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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문화

일본 근세 농민 생활사 -6. 농가의 생활과 그 변화

by 雜s 2026. 10. 27.

内証勘当

6. 농가의 생활과 그 변화

 

 

 

 

(1) 가족

 

가장의 권위

집 안에 화덕(이로리囲炉裏)을 중심으로 하여 가족이 모이는 곳에도 자연스레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장식 공간(토코노마床の間) 또는 그에 해당하는 곳을 등지고 앉는 자리가 상석인 요코자横座이고, 그 좌우를 무카이자向座·나베자鍋座, 입구를 키지리木尻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요코자는 가장 높은 자리로 호주나 적자嫡子가 앉는 곳이고, 무카이자는 귀한 손님이 앉는 자리, 나베자는 주부가 앉는 자리, 키지리는 화로에 땔감을 넣는 곳이란 뜻에서 붙은 말로 가장 말석이어서 며느리의 친정 식구 등은 여기에 조심스레 앉는다. 요코자는 특히 가장권을 나타내는 자리이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니면 앉을 수 없다. "고양이와 멍청이는 요코자로 돌아간다"라든지 "여자의 요코자는 100살이 되어도 없다" 같은 속담이 보여주는 바와 같다. 그러나 본가의 호주는 별가에 가면 요코자에 앉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이는 일족의 어른이라는 권위를 나타낸 것이다. 본가와 분가가 모일 때에는 오래된 분가일수록 윗자리에 앉고, 인척 관계라면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석에 앉았다.

 

 

의절(칸도우勘当)・절연(큐우리旧離)과 연좌법縁坐法

 

 

이 요코자에서 볼 수 있는 가장의 권위는 자식을 징계해 의절하는 일도 할 수 있었다. 의절은 자식이 행실이 나빠 여러 번 타일러도 효과가 없을 때 부자의 연을 끊고 내쫓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절연(久離라고도 씀)이 있는데 보통 '연을 끊는다'고 했다. 이건 형법에 따른 연대 책임을 면하기 위해 도망자 등과의 연을 끊어 놓는 것으로, 윗항렬의 친족이 아랫항렬의 친족에 대해 행하는 것이었다. 곧 집에 있는 사람을 내쫓는 것이 의절이고, 이미 집을 떠난 사람과의 연을 끊는 것이 절연이었는데, 이 둘은 혼용되었다. 의절을 하든 절연을 하든 마을 역인에게 신고하여 의절장(勘当帳)이나 절연장(旧離帳)에 등록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건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비공식 의절(内証勘当)이었다. 왜 이처럼 의절·절연을 공식적인 것으로 해야 했냐면, 당시 형법의 연대 책임 제도 때문으로, 부모의 죄를 자식이 지고 아우의 죄를 형이 지는 등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연좌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예를 들자면, 겐로쿠元禄 7년(1694) 12월 4일 밤에 에도의 유시마湯島 6쵸우메六丁目에 사는 낭인 키무라木村 아무개의 하인 로쿠헤이六平가 주인의 명으로 심부름을 갔다가 일단 돌아와 다시 외출하려 하자 주인에게 꾸지람을 듣고, 그 자리에서 주인을 죽여 동료에게 붙잡힌 사건이 있었다. 로쿠헤이는 주인 살해죄로 이듬해인 겐로쿠 9년 3월 27일 니혼바시에서 사흘 동안 효수하고 톱질형에 처해진 뒤 아사쿠사에서 책형에 처해졌다. 주인 살해는 당시 가장 무겁게 처벌받던 일이다. 그런데 로쿠헤이의 형으로 시나노信州 시쿠군佐久郡 시모하타무라下畑村에 살던 65세의 젠지善次와 오다기리무라小田切村에 있던 60세의 킨자에몬金左衛門 두 사람, 그리고 로쿠헤이의 아들인 10세 남자아이, 젠지의 16세·10세 두 아들, 킨자에몬의 22세·21세 아들과 14세의 딸, 합해서 8명이 에도 마치부교우町奉行에게 소환되었다. 젠지와 킨자에몬도 백성이었음이 틀림없는데, 겐로쿠 8년 초에 에도로 와 동생 로쿠헤이가 처분된 날에 이 늙은 백성 두 사람과 로쿠헤이의 아들 10세 칸노죠우勘之充는 주인 살해범의 형이자 아들이란 이유로 아사쿠사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로쿠헤이와 똑같은 형장이었던 듯하다. 젠지와 킨자에몬의 아들 네 사람은 유배형에 처해졌고, 젠지의 둘째 아들은 맹인이었기에 고향으로 돌려보내 친척에게 영구 위탁하게 했다. 이것이 당시 연좌의 예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본다면, 겐로쿠 4년(1691) 10월 우슈羽州 오네자와米沢의 막부령 카메오카무라亀岡村의 진에몬甚右衛門의 딸이 같은 마을의 백성 곤로쿠権六라는 자와 혼인을 하여 29일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25일에 진에몬의 하인 히코사쿠彦作가 주인의 광 안에서 그 딸의 목을 베고 자신도 자해를 해 버렸다. 다이칸소代官所에서 수사를 하자, 부모인 진에몬의 이야기에서는 히코사쿠가 부당하게 딸을 죽였다면 소리도 질렀을 것이다. 그러면 광과 본채 사이는 4-5칸이기에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없었던 건 전부터 밀통하던 사이로 서로 합의해 죽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외에 아무 사정도 모른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듬해인 겐로쿠 5년 6월 로우쥬우老中 토다 야마시로노카미戸田山城守는 히코사쿠의 사체를 그곳에서 책형, 히코사쿠의 친아버지 코우야스무라高安村의 요소자에몬与惣左衛門과 히코사쿠의 형 후카누마무라深沼村의 큐우사쿠久作 두 사람은 사형, 히로사쿠의 누이·큰어머니·사촌동생 등 9명은 목숨은 살려주고 별도의 처벌은 없다고 처벌을 내렸다. 오늘날이라면 동반 자살이라고 끝날 일이 주인의 딸을 죽였다는 죄에 의해 연좌법으로 아버지도 형도 사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연좌법이 있기 때문에, 품행이 나쁜 자식이나 가출을 한 자가 언제 어디에서 어떠한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 그 때문에 연을 끊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은거한 부모도 호주인 자식을 의절할 수 있고, 다른 가문에 결혼한 자라도 절연을 할 수 있었다. 비공식의 의절·절연은 연좌를 면하게 해주지 못했기에 공식적인 것이 필요했을 텐데, 자식의 행실이 바로잡혀 그 필요가 없어지면 이를 용서해 복귀해 살 수 있게 했다. 막부령에서는 의절할 때에는 주요한 친척·5인조·마을 역인의 연서를 받아 다이칸에게 신고하고, 다이칸은 호적에서 뺐다. 호적에서 뺀다는 건 당시의 호적인 인별첩人別帳에서 제거하는 것으로, 그 뒤는 무숙無宿이 되어 히닌非人의 수하가 되는 것이었다. 가출을 한 경우는 30일마다 끊어서 6번(육절六切이라 함)의 수색을 하고, 찾을 수 없던 경우 다이칸이 부교우소에 청원해 영구 수색(永尋ね) 상태가 되며, 그때 호적 삭제를 요청하면 똑같은 수속으로 인별첩에서 제거했다. 분카文化 9년(1812)부터 수속이 간단해져 다이칸이 처리할 수 있게 되었는데, 텐포우天保 5년(1834)의 시모츠케下野 츠가군都賀郡 카미이즈무라上泉村의 인별첩 모음 목록에 의하면, 인구 275명의 마을인데 도망가 영구 수색인 자가 20명, 호적 삭제자가 35명이나 있다. 이건 빈곤 때문에 몰락하고 도망가서 행방불명이 된 자가 많았던 듯한데, 또한 시대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주부의 입장

여하튼 부모는 자식을 의절·절연에 의해 연을 끊는다는 매우 강한 징계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부모를 중심으로 한 가족은 그 안에서도 신분적인 차이가 있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교하면 아버지가 훨씬 우월한 힘을 가져서 밖에서 바라보는 시각만큼 여자가 열등시되었던 건 아니다. 게다가 중농 이하가 될수록 가장과 주부의 지위가 평등에 가까워져 주부가 가장을 이름으로 막 부르는 곳도 있다. 이건 농가에서 노동은 남자나 여자나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시집을 간 초기는 남편에게는 부모나 동생들도 있어서 감정적으로도 며느리의 입장은 매우 불리하다. 남편과의 사이가 원만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가족과의 불화 때문에 이혼하게 되는 일도 적지 않다. 부모의 자식이자 동생들의 형이었던 자를 밖에서 온 며느리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모두 며느리에게 반사되어 온다. 그 감정은 본능적인 것이기에, 남편과 원만하다면 어느 정도 반사는 강해진다. 경제적으로 보면 남편의 집에는 논밭도 집도 가재도 있다. 며느리는 몇 가지 소지품을 가지고 오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 큰 차이가 끊임없이 며느리를 압박한다. 며느리가 가져 온 큰 힘은 노동력이다. 두 사람의 일손이 있는 곳에 온다면 1/3의 노동을 부담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자신의 노동량을 가능하면 늘려야 한다. 며느리는 아침은 가장 일찍 일어나고 밤은 가장 늦게 잠들었다. "남의 며느리와 무뎌진 식칼은 언제나 쨍쨍히 서 있는 것이 좋다"라고 이야기되었다. 노동량의 증가에 따라서 며느리의 집 안 비중이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며느리는 남편의 곁으로 온 것이 아니라, 그 집에 온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15년이나 20년 지나고 나서도 '우리 며느리'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며느리는 때때로 친정에 돌아간다. 보통은 정월이든지 백중의 정해진 때밖에 돌아갈 수 없기에, 봄과 가을에 1번 정도씩 세탁을 하기 위해 친정으로 돌아가는 관습이 있던 곳도 있다. 그건 옷의 세탁보다는 목숨의 세탁이었다. 

 

 

며느리에서 주부로

며느리가 주부의 입장에 설 때에는 그걸 형태로 표현하는 곳도 있었다. 오우우奥羽 지방에서 행해졌던 '주걱 넘기기(杓子渡し)'는 그것이었다. 며느리에게 주부의 권리를 양도할 때에는 새로운 냄비 뚜껑의 위에 새로운 주걱을 1개 얹고 그걸 두 손으로 쥐어 며느리에게 넘기는, 그것으로 주부의 권리를 넘겼던 것이다. 히다飛驒의 어느 지방에서는 제야의 밤에 주부가 며느리에게 모두의 밥을 푸도록 명하는, 그것으로 주걱 넘기기가 완료하게 되었다. 밥을 푸는 것도 주부의 권리로, 그때까지는 며느리는 주걱을 쥘 수 없었던 것이다. 며느리가 시어머니 때문에 고생하는 가장 큰 것은 밥을 자유로이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이외의 일은 참더라도 '입을 틀어막히고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 많았다. 시어머니가 너무 젊으면 언제까지지나더라도 주걱이 넘어오지 않기에, 혼담할 때에도 시어머니의 연령이 문제가 되었다.

이런 비참하고 잔혹한 일이 이 가족 제도 안에서 생겼던 것이다. 다만 이건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관계에서만 생각하고 끝낼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 품고 있던 애정이 새롭게 얻은 아내에게 쏟아지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며느리에 대한 애정은 차이가 있지만, 이성에 대한 애정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된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곳에서 질투가 생긴다. 그렇더라도 주부의 자리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며느리에 대해 강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며느리가 주부의 지위에 오를 무렵이면, 그 집을 위해 일한 노동량은 막대해진다. 그 비중은 시잡왔을 때보다 훨씬 커져서,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빼낼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하인을 많이 부리는 부농보다는 한 가족이 직접 일하는 집 쪽이 그 비중이 큰 게 당연하다. 그 집의 재산이란 것이 거의 부부의 협력으로 만들어지고 또 유지되어 왔음이 분명하다. 봉토나 봉록을 받는 무사와 그 아내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게다가 아내는 남편과 비슷한 정도로 농사에 관한 지식도 있고 노동력도 있다. 농사일에 대해서는 남편에 뒤지지 않는 발언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자식이 자라 며느리를 맞이하면, 며느리에게 자신이 겪은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는 집집마다 저마다의 격식과 관례가 있어 그걸 가르쳐 익히게 해야 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나 남들만큼 고생은 해야 하는 법이어서 '우리 며느리'만 편하게 지낼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자신이 '배우고 길러진 정도'가 부족했다고 여겨 며느리를 더욱 철저히 가르치기도 했다. "진한 차를 끓였다네, 할멈 오시게, 며느리 흉보며 마셔 보세"라는 노래 같은 게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런 반복이 5번, 10번 거듭되면 그건 더 이상 흔들 수 없는 철칙이 되어 작은 가족 안에서 크게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혼인의 조건

주부가 되고 나서 갑자기 여자의 힘이 강대해지는 것은 여자가 그때까지 부당하게 압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더라도 아이 쪽이 존중되고, 자식은 이 집에서 태어난 것이고 며느리는 밖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혼인이 부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문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혼인할 때의 조건은 상대방의 재산이나 가문이 상당한지 어떤지이고 본인의 문제는 부차적 문제였다. 가을 어귀에 며느리를 맞이하는 건 겨울철 식량이 손실이라고 해서 초봄에 혼례를 하는 지방도 있었다. 며느리가 집에 어울리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발 들이기(아시이레足入れ)'라는 시험 결혼을 하여, 어울리지 않으면 친정으로 돌려보내는 관습도 있었다. 그러나 늘 남녀가 서로 아무 애정도 없이 결혼했다고는 할 수 없다. 에도 시대의 농촌은 50호나 60호의 한 마을이었기에, 마을 사람은 서로 그 집의 경제 상태까지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한 젊은 사람에게는 공동 숙소(寝宿)가 있어서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나이가 차면 그곳에 묵으러 가는 관습이 있던 곳이 적지 않았다. 공동 숙소는 마을 안에서 적당한 집을 선택해 15~16세가 되면 그곳으로 숙박하러 가는 것으로 모든 뒷바라지는 공동 숙소의 부모가 했다. 남녀 별도로 공동 숙소를 정하던 곳도 있지만, 남녀 혼숙인 곳도 있었다. 공동 숙소가 없는 곳에서도 침소 잠입은 행해졌다. 미혼인 남녀는 서로의 공유라는 생각이 상당히 널리 남아 있었다. 그들 중에서 결혼으로 이어지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 경우에는 공동 숙소 부모가 중개와 기타 뒷바라지를 했다. 딸이 승낙해도 부모가 허락하지 않을 때는 젊은이 무리가 딸을 훔쳐 왔다. 가문이 어울리지 않거나, 딸에게 따로 혼약자가 있을 때에는 부모도 승인하고 훔쳐 가게 했다. 남자 쪽에서는 술자리를 마련해 기다리고, 그 다음날 중매를 세워 딸의 집에 다시 허락받으러 간다. 그러면 대개는 수습되었다. 서로의 공유였던 딸이 어느 남자의 독점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물 끼얹기와 돌팔매질 등이 행해졌다. 혼레 당일 밤, 새 부부에게 물을 끼얹는 것은 부정을 씻는 의미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사위 괴롭히기와 며느리 괴롭히기의 의미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혼가에 돌을 던지는 것과 함께 때로는 난폭한 행동을 하게 되어, 막부에서도 여러 번에서도 농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무가에게도 에도의 상공인에게도 여러 번 금령을 내리거나 처벌하거나 했다. 특히 다른 마을 사람이 데릴사위가 되었을 때, 젊은이들이 사위 괴롭히기를 하는 것은 자기들의 공유였던 딸을 다른 마을 사람에게 빼앗겼다는 것에 대한 반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각지에 있던 젊은이 무리는 이 공동 숙소를 중심으로 했기에, 결혼은 또한 젊은이 무리를 빠져나온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혼례 당일만이 아니라 연말이나 정월에 신혼 부부를 괴롭히는 풍습은 각지에 있었고, 그건 이성을 독점하는 데 대한 댓가와 젊은이 무리를 벗어나는 것에 대한 축복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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