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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foodsovereigntytours.org/2011/04/south-korea-part-ii-modernization-and-global-ambitions/



By Anders Riel Muller

남한의 개발 모델은 어떻게 이 나라가 50년도 안 되어서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에서 경제적 강대국의 하나가 되었는지 종종 외부인을 놀라게 한다. 그 모델은 상대적으로 적은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지불한 빠른 산업화의 가장 좋은 사례로 일컬어졌다.  분명 이러한   관찰자는 서울 외곽으로 가보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적, 인간적, 환경적 비용은 당신이 도심에서 더 멀리 나서면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은 1980년대 말 마침내 연이은 정부에서 민주주의를 이루었지만, 더 많든 적든 똑같은 경제 궤도를 밟아갔다. 역동적이고, 세계적이고 첨단기술 사회인 듯한 한국의 공식적인 인상은 대개의 방문자와 주류 한국인들이 보는 것이다.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정책은 한국을 현대사회로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한국의 농촌은 이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증가하는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한 농지에 대한 압력은 주요한 쟁점이다: 농지는 사상 최저로 줄었다(farm land). 도시와 산업개발을 위해 토지에 우선순위를 매긴 최근 사례는 40년 뒤 마침내 실현된 새만금 간척사업이다. 401㎢ 사업은 쌀 생산량을 위한 농지를 늘리고자 1971년 제안되었다. 2011년 3월 정부는 이미 한국의 쌀 생산은 충분하다는 논거를 기반으로 그 땅의 오직 30%만 농지로 보존하고 나머지 70%는 주거용, 산업용, 상업용으로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러한 논거는 쌀 생산을 위한 해외기지를 얻으려고 정부 스스로 개입하는 데에서 극명하게 대조된다(landoverseas). 한국의 경관을 바꾸고 있는 다른 주요한 사업은 4대강 사업이란 이름의 어마어마한 물 사업이다. 정부는 농민과 도시지역이 똑같이 혜택을 보고 심지어 UNEP에서 좋은 기후 적응의 사례로서 갈채를 받았다고 이러한 거대한 물길 복원 사업을 홍보했다. UNEP는 나중에 한국의 환경단체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고서 그들의 지지를 철회했다. 비판자들은 농지를 더욱 감소시키고, 수많은 문화역사유산(heritage)을 파괴한다고 역설한다. 두 사례는 정부가 도시지역에 집중하고 농민과 농촌주민의 필요와 요구는 무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농업의 위기에 기여하고 있는 또 다른 요인은 주로 도심지의 식습관 변화이다. 서구식 먹을거리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즐기게 되었다. 한식에 대한 자부심은 남아 있지만, 서구식 요리법은 부와 세계적 생활방식의 상징이다. 유제품, 빵, 고기는 수요가 높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빵집은 골목마다 있다. 한국 농업생산과 한정된 토지의 양이란 구조에서는 이러한 많은 생산물을 국내에서 생산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치즈와 고기의 생산은 훨씬 많은 자원이 집중되고, 이렇게 하여 토지, 물, 사료에 대한 수요를 높이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농촌에 있는 가족을 찾아갈 때, 고기는 여전히 가끔 먹는 호사로 여겨진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주로 구워 먹는 고기를 먹지 않고 하루를 보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식량위기에 대한 ‘해결책’: 시장 개방과 해외기지 확대

시간이 지나면서 산업개발과 인구압이 토지의 수용력 너머로 한국의 식량 수요를 밀어붙였다. 2008년 식량 가격의 위기 이후, 남한은 해외의 농지를 얻으려는 중국, 일본,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나라들 사이에서 가장 적극적인 나라의 하나가 되었다(farm land acquisitions). 최근 중앙일보는 사설에서, 해외의 농지를 확보하여 세계 농산물 시장의 투기(speculation)에 대응해 나라를 보호하고 식량 공급을 안정적으로 하려는 남한의 시도를 독려했다. 이러한 점은 한국이 20세기 초반 일제에 강점되며 한국의 소농들을 엄청난 이주와 빈곤에 빠지게 만든 토지수탈에 저항했던 역사를 고려하면 흥미롭다. 

이렇게 토지를 얻는 곳은 대부분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다. 토지 구매의 자세한 사항은 접근하기 어렵고, 그러한 거래의 대부분은 수단처럼 인권 침해가 의심스러운 나라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남한의 가장 큰 식품기업의 대부분은 종종 협상을 돕는 등 남한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한국 농촌공사와 같은 공기업이 직접 이러한 농지를 소유하고 경영한다. 가장 유명한 토지 거래는 2008년 발표된 남한의 대우가 마다가스카르의 농지 130만 헥타르(경작할 수 있는 땅의 거의 절반)를 99년 동안 임대한 일이다. 그 제안은 마다가스카르에서 광범위한 사회불안을 불러일으키고 대통령인 Marc Ravalomanana이 떨어지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새로 선출된 반대편 지도자는 서둘러 토지 거래를 뒤집어버렸다(land deal).

그런데 남한이 자급하지 못하는 것을 경제개발 전략의 탓이라고만 할 수 없고 -곧 도시 인구와 농업을 두고 산업 개발을 우선시하는- 가장 큰 무역 상대인 미국과 장기적으로 유대 및 의존한 결과이다. 미국 식량 수입에 대한 남한의 의존성은 한국전쟁의 종료로 거슬러올라간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반도는 연합군과 공산군 사이의 엄청난 전투로 폐허가 되었다. 특히 미공군은 군인과 민간인을 목표로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퍼부었다. 사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내내 그러했듯이 한국전쟁에서도 네이팜탄을 더 많이 사용했다. 그 전쟁은 한국을 폐허로 만들었고, 이 나라는 전쟁이 끝난 뒤 오랫동안 미국의 막대한 구호식량을 받았다. 미국의 식량원조는 처음에는 가난하고 굶주린 수백만 전쟁 피해자를 먹여 살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미국의 식량원조는 곡물 가격을 낮게 유지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이에 따라 남한의 농업 부문은 침체되었다.

이 글에 썼듯이, 그 마무리는 미국과 남한 사이의 자유무역협정이다. 협상은 오래전인 2007년 시작되었고, 남한에서 광범위한 시위의 주제가 되었다. 특히 2007년 미국산 소고기 수업에 반대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US beef). 남한이 2005년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이후 한국의 농민은 값싼 수입품으로 농촌 생계가 점점 어려워지는 압력을 느껴왔다(rural livelihood). 미국 농무부는 자유무역협정의 승인이 한국으로 수출되는 식량을 상당히 늘릴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미국은 이미 미국 농산물을 위한 다섯번째 큰 시장인 한국으로 이미 50억 달러를 넘게 식량을 수출하고 있다. FTA가 체결됨에 따라 전통적으로 남한의 농업이 가장 보호하던 쌀을 포함하여(protected area) 거의 모든 농업 무역 관세는 사라질 것이다.


파도와 싸우기

해외의 토지 취득과 자유무역협정은 기업의 이윤, "식량안보"와 "현대의" 강대국으로 한국을 확립하려는 끈질긴 추구라는 명목으로 전국 방방곡곡 농촌사회의 관 속으로 손톱을 더욱 깊숙이 밀어넣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은 강력히 맞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나라 안에서만이 아니라 점점 더 국제 무대에서 들려주고 있다. 남한 농민의 역경이 처음 국제적으로 조명을 받은 것은 2003년 칸쿤에서 열린 장관회의에서였다. 협상장 밖에서 농민활동가 이경해는 울타리에 올라가 WTO의 소농에 대한 폭행에 항의하는 수천의 시위대와 경찰이 지켜보는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후 전국농민회총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맹은 세계의 식량 체계에 대한 신자유주의 무역정책과 농산업 지배에 대항하는 세계적인 투쟁에서 강력한 목소리가 되었다. 

또한 소비자는 점점 한국의 개발노선이 농민과 농촌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23만 이상의 소비자 회원과 1700의 생산자가 함께하는  생태적인 지향의  협동조합 한살림은 농민과 도시 소비자들의 직접적인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일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개발노선에 환멸을 느낀 도시와 농촌의 활동가들이 급속한 산업화와 끊임없는 부의 추구로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문화, 역사, 토지, 음식에 대한 연결을 회복하고자 그들 스스로 농촌 지역에 설립하고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반에 시작했다(recover the connection).

남한은 근대화와 세계화를 추구하며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 역사, 문화를 존중하는 대안적인 방법이 있는 모범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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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이란 처참한 일을 겪은 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하나의 유령이 남북한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흰쌀밥에 고깃국"이란 이름의 신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도록 노력하자고 경주했고, 사람들은 평생 소원이 고깃국에 흰쌀밥을 말아 배터지게 먹는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북한이 앞서는 듯했다. 누구는 일제강점기 남쪽은 식량생산기지였지만 북한은 공업지대라서 그런다고 한 듯하다. 누가 그랬는지는 기억나제 않는다. 내 기억력이 떨어지는 걸 후회할 뿐. 아무튼 그런 헛소리가 어떻게 나왔나 모르겠다. 북한에다 2차 유럽전쟁과 미일전쟁 때 남은 모든 걸 쏟아부었다는 건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걸 세워 착실히 공업화의 길을 밟아 나아간 결과일 뿐이다. 그에 자극 받은 장면 정부에서도 카톨릭인가 개신교인가 쪽의 연줄을 통해 미국에서 지원을 받아 경제개발을 추진하려 했다는 얘기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우리의 박 장군! 소시적부터 기회를 놓치지 않는 데에는 도가 텄으니, 난 그가 여순 사건에서도 활약했다는 걸 알고 무척 놀라웠다. 역시나 그 탁월한 능력으로 4.19혁명 이후 아직은 어수선한 정국을 놓치지 않고 정치의 전면에 부상한다. 아, 아직도 그 한 장의 사진을 잊을 수 없다. 멋진 검은 색안경을 끼신 땅땅한 그 자태, 그리고 그 옆을 듬직하게 지키던 영화배우 김원희인가와 똑같이 생긴 차씨 아저씨의 모습을... 사진이 있나 찾아봤더니 여자배우 김원희만 잔뜩 나온다. 우씨. 참 이게 김원희 씨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름름한 자태를 보라!



이제 본격적으로 가난하고 배고픈 조국을 새롭게 바꾸기 위하여 특유의 군바리 정신, 대일본 관동군 방식으로 국민을 몰아치기 시작한다. 먼저 국내 정치 기반을 잘 닦는 한편, 1960년대에 있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공업화를 위한 기반을 닦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유명한 건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2년 5개월만에 역사하신 경부고속도로.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대하면 빨갱이~


나를 파라!



어째 사진에서 보이는 구호가 4대강 뚫는다는 요즘 모습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아 씁쓸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쥐박이 대통령께옵서도 색안경 끼고 나오면 이상하게 비슷하더군. 하지만 길은 뚫린다. 길이 뚫리고 심장부터 발끝까지 혈관이 새로 뚫린 듯 자동차가 화물이 무섭게 하나둘 달리기 시작한다. 

새것과 헌것의 공존.




이제 슬슬 고민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 쉬발~ 길도 뚫고, 일본한테 빌어서 돈도 구해오고 공장도 짓고 하는데, 일할 새끼들이 안 보이네?' 지금 같으면 외국사람들 데려다 시키겠지만, 거기도 지금처럼 이렇게 일하러 올 사정은 되지 않고... '아! 농사꾼들이 있었지. 일단 값싸게 그놈들 먼저 데려오자.' 이렇게 하나하나 옆집 철수 형, 우리 영희 누나가 도시로 도시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보내오는 도시의 신기한 물건들은 아이들에게 '도시에 나가면 흰쌀밥에 고깃국도 실컷 먹고, 테레비에서 재미난 것도 많이 보고...' 하는 엄청난 환상을 심어준다.




그때 시작된 새마을운동. 아직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 뭐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확실한 건 미신 타파! 새로운 마을 조성! 을 외치며 중국의 문화혁명 못지 않게 농촌 마을에 엄청난 바람이 불어닥친다. 그것이 결국 이농과 공업화, 농촌의 식량 생산기지화와 맞물려 있는 건 아닌지...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메이지정부는 후쿠오카의 발달한 논농사 방법을 온 일본으로 퍼뜨리기 시작한다.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경.제.성.장! 이다. 그때는 흰쌀밥에 고깃국! 이라는 구호가 그것을 대변하고, 지금은 국민소득 2만 딸라 이상의 선.진.국! 일본의 메이지정부도 그걸 놓치지 않고 우리가 막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세운 이유는 여러분에게 흰쌀밥을 실컷 먹게 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해야 했기에, 후쿠오카의 농법에 기반하고 서양의 발달한 농법을 접목- 줄모, 긴네모꼴 못자리, 말 쟁기질, 소금물 가리기, 화학비료, 품종개량 등등 -하여 생산량 증대와 경작지 확대를 위해 노력한다. 

 

사실 일본도 그 이전에는 강 하구의 평야지대에서나 논농사를 지었지 대부분은 밭농사나 산에서 먹을거리를 구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농지 정리나 관개법 등은 중국이나 서양을 시찰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이 들여오지 않았을까 하는데, 밭농사 중심의 생활이다 보니 바닷가의 수산물과 산간 지방의 농림산물을 서로 교환하는 형태로 먹고 살았다. 더구나 평야에서 논농사를 짓는다는 건 자기 목숨을 내걸고 해야 하는 일... 전란이 많았던 일본에선 전시가 되면 농민이 군인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목숨 걸고 논농사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자유롭게 산으로 다니며 화전이나 부쳐 먹는 게 더 속이 편했을 게다. 그래서인지 일본 박물관이나 자료를 뒤지면 화전에 대한 기록이 참 많이 나온다. 그 나라의 자연조건이 또 거기에 알맞기도 하고... 그래서 일본 한자에서 밭은 우리의 田이 아니라 畑이지 않은가? 밭에다 불을 놓은 형상이 밭이고, 우리의 밭 전 자가 논두렁으로 구획이 나누어지는 논이다.

 

일본의 메이지정부가 야심차게 쌀 생산량 증대를 꾀하면서 쌀까지 배급해 주기에 이르니, 이런저런 걸 통해 쌀맛을 본 사람들이 이거 쌀 아니면 못 먹겠다며 쌀에 환장해 버린다. 그러니 자연히 생산량이 새로운 농법의 도입으로 늘었다지만 그 수요를 다 맞출 수 없게 된다. 거기다가 전쟁까지 벌이러 꿍꿍이를 세우니 군량미 등으로 얼마나 많은 쌀이 필요하겠는가. 또 그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보상해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는 일용할 양식이니 말이다. 결국 조선과 대만은 일본의 식량 생산기지로 전락한다. 일본이 권업모범장-농사시험장을 세워 조선의 농업을 발전시킨(?) 이유는 다 그런 꿍꿍이에서 나왔을 게다. 조선의 근대화? 그것도 더 말하면 잔소리!

 

쌀맛은 참 기가 막히다. 요즘도 현미잡곡밥을 먹다가 어디 식당에 가서 흰쌀밥,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흰쌀밥을 먹으면 그냥 밥이 꿀떡꿀떡 넘어간다. 진짜 꿀떡이 따로 없다. 몇 숟가락 안 떠 먹었는데 밥은 어디로 다 사라지고 없다. 당시 일본도 그러지 않았을까? 잡곡밥 위주로 먹던 사람들에게 메이지정부는 흰쌀밥의 맛을 일깨워준다. 조국의 근대화란 이런 것이다! 보아라, 그리고 먹어라~! 너희를 구원하는 건 이 메이지 정부다!

 

그리고 우리는 본의 아니게 일본을 통해서 흰쌀밥을 접하게 된다. 그것도 뼈에 사무치도록... 어르신들 만나 일정 때 이야기라도 꺼낼라 치면, 대뜸 그놈들이 얼마나 독한지 땅 파고 묻어 놓은 것까지 다 뺏어 갔다고 한다. 조선시대야 다들 잡곡밥을 주로 먹었을 테고, 나랏님이나 양반님네들이나 그런 높고 귀하신 분들이나 흰쌀밥을 먹겠거니 했다. 그리고 논농사도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리 넓지 않았을 테고, 넓었다고 한들 내가 부쳐먹을 땅이 있으니 소작을 해서 양반님네한테 바친다손 쳐도 내 식구 먹을 떼거리는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 판에, 나라의 마마까지 일본놈들한테 죽는다고 하지 않나, 나랏님도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지를 않나 흉흉한 소문에 팍팍한 세상살이가 되었겠지. 그런 판국에 이놈들이 뭐 빠지게 일해서 농사지어놨더니 이런 도둑놈들도 도둑놈이 없지, 농사지은 거에 비료값이다, 종자값이다, 무슨 값이다 하면서 다 제하면 30% 떨어지면 잘 떨어지는 것이니 열받지. 그래도 꾹꾹 참으며 농사꾼이 땅파먹지 않으면 뭐해 먹겠냐, 다른 걸로도 끼니나 때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농사만 지었다.  

 

하지만 세계 대공황이 벌어지고, 일본이 중일전쟁에 이어 미일전쟁까지 일으키면서 생활은 참담해진다. 그러면서 뼛속 깊이 새겨진다. 내 꼭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세상을 한번이라도 봤으면 좋겄네! 그리고 그게 그 뒷세대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 박정희는 그 민심을 읽고, 내가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여주마! 나를 따르라~ 대신 조용히 해. 아무것도 묻지도 말고 따지지 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까라면 까고, 맞으라면 맞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 그런데 어디 사람이 그런 존재인가. 모두 자신의 자유의사가 있고, 누구나 자유롭다는 헌법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참 어두운 시대였다. 

 

박정희는 결국 1977년 식량자급율 100% 달성이라는 발표를 하고 조국의 녹색혁명을 완수한다. 하지만 그의 공업화와 녹색혁명으로 잃은 것들... 마을 단위의 공동체 정치와 문화생활, 작물다양성을 비롯한 생물다양성, 지속가능성, 지역 균형발전, 고르고 균등한 분배, 동등한 출발선, 그리고 누구나 자유롭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기본권 등등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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