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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이 없으면 농업도 없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農夫餓死, 枕厥種子)”라는 속담만큼 씨앗의 소중함 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다. 내가 씨앗, 특히 토종 씨앗에 처음 관심을 기울인 건 대학을 다니던 2000년대 초반이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던 나는 졸업 이후 유기농업으로 생계를 꾸리고 싶어, 이를 준비하면서 전통 농법과 토종 씨앗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전통 농법은 10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한국 사회의 빠른 변화와 함께 농업 현장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씨앗은 달랐다. 시장에 판매할 목적이 아니라, 집에서 먹거나 조상에게 물려받 은 것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여전히 집집마다 몇 가지씩 토종 씨앗을 지키고 있었다. 그 농민들은 무슨 이유로 토종 씨앗을 보전하고 있었을까? 토종 씨앗은 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일 까?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토종 씨앗이 소중한 까닭
토종 씨앗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농업생태계에서 농민이 대대로 사양, 재배하거나 이용하 고 선발되어 와 한국의 기후와 풍토에 잘 적응된 식물의 씨앗”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이야 다들 종묘상에 가서 씨앗이나 모종을 사다가 심지만, 과거에는 그러지 않았다. 종묘상이 없던 시절에 는 직접 씨앗을 받아서 쓰거나 이웃에게 얻었다. 그도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 들고 온 씨앗으로 농사를 지었다. 이처럼 어느 농민이,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계속해서 씨앗을 받아서 농사를 지 으면 씨앗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씨앗은 그것이 재배되는 지역의 자연환경과 인간의 요구에 적응하며 진화 하게 된다. 쉽게 말해, 어떤 병해충이 발생하거나 특정 잡초가 심하거나 가뭄이나 폭우 같은 기 후가 빈번한 곳에서 오랜 시간 재배되면서 그에 견딜 수 있는 능력(저항성)을 발달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형질이 씨앗 안에 유전자의 형태로 남아 후대로 이어진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려는 종자 관련 연구자나 기업에 토종 씨앗은 중요한 존재로 여겨진다. 직접 농사짓거나, 음식으로 먹는 사람에게 토종 씨앗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앞서 토종 씨앗은 자연환경이나 인간의 요구에 적응해 왔다고 언급했다. 토종 벼를 예로 들면, 토종 벼는 신품종 에 비해 키가 크고 수확량이 떨어진다. 또, 가뭄에 강한 편이고, 까락이 있는 게 대부분이다. 무 슨 이유로 이런 특징을 가지게 되었을지 생각해보면 재밌다. 먼저, 과거에는 지금처럼 제초제 등이 개발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풀보다 먼저 논의 공간을 차지하려고 키가 클 수 있다. 또 한, 볏짚을 활용하는 일이 중요했다. 다양한 생활도구부터 가축의 먹이까지 볏짚이 다양하게 활 용되며 수확량이 좀 적어도 키가 큰 벼가 선호되었을 수 있다. 이렇듯 생물학적, 농업적, 생활 문화적 측면의 필요 때문에 그러한 토종 벼들이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다양한 맛의 근원이라는 측면도 있다. 농촌에서 토종 씨앗을 재배하는 할머니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열이면 열 모두 개량종보다 토종이 더 맛있다고 이야기하신다. 물론 맛이라는 건 다분히 주관적인 평가라고 치부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토종과 개량종의 우열 이 아니라, 맛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이다. 요즘 우리가 먹는 농산물을 보면 개성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유명 식품기업에서 만든 두부, 된장, 콩나물 같은 콩 가공식품부터 채소 판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농산물들을 보면 거의 똑같은 품종들뿐이다. 언제 어디를 가든 비슷한 농산물만 있으니 음식의 맛이 재료가 아닌 양념에만 좌우되기 쉽다.
왜 우리의 농산물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것뿐일까? 왜 일부 농가에 보전되는 여러 가지 토종 씨앗으로 재배한 다양한 농산물은 찾아보기 힘들까? 이런 물음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나의 머 릿속을 떠나질 않고 있다.
씨앗에는 시대상이 반영된다
한국에서 토종 씨앗보다는 개량종이 더 중시되며 널리 퍼진 건, 한국 사회가 다양성보다는 균일 성 또는 획일성에 기초를 두고 생산성만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는 초고도 성장을 위하여 우리가 선택한 전략은 선택과 집중이다. 이를 위해 농업에서는 수확량이라는 잣대에 따라, 다양한 맛보다는 여럿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그러면서 집에서 먹을 목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씨앗을 심던 관행은 상품성이 있는 소수의 씨앗만 대량으로 재배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토종 씨앗보다는 그런 목적에 적합한 개량종 씨앗만 선택되었고, 토종 씨앗은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통일벼를 들 수 있다. 1970~80년대 초까지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권장했던 통일벼는 밥맛이 좋아서가 아니라 수확량이 많아서 선택된 대표적인 개량종이다. 결국 이를 통해 쌀 자급률 100%를 달성하게 되었지만, 지 금에 와서 통일벼는 어떻게 되었는가. 밥맛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결국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았는가. 경제성장과 함께 사람들은 이제 농산물을 선택할 때 양보다는 질과 맛을 우선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현재의 농업은 그런 소비자의 변화된 다양한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농산물 생산에서도 다각화가 필요하고, 생산의 다각화를 위해서는 그 기초가 되는 다양한 씨앗이 요구된다.
맛있는 밥상을 책임질 토종 씨앗
그래도 아직은 늦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동아시아 종자 네트워크’라는 행사에 참석하고자 일본에 방문했다.우리보다 더 일찍 많은 변화를 겪은일본 농업의 경우, 토종 씨앗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씨앗 문제에 관심을 가진 농민들도 토종보다는 직접 씨앗을 받아서 재배하며 만드는 고정종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마지막 열차에 탑승해 있는 토종 씨앗 지킴이들이 전국 각지의 농촌에 남아 있다. 그들이 여전히 재배하고 있는 토종 씨앗은 신품종보다 수확량은 뒤떨어져도 더 좋은 맛 때문에, 또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먹이려고 남아 있는 것이 많다. 그러한 토종 씨앗들을 이용해 다양한 품종을 재배하여 틈새시장을 노려볼 수도 있겠다. 최근 새로운 맛을 찾는 소비자들 때문에 동남아시아나 유럽 쪽의 채소가 한국에 도입되어 점점 재배면적이 확대되고 있다는 뉴스도 나오는 이때, 독특한 향과 맛을 가
진 토종 씨앗을 찾아내 그런 수요를 충족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조금씩 서서히 토종 씨앗의 재배면적이 늘어나며 우리의 밥상에서 한자리를 차지한다면 토종 씨앗은 다시 한 번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대학 시절 농촌 활동에 참가하며 “먹어야 산다”는 구호를 만들어 외치곤 했다. 당시에는 ‘사람은 먹어야 산다’는 의미로 지은 문구인데, 이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토종 씨앗은 우리가 ‘먹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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