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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 김석기







한국에서 농사를 중심으로 한 대안운동이 시작되고 확산된 지 어느새 20여 년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 이러한 대안운동이 펼쳐지는 공간을 가리키는 몇 가지 용어가 사용되었다. 먼저 ‘주말농장’이다. 이는 말 그대로 주말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 곳이란 뜻이 담겨 있다. 90년대 중후반, 일반 도시민들의 일상에 농사라는 행위가 파고들면서 공간 확보 등의 문제로 수도권 주변부의 농지를 이용하여 분양을 하는 농장이 생겼는데, 그곳들이 표방한 개념이 바로 주말농장이다. 아직도 과도한 노동시간으로 쉴 시간조차 없다고 평가되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주말이라는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단어일 것이다.

 

다음으로, 지금도 널리 쓰이는 용어인 ‘텃밭’이다. 주말농장이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꼭 주말이 아니어도 평일에 출근하기 전이나 퇴근하고 나서 농장을 찾아와 농사의 재미를 즐기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이 농사짓는 곳은 이제 더 이상 ‘주말’농장이 아닌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주말농장이 갖는 시간적 한계를 인식하고 그보다 적합한 용어를 찾아낸 것이 바로 텃밭이다. 이를 통해 도시민이 농사를 짓는 행위와 공간에 대한 개념이 더욱 확장되었다. 이는 이후 도시농업이란 용어로 재정의되면서 도시가 야기한 여러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운동으로 인정을 받고 이에 동참하는 움직임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텃밭’이란 단어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텃밭의 사전적 의미는 집터 등에 딸려 있는 밭을 뜻한다. 이 개념을 확장하여 도시민이 새로운 대안운동의 일환으로 농사를 짓는 공간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한국 특유의 도시개발과 그 주거문화로 인하여 여전히 사람들은 자동차 등을 이용해 짧게는 10-20분, 길게는 1시간 이상 이동하여 농사를 지어야 했다. 즉, 텃밭은 텃밭이되 자신의 생활공간과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하려 마음먹고서 가든Garden이란 단어를 한국어로 어떻게 옮길지가 고민거리였다. 지금 우리가 널리 쓰는 텃밭이란 용어에 그 뜻을 온전히 담을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한국인에게 가든이라 하면 그 사전적 의미인 정원이란 뜻보다는, 도시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음식점이 먼저 떠오른다. 그렇다고 정원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자니, 농사라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보다는 무언가 수목과 화초 등을 예쁘게 가꾸는 공간이라는 의미만 강조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 현재 가장 익숙하고 널리 쓰이는 텃밭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겠다. 하지만 작물을 심어서 가꾸어 수확하는 ‘생산’이란 측면 이외에 정원이 지니는 경관과 아름다움 등을 모두 담지 못하는 것 같아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와 똑같은 고민이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텃밭 정원’이 그 산물이다. 이는 말 그대로 텃밭+정원으로서, 작물을 심어서 수확한다는 맥락에서 생산적인 공간인 밭은 밭인데 단순히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꽃과 나무 등을 심어서 즐기기도 한다는 정원이란 단어를 합하여 최근에 새로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저기 멀리 있는 큰길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갈 수 있는 샛길이나 지름길로 주로 다니고, 긴 말보다는 짧은 말을 즐기는 것이 인간의 특성 아닌가? 그러한 언어의 효율성이란 측면에서 텃밭 정원도 적당한 단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만하던 차에, 가든Garden에 담긴 여러 의미 가운데 ‘뜰’에 주목하게 되었다. 뜰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하다. “집 안의 앞뒤나 좌우로 가까이 딸려 있는 빈터. 화초나 나무를 가꾸기도 하고, 푸성귀 따위를 심기도 한다.” 그렇다. 뜰은 화초나 나무는 물론이고, 푸성귀 등도 심는 공간을 뜻하는 한국어이다. 그런데 뜰만으로는 농사라는 행위를 오롯이 담기 어려우니, 거기에 주로 농사를 짓는 공간이란 의미로 밭이란 단어를 합하면 어떨까?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하게 된 번역어가 바로 ‘뜰밭’이다.

 

물론 새로운 개념어가 받아들여지고 확산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사람들이 새로운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고 그대로 사장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서구 사회의 가든이란 말이 지니고 있는 뜻을 담을 수 있는 단어로 뜰밭만큼 적합한 건 없을 것 같다. 서구의 가든은 그들이 지닌 주거문화를 담고 있는 말이다. 개인이 자신의 거주 공간을 활용해 화초를 가꾸며 즐기는 행위 말이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을까? 특히 아파트로 대표되는 한국 도시의 주거 문화에 뜰밭이 파고들 여지는 있는가? 또, 베이비부머의 은퇴와 함께 이른바 귀촌자가 많아지고 있는데, 그들이 자신의 주거 공간에서 정원은 물론 텃밭을 가꾸고 그를 즐길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한국의 도시 곳곳에서, 그리고 귀촌자가 정착한 곳들에서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귀농운동과 도시농업운동이 펼쳐진 20여 년의 시간이 낳은 성과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 샐리 씨는 뜰밭에 매우 다양한 식물을 재배하고 있다. 단순히 작물만 심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꽃과 허브 종류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까지도 심어서 관리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목표, 즉 뜰밭과 그 주변에 건강하고 균형 잡힌 생태계를 조성해 농약과 비료 같은 화학물질 없이도 작물을 재배하고 수확하여 맛있게 먹기 위해서이다. 농지에 작물만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식물들을 공존시킴으로써, 그를 통해 여러 곤충 –익충은 물론 해충까지- 과 새, 토양의 생물 및 미생물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려 한다. 샐리 씨는 그들의 활동을 통해 얻는 부산물을 즐길 뿐이다.

 

이러한 샐리 씨의 농법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새로운 것은 아니다. 샐리 씨도 곳곳에서 이야기하듯이, 이미 과거부터 존재하던 방법을 재확인하는 것일 뿐이다. 전통적인 농업에서도 일정한 공간에 여러 가지 작물을 사이짓기하고 섞어짓기하는 방법들이 발달해 왔다. 어떤 작물을 다른 어떤 작물과 함께 심었을 때 농사가 잘 된다는 이야기는 동서의 옛 농사책에도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농학자들은 조선의 2년3작식 농법을 평가하면서 이는 조선의 농민들이 수천 년 동안 조선의 자연환경에서 농사지으면서 개발한 농법으로, 과거 유럽의 삼포식 농법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하기까지 했다. 2년3작식 농법은 돌려짓기와 사이짓기라는 농법이 결합되어 있는 형태인데, 2년의 기간 동안 3번의 농사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아무튼 샐리 씨의 이 책이 재미있고 의미가 있는 점은 샐리 씨가 과거의 이야기에만 머물고 그를 답습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만들기 위하여 여러 고전과 참고도서 등을 바탕으로 자신의 뜰밭에서 끊임없이 직접 실험하고 새로운 작물과 식물의 조합을 찾았다. 그리고 그렇게 알아낸 결과를 여기 보듯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이러한 실험정신이 근대 이후 서구 사회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라는 평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이를 착실히 실천했을 뿐일지 모른다.


10년이 넘게 텃밭 농사를 지으면서 나도 이러한 시도를 해보지 않으려고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습관처럼 농사짓던 대로 농사짓기만 한 건 아닌지 반성이 된다. 샐리 씨에 비교하니 나는 기껏 해야 작물과 작물의 궁합만 살폈을 뿐이다. 샐리 씨처럼 작물만이 아니라 작물에 꽃과 허브를 조합한다는 생각은, 솔직히 고백하건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는 나의 텃밭이 나의 주거공간과 근접해 있는 ‘애완텃밭’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작물을 얻을 생각만 해서 나온 결과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무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조나 기장처럼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며 위로 자라는 작물과 마찬가지로 거름이 많지 않아도 되며 땅으로 덩굴을 뻗는 고구마의 조합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다는 사실도 알았고, 마늘밭에 상추를 섞어짓기하는 할머니들의 농법을 따라하니 과연 서로 잘 자라더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또 배추 곁에 우연히 떨어진 동부 씨앗이 나중에 자라서 진딧물을 모조리 끌어당기는 덫 식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재미난 성과였다. 지금도 내가 모르는 수많은 방법들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을 것이다. 그 내용들이 잘 정리되고 여러 사람에게 공유되지 못할 뿐이다.


앞으로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농사에 관심이 있으며 재미난 농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더 큰 즐거움을 느끼고, 그 소문이 나면서 재미나게 농사짓는 사람들이 더욱더 늘어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발견한, 또는 개발한 방식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소통할 수 있는 농사모임이나 공동체 같은 집단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이를 통해 이른바 ‘농農 문화’라는 것이 한국 사회에 흥성흥성하여 논밭에서 작물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식물들도, 그리고 곤충을 비롯한 조류와 토양생물 및 미생물 등도 공존, 공생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누구나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인을 성장시키는 행위와 공간으로 농사와 뜰밭이 주목을 받고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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