2층 농막이 하나 서 있다. 농막에는 현판이 세 개 걸려 있다.

 

이 현판은 모두 할아버지께서 직접 쓰고 새기신 것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四海之內皆爲兄弟(세상의 모든 것이 다 형제다)”, “桃李不言下自成跡(복숭아와 자두는 말하지 않고 스스로 이룬 것을 내려놓는다)”, “待人春風持己秋霜(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하고 자신을 다잡을 때는 가을서리처럼 하라)” 논어, 사기, 채근담에 나오는 글귀들로서, 하나하나 모두 마음에 깊이 새길 만하다.

7년 전 이곳에 들어오실 생각을 하신 것이나, 농원을 꾸미신 손길로 보거니와 보통 분이 아니신 듯하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오늘은 시간이 부족하다. 또 난데없이 불쑥 찾아온 객이니 더욱 그렇다. 언제 다시 한 번 찾아와 찬찬히 즐길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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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먹고 살기 좋은 곳, ‘동막골’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④ 450살 된 장상동 ‘은행나무’
영화 덕분에 유명해진 땅이름이 있다. 바로 안산에도 있는 동막골이 그곳이다. 동막골이란 이름은 참 특이하다. 동쪽이 막힌 곳인가? 아니면 동막(東幕)이란 한자로 미루어 주막이라도 있던 곳인가? 그 이름의 유래며 뜻을 전혀 짐작할 수조차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지명을 연구한 논문을 읽다가 그 뜻을 알았다.

 

동막(東幕)이란, 원래 있는 우리말을 표기하려고 한자음을 빌려 적으면서 나온 것인데, 그 본디 우리말은 “두모”라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모란 배산임수의 지형을 지칭하는 말로서, 뒤에는 산을 두르고 앞에는 시내와 너른 들을 낀 곳을 뜻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먹고 살기 좋은 곳을 가리킨다.

그러니 안산에 있는 동막골은 예부터 사람들에게 먹고 살기 좋은 곳으로 인정받은 유서 깊은 곳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지나온 벌터의 뜻 역시 농사지을 수 있는 들이 넓다는 것이니 더욱 그렇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두모란 땅이름은 주로 중부지방에 흔하다고 한다. 두모는 두무, 두모, 두미, 도마, 동막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니 어디 여행을 다니면서 보이면 정말 사람이 살 만한 좋은 곳인지 확인해 볼 일이다.

 

영화 때문에 유명세를 떨며 이 사람 저 사람이 들락거렸는지, 마을 입구에서는 영화 동막골에 나온 곳이 아니라는 푯말까지 볼 수 있다. 아무튼 요즘은 너도 나도 차를 끌고 다니면서 못 가는 곳 없이 구석구석까지 잘 다닌다.

빠르고 편하고 자유로운 이 운송 수단을 축복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운전면허증이 없는 난, 어지간하면 이대로 늙어 죽고 싶다. 차에게 나의 시간과 공간을 할애하기에는 느리게 다니며 보고 즐길거리가 너무 많다.

동막골의 법정동명은 장상동이다. 앞에서 말한 적 있는 노리울을 42번 국도를 중심으로 위와 아래로 나누어 장상동과 장하동으로 정했다. 지도가 있는 분은 펴서 보면 알겠지만, 안산분기점에서 조남분기점까지 길쭉한 평지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노루목처럼 중요한 길목이라 고구려 때부터 장항구(獐項口)라 부르며 중시한 것이다. 이곳이 밀리면 백제가 밀고 올라올 수 있을지 모를 위험이 생기니 말이다. 물론 굳이 이곳 말고도 다른 길목도 있지만,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이었을 것이다.

동막골, 곧 장상동에 들어가면 바로 마을의 광장을 만난다. 예전이었다면 뜨거운 땡볕을 가려주는 커다란 정자나무라도 하나 서 있었을 만한 곳이다. 지금은 예전 주민들도 많이 떠나 사람도 별로 살지 않고, 집보다 공장이 더 많은 듯하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난 뒤로 마을은 황폐해졌겠지.

 

아니 이걸 가치판단이 들어가는 황폐라는 말로 설명하면 안 되겠다. 인간은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며 농업에서 공업으로 다시 서비스업으로 전이해 왔으니 말이다. 서비스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내친 김에 지난번 새로 알게 된 ‘비움’이란 곳까지 갈까 하다가 관두었다. 대신 물을 찾아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 각종 묘목을 판다는 간판을 걸어 놓은 집에 들렀다. 마침 한 할아버지께서 낙엽을 치우고 계셔 인사를 드리고 지나가다 들렀는데 물 좀 얻어 마실 수 없겠냐고 여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곳 물이 참 좋다면서 집 앞에 있는 약수를 사람들이 많이 떠가기도 하고, 자신도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자랑하신다. 물을 얻어 마시면서 맛을 보니 정말 자랑할 만하시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 시설은 형편없지만 물맛만큼은 마셔본 안산의 다른 어느 곳보다 뛰어나다.

김홍규 할아버지(75)께서는 이곳에 들어온 지 3년이 되셨는데, 7만 5000평이 되는 산을 관리하며 이곳에서 살고 계신다. 혼자 그 넓은 산을 어떻게 관리하시는지 놀랐는데, 아직도 연세에 비해 정정하시다. 다만 홀로 사시는 듯해 적적해 보이셨다. 할아버지가 머물고 있는 집도 작지만 꽤 잘 지은 집임을 알 수 있었는데, 본인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100년은 된 집이라고 하신다.

 

 

장상동은 그래도 옛 마을의 모습이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할까? 본인의 의지로 새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을 낙오자라고 느끼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농민과 농촌은 이용 가치가 있을 때만 쥐꼬리만한 대우 좀 받다가 쓸모를 잃자 내침을 당하고 있다.

시골에 가도 그런 마당에 안산이란 도시의 이곳에서는 더 심하지 않을까? 옛날부터 살던 마을 주민은 만나지 못했지만, 길가에 늘어선 작은 공장과 쓰러져 가는 옛 집이나 새로 번듯하게 지은 집들에서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 나오는 길에 우연치 않게 장상동의 보호수를 만났다. 수암에서 만나 노거수만 생각했지 이곳에서 만나리라고 털끝만큼도 예상치 못했기에 정말 뜻밖이었다.

역시, 이곳도 노거수가 대변하고 있듯이 오랜 전통을 지닌 동네였구나. 여기에 버티고 선 나무는 은행나무로서,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표지판에 수령이 420년으로 나와 있는 걸로 계산하면 현재 450살 정도는 되었겠다.

 

이 은행나무는 450년이란 시간 동안 한자리에 서서 무엇을 보았을까? 450년이란 세월을 보냈음에도 겉으로 보기에 굵기나 크기는 초라하기만 하다. 꼭 이 동네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 안타깝다.

450년이면 더 굵고 힘차게 뻗어 있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하천 정비 공사니, 뿌리를 뻗을 만한 흙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나무는 욕심 부리지 않고 자기가 클 수 있을 만큼만 알아서 크지 않던가!

날개의 깃털을 상한 새는 새 깃털이 밀고 나올 때까지 푸른 하늘을 날지 못한다. 자연의 섭리가 그러할진대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동막골의 오늘을 보면서, 뿌리 없는 나무가 살 수 없듯이 뿌리 잃은 인간은 외롭고 불안할 뿐이란 생각이 든다.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런 모습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경기 부흥이란 미명으로 쓸데없는 데 돈을 쓰며 몇몇 개인의 배만 불리기보다는, 이 땅의 한 울타리 안에서 사는 이웃의 삶을 살필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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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 ‘시랑’을 돌려주세요”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③ 흐드러지게 핀 ‘목련나무’
수암으로 가는 길에 그동안 계속 맘에 걸렸던 시랑초등학교를 둘러보려고 한다. 안산 부곡동에 자리한 시랑초등학교의 이름은 정정옹주의 남편이었던 유적이 이부시랑이란 벼슬까지 오른 걸 기념하려고 부르던 동네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시랑초등학교를 빼고는 모조리 다 시낭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로마자로 Sinang이라 표기하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밑도 끝도 없이 시낭이란 이름을 쓸 것이 아니라 원래대로 되돌려 놓아야 할 일이다.

교통표지 판부터 시작하여 시낭운동장(옛 양궁경기장)의 이름이며 각종 인터넷에 올라가 있는 이름까지 하면 만만한 작업은 아닐 테다.

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이름은 큰 의미를 지닌다.

양궁경기장은 지나만 다녔지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 이번 기회에 어떤 곳인지 들어가 보았다.

운동장에서는 경기도 교육감 선거를 하면서 졸지에 쉬는 날을 맞은 학생들이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뭔 일인가! 인조잔디를 깔은 듯한 운동장 바닥은 다 닳아서 반들반들하고, 더구나 그 위에는 모래까지 쫙 깔려 있다.

한 학생을 붙들고 이야기하니 여기서 넘어지면 죽음이란다. 오랜만에 노는 날이지만 놀 만한 곳이 없는 우리나라의 청소년의 모습에, 새로 짓는 것만 좋아하지 정작 원래부터 있는 건 잘 관리하고 활용할 줄 모르는 이 나라 어른의 행태에 슬프다. 저런 데서 놀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아플까?

 

씁쓸한 마음을 털어내며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수암까지 가는 길에 들를 곳이 많으니 서둘러야겠다. 정재초등학교를 지나 벌터를 거쳐 서해안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를 지났다.

바로 이곳, 가끔 신도림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멀리 보이는 버드나무의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한 곳이다. 이런 나무가 아직은 보호수로 지정되어 특별한 보호를 받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보호수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나이테를 이루면 보호수가 되겠지.

 

지난 가을에 심어 놓은 밀이 퍼렇게 올라와 눈을 시원하게 닦아준다. 처음 들어선 길을 조심히 걸었다. 입구에서 사유지이니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입간판을 보았기 때문이다. 밀을 심어 놓은 것은 소를 키우려고 그런 것인데, 축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공장도 몇 개 있다. 아무튼 근교에는 작은 공장들이 즐비하다. 도시가 발전(?)하는 전형적인 수순인가 보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여기 사신다는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여기서 일하지는 않고 그냥 오가며 돈벌이하며 산다고 하시는 말씀에 자세한 건 여쭈어 보지 않았다. 그저 여기 자리 잡은 집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만 여쭈었다. 1960년대부터 있던 집이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미루어, 흐드러지게 핀 목련나무도 벚나무 길도 입구의 버드나무도 40~50년 정도 살았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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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성동→일동, 구룡동→이동, 시곡동→사동?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② 안산의 ‘옛 모습’ 아세요?

 

한동안 안산의 옛 모습은 어떠했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시화방조제를 쌓아 개막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도시로 개발되기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래서 안산에서 오래 살았다는 어르신을 만나면 꼭 이와 관련해 물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암만 들어도 머릿속에 그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또 안산에서 10년 이상 산 사람은 꼭 ‘사리 포구’를 이야기하며 좋았다고들 하는데, 거기도 가본 적이 없으니 무엇을 떠올릴 수 있으랴! 그래서 자연히 옛 지도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대충 머릿속에 안산의 옛 모습을 그릴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지도가 자세하지 않아 여전히 목이 말랐다. 그러다가 우연히 일본이 1915년 무렵 작성했다는 첩보지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이 지도를 찾으려고 몇 주일 동안 사방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라는 제목으로 영진문화사에서 나온 지도책이 서울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고생 끝에 지도책을 펼친 순간, 확실히 조선에서 만든 지도와는 다르게 정확하게 지형이 표현된 지도를 볼 수 있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일동은 점성동, 이동은 구룡동, 사동은 시곡동으로 바꾸면 안 될까?

 

그러니까 현재 가장 번화한 중앙동이라는 곳이 바닷가였고, 고잔동 일대는 모두 개펄이었겠구나. 주변부에 자리한 상대적으로 덜 번화한 곳들이 원래부터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는 걸 알았다. 참,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원래 점성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일동이라고 부르지? 어디다가 일동에 산다고 하면 숫자 1인지 일인지 다들 헷갈려 한다. 그럴 때마다 뭔가 찜찜해 죽겄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도 그렇고 일본이 만든 지도에서도 점성이라고 하니, 일동은 점성동으로, 이동은 구룡동으로, 사동은 시곡동으로 바꾸면 안 될까? 동네 이름을 바꾸려면 연판장이라도 돌려야 하려나 모르겠다. 누가 방법 좀 알려주면 좋겠다.

동네 이름과 관련해서 우리 동네는 아니지만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 하나 있다. 4호선을 타고 오다 보면, 평촌이라는 곳이 그렇다. 내 기억에 처음에는 벌말이었는데, 왜 그 좋은 벌말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한자로 평촌(平村)이라 바꿨는지 모르겠다. 그게 더 부동산 가치를 올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쁘고 뜻 깊은 자기 이름을 버린 동네라는 오명은 떨칠 수 없을 게다.

 

 

 

 

 

 

내 사는 곳 점성(占星), 이익선생 호 성호의 星은 점성에 땄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인 점성占星이란 이름은 참 별나다. 별을 보고 점을 치던 곳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여기서 특별히 별이 더 잘 보였을 리는 없다.

성호(星湖) 이익 선생님의 호는 점성의 성과 송호의 호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 하는데, 이 동네가 별과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누군가는 이익 선생님이 별을 보면서 천문을 공부한 곳이라 첨성이 맞다고도 하지만, 그게 맞는 얘긴지 확인할 길은 없다. 또 우리나라의 무당은 별점을 치지는 않았으니 분명 다른 뜻이 있을 터이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소금장수나 새우젓장수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한다. 군포 속달에 사시는 동래 정씨 집안 어르신께 이야기를 들었는데, 옛날부터 안산의 생선장수와 소금장수 같은 봇짐장수가 중앙병원 뒤쪽에 있는 점성고개를 넘어(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반월저수지가 나온다) 장사하러 왔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야 새벽부터 짐을 지고 나가 오전에 장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테니, 이 고개를 넘을 때쯤이면 점섬(점심) 먹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점섬, 점섬 하다가 그걸 한자로 표기하면서 점성으로 굳어진 것은 아닐까?

지금도 점성인지, 첨성인지, 아니면 점섬인지 확실하지 않아 옛 지도를 보면 점성이라 하고, 이익 선생님 관련해서 찾아보면 첨성리에 살았다 하고, 현재 이곳에 있는 공원은 점섬공원이라 한다.

 

 

 

 

노거수 만나러 떠나는 길, 귀한 인연을 고대하는 길

 

이렇듯 땅이름은 그 유래가 명확하지 않다. 이 사람한테 물으면 이렇게, 저 사람한테 물으면 저렇게 이야기해 준다.

젊은 날 가슴 시리게 사랑한 첫사랑 그나 그녀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웃는 얼굴은 어땠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지만 그 이름 석 자만큼은 기억에 남듯이, 땅이름도 그러하다. 덕분에 뒤에 남은 사람은 그 이름 석 자만 가지고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재미도 있지만.

아무튼 안산의 옛 모습도 살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노거수를 보러 떠나야겠다. 첫 목적지는 안산의 옛 1번지, 수리산 밑자락에 자리한 수암(현 안산동)이다.
 
여기는 관아와 읍성이 있던 군사, 정치, 행정,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교통편도 불편하고 중심부와 너무 동떨어진 한적하다 못해 낙후된 곳으로 인식되지만 말이다. 그나마 안산동이란 이름이 옛 흔적을 남기고 있어 다행이다.

이 일대가 중심지였다는 것은 이곳에 남아 있는 노거수의 수로도 엿볼 수 있다. 현재 수암에 무려 4그루, 장하동과 장상동에 1그루씩 모두 6그루가 이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노거수는 그냥 오래되고 커다란 나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전에 나오는 뜻은 노거수(老巨樹)라 하여 단지 “나이가 많고 커다란 나무”라고만 한다.

하지만 그 나무와 얽힌 추억과 기억들, 잎이 피고 지듯 피고 져간 주변 사람들의 삶, 시간과 공간의 흐름과 떨림, 흥망성쇠와 상전벽해는 오직 그 주변에서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기억에서 기억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질 뿐이다.

오늘 노거수를 만나러 길을 떠나지만, 그와 함께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단순히 풍경을 그리는 데 그칠 수 있다. 그런 귀한 분을 만날 인연이 있을까? 꼭 한 번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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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18그루’ 나무와의 만남, 그 첫 걸음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① 선사시대부터 산 안산역사

 

 

노거수를 찾아서

 

2009년 새해 벽두부터 안산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각종 언론에 안산이 오르내렸고, 들을 때마다 밀려오는 짜증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어느덧 안산에 와서 산 지가 4년이 넘었다. 그동안 살아본 안산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안산에 왔을 때를 기억하면 그렇지도 않다. 서울에서 멀다는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시골은 아닌지, 공장만 있는 건 아닌지, 도대체 어떤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결혼과 함께 안산에 왔고, 그렇게 자리를 잡은 곳이 일동이다.

 

일동에 자리를 잡아 살고, 또 부곡동으로 텃밭을 오가며 안산의 이러저러한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 보니 안산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다. 이런 궁금증은 텃밭에 계신 안산의 토박이 어르신께 이야기도 듣고, 도서관에서 향토지도 찾아보고, 직접 다니며 보고 들은 내용으로 해결해 나갔다.

 

그 결과, 지금이야 안산이 뜨내기들의 도시이지만 원래는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재미난 곳이란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주변 상황을 보면 점점 더 뜨내기의 도시로 전락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안산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안산이 그런 곳이 아니라는 걸 얘기할 수는 없을까?

나름대로 고민하다가 우연히 나무에 눈이 갔다. 그래, 백 년도 못 사는 게 인간이라지만 나무는 몇 백 년을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나무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그 나무가 버티고 서서 보아 온 동네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며 안산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 먼저 안산시청 푸른녹지과에 전화를 걸어 이경주 님의 도움으로 안산의 보호수 목록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도서관에 찾아가 향토지를 꼼꼼히 읽고 사전 지식을 쌓았다. 마지막으로는 답사할 곳을 지도로 찾으며 머릿속에 넣었다. 이제 안산의 노거수를 찾아 길을 나서기만 하면 된다. 자, 이제 가자!

 


뱀다리 하나.

노거수란? 나이가 많고 커다란 나무를 말한다. 현재 안산에서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는 모두 20그루. 그 가운데 풍도에 있는 2그루를 제외하면 모두 18그루가 있다. 풍도의 나무는 2003년에 새로 지정된 것으로서, 그곳에 가려면 인천에서 아침 9시 배를 탈 수밖에 없는데 비용도 시간도 만만치 않아 빼기로 마음먹었다.

 

뱀다리 둘.

안산의 역사는? 안산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물론 지금과는 지형이 많이 달랐지만. 안산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식 고인돌이 있고, 인간보다 더 이전에 살았던 공룡의 발자국도 찾아볼 수 있다. 아무튼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남하했을 때 안산을 차지하고 장항구현(獐項口縣)이라 했단다.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아직도 수암에 가다 보면 노리울을 볼 수 있다. 장항, 곧 노루목이 아닌가. 고구려 장수왕이 5세기 때 인물이니 적어도 1500년 전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말씀.

그것만이 아니다. 가장 최근인 조선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안산에 살던 호구와 인구부터 특산물까지 볼 수 있다. 대략 평균을 내면, 2000호 안팎에 1만 명 남짓의 사람이 안산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현 안산의 인구 70만에 비교하면 별 것 아니지만, 조선시대에 인구가 최대 1500만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1/1500이 안산에서 살았으니 만만한 숫자가 아니다.

그리고 안산의 특산물은 기록에 남은 걸 보면 대부분 수산물이다. 시화방조제가 생기기 전 안산은 농어업이 조화를 이룬 곳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업화 정책에 따라 새로운 공업도시가 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것이 혜택인지 아니면 재앙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으면 한결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 옛날에는 먹을거리도 많고 참 좋았다고…. 지금은? 상상에 맡기겠다. 풍요로운 삶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솔직히 내가 느끼는 지금의 안산은 재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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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은 신도시가 아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아오던 곳이었다.

그러던 곳을 새로 개발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신도시인 양 생각한다.

공장 많은 곳, 범죄율 높은 곳, 뜨내기 많은 곳... 이런 평가가 현재 안산의 모습이다.

 

그러나 안산은 그 역사가 무지 오래된 곳이다.

물론 시화방조제를 만들면서 안산의 역사는 새로 시작되긴 했다.

옛 마을을 쓸어 버리고 새로운 집을 만들고, 개막은땅에는 공장들이 들어서고, 이제 아파트며 전국 곳곳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넘친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이가 있으니, 바로 이 느티나무이다.

한대역에서 중앙역 사이에 있는 이 느티나무는 나이만 무려 400살이 되었다.

이건 이제 하나의 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하지 않은가?

들어서는 길조차 없어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 덕분인지 어마어마하게 가지를 뻗은 것이 나이보다 훨씬 건강해 보인다.

사람들의 왕래와 손길이 많이 닿는 나무보다는 훨씬 행복하다고 할까?

뭐든 사람이 많이 끼면 문제가 된다.

 

 

얼마나 더 물러나야 온전한 모습을 담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금만 더 가면 굴러떨어질 것 같아 이쯤에서 찍었다.

나무 둘레는 어른 4~5명이 둘러안아야 할 정도로 굵다. 

 

 

1982년에 370살이라고 추정했으니, 벌써 20년도 더 지났다.

400살...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나이다.

 

 

옆에 꼽사리처럼 자라는 나무는 밤나무다. 어디서 씨가 굴러왔나보다.

보통은 자기 새끼를 치는데, 이 느티나무는 맘씨 좋게도 밤나무를 불러왔다.

 

 

원래 이곳은 바닷물이 들락거리던 곳이다.

지금은 시화방조제 덕에 너른 땅이 생겨, 예전에는 농토로 썼지만 지금은 모두 돈이 되는 건물들뿐이다. 

새만금 공사가 끝나면 아마 그곳도 이렇게 되리라.

그래도 좀 다른 것이 그곳은 수도권이 아니라 이 정도까지는 아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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