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중국은 세계 최대의 밀 소비자로서, 국수와 만두, 빵 및 여러 반죽을 만드는 데 밀을 이용한다. 하지만 늘 그랬던 건 아니다.

밀은 신석기 시대가 끝날 무렵인 약 4600년 전 중국 북부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의 연구에 의하면그 당시에는 맛이 별로 없었다. 초기에 밀은 기아를 막기 위해 재배한 작물로서, 요리의 기쁨보단 절망의 작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중국 북부의 최초 농민들은 주로 조를 재배했다. 가뭄에 강한 이 작은 씨앗의 곡물은 1만1500년 전부터 재배되기 시작해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주로 재배되며, 미국에선 새의 모이로 이용되었다. 역사 기록과 초기 요리법에 기반하여, 연구자들은 수천 년 뒤인 당나라(618-907년) 시대에 밀이 조를 대체하여 이 지역의 주요 작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러한 변화가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날 밀의 장점은 명백하다. 요리의 다양성 말고도, 밀은 더 빨리 자라며 조보다 꾸준히 더 많은 수확량을 올린다. 하지만 고대의 농민들은 처음부터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면, 적어도 당나라 때까지 밀은 일반적으로 조와 똑같은 방식인 죽으로 소비되었다. 그 곡물은 찌거나 통밀로 조리되어 거칠고 입맛에 안 맞는 요리로 만들어졌다. 여러 초기의 저술가들이 밀죽은 "야만인과 농민을 위한" 음식이라고 언급했는데, 아마 극단적인 시기에만 소비되었을 것이다. 


중국 북부의 농민들은 왜 밀을 재배하기 시작했을까? 

그 답을 추적하기 위하여, 나는 2014년 박사 학위논문을 쓰면서 중국 북부의 여러 지역에서 이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을 무렵의 여러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고고학자는 발굴현장에서 곡물의 유물을 찾아 이를 추론했는데,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가 아니라 실제로 소비할 수 있었는지만을 밝혀냈다. 최근 연구자들은 이를 해결하는 더 직접적인 방법을 알아냈다.인간 유골의 동위원소를 조사하는 것이다. (동위원소는 탄소처럼 원자량이 약간 다른 요소이다. 어떤 동위원소는 방사성이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붕괴되지만, 다른 동위원소는 안정적이다.) 뼈부터 치아의 발견되는 모든 탄소와 질소의 여러 안정된 동위원소의 비율은 고대인의 식단에 대한  강력한 정보를 전달한다.  

조와 밀 같은 다양한 식물은 서로 다른 화학 경로를 이용해 자라기에, 토양에서 독특한 비율의 안정적인 탄소 동위원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 차이점은 이른바 C3와 C4 식물로 구별된다.) 우리가 먹는 것이기에, 그것들의 특정한 비율의 탄소가 인간의 유골에 통합되어 몇 세기가 지난 뒤에도 검파될 수 있다.

 특히 조는 중국 북부에서 재배된 유일한 주요 C4 작물이라서, 사람들이 주로 조를 먹다가 C3 작물인 밀 같은 다른 걸로 주식을 바꾸면 상대적으로 쉽게 알아낼 수 있다. 

발표된 보고서들을 조사하여 나는 약 9000년 전인 신석기 시대 중반부터 서기 220년 동한 왕조가 망한 뒤까지 약 1200개의 데이터 포인트를 수집했다. 장소는 북서부인 간쑤성부터 동부인 산둥성에 이르는 현대의 8개의 성에 흩어져 있었다.  

나와 동료들은 이 거대한 데이터 세트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이들 광대한 연구 지역에 걸쳐 있는 집단이 모두 동시에 독점적이던 조 기반의 식단에서 더 혼합된 식단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매우 놀라운 이야기이다. 이처럼 광대한 지리적 구역에서 요리법이 갑자기, 그리고 거의 동시에 바뀌려면 단순히 새로운 음식을 갈망했다는 것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 영상은 고대 세계의 가장 중요한 작물화된 곡식이 7000년에서 3500년 전 어떤 경로로 확산되었는지 보여준다. Javier Ventura/Washington University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약 4200년 전 발생했던 완신세 사건 3이라 부르는 주요한 기후변화이다. 당시 대륙들의 기후는 춥고 건조해졌다. 예를 들어 지중해 동부와 서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강우량이 1/3에서 절반으로 감소하여 사해의 수위가 45m 감소했다. 이러한 "대가뭄"이 전 세계 작물 생산에 혼란을 야기해 메소포타미아부터 인더스 계곡까지 정치적 격변을 불러왔고, 중국의 중앙 평원에서는 신석기 문화가 붕괴되었다. 

이에 더해, 신석기 말기는 전 세계적으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한 시기였다.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작물 수확량이 변동됨에 따라, 중국 북부의 신석기 농민들은 어려움에 빠졌을 것이라 가정하는 건 합리적이다.

밀은 실제로는 조보다 더 많은 물을 필요로 하기에 역사의 건조한 시기에는 좋지 않은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밀은 조와 다른 계절에 교대로 파종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밀은 조를 수확한 뒤에 파종할 수있다. 그해에 조 농사가 망해도 농민들은 아직 구황을 위해 밀을 재배할 수 있었다. 이것이 중국 북부의 사람들이 밀을 재배하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에는 많은 교훈이 있다. 기후변화는 극단적 날씨부터 해안선 변화까지 항상 예기치 않은 사회의 변화를 불러왔다. 이 사례에서, 중국 북부에서 일어난 완신세 사건 3의 여파는 결국 맛이었다. 오늘날 중국 북부의 사람들은 국수와 만두, 빵 등을 즐긴다. 하지만 그리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늘 그런 건 아니다. 

단 하나의 작물에만 주로 의존하는 대규모 단작은 늘 끔찍한 발상이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을 생각해보라. 19세기 중반 감자의 치명적 역병이 발생해, 감자에만 의존하던 이 나라에서 약 100만 명이 사망했다. 



1840년대 감자 기근 시기의 아일랜드처럼 먹을거리 공급 문제는 기아와 폭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British Library/Flickr


그러나 과학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과 세계 여러 지역의 많은 대규모 농장들은 그들이 의존하는 작물의 숫자가 위험할 정도로 제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식물 종 -아마 수십에서 수백만 종- 을 식용할 수 있지만, 오늘날에는 약 200종만 재배되며 단 3가지(옥수수, 밀, 벼)가 인류의 열량 대부분을 구성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의하면, 100년 전에 재배되던 작물의 75%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일부 지역에서는 조를 포함한 토종 작물을 되살려 지역의 농업을 더 지속가능하게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 농민들은 더 다양한 농업 체계로 나아가고자 했으며, 이것이 파괴적이었던 사건을 탐색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되었다. 고고학과 역사 자료에 의하면, 밀과 벼, 콩, 귀리, 메밀 및 보리도 재배했는데 밀이 더 선호되었다. 

한 가지 완벽한 작물은 없다. 다양성을 높이는 일이 기후가 요동치는 시기에 살아남기 위한 열쇠이다. 우리는 여전히 인위적인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한편, 실용적으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게 현명하다. 기후변화로 인한 장래의 먹을거리 스트레스를 막기 위하여, 더 많은 농민들이 편안한곳을 벗어나 요리의 기반을 확장해 갈 수 있는 좋은 시기이다. 


https://www.sapiens.org/archaeology/chinese-farm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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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5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게 된다. 이후 탈옥을 시도하다 걸려 19년까지 형이 늘어나게 된다. 그런데 왜, 장발장은 빵을 훔친 것일까?

1789년 7월 14일, 프랑스의 인민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점령해 버린다.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그와 같은 무모한 짓을 감행한 것일까?

마리 앙투아네트를 천하의 나쁜년으로 만든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돼지?"라는 날조된 말은 왜 나온 것일까? 이런 류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유층이 빈곤층의 형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껄이는 말이라 언급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기후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좋다. 17세기는 기온 저하가 극에 달했던 이른바 '소빙기 또는 소빙하기'의 시기였다. 기온 저하와 함께 잦아진 기상이변으로 당연히 농사가 망하게 되었고, 이는 기근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말 배가 고플 때는 반항할 힘도,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그때는 모든 신경이 먹고 살아남는 데에만 집중하게 된다. 사람들이 손에 낫과 쇠스랑을 들고 일어나는 건 굶주려 죽기 직전이 아니라,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데 절망과 공포가 엄습할 때이다. 프랑스에서는 그런 상황이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혁명이 일어난 것 아닐까 싶다. 프랑스는 유일하게 스스로의 손으로 왕의 목을 친 국가인가?

같은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청나라에서도 여러 난이 빈번하게 발생하다 1800년대에 들어서 아편전쟁과 함께 쇠락해 버리고, 일본에서는 계속되는 대기근에 검약령을 내리며, 조선은 영조와 정조가 등장해 정치와 경제를 안정화시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노력은 그러한 배경 때문에 더 돋보였던 것 아닐까?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를 보면 17세기 조선의 기상이변과 식량난, 그리고 그를 해결하기 위한 당시의 노력을 살펴볼 수 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79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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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비조절 가설은 가설이 아닌 법칙이 될 수 있을까? 기근과 같은 살기 어려운 조건에서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 더 많아진다는 흥미로운 가설이다. 음, 그러면 다른 사회현상도 이를 통해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아무튼 아직은 가설 수준이니 연구가 진척이 되기를 기대해보겠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출생률이 대약진의 기근 동안 떨어졌다. 

28 March 2012

1960년대 초반의 기근 동안 여자아이의 숫자가 남자아이보다 더 천천히 떨어졌다. 

KEREN SU/GETTY IMAGES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기근의 하나를 분석하자 식량이 부족할 때 여성은 아들보다 딸을 낳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뉴욕시립대학의 사회학자이자 인구통계학자인 Shige Song 씨는 1929년 9월에서 1982년 7월 사이에 출산한 30만 명 이상의 중국 여성에서 얻은 자료를 분석했다. 이 기간은 수백만 명이 죽고 공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중국의 지도자들이 토지에서 노동자를 끌어오던 대약진 기근을 포함한다. 

기근이 시작된 이후 단 1년이 지나자 Song 씨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는 비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 1960년 4월 여자아이 100명에 남자아이 109명에서 기근이 끝나고 약 2년 뒤인 1963년 10월까지 여자아이 100명에 남자아이 104명으로 떨어짐. 그 비율은 1965년 7월 무렵까지 기아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오늘 Royal Society B1  회보에 발표된 Song의 분석은 성비조절 가설을 지지한다 —종이 환경조건에 반응하여 그 후손의 성을 바꾼다는 생각. 병약하고 영양상태가 나쁜 수컷은 비슷하게 영양부족인 암컷보다 더 적은 후손을 갖는 경향이 있어서, 그 가설은 기근 시기에는 인구를 유지하기 위하여 여성이 더 적은 남자아이를 출산한다고 예측한다.

붉은 사슴2을 포함하는 동물에 대한 연구는 이미 그 가설에 무게를 싣고 있지만, 지금까지 인간에게서는 증거가 “덜 명확했다”고 Song 씨는 말한다. 기근에 대한 선행연구의 결과도 —1944~45 네덜란드의 겨울 기근(Hunger Winter)34과 1942년 소비에트연방의 레닌그라드 포위로 인한 심각한 식량부족5 — 일관되어 왔다.

Song 씨는 식량부족이 더 심각하고 오래 이어졌으며, 결정적으로 기근에 대한 선행연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고 훨씬 더 많은 자료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중국의 기근에서 분명하게 영향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분석은 기근의 영향이 유발되는 데 필요한 시간에 대한 통찰은 준다 —그가 말하길, 최소한 1년.


비율에 대한 까닭

중국 가족계획위원회가 조사한 전국의 인구 다산의 일부로서 Song 씨가 1982년에 모아 분석한 그 자료는 여성에게 전체 출산경험에 관해 물었다. Song 씨는 그 조사의 정확도는 정확히 그 아이의 성을 보고하는 여성에게 의존한다고 언급하는데, 그는 그들이 그걸 잊거나 거짓말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Song 씨는 중국의 한 아이 정책 —1978년 도입되고 가족에게 더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는 남아 선호로 일그러진 성비를 낳은— 은 결과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적다고 덧붙인다. 그는 자료를 수집할 때 그 정책은 매우 초기였고, 부모가 아이의 성별을 미리 알아 선택적 낙태를 할 수 있는 초음파 기술도 널리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난 연구에 나타난 성비의 변화가 기근에 대한 노출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한다”고 아틀란타 에모리대학의 인구통계학자이자 경제학자인 Cheng Huang 씨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영양부족이 감소의 유일한 원인은 아닐 것이라 한다. 그는 대약진 기간의 증가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또한 "문서로 충분히 입증되고" 역할을 했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린 감소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뉴욕 콜롬비아대학의 전염병학자 Lambert Lumey 씨는 말한다. 그는 Song 씨가 강한 사례를 만들 수 있으려면 전체 인구에서만 찾을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기간에 기근에 노출된 특정한 중국 지역의 남여 출생비를 조사할 것을 제안한다. 

Song 씨는 1988년 조사에서 얻은 자료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탐구하길 바란다. 그는 또한 그 연구가 한 자녀 정책이 자연적 패턴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빛을 발해야 한다고 한다. 

Nature
 
doi:10.1038/nature.2012.10331

http://www.nature.com/news/hungry-mothers-give-birth-to-more-daughters-1.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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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온 세계에서 5살 이하의 아이 가운데 900만 명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1/3 이상이 기아와 관련되어 죽음에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2009년 11월 세계의 정상이 기아문제를 해결하자고 모였지만, 실질적인 대안은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브라질의 룰라 전 대통령은 "천문학적인 돈이 실패한 은행들을 살리는 데 낭비되고 있는데, 이 돈의 절반이면 지구에서 굶주림을 완전히 퇴치할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해결책이 마련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선진국의 기아문제에 대한 냉담함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곡물시장 투기꾼들의 탐욕이 바로 기아의 원인이며 "기아문제를 빈곤국의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된 구조적이고, 또는 감수해야 할 유감스런 일로 본다"고 비판했습니다.


우리의 반기문 형님도 "세계에 10억이 넘는 인구가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기아에 시달리고, 특히 해마다 1,7000명 이상의 아이들이 기아로 목숨을 잃는다"며 선진국의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올해 동아프리카에는 60년 만의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가뜩이나 국내 정치가 혼란스럽고 농업생산성이 떨어지는 판에 설상가상의 일이 터진 것입니다. 이제 긴급하게 구호의 손길을 내밀어 줘야 합니다. 아래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의 주소입니다. 동아프리카 긴급구호를 위한 후원페이지입니다. 우리의 10만 원이면 130명의 아이에게 비상식을 제공할 수 있답니다. 10만 원이 부담스럽다면, 3만 원과 5만 원 후원도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아래는 소말리아 기근 사태에 대한 CNN의 보도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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