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농촌의 전통과 주민
(1) 가문의 격(家格)과 전통
마을의 전통
봉건 사상의 벗어남이란 입장에서 농민 사상의 보수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농민의 사상은 일면으로는 안정성·견실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일면으로는 정체적·보수적인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건 농업 그 자체의 성격에 기반한 바가 많지만, 또한 일본의 농업 경영의 형태나 기술의 발달 단계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것들과 깊은 관련을 갖는 것인데, 농촌 사회의 질소 지속이나 가족 제도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농촌에서 계속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는 아마 일본의 농촌 역사에서 최대 변혁이 되어 나타날 듯하다. 따라서 앞으로 농촌의 모습이 오늘날까지와는 매우 다른 것이 될 것은 쉽게 예측되는 바이지만, 적어도 오늘날까지 이어진 농촌은 참으로 긴 전통에서 생존해 왔다. 다이카大化의 개신은 일본 최초의 토지 제도에 대한 변혁이었는데, 군지郡司 이하의 지방관리는 쿠니노미야츠코国造·아가타누시県主라고 할 만한 세습 가문의 자를 임명했기 때문에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 다이카 이전 시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율령 제도가 폐퇴하고 장원이 발생할 때, 토지를 개간해 지방의 대소 지주가 된 것은 또한 코쿠시国司·군지 이하의 지방 호족 또는 부유한 백성이었다. 그 토지는 중앙의 권문세가·왕족·신사와 사찰에 기진해서 그 보호를 구했지만, 실질적으로 관리의 책임을 맡았던 건 개간주나 그 자손이었다. 이리하여 무가가 발흥했을 때에는 지방 하급 무사는 다시 농촌의 안에서 나왔다. 전국 말기 이래, 무사가 도시에 집주하여 이른바 병농 분리가 이루어졌을 때, 토착해서 마을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중세의 무사 또는 무사에 가까운 자가 많았다.
에도 시대의 쇼우야·오오죠우야 등에는 장원 시대부터 이어진 토지의 유력자였던 자가 적지 않았다. 검지 사업은 그들을 백성으로 규정해 종래의 지위로부터 아래로 떨어뜨렸지만, 그럼에도 마을 안에서 그들의 지위와 경제력은 지속되었다. 메이지의 지조地租 개정은 에도 시대의 토지 소유 백성을 그대로 지주로 정했다. 따라서 에도 시대에 입장은 농촌 안에서는 여전히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농촌 안의 상층부는 개별적으로 보면 부침은 있으나 하나의 계통을 이어 내려온 것이다. 농촌의 전통 또한 이러한 것이었다. 마을의 제례는 그 의의가 잊혀진 뒤에도 예전 관습에 따라 행해진다. 연중행사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해 왔지만 여전히 소중히 지켜지고 있다.
사는 집도 100년 200년의 그을음에 물들어, 어느 마을의 아무개라는 집은 몇 번의 큰 폭풍에도 견뎌 왔다. 개개의 것에 동요가 적다는 것은 마을 전체도 동요가 적다는 것으로, 그 관습 질서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져 마을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특히 에도 시대처럼 많은 속박이 가해져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던 시대에는 그것이 한층 더 명확히 나타났다. 마을의 질서를 지키는 것이 마을 주민의 책무로 여겨졌고, 그를 어기는 자는 이단자로 취급되었다.
가문의 격식
그러한 마을 사회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가문의 격식일 듯하다. 지금의 도시 생활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또는 돌아보지 않게 된 가문의 격 문제야말로 도시와 농촌을 구별하는 중요한 한 요소였다. 왜냐하면 '시민적'인 것은 '가문의 격'이란 관념을 내동댕이치는 것을 하나의 조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이고 과거는 아니다. 과거를 중요한 요소로 삼는 '가문의 격'은 그곳에서는 성립하는 것이 어렵고, 그를 대신해 '인격'이 중요시된다. 수도의 물로 갓난아기의 첫 목욕물을 사용했다는 것이 에도 토박이의 자격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던 때에, 마을에서는 2대·3대 정도 된 집안은 분가한 집으로 여겨졌다.
가문의 격이란 것을 특별히 다루어서 논하는 자는 없다. 그러나 마을 사람은 모두 그걸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이야기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 안에서 자기 집안이 마을에서 어느 정도에 위치하는지를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다른 집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 격은 부의 힘만으로는 좌우되지 않는 것이기에, 경제의 움직임보다도 더 움직이지 않는다. 자산이 생겼다고 해서 곧바로 가문의 격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격을 올리기 위해서는 격이 좋은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는다. 그것을 (관계를) 짜서 올린다고 한다. 그 격이 까다롭기 때문에 혼인 관계도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상대의 인물됨이나 자산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으로 가문의 격이 위력을 갖는다. 혼담이 상당히 진전되면, 일족과 인척에게 이를 알려 양해를 구해야 한다. 돈에 눈이 멀어 가문의 격을 떨어뜨렸다는 비난을 피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가문의 격이 늘 머릿속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고, 격식 차린 자라에 앉을 경우라든지 혼담이라도 일어날 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한담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한때는 그런 생각에 강한 반감을 가지면서, 이윽고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그걸 문제로 삼는다. 자신의 집이 마을 안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다고 자각하고 있는 자는 물론이거니와,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 자조차도 그걸 신경 써서 자기보다 못한 가문을 찾는다. 저기는 타지 사람이라든지, 자기 가문은 몇 대 전에 어디에서 며느리가 시집을 왔다든지, 어떤 곳이든 찾아보면 다른 데와 다른 점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가문의 역사, 라고 하더라도 몇십 년 몇 대 동안 똑같은 생활을 해 왔던 자에게는 3대 전의 할아버지가 술고래라 가산을 탕진했다든지, 할머니가 시집올 때 혼수가 대단했다든지 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집집마다 역사가 이야기로 전해져 마을의 전통이 몇십 년 몇백 년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물론 4대 5대를 거슬러오르면 대부분의 집에게는 전설의 시대, 신화의 시대였다. 현실에 남아 있는 것은 가문의 격이라는 것에 응집되어 있었다. 저자가 살고 있는 카미호우야신덴上保谷新田(현 니시도쿄시)의 묘지는 장기의 배치로 일컬어, 첫째 줄 중앙에는 나누시의 묘, 그 옆이 토시요리, 다음이 백성다이百姓代와 같이 되어 있고, 깊이는 같지만 너비는 점차 좁아져서 왕부터 사·상·마·차로 늘어선 것처럼 되어 있다. 길을 사이에 둔 둘째 줄은 졸의 격이다. 단골 이발소 주인은 "우리는 외지인으로 H씨(나누시) 집에서 짚신을 벗었다고(더부살이했다고) 해서 묘지는 가장 구석에 있지요"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장례식 때나 백중맞이에서는 예전 가문의 격이란 것이 뚜렷이 드러난다.
농촌에서 자란 사람은 오늘날에도 가문의 격이란 것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마을의 집집마다 경제적 자산력의 순위를 매기는 일은 어렵더라도, 가문의 격이란 순위라면 누구나 대략적으로 매길 수 있을 듯하다. 메이지 이전의 봉건 사회에서 가문의 격이 얼마나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는지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텐메이天明 3년(1783)에 아사마산浅間山이 대폭발했을 때, 죠우슈우上州 아가츠마군吾妻郡 칸바라무라鎌原村는 300명 정도의 인구가 93명으로 줄었다. 그때, 인근 마을의 사람 3명이 구호 오두막을 지어서 구조했는데, 백성은 가계와 혈통을 심사해, 설령 당시는 부유하더라도 가문의 격이 없는 자는 다다미방에 들이지 않고, 격식을 차린 인사가 어려웠기에 이 오두막 안에서 친족의 약속을 맺게 한 뒤 93명의 혼인 관계와 기타 신상 처리를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네기시 시즈모리根岸守信의 『귓집(耳袋)』에 있다.
집짓기와 신분
메이지 초년에 편수되었던 『미노국美濃国 민속지고民俗誌稿』에 의하면,
메이지 유신 이전 봉건일 때, 영주가 그 토지를 달리하여(비슈尾州 영지·카사마츠笠松 군다이, 그외 하타모토 치교우쇼知行所 혹은 지토우地頭) 민심과 풍속 또한 같지 않으며, 혹은 촌장과 오랜 가문의 자는 문벌을 중시해 영세민을 속박하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영세민(소작인 혹은 예속 농민)에게 의복의 제도를 한정해 상하 예복·문양 넣은 짧은 겉옷과 하의 및 나막신·가죽을 댄 눈신·우산 등을 사용하는 걸 허락하지 않고, 또 영세민인 자가 부유하더라도 집을 새로 지을 때는 기와 차양이나 매단 천장(釣天井)·석자 장식 마루에 테두리 두른 문 혹은 흙벽 광의 흙을 바른 두꺼운 문 등을 짓는 걸 허락하지 않으며 크게 권위를 휘두르고, 가문의 격을 내세우는 자(여기에 말하는 문벌은 종래 마을 안에서 나누시·쇼우야 혹은 카시라분頭分이라 외치며 세습해 온 무리로, 실제 가문의 격이 있는 집안은 모든 군에서 적고, 이른바 예전에 부유했던 자가 대대로 그 권세를 이어받은 것에 불과함)는 비록 빈궁하고 무지몽매하더라도 마을 주민을 멸시하는 폐단이 있으며,
라고 했다. 그리고 이는 한 마을 안의 구별에 그치지 않고, 그 영주가 토쿠가와 친족 번인지 하타모토인지 등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었다.
오와리번尾張藩 관할의 인민(번 신하의 급지도 이 안에 있음)에 혈통과 문벌이 있는 자, 부유하여 부과금 등을 조달하는 쌍칼을 차는 것을 허용하고, 또 연초에 말씀을 내리는 등 그 격식과 계급이 있는 자는 거의 무사의 가문과 다르지 않으며, 아래 백성에 이르러도 여전히 그 영주의 지위와 벼슬이 존귀하고 문벌이 높으며 또 그 봉역이 큰 것을 내세워 자못 오만한 뜻을 품고 남을 멸시하는 기풍이 있다. 오오가키번大垣藩 영지의 인민에 이르러서는 격식과 등급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결코 교만한 기색이 없고, 다만 의기양양하게 스스로 만족할 뿐. 막부령의 인민에 이르러서는 혈통과 문벌을 귀히 여기는 풍습이 있는 데다가 격식이 높아서 결코 두 번 관할의 인민보다 아래에 있지 않고, 일이 있어 의석에 임하면 반드시 윗자리에 앉음. 그 말세에 이르러 매관売官의 법을 본떠 명가금冥加金이라 부르며 거액을 부유한 인민에게 부과하고, 그 납부액의 다소에 따라 격식을 허가하되 각각 등차가 있음. 또 그 관할의 현리県吏는 갖가지 명목을 만들어 쌍칼을 차는 걸 허락했다. 이에 한때 다투어 쌍칼을 차는 자가 많아져, 무사인지 농민인지 거의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식견 있는 자는 몰래 농기구를 팔아 도검을 산다며 탄식했다. 또 한 가지 악습이 있어, 아래 백성이 기와집을 짓는 걸 금했다. 심한 경우에 이르러서는 차양이라 하더라도 기와로 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를 향례郷例라 했다. 만약 금지를 어기면 그 관청에 고발해 마침내 이를 헐게 했다.
이러한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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